[데스크 칼럼] 전세 사기라는 사회적 재난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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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영 사회부 차장

‘깡통 전세’ 등 정부 정책 구조적 실패 탓
주로 사회 초년생 20~30대 피해자 양산
부산서도 100억대 보증금 미반환 사례
22대 국회, 예방·지원책 마련 힘써주길

재난.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을 뜻하는 말이다.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형태의 재난도 생겨난다. 최근에는 전세 사기라는 ‘사회적 재난’이 주로 사회 초년생인 20~30대 청년들을 덮쳤다. 주변에서 그 피해자를 찾기가 어렵지 않을 정도로, 신종 재난은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전세 사기·깡통 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측은 “전세 사기와 깡통 전세 피해는 세입자에게 불리한 주택임대차 제도와 잘못된 보증금 대출제도로 발생한 사회적 재난”이라고 정의한다. 그럼에도 모든 피해 책임은 세입자에게 전가되고 있는 불합리한 현실을 토로한다.

전문가들도 전세 사기가 정부가 집값 하락 리스크에 대비하지 못한 구조적 실패 탓이라고 지적한다. 부동산 시장이 금리나 대출 정책 등 정부 정책에 좌우되는 만큼 사태 발생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전세 사기 피해자가 되기를 바란 사람은 없다. ‘전세 사기를 당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세 계약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얼마 전 후배 기자가 〈전세지옥〉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했는데, 서점에서 발견한 해당 책의 띠지에서 이 문구를 만났다. 1991년생인 저자는 전세 사기 피해자로 보낸 820일을 기록해 책으로 펴냈다.

그는 전세 사기라는 범죄의 늪에서 벗어나 피 같은 대출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선배, 그 사람은 결국 원양상선을 탔대요.” 우리가 기대하는 해피 엔딩은 현실엔 없는 걸까. 그럼에도 저자 최지수 씨는 파일럿이라는 꿈을 잃지 않고, 원양선에 올라타 재기에 나섰다. 그는 ‘전세 사기를 완전히 극복하는 순간은 돈을 온전히 돌려받는 날이 아니라, 조종사 훈련을 시작하는 첫날일 것’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고통에 시달리는 모든 경제 범죄 피해자들에게 응원과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피해자가 최 씨처럼 이 재난의 시대를 잘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 사기 사건에서처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정부와 지자체가 보다 적극적으로 피해자 구제와 지원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부산에서도 전세 사기 피해자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최근 사례로 동래구, 연제구, 남구, 부산진구 등에 빌라를 소유한 50대 부부가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 사건(부산일보 1월 10일 자 10면 보도)의 여파가 커지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100여 명. 피해액도 100억 원 이상이라고 한다. 건물주 부부는 “부동산 사업 실패로 전세금을 돌려줄 돈을 잃었을 뿐 처음부터 사기를 칠 생각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들에게 결국 사기 혐의가 적용될지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전세 세입자들의 희망이자 동아줄처럼 여겨졌던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보험도 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임대사업자의 서류 조작을 이유로 HUG가 보증보험을 해지한 탓에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례도 있다. 피해자들은 지난달 21일부터 부산 남구 HUG 본사 앞에서 한 달간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80여 명의 세입자는 HUG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기도 했다. HUG가 허위 서류를 걸러내지 못한 책임을 세입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기 피해를 당한 세입자들이 관리자 없이 임대 주택에 거주하며 이중고(부산일보 2월 29일 자 10면 보도)를 겪기도 한다. 잠적한 임대인 대신 피해자들이 건물의 소방관리를 떠맡거나 고장난 시설을 사비를 들여 보수하는 식이다. 집주인이 대여료를 내지 않아 방범 업체에서 CCTV를 떼어가는 등 안전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일도 생긴다.

일부 기초 의회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동래구의회가 최근 통과시킨 ‘부산시 동래구 재난취약계층 주거환경 안전관리 및 지원에 관한 전부개정조례안’이 대표적이다. 재난 취약계층을 상위법에 맞게 안전 취약계층으로 변경하면서 지원 범위를 확대했는데, 전세 사기 피해자를 대상자로 명문화한 것은 동래구가 전국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부산시도 청년 근로자와 교육 희망자를 대상으로 ‘찾아가는 전세 사기 피해 예방·생활법률 교육’을 여는 등 피해 예방에 나서고 있다. 고등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전세 사기 예방 교육을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사회 초년생들이 주로 피해자가 되고 있는 만큼 청년 층을 대상으로 한 이 같은 교육은 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4·10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새로 뽑힐 제22대 국회의원들도 전세 사기 피해자를 구제하고 예방하기 위한 입법 활동에 각별히 신경 써 주기를 바란다.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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