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무지라는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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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오직 스스로의 필요로만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끊임없이 작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
타인의 소리에도 세심하게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좋겠다.

새로운 계절이 무르익는 중이다. 나무마다 새잎이 움트고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들을 목격하는 일은 웬만한 영화 감상보다 감동적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일지언정 픽션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리얼한 세계의 감동. 길을 걷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가 있다. 물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항상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주지만은 않는다.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처 입은 채 죽어버린 작은 동물이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때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필요한 힘은 이렇게 매번 다르다. 권여선의 소설집 〈각각의 계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드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알기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생각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오해 없이 알아챈다는 것도, 내 진심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달한다는 것도 말이다. 〈각각의 계절〉에 수록된 단편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에서 주인공 오익은 여동생 오숙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의절을 당하는데 그는 여동생이 왜 그렇게 분노하며 의절을 통보했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또 오익은 어머니가 왜 그렇게 무수한 말들로 자신을 괴롭히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한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간과한 것들, 그것이 자신에게 화살로 돌아온다. 그러면서도 오익은 억울해한다.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라면서. 몰랐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무지(無知)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걸까?

직설적인 단어로 말하지 않아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뜻을 파악하는 것, 어렵더라도 스스로 깊이 생각해 그 뜻을 알아채고 중요한 함의를 간과하지 않는 것, 그것은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의 기본자세이다. 그리고 문학과 삶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인간에 대한 자세를 그렇게 갖추어야 할 것이다. 상대방에게 분노와 슬픔을 심어줘 놓고, 그 일에 대해 돌아보거나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몰랐다면서 매번 자신의 무지를 변명거리로 삼는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소설 속 주인공 오익은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인 듯한 ‘새 세 마리’라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어떤 의미와 암시를 담은 말인지 생각하기 시작하고, 나중엔 ‘파흣키에에, 궤헤그르르’와 같이 언뜻 무의미하게 들리는 소리들의 의미도 찾아내려 애를 쓴다. 얼핏 보면 뭔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 소리들은 무의미한 소리들의 조합일 뿐이다. 정작 그에게 중요한 것은 ‘궤헤그르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절을 선언한 여동생과 자신을 괴롭히는 어머니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이었다. 끝내 맞닥뜨려야 할 누군가의 진심은 회피한 채 그저 무의미한 말장난 속에 빠져들거나 난해한 언어를 해석하는 일에 골몰하는 오익의 태도는 어쩐지 그리 낯설지가 않다.

선거를 앞두고 수많은 말들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에게 분노와 슬픔을 심어줘 놓고 정작 그 모든 것들을 회피하는 껍데기 같은 말들에 대해서, 뭔가를 소리 높여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외면한 채 무의미로 가득 채운 그들의 언어에 대해서 말이다. 각각의 계절을 나기 위한 각각의 힘이 오직 스스로의 필요로만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끊임없이 작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 타인의 소리에도 세심하게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의 굼뜬 움직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봄은 지나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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