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특별전에서 만난 특별한 작품 ‘랜드 앤드 프리덤’ [경건한 주말]
“대처의 장례식도 민영화하자. 가장 싼 가격을 제시한 업체에게 맡기자. 그는 그런 걸 원했을 것이다.” 2013년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사망했을 때 켄 로치 감독이 남긴 말입니다. 대처 정부의 무분별한 민영화 정책을 비꼰 것인데, 켄 로치의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1936년생인 로치 감독은 지금까지 칸영화제에 15회나 초청된 영국의 대표적인 거장입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기도 했습니다. 그런 로치 감독의 명작들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특별전이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까지 열리는 ‘켄 로치 특별전’ 상영작 중 하나인 ‘랜드 앤드 프리덤’을 감상해봤습니다.
지난 17일 오후 3시 20분, 영화의전당 상영관 중 하나인 ‘시네마테크’에 적지 않은 관객이 모였습니다. 로치 감독의 ‘랜드 앤드 프리덤’(1995)을 관람하러 온 시네필입니다. 1967년 ‘불쌍한 암소’로 데뷔한 로치 감독은 2년 후 ‘케스’(1969)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한국 영화관에 상륙한 것은 30년 가까이 지난 1996년이었는데, 이때 상영된 기념비적 작품이 바로 ‘랜드 앤드 프리덤’입니다.
1990년대생인 기자는 이번 특별전 덕에 처음으로 스크린을 통해 ‘랜드 앤드 프리덤’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로치 감독 작품은 종종 특별전이나 기획전을 통해 상영되곤 했지만, 이 작품이 리스트에 포함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올해 초에도 로치의 신작이자 은퇴작인 ‘나의 올드 오크’ 개봉을 기념해 CGV아트하우스에서 그의 작품 6편을 상영하는 특별전을 열었지만, ‘랜드 앤드 프리덤’은 빠졌습니다.
스페인 내전 바탕 명작…의용군 시선으로 본 희망과 좌절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차지한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합니다. 1994년 영국 리버풀 한 공립 주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결국 사망한 노인 ‘데이비드 카’(이안 하트)의 손녀가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편지와 옛 신문 기사, 빛바랜 사진 등을 영상으로 재구성한 형식을 취합니다.
젊은 시절 실업자이자 공산당원이었던 데이비드의 인생을 바꾼 것은 1936년 리버풀의 한 모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노동자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스페인 시민군의 연설에 감화되어 약혼자의 만류도 뿌리치고 프랑코와 싸우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합니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의 배경을 자막 등으로 간단히 소개하지만, 관련 배경지식이 없다면 스토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배경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소수 기득권이 토지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봉건주의 국가였던 스페인은 1873년 연방제를 표방하는 제1공화국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각 지역의 분리 독립운동과 마르크스주의의 확산, 빈부 양극화와 군부 독재 등으로 정치적 혼란은 가중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제2공화국이 수립됐지만 대공황으로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고, 파시즘과 무정부주의 등 극단주의가 퍼지면서 분열에 불을 지핍니다. 이런 가운데 우파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반발로 1936년 총선에서 좌파와 공화파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둡니다. 좌파 정부는 토지개혁 등 다수 국민들이 염원하던 정책을 시행하지만 소수 기득권은 극렬히 저항했고, 우파인 프랑코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은 국민파(프랑코파)와 공화파로 나뉩니다.
이렇게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을 타도하기 위해 세계 각국 지식인과 노동자들이 의용군으로 참전하는 독특한 양상으로 확대되면서 세계사에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식인도 국제 여단의 자원병으로 참여해 프랑코와 싸웠습니다.
영화 주인공인 데이비드 역시 국제여단에 합류하기 위해 스페인행 기차에 무작정 올라탑니다. 이 기차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 통합 노동자당’(POUM) 민병대에 합류하려는 시민군을 만나 그들과 함께 하게 됩니다.
군사 훈련을 거쳐 공화파 시민군이 된 데이비드는 전선에 배치돼 힘겹게 싸웁니다. 무기는 낡았고 물자는 부족하지만 대의를 위해 똘똘 뭉친 민병대는 프랑코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둡니다. 데이비드는 동료 블랑카(로사나 파스토르)와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전우애가 꽃피던 민병대는 좌파 내부의 분열로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스페인 공산당이 당시 소련의 지시에 따라 비공산당 좌파 세력을 배신한 겁니다. 무기 공급이 중단되자 데이비드는 혼자 인민군에 가담했지만 염증을 느끼고 다시 동지들을 찾아 의용군으로 돌아갑니다.
실화 방불케 하는 짜임새…특별전은 이번 주말까지
영화는 밀도 높은 스토리와 배우들의 명연기로 대단한 몰입감을 자아냅니다. 이데올로기 갈등, ‘땅과 자유’를 꿈꿨던 이상주의자들의 희망과 좌절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리얼리즘의 대가인 로치 감독 작품답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는 착각마저 들게 합니다. 데이비드의 의용군이 점거한 땅을 배분하는 문제를 놓고 마을 주민과 의용군이 벌이는 치열한 이념논쟁 시퀀스는 실로 압권입니다. 다만 연출적 완성도는 약간 떨어집니다. 예컨대 전투 장면은 조악한 편이고, 극 후반부 한 주요 인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보이스오버는 지금 보면 신파적 성격이 강합니다.
영화는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경험을 르포 형식으로 풀어낸 ‘카탈로니아 찬가’와 성격이 유사합니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이들에 대한 찬사와 함께 이들의 희망을 좌절시킨 좌파 내부 분열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시선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로치 감독은 이에 더해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라스트 신을 통해 전달합니다.
로치 감독의 수작들을 상영하는 특별전은 오는 21일까지 진행됩니다. 특히 금요일인 19일 저녁에는 ‘나의 올드 오크’ 상영 후 전은정 부산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영화를 설명하는 ‘시네도슨트 영화해설’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 20일 토요일 오후 무료로 상영하는 ‘캐시 집에 오다’(1966)는 이미 매진된 상태입니다. 로치가 영화판에 뛰어들기 전 방송국에서 일할 때 연출한 이 BBC 흑백 드라마는 방영 당시 600만 명의 시청자가 봤다는 명작입니다.
이밖에도 ‘나, 다니엘 블레이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외모와 미소’(1981) ‘미안해요, 리키’(2019) 등이 관객과 만남을 앞두고 있습니다. 상영 시간표 등 자세한 내용은 영화의전당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됩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