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고독은 ‘둘’이다
스타 투우사 로카 레이와 황소의 사투
인터뷰를 지우고 거친 숨소리로 채운 사운드
판단 없이 응시하는 알베르 세라의 미학
김필남
1932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스페인 투우장의 붉은 모래 위에서 삶과 죽음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이를 ‘오후의 죽음’이라 불렀. 그에게 투우는 인간의 용맹함과 명백한 파국이 완성되는 거대한 지상 의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알베르 세라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다시 그 오후의 투우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인간과 짐승 중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이 잔혹한 대결 앞에서 관중은 환호하지만, 오직 그의 카메라만이 고요하다.
다큐멘터리 ‘고독의 오후’는 어둠 속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황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이후 투우계의 스타 ‘안드레스 로카 레이’가 등장한다. 경기복을 갈아입는 호텔 방, 경기장으로 향하는 차 안, 그리고 투우장. 영화는 이 세 공간을 오가는 로카 레이를 지켜본다. 그런데 영화는 이상하다. 다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터뷰도 내레이션도 없다. 그가 왜 이 위험한 일을 하는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캐묻지 않는다. 그저 투우복을 갖춰 입고, 차를 타고, 소와 마주하고, 다시 차에 오르는 동작만을 지켜본다.
눈에 띄는 건 관중이다. 분명 투우장을 가득 채웠을 얼굴들을 감독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함성과 탄식은 화면 밖에서만 들려올 뿐이다. 이 선택 때문에 영화는 이상한 압력을 가진다. 즉 관중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관객은 투우사의 긴장과 두려움, 소의 거친 숨소리를 고스란히 느낀다. 화면은 점점 좁아지고, 결국 그 좁은 틀 안에는 오로지 서로만을 마주하는 인간과 짐승,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만이 남겨진다.
격렬한 승부를 마치고 동료들의 환호 속 차에 오른 로카 레이는 죽음과 생존 앞에서 복잡하다. 경기에 만족하지 못했을 때는 “관객들이 야유하진 않았어?”라고 묻거나,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온 소에 부상을 입은 뒤에는 “소는 본래 다 겁쟁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투우사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카메라는 점차 황소의 거친 숨소리와 눈빛,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오래 응시하기 시작한다. 투우사가 황소를 도발하고, 칼을 꽂고, 마침내 쓰러지는 순간까지 카메라는 그 죽음의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처음에는 충격적이지만, 경기가 거듭될수록 그 죽음이 예정된 수순처럼 익숙해진다. 그리고 관객은 이 경기가 황소의 죽음을 전제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투우사에게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있지만, 황소에게는 죽음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투우를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카메라는 폭력과 환호, 긴장과 침묵, 삶과 죽음을 기록하지만, 그 앞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알베르 세라에게 이 같은 태도는 낯선 것이 아니다. 그는 ‘기사에게 경배를’에서 돈키호테 신화를 해체했고, ‘내 죽음의 이야기’에서는 카사노바의 노년을, ‘루이 14세의 죽음’에서는 절대군주의 마지막 시간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퍼시픽션’에서는 식민주의와 권력의 허상을 탐구하며 역사와 신화, 권력의 이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틀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거대한 사건보다 그것을 견디는 인물의 시간에 머물렀고, 명확한 해답보다 관객의 해석을 요구했다.
‘고독의 오후’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감독은 투우를 변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양식화된 구도와 반복되는 동선은 현실을 하나의 의식처럼 만들고, 기록과 극영화의 경계를 흐린다. 그렇게 영화는 투우라는 전통의 옳고 그름보다,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우리는 왜 그 죽음 앞에서 환호하고, 때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감독은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같은 오후를 견디는 투우사와 황소, 두 존재의 고독을 응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