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원픽]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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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공유다 심문섭 공연프로듀서

올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된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올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된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무대를 짓고 올리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작품을 마주해왔다. 때로는 화려한 기술에 감탄하고, 때로는 치밀한 서사에 압도되기도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기는 작품은 따로 있다. 나에게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만난 김민정 작, 윤시중 연출의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이 바로 그러하다.

2019년 초연으로 처음 이 작품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광주에서 네 번, 그리고 멀리 에든버러의 작은 소극장에서 한 번, 총 다섯 번을 관람했다. 매년 신록이 푸르러지는 5월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부산에서 광주로 향한다. 처음에는 혼자서 찾았던 그 길을, 이제는 이 경이로운 경험을 꼭 함께 나누고 싶은 소중한 이들의 손을 잡고 동행한다. 나에게 이 여정은 단순한 관극을 넘어, 그날의 영령들을 위로하며 나만의 ‘제(祭)’를 지내러 가는 경건한 의식과도 같다.

처음 무대를 마주했을 때의 미학적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거대한 블랙박스 극장 안에서, 윤시중 연출은 붓과 분필 하나로 무대라는 3차원 공간을 거대한 역사적 캔버스로 바꾸는 파격을 선보인다. 막과 장의 구분도 없이, 여백의 미와 역동적인 움직임만으로 순식간에 수십 년의 시간을 교차하며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려내는 순간은 연극적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최정점을 보여준다.

작품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중심인 전남도청, 그리고 그 건물의 벽을 하얗게 칠하던 칠장이 노인의 기억을 따라간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며 지우려 하는 아버지와 "사라지지 않도록 그리겠다"며 군부독재에 맞서 도청 벽에 글을 새기는 아들. 그리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그 위험한 문장들을 필사적으로 다시 하얗게 칠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슬픈 붓질과 거친 숨소리는 객석으로 고스란히 걸어 들어왔다.

전남도청 철거라는 현실 앞에 괴로워하는 노인의 기억을 통해 2005년, 1980년, 1950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책장 속 활자나 박제된 지식, 그리고 영상 콘텐츠로만 알고 있던 ‘그날의 아픔’이 내 안으로 파고들았다. 점차 아들과 아내를 빼앗아가 버린 잔인한 역사 속에서, 평범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부서지고 또 버텨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처절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매번 객석을 나설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부채감이 밀려왔고, 역설적이게도 이 공연을 반복해 보는 행위는 그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공연 제작자의 관점에서도 이 작품은 늘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고도로 발달하는 기술이 무대를 채워가는 이 시대에 ‘과연 연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징한 해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짓과 거친 붓질, 공간의 유기적 활용이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적인 극장의 공기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음을 이 작품은 온몸으로 웅변한다.

이따금 창작과 제작의 현장에서 방향을 잃고 지칠 때, 아들의 흔적을 지켜내기 위해, 또 그날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붓을 들던 주인공의 실루엣을 떠올린다. 무대 예술의 본질과 시대적 책무를 일지 않으려 분투할 때마다 꺼내어 보는 나침반 같은 작품. 캔버스를 가득 채우던 먹의 향을 되짚는 순간, 무대를 향한 나의 심장 박동도 다시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이 내 인생의 최애이자 ‘원픽’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심문섭·예술은공유다 공연프로듀서

'예술은 공유다' 심문섭 대표가 at 광안리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at 광안리 발행인 힙한 감성의 지역 문화예술 가이드북인 계간 at 광안리가 나왔다. at 광안리는 부산 수영구 내에서 열리는 축제, 공연, 전시 등의 일정 70여 개를 창간호에 담았다. 표지에는 수영구에 거주하는 미타 작가의 컬러플한 상어 그림이 사용되었다. 2024.05.29 부산일보DB '예술은 공유다' 심문섭 대표가 at 광안리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at 광안리 발행인 힙한 감성의 지역 문화예술 가이드북인 계간 at 광안리가 나왔다. at 광안리는 부산 수영구 내에서 열리는 축제, 공연, 전시 등의 일정 70여 개를 창간호에 담았다. 표지에는 수영구에 거주하는 미타 작가의 컬러플한 상어 그림이 사용되었다. 2024.05.29 부산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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