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지 마시오”깨고, 캔버스에 '변화와 소멸'의 자연을 입히다
초량 ‘낭만시간연구소’ 최은희 개인전
비·바람이 그린 ‘해방된 회화’ 선보여
생태적 변화의 흔적을 예술로 포용
전시장 바닥엔 잔디, 작품 터치 허용
“보는 이미지 아닌 겪는 이미지로”
최은희 개인전 ‘해방된 회화: 토양에 뿌려진 그림들’이 열리고 있는 부산 동구 초량의 독립예술공간 낭만시간연구소 전시 전경. 낭만시간연구소 제공
최은희 개인전 ‘해방된 회화: 토양에 뿌려진 그림들’이 열리고 있는 부산 동구 초량의 독립예술공간 낭만시간연구소 전시 전경. 낭만시간연구소 제공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흙 내음이 섞인 잔디 향이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부산 동구 초량로 낭만시간연구소의 10평 남짓한 공간 바닥에는 실제 잔디가 깔려 있다. 익숙한 화이트 큐브와는 다른 감각적 환경이다. “둘이서 직접 깔았어요. 작품 내용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공간을 운영하는 기획자 김민서(대표)·여수현 씨의 말이다. 이 잔디는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밭에서 이루어진 작업의 시간과 조건을 전시장 안으로 옮겨오는 장치다.
최은희 개인전 ‘해방된 회화: 토양에 뿌려진 그림들’이 열리고 있는 부산 동구 초량의 독립예술공간 낭만시간연구소 전시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최은희 ‘Transition_Land of utopia'(2025-2026) 연작 중에서. 낭만시간연구소 제공
최은희 ‘Transition_Land of utopia'(2025-2026) 연작 중에서. 낭만시간연구소 제공
지난 11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최은희 개인전 ‘해방된 회화: 토양에 뿌려진 그림들’은 회화의 익숙한 전제를 다시 묻게 한다. 벽에 걸린 작품들은 비와 바람, 온도와 습도, 식물의 성장과 침식의 시간을 통과하며 표면이 변화한 상태를 드러낸다. 얼핏 훼손된 듯 보이지만, 작가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훼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연과 협업한 결과라고 봅니다.”
보존과 안정성을 전제로 하는 일반적인 회화와 달리, 이 작업은 변화와 소멸의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작품은 자연 속에서 시간의 영향을 견디며 변형되고, 그 흔적이 또 다른 이미지로 남는다. 기획자들 역시 “회화가 영구히 보존돼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과정까지 작품으로 보려는 시도”라며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상태로 제안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부산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밖_앝’에서 열린 최은희 개인전 ‘Land of Utopia’ 전시 광경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 자료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지난해 부산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밖_앝’에서 열린 기획전 '공생물성'에 출품된 최은희 작가의 작품. 밖_앝 제공
이러한 작업은 지난해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밖_앝’에서 열린 ‘Land of Utopia’에서 먼저 선보였다. 실제 밭에서 진행된 전시에서 작가는 “리넨 캔버스를 단순한 바탕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는 ‘대지’이자 ‘토양’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화면에 드러나진 않고 물감 튜브 안에 감춰진 뿌리는 생명의 시작점이자 보이지 않는 내면의 힘을 상징한다.
1년이 지난 뒤, 그 작업은 다시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밖_앝’에서 함께 주말농장을 함께한 낭만시간연구소 기획자가 “밭에서 이야기로 끝내지 말고, 전시장으로 확장해 보자”고 제안했다. 작가 역시 이를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조심스러운 입장도 밝혔다. “밭에서 한 작업으로 전시를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 여전히 많은 분이 ‘자연과 협업하지 않은’ 깨끗한 회화를 선호하니까요. 저 역시 너무 힘들었고요. 그래도 그 시간과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걸 지닌 채 전시장 안으로 들어온 거니까요.”
시장 반응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지난해 아트페어에서 한 점도 판매하지 못한 건 맞아요. 그런데 반응이 나빴다고 보기도 애매해요. 첫날만 걸렸고, 다음 날에는 다른 작품으로 교체됐거든요. 그 자리에 걸린 작품은 금세 팔렸고요.”
전시장에서 만난 최은희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그럼에도 이번 전시에 쏟은 공은 적지 않다. 작품에는 무반사 유리 액자를 새로 맞췄고, 훼손이 심한 경우 캔버스 구조를 보완하기도 했다. 재작년 프랑스문화원 개인전 때 처음 시도한 ‘터프팅’(Tufting) 작업도 선보인다. “밭에 있을 때와는 달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개미집이 생긴 작품은 나무틀을 잘라내기도 했죠.”
이번 전시에서 강조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관람 방식이다. 일부 작품은 실제로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저에게 가장 강압적으로 느껴졌던 전제가 ‘만지지 마시오’와 ‘보존’이었어요. 관객이 작품을 만지는 행위 자체가 기존 질서를 흔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작품이 ‘보는 이미지’가 아니라 ‘겪는 이미지’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잔디를 밟는 촉감과 작품 표면을 더듬는 경험은 관람을 시각 중심에서 신체적 감각으로 확장한다. 동시에 자연 속에서 생성된 회화를 다시 전시장 안으로 불러들이며, 그 사이의 긴장과 가능성을 함께 드러낸다.
최은희 작가가 직접 만든 터프팅 위에 율무를 그린 신작(‘Transition_Land of utopia'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최 작가의 율무 작품은 해외 반응이 좋은 편이어서 JP모건 등 해외에서 대부분 컬렉팅했다. 김은영 기자 key66@
최은희 ‘Transition_Land of utopia'(2025-2026) 연작 중에서. 낭만시간연구소 제공
최은희 작가는 부산예고와 부산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동서대 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감 튜브와 붓을 페르소나로 삼아 자연과 인간, 창작의 관계를 탐구해 온 그의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보다 확장된 방식으로 제시된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네이버 예약을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