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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산, 물 들어온다
“요즘 부산에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도시에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시기인가 보다.” 이런 말들을 많이 듣는다. 도심 친수공원에 느닷없이 나타난 상어 부캉이가 단연 주인공이다. 시작은 평일과 주말, 도심과 자연 할 것 없이 곳곳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이면서부터였다. 대만 여행객들의 ‘부산병’은 처음엔 과장 아닌가 했다. 국내에서도 부산에 대한 선망을 고백하는 타지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정말 그런가 싶다.
규모 자체가 커진 K관광 중에서도 부산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면 자연 환경과 문화·관광 자원, 라이프스타일과 같은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정부 정책이나 상업적 기획보다 부산만의 풍경, 부산만의 지역성, 부산만의 역사를 품은 콘텐츠들이 사람들을 자발적인 팬으로 만들었다. 10월의 부산을 들썩이게 한 부캉이와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부산국제영화제도 마찬가지다.
북항친수공원은 장벽 너머 삼엄한 보안 구역이던 노후 항만을 재개발한 곳이다. 피난과 파병 부두에서 경제발전 신화를 이끈 수출 역군의 현장을 지나 누구나 거닐 수 있는 친수공원으로 돌아왔다. 이곳을 20일째 떠나지 않고 있는 상어는 소셜 미디어에서 ‘부캉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단숨에 친근한 존재가 됐다. 부산 시민들조차 잘 모르던 ‘북항’까지 전국에 알린 건 부수적인 효과다.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주문한 ‘슬리퍼를 신고 가서 즐길 수 있는’ 북항 재개발의 비전이 부캉이로 실현된 셈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31년 전 ‘지방에서 무슨 영화제냐’는 냉담한 시선 속에서 아시아 대표 영화제를 꿈꾼 영화청년들의 열정에서 출발했다. 공식 약어는 영문 앞 글자를 따서 BIFF다. 처음에는 PIFF였다. 부산이 로마자 표기법상 ‘Pusan’에서 ‘Busan’으로 바뀐 뒤에도 수년간 개명을 미뤘다. 공식 명칭과 상관 없이 전국의 영화 팬들은 ‘부국제’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바다 어귀의 전용 상영관뿐 아니라 커뮤니티비프와 동네방네비프의 이름으로 부산 전역을 찾아간다.
지난 주말 열광 속에 끝난 부산국제록페스티벌도 있다. 2000년 제1회는 7월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열렸다. 이후 다대포해수욕장을 거쳐 지금의 탁 트인 삼락생태공원으로 무대를 옮겼다. 2019년 유료화를 결정할 때는 논란도 있었다. 이제는 전국에서 4만 명 넘는 유료 관객이 몰리는 국내 1위 음악 축제로 자리 잡았다. 관객들은 특히 8년째 누적 17억 원을 후원한 부산 기업 대선주조의 소주 하이볼바나 사상구 한신2차아파트부녀회의 부추전과 소고기국밥 부스 같은 지역성에 호응한다.
물론 관광도시가 곧바로 도시 전체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부산은 소프트파워를 활용해 관광산업을 넘어 도시 전체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인구 정책 측면에서 보면 일자리보다 부산만의 차별화된 문화 환경과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전문가를 취재한 적이 있다. 좋은 일자리가 적어서 청년이 떠나니까 대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맞지만, 가고 싶은 도시, 매력적인 도시를 만들면 사람이 모이고 그들이 창업을 하고 기업이 인재를 따라올 수도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 소개한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연구도 비슷하다. 5개 대륙 80개 도시, 약 1만 7000명을 조사한 결과 도시가 제공하는 일상 생활의 질에 만족하는 노동자가 그렇지 않은 노동자보다 직무 만족도가 30%포인트나 높았다. 소위 ‘경험 보너스’가 도시의 규모나 편의 시설의 숫자보다 훨씬 중요했고, 젊은 층일수록 더 그랬다. 보고서는 인재들은 갈수록 이미 유명한 대도시가 아니라 일상 생활이 더 풍요롭고 더 연결되어 있으며 더 개방적이고 가능성으로 가득 찬, 떠오르는 도시를 선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는 콜로라도주의 인구 10만 소도시 볼더와 텍사스주의 주도 오스틴이 모델로 꼽힌다. 볼더는 로키산맥 관광의 거점이자 첨단 기술 산업과 웰빙 산업이 집중된 ‘스타트업의 성지’다. 오스틴은 매년 봄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 예술축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와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주요 사업장으로 유명하다. 일본 최초로 스타트업 비자를 도입해 청년 인구비율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후쿠오카도 가까운 예다.
물이 들어올 때는 일단 노를 저어야 하고, 동시에 다음 파도를 대비해 배도 지어야 한다. 공공기관을 유치하고 대기업을 모셔오는 것은 어렵고 또 중요하다. 이미 갖고 있는 부산의 소프트파워 자산과 그 토대 위에서 싹트고 있는 새로운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키워내는 것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지금 좋은 파도가 물러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2026-10-0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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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캉이에게 빌어보는 북항의 소원
부산 북항에 나타났다고 ‘부캉이’란다. 3.5m 길이의 쇼맨십 넘치는 그 상어말이다. 차례상도 사라져 적적해진 추석 연휴, 부산에서 전국구 스타 하나가 탄생했다.
랜드마크 부지를 책임질 민간 투자자 하나 구하지 못해 표류 중인 북항이다. 그런데 부캉이 덕에 전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핫플레이스가 됐다. 가끔 현실은 허구보다 더 허구스럽다.
알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부캉이에게는 선배가 ‘한 마리’ 있다. 1964년 느닷없이 해운대 바닷가에 200살 안팎으로 추정되는 바다거북 한 마리가 찾아왔다는 기록과 영상이 남아 있다. 중동 일대가 온천 개발을 시작한 시점이라 이 뜻밖의 존재는 용궁에서 온 귀한 손님 취급을 받았단다.
그 덕에 바다거북은 다친 부위를 치료받고 술에 노잣돈까지 대접받고 떠났다. 바다거북이 바다로 떠나던 당시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소원을 빌었다니 지금의 부캉이 못지않은 인기였던 모양이다.
바다거북이 찾아간 1960년대의 해운대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해프닝의 중심이었던 중동도 해운대구가 아닌, 동래구 해운대출장소 관할의 작은 온천 마을이었다.
신기한 건 거북이 다녀간 그 이듬해부터 관광호텔을 비롯해 숙박업소가 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해운대 온천 개발 사업이 제대로 탄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의 중동과 구남로 일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부캉이 선배’는 진정 영험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연휴에도 끊이지 않는 부캉이 뉴스를 보며 바다거북을 떠올린 건 간절함 때문이다. ‘북항도 곧 해운대처럼 환골탈태할 거야’라는 희망을 주기 위해 찾아온 메신저가 부캉이가 아닐까 하는 그런 기대 말이다.
부캉이는 외해로 나가라며 쳐놓은 그물도 뛰어넘어 친수공원으로 돌아왔다. 그 친수공원 한가운데가 부산의 미래 성장엔진으로 평가받는 북항 랜드마크 부지다. 오늘도 부캉이를 찾아온 방문객 사이로 웃음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정작 그 땅을 바라보는 부산시와 동구, 해수부와 BPA 관계자의 한숨은 늘고만 있다.
2015년 글로벌 리조트 기업인 샌즈 그룹이 그 땅에 5조 원 복합리조트 건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리조트 내 카지노의 내국인 출입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그 투자 건은 태국으로 날아갔다. 그 뒤로 랜드마크 부지의 민간사업자 공모는 유찰을 거듭하는 중이다.
다행히도 올해 초 전재수 시장과 곽규택 의원이 여야 협치로 항만 재개발법을 개정했다. BPA의 사업 참여를 법적으로 열어놓은 것이다. 1단계 재개발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평가다. 그러나 확실한 방점을 찍어줄 청사진은 부족하다.
마침 문화체육관광부의 스포츠·공연 복합형 돔구장 건립 사업 공모를 시작했다. 5만 석 규모의 대형 돔과 3만 석 규모의 중형 돔을 지자체 2곳에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부산시는 복합돔 공모로 북항 개발의 물꼬를 트겠다는 계산이다. 해당 부지에 돔 아레나를 건설하고 호텔과 공연장 등을 결합한 복합 개발을 제안할 방침이다.
쏟아지는 지자체 문의에도 문체부는 구체적인 국비 지원 규모는 비밀에 부치고 있다. 국비 지원이 어느 정도가 될지, 언제 지원이 이뤄질지 구체적인 안이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은 지자체들의 제안을 전부 받아보고 틀을 짜겠다는 자세다.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높인 북항은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다.
냉기만 감돌던 북항을 부캉이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전국적인 명소로 만들었다. 친수공원에 몰려온 방문객마다 ‘상어 보러 왔다가 북항이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알았다’며 연신 입을 모은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면 억만금으로도 사기 힘든 천운이 북항으로 찾아든 셈이다.
부캉이는 언젠가 다시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친절한 상어 한 마리가 부산에 선물한 천운도 유효기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부산시와 해수부 모두 북항의 잠재력을 전국에 알린 이 호재가 시들도록 손 놓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북항 돔 아레나는 건설 비용만 1조 3000억 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국비 지원을 마중물로 건실한 민간 투자가 지속해서 이어져야 성공할 수 있는 매머드급 사업이다.
끊임없이 헤엄쳐야 사는 상어인 부캉이는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친수공원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파도타기 하듯 호응을 유도한다. 그게 100만 명을 동원한 인기 비결이란다. 미래 성장엔진에 대한 민간의 관심과 투자 열기가 식지 않도록 해야 할 부산시의 모습이기도 하다.
2026-10-0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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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오 마이 국밥!
원도심인 부평시장 근처를 저녁 시간에 지나다 활기차게 변한 거리 모습에 깜짝 놀랐다. 부산으로 몰려든 외국 관광객 덕분이었다. 지난달 19일부터 23일까지 이어진 일본 실버위크 기간 동안 트립닷컴 일본 사이트 항공 예약 기준으로 한국은 가장 인기 있는 해외 목적지 1위에 올랐다. 도시별로 본 해당 기간 항공권의 일평균 예약량은 부산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1%나 급증, 43%를 기록한 서울을 훌쩍 뛰어넘었다. 오늘부터 7일까지 이어지는 중화권의 국경절 연휴 기간 부산은 대만 여행객이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 4위에 올라, 5위를 기록한 서울을 제쳤다.
부산 음식을 먹기 위해 부산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분석 또한 반갑다. 지난해 4월 부산시는 외국인 관광객 누적 100만 명을 역대 가장 이른 시기에 돌파하며, 차별화된 미식 관광에 대한 투자를 외국인 관광객 증가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특히나 부산 대표 음식 돼지국밥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느낌이다. 대만 관광객들은 돼지국밥을 너무 좋아한다. 부산으로 오는 대만 항공사 타이거에어는 탑승권에 돼지국밥 광고를 넣고, 돼지국밥을 기내식으로 판매할 정도다. 1953형제돼지국밥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한글 간판을 내건 첫 해외 매장을 열고 돼지국밥 세계화에 나섰다. 먹을 것이 귀하던 한국전쟁 피란 시절 부산에서 대중화된 부산 돼지국밥이 〈미쉐린 가이드 부산〉에 5곳이나 오른 사실도 대단한 일이다.
부산시와 부산관광공사가 올해 처음으로 열고 있는 ‘2026 부산돼지국밥대전’도 큰 관심거리다. 지난 14일에는 1만 800여 명이 참여해 시민이 추천한 240곳 가운데 부산 대표 돼지국밥집 20곳이 공개됐다. 오는 14일까지 운영되는 국밥 주간에 카카오맵 투표를 통해 20곳을 다시 10곳으로 좁힌 뒤, 최종 베스트 3(쓰리)를 뽑는다고 한다.
국밥대전에 대해 일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른 입맛을 서열화하고, 순위에 오르지 못한 식당은 ‘맛없는 집’이라는 꼬리표를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최근에 만난 한 국밥집 사장님은 “20위에 들었지만, 걱정이 된다. 탑3에 오르기 위해 대중의 입맛에 맞춘 표준화된 맛으로 쏠리면, 각 국밥집 고유의 개성이나 매력은 사라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른데 향토 음식 돼지국밥을 가지고 순위를 매기는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웃 나라 일본의 사례를 살펴봤다. 국밥대전은 일본에서 라멘집에 순위를 매기는 마케팅 방식과 닮았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TRY 라멘 대상(Tokyo Ramen of the Year)’ 같은 순위를 매기는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입상하면 해당 라멘집에는 최고의 명예가 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반드시 맛봐야 할 도장 깨기 목록에 오른다. ‘일본에서 줄 서서 먹는 1등 라멘’이라는 타이틀은 해외 진출로 연결된다. TRY는 스스로를 ‘라멘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는 다국어 라멘 포털’이라고 선언하고, 올해부터 공식 사이트를 영어와 중국어로도 선택해 볼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이러니, 라멘 장인들은 최고의 면과 최고의 육수 개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라멘 전문점 시장은 2025년도 기준으로 약 8~9조 원 규모로 부산 돼지국밥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순위를 매기는 마케팅이 결과적으로 라멘 시장 파이를 키운 것이다. 서민 음식을 문화 콘텐츠로 포장해 미식가들을 일본으로 불러 모으고, 글로벌 무대에도 데뷔시키는 역할을 했다.
대체 언제부터 돼지국밥 같은 음식을 먹었는지 추적해 보니 놀랍게도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신석기 시대 말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돼지를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청동기 시대에 제사장이 등장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제물로 바친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한정된 양의 고기로 여러 사람이 배불리 먹기 위해서는 고기와 뼈를 넣고 국을 끓여 나누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부산 향토 음식은 1999년부터 매년 추가하는 방식으로 지정해 왔는데, 돼지국밥은 2007년 막차를 타고 향토 음식 목록에 들어왔다. 돼지국밥이 부산 음식으로 인정받은 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미쉐린에 오른 돼지국밥집 5곳 중 합천국밥집만이 시민들이 뽑은 부산 대표 돼지국밥집에 포함됐다. 우리 부산 시민은 미쉐린이 뭐라든 간에 상관 없이 나만의 최애 돼지국밥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탑3가 어디가 될지 궁금하지만 단골 돼지국밥집을 바꿀 부산 시민은 별로 없을 것으로 믿는다. 무려 청동기 시대부터 출발해 한국전쟁 직후 본격적으로 먹어서 미쉐린까지 오른 돼지국밥. K푸드에 열광하는 세계인들과 나눠 먹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2026-09-3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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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명절에 생각하는 돌봄
추석 연휴 가족들이 모였다. 북항 친수공원을 전국구 핫플로 만든 상어 ‘부캉이’부터 고3 조카의 입시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명절의 특성상 주변 어르신이나 지인에 대한 안부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 집이나 ‘돌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알게 됐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A는 집안 어른들이 줄줄이 병원에 입원을 해서 몇 개월을 정말 바쁘게 보냈다고 전했다. 늘 밝고 씩씩했던 A는 몸이 너무 힘들어 병원에 갔다가 의사한테 거의 소진 상태라며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지인 B는 치매에 걸린 부모가 매일 보는 사람 외에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방문객을 경찰에 신고하는 소동을 빚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환자의 심리적 안정을 생각해 명절에도 가족이 모일 수 없게 된 상황을 접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갑자기 가족이 암 같은 큰 질환으로 진단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병원을 찾는 일부터 각종 검사와 수술, 후속 치료까지 이어지는 긴 간병의 시간이 얼마나 힘든지 경험한 사람은 안다. 단순 골절이나 독감, 마음의 병까지 다 돌봄이 필요하다. 그 돌봄의 대상은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될 수 있다. 지금은 내가 누군가를 돌보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간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겪을 일이다.
돌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국가데이터처의 사회조사를 통한 인식 변화 분석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부모 부양을 ‘가족·정부·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고 보는 중장년층이 49.0%에서 65.0%로 늘어났다. 부모 부양을 개인이 아닌 사회 공동의 책임으로 보는 시선이 늘어난 것이다.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자녀와 부모를 같이 돌봐야 하는 낀 세대가 가계 지출 중 가장 큰 부담으로 느끼는 것이 교육비와 간병비였다.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환자와 보호자가 지출한 사적 간병비는 2018년 8조 원을 넘었다. 2024년 기준 입원 환자의 사적 간병비 규모는 연간 11조 원으로 늘어났다. 정부가 병원에서 가정까지 간병 걱정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각종 제도를 논의하고 있지만, 노부모 돌봄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놓고 가족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2006년부터 2018년까지 돌봄 부담으로 인한 자살 사례 보도가 약 60건에 달한다. 2007년부터 2023년까지 간병 살인이 228건에 이른다는 자료도 있다. 돌봄 부담에 따른 자살 사건의 절반은 고령의 부부 간병에서 발생했다. 홀로 돌봄을 제공하던 상황에서 돌봄 제공자들이 중증 질병이나 우울증을 경험한다. 이 상황에서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고 돌봄 노력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을 때 자살 위험이 증가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난 8월 복지부는 ‘돌봄·간병 부담 자살예방 대책’을 발표했다. 노인·장애인 돌봄 가구 중 고위험 가족을 집중 발굴·조사하고, 장기요양이나 장애인 등록 신청 등 돌봄 초기 단계부터 해당 가족의 돌봄 환경·마음건강을 조사해 위험 징후가 확인되면 긴급 돌봄 지원 서비스 등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가족의 돌봄 부담 완화를 위한 서비스 확대, 치매나 발달장애 같은 고난도 돌봄 가족에 대한 상담과 교육, 돌봄 인프라 취약 지역의 서비스 제공 강화, 돌봄자의 정신적·육체적 소진 예방을 위한 휴식 지원 확대 등이 대책으로 제시됐다.
질병이나 장애로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있어도 직장생활 등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고, 빈부격차가 돌봄격차로 이어지지 않게 사회적 안전망도 촘촘히 해야 한다. 희귀·난치성 질환자나 고령화한 은둔 청년, 가족돌봄 청년 가구나 다양해진 가족 유형 등 돌봄 대상과 돌봄자의 개별 상황에 맞춘 세밀한 지원책 설계도 필요하다.
시내 도로에서 백발의 아들이 노모의 휠체어를 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횡단보도 진입을 위해 지나가야 할 교통섬의 낮은 턱에 휠체어 바퀴가 걸렸다. 아들이 힘을 주어 겨우 휠체어를 교통섬 위로 올리는 모습을 보며 그 약간의 턱이 두 사람에게 얼마나 큰 불편으로 다가왔을까를 생각했다.
좋은 돌봄 정책이란 무엇일까. 아들이 밀고 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그 가족의 돌봄 상황에 비유한다면, 두 사람의 ‘돌봄 휠체어’가 막힘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은 정책의 시작점일 것이다. 돌봄은 어느 한 가족만의 숙제가 아니다.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숙제이며, 사회가 함께 풀어 나가야 할 숙제이다.
2026-09-2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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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강강술래를 하자
격투기를 좋아한다. 지금은 사라진 입식타격 K1으로 입문해 요즘은 세계 최대 종합격투기 단체인 UFC 경기를 즐겨 본다. 처음엔 링 위의 피 튀기는 혈전, 시원한 KO 장면에 눈길이 갔다. 주먹질이라곤 해본 적 없는 범생이 눈에 UFC 옥타곤(팔각형 링)은 완전 새로운 세계였다. 그러다 링 밖의 룰을 알게 되면서 더욱 빠져들었다.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승자는 패자를 ‘리스펙’(존중)하는, 이른바 무도(武道)의 매력이다.
UFC 페더급에서 뛴 ‘코리안 좀비’ 정찬성의 3년 전 은퇴 경기는 리스펙 그 자체였다. 이 체급 챔피언을 지낸 맥스 할러웨이와 경기에서 정찬성은 3라운드 큰 거 한 방에 쓰러졌다. 가끔 이 경기를 다시 돌려보는 이유는 그다음에 벌어진 장면 때문이다. KO 승리의 기쁨을 ‘아주 잠깐’ 만끽한 할러웨이는 곧장 패자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누운 정찬성을 직접 부축해 의자에 앉힌 뒤 포옹을 건넸다. 더 압권은 판정 순간이다. 심판이 승자의 손을 치켜들자 정작 할러웨이는 정찬성의 손을 치켜올렸다. 그러곤 “코리안 좀비는 레전드(전설)다”를 외치며 관중의 환호를 끌어냈다. 할러웨이의 진한 리스펙을 받으며 이날 정찬성은 은퇴를 선언했다. 승패는 링 안에서의 일일 뿐이다. 옥타곤에서 내려오면 승자도 패자도 없고 동료를 존중하는 태도, 격투기를 사랑하는 마음만 남는다.
요즘 정치권을 보며 링 위의 낭만을 생각한다. 카운터펀치, 난타전, 2라운드 등 격투기에 빗댄 정치 기사는 예나 지금이나 흔한데, 승자가 패자에게 손을 내미는 훈훈한 소식은 찾아볼 수 없다. 상대를 향한 혐오와 악마화를 넘어 같은 진영에서도 배제와 편 가르기가 난무한다. 실제로 피를 튀기며 싸우는 옥타곤 선수들이 신사처럼 보일 정도다. 정치의 수준이 곧 유권자의 수준이라지만, 너도나도 잘못이라는 양비론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나도 맞지만 당신도 옳다는 양시론으로 상대를 품을 때, 퇴행을 멈출 여지가 생긴다.
정가의 도(道)를 다시 세우는 작업은 어디서부터, 누가 먼저 시작해야 할까.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물꼬를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포용을 강조한 이 대통령은 한 지지자의 X(옛 트위터) 게시물을 인용했다가 과거 비하 글이 알려지자 곧바로 삭제했다. 유감의 뜻과 함께 지지자들을 향해 “여러분이 바로 이재명이고 대통령이라 생각하고 행동해 달라”며 건전한 논쟁을 당부했다. 지도자의 말과 솔선수범은 범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녔다. 이 대통령의 메시지에 여야 지도자들이 잠시 링 아래로 내려와 품격있게 호응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마침 추석 연휴다. 한 경기를 끝내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즈음 정치 뉴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진이 있다. 기차역에서 정당별로 갈라져 귀성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다. 올 추석에도 똑같은 계획이라면 글쎄다, 예년을 떠올려 보자. 아무리 90도로 허리를 숙인들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는 이들이 있었던가.
시민 호응을 바란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 폴더인사 말고 ‘강강술래’는 어떤가. 좀 더 큰 광장이 있는 부산역 앞이 좋겠다.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대표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앞장서 광장 한가운데서 손을 맞잡으시라. 그러고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다. 양당 지도부가 하나둘 합세하면서 서서히 원이 커진다. 역을 오가는 시민들도 모여들 것이다. 강강술래에 노래가 빠질 수 없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선창) “강강술래~”(후창) “사이좋게 지내보세~”(선창) “강강술래~”(후창) 명절 소원을 빌고 싶은 시민이 있다면 기회를 주자. “우리가족 건강하게~”(선창) “강강술래~”(후창) “주식시장 떡상해라~”(선창) “강강술래~”(후창) 광장의 강강술래는 외국인들에게도 큰 볼거리를 선사할 테다.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기에, 세계인에게 자랑할 K-컬처로 손색없다.
롯데 자이언츠가 잘해야 집구석이 조용하듯, 정치권이 싸울수록 명절 밥상 분위기도 험악해진다. 올 추석에 친인척과 대화가 정치 얘기로 흘러간다면 강강술래가 빛을 발할 때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5촌 당숙을 향해 “강강술래~”, 민주당을 싸잡아 욕하는 큰아버지 앞에서 “강강술래~”, 국힘은 국짐이라 핏대를 세우는 이모 눈을 바라보며 “강강술래~”를 외치자. 그래도 안 통하면 손을 맞잡고 일어나 왼쪽으로 돌자. 왜 하필 왼쪽이냐 버티면 오른쪽으로 돌자.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강강술래”를 노래하다 보면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바람,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만 남을 것이다. 이 글에 혹시 댓글이 달린다면 미리 답글을 드린다. “강~강~술~래~!”
2026-09-2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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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사가 만사'… 경남 도민 주권은?
공직사회에 회자되는 말 가운데 ‘인사가 만사’란 말이 있다. 굳이 공직사회가 아니더라도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물을 배치하는 것이 절실하니, 잘된 인사는 조직의 명운과 관련된다. 그래서 인사는 항상 어디에서나 만사다.
박완수 경남지사가 민선 9기를 출범하며 공석이던 경제부지사 자리에 지난 7일 최만림 전 경남도 행정부지사를 임명했다. 최 전 행정부지사는 민선 8기 초기 2년을 박 지사와 손을 맞춰 경남 도정을 무난하게 이끈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임 경제부지사가 퇴임한 뒤 후임자를 물색하던 박 지사는 ‘늘공(공무원) 최만림’을 ‘어공(어쩌다 공무원) 최만림’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최 전 부지사의 도정 운영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적지만, 돌고 돌아 회전문 인사를 보는 도민들의 시선은 마냥 곱지만은 않다.
9기 도정에서 진행하는 인사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 지사 선거를 돕기 위해 사표를 냈던 조철현 경남도사회서비스원 원장은 이달 중순 재임용됐다. 조 원장은 박 지사가 창원시장일 때부터 함께 일한 공직자 출신이다. 지역 정가에서는 몇 안 되는 박 지사의 측근으로 분류한다.
마찬가지로 박 지사 선거를 돕기 위해 임기를 남겨놓고 사퇴했던 진정원 경남FC 전 단장은 지난달 일찌감치 다시 제자리로 복귀했다. 6·3 지방선거 당시 합류해 선거운동을 도운 진 단장은 2023년 경남FC 단장 임명 때 축구선수나 지도자 출신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았다. 경남FC 성적이 하위권인데도 책임져야 할 단장이 선거판에 뛴다는 비난을 받았던 진 단장은 경남FC 구단주인 박 지사가 국회의원일 때 비서관이었고, 박 지사 재선 뒤 인수위 격인 경남대도약 준비팀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돌려막기 인사’라고 부를 만한 사례도 있다. 진 단장과 마찬가지로 박 지사 선거를 돕기 위해 사표를 냈던 정연희 전 경남여성가족재단 대표는 이달 초 경남교통문화연수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취임했다. 올해 창원시 추천 몫인 박태훈 경남로봇재단 이사장 후보도 구설에 올랐다. 공모를 통해 추천됐지만, 박 후보는 경남도 출자기관인 경남무역 대표를 지낸 인물이다. 마산회원구가 지역구인 윤한홍 의원의 보좌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도의회 인사청문회 대상인 경남신용보증재단 이사장에는 이효근 직전 이사장이 다시 후보로 선정돼 인사청문 절차를 마쳤다. 이 이사장 후보는 도의회 경제환경위원회가 부적합 평가를 내렸을 정도다. 도지사와 같은 당 출신이 다수인 도의회에서 인사청문 결과 부적합 의견이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어서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는 비판이다.
8기 도정에서 박 지사의 지근거리에서 활약했고, 8기 도정 말기 사표를 내고 박 지사를 도와 선거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이영일 경남도 정책특보와 민선 8기 도민소통특보를 지낸 강석 대외협력특보가 다시 9기 도정에서 정무직으로 복귀한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특보는 선출직 후보와 함께하는 사실상 원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련의 산하 기관장 인사는 박 지사의 평소 지론과도 맞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박 지사는 평소 산하 기관장 인사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도민들에게 “실력 있고 역량 있는 사람을 많이 지원하라고 권유해라”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경남도 유해남 대변인도 이효근 후보가 도의회 부적합 판정을 받은 다음 날 브리핑을 통해 “경남도는 출자·출연 기관장 인사에서 특정인을 미리 정하거나 염두에 두고 공모와 심사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론은 냉랭하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앞선 현실이 사뭇 달랐다.
경남 기초단체에서도 회전문 인사에 대한 비판이 빈발했다. 이달 초 오태완 의령군수가 자신의 강제추행 재판에서 위증한 전 수행비서를 소통비서관으로 재임용해 보은 인사 논란이 일었다. 허위 증언으로 처벌받은 측근을 다시 공직에 기용한 것은 군민을 우롱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의령군은 임용 결격 사유가 없다고 말했다.
창원시 산하 창원문화재단 이사장 후보도 문제가 됐다. 윤한홍 의원의 친형인 윤한훈 씨가 창원문화재단 최종 임용후보자가 됐으나 논란이 커지자 윤 씨는 결국 사퇴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선출직 단체장은 상대 후보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리에 오른 만큼,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 기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단체장이 되고서는 도민 이익만 봐야 한다. 말은 맞았지만, 결과는 ‘측근’으로 귀결된다. “공적 시스템을 거쳤다”라는 해명보다,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제대로 잘 찾는 것이 절실하다.
이재희 사회2부 선임기자 jaehee@busan.com
2026-09-2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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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왜 오디세이 거인은 실물이었을까?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 한 달여 만에 1000만 관객 몰이에 성공했다. 3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에도 불구하고, 올해 최대 흥행 외화 자리를 꿰찼다. 리뷰와 평점 등을 살펴보면, 비평가는 물론 일반 관객들의 평가도 상당히 좋다. 장대한 서사도 흥미롭고, 압도적인 화면과 사운드도 몰입감을 높였다는 평가가 많다. 비전문가인 일반인들은 이런 복잡한 분석을 묶어서 축약해 “재밌다”라고 표현한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에겐 독특한 ‘장인정신’이 있다. 사실 집착에 가깝다. 할리우드에선 일상이 된 ‘CG’를 거부하고, 디지털 기술을 최대한 배제해서 촬영한다. 오디세이는 아이맥스용 필름으로 100% 촬영했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도 CG가 아니라 18m 크기의 실제 움직이는 구조물이었다. 거인족들도 장신 배우들을 고용해 원근법으로 촬영했다. CG로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디지털의 도움을 최소화하며 번거로운 옛날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CG가 아무리 정교해도 실물보다 못하고, 실물이 없으면 배우 연기도 어색하다는 게 놀런 감독의 생각이다. 그가 거장 반열에 오르게 된 것에 이런 고집스러운 촬영 스타일도 기여했을 것이다. 설령 CG로 실제와 똑같은 결과물을 만든다 해도, 사람들은 실물 촬영을 더 높게 평가할 것이다.
2009년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소속 울리히 커크 연구진은 fMRI(자기공명영상)으로 재밌는 실험을 했다. 참여자에게 똑같은 추상화를 주면서, 사람 또는 컴퓨터의 작품이라고 라벨링을 했다. 이때 참여자들의 뇌 반응을 살폈다. 예상대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때 즐거움과 보상을 처리하는 뇌 영역이 더 활성화됐다. 인간은 예술을 결과만 보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투입된 아날로그적인 노력에도 반응한다.
SNS와 쇼츠 영상이 대세인 요즘 세상에서 북콘서트와 북페스티벌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책을 읽고,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는 거다. 어느 지역 독서대전에 7만 명이 왔다 갔다는 뉴스도 있다. 지난 12일과 13일에 부산 백양근린공원 일원에서 열린 ‘2026년 낙동독서대전’도 성황리에 끝났다. 북페스티벌의 흥행은 수년 전부터 꾸준히 관찰돼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책을 통한 소통이 늘어 가는 현상은 아날로그 방식의 지식 교류를 원하는 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핸드폰만 켜면 쇼츠 영상으로 짧은 뉴스를 접할 수 있다. AI에 물어보면 뭐든 상세하게 답이 나온다. 디지털을 통하면 빠르게 큰 노력 없이 지식 습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앎의 재미는 없다. 공감각적인 동물인 인간은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를 하면서 지식을 쌓는 재미를 얻을 수 있다. 아날로그 방식의 독서를 하면 전두엽과 측두엽이 더 강하게 상호작용해 ‘깊은 읽기’에 유리하고, 디지털 매체는 ‘얕은 읽기’에 적합한 뇌 회로가 작동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시간을 들여 가며 책장을 넘기면 더 깊게 생각할 수 있고, 지식 습득을 넘어선 앎의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경험을 공유하면서 즐거움을 더 키우는 자리가 북콘서트나 북페스티벌이라는 거다.
디지털 세상은 오래전 이야기다. 이제 인류는 AI시대 한복판으로 향하고 있다. 어떻게 디지털과 AI를 거부하겠는가. AI는 업무의 효율성 증가, 생산성 향상 등에 매우 효과적이다. 사적인 일들, 여행 계획을 세우거나 점심 메뉴를 정할 때도 AI를 쓰면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효율적으로 일하고, 더 빠듯하게 사는 게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사피엔스는 초원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는 것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다. 디지털이 없는 느린 일상에서 타인과 직접 소통하는 삶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인류가 디지털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AI와 대화하며 열심히 살아 생산성을 극대화해도, 우리에겐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아날로그적인 즐거움과 만족감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커피숍에 줄을 서서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게 흔한 일이 됐다. 어쩌다 작은 커피숍에 들어가 주인장과 짧은 대화 속에서 추천 받은 음료를 마시면, 왠지 맛이 더 만족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짧은 아날로그적인 소통이 맛을 더 했을 것이다. 디지털과 AI시대에 더 잘 살려면, 우리의 아날로그적인 본질을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2026-09-1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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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산대 양산캠퍼스, 마지막 기회 잡자
부산대 양산캠퍼스와 관련해 반가운 소식이 잇따라 들린다. 네이버클라우드와 AI 혁신 생태계 조성을 위한 협약 체결에 이어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 선정, 도시숲 조성도 추진된다. 20여 년째 방치된 양산캠퍼스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부산대 양산캠퍼스는 2000년 양산신도시 조성 당시만 해도 지역 발전을 이끌 ‘구원투수’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계획했던 시설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으면서 110만㎡에 달하는 부지 중 54만 2000㎡가 ‘빈 땅’으로 방치되고 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시민들의 실망과 불만도 컸다.
수차례 해법을 모색했지만,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돌파구로 찾은 것이 2023년 정부의 공간혁신구역 선도사업이다. 용도지역과 건폐율·용적률 등의 규제를 유연하게 적용해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개발의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평가됐다.
그러나 부산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부지 가격을 놓고 이견을 보이면서 사업은 제자리걸음이다. 부산대는 현재 감정평가액 수준을, LH는 과거 매입가격을 기준으로 한 가격을 주장하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대의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 선정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부산대는 양산캠퍼스 유휴부지를 산업과 연계한 연구 거점으로 육성하고, 54만여㎡ 규모의 ‘산업AX연구캠퍼스’ 조성을 구상하고 있다. 연구 인력과 기업 등을 지원하는 주거·배후부지도 조성된다.
문제는 재원이다. 지역 거점 국립대의 경쟁력을 높이고 연구·교육 기능을 강화하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실제 부산대가 최근 마련한 비공개 활성화 용역안에 8000억 원을 투입하는 방안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규모가 맞다면 정부 지원만으로 필요한 재원을 모두 충당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결국 부산대가 보유한 자산을 활용해 자체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장기간 활용하지 못한 양산캠퍼스 유휴부지 일부를 매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공간혁신구역의 중요성이 커진다. 같은 땅이라도 어떤 용도로 개발할 수 있느냐에 따라 토지 가치는 크게 달라진다. 아파트 등 주거시설을 건립하는 데도 유리해진다. 공간혁신구역이 부산대가 유휴부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미래 경쟁력 확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네이버클라우드와의 협력도 기대를 높인다. AI 공동연구와 산학협력, 인재 양성, 창업 지원 등을 통해 양산캠퍼스를 동남권 AI 산업 혁신의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대학의 연구 기능과 기업의 기술력이 결합하면, 20년 넘게 방치된 빈 땅이 미래 산업을 키우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윤영석 국회의원이 추진하는 도시숲 조성사업도 눈여겨볼 만하다. 캠퍼스 내 3만 3000㎡에 도시숲과 자연공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하겠다는 계획이다. 연구·산업 기능에 시민을 위한 공간까지 갖춘다면 양산캠퍼스의 역할은 더 커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업을 개별적으로 추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의 사업으로 묶어야 한다. 그래야 양산캠퍼스가 단순한 유휴부지를 넘어 양산의 새로운 성장거점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를 위해 부산대와 LH의 결단이 필요하다. 양측이 현실적인 접점을 찾아 공간혁신구역 선도사업이 실제 개발로 이어질 수 있도록 속도를 내야 한다.
양산시의 역할도 중요하다. 최근 모든 부서가 참여하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적극 대응하기로 했다. TF는 단순한 행정 지원을 넘어 부산대와 LH, 경남도, 정부를 연결하는 실질적인 조정자가 돼야 한다. 필요하다면 제도 개선과 국비 확보에도 나서야 한다.
양산은 인구 40만 명을 바라보는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의 외형이 커진 만큼 새로운 산업과 교육·연구 기능을 갖춰야 한다. 부산대 양산캠퍼스가 그 중심에 설 수 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공간혁신구역이라는 제도적 틀이 마련됐고, 부산대가 미래 연구 기능 강화를 위한 새로운 구상을 내놓았다. 네이버클라우드라는 민간기업과의 협력도 시작됐다. 이제 남은 것은 부산대와 LH가 현실적인 해법을 찾고, 양산시와 지역 정치인이 적극적으로 중재하며, 정부와 경남도 역시 힘을 보태야 한다.
시민들이 오랫동안 ‘기회의 땅’이라며 기다려온 부산대 양산캠퍼스가 더 이상 빈 땅으로 방치돼서는 안 된다. 양산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번에는 반드시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한다.
2026-09-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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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65만 청년들이 그냥 쉰 이유
최근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진’을 차지한 한 여성의 성형 논란이 뜨겁다. 과거 방송에 출연했던 10대 시절 모습과 현재 외모가 크게 다르다는 이유로 의혹이 제기됐다. 당사자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차가운 시선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성형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유독 이 문제에 민감하다. 유명인의 외모가 조금만 변해도 인터넷은 순식간에 불붙는다. 대중은 왜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할까? 그들은 단순히 외형의 변화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분노하는 지점은 바로 ‘공정의 훼손’이다.
성형은 하나의 특혜나 반칙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자본으로 출발선을 바꾸었다는 인식이 작동한다. 특히 외모 평가가 핵심인 미인대회에서 성형이라는 편법을 쓴 참가자는 경쟁의 규칙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러한 공정성 시비는 비단 미인대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공정성은 한국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가장 예민한 역린이다. 취업과 시험 등 경쟁이 치열한 영역에서 반칙으로 승리를 챙겨가는 광경을 볼 때 대중은 분노를 넘어 무력감에 빠진다.
최근 한 인기 연예인이 친일파 후손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거센 비난을 받았다. 대중이 분노한 본질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을 배신하고 축적한 부와 권력이 대를 이어 세습되었기 때문이다. 그 부당한 자본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는 점이 분노의 근본 원인이다.
‘금수저’와 ‘흙수저’를 바라보는 씁쓸한 시선도 그 연장선에 있다. 부모의 직업과 재력이 자녀의 스펙을 결정하고,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격차를 벌려놓는 세습 자본주의가 이 논쟁의 이면에 있다. 부모를 잘 만났다는 이유 하나로 출발선에서 까마득히 앞서 나가는 광경을 볼 때 청년들이 느끼는 것은 깊은 박탈감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이 이토록 화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이를 타인의 성공에 대한 시샘이라 치부한다. 그러나 본질은 불공정한 사회 구조에 있다. 기득권이 짜놓은 판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된 경쟁조차 해보지 못한다는 좌절감이 청년 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다. 실제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청년 삶의 질 2025’ 지표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층 절반가량은 여전히 ‘한국 사회를 불공정하다’라고 인식하고 있다. 기득권의 부정부패, 공정하지 못한 경쟁 시스템 등이 불공정의 주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용혜인 의원을 둘러싼 ‘벼락출세’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용 후보자는 민주당 주도 위성정당의 혜택으로 비례대표만 두 번 당선됐다. 그럼에도 국회의원직을 유지한 채 장관까지 겸직하겠다고 선언했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이중·삼중의 특혜”라는 지적에 직면했다. 공정과 기회의 균등을 외치던 젊은 정치인마저 자신의 출세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리는 모습은 위선 그 자체다.
불공정이 일상이 된 사회 탓일까. 최근 청년 고용률은 장기간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구직도 취업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쉬었음’으로 분류되는 청년이 65만 명을 웃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향해 의지 부족이라며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청년들이 도전에 발을 빼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판이 뒤집히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것은 아닐까. 불공정에 가로막힌 청년들에게 노력이라는 단어는 이미 효용을 다했다. 그들은 주류 사회의 경쟁 체제 밖으로 탈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년도 예산안에 43조 원이 넘는 청년 예산을 편성했다. 성장 단계별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현금성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청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국가가 쥐여주는 시혜성 푼돈이 아니다. 그것은 자립을 돕기는커녕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어 청년을 더 취약하게 만드는 환대의 역설일 뿐이다. 현금 살포는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한다. 특히 자신과 미래 세대가 짊어져야 할 나랏빚이라는 사실을 청년들은 잘 알고 있다.
정부가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과제는 임시 처방이 아니다. 청년이 원하는 것은 제대로 싸워볼 수 있는 ‘공정한 기회’다. 특혜를 차단하고 동등한 출발선을 보장하는 제도적 뼈대를 먼저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 최소한 동일한 출발선에서 경쟁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과 제도적 보장이 마련되지 않는 한, 그 어떠한 막대한 예산도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다. 국가가 공정하지 않은 게임을 방치하는 것은 청년들에겐 깊은 상처를 안기는 또 다른 폭력이다.
2026-09-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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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방도시 잇는 국제선 직항이 늘어난다
전 세계 주요 항공사들이 ‘지방도시 직항’ 노선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에선 허브공항을 거치지 않고 유럽 휴양지를 직접 잇는 항로 개설이 활발하다. 아시아와 호주, 중동과 유럽을 연결하는 직항 노선도 늘었다. 지방도시 직항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은 오는 12월부터 워싱턴D.C.~더블린, 암스테르담 노선에 취항한다. 스페인 이베리아항공은 하계 스케줄부터 마드리드~토론토 주 5회 운항을 시작했다. 캐나다항공은 2027년 여름부터 토론토와 오슬로(핀란드), 섀넌(아일랜드), 니스(프랑스)를 잇는 대서양 횡단 노선을 운항할 예정이다.
이들 노선은 에어버스의 최신 항공기인 A321XLR 기종을 활용한 중장거리 노선이다. A321XLR은 에어버스의 인기 기종인 A321neo를 개량한 장거리 협동체(narrow body) 항공기다. 협동체란 항공기 내부 복도가 1개인 소형항공기를 말한다. A321XLR은 최대 항속거리가 4700해리(8704㎞)에 달한다. 최대 항속거리가 3500해리였던 A321neo에 연료탱크를 추가하고 효율성을 높여 거리를 비약적으로 높인 것이 특징이다.
A321XLR처럼 장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소형항공기의 등장은 항공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새로운 수익 노선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기존에 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던 광동체 항공기는 연료 소모량이 많고 공항 착륙료도 비싸서 운항 비용이 많이 든다. 300석에 달하는 좌석 가운데 편도당 200~250명의 승객을 태우지 못하면 적자 운항이 불가피한 구조다. 반면 A321XLR과 같은 장거리 협동체 기종은 광동체와 비교해서 운항 비용을 약 45% 적게 든다는 것이 항공업계의 분석이다. 100~180명의 승객만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다.
장거리 협동체는 허브공항이 위치하지 않은 대도시나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장거리 직항에 최적화된 항공기다. 300석까지는 채울 수 없지만 분명한 장거리 직항 수요가 있는 도시에 신규 노선을 개설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셈이다. 이 때문에 A321XLR 제조사인 에어버스는 이 항공기를 ‘신규 노선 개척자(network opener)’라고 부른다.
계절에 따라 수요가 크게 변하는 ‘휴양지’ 노선에도 장거리 협동체가 변수가 될 수 있다. 기존에는 휴양지 장거리 직항은 광동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연중 운항이 불가능했다. 수요가 몰리는 기간에 대형항공기를 투입해 운항하고 비수기에는 운항을 하지 않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장거리 협동체를 투입하면 계절에 따라 수용 변동이 큰 노선도 연중 일정한 운항 스케줄을 유지할 수 있다. 이 경우 관광객은 항공 운항 일정에 따라 여행계획을 수정하지 않아도 되고 관광 도시도 비수기에 최소한의 관광 수요를 유지하게 돼 전반적인 관광산업 활성화가 가능해진다.
장거리 협동체는 허브공항을 중심으로 노선을 편성해 지방도시 여행자에게 환승을 강요하는 ‘허브 앤 스포크(Hub-and-spoke)’ 네트워크 전략을 일부 약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승객은 직항을 선호하지만 대형 항공사들은 장거리 노선을 운항하는 데 필요한 광동체를 채울 승객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허브 앤 스포크 전략을 폈다. 장거리를 협동체를 운항할 수 있게 되면서 중소도시를 직접 연결하는 직항(Point-to-Point) 노선을 신설할 수 있게 됐다. 지방 도시를 향하는 승객은 허브공항에서 몇 시간씩 ‘환승 대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허브공항의 병목 현상에 따른 지연도 피할 수 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국제선 장거리 직항 확대 기대도 높아졌다. A321XLR의 제원상 항속거리를 적용하면 시애틀(8300㎞), 시드니(8300㎞), 이스탄불(8200㎞), 헬싱키(7400㎞) 등 장거리 직항도 가능하다. 다만 만석 승객, 수하물, 연료 여유분 등을 감안한 실용 항속거리를 감안하면 델리(4900㎞), 두바이(7000㎞), 호놀룰루(7200㎞) 등이 중거리 노선 개설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김해공항은 야간운항 제한시간(커퓨타임) 문제로 항공사가 장거리 직항을 운항할 경우 경제성에 한계가 있다. 커퓨 안에서 왕복 운항 스케줄을 만들 경우 항공기가 현지에서 하루를 대기해야 하는데 이 경우 항공기의 ‘회전율’이 떨어져 항공사로서는 손해를 보게 된다.
김해공항은 슬롯(이착륙 횟수)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어서 신규 노선 취항이 쉽지 않다. 결국 가덕신공항 개항으로 24시간 운영되는 공항이 확보되고 슬롯에 여유가 생겨야 중장거리 직항 확대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항공기술의 발전에 따른 노선 확대 효과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선 가덕신공항의 조기 개항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6-09-0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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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2차 공공기관 이전과 '마지막 스퍼트'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이전안 발표를 앞두고 관가와 금융권이 술렁이고 있다. 정부 공식 발표에 앞서 지난 7월 중순과 지난달 중순, 약 한 달 간격으로 이전 기관 배치안이 담긴 이른바 ‘금융권 지라시’가 SNS를 통해 확산한 것이 발단이다. 국토교통부 실무진의 발언을 요약했다는 이 지라시에는 국토부가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로 공공기관 이전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9월 중 이전안 발표가 임박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은행·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 유관기관은 세종으로, 한국투자공사(KIC)와 7대 공제회, NH투자증권 등 자산운용 관련은 전주로, 농협은행·농협생명·농협손해보험 등은 부산으로, 농협중앙회는 나주로 이전하는 방안이다.
금융권에서는 정부 원칙과 지자체 지역 논리, 정치권 이해관계를 잘 끼워 맞춘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라는 분석부터 여권이 향후 이전 로드맵에 대해 여론을 떠보기 위해 흘렸을 가능성, 국토부 실무진과 비공식 대화에서 나온 개인적 구상을 정리한 것이라는 추측까지 다양한 해석이 제기됐다.
정부는 곧 “결정된 바 없다”고 해명했다. 일부 언론이 지난달 말 국무회의에서 이전안 의결을 추진한다는 내용까지 보도하자, 정부는 공론화와 지자체·노조 등의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10~11월께 이전안을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지라시 유통과 정부 해명으로 이전안 발표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확산하면서 긴장감은 오히려 높아졌다.
지라시 내용은 미확인 정보로 남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내용의 진위와 별개로 공공기관 2차 이전을 둘러싼 지역 간 경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부가 앞으로 어떤 기준과 논리로 기관을 배치할 가능성이 있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 내용을 접한 금융권과 관가에서도 기관별 산업 연관성과 지역 특성을 고려한 배치라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김윤덕 국토부 장관은 최근 공공기관을 혁신도시 중심으로 산업·기능 연관 효과에 따라 ‘집적과 집중’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서울 잔류 기관을 최소화하겠다는 분명한 정부 원칙을 밝혔다. 이 원칙에 맞춰 부산시와 부산 정치권도 2차 이전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몇 개 기관을 유치하느냐’보다 부산에 어떤 기관을 집적해야 가장 큰 시너지와 이전 효과를 낼 수 있는지 따져, 이를 정부에 설득력 있게 제시할 논리와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금융권과 관가에서는 정부가 당초 이르면 8월 말이나 9월 초 공공기관 이전안을 발표하려 했지만, 이전 대상 기관 노조와 유치 희망 지자체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발표 시기를 늦췄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에 무게를 싣고 있다. 관가의 정책 결정 구조를 잘 아는 한 금융권 인사도 “극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배치 작업이 마무리되고 초안 공개가 임박했지만, 반발이 커지자 발표 시기를 늦췄을 가능성이 크다”며 “부산도 아직 남은 시간 동안 공공기관 유치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은 2009년 서울과 함께 금융중심지로 지정된 이후 한국거래소·한국예탁결제원·한국주택금융공사·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기술보증기금 등 주요 금융 공공기관이 자리 잡았다. 금융산업 핵심 인프라가 집적된 만큼 추가 기관 이전에 따른 연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고, 해수부 이전에 따른 해양금융을 비롯해 블록체인·디지털금융 등 미래 금융산업으로 확장할 기반도 갖췄다.
정주 여건도 강점이다. 최근 국토부 조사에서 부산은 1차 공공기관 이전 지역 10곳 중 이전 직원의 1인 가구·가족 동반 이주율이 80%를 넘으며 가장 높았다. 이전 대상 기관 내부에서 세종·전주보다 부산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쓰이는 ‘마지막 스퍼트’는 남은 시간과 자원을 모두 쏟아부어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뜻한다. 정부가 이전 원칙으로 ‘집적과 집중’을 내세운 지금, 부산은 그동안 시민들이 염원해 온 산업은행 부산 이전의 당위성을 정부의 이전안 퍼즐이 최종적으로 맞춰지기 전까지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다른 국책은행도 마찬가지다.
지라시에 포함된 금융위원회의 세종 이전안 역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금융중심지에 금융위원회가 와야 한다는 논리만으로 부족하다면, 이미 자본시장 인프라와 주요 금융기관이 집적된 부산에 금융정책 총괄 기관인 금융위원회가 이전하는 것이 ‘집적과 집중’ 원칙에 더 부합한다는 논리도 충분히 가능하다.
공공기관 이전안 발표가 미뤄진 만큼 부산에는 다시 시간이 주어졌다.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은 이 황금 같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2026-09-0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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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폭염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지난 8월 몰타에서 영국 버밍엄으로 향할 예정이던 라이언에어 항공편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객기 출발 전 한 시간 넘게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찜통더위 속에서 기내는 거대한 가마솥으로 변했고, 무작정 대기해야 했던 승객들은 옷을 벗거나 일부는 어지럼증과 구토 증상을 보였다. 2명이 실신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여객기는 기체 결함 점검 후 출발했으며, 이륙한 뒤에야 에어컨이 가동됐다. 한여름 여객기에서 에어컨이 고장 나 겪게 되는 처절한(?) 풍경이다.
2022년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은 중동의 카타르에서 열렸다.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월드컵이 개최될 수 있었던 건 에어컨 시설이 큰 역할을 했다. 경기장 곳곳에 첨단 냉방시설이 설치됐기에 관중들은 뜨거운 중동에서도 쾌적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에어컨이 등장한 건 124년 전이다. 1902년 미국의 엔지니어 윌리스 해빌랜드 캐리어가 발명했다. 코넬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캐리어는 졸업 후 뉴욕의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한 인쇄공장로부터 여름철 습기 때문에 종이가 휘고 잉크가 번지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뢰를 맡게 된다.
고심하던 그는 기차역을 뒤덮은 안개를 보며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장치(Air Conditioner), 즉 에어컨 발명의 단초를 얻는다. 온도와 습도의 상관관계를 깨달은 캐리어는 난방 코일 속에 차가운 물을 통과시켜 코일 주위의 공기를 냉각시킴으로써 기온을 떨어뜨리고 습기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인쇄공장 문제를 해결하려던 에어컨 기술은 이후 인간의 생활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꿔 버린다.
1925년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리볼리 극장에 캐리어의 에어컨 시스템이 설치되면서 영화산업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이전까지 여름은 영화산업의 비수기였다. 덥고 습한 비좁은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건 고역이라, 여름엔 관객들이 극장을 거의 찾지 않았다. 하지만 시원한 에어컨이 들어서자 오히려 여름에 관객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영화산업의 계절적 한계는 사라지게 됐다.
에어컨은 정치환경도 바꿨다. 미국 의회 의사당에 에어컨이 설치된 1928년 이후 의원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무리 없이 의정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당초 선풍기에만 의존했던 터라 의사당 창문을 늘리려던 계획도 없던 일로 돌아갔다.
100층 넘는 초고층 빌딩, 마천루 건설도 에어컨이 있기에 가능했다. 에어컨은 높은 건물 안에서 창문을 열지 않고 사람이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대형 여객기나 초고층 빌딩은 물론 백화점, 병원, 호텔 등 현대 문명의 산물들은 에어컨 보급이 기반이 됐다.
사막 한가운데 들어선 라스베이거스 같은 도시도 에어컨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 전 총리는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은 에어컨”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공무원들이 일하는 공공건물에 에어컨을 달았고, 이를 통해 동남아 무더위를 극복하고 정부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싱가포르 경제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가 에어컨인 셈이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떠받치는 반도체 산업과 데이터센터의 필수 설비도 에어컨이다. 반도체는 온·습도와 공기청정도를 정밀하게 관리해야 하고, 데이터센터는 서버가 내뿜는 막대한 열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고도의 청정과 항온 상태가 유지되어야 하는 의약, 화학, 섬유, 식품 가공 등 산업도 에어컨이 없었다면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거 칭기즈칸은 세계 땅의 절반을 정복했다는데, 캐리어가 발명한 에어컨은 세계인의 생활무대를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더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곳, 더 뜨거운 곳으로 생활영역을 넓히게 한 동력이 에어컨이다.
하지만 에어컨 사용이 늘어날수록 과도한 전력 소비와 냉매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란 환경 문제는 당면한 과제다. 몬트리올 의정서 협약에 따라 2030년 이후에는 온실가스 냉매의 사용을 대폭 감축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냉각, 펠티어 냉각 등 실외기 없는 친환경 냉각 기술 개발이 국내에서 결실을 앞두고 있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다.
올해 경남 양산은 기상 관측 이래 최고 기온인 42.5도를 찍었고, 유럽에선 역대급 폭염에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폭염이 일상이 된 시대, 이제 에어컨은 필수품이 됐다. 특히 어린이와 노인 등 취약자에겐 생존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다. 에어컨이 환경 문제를 유발하지만, 결국 기술력으로 이겨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됐다.
2026-08-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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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방에도 사람이 산다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 오직 서울의 과열된 집값을 잡겠다며 처방한 해열제를, 미분양이 속출하는 지방 저체온 환자에게도 똑같이 투여하고 있으니. 숨 넘어가기 직전이라고, 이 약을 먹으면 다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데도 정부의 시선은 여전히 서울과 수도권의 집값 그래프로만 향해 있다. 지방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수도권 과열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시행되는 규제 일변도의 조치들은 자생력이 약한 지방 부동산 시장의 사슬부터 끊어내고 있다. 이 같은 규제의 역설은 지금껏 반복돼 왔고, 지방민은 학습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 결과 정부 부동산 대책이 거듭되면 될수록, 자금력 있는 지방민은 너도나도 서울 똘똘한 한 채를 찾아 ‘자본 탈출’을 시도한다.
지난달 23일 열린 대통령 주재 부동산 국민 대토론회와 뒤이어 나온 8·3 부동산 세제개편안은 이러한 수도권 편향적 국정 프레임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토론회에서는 지방에선 넘볼 수조차 없는 30억 원대 주택을 두고 초고가 주택이 맞냐 아니냐 의견이 분분했는데,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고개를 갸웃하며 “지방과 수도권의 초고가 주택 기준에는 큰 차이가 있다”며 서울 사람 편에 섰다. 토론회 내내 국민 절반에 해당하는 지방민은 초대되지 않은 ‘그들만의 세상’에 온 것 같은 불편함과 소외감, 박탈감을 느껴야 했다. 지역 전문가의 발제나 발언 기회도 전혀 없었다.
토론회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세제 개편안에서 ‘지방 무시’는 더욱 노골화됐다. (대개) 서울에 있는 20억 원짜리 거주 1주택자에게는 종합부동산세를 아예 면제해주기로 하고 30억 원까지도 종부세를 줄여주기로 했지만, (대개) 지방에선 주택 3채를 다 합쳐 13억 원만 넘으면 종부세 폭탄을 맞게 됐다. 관련 정부 브리핑에선 한 기자가 지방과의 과세 형평성에 대해 묻자 정부 관계자가 “지방에는 종부세 많이 내는 분이 많이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해 부산에서만 주택분 종부세를 낸 다주택자가 1만 2205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정부는 지방의 적체된 미분양 물량을 흡수해 임대 시장에 공급할 유동성의 주체가, 그나마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대상이 다주택자라는 점을 간과했다. 결국 지방 주택을 처분하고 서울의 똘똘한 한 채, 안 되면 서울 사람들 눈엔 ‘덜 똘똘한 한 채’라도 갈아타라는 정책적 신호는 지방 부동산 시장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부 발표나 대통령 말 한마디만 나와도 은행 대출 심사가 하루 아침에 뒤바뀌기도 하니 지역 건설업계는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미 부산의 경우 악성으로 분류되는 준공 후 미분양이 역대 최고 수준임은 물론, 악성 미분양 비율이 전체 미분양의 40%를 돌파하는 등 지방 시장은 이미 심각한 동맥경화 상태에 빠져 있다.
정부 지방 무시를 비판하는 본보 보도가 나간 뒤 부산은 물론 경남 창원, 경북 등에서도 본보로 응원과 정부 성토 메일, 전화가 쏟아졌다. 부산의 한 기관 수장은 “부동산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대한민국 서울과 지역의 초양극화가 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다”면서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이번 토론회 사례에서 보듯, 서울 사람 눈에는 지역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정부가 연일 지역 균형 발전을 강조하고, 2차 공공기관 이전까지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가 던져주는 것만 먹어” 식의 시혜적 관점으로만 지방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경고했듯, 시장 실패보다 무서운 건 잘못된 제도 설계로 인한 ‘정부 실패’다. 서울과 수도권 시장이 규제 속에서도 글로벌 자본과 풍부한 대기 수요로 하방 압력을 견뎌내는 사이, 지방은 즉각적인 거래 절벽과 가격 폭락이라는 치명상을 입고 있다.
특히 거래 절벽은 단순 자산 가치 하락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뿌리째 뒤흔든다. 취업이나 이직, 자녀 교육 등을 위해 거주지를 옮기고 싶어도 집이 팔리지 않아 자신이 살던 지역에 묶여버린다. 평생을 모아 힘겹게 일군 집이라는 자산이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돕는 사다리가 아니라, 발목을 잡는 주거 락인(housing lock-in)의 사슬이 되어버린다.
열이 많이 나 링거를 맞아야 하는 서울보다 더 급한 환자는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지방 시장이다. 국민 절반이 사는 서울 공급 대책이 나올 때, 나머지 국민 절반이 사는 지방 수요 대책도 같이 나와야 한다. 둘은 전혀 다른 시장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이후 또 최저치를 찍었다. 지지율 하락의 원인마저 오로지 부동산 관련 ‘서울 민심’에서만 찾고 있으니,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 지방에도 사람이 산다.
2026-08-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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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간판 뒤의 얼굴들
“기자님은 대형마트 안 가세요? 시장에서만 장 보세요?”
2010년대 초반 3년간 유통업계를 취재했다. 대형마트와 SSM의 공세가 본격화되고, 골목상권은 고사 위기를 호소했다. 대형마트 심야영업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일을 지정한 유통산업발전법의 탄생도 이때다. 버티다 못해 폐업 준비를 하는 슈퍼마켓, 대기업 식자재 매장에 비상이 걸린 도매시장 상인들을 만났고, 매장을 변칙 개점하거나 의무휴업일에도 배짱 영업을 하는 대형마트를 지적했다.
당시 부산 출점을 앞두고 서울에서 온 한 유통 대기업 담당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요즘 누가 전통시장을 가느냐, 당신도 대형마트에서 편리하게 사지 않느냐. 그런 뉘앙스의 힐난이었던 것 같다. 그 때로부터 십수 년, 지금은 지역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홈플러스 지키기를 호소하고 나섰다. 홈플러스는 파산 문턱에서 가까스로 회생 기한을 받고 일부 점포에서 영업을 재개했다.
업계 2위 홈플러스가 파산 위기까지 간 원인은 복합적이다. 국내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는 2015년 영국 테스코로부터 홈플러스를 7조 원대에 인수한 이후 투자금 회수를 위해 자산 매각 중심의 구조조정에 나섰다. 점포와 물류센터를 줄줄이 매각했고, 일부는 판 뒤 다시 빌려 쓰는 방식으로 영업을 이어갔다. 점포는 줄고 비용은 늘었는데, 그 사이 대형마트 업황 자체가 악화됐다.
일각에서는 홈플러스 사태를 두고 골목상권을 지키려고 대형마트를 규제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대형마트의 의무휴업일을 늘린다고 전통시장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쿠팡과 새벽배송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유통업체만 키워준 결과였다는 논리다. 그러나 정책이 시대와 산업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것과 정책의 보호 대상과 명분이 잘못됐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지켜야 하는 것은 노동자와 지역 경제다. 2012년 유통법이 만들어질 때도 그랬고, 홈플러스 지키기를 말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홈플러스가 문을 닫으면 전국 10만 명 노동자가 생계를 위협 받고 1800여 개 입점 업체와 협력 업체가 손해를 본다고 한다. 그런 현실을 두고 사모펀드의 경영 실패나 온라인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된 소비 패턴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태평할 수는 없다.
기술의 변화가 유통 산업을 바꾸고 소비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양상은 새롭지 않다. 대형마트와 편의점, 올리브영과 다이소가 골목마다 생겨나는 사이에 슈퍼마켓과 문방구, 화장품 가게와 철물점은 골목에서 점차 사라졌다. 새벽배송, 당일배송, 주말배송으로 쇼핑이 놀랄 만큼 편리해진 반면 물 한 병, 파 한 단을 사려고 해도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쇼핑 사막’, ‘식품 사막’도 늘고 있다.
정책은 변화에 취약한 대상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비수도권도 대표적인 예다. 부산 홈플러스만 해도 이번 사태 전에 이미 폐점이 잇따랐고, 백화점도 롯데백화점 마산점에 이어 현대백화점 울산점 동구가 폐점 수순이다. KB금융 분석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점포당 월평균 매출액은 서울이 수도권 평균의 배, 비수도권의 3배였고, 방문객 수는 비수도권이 서울의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특히 유통업은 매출과 대비해 고용이 많은 산업이고, 농수산물부터 공산품까지 다양한 생산자에다 금융, 물류까지 연계되기 때문에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 지역의 전통적인 상권을 지키던 백화점의 폐점이 지역 경제 침체의 신호가 되는 이유다. 지방 소도시 핵심 상권에 ‘임대’를 붙이고 늘어서 빈 가게들이 지방소멸을 상징하는 장면인 것도 마찬가지다.
유통 대기업이 합리적인 경영 선택이라는 이유로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에 점포를 닫고, 수도권에만 투자를 한다면 쇼핑 사막은 무서운 속도로 번질 것이다. 새벽 배송으로 대다수가 편리해진다고 해서 골목 상권이 고사하도록 내버려둔다면 내 이웃들이 일자리를 잃고, 여러 가정이 흔들릴 것이다. 거대한 물류센터 바깥에서 거리가, 도시가 텅 비어간다면 그것을 혁신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요즘 세상에 누가 대형마트를 가느냐. 새벽 배송이 얼마나 편리한데 규제를 말하느냐. 이런 질문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유통업 정책이 지켜야 하는 것은 특정 기업이나 혁신 기술이 아니라 물건을 사고 파는 노동자와 소비자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불편해지고 가장 늦게 회복하는 취약한 사람들이다. 우리 이웃들이 걷고 만나고 밥 먹고 대화하는 거리이고, 내 가정을 지탱하게 하는 일터다.
간판이 하나씩 꺼질 때마다 그 뒤의 얼굴들도 함께 꺼진다. 매출의 숫자나 신기술이 아니라 그 얼굴들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에 두는 유통법 개정을 기대한다.
최혜규 경제부 부장 iwill@busan.com
2026-08-2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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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공공기관 이전 지원, 비용 아닌 투자
하반기 2차 공공기관 이전이 본격화한다. 전국의 지자체가 전시 태세다. 유치위원회를 꾸리고 정치권과 공조하며 이전 효과가 큰 기관을 한 군데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부산이 경계해야 할 건 안이함이다. 해양수산부와 HMM 부산 이전이 급물살을 타면서 산하기관 이전을 당연한 부산 몫으로 여기는 자세가 만연해 있다. 제2의 도시이고 신공항과 항만을 갖췄으니 당연히 이리로 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식이다. 그야말로 위험한 태도다.
나라를 병들게 하는 수도권 일극체제는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인구와 기업, 자본과 일자리가 모두 서울에 몰려 있다. 수도권을 벗어나면 정글이라도 펼쳐지는 줄 아는 이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다. 이들의 눈에 부산은 서울에 대적할 만한 제2의 도시가 아니라, 수도권과 가장 멀리 떨어진 '외진 도시'일 뿐이다.
부산이 상대적 강점으로 여기는 광역시급 인프라도 이들 눈에는 도토리 키재기다. 부산이 경쟁 시도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부산 안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공공기관 이전을 지역의 당연한 지분 찾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로 봐야 할 시점이다. 100억 원을 쓰더라도 110억 원의 이익을 보겠다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당장 빠듯한 재정 상황에서 공공기관 유치 지원안에 투입되는 예산을 비용으로 보면 당연히 아깝다. 그러나 투자로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무실 하나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수백 명의 고급 인력이 이동하고 가족이 정착한다. 소비가 늘고 후방 산업이 따라온다.
실제로 부산은 이미 공공기관 이전의 효과를 체감하고 있다. 해수부와 HMM 이전 결정 이후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부산 전역을 짓누르던 패배주의가 옅어졌다. '부산은 뭘 해도 안 된다'는 식의 냉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당장 눈치 빠른 입시 시장부터 이 같은 분위기를 읽어내고 있다. 1차 공공기관 이전으로 금융계 공기업이 뿌리를 내렸고 지역할당제까지 적용되며 부산대 상경 계열 학과의 입결이 개선됐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해수부 이전 덕에 지역 대학가의 해양 관련 학과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이들 대학이 하나둘씩 수도권 학생을 상대로 입시설명회에 나서고 있다.
이는 그간 부산시의 갖은 정성에도 겉돌던 청년의 마음이 더는 흔들리지 않게 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부산에서도 기회는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부산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시 청년 정책 예산은 2019년부터 2025년까지 4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현금이나 주거 지원을 제외하면 상당수 청년들은 정책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청년 정책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청년의 마음'을 붙드느라 쓰는 비용보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사람과 기관에 대한 이전 투자가 훨씬 더 효과를 내고 있다는 말이다.
정책 간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해수부 산하기관 등 공공기관 이전 지원에 전향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해수부가 부산으로 왔으니 나머지 산하기관도 줄줄이 따라와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순진하다.
결국 공공기관 이전도 투자 싸움이다. 사람의 이동에 투자하고, 조직의 이동에 투자해야 한다. 지금 하반기 시작되는 2차 공공기관 이전에서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부산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이와 병행해 중앙 관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반발을 잠재워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효과도 없는 공공기관 이전으로 이산가족만 양산한다'라는 볼멘소리가 가득하다. 이를 반박할 논리와 백데이터부터 제시해야 한다. 이전의 효과를 눈앞에서 보여주고 반발을 잠재우지 못하면 향후 이전 정책의 지속성도 담보할 수 없다.
수십 년 묵은 망국병을 치료하는 큰 싸움을 부산 혼자서만 감당하려 해서는 안 된다. 3명의 시도지사가 지역별로 이전을 희망하는 기관을 사전에 조율하는 식으로 공동전선을 펼쳐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공기관 이전은 지역에 대한 시혜가 아니다. 수도권 일극체제를 완화하기 위한 국가 전략이다. 부산 역시 이를 당연한 몫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지금 부산에 필요한 것은 비용을 아끼는 계산이 아니라 미래를 사는 계산이다.
2026-08-19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