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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이슈 추적, 왜?'는 이렇게 시작됐다
현대인의 영원한 숙제, 다이어트. 간헐적 단식이나 1일 1식을 하는 등 식단을 관리하는 사람, 헬스장에 다니는 사람, 하루 1만 보를 걷는 사람 등 그 실천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최근 미국에선 비만 치료제 ‘위고비’의 품귀 현상까지 벌어진다고 하니, 체중 감량에 대한 관심은 만국 공통이다.
올해 초 부경대 학생들이 비만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들고 왔을 때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재밌는 주제라고 판단했다. 부산시 빅데이터 서포터즈로 활동했던 이들은 영도구와 서구가 인구 분포나 면적 등의 환경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비만율에 있어선 큰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집중했다. 대학생들이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찾은 이유 중 하나는 공공체육시설과 동네체육시설의 개수 차이다. 1㎢당 공공체육시설은 영도구 3.7개, 서구는 6.3개(약 1.7배)였다. 1㎢당 동네체육시설은 영도구 3.8개, 서구 5.2개(약 1.4배)였다.
이런 차이가 비만율 격차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느냐고 전문가들에게 질문했을 때 대부분은 고개를 저었다. 비만의 원인이 식이, 운동, 신체활동, 질병 여부 등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원인으로 단정 지어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오히려 소득과 비만율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선 많은 전문가들이 확신에 찬 답변을 내놓았다.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비만율이 낮다는 것이다. 북유럽 등 선진국에 채식주의자가 많다든가 미국의 저소득층이 정크 푸드를 즐겨 먹는다든가 하는 사례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실제로 질병관리청의 2021년 지역사회 건강통계에 따르면 비만율이 가장 낮은 지역 상위 5개 지역에 대도시 부촌이 이름을 올렸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23.7%), 서울 강남구(23.9%)·서초구(24.4%),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24.9%), 대구 수성구(25.0%) 순이다.
부산에서도 비만율은 지역마다 격차가 존재했다. 영도구의 경우 2012년부터 2021년 사이 비만율이 부산 평균보다 낮았던 적이 단 한 차례밖에 없을 정도로 비만율이 높은 지역이었다. 전문가들은 노인 인구가 많고 기초생활수급자를 비롯한 저소득층이 많은 지역 특성이 그 원인일 것으로 분석했다. 그렇다고 이 같은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특히 이 문제를 제보한 부경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김규하·김동훈·나현준 씨와 조형학부 졸업생 최예원 씨는 “비만은 사회적 문제”라고 강조하며 원인과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래서 <부산일보> 기획취재부는 각 지역 현장을 찾아 지역별 격차의 이유를 밝혀 보기로 했다. 지역 보건소와 마을건강센터, 체육시설, 병원, 부동산, 시장 등을 발로 뛰며 전문가와 주민을 인터뷰 했다. 이렇게 새 기획 시리즈 ‘이슈 추적, 왜?’가 시작됐다.
취재진은 현장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르신들이 가벼운 산책과 운동을 하기에 영도구의 경사가 심한 지형이 장애가 된다는 것, 집 근처에 편하게 운동을 할 만한 시설이 부족하다는 것, 독거 노인이 많다 보니 식단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 등이다.
서구의 경우 최근 5년 사이 서대신동을 중심으로 재개발이 활발해 신규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소득이 높은 젊은 층의 유입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지역은 “아예 딴 동네가 됐다” 할 정도로 인구 구조의 변화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취재진이 2018년과 2021년의 인구 데이터를 비교한 결과 서구 전체의 60대 이상 인구 비율은 이 기간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안타깝지만 서구 전체의 비만율이 낮아진 원인으로 특정 지역의 재개발을 꼽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취재진과 대학생들이 데이터 분석을 통해 얻은 영도구와 서구의 각종 지표 차이는 인포그래픽 형태로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결론은 이거다’라고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속 시원한 답변은 찾지 못했지만, 두 지역의 격차를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는 효과는 있었다. 대학생과의 협업을 통해 젊은 층의 문제 의식을 지면에 담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신문의 양쪽 지면을 채운 인포그래픽 작업은 최예원 씨가 직접 맡아줬다.
<부산일보>는 앞으로도 이러한 지역 이슈들을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챗GPT는 미처 답할 수 없는 현장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자 한다. ‘이슈 추적, 왜?’가 지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하고, 논쟁적 이슈의 원인을 깊이 있게 파헤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제보와 참여를 기다린다.
2023-03-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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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통 큰 결단…'따뜻한 가슴'으로 마무리하라
문제 : 다음 기사에서 ○에 들어갈 사람 이름과 □에 들어갈 당명은?
‘○ 대통령은 한·일정상회담 뒤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양국 국민 정서가 서로 다른 한 양국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어떤 합의를 내리기가 어렵다”며 “이 때문에 제 임기동안에는 공식 의제로나 공식 쟁점으로는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대통령은 또 “역사적 진실에 대해 서로 합의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나 미래를 위해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일본의 호응을 요구했다.
○ 대통령은 이어 “독일의 아데나워 전 총리가 서유럽과의 관계를 풀었고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동유럽과의 관계를 해결해 지금은 유럽질서를 주도하고 있다”며 과거의 사례를 들었다.
그러자 □당은 일본의 사과와 보상 등 과거사에 대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 대통령을 비판했다. A 최고위원은 “○ 대통령의 발언은 국가원수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국내에선 오기정치를 하면서 밖에선 굴욕외교를 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B 정책위의장은 “관계국가의 잘못된 역사적 문제에 대해선 따질 것은 따지고 내부적으로 국론을 통합해 힘을 결집하는 것이 국익을 위한 길인데도 ○ 대통령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많은 사람들이 ○은 윤석열 대통령이고, □는 더불어민주당이 정답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이 기사는 2004년 7월 23일 부산일보에 게재된 것이다. ○은 노무현 대통령, □는 한나라당이 정답이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미래통합당→자유한국당→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전신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2004년 7월 21~22일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간 협력 관계 증진을 다짐하면서 역사문제를 비롯한 두 나라 사이의 현안에 대해 조금이나마 간극을 좁혔다.
그로부터 19년이 흐른 지난 16일 윤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한·일관계에서 있어서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윤 대통령의 발언과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여러모로 맥락이 닿아있다. ‘과거사 해결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던 한나라당의 비판은, 이번 정상회담을 ‘신(新)을사조약에 버금가는 굴욕외교’라고 총공세를 펴고 있는 민주당과 빼닮았다.
19년이 지났지만 정권만 달라졌지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미래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과 여야는 예전에 가졌던 자신들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
야당은 미·중 전략 경쟁, 공급망 위기, 북한 핵 위협 고도화 등 복합 위기 속에서 한·일 협력의 필요성이 더 커졌고, 결국 일본 측의 제대로 된 사과나 배상 약속 없이 강제징용 해법을 우리가 먼저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성을 이해해야 한다. 정부 여당은 과거 야당 시절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가졌던 유화적인 자세에 섭섭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는 만큼 지금 야당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국익 외교에 협조할 수 있도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눈에 뻔히 보이는 반발을 무릅쓰고 국익과 미래를 위해 결단했다는 윤 대통령이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 한가지 더 남았다는 점이다. 그건 바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보듬고 껴안는 일이다.
2018년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 승소자는 15명이었고, 그 중 3명이 생존해있다. 이 분들은 모두 90세가 넘은 고령이고 생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그건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국정의 최종 책임자로서 일본의 사과보다는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대외적으로 이를 번복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 대목에서 윤 대통령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고 이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진솔한 자리를 가져야 한다. 한·일 청구권 협정과 대법원 판결, 그로부터 파행된 여러 문제를 떠나서 이 분들에게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아쉬울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만나 손을 잡아주고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를 상당부분 치유할 수 있다고 본다. 한·일 관계 미래를 위해 윤 대통령은 냉철한 머리로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이제는 따뜻한 가슴으로 그 결단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다.
2023-03-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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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일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
‘정말로 머리 좋은 혼은 태어날 때 어떤 나무에서 왔는지 기억하고 있지만, 경솔하게 입 밖에 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숲 속에 들어가 우연히 ‘나의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나이를 먹은 자신을 만나는 수가 있지.’
일본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집 〈‘나의 나무’ 아래서〉의 한 구절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비판하며 정치인들의 신사 참배와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1935년생인 그가 지난 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별세 소식은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안이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려졌다.
정부 발표와 오에 겐자부로의 별세 소식이 겹치면서 그가 미래 세대인 어린이를 대상으로 쓴 이 에세이집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정부가 ‘제3자 변제안’을 강제징용 피해 보상의 해법으로 제시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2001년에 발간된 그의 에세이는 그가 자란 마을에 전해지는 ‘나의 나무’ 전설에서 시작된다. 뿌리에서 나온 혼이 사람이 됐다가 죽을 때 돌아가는 ‘나의 나무’가 마을 사람마다 있고, 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 어린 내가 어른이 된 나를 만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오에 겐자부로는 그 전설을 듣고 어른이 된 나를 만나면 이렇게 질문하고 싶었다고 한다.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과거와 미래가 이어져 있는 역사에 대한 은유로도 해석되는 ‘나의 나무’ 전설은, 우리의 아이들이 현 세대에게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묻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안을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으로 표현하는 대목은 개운치 않다. 공정의 가치와 인권 감수성이 이전 세대보다 높은 미래 세대가 개인의 피해 회복보다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다수의 이익에 방점을 찍은 이번 해법에 찬성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최근 사적 복수를 다룬 드라마들이 하나의 장르물처럼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세간의 인기를 끄는 현상은 이런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학폭을 주제로 다룬 ‘더 글로리’나 범죄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를 처단하는 내용의 ‘모범택시’ 등의 살벌한 사적 복수극들은 하나같이 평범했던 개인이 당한 피해를 사회가 해결해 주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 사법 체계가 개인의 피해를 구제하지도, 복수를 대신하지도 못 한다는 사회적 좌절감과 분노가 드라마 인기의 기저에 깔려 있다. 개인의 권리나 존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태의 반영으로도 해석된다.
정부의 제3자 배상안이 “국가는 개인의 피해를 구제하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그 피해가 주권을 잃은 나라 때문에 생긴 것이라도. 국민 다수의 이익이 몇 명 안 되는 개인들의 고통에 발목이 묶여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미래 세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아닐까?
강제징용 피해자가 겪은 고통의 본질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다. 끔찍한 폭력을 당한 이들이 바라는 것은 드라마 ‘더 글로리’의 대사처럼 당시 처참하게 무너졌던 자신의 명예와 영광의 회복일 것이다.
현재 교착 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정부의 의도에는 동의하지만, 하필이면 미래를 위한 전진이 일제 수탈 피해자의 고통을 지렛대 삼았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게다가 정부의 통 큰 선제적 호의에 비해 현재까지 일본 정부의 호응은 소극적이기 그지 없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일본에 대한 원망을 안고 가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한때 힘없는 나라에서 이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조국에 대한 원망까지 안고 가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의 나무’ 아래서〉에는 오에 겐자부로가 일본 제국주의 패망 전후 겪었던 유년 시절 이야기가 흥미롭다. 용감하고 강한 일본 군인이 영국군을 물리쳐 싱가포르에서 보낸 고무공 구입권에 당첨되어 기뻐한 일, 학교 선생님이 미국을 적국으로 가르치다 전쟁 패배 후 친구라고 말하자 학교를 가지 않았던 일화 등이 소개되어 있다. 전쟁터에 나가 낙오되거나 적군을 죽이는 악몽을 꿨다는 회고도 나온다. 전쟁이라는 무자비한 폭력은 인간을 한없이 들뜨게도, 두렵게도 만든다.
일본이나 한국의 현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대한 이해와 현명한 대응이다. 일본은 과거의 폭력에 대해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한국은 개인 존엄에 대한 예의를 가지고 있다고 미래 세대에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라는 나무 아래에서 마주친 미래 세대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물었을 때 말이다.
2023-03-2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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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SNS에선 행복하십니까?
지난 12일 일본 주간지 슈칸신초의 인터넷판 데일리신초는 한국의 스시 오마카세 열풍을 다루면서 그 이면에 “한국 남녀의 허세가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기사는 “비싸게는 인당 25만 원에 달하는 오마카세를 먹는 것은 이제 한국 젊은이들에게 사치의 상징”이라며 “첫 데이트나 생일, 크리스마스 등의 기념일에 인기 오마카세 레스토랑을 예약하면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는 훌륭한 선택’이라고 주위로부터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연인과 함께 SNS(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에 사진과 영상을 올려 다른 사람에게 오마카세 방문을 자랑하는 것까지가 세트”라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달에는 일본의 우익 성향 매체가 한국의 명품 소비를 거론하며 “예나 지금이나 외화내빈의 나라”라고 꼬집었다. 서울 특파원을 지낸 해당 기사의 기자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면서도 에르메스 빈 상자를 배경으로 가짜 롤렉스 손목시계를 찬 자신을 찍는다”고 썼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셀프 배상안’과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한·일전 참패로 가뜩이나 국민적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언론의 노골적이면서도 도 넘은 지적은 불쾌감을 자아낸다. 한편으로는 체면과 남들의 시선을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가 SNS를 통한 경쟁적 사생활 노출과 결합하면서 빚어진 사회적 병리현상의 일단면을 드러낸 것 같다. 마냥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 오마카세 예약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초밥을 뜻하는 스시와 수강신청을 합친 ‘스강신청’이란 말도 MZ세대 사이에 유행한다고 한다.
기성세대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직장인 소셜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는 합산 연봉이 8000만 원인 부부가 스스로 ‘하류인생’이라고 밝힌 게시글이 화제가 됐다. 남편과 본인의 연봉이 각각 4000만 원, 3700만 원이라고 공개한 작성자는 “회사명이 블라인드에 나오지 않을 만큼 작은 중소기업에 다닌다”며 억대 연봉자와 수입차가 넘쳐나는 이 커뮤니티에서 자신은 실패한 하류인생에 불과한 것 같다며 자조했다.
자신을 표현하고 남과 소통하는 공간인 SNS에서 군중 속의 고독,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호화 여행지에서 값비싼 음식을 즐기는 ‘인증샷’을 올려 ‘좋아요’를 받고, 팔로워를 끌어들이며 마치 셀럽이 된 것 같은 도취감에 빠진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지인들의 피드백이 잦아들고 방문이 뜸해지면 더 많은 관심을 받기 위해 더 튀는 사진을 포스팅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악순환에 짓눌린다는 것이다.
이 같은 SNS 과몰입으로 인한 병리현상을 빗대 ‘카페인 우울증’이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대표적인 소셜미디어인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앞 글자를 따 만든 말로, SNS에 드러난 타인의 모습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과 우울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SNS에 인증샷을 올리고, 좋아요나 댓글이 달리지 않으면 초조해지고, 다른 사람의 SNS를 기웃거리느라 불면증에 시달리며 일상에 집중하기 어려워진다.
이 같은 과도한 인정욕구와 남들과의 비교의식은 합계출생율 0.78명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한국의 심각한 저출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010년대 들어 경쟁하듯 확산된 국내의 SNS 열풍을 타고 남들의 삶을 엿보기도 그만큼 쉬워지면서 남들만큼 잘 살고 잘 키울 자신이 없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SNS 이용률이 높을수록 출생율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여럿 나오기도 했다. SNS를 통해 접하는 셀럽들의 화려하고 트렌디한 라이프스타일에 탐닉해 들어갈수록 가족에 헌신하느라 얽매이는 결혼생활을 선택하기가 꺼려진다는 것이다.
SNS 상에서는 나 빼고 모두가 부자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만 같아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박탈감에 빠진다. SNS 속 이미지와 현실 속 나의 모습 간에 괴리감이 도드라질수록 자조감과 허무감 역시 커지는 것은 물론이다. 혹은 저 사람도 나처럼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도 든다.
코로나19 유동성 잔치가 끝나면서 자산가치는 쪼그라들고, 금리와 물가는 치솟고 있다. 언제까지고 ‘욜로’와 ‘플렉스’를 외치며 과시형 소비를 즐기기에는 당장 막아야 할 카드 대금이 버겁고, 살림살이가 너무나도 팍팍하다. ‘과시소비의 경연장’이 된 SNS 문화에 염증을 느껴 계정을 정리하거나 사용 빈도를 줄이는 이들도 늘고 있다. SNS에 빛나는 한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고단한 현실을 저당잡혀야 한다면, 당분간 ‘카페인’을 줄여보는 것도 좋겠다.
2023-03-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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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지혜가 답이다
‘인공지능(AI)은 금융위기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금융위기의 예방, 예측 및 대응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금융위기의 예방 측면에서, 인공지능은 금융시장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상징후를 식별해 조기 경보를 제공할 수 있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경우에는, 인공지능은 빠르게 대처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상 챗GPT가 작성한 글이다. ‘인공지능이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다. 모든 내용을 다 옮겨오진 못했지만 예방·대응방법 또한 꽤나 구체적이다. 기자가 한 일이라곤 경어체로 작성된 챗GPT(예의도 바르다)의 글을 평어체로 바꿔놓은 정도다. 훌륭하다. 영어가 모국어이다보니, 영어로 나누는 대화의 답변은 더욱 훌륭하다고 한다. 기자의 영어 실력이 짧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고보니 챗GPT를 활용한 영어교육법도 떠돌아 다닌다.
챗GP 이슈가 뜨겁다. ‘챗GPT는 OpenAI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언어모델 중 하나이다. 챗GPT는 다양한 자연어 처리 태스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대화형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훈련됐다. 대화의 문맥을 이해하고, 이전 대화에서의 맥락을 바탕으로 다음 발화를 생성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역시 챗GPT의 문장이다.
챗GPT 스스로가 설명하듯, 챗GPT의 놀라운 점은 그와의 대화(채팅)가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데에 있다. 과거에도 뛰어난 인공지능은 있었다. 수 년전 이세돌과 세기의 대국을 벌였던 알파고 역시 대표적인 인공지능이다. 그러나 기자에게 알파고는 계산이 빠른 컴퓨터에 불과했다. 챗GPT는 다르다. 챗GPT의 반응은 사람의 그것과 유사하다. 음성기능은 없지만 문장 자체만으로도 실제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게다가 답변의 내용도 제법 그럴싸하다. 일부 특정 질문에 대해선 마치 정치인의 화법을 학습한 것처럼 알맹이 없이 형식만 그럴싸한 답변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대체로 만족스럽다. 미국의 로스쿨과 경영대학원 시험 문제도 거뜬히 통과할 정도다. 만약 짧은 리포트 과제에 챗GPT를 사용한다면? 앞으로 교수님들은 학생 스스로 작성한 과제물인지 혹은 인공지능이 작성한 것인지 구분하는 데에 고민께나 하게 생겼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기자가 아는 한 금융전문가는 조만간 인공지능이 최근 발생한 실리콘밸리뱅크(SVB) 파산과 같은 금융위기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작 챗GPT는 ‘완전히 막을 순 없다’고 겸손을 떨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로서의 이야기다. 모든 금융위기는 위기에 앞서 많은 신호를 보낸다.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다룬 영화 ‘빅쇼트’나 한국의 IMF 사태를 다룬 ‘국가부도의 날’을 본 분들이라면 위기에 앞서 얼마나 많은 시그널이 구체적 수치로 나타났는지 이해할 테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그러한 전조들을 적시에 해석해 충격의 연착륙이 가능한 해법을 내놓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멋진 신세계의 문턱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가 그러하듯, 인공지능이 가져올 신세계가 마냥 멋지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교수님의 고민부터가 그러하다. 인공지능이 만든 결과물의 가치가 누구의 소유로 귀속되는지부터 의문이다. 딥러닝 인공지능이 학습을 위해 습득하는 데이터의 저작권 또한 문제다. 기자의 이 글 역시 상당 부분을 챗GPT가 만든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그것은 표절인가? 표절이라면 기자는 누구의 창작물을 표절한 것인가? 챗GPT를 표절한 것인가? 챗GPT가 습득한 학습데이터를 표절한 것인가? 당장은 애써 시비거리나 찾는 할 일 없는 공상가의 딴지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닥칠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고민은 따로 있다. 기자가 기사 작성이라는 업무를 인공지능에게 떠넘길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오늘 이 칼럼도 챗GPT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밥이라도 사야할 판이다. 그런데 기자가 아닌 기자의 회사가 기사 작성의 업무를 인공지능에 맡긴다면? 기자는 일자리를 잃는다. 수많은 역할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경우 맞닥뜨릴 고용 불안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인공지능 시대의 가장 큰 화두일 테다. 그 해결 방안까지 챗GPT에 물어볼 순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개발만큼이나 그에 걸맞은 제도적 윤리적 틀과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 시급한 이유다.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도 플라톤의 글 없이는 이데아를 논할 수 없다. 결국 인간의 지혜가 답이다.
2023-03-1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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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의사 찾아 삼만리'…의료불모지 경남
인간의 요구와 욕구에 대한 간절함을 떠올리는 동화 ‘엄마 찾아 삼만리’.
이 동화는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단편 ‘아펜니노에서 안데스까지’를 번역한 것이다. 9살 소년이 돈 벌러 떠난 엄마를 찾아 이탈리아 ‘아펜니노산맥’ 끝자락 항구도시 제노바에서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안데스산맥’까지 무려 1만 2000km를 다니며 겪게 되는 역경을 소개한다. 최근 경남에 이 같은 간절함만큼이나 절실한 것이 ‘의사 모시기’다. 공공병원은 물론 사설 병원에서도 의사 구하기에 혈안이다. 인구 3만 4000여명의 농촌 지자체인 산청군은 내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 12개월째 허송세월하고 있다. 산청군보건의료원은 지난해 4월 내과 전문 공중보건의 복무기간이 만료됐지만 최근까지 후임자를 받지 못했다. 그동안 3차례에 걸친 내과 전문의 채용면접에서 적임자가 없어 4차 모집공고를 내놓은 상태다. 채용 조건은 연봉 3억 6000만 원에 계약 기간 2년,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 등으로 타 지역 공공의료원보다 대우가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령인구가 대부분인 주민들은 공공병원인 산청군보건의료원 의료서비스에 의존하고 싶지만, 정작 의사가 없다. 진료를 받기위해 종합병원과 대학병원이 있는 인근 진주시로 원정을 가야한다. 농촌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의료비에다 원정 교통비까지 지불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사설 병원도 의사모집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남에서 유일하게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창원에서조차 의사 구하기는 어렵다. 창원지역 한 종합병원은 7개 진료과를 갖춘 또 다른 소규모 병원을 개원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수백억 원을 들여 건물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올해 3월 초 개원 목표로 추진했지만 최근 연기 결정을 내렸다. 건물 리모델링과 간호사, 행정인력 등 모든 조건을 갖췄지만 의사 확보가 문제였다. 15~20명 의사가 필요했지만 지원 인력은 1~2명에 불과했다는 후문이다.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요양병원도 의사 모집에 혈안이다. 창원에서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A 씨는 “연봉 15%를 인상한 상태에서 의사모집 공고 5개월만에 겨우 1명 구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5개월동안 원장을 비롯한 의사 4명이 늘어난 야간당직으로 생지옥을 경험했다”면서 “의사 확보가 병원운영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고 지적했다.
경남도내 의사부족은 객관적 수치로 입증되고 있다. 경남에는 인구 10만 명당 의대 정원이 2.3명으로 전국 평균 3분의 1에 불과하다. 경남도와 18개 시·군이 필수 의료서비스 제공 격차를 줄이기 위해 공공병원 신축을 추진하고 있지만, 의사 인력을 공급하는 의대 정원은 진주에 있는 경상국립대학교 76명이 전부다. 경남의 인구 절반에 못 미치는 153만인 강원도는 4곳 의대에서 267명을 배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경남도내 18개 시·군 가운데 14개 지역이 응급의료취약지역으로 지정될만큼, 의료공백이 심각하다.
지역과 수도권 의료격차도 크지만, 지역간 불균형도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 가운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의과대학이 없는 곳이 창원시다. 창원시는 최근 ‘창원 의과대학 유치 기획단’을 구성해 활동에 착수했다. 오는 27일에는 경남도와 창원시가 국회에서 ‘창원 의과대학 유치’ 토론회까지 계획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창원을 중심으로 의과대학 유치 등 의료인력 확충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상태다.
의료인력 확충을 공약으로 걸었던 박완수 도지사는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의대 유치는 지역에서 오래 논의한 문제로, 경상대 의대 정원이 확대되고, 창원에 의대가 들어서는 두 가지가 이뤄지면 좋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경남도는 지난해부터 의대 유치 등 의료인력 확충을 위해 ‘의과대학 설치 TF’를 운영 중이다. 의과대학 설치에 대한 간절함이 경남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지만 성사 여부는 미지수다.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 방침이 지역 간, 이해 당사자 간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창원지역 의대 설립에 대한 열망이 뜨거워지는 가운데 찬물을 끼얹는 언사도 나왔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이 지난달 서울지역 언론 인터뷰에서 “정년 퇴직한 의대 교수 등 ‘시니어 의사’의 활용을 제안한다”고 대답했다. ‘지방에 의사가 모자란 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시니어 의사’는 일시적 해소방안이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이 회장에게 의료서비스 확충에 대한 경남도민의 간절함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2023-03-0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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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저평가된 삶은 없다
고준위 방폐장 문제로 전국이 뜨겁습니다. 고준위 방폐장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를 쌓아두는 저장시설입니다. 강한 열과 방사능 때문에 10만 년 이상 인간 세상과 접촉을 차단해야 하는 게 사용후 핵연료지요.
원자력 업계가 이 난제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원전 내에 저장시설이 포화됐습니다. 부산과 가까운 고리원전만 해도 사용후 핵연료 포화율이 86%에 육박합니다.
수도권 언론은 연일 ‘한계 임박’, ‘지역 반발’ 등의 논조로 기사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참 우습지요, 그 심각한 기사들 어디에도 고준위 방폐장을 어디에 둘지 따져보자는 기사가 없습니다. 은근히 원전 지역이 방폐장까지도 떠안아야 하지 않느냐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부산과 울산, 경남은 이미 수십 년간 원자력 발전의 리스크에 시달려 왔습니다. 사용후 핵연료까지 떠안겠다고 한 적도 없고요.
전기요금 폭탄이 떨어진 서울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친원전 정책으로 환원하길 잘했다’며 환영일색입니다. 연간 전력 자급률이 10%도 되지 않는 서울에서야 원전이 가동되든, 되지 않든 전기요금만 내려간다면 반가울 테지요.
그러나 전기요금 차등제 시행에는 입을 닫고, 방폐장은 나몰라라 하는 게 서울과 수도권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부산과 기타 등등’의 심정은 어떨까요. 상경한 형님 대신 정성껏 부모 봉양했더니 제사까지 떠안게 된 동생이 이런 심정일까요.
그 와중에 우주항공청을 둘러싼 또 다른 촌극은 더욱 입맛을 쓰게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정부는 연내에 경남 사천에 우주항공청을 개청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대뜸 업계에서 공약에 반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해 여론의 뭇매를 자초합니다.
국가우주정책센터가 전문가 100인을 상대로 우주항공청 입지 설문 조사를 해서 ‘행정부처와 정부연구기관이 모여 있는 대전·세종권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67%로 나왔다고 발표한 겁니다. 사실상 산업은행 갈등 ‘시즌2’입니다.
주무 부처인 과기부가 공약에 맞춰 우주항공청 입지를 사천으로 못 박고 특별법까지 입법예고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산하 기관이 입지를 되묻는 설문 결과가 진행했다는 건 항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슬 퍼런 정권 초기에 일개 과기부 산하 기관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용산에 보란 듯이 항명 했으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응, 그래도 나는 못 내려간다’는 공무원 조직 전반에 깔린 반(反)지역 정서가 그 뒷배라면 뒷배겠지요.
난데없이 산업팀장이 원전이니 대통령 공약이니 입에 올리는 건 한 자산운용사 대표를 만난 일이 떠올라서 입니다.
여의도에서 근무하던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굳이 투자처도 많고 자금 조달도 쉬운 서울을 두고 고향에 왔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부산이 우량업체가 많은데 저평가 되어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여의도에서 전화만 돌려 뻔한 리포트를 올리기보다 부산에서 발품 판 기업평가를 하겠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부산이 구닥다리 제조업 위주라 빠르게 바뀌는 산업 트렌드를 못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본 부산은 외려 알짜 기업이 충분한 도시였던 겁니다.
돌아오는 길에 따져 보니 어쩌면 ‘노인과 바다’라는 부산의 현실이 여러 가지 리스크와 부정적인 평가가 뒤범벅 되어 태어난 허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리스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로 인한 저평가로 필요 이상의 자책을 해 온 건 아닐까요.
부산이 대외적인 평가에 좀더 당당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배짱도 생겨났습니다.
당장 고준위 방폐장 논란에서도 부산은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입니다. 양보하고 물러설 이유가 없습니다. 수익자 부담 원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식 아니었습니까.
방폐장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면 응당 서울과 수도권을 포함해 전국의 모든 지역이 예비 대상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주항공청을 비롯해 산업은행까지 공공기관 이전 이슈에서도 지역은 어깨를 펴야 합니다. ‘촌동네 욕심’이 아니라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대승적 판단입니다. 이전 기관 임직원에게는 따뜻한 포용력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러나 지역을 폄하하며 이전 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은 단호히 응징해야 합니다.
부산 사람이고, 부산 기업이고 저평가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2023-03-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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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양산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 해결되나?
기자는 경남 양산시의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가 시급하다는 기사와 칼럼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한 칼럼에서는 사례 소개와 함께 ‘흩어진 양산 관할 행정기관, 더 이상 방치 안 된다(2018년 3월 5일 자)’고 지적했다.
또 다른 칼럼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양산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 공동 공약 채택 어떨까(2020년 3월 30일 자)’라며 당시 총선 출마자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최근 권혁준(양산 4) 도의원이 자유발언을 통해 “양산시의 행정구역은 경남이지만, 법원과 보훈 행정은 울산관할이다. 경남도민으로서 소속감이 떨어지고 도정에 대한 신뢰도마저 상실할 우려가 있다”면서 양산시의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 문제를 또다시 제기하고 나섰다.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화답했다. 그는 실국본부장 회의에서 “양산이 경남이지, 부산이냐”며 관할구역 불일치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지시했다. 그는 또 “양산시의 관할구역 불일치 문제는 경남의 오랜 숙제”라며 “도청이 이걸 방치하는 것은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양산이 경남 행정구역임을 인식하도록 TF팀을 구성해 정부와 협력할 것”을 주문했다.
경남도는 행정부지사를 총괄 단장으로 도와 양산시, 경남연구원이 함께 TF팀을 만들었다. 도지사와 경남도가 관심을 두고 TF팀까지 구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TF팀은 양산 방송권역 일원화와 법원·보훈기관 접근성 개선, 법기 수원지 소유권 문제를 우선 과제로 선정했다. 행정서비스 권역 불일치로 인한 주민 불편 사항이 있다면 과제에 포함해 논의하기로 했다.
양산 인구는 35만 3000명으로 경남 18개 시·군 중에서 창원과 김해에 이어 세 번째다. 예산도 1조 7000억 원을 넘어서는 중견 도시로, 이곳을 관할하는 행정기관은 경남도청이다. 경찰과 병무, 교육, 소방 역시 경남지역 경찰청과 병무청, 교육청, 소방본부에서 담당한다.
그런데 양산경찰서의 수사 지휘와 보훈 업무는 울산지검과 울산보훈지청의 지시를 받는다. 고소·고발 사건이나 소송 등 법원과 검찰 관련 민원도 울산지법과 울산지검에서 맡고 있다. 지역방위협의회와 전기는 부산의 육군 53사단과 한전 부산지사가 관할한다. 선거관리위는 경남도 선거관리위에 속하지만, 울산지방법원 판사가 위원장을 맡는다. 이 때문에 주민들이 관련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부산이나 울산, 경남으로 가야 하는 시간적·경제적 불편을 겪고 있다.
방송권역은 더욱 심각하다. 지역과 가구별로 다른 권역 지상파 방송을 시청하기 때문이다. 한 집에서 KBS는 창원, MBC는 부산권역 방송이 나오는 사례도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거 때면 후보자 TV 토론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관련 민원도 속출하고 있다.
양산시는 1990년대부터 정부에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를 요구했지만, 2018년 4월 양산세무서가 문을 열면서 세무 행정만 해결됐을 뿐이다. 양산시는 신도시를 중심으로 인구의 85% 이상이 부산이나 울산 등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외지인이어서 소속감이나, 애향심 같은 문제는 심각하다. 양산시는 시민들의 소속감과 애향심을 심어주기 위해 축제나 체육대회 등을 수시로 개최하고 있지만, 해결은 쉽지 않다. 불편 해소가 안 되다 보니 양산 시민들은 수시로 경남도의 홀대론을 제기하거나 선거를 앞두고 부산·울산 편입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경남도가 30여 년 만에 양산시의 행정기관 관할 일원화 방안 마련을 지시하고 TF팀이 실무작업에 들어간 만큼 양산시민들이 거는 관심도 기대 이상이다.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 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풀어야 할 숙제도 찾을 수 있을 것이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걱정도 있다. 당장 성과를 내기 위해 무조건 경남도청 소재지로 행정기관을 모으면 양산시민들의 또 다른 불편이 예상된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민 편익 향상이 되는 방향으로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양산세무서 설치가 좋은 사례다. 가능하면 양산을 관할하는 행정기관을 양산지역에 설치(신설)하는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다. 물론 기관 설치 비용 부담과 중앙정부와의 협의 등 실무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도 많을 것이다. 문제 해결에는 양산시보다 경남도의 역할과 노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성과를 보일 때 양산에서는 경남도 홀대론과 부산·울산 편입설이 사그라지고 양산시민이라는 연대감과 도시 경쟁력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
2023-03-0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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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스포츠의 기본은 체력이다!
한국 양대 프로 스포츠의 계절이 돌아왔다. 프로축구 K리그1이 25일 울산 현대와 전북 현대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2023시즌 막을 올렸고, K리그2가 삼일절인 내일 첫판을 펼친다. 프로야구 KBO리그는 4월 1일 개막하나, 앞서 3월 9일 ‘야구 월드컵’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사실상 새 시즌의 출발을 알린다.
부산 연고 프로야구·축구 팀인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아이파크는 지난 시즌 나란히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롯데는 64승 4무 76패(승률 0.457)로 정규리그 8위에 그쳤고, 부산은 9승 9무 22패(승점 36)로 2부리그인 K리그2 11개 팀 중 꼴찌를 겨우 면한 10위로 추락했다.
두 팀의 부진은 지난 한 해에 머물지 않는다. 롯데는 2017년 정규리그 ‘반짝 3위’로 가을야구에 진출한 이후 5시즌 연속 하위권에 처졌다. 7-10-7-8-8.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롯데가 남긴 성적이다.
부산도 만만치 않다. 2015시즌 K리그1에서 K리그2로 강등된 부산은 5년 만인 2019시즌 K리그1에 승격했다. 하지만 2020년 K리그1 무대를 밟은 지 단 한 시즌 만에 꼴찌로 전락, 2부리그로 다시 강등됐다. 2021시즌 K리그2 5위(12승 9무 15패·승점 45)에 그치더니, 지난 시즌엔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절치부심, 새 시즌을 앞두고 두 팀은 나란히 전력 강화에 열을 올렸다. 선수 보강과 함께 두 팀이 꺼내 든 카드는 ‘체력 강화’였다. 부산과 롯데의 두 사령탑은 공교롭게도 거듭된 성적 부진의 원인을 체력적인 한계에서 찾았다.
지난해 중반 긴급히 부산 지휘봉을 잡은 박진섭 감독은 “지난 시즌 부산은 경기 시간 70분이 지나면 체력이 급격히 방전됐다. 이 때문에 후반 막판 실점이 많아지고, 득점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이런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 경기가 지난해 2월 27일 경남FC전, 5월 17일 대전하나시티전이었다. 부산은 두 경기 모두 2-0, 3-0으로 앞서다 후반 막판 연속골을 얻어맞으며 각각 2-3, 3-4로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했다. 한 시즌에 이런 대역전패를 두 번이나 당하면 선수들의 정신적인 내상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롯데도 매 시즌 초반 잘나가다 여름과 후반기를 넘어가면 성적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늘 ‘봄데’였다. 지난 시즌도 4월 한 달간 2위에 올랐다가 결국 8위로 끝나 버렸다.
지난해 연말 끝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팀 중 하나가 크로아티아였다. 크로아티아는 조별리그에서 단 1승(2무)만 거두고 토너먼트에 올라 일본과의 16강전, 브라질과 8강전을 연거푸 승부차기로 이겨 4강에 진출했다.
이는 앞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이어진 전통(?)이었다. 크로아티아는 러시아 대회 때도 16강전(덴마크전), 8강전(러시아전)을 승부차기로 이겼고, 잉글랜드와의 4강전은 연장 끝에 2-1로 승리해 결승까지 올랐다. 크로아티아는 월드컵 두 대회에서 연장 혈투만 5차례 치러 모두 이겨 내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줬다.
크로아티아의 승리 비결은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었다. 크로아티아 선수들은 연장 120분 이상을 뛰고도 다음 경기에서 오뚝이처럼 살아났다.
돌이켜보면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 신화’를 이룬 바탕도 체력이었다. 당시 한국도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연장 골든골(2-1)로 꺾었고, 8강전에선 스페인을 승부차기 끝에 이겨 4강에 올랐다.
한국 대표팀을 맡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가장 강조한 게 체력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전후반 내내 달릴 수 있는 체력을 중요시했고, 체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강도 높은 파워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강한 체력은 덩치 큰 유럽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경기력의 바탕이 됐다.
드라마 ‘미생’에서 바둑 스승은 어린 주인공에게 이런 가르침을 전한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대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스포츠나 공부나 가장 기본은 체력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나 전술이라도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써먹을 수 없다. 끈기와 근성 같은 정신력도 체력이 받쳐 줘야 발휘되는 법. 부산과 롯데는 부진 탈출의 해법으로 가장 기본인 ‘체력 강화’를 짚었다. 그리고 동계훈련 기간 태국에서, 괌에서 어느 때보다 고강도 훈련을 소화하며 체력을 길렀다. 이제 그 결과물을 내놓을 때가 다가왔다.
2023-02-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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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국민 안전에 기우는 없다
해양수산부 장관이 국회에서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확산 시뮬레이션 결과가 정부 공식 입장이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현재 확보된 자료를 토대로 한 기초 연구일 뿐이고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앞서 정부가 오염수 대응 범정부TF를 통해 예고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 결과라는 걸 고려하면 무책임한 답변이다. 이르면 4월 방류가 예고된 시점에서 여전히 오염수 농도 같은 핵심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한 것 자체가 소극적 대응의 결과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번 연구를 포함해 국내외 연구기관의 원전 오염수의 해양 확산 시뮬레이션 결과는 대체로 비슷하다. 오염수가 4~5년이면 국내 해역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유입 시점의 방사능 물질은 허용 기준치 이하라 안전성을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모든 연구가 실제 오염수가 아니라 일본 측 방류 계획상의 일방적인 자료에 근거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원전 오염수 대응은 과학에 기반해야 한다는 주장은 맞는다. 그럴수록 방류 전에 오염수의 안전성이 철저히 검증돼야 한다. 현실은, 아직까지 오염수의 정체는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다. 후쿠시마 원전의 운영사인 도쿄전력은 다핵종제거설비(ALPS)로 62종의 오염물질을 거르고 걸러지지 않는 삼중수소는 기준치 이하로 희석시켜 130만t의 오염수를 30년 동안 태평양에 흘려보낸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다핵종제거설비의 성능과 희석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호주 등 18개국이 속한 태평양제도포럼(PIF) 요청으로 도쿄전력의 오염수 데이터를 검토한 미국의 핵 물리학자는 “계획적이고 통제된 방법이라는 의미의 ‘방류’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부적절해보인다”고 비판했다.
선박이 빈 화물칸에 채워오는 평형수 문제도 있다. 최근 5년간 후쿠시마와 인근 6개 현 해역에서 퍼담은 평형수 수백만 t이 우리 해역에 섞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무엇보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불확실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확률이 낮다는 말은 충분하지 않다.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장 수산업은 궤멸 수준의 타격을 우려한다. 제주연구원이 지난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오염수가 방류될 경우 국내 수산물 소비는 46.7%, 제주도 내 관광 소비는 29% 정도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 수산업과 관광업의 비중이 높은 부산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는 한국을 포함해 11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성 검증 결과를 기다린다는 입장이다. 최종 보고서는 이르면 이달 중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방류에 임박한 발표 시점이나 기존의 IAEA의 입장으로 미뤄 방류를 기정 사실로 하는 결론일 가능성이 높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능 오염수가 생기기 시작한 게 12년 전, 도쿄전력이 해양 방류 계획을 발표한 건 2년 전이다. 그동안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정부의 대응은 별반 나아간 것이 없다. 일본의 방류 결정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국제해양법재판소 제소를 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결국 말뿐이었다. 가처분소송과 비슷하게 방류를 일단 중단시키는 ‘잠정조치’를 요청할 시점도 이미 한참 지났다. 소극적인 대응이 이번 정부 들어 강화된 친원전 기조나 ‘저자세’의 대일 외교 때문이 아니냐는 비판까지 나온다. 이런 비판이 사실이라면 논점이 잘못된 것이다. 이 문제는 친원전 탈원전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안전의 문제이고, 한일 문제가 아니라 국제 문제이기 때문이다.
숫자만 붙들고 있어서는 어떤 피해도 막지 못한다. 600년 만에 한 번 있는 강도의 대지진과 쓰나미로 원전 방호벽을 넘어 방사능이 유출될 확률은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후쿠시마 주민들과 어민들 앞에서 의미가 없는 숫자일 뿐이다. 고리원전이 있는 부산 기장군에서 한 집안에 6명이 암 환자가 된 ‘균도네’에게 원전의 안전성을 외쳐봐야 위로가 될 리 없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잠실야구장에서 야구공을 맞을 확률과 하필 맞은 사람이 어린이일 확률을 비유로 든다. 아무리 가능성이 낮더라도 피해가 치명적이라면 어떤 걱정도 기우일 수 없다.
정부는 사후 대책이라도 제대로 내놓아야 한다. 적극성과 투명성이 관건이다. 지금까지 깜깜이였던 범정부TF의 활동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부터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은 정부의 구체적인 노력을 따져묻고 알 권리가 있다. 지금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실제 방류 상황과 피해에 대한 정부의 발표도 신뢰받기 어렵다. 주변국과 협력하는 정교한 외교 전략도 시급하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에 무한한 책임이 있다.
2023-02-2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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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낙동강 ‘독수리 식당’이 전하는 말
도시 바깥쪽으로 걷다 보면 산과 들도 만나고 크고 작은 물길도 만난다. 산과 들 주변의 얕은 개울은 물론 강과 같은 제법 큰 하천 주변에서는 야생 동물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흔적은 물길이 만든 모래톱 위에 발자국 형태로 남은 경우가 많다. 발자국의 주인공인 고라니, 너구리, 뭇새 등 야생의 생명들은 인적이 사라진 시간이면 모래톱을 찾아와 목을 축이고 휴식을 취한다. 지형에 따른 물의 유속 차이 때문에 형성된 모래톱은 단순한 퇴적물이 아니라 야생 동물이 물길에 쉽게 접근하도록 완충 역할을 하는 생명의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모래톱은 개발 때문에 많이 사라졌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구불구불한 물길을 직선으로 펴고, 하천 본래의 바닥 기울기와 생태계 등을 완전히 무시한 천편일률적인 하천 정비 공사가 한때 유행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대다수 물길은 제각각 갖고 있던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 물길에 깃든 생물들의 생태 균형과 평화도 파괴됐다. 그 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시멘트를 걷어내고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노력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인간이 일방적으로 파괴한 자연과의 공존 균형은 여전히 제대로 회복되지 않고 있다.
공존은 언제나 쉽지 않다.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 계층과 계층의 가치관과 입장 차이가 확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상대를 평가하다 보면 공존은커녕 갈등만 키운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특히 더 어렵다. 자연은 직접적으로 항의하지도,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도, 집회를 열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로 생태 분야의 공존 파괴 현상은 죄의식이나 반성조차 없이 자행된다는 특성을 갖는다. 더욱이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을 일방적으로 무너뜨리면서도 수자원 확보, 재해 예방 등의 명분을 달아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했다. 자연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공존 파괴 행위가 계속되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최근 낙동강 합천창녕보의 수문이 닫혔다. 농지에 물을 대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차게 흐르던 물길은 수문에 가로막혔다. 수위가 상승하면서, 수문 개방 이후 형성된 드넓은 모래톱들은 물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 모래톱들은 온갖 야생 동물들의 안식처였다. 호사비오리, 흰꼬리수리, 원앙 등 얕은 물가에서 먹이를 구하는 습성을 가진 희귀 조류들이 이곳에서 쉬거나 사냥하며 삶을 이어갔다. 모래톱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독수리들에게 먹이를 공급하는 이른바 ‘독수리 식당’ 역할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은 독수리 등 야생 생물들은 파괴된 일상의 상처를 어느 곳에서 추스리고 있을까. 농번기도 아닌 이 차가운 계절에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것이 그렇게 시급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이어지고 있다. 수문 폐쇄 시기를 최대한 늦추거나 취수구 높이 조정 등 제3의 대안을 모색하는 한층 더 특별한 공존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유사한 일은 비일비재하다. 낙동강은 철새들의 낙원이다. 쇠제비갈매기는 낙동강 하구를 찾는 대표적인 여름철새로 꼽힌다. 이들은 4월 초부터 도요등, 신자도 등 낙동강 하구의 모래톱을 찾아 산란하고 새끼를 키운 뒤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쇠제비갈매기들은 한동안 낙동강 하구를 찾지 않았다. 번식 습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산란기에 모래톱 일대를 청소하는 등 서식지 교란 행위 등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낙동강 하구를 떠난 쇠제비갈매기 집단의 일부는 경북 동해안의 모래밭으로 번식지를 옮겼다. 하지만 오토바이들이 쇠제비갈매기들의 번식지인 해변 백사장을 돌아다니며 둥지와 알을 고의적으로 파손되는 등 수난은 계속됐다. 사진 촬영을 위해 둥지를 훼손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쇠제비갈매기 새끼의 다리에 줄을 묶어 연출 사진을 찍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노력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공존은 공감을 필요로 한다. 공감의 본질은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공존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정확하게 알고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언어로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서는 한층 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수문을 닫아버리면 낙동강의 평화는 끝이다. 모래톱은 수장될 것이고 강은 6m 이상의 깊이로 깊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생명도 강에 접근할 수 없다. 이 겨울 한 철이라도 더불어 사는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합천창녕보 수문 폐쇄를 안타까워하던 환경단체들의 성명서에 담긴 한 구절이다. 공존을 위한 최선의 방안은 그냥 찾아지지 않는다.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한층 더 특별하고도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2023-02-2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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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지난 주말 해안 갈맷길을 걸었다. 금정산을 낀 동네에 살지만, 바다는 늘 동경의 대상. 차를 두고 도시철도와 동해선 열차를 이용해 월내역에 도착해 인근의 임랑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름도 예쁜 해맞이로를 따라가니 해변이 나왔다. 대부분의 부산 바닷가와 달리 이곳은 개발이 덜 된 덕에 제법 고즈넉한 운치마저 느껴졌다.
임랑해수욕장을 우선 찾은 이유는 ‘욜로 갈맷길’ 때문이다. 부산에는 이미 9개 코스 278.8km에 달하는 ‘갈맷길’이 조성돼 있다. 이 중 대중교통과 연계성이 좋고 걷기에도 크게 부담이 없는 100km 구간을 10개 코스로 다시 추린 것이 욜로 갈맷길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 후회 없이 즐기며 살자는 뜻의 욜로(You Only Live Once)는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행복을 찾아 누리자는 삶의 태도를 일컫는다. 여기에 경상도 방언인 욜로(이리로)를 덧붙여 지은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욜로 갈맷길은 코스별로 10km 안팎으로 3시간 정도면 완주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기존 갈맷길 중 해안코스 7개와 강변코스 1개, 산행코스 2개 등 10개 코스를 욜로 갈맷길로 선별, 3월부터 본격 마케팅을 통해 생활 속 걷기 문화의 새 붐을 일으키려는 게 부산시의 구상이라고 한다. 부산의 상징 새 갈매기에 길을 붙여 ‘갈맷길’을 조성한 게 2009년 무렵이니 벌써 15년이 흘렀다. 욜로 갈맷길은 기존 갈맷길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자 시즌 2인 셈이다.
임랑해수욕장에서 일광해수욕장 간 9.1km 구간이 욜로 갈맷길 1코스다. ‘갈맷길 더 비기닝’이라는 그럴듯한 이름도 가졌다. 일을 핑계 삼아 평소 운동과 거리를 꽤 뒀던 ‘초보’로서 선뜻 길을 나선 데에는 ‘비기닝’이라는 부담 없는 이름도 작용했다.
너무 쉽게 나선 탓일까. 수려한 부산의 해안 풍경을 즐기며 완보하려는 욕심은 시작부터 난관을 만났다. 임랑해수욕장 끝에서 시작한 산책로가 곧 도로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바닷가 낭만은 사라지고 한동안 스쳐 지나가는 차량 행렬 눈치를 보며 부담스럽게 걸어야 했다. 이기대 수변공원 주변으로 조성된 해안 산책로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을까.
20분 남짓 고행을 끝내고서야 다시 해안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중동항을 지나고 붕장어(아나고)로 유명한 칠암항에 이르자 방파제 너머 나란히 서 있는 등대들이 반겼다. 붕장어와 갈매기, 야구를 형상화한 등대들은 ‘여기가 마 부산아이가’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비록 인공 건축물이지만, 다른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날것 그대로 부산의 이미지를 보여 주는 현장이다. 이어진 신평소공원에는 범선 모양의 전망대가 있었다. 눈 아래 펼쳐진 바다에는 공들여 새긴 듯 뚜렷한 지형의 변화를 볼 수 있는 퇴적층이 파도와 싸우고 있었다.
조금 전 느낀 불편을 잊을 무렵 다시 고행의 길이 시작됐다. 온정마을에서 이동항 간 약 2km 구간 역시 일광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발을 옮겨야 했다. 군데군데 난간이 있는 나무 덱 길을 조성해 보행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지만, ‘욜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길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동항에서 일광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의 언덕길 역시 마찬가지. 특히 어둑어둑 해 질 무렵 달려오는 차량의 전조등을 속절없이 마주해야 하는 점은 크게 아쉬웠다.
3시간 남짓 산책을 마치고 일광역에서 열차에 몸을 실었다. 평소 안 하던 운동을 감행한 뒤 느낄 법한 뿌듯함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부추김에 동행한 이의 눈치를 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평소 불평을 자주 하는 탓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프로 불만러’라는 핀잔을 종종 듣는다. 누군 누그러뜨려 ‘기자답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그날 산책이 부산에 산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진 기회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부산을 사랑하는 ‘불만러’로서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점 역시 명확히 하고 싶다. 이동이 쉽지 않은 코스뿐만 아니라 미흡한 관리실태도 제법 눈에 밟혔다. 지난해 9월 들이닥친 태풍 힌남노의 심술이라 짐작되는 상처마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기도 했다.
부산시와 일선 구·군이 2030세계박람회 유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다. 4월 예정된 국제박람회기구 실사단 방문 대비만 해도 벅찬 실정이리라. 그래도 프로 불만러로서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다. 소시민의 작은 불만을 살피다 보면 큰일을 그르치는 위험도 줄어들 것이라 믿으니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2023-02-1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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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어떤 아트 토크
토크 1. 평범한 주말 저녁 집에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 중 한 명이 TV 프로그램 ‘예썰의전당’ 박수근 편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질감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 그림 속 고목이 품고 있는 초록빛에서 시작해 ‘시대를 반영하는 그림’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난해 부산비엔날레에서 주목받은 1938년생 오우암 작가가 있다고 하자 가족들은 바로 이미지 검색에 들어갔다. 한국전쟁 전후 삶의 모습을 자신만의 색채로 담아낸 작품을 보며 누군가 말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그림, 작가의 경험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80대 어머니까지 가세한 뜻밖의 토크에서 ‘일상 가까이 들어온 미술’의 존재를 실감했다.
미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미술시장에는 아트테크 광풍이 불었다. 아트페어나 전시장 입구에는 ‘오픈런’ 대기 줄이 늘어섰고, 뜬다 싶은 작가의 그림은 나오는 대로 사겠다는 예약 전화가 줄을 이었다. 하반기부터는 확 달라졌다. ‘그림만 걸면 팔리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뜨겁게 끓어오른 미술시장은 냉각기에 들어섰다. 이런 시장 분위기와 달리 ‘미술 자체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상승선을 그리고 있다. 특히 대형 기획전을 중심으로 미술관 관람객의 증가세가 두드러진다.
부산시립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은 총 7만 7203명이 관람했다. 한국 근현대 미술 대표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는 매번 회차별 관람 인원 숫자를 꽉 채웠다. 전시 막바지에는 현장 예매 대기자가 로비를 가득 메우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세계적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전도 전국 관람객을 부산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전시 개막 이후 관람객 숫자가 4만 명에 육박한다. 리움미술관의 ‘마우리치오 카텔란’전도 예매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술관 관람 열기는 유명 작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3개 기획전에 대한 관람객 반응도 뜨겁다. 특히 미술관 개관 이후 첫 어린이 전시인 ‘포스트모던 어린이’는 누적 관람객 수가 6만 3000명을 넘어섰다. 생애 처음으로 미술관 전시를 관람했다는 어르신, 보고 싶은 전시를 찾아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 아이 손잡고 찾아오는 부모까지 과거에 비해 미술관을 방문하는 세대와 계층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토크 2. 전시를 마친 한 기획자를 배웅하는 자리였다. 전시 결과와 함께 새로운 관점을 촉발하는 미술 이야기가 나왔다. 기획자는 컨테이너선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 문제와 환경 문제를 다룬 작품을 본 관람객이 ‘해상운송 회사의 주주로서 책임감’을 언급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세상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나 생각이 작품을 통해 보는 이에게 가 닿은 것이다. 전시는 작가 또는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낸다. 어떤 전시를 계기로 그림이 좋아지거나, 작가가 궁금해질 수 있다. 또 자신도 모르던 자기 속의 감정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모임에 동석한 이가 말했다. “어떤 시대를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시대의 향기·냄새·질감 등을 가시화한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대를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경험하는 만큼, 아는 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린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알면 더 잘 즐길 수 있다. 당장 서점만 가도 미술사 서적부터 시대·장르별 작가와 작품 해설서, 아트투어와 아트테크 가이드,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서까지 미술 관련 책이 넘친다. 문화회관·문화센터의 미술 관련 강좌 참가자도 꾸준히 늘어난다. 도슨트 진행 시간이 되면 100명 이상이 몰릴 정도로 ‘작품 제대로 이해하기’에 대한 열망도 뜨겁다.
토크 3.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개막일 현장에서 만난 청소년과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친구들과 같이 왔다는 한 중학생이 말했다. “완전히 이해는 하지 못해도,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어떤 느낌을 받았다.” 예술을 접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반응. 이것이 바로 미술을 즐기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색이 좋아서, 묘한 감정이 들어서 미술에 관심이 생긴다.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내 그림 취향을 발견하고 ‘내 마음에 저장’하는 작가 목록도 만들어진다. 미술관을 찾아도 좋고 가까운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도 좋다. 좀 더 적극적으로 대안공간이나 신생공간을 탐험해도 된다. 전시장 입장이 어색하다면 아트페어 현장 방문도 괜찮다. 미술계의 여러 현장. 그 어딘가에 당신이 좋아하게 될 그림과의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23-02-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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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테슬라의 두 얼굴
테슬라는 ‘자동차 업계의 애플’로 불린다. 아이폰으로 전세계 휴대폰 시장을 뒤흔들었던 애플처럼 테슬라도 전기차로 자동차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천재 CEO도 닮은꼴이다. 애플에 스티브 잡스가 있었다면 테슬라엔 일론 머스크가 있다.
2007년 잡스는 삼성, 노키아의 2G 피처폰과 블랙베리 등의 자판식 휴대폰이 판치던 업계에 3.5인치 디스플레이에 홈버튼 하나만 있는 스마트폰을 들고나왔다. 그 안에 자판부터 앱 등 모든 소스가 들어가 있었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디자인은 스마트폰의 표준이 돼버렸다. 단순하고 깔끔하면서도 사용성을 대폭 끌어올린 아이폰처럼 테슬라도 단순함을 통한 혁신을 내세웠다. 실내에는 모니터 하나만 달랑 있고, 공조와 오디오, 네비게이션 조작을 위한 버튼이 없다. 시동버튼도 없다.
애프터서비스(AS) 방식도 기존에는 AS센터로 가서 수리했지만 테슬라는 아이폰처럼 OTA(무선업데이트)를 통해 시스템 업그레이드와 AS까지 해주고 있다. 거기에 긴 충전거리까지 내세우며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이 전기차 출시를 본격화하기도 전에 시장을 장악했고, 글로벌 기업 가운데 주식 시가총액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용접 대신 한 번에 차체를 찍어내는 ‘기가프레스’로 대표되는 제조 혁신, 온라인 전용 판매 등을 통해 자동차 업계 사상 최고 수준의 마진율을 확보한 것도 업계를 놀라게했다. 지난해 글로벌 판매 1위 토요타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현대차그룹의 영업이익률은 10%를 밑도는 반면 테슬라는 16.8%에 달했다.
이처럼 자동차 혁신의 아이콘이 된 테슬라이지만 그 이면은 혁신과는 거리가 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부당 광고와 주문취소 방해 혐의 등으로 28억 원 과징금 처분을 받은 것이다. 여러차례 가격을 인상하고 늑장 AS로 소비자 불만이 높았던 상황에서 이 같은 행태까지 드러난 것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테슬라는 국내 홈페이지에서 자사 전기차의 주행가능 거리, 수퍼차저 충전 성능, 연료비 절감 금액에 대해 거짓, 과장, 기만 등으로 사실과 다르게 광고했다.
테슬라가 2019년 8월 16일부터 최근까지 국내 홈페이지에 ‘1회 충전으로 528km 이상 주행 가능’이라고 했는데, 이는 상온(섭씨20~30도)·도심 도로 등 특정 환경에서만 가능한 거리였다. 실제 대부분 주행 조건에서는 광고보다 주행거리가 짧았다. 특히 온도가 낮은 도심 도로에서 측정한 주행거리는 광고에 견줘 최대 50.5%까지 줄었다.
공정위는 또 테슬라의 연료비 절감 금액 광고에도 기만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테슬라는 여기에 주문을 취소한 소비자에게 10만 원의 위약금을 징수했고, 온라인으로 주문을 취소할 수 없게 했다고 한다. 고객이 왕 내지 갑이 아니라 테슬라가 갑질을 한 셈이다.
이뿐만 아니다. 테슬라코리아의 경우 국내 진출한 다른 수입차들과 달리 기부 등 사회공헌활동은 전무한 모습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나타난 테슬라코리아 감사보고서에는 기부항목이 아예 없다. 2021년 기준으로 테슬라코리아와 매출이 비슷한 포르쉐코리아가 16억 원의 기부금을 내고 다양한 공헌활동을 하는 것과 비교된다. 매출 7497억 원인 볼보차코리아도 7억 원을 냈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테슬라가 전기차 보조금 명목으로 한국정부에서 연간 1000억 원 안팎 챙긴 적도 있는데 기부금 0원은 한국시장을 대하는 테슬라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냐”고 꼬집었다.
고객들과의 소통에도 소극적이다. 한국 시장에서 연간 40% 안팎 차값을 올릴때는 물론이고 최근 판매부진에 따른 차값 인하에 대한 설명 요구에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테슬라 중국 법인의 경우 임원이 직접 해명하는 것과는 대비된다. 테슬라의 닮은 꼴 애플도 과거 AS 등에서 한국 소비자를 무시하다가 불만이 폭발하면서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수입차 업계 한 관계자는 “글로벌 메이커들이 전기차를 잇따라 출시하면서 테슬라 입지가 좁아졌다. 더이상 시장을 주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국토요타자동차의 경우 사회공헌 관련 보도자료를 낼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문구가 있다. ‘기업시민의 일원으로서 한국 사회를 위한~’, ‘한국 사회 일원으로서~’ 등이다. 테슬라는 앞으로 보도자료나 신차를 낼 때마다 ‘한국에서 돈만 벌어가는 기업으로서~’라는 문구를 새겨야 할 듯하다.
2023-02-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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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가덕신공항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제목만 봐도 신물이 날 법하다. 가덕신공항과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특별법(TK신공항법) 얘기를 하는 게 나조차 마뜩지 않다. 멀리서 보면 도긴개긴이라고, 대충 타협하라는 훈수도 넘친다. 그러나 지역의 미래가 걸린 문제에 점잔빼고 마냥 지켜볼 순 없는 일 아닌가. “갈등 유발” 비판 속에서 내키지 않는 한마디를 또 보탠다.
“TK와 부산은 경쟁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 관계다.” “신공항으로 싸우면 수도권론자만 웃는다.” TK신공항법의 ‘독소 조항’을 지적하는 부산을 향해 TK 정치권과 언론이 이런 충고를 한다. 가덕신공항의 지난 20년을 아는 사람이라면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를 테다. 가덕신공항의 ‘우군’을 기대하고 연대의 장에 끌어들였음에도 되레 최대 방해꾼이 됐던 TK의 행태는 부산이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입장 바뀌었다고 저렇게 입바른 소리를 쏘아대니 참 얄밉다는 생각마저 든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자원이 수도권으로 몰린 나라에서 남은 파이를 차지하려면 지역 간 경쟁은 숙명적이다. 각자도생의 자원 쟁탈전에서 때론 ‘안면 몰수’를, 때론 ‘내로남불’도 불사하는 게 지역 간 경쟁의 실상이다. 각 도시 최고 화두는 공히 ‘내 지역 발전’이고, 이는 TK도 PK도 마찬가지다. 옳다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 TK에서 가덕신공항 특별법을 유일하게 지지했다는 홍준표 대구시장이 경남지사 시절 “물구덩이보다 맨땅이 낫다”며 산봉우리를 20개 이상 깎아야 하는 밀양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할 생각도, 대구 정치권이 안으로는 가덕신공항보다 더 빨리, 더 크게 지어 영남권 여객·물류를 선점하자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는 걸 탓할 생각도 없다. 퇴락해가는 지역을 되살리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누군가 정치는 짐승의 비천함을 겪으면서 성인의 고귀함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는데, 소멸하는 지역 리더라면 ‘떼쓰기’ ‘지역 이기주의’라는 비난의 진창을 굴러서라도 활로 하나 뚫겠다는 각오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관점에서 이번 사안을 대하는 부산시와 지역 여권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TK의 신공항법 속도전에 ‘먼 산 불구경’하던 부산 여권이 들끓는 비판에 지난달 30일 부랴부랴 모여 낸 결론은 “가덕신공항에만 집중하자”였다. 이 문제를 지적한 언론과 시민사회를 향해서는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한다’는 불만도 내보였다. 달을 가리켰더니 손가락을 꺾은 셈이다.
TK도 원하는 공항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는 이들의 배려심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관념 속에선 두 공항이 동시 착공될 경우, 정부의 한해 교통 예산 3분의 1에 달하는 6조 원이 두 지역에 착실히 투입되고, TK신공항이 수 년 먼저 개항해도 따뜻한 연대 안에서 영남권 항공 수요를 두 공항이 적절히 분담하는 착한 드라마가 그려진다. 전쟁 같던 가덕신공항 성사 과정을 지켜본 나는 그런 판타지가 믿기지 않는다. 당장 그 아름다운 협력의 대상은 자신들의 신공항을 유사 시 인천공항을 대체하는 중추공항으로 격상하고, 활주로 길이를 3.8km까지 늘리는 방안을 법으로 강제하겠단다. ‘기부 대 양여’ 원칙은 온 데 간 데 없고, 지금은 국비 소요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2단계 확장안까지 마련해 그 규모를 끝없이 키우려 한다.
이쯤에서 부산 여권은 가덕신공항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봐야 한다. 두 정권의 공약이었지만, 두 번 다 좌초됐다. 전 정부에서 다시 깃발을 올린 뒤에는 ‘왜 다 끝난 일을 재론하느냐’는 정부와 수도권 언론, TK의 3중 반대 속에 천신만고 끝에 쟁취한 결과물이다. 아름다운 양보나 선의의 배려는 없었다. 힘의 논리만 앞세우라는 뜻이 아니라 시민들의 절박감으로 얻은 결과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발등의 불’이 된 사용후핵연료 문제 대처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시민들도 8년 뒤 포화에 이르는 폐연료봉을 원전 내 저장하는 것 외에 달리 묘책이 없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희생이 영속화하지 않도록 구체적인 로드맵 정도는 이끌어 내야 할 텐데, 그저 법안 하나 발의하는 것으로 이 국면을 넘기려는 것 같아 보인다.
부산은 TK신공항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김해공항 이용량의 5분의 1 수준인 대구공항의 수요가 앞으로 훨씬 커질 것이라는 비상식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가덕신공항 이상의 공항’을 법으로 밀어붙이려는 그 무리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지역 이익을 지키는 당연한 문제 제기를 타 지역, 혹은 윗선의 눈치 때문에 하지 못하는 나약한 정치가 부산 여권의 실체라면 그 존재 가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2023-02-06 [1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