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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이번 추석엔 '감사 인사 챌린지' 어때요?
미국에서 두 자릿수에 육박하는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현대·기아차가 때 아닌 소송에 휘말렸다. 최근 미국에서는 10대들을 중심으로 현대차와 기아 차량을 표적으로 한 차량 절도가 급증하고 있고, 도난 차량을 이용한 2차 범죄와 난폭 운전, 교통 사망사고 등 관련 폐해도 만연하다고 한다. 현대·기아차 구형 모델에 도난 방지 장치인 엔진 이모빌라이저가 설치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해당 도난 방지장치의 설치는 의무 사항은 아니어서 2021년 11월 이전 생산된 현대·기아차량에는 이 장치가 없다. 이로 인해 지난해부터 현대·기아 차량을 훔치고 이를 인증하는 동영상을 틱톡과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는 속칭 '현대·기아차 챌린지'가 유행했고, 미국 10대들 사이에 모방 범죄가 급증했다.
이에 뉴욕, 클리블랜드 등 미국 내 17개 시 당국은 도난 방지 장치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아 이 같은 범죄를 조장 내지는 방치했다며 지난 6월 현대·기아차에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관련 범죄로 골머리를 앓는 지자체들이 차량을 훔친 범죄자나 범죄 예방에 실패한 치안당국 대신 제품을 만든 한국 기업에 엉뚱하게 책임을 돌리는 모양새인데, 정작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집 현관에 배달된 택배가 도난당하면 아마존을 비난하느냐”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범죄나 친구 괴롭히기, 자해 같은 각종 반사회적 행위가 SNS를 기반으로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10대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유럽에서는 얼굴을 꼬집어서 일부러 흉터를 만들어 프랑스 폭력배의 거친 모습을 따라하는 자해 행위가 ‘프렌치 흉터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유행했다. 위험천만한 ‘기절놀이’도 ‘블랙아웃(의식 상실) 챌린지’라는 명칭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환각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기절할 때까지 목을 조르거나 숨을 참는 것인데 올해 1월 아르헨티나의 12세 소녀가 틱톡 라이브 영상을 켜놓고 이 챌린지에 나섰다가 숨지는 등 지난해에만 전 세계적으로 20명의 청소년이 사망했다는 통계도 있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새삼 심각성이 재조명되고 있는 교권 침해 문제도 ‘SNS 챌린지’에 올라타면 최악의 양상으로 치닫는다. 미국에서는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다짜고짜 교사를 마구잡이로 폭행하는 장면을 틱톡에 올리는 이른바 ‘선생님 때리기 챌린지’까지 유행하며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오죽하면 지난 7월 200곳에 달하는 미국의 지역 교육청들이 SNS가 교내 질서를 무너뜨리고, 학생들의 정신건강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며 틱톡과 페이스북 등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 최고 스마트폰 보급률에 청소년 10명 중 4명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은 이 같은 ‘막장 챌린지’가 위험 수위로 치닫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전세계적인 K팝 열풍을 타고 K팝 안무 동작을 따라하는 ‘댄스 챌린지’가 초등학생과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탕후루 ASMR’ 같은 먹방 챌린지도 음식의 종류를 바꿔가며 꾸준한 인기다. 부모들 입장에서야 자녀들의 스마트폰 중독과 무비판적 유행 따라하기가 우려스럽겠지만, 그래도 자녀들이 반사회적 콘텐츠에 탐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유례없는 6일 간의 긴 추석연휴가 시작됐다. 이번 추석에는 둥근 보름달처럼 밝고 넉넉한 마음으로 소중한 가족이나 평소 고마웠던 이웃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챌린지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명절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방’을 찍어보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랜덤 댄스 챌린지’에 도전해 카톡 친구들과 공유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평소 고생하시는 경비원 어르신에게 작은 명절 선물을 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공익광고 같은 관 주도 캠페인이 아니라 연예인이나 유튜버 스타 같은 인플루언서들이 먼저 판을 깔고 팬들이 호응하면 소소한 재미와 감동이 있는 트렌디한 챌린지가 이어질 듯도 하다. 부모들도 이번 연휴동안만은 반목과 혐오를 부추기는 극단적 정치 유튜브는 좀 멀리하고, 영상 챌린지로 자녀 세대와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경제학에 ‘악화(실질적인 가치가 낮은 저질의 돈)가 양화(좋은 돈)를 구축한다’는 유명한 법칙이 있다. 악화를 발본색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양화를 지속적으로 유통시키는 것이다. 나쁜 콘텐츠는 좋은 콘텐츠로 막아야 한다.
2023-09-2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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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국민연금 ‘더 내고 덜 받는’ 것이 능사?
1998년 ‘017 패밀리 요금제’라는 상품이 출시됐다. 지금은 SK텔레콤에 합병된 신세기통신의 휴대폰 요금제로, 기본요금만 내면 미리 지정한 2~4명 간의 통화가 무제한 무료였다. 통화시간 당 요금을 매기던 시절 통화량이 많은 커플에겐 너무나 ‘혜자’스런 요금제였고, 순식간에 가입자 44만 명을 돌파했다. 정작 회사 입장에선 수익은 없고 통신회선 부하만 일으키는 애물단지였다는 것은 아이러니. 결국 요금제는 출시 6개월 만에 폐지됐다. 허나 기존 가입자의 혜택마저 중단할 순 없었다. 회사는 이들을 다른 요금제로 유도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체로 허사였다. 가입자들은 길게는 10년 넘게 번호를 유지하며 공짜 혜택을 누렸다. 심지어 웃돈(100만 원을 상회했다는 소문이다)을 주고 해당 전화번호를 사고파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른바 계약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무릇 아무리 대기업이 애를 써도 쉽게 무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세상엔 그렇지 않은 계약도 있다. 국민연금이다. 최근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의 칼을 뽑았다. 개혁이라는 것이 결국 계약자와의 계약사항을 변경하는 것. 그런데 새 계약자부터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계약자도 변경 사항을 그대로 적용받는다. ‘국민’연금이라 이름 붙였지만 정작 국민들 자유의지로 맺은 계약이 아니다보니, 계약사항이 변해도 그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달 초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연금재정계산위원회가 연금 개혁안을 제시했다. 핵심은 보험료율은 현행 9%에서 15%로 올리고, 현재 63세인 연금 받는 나이를 68세까지 단계적으로 늦추자는 내용이다. 쉽게 말해 가입자에게 ‘지금보다 더 내고, 지금보다 덜 받아가라’는 뜻이다. 현행대로라면 수십 년 후 기금 잔고가 거덜나고 미래 세대에 큰 부담이 된다니, 괜한 투정을 부렸다간 나만 제 잇속만 차리는 만무방이 될 분위기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탐탁지 않다. 꼭 기자만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소득대체율 인상(쉽게 말해 덜 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받자는 거다)을 요구하며 국민연금재정계산위원회를 사퇴하는 위원들까지 나왔다.
국민연금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다만 ‘곳간이 비어가니 더 내고 덜 가져가라’는 식의 단순 해법을 과연 ‘개혁’이라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가재정이 뭔지 모르는 이 무지렁이 기자도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을 테다. 무엇보다 노인들에게 무조건 (연금수령액을) 덜 받아가라고 하기에 현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 2020년 기준 한국 노인빈곤율(40.4%)은 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다. 노인 10명 중 4명은 미래 세대를 걱정할 여력조차 없다.
과연 우리는 많이 받고 있는가. 한국의 노인 인구 비중은 전체 인구의 20% 수준. 그들에게 지급되는 국민연금 지출액은 고작 GDP의 1.4%에 그친다. 유럽의 경우 노인 인구 비중은 약 18%이지만, 그들을 위한 공적연금 규모는 GDP의 11%에 달한다. 물론 국민연금 외 노인 복지 예산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걸 포함해도 여전히 부족하다. 그런데 허리띠를 졸라매라 하는 쪽은 오히려 한국이다. 나라마다 주머니 사정이 다른데 똑같이 비교할 수 있냐고? 누구 주머니 사정이 더 안 좋을까. 한국의 국민연금 기금 규모는 역시 GDP 대비 OECD 회원국 중 1위다. GDP의 절반에 가까운(48%) 돈을 기금으로 운용한다. 참고로 GDP 대비 10% 이상 기금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겨우 7개국 정도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도대체 다른 나라는 어떻게 국민연금을 유지하는가. 이달 초 위원회를 사퇴한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남찬섭 교수와의 통화에 그 답이 있었다. 남 교수는 "(우리나라는 국민연금에 대해) 가입자가 낸 보험료로 보험금(연금)을 지급하고도 어떻게 손실 없이 기금을 유지할 수 있을지의 손익 구조에만 집착한다"며 "반면 다른 나라들은 이를 국가의 책임으로 여기고 부족분을 지원한다"고 꼬집었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국민의 절반 이상이 "더이상 국민연금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내는 국민연금 외 민간기업의 연금 상품에 눈을 돌린다. 민간기업보다 국가를 더 믿지 못하는 이 상황을 정부는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민간기업의 경우처럼 한 번의 계약을 평생 유지해달라 억지를 부리자는 것은 아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연금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마냥 연금 가입자의 허리띠만 졸라매라는 식의 통보는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는 부디 현 세대와 미래 세대를 모두 보듬을 수 있는 묘책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김종열 경제부 금융·블록체인팀장 bell10@busan.com
2023-09-2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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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우주항공청 사천 건립’, 경남 미래다
‘한국판 나사(NASA·미국 항공우주국)’로 불리는 우주항공청 설립을 위해 지난 4월 ‘우주항공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특별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하지만 여야 이견으로 5개월여 방치되다, 최근에야 논의가 시작됐다.
당초 정부는 2030년 세계 7대 우주강국 도약을 목표로 6월 국회 의결을 거쳐 연내 우주항공청 임시 청사 개청을 목표로 했다.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공전하는 이면에는 여야 이견을 비롯해 우주항공청 입지를 두고 지역간 미묘한 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우주항공청 설립 얘기가 나오자 주요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본사가 있는 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카이스트 등이 있는 대전광역시,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전남 고흥 등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경남지역 대선공약으로 ‘사천 우주항공청 설립’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사천이 최종 후보지로 사실상 낙점되는 듯했다. 하지만 특별법안 통과를 두고 여야가 5개월간 공전하는 바람에 올해 우주항공청 설립은커녕, 법안 통과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경남지역 산업계·학계·비영리 민간단체 등 38개 단체·협회 등이 연대해 발족한 ‘우주항공청 설치 범도민 추진위원회’는 지난 3일 사천시 삼천포대교공원에서 ‘우주항공청 특별법 통과 촉구를 위한 범도민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말이 범도민 궐기대회지 실제는 ‘관제 데모’나 다름없다. 관제 데모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 기관이 개입해, 정부 등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벌이는 시위다. 독재 시절에나 유행했던 관제 데모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민주사회의 여론형성 방법은 아니다.
이날 행사에는 박완수 경남도지사를 비롯해 김진부 경남도의회 의장, 최효석 재경 경남도민회장, 권순기 경상국립대 총장 등 추진위 공동위원장과 최형두 국민의힘 경남도당위원장, 하영제 국회의원, 박동식 사천시장, 조규일 진주시장 등 도내 기관단체장과 지방의원, 추진위 소속 학계와 산업계·시민단체 등에서 5000여 명이 참가했다.
관제 데모를 해서라도 경남지역 정·관·학계 지도자들이 앞장선 이유는 뭘까? 사천 우주항공청 설립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다. 우주항공청 연내 설립은 윤 대통령과 박 도지사 공약사업이라는 상징성을 넘어 경남지역 경제활성화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기계와 조선, 방산 등 제조업 기반의 경남은 새로운 미래성장 동력으로 항공우주산업을 주목하고 있다. 사천에는 이미 KAI 본사가 자리하고 있고, 진주와 사천에는 항공우주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또 경남은 KAI를 비롯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우주분야를 선도하는 기업과 협력업체들이 위치해 국내 우주분야 생산액의 43%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우주부품시험센터, 세라믹기술원, 재료연구원 등 우주분야 전문 연구기관과 지역대학을 통한 전문인력 양성 시스템이 구축돼 있는 등 산·학·연이 조화로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날 박 도지사는 “국가 우주경제 비전의 실현을 위해서는 우주산업 중심은 반드시 경남이어야 하고, 우주항공청이 사천에 조속히 설치돼야 한다”면서 “일부 공공기관이나 정치인의 집단이기주의적 반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경남도민의 열망이 전달됐는지, 이틀 후인 지난 5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특별법을 논의하기 위한 안건조정위원회가 구성됐다. 야당 간사인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대전 유성구갑)이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여야는 지난 13일 법안이 제출된 이후 5개월 만에 첫 심의에 착수했다. 또 19일 3차 회의를 열고 민간 전문가 의견을 청취했다. 종합토론이 예정된 오는 25일까지 결론을 낸다는 방침이다.
경남도민은 특별법안이 조만간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또 어떤 복병이 나타날지 결과를 속단하기 힘든 상황이다. 최대 관심사는 당연히 입지다. 법안 심사에 앞서 조 위원장은 “설치 논의는 입지와 관련한 건 아예 없다”며 “입지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시도가 계속 있으면 논의가 안 될거라고 분명히 경고한다”고 선을 그은 상태다. 특별법안 통과 후 입지는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한마음으로 달려왔던 경남도민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kks66@busan.com
2023-09-2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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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동반자와 들러리
“나의 재능을 사우스비치로 가져간다.”
마이클 조던에 비견되는 현역 최고의 농구 스타 르브론 제임스는 13년 전 고향 클리블랜드를 떠나 마이애미로 이적합니다. 그 과정에서 ‘더 디시전(The Decision)’ 쇼로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놨죠. 스포츠 스타가 고액의 연봉을 좇아 팀을 옮기는 일은 흔합니다. 그러나 제임스는 한술 더 떠서 ‘내 인기와 재능을 어느 도시에 줄까 궁금하지?’라며 이를 미국 전역에 공개방송한 겁니다.
선수가 구단을 ‘간택’하는 이 발칙한 쇼가 달라진 스포츠 비즈니스의 현실을 보여줬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습니다. 비즈니스의 무게 중심이 구단이 아니라 선수에게 넘어갔다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라는 겁니다.
난데없이 농구 이야기를 꺼낸 건 과연 부산시는 비즈니스 트렌드에 맞는 자세를 갖추고 있느냐고 되묻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업 비즈니스도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한국의 사람과 재화가 수도권으로 집중되면서 남은 도시끼리 무한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기업을 모셔 와서 지갑을 열게 하려면 지자체가 스킨십에 공을 들이고 그만한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부산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부산 기업인들은 지난 2년간 부산시에 200억 원이 넘는 돈을 2030월드엑스포 유치 지원금으로 전달했습니다. APEC 정상회담 때도, 아시안게임 때도 이만큼 지갑을 연 적은 없었지요.
코로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불황에도 부산 기업들이 뭉칫돈을 내놓은 이유는 뭘까요? 흔히 말하는 경제적 부가 효과 때문일까요? 모르긴 해도 부산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동안 부산시는 척지고 살 수 없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엑스포 유치전 와중에 부산 기업인 사이에는 이런저런 불만이 쏟아집니다. ‘기업이 부산시를 생각하는 만큼 부산시도 기업을 시정의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느냐’라는 불멘 소리가 그것입니다.
지난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엑스포 4차 PT에서는 한 차례 해프닝이 있었답니다. PT 본행사 이후 대한민국 리셉션이 열렸습니다. 정부가 해외 인사를 대거 초대해 엑스포 유치를 호소하라고 깔아준 판입니다. 부산 경제사절단 중 국내외 수백 명의 인사가 운집한 이 리셉션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상의회장 단 1명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출입이 거절됐습니다.
사절단을 꾸려 파리로 함께 떠나자고 제의한 건 부산시였습니다. 그러나 현지에서 사절단이 전달받은 건 참석해야 할 행사의 시간과 장소가 전부였습니다. 이쯤 되면 시장이 파리 출장 가는데 자비로 비행기 타고 따라와서 들러리 서달라고 부탁한 꼴입니다.
무심한 건지, 무례한 건지 모를 부산시의 이런 자세는 이미 지난 4월 국제박람회기구 실사 때도 문제가 됐지요. 지난해 부산시는 에어부산에 엑스포 유치 기원 문구를 항공기에 래핑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적자투성이 에어부산이었지만 이를 받아들여 7억 원을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실사단의 의전용 항공기는 대한항공으로 결정나면서 난리가 났었습니다. MOU 체결할 땐 동반자라며 호들갑 떨다가 정작 결정적인 시점에서는 거점 항공사를 들러리로 전락시킨 겁니다.
부산은 국제도시입니다. 월드엑스포 같은 메가 이벤트 유치도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 겁니다. 그때마다 든든한 동반자는 필요합니다. 방정맞은 소리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당장 이번 엑스포 유치가 불발 돼서 재유치 운동을 벌이자고 한다면 들러리 취급받던 기업인들이 다시 기분좋게 지갑을 열까요?
부산시가 공을 들이는 역외 투자 유치도 기업인을 들러리로 세우는 이런 낡은 행태를 벗어나지 않고는 힘듭니다.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 필요한 건 진정성과 디테일입니다. 그 두 가지가 갖춰져야 기업인이 앞다퉈 ‘나의 투자를 부산으로 가져간다’고 팔을 걷을 겁니다.
부산시도 월드엑스포 유치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다들 바쁘고 힘든 줄로 압니다. 그러나 급하더라도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기업인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시정의 동반자를 잃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여유도 챙겼으면 합니다. 11월의 마지막 PT가 아름답고 훈훈하게 마무리되길 기도합니다.
2023-09-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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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통도환타지아, 양산 지역민과 상생을
30년 전인 1993년 5월 1일 토요일, 경남 양산 하북면 순지리 경부고속도로 통도 IC. 이날 고속도로 상·하행선 20km와 국도 35호선을 이용하던 차들이 모두 멈췄다. 버스와 택시 운행도 불가능했다. 이 상황은 영남지역 최대 규모 테마·놀이시설인 통도환타지아(환타지아) 개장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린이날에는 6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몰리면서 개장 때보다 체증이 더 심각했다. 환타지아 주변 도로의 교통체증은 주말마다 계속됐다. 이로 인해 당시 하북주민들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못하고, 응급환자나 화재 발생 시 제때 조처를 받지 못한다며 개장 1개월 만에 환타지아 폐쇄 운동에 나섰다.
양산군(현 양산시)도 한국도로공사와 협의해 주말 경부고속도로 부산~통도 IC 간 매표를 중지해 환타지아를 찾는 부산 시민들의 국도 이용을 유도하는 촌극까지 빚었다.
환타지아는 개장 첫해 140만 명 방문객을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연간 100만 명 이상 찾을 만큼 부울경에서 인기 절정의 장소였다. 당시 부울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 대부분이 한번은 방문했을 정도로 사랑을 독차지했다. 아이에겐 꿈의 장소였고, 어른들에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현재 모습은 처참하다. 내부는 잡풀이 무성하게 자랐고, 웃음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던 놀이기구는 녹슨 채 방치됐다. 야간 투어로 화려했던 밤은 암흑천지로 변했다.
양산 경제의 ‘복덩이’였던 환타지아가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것이다. 환타지아는 98년 부도로 법정관리를 거쳐 2004년 새 사업주를 찾았다. 사업주는 새 단장을 했지만,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방문객 감소로 이어졌다. 사업주는 1000억 원을 들여 2006년 아쿠아환타지아 개장, 이듬해 실내 물놀이시설을 포함한 콘도미니엄을 건립하면서 감소세인 방문객을 증가세로 되돌렸다.
그러나 새로운 물놀이 시설이 ‘한 철 장사’에 그치고, 김해 등지에 아쿠아 시설이 생기면서 또다시 감소세로 전환됐다.
방문객은 2010년 50만 명대로 떨어졌고,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직전인 2019년에는 39만여 명까지 추락했다.
환타지아는 코로나 팬데믹을 이유로 2020년 3월부터 휴장에 들어갔다. 현재 휴장 사유가 사라졌지만, 재가동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매각설마저 나돌면서 사실상 환타지아 재가동은 어려울 전망이다.
환타지아 휴장이 길어지면서 하북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양산시가 하북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시행했지만,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상권 위축은 인구 감소 속도로 이어졌다. 하북 인구는 환타지아가 성업 중이던 2002년 1만 1000명이었다. 이후 인구가 줄면서 2009년 9927명, 2018년 8996명, 2022년 7997명으로 각각 떨어졌다. 1만 명대 인구가 9000명과 8000명대로 감소하는 데 7년과 9년이 소요됐지만, 7000명대로 떨어질 땐 4년에 불과했다.
보다 못한 주민이 나섰다. 대원마을 주민들은 최근 양산시에 환타지아 부지를 매입, 지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청소년 수련원 등 공공개발을 건의했다. 차선책으로 인구 유입을 위해 아울렛 등 쇼핑몰이나 아파트 건립, 체육공원 건립도 주문했다.
양산시는 ‘불가’를 통보했다. 시가 10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환타지아 부지를 매입할 재정 여력이 없는 데다 30년째 미준공인 상태인 환타지아의 경우 용도변경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가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특혜’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환타지아에 흩어져 있는 상업시설을 한곳에 모아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시설을 건립하고, 이들이 선호하는 놀이시설 일부를 가동하는 방식으로 환타지아 운영 재개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환타지아는 통도 CC 사업주가 골프장 건설비용의 10%인 27억 원을 관광진흥기금으로 내지 않는 대신에 400억 원을 들여 조성했다. 하지만 환타지아가 조성된 지 30년이 지났고, 사업주도 변경됐다. 여기에 적자로 장기간 휴업 중인 사업주에게 환타지아 재가동을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다.
양산시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공영개발’이 필요하다면 나서야 할 것이다. 사업주 역시 땅을 이대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업영역을 모색해야 한다. 주민은 기업과 지역사회가 공존하기 위해 양보와 협조도 필요하다. 팔짱만 끼고 있으면 환타지아 회생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양산시와 사업주, 주민은 상생의 목표인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금 당장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야 할 시점이다.
2023-09-1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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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느리게 살아남는 법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란 격언이 있다. 앞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 방향(목표) 설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작정 빠르게 달려 나가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일 터. 방향을 잃으면 방황하기 십상이니까.
요즘 이 말의 의미를 스포츠를 통해서 되새기게 된다. 특히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활약하는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피칭을 보면서. 류현진은 팔꿈치 부상을 당해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쳐 1년여 만에 빅리그에 복귀했다. 그의 복귀전에 앞서 전문가들의 의구심은 컸다. 36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네 번째 큰 수술(고교시절부터)을 받고 과연 예전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적어도 복귀 초반엔 고전하리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류현진은 보기 좋게 예상을 깼다. 복귀 후 선발 등판한 7경기(12일 현재)에서 3승 2패 평균자책점 2.65, 34이닝 동안 삼진 28개를 뺏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 중이다.
직구 구속은 수술 전보다 떨어졌다. MLB 기록 통계사이트인 베이스볼서번트에 따르면 류현진의 올 시즌 직구 평균 구속은 시속 88.3마일(약 142km)에 불과하다. 이는 100구 이상 던진 MLB 투수 618명 중 607위에 해당하는 최하위 수준의 느린 공이다. 올 시즌 MLB 투수 평균 구속은 94.2마일(151.7km)에 이른다. 그럼에도 류현진이 살아남는 건 다양한 구질과 송곳날 같은 제구력 덕분이다.
류현진은 시속 100km까지 떨어지는 매우 느린 커브를 들고 나와 MLB 강타자들을 무력화하고 있다. 140km대 직구와 120km대 체인지업, 100km대 커브를 섞어 던지는 완급조절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빼앗기기 일쑤다. 여기에다 스트라이크존 상하좌우 구석구석을 자유자재로 찌르는 제구력이 더해지며 느린 공의 위력은 배가 된다.
스티브 댈코스키란 투수가 있었다. 미국 팬들에겐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투수로 기억되는 선수다. 댈코스키가 프로에서 뛴 시기는 1957년부터 1965년까지다. 키 179cm에 77kg으로 평범한 체격의 이 왼손잡이 투수가 기록한 최고 구속은 177km. 스피드건이 없던 시절이라 정확한 속도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그의 공을 접했던 타자나 야구인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댈코스키는 메이저리그 무대를 한 번도 밟지 못했다. 그는 마이너리그에서만 9년을 뛰며 통산 46승 80패 평균자책점 5.59를 남겼다. ‘하얀 번개(White Lightning)’란 별명답게 불같은 광속구를 앞세워 총 995이닝을 던지는 동안 무려 1396개의 삼진을 뽑아냈다. 그러나 볼넷 또한 1354개나 허용했다. 고질적인 제구력 불안으로, 삼진을 잡아낸 만큼 볼넷을 내준 것이다.
어마무시한 공을 던졌지만, 형편 없는 제구력은 댈코스키의 발목을 잡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투구는 타자의 귓불을 찢고, 심판의 마스크를 조각냈으며, 포수 머리 위의 관중석 의자를 강타하기도 했다. 제구력 잡기에 실패한 댈코스키는 끝내 빅리그에 오르지 못하고 어깨 부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결국 투수의 생명은 제구력이다. 제 아무리 160km가 넘는 광속구라도 ‘방향’을 잡지 못하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빠른 공이 없어도 다양한 변화구를 꽂아 넣는 정교한 제구력으로 무장했다면 최고의 투수로 생존할 수 있다. 류현진 이전에 그레그 매덕스(355승), 톰 글래빈(305승), 제이미 모이어(269승)가 그랬다.
류현진의 부활은 국내 투수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드러났듯이 한국 투수들은 미국은 물론, 일본 투수보다도 직구 구속이 한참 뒤진다. 구속이 처지면 제구력이라도 뒷받침돼야 하는데 오히려 못 미치는 모습이다. 제구가 안 되니 자신감이 떨어지고, 타자와의 정면대결보다는 피해 가다 3볼까지 몰리고 볼넷을 남발한다.
강속구는 타고나지만, 제구력은 훈련과 노력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많은 훈련을 통해 투구폼의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고, 몸의 전체적인 균형감을 찾아 나가면 제구력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제구력이 갖춰지면 시속 100km의 느린 공도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배짱이 생긴다.
투수를 ‘스로어(thrower)’가 아닌 ‘피처(pitcher)’라 부르는 건 방향성(목적성) 있는 공을 던지기 때문이다. 속도가 안 되면 방향이라도 잘 잡아야 하는데, 지금 한국 야구엔 방향성 잃은 공들이 너무 자주 보인다.
정광용 스포츠라이프부 에디터 kyjeong@busan.com
2023-09-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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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여름이 지나가고
여름이 갈수록 힘든 건 지구 전체의 문제다. 게릴라성 호우와 밤에도 식지 않는 폭염은 지구온난화가 아니라 지구열대화가 시작됐다는 유엔의 경고를 당장의 위기로 체감하게 했다. 특히 한국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든 건 자고 일어나면 쏟아지는 사건 사고들이었다.
2주 넘게 계속된 극한호우로 전국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와중에 수도권에서 시작된 무차별 칼부림은 전국 곳곳의 동시다발 칼부림 예고로 번졌다. 전 세계 청소년들이 뻘밭에서 고생한 새만금 잼버리 사태에 이르러서는 새 뉴스를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끝이 아니었다. 대낮 서울 한복판 둘레길에서 출근하던 여성이 성폭행범에게 살해당했다. 어느 초년 교사는 근무하던 초등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여름의 말미에 일본은 예고했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다. 모두 7, 8월 두 달새 일어난 일들이다.
뉴스가 뉴스를 덮었고, 이슈가 이슈를 삼켰다. 사람들은 ‘뉴스 급체’를 호소했다. 짧은 기간 큰 뉴스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들 뉴스와 뉴스 소비자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의미다. 아우성을 듣고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무엇보다 생명과 안전의 문제였다. 천재지변과 이상동기 범죄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뉴스 속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감각은 실재하는 두려움이다. 충북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포함해 전국에서 47명이 숨지고 3명이 실종된 집중호우가 그랬고, 십수 명의 사상자를 낸 신림역, 서현역 흉기 난동사고와 관악산 둘레길 성폭행 사망사고도 그랬다.
대비할 수 있었고 적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기후변화로 집중호우는 점점 극단적인 양상이 됐고, 3명이 숨진 부산 초량 지하차도 침수사고 이후로도 3년이 지났다. 개인적인 좌절과 분노를 여성을 비롯한 약자에게 투사하는 ‘인셀(비자발적 독신)’들의 혐오가 온라인에서 싹을 틔운 지는 오래됐지만 제때 도려내지 못한 결과 도심의 흉기 난동과 성범죄로 나타났다.
범주는 달라도 사건이 국민적 이슈가 되는 이유는 비슷하다.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가 장기적으로 건강에 미칠 영향은 어느 쪽으로든 모두에게 공평할 것이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교사들은 그동안 숱하게 호소한 교육 현장의 감정노동 실태를 새삼 고발했다. 새만금 잼버리 사태는 국제대회가 이렇게까지 엉망일 수 있다는 놀라움과 한국을 찾은 청소년들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가장 심각한 건 사회적 신뢰의 근간을 건드린 것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건 기본적인 믿음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은 나를 해코지하지 않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면 공권력이 나서서 제지할 것이다. 재해 위험 상황에서는 정부가 안전 지침을 안내하고,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면 권한 있는 사람이 책임질 것이다. 이런 믿음이 깨질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개인의 도덕도, 합의된 권위도 소용없게 된다. 그곳은 지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의 뉴스들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면 거기에서 지옥의 일단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극한호우와 흉기 난동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오송지하차도 참사 유가족협의회는 지난 4일에도 분향소 기습 철거에 항의하며 농성을 벌였다. 다시 분향소를 열었지만,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이뤄지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흉기 난동의 트라우마로 서울 지하철 출근길에서는 지금도 오인 신고와 대피 소동이 끊이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만 불어도 불같은 여름은 가물가물하게 마련이다. 앞으로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9월에도 폭염주의보에 열대야가 이어진다. 전남 여수 바다는 아직도 식지 않아 양식장 우럭이 떼로 죽어나간다. 여름이 끝나도 끝이 아니다. 가을에는 무섭게 뛴 추석 제사상의 물가로, 겨울에는 북극의 해빙이 녹아서 몰고온 한파로 돌아올 것이다. 다음 여름이 오기 전에 지구 전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올여름을 휩쓸고 간 사건 사고들도 마찬가지다. 뉴스는 더 새로운 뉴스로 묻히게 마련이지만 다음 사건 사고가 되풀이되기 전에 정부는 국민이 안심하고 다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서현역 사고로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숨진 미대생 김혜빈(20) 씨를 포함해 지난여름의 희생자들을 제대로 추모하는 일이다.
2023-09-0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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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군 최고 통수권자의 의중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여당에 투표하는 것이 군인의 길이 아니겠는가?” 31년 전 일이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1992년 3월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선거 부재자투표 때의 경험이다.
당시 강원도의 한 보병 사단에 이등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훈련소에 입대한 것은 그해 1월이었다. 그러니까 선거가 열린 3월 24일 기준으로는 자대 배치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중의 신참’이었다.
군 장병들의 부재자투표는 실제 선거일보다 며칠 앞서 진행됐다. 그래야 개표일에 맞춰 투표자의 주소지 개표소에 투표지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표 당일인지 며칠 앞둔 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대장인지, 소대장인지, 아니면 행정보급관(인사계)이었는지도 아렴풋하다. 확실한 것은 투표 때 1번을 찍으라는 ‘의중’을 하달받았다는 것이다. 1번 후보는 여당 후보였다.
하달은 ‘정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계급사회 최말단에 있던 나에게는 다른 선택이 배제된 명령이었다. 실제로 중대 행정반 안쪽 방에서 은밀히 진행된 부재자투표는 인사계가 두 눈을 부릅뜨고 기표 위치를 직접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공개투표였다. 투표는 군 최고 통수권자의 의중에 복무하는 군인의 애국심을 증명하는 인증 절차였던 셈이다. 선거를 이틀 앞둔 3월 22일 육군 9사단의 현역 소대장 이지문 중위의 폭로 기자회견이 있었지만, 선거는 1번 당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은 군이 관여된 부정 선거의 전형으로 기록돼 있다.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 것은 2023년 맞닥뜨린 상식 밖 군의 행태가 30년 전 그때와 빼닮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채수근 상병 사망사건이 그렇다. 갓 스무 살의 생때같은 해병대원이 폭우로 불어난 강에서 실종자 수색에 동원됐다가 목숨을 잃었다. 사건이 난 경북 예천군 내성천 일대는 당시 유속이 세어 장갑차조차도 물에 들어간 지 5분 만에 뭍으로 나와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강 속에 직접 몸을 담가 수색하는 장병들에게는 구명조끼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군인권센터가 발표한 채 상병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해당 부대가 수색에 동원된 사병들에게 전달한 지시는 통일된 복장(빨간색 해병대 체육복 상의) 유지와 웃는 모습 보이지 않기 등 상부의 시선을 의식한 것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채 상병 사망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비상식은 가관이다. 해병대 수사단이 사단장을 포함한 해병대 지휘부 8명에 대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통보서를 경찰에 넘기자 탈이 났다. 국방부 장관의 결재까지 받은 걸 번복하고 회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대령 계급의 박정훈 수사단장은 소를 닮은 사람이었다. 눈치 없게도 상부의 의중에 반하는 길을 우직하게 가려 했다. 그러자 군은 그에게 항명과 상관 명예훼손 혐의를 씌워 입건하고 사전구속영장까지 청구하는 상식 밖의 선택을 했다.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군이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급기야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는냐’는 VIP의 의중이 전달됐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이전 논란은 가량없다. 발단은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돼 있던 독립투사 5인의 흉상을 난데없이 ‘재배치’하겠다고 나서면서다. 그중에서도 홍범도 장군을 콕 찍어 아예 학교 밖으로 내보겠다고 해 더 시끄럽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이끈 지도자를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이 있다는 이유에서 추방하겠단다. 두 전투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박근혜 정부는 잠수함에 홍범도함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문재인 정부는 카자흐스탄에 있던 그의 유해를 송환해 국내에 안치했다.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 모신 것은 육사 생도들이 이들의 애국심과 헌신을 새겨 국군의 동량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정부가 바뀌었다고 이런 마음이 바뀔 이유가 없다.
이런저런 군대 이야기로 나라가 시끄럽다. 보수 여당 인사들조차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서는데도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진보·보수의 대립으로 해석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세간에는 일련의 논란이 ‘용산의 의중’에서 비롯됐다는 낭설(이라고 믿고 싶다)이 정설처럼 돌아다닌다.
‘공산전체주의’와 대치하는 분단국의 군을 혼란 속에 오래 방치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다. 뜻하지 않게 꼬인 게 있다면 풀어야 한다. 가장 빠른 방법은 당사자의 한마디이지 싶다. 31년 전처럼, 군이 또다시 기로에 서 있다. 최고 통수권자의 의중을 정확히 밝혀야 할 때다.
2023-09-0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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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김종식과 오우암
1918년생 김종식 작가. 여명기 부산화단을 가꾼 1세대 토박이 작가인 그를 빼놓고는 부산미술을 이야기할 수 없다. 김 작가가 30년 이상 거주했던 부산 중구 대청동에서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가 열리는 부산광역시중구문화원에서는 작가가 창작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아틀리에 건물이 바로 보인다.
한때 ‘남장 김종식 기념관’으로 운영됐던 아틀리에 건물은 부산 미술사에서 중요한 공간이다. 건축면적 80㎡ 규모의 2층 건물은 작가와 가족이 살았던 집인 동시에 부산 예술인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작업실이었다. 부산 최초 지역 화가 모임인 ‘토벽회’의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김 작가의 아들인 김헌 김종식미술관 이사장이 ‘바다가 바로 발밑에 보였다’고 말할 정도로 부산항이 잘 보이는 이곳에서 ‘부산항’ 시리즈가 탄생했다. 부산시립미술관에 소장된 ‘부산항 여름’과 ‘부산항 겨울’은 1949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부산항 석양’은 1956년 작품이다. 이 그림들이 제작된 사이에 큰 사건이 있었다. 바로 1953년 부산 역전 대화재이다. 화마에 집도 작품도 모두 잃은 작가가 느꼈을 괴로움은 작품 ‘인간가족’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부인이 발벗고 나선 덕에 이 건물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재건됐다는 이야기에서는 화가의 작업을 응원하는 가족애도 느낄 수 있었다.
김 작가는 1988년 세상을 떠났다. 20년 뒤 기념관이 현재의 부산진구에 위치한 김종식미술관으로 이전한 이후 아틀리에 건물은 비어있는 상태이다. 한때 지자체가 매입을 검토한 적이 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중구 일대 문화벨트 취재를 하며 이 집을 봤을 때 안타까웠다. 이번 전시 초반에 김종식 작가의 제자들이 관람을 하고 갔다. 선생님과 야외 스케치를 같이 다닌 이야기, 술을 마신 이야기 등이 오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늦기 전에 이 아틀리에에 대한 기억을 보존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38년생 오우암 작가. 오 작가는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어머니를 잃고 ‘전쟁고아’가 됐다. 군 전역 후 부산의 한 수녀원에서 30년을 근무했던 그는 보일러실에서 합판에 에나멜페인트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미대에 다니는 딸의 물감을 사용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군상,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을 주는 풍경.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오 작가의 그림은 미술 전공자인 딸도 놀라게 했다.
오우암 작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저 작가는 누굴까’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의 생이 담긴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부산비엔날레 오픈 날 부산현대미술관 지하에서 오 작가의 작품을 만났을 때 반가웠다.
스산한 새벽 풍경 속에 홀로 춤추는 무당, 거대한 기차역 울타리 뒤에 선 어린아이의 뒷모습, 한쪽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이 되어 가족 뒤를 따라 마을로 돌아가는 길. 격변의 시기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교차하는 기차역. 오 작가의 작품에는 유년의 기억이 많이 담겨 있다. 2022 부산비엔날레 김해주 전시감독은 오 작가가 과거 기억과 트라우마에서 끌어올려진 장면들을 통해 전쟁과 이념 투쟁으로 상처 입은 한국 현대사의 어떤 원형적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고 했다.
생의 마지막은 경남 함양에서 보냈지만, 오 작가는 부산에서 56년을 살았다. 가장 오래 살았던 공간인 만큼 그림 속에 부산의 장소가 종종 나온다. 그림 속 부산의 도심과 풍경들은 맑은 하늘이나 바다와 같은 푸른색을 사용했는데, 그 속에서도 고독감이 전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도 앞바다, 깡깡이 마을, 자갈치, 범일동 구름다리, 옛날 적기 일대(현 우암동) 등이 등장한다. 감만동 철길 건널목과 ‘이번 역은 남포역’을 알리는 도시철도 1호선 내부를 그린 그림을 보면 부산의 역사가 담긴 작품이 가지는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지난 7월 26일 오우암 작가가 별세했다. 딸인 오소영 작가는 아버지의 작품을 기증할 곳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부산비엔날레에서 오 작가의 그림을 발견한 사람들에게서 구입 문의가 오고 있지만 그렇게 흩어지는 것보다는 한곳에 모아서 더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했다. 딸의 말에 따르면 오 작가는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전시작 위에도 덮어 그려서 남아 있는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부산과 한국사의 장면들이 담긴 그의 작품을 부산에서 오래도록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술로 부산을 지켜오고 부산을 담아낸 두 작가, 그들이 남긴 유산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은 남아있는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다.
2023-08-3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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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백선엽은 이해해도 홍범도는 안 된다?
정율성이라는 인물을 잘 몰랐다. 문제가 된 공원 이전에 음악제, 학술대회, 생가·고향집, 거리, 음악제·동요제 등 광주에서 20년 가까이 ‘기념 열풍’이 불고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 ‘기원’을 찾아봤다. 2002년 중국에서 그의 일대기를 조명한 영화가 나오고, 2년 뒤 광주 남구청이 학술대회를 개최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중국 정부 고위관계자가 광주를 찾아 정율성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생가를 찾는 중국 관광객들이 늘어났다는 기사가 검색됐다.
기념 열기는 더 뜨거워졌고 광주 남구와 전남 화순군이 ‘우리 고장 사람’이라고 다투는 일도 벌어진다. 정율성은 20년간 광주에서 가장 빛나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작 정율성이 ‘추앙’받는 이유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광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중국의 3대 작곡가라는 평가만으로 “안중근, 윤봉길도 못 받는 호사”를 누린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음악가로서 그의 업적 때문에 수많은 중국 관광객이 온다”고 한 강기정 광주시장도 사실 잘 모르는 게 아닐까 싶다. 당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진보정권 아래 중국에 우호적인 기류가 조성됐고, 지자체들의 관광 활성화 논리가 더해져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맹목적인 기념 경쟁이 일어난 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6·25 때 북한군 ‘응원대장’으로 서울까지 내려와 전투를 독려했다는 사실을 광주시민들이 알고도 각종 기념사업에 동의했을까? 최근 광주 분위기를 보니 그 또한 아니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광주시는 “이미 진행 중인 사업이라 중단하기 어렵다”고 할 게 아니라 여론을 다시 수렴해 사업 재정비에 나서는 게 옳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와의 대결을 천명한 뒤 역사 논쟁에 불을 댕긴 듯한 여권이 정율성 문제를 지적하고 나선 것은 적절한 ‘타깃팅’이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의 나쁜 습속 중 하나는 뭔가 유리하다 싶으면 ‘적정선’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승만 기념관, 백선엽 재평가에 이어 정율성까지 상식선 안쪽에서 움직이는 듯하던 여권발 ‘역사 바로세우기’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걸고 넘어지면서 균형감을 잃은 느낌이다. 철거가 아니라 독립기념관이라는 적절한 장소로 옮기는 것이라는 설명도 그의 소련 공산당 가입이 이전 배경이라는 군의 설명으로 설득력이 없어졌다. 100년 전 타국에서 외롭게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 그의 항일투쟁 공적을 가릴 만한 이유가 될까. 1943년에 작고한 그는 해방 이후 혼란상은 물론 6·25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복무에 대해서는 나라 잃은 청년의 선택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느냐던 여권이 청년 홍범도의 공산당 가입을 문제 삼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이중잣대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다.100% 객관적인 역사는 있을 수 없고 현재의 시각을 통해 끊임 없이 재해석된다는 것이다. 권력자는 지배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항상 역사에 개입하려는 욕구를 느낀다. 정권 교체 이후 어김 없이 역사 논쟁이 발생하는 이유다.
그러나 권력이 섣부르게 역사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는 항상 반작용을 불렀다.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그랬고, 6·25 때 공로로 김일성 훈장까지 받은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로 묘사한 문재인 정부의 서훈 시도 역시 논란 끝에 좌절됐다. 우리의 경우, 근현대사의 굴곡이 컸고, 이해 당사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점에서 역사 논쟁은 그 어느 나라보다 민감한 소재다. 아무리 선의에서 출발해도 국민 공감대를 모으면서 지극히 조심스럽게 끌어가지 않는 이상 ‘역사 전쟁’으로 비화돼 국론 분열만 더할 뿐이다.
서민들에게 이런 논쟁은 한가롭기만 한 ‘그들만의 권력 싸움’에 불과하다. 얼마 전 노동자 출신의 무명가수가 부른 노래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는 기현상이 미국 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서민 생활의 고달픔을 외면한 채 자기 잇속만 챙기는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가사가 폭발적인 반응을 불렀지만, 공화당은 “민주당이 세금을 마구 걷어서 복지에 쓰고 있는 걸 비판한 것”이라고, 민주당은 “노동조합을 강화해야 이런 불만을 풀 수 있다”며 상대를 향한 비판의 도구로 삼았다.
정작 당사자는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며 논쟁에 당혹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정치가 서민과 유리돼 그들만의 게임에 빠져있는 건 미국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지금 한국 정치권이 부딪치는 문제가 50년, 100년 뒤에도 의미를 가질까? 여권에서도 비판이 거센 홍범도 흉상 이전은 이쯤에서 재고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뭐든 과하면 탈이 난다.
2023-08-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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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재계 1위의 가볍지 않은 무게
“삼성이 하면 기준이 된다.”
삼성그룹 고 이건희 회장이 남긴 말이다. 고졸·여성 사원 차별 철폐 등 기업 경영은 물론이고 사원 복지와 사회공헌 등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서도 삼성에서 시작돼 다른 대기업으로 퍼져나간 사례들이 많다. 삼성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돌려 말하면 삼성이 주도적으로 했다가 검찰이나 정부의 매를 먼저 맞는 일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이다. 삼성은 이를 계기로 SK, 현대차, LG 등과 함께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을 탈퇴했고, 이재용 회장(당시 부회장)은 적극 가담했다며 구속까지 됐다. 이재용 회장은 당시 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해 “더 이상 개인적으로 전경련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의 시간이 흐른 뒤 현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 내부에서 전경련 부활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전경련 후속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가입해야 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삼성으로선 두 번 다시 전경련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다시 총대를 멨고, 다른 그룹사들이 뒤를 따르는 모양새가 됐다.
그나마 전경련과 삼성 실무진 간에 명분과 실리를 잘 정리하는 바람에 ‘선언’까지 했던 이재용 회장으로서도 부담은 던 상황이다. 실질적으로는 전경련에 재가입한 것이지만 그 과정은 기존 계열사들이 가입돼 있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 회원의 자동승계 형식을 띤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2014년 세월호 침몰사건, 해마다 반복되는 태풍·집중호우로 인한 수해 등 국가적 재난이나 국내외 대형 사건 발생 시 성금 액수도 삼성이 가장 많다. 올해 삼성전자는 역대급 적자를 내고 있지만 기부·성금액은 타 그룹과 비교 불가다.
과도한 액수로 논란이 되고 있는 총수들의 연봉도 삼성은 다른 대기업들과 다른 모습이다. 재계 총수들이 매년 계열사들로부터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의 연봉을 챙겨가고 있지만 이재용 회장은 6년째 ‘무보수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된 데 대한 책임 경영의 일환이라지만 각종 비위에 연루됐던 다른 총수들은 복귀 후에도 그렇지 않았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등 국가적 사업에서도 정부는 “삼성이 꼭 나서줘야…”라며 손을 내밀었다. 실제 삼수의 도전 끝에 유치에 성공한 평창동계올림픽은 고 이건희 회장의 활약이 없었으면 유치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대통령 단임제’도 재계 1위 삼성에겐 부담이다. 새로 집권하는 대통령마다 5년 안에 자신의 대선공약을 임기 내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기업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들의 고용 창출과 투자 요구에서 가장 큰 부분은 언제나 삼성의 ‘몫’이었다.
그러나 국정농단 사태에서 보듯 정부와 기업 간 유착, 그로 인한 비리들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삼성은 피해갈 수 없었고, 총수는 검찰에 불려 다녀야 했다.
고 이건희 회장이 1995년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말한 것은 수십 년간 기업인으로 있으면서 정치권과 행정부, 지자체에 겪은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와 세금은 갈수록 강해지거나 높아지면서 지원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 기업들은 정치권과 달리 세계 일류를 지향하고 그 성과물로 분야별 글로벌 1위의 성과를 내는 곳이 많다. 전자, 자동차, 조선 등의 분야에서 수십 년간 첨단 기술 개발로 막대한 영업이익을 냈고, 한국을 당당하게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특히 삼성은 세계 1위인 반도체·스마트폰 부문의 성과로 인해 2010년대부터 국내 순위보다는 글로벌 10위권 기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인터브랜드 기준 브랜드 가치도 세계 5위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이건희 회장의 발언처럼 아직도 4류다. 국회는 18대, 19대, 20대, 21대로 숫자는 올라가지만 매번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가 계속되고 있다. 현 21대 국회도 마찬가지다. 여야 정쟁으로 인한 역대 최저 법안 처리율로 각종 민생 법안들이 통과되지 못했고, 국민들에게 혼란만 초래하는 입법 등으로 비난을 샀다.
이제는 정부와 정치가 일류로 올라서 재계에 화답할 때다. 다행히 윤석열 정부 들어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각종 세제 지원안을 내놓고 있어 그나마 희망적이다.
2023-08-2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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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도대체 안전한 곳은 어디인가
“폭염 때문에 해수욕장도 못 갔는데, 내일은 흉기 난동 예고 글 때문에 서면도 못 갈 것 같고….” 이달 초 부산으로 휴가를 온 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난 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 이후 전국 주요 지하철역에 대한 살인 예고 글이 잇따르던 때였다. 지인이 걱정돼 다음 날 다시 안부를 물었다. 결국 서면을 찾았다는 그는 뜻밖에도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것 같아. 경찰이 쫙 깔려서 걱정 없겠는데.” 경찰 인력이 대거 투입된 덕분에 가장 위험할 줄 알았던 지역이 그 순간 가장 안전한 곳으로 느껴지게 된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인근에서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 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이상 동기 범죄’(일명 ‘묻지마 범죄’)에 대한 우려가 높다. 대낮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충격은 더 컸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 해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게 됐다. 2주도 채 안 돼 발생한 서현역 사건 역시 퇴근 시간대 인파가 몰리는 백화점 안팎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범죄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는 걸까. 세계가 부러워하는 ‘치안 강국’은 허상이었을까. 영국 BBC 방송은 지난 13일(현지시간) 최근 우리나라에서 잇따르고 있는 ‘묻지마 범죄’를 알파벳 ‘Mudjima’로 그대로 표기해 보도했다. 다만, BBC는 ‘한국은 여전히 매우 안전한 나라’라는 전문가의 말도 전했다. 우리나라의 살인율은 인구 10만 명당 1.3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 수준이고, 미국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뒤이어 서울 신림동에선 또 한 건의 흉악 범죄가 발생했다. 지난 17일 30대 남성이 한 공원 둘레길에서 여성을 둔기로 폭행한 뒤 성폭행했고, 의식 불명이던 피해자는 지난 19일 결국 숨졌다. 교사인 그는 방학 중에도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의자는 해당 장소에 CCTV가 없다는 점을 노렸다고 한다.
일상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범죄만은 아니다. 폭우, 폭염, 산불과 같은 자연 재해도 끊이지 않는다. 이상 기후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으면서 즐거워야 할 여행이 '지옥'으로 변하는 일도 생겼다. 지난 5월 괌에서 태풍 '마와르'에 발이 묶였던 관광객들은 그곳을 '괌옥'이라 불렀다.
이달 1일 막을 올린 ‘2023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에 참석했던 대원들에겐 폭염 속 야영장이 악몽과도 같았을 것이다. 물웅덩이, 온열질환, 벌레, 비위생적 화장실 등 각종 보건 위생 문제가 이들의 안전을 위협했다. 기후 위기 시대에 한여름 대회를 강행하면서 행사 준비에 소홀했던 주최 측의 안일함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지난달 14명의 생명을 앗아간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제2지하차도 참사는 어떤가. 3년 전 3명의 인명 피해를 낸 부산 동구 초량지하차도 참사와 판박이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컨트롤 타워 부재라는 ‘무대책 행정’은 달라진 게 없다. 역시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얼마 전 만난 기후 전문가는 해수면 상승에 대비한 국가 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바다를 낀 부산은 해변에 아파트가 많아 수해가 일상화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온난화로 한반도 근처에서 태풍이 발생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데, 만조와 같은 극단적 상황이 겹칠 경우 복합 재난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기후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말마저 생겨나고 있다. 해안가 고급 주택에 살던 부유층이 높은 지대로 이사하면서 원래 살던 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이다. 우리나라가 아직 기후 위기에 둔감한 것은 앞서 극한 재해에 맞닥뜨린 다른 나라에 비해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마저 나올 정도다.
범죄와 재난, 신종 감염병 등으로 안전한 곳을 찾기 힘든 시대다. 정부와 지자체는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상 동기 범죄의 원인이 사회적 고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들의 소외감이 범죄로 이어지지 않게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강력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CCTV 사각지대를 찾아 해소하는 섬세한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기후 위기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영국, 네덜란드, 독일의 ‘경제기후부’ 같은 부처를 신설하는 등 국가 시스템도 정비해야 한다. 재난에 대비해 생존 키트를 구비한 가방을 싸두고, 범죄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호신용품을 알아보며 하루하루 살아남아야 하는 국민들의 불안을 헤아려야 한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황궁아파트’ 같은 최후의 안전지대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출퇴근 길이든, 대낮이든 한밤이든, 언제 어디서나 안전한 사회가 진짜 유토피아 아닐까.
2023-08-2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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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이재명 혁신안, 박근혜 혁신안
혁신(革新)의 혁(革)자는 ‘가죽’을 뜻한다고 한다. 육체의 가죽을 벗겨내 새롭게 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혹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혁신위원회를 구성해 쇄신에 들어갔다. 하지만 혁신안을 놓고 친명(친이재명)계와 비명계가 다투는 것을 보니 이건 자신의 가죽을 벗겨내기보다는 상대방의 가죽을 벗기려는 권력 싸움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 정당들은 선거 패배로 위기에 처하면 너나 없이 혁신위원회를 만들어서 당을 바꾸겠다고 한다. 20년 넘게 정치권을 취재한 기자가 볼 때 자신의 가죽을 벗겨낸 혁신안다운 혁신안이 나온 것은 단 한 번뿐이었지 않나 싶다.
2005년 한나라당의 혁신안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 여론의 역풍을 맞아 백척간두에 섰다. 그 직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참패가 불보듯 뻔했으나, 비상전권을 쥔 박근혜 대표 등장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전체 의석 과반을 넘는 152석을 차지했음에도 121석을 건져낸 것이다.
당시 박 대표는 사실상 한나라당을 장악했고, 현상만 유지하면 차기 대선에서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대선 후보 선출에 당원들만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그런 방식으로는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없고, 정권교체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당의 체질도 바꾸고, 정권 교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혁신위원회를 구성해 대변신을 맡겼다.
혁신위 인적 구성부터 파격적이었다. 홍준표 현 대구시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혁신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때만 해도 홍 위원장은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검찰에서는 ‘독고다이’로 불렸고, 당에 와서는 지도부의 명령도 씹어서 뱉어버리는 ‘꼴통’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박 대표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뚜렷한 반대파였다. 홍 위원장은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나와 박 대표와 직접 경쟁했다. 박 위원은 2년 뒤 박 전 대통령을 꺾고 대선 후보를 쟁취한 이명박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이들이 내놓은 혁신안은 그야말로 ‘박근혜의 가죽’을 벗기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일반 국민 참여를 50%까지 늘렸다. 또 대선 1년 6개월 전에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도록 했다.
한나라당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온 박 대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혁신안이었다. 친박(친박근혜)계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6월에 성안작업이 끝난 혁신안은 11월까지 당헌·당규에 반영되지 못했다. 그해 8월 30~31일 이틀간 밤을 새우면서 10시간 넘게 진행된 마라톤 회의는 당의 분열을 재촉하는 듯했다. 혁신위원장 홍준표는 “대표는 혁신위에 간섭말라”고 친박계의 외압을 차단했다. 그는 심지어 “혁신안이 시행되면 기존 당대표 임기는 중단된다”면서 박근혜의 대표직 사퇴까지 거론했다.
박 대표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혁신안을 받자니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격이고, 거부하자니 비주류의 반발이 만만찮았다.
당시 박 대표와 가까운 인사의 전언은 이렇다. “대표(박근혜)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결론을 내렸다. 첫째는 당이 깨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어느 안이 정권 교체에 더 도움이 되는지였다.”
그해 11월 14일 한나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친박들은 표결을 해서 혁신안의 운명을 정하자면서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박 대표는 이들을 외면하고 전격적으로 혁신안 수용을 선언했다. 박 대표는 “의원 여러분이 대부분 혁신안 원안대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으로 느꼈다”며 “굳이 표결하지 않고 혁신안 원안대로 가자”고 정리했다.
20년 전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지금의 민주당뿐만 아니라 어느 정당이라도 혁신 작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 혁신작업은 인선부터 고만고만했다. 혁신위원장으로 처음 거론됐던 이래경, 노인폄하 논란을 빚은 김은경 혁신위원장 모두 이 대표의 가죽에 칼을 댈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김은경의 혁신안은 이 대표의 가죽을 벗겨내기보다는 오히려 그 가죽 위에 갑옷까지 입혀준 꼴이다. 혁신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혁신의 최종 목표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민주당의 내년 총선은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2023-08-1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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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광복절과 ‘신 냉전’
“우리가 총을 겨누며 들이닥치자 부엌을 뒤지던 인민군이 뒤를 돌아보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아이였어. 배가 많이 고팠겠지. 아이라도 총을 갖고 있으니 총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어.”
평소 거의 말씀이 없으셨던 외조부께서 그날은 약주를 드시고 전쟁의 기억 한 자락을 들려주셨다. 경상도의 어느 시골에서 농사짓던 외조부는 6·25 전쟁 때 군인으로 참전하셨다.
무쇠처럼 단단했던 외조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같이 행군하며 고향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가 폭격으로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거나 인민군 시체들을 무슨 물건처럼 구덩이에 묻은 경험을 들려주실 때는 긴 침묵이 함께 했다. 외조부의 침묵은 고통을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생각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조부를 전쟁터에 보낸 외조모의 이야기도 믿기 힘들었다. 이장이 동네 공터에 마을의 성인 남자들은 다 모이라고 한 후 트럭을 타고 다 같이 이동했는데, 그것이 징집의 시작이었다. 트럭에 올라탄 외조부를 발견하고는 ‘어딜 가냐, 언제 오냐’고 물었더니 ‘오래 안 걸린다’는 답을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1년이 넘도록 외조부와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손가락이 잘리고 다리를 다친 외조부가 돌아왔을 때 놀라기도 했는데, 그나마 살아 돌아왔으니 다행으로 여겼다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외조부는 포탄 파편을 맞아 후방으로 이송 되면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였다.
두 분의 전쟁 경험담을 떠올릴 때마다 평범한 촌부가 어린 아이에게 총을 겨누게 되고, 수없는 이들의 처참한 죽음을 시도 때도 없이 떠올리고, 마을에서 혼자 살아왔다는 미안함을 평생 안고 살게 되는 것이 전쟁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6·25 전쟁 발발 5년 전 우리 민족이 맞이한 광복이라는 사건은 일제 암흑기를 벗어나, 말 그대로 ‘빛을 회복’한 거대한 희망의 이벤트였다. 하지만 냉전이라는 국제 질서 속에 광복은 분단과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고도 그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한반도 최대 비극인 6·25 전쟁으로 치닫게 됐는지, 학교에서 광복과 이후 시대를 배울 때 굉장히 의아했고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치열했던 항일의 역사와 외조부모를 비롯해 전쟁과 전후 많은 이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광복 이후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자문을 하기도 했다. 좌측 여운형과 우측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이 만약 성공했다면? 냉전의 극한 대립 속에서도 중립국 지위를 갖고 번영했던 유럽의 몇몇 나라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선명성이 부족한 이들은 세력을 모으기 힘든 것인지, 양극단에 서 있던 이들이 정국의 중심축이 됐고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흐지부지됐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무정부 상태의 힘없는 나라를 기다린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신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올해 광복절을 맞는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탈 냉전 시대를 맞은 지 불과 30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다시 우리는 냉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냉전은 열전의 형태로도 비화했다. 세계가 협력하며 자유롭게 오가고 무역하던 시대에서, 강대국을 중심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분위기가 강화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금융위기 이후 불완전함을 노출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국 중심 체제로 재편되는 움직임을 가속화 시켰다.
탈냉전 시대의 번영을 이끌던 미국과 영국은 각각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 이후 세계와 맞잡은 손을 놓아버리고 자국 중심주의를 공언하고, 러시아와 중국은 민족주의에 기반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와중에 우리나라는 미국의 동맹 중심 정책에 적극 호응하며 신 냉전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열강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국가가 엄청난 불행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안다.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이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광복 후 극심한 분열과 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은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 경험이 신 냉전 시대를 넘는 지혜로 확장되길 광복절을 맞아 다시 한번 간절하게 바란다.
2023-08-1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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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섬뜩한 살인예고가 놀이라니…
“8월 4일 금요일 오후 6시에서 10시 사이 오리역 부근에서 칼부림하겠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경찰도 죽이겠습니다.”
“내일 지하철 서면역 5시 식칼 들고 찾아가겠다.”
지난 3일 광란의 차량 질주와 흉기 난동으로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친 ‘분당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이후 전국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살인 예고 글의 일부다. 누군지 모를 작성자의 자포자기 심정과 세상을 향한 적의가 선명하게 녹아 있어 섬뜩함을 자아낸다.
지난달 21일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2주 만에 발생한 서현역 칼부림 사건은 범행의 잔혹성과 납득할 수 없는 동기만큼이나 비슷한 무차별 흉기 습격이 언제 어디서든 나와 내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흉기를 들고 덮칠 것 같아 주변을 흘낏거리고, 큰 소리만 나도 심장이 내려앉는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치안 강국이라고 자부했던 대한민국이 불과 며칠 새 살벌한 감시사회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이 같은 흉흉한 분위기에 불안감을 한층 가중시키는 것이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살인 예고’ 글이다. 온라인상에 단순히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막연한 토로부터, 구체적인 범행 일시, 장소와 대상을 지목하고, 흉기사진까지 첨부한 협박글까지 형식도 다양하다. 현재까지 경찰에 신고된 살인 예고 글만 200건이 넘는다.
신고가 접수될 때마다 경찰은 예고문에서 지목된 장소에 경찰력을 투입해 ‘거수자’에 대한 검문검색을 펼친다. 장갑차와 총기로 무장한 경찰들이 경비를 펼치는 살풍경 속에 시민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당 장소 방문을 꺼리고, 유동인구가 끊기면서 장사를 망친 상인들은 울상이다.
유례없는 ‘살인 예고 광풍’에 대한민국 사회 불안 조장과 국가 시스템 마비를 획책하는 반국가세력의 조직적인 준동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경찰에 붙잡힌 살인 예고 글 게시자의 절반 이상이 10대 청소년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실제 살해 의도가 없는 단순 장난이었다” “단순 어그로(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내용의 글을 올리는 것)였는데 사건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는 말로 선처를 호소한다.
이들의 말에서는 반공동체적 범죄인 살인 협박을 일종의 ‘인증 챌린지’나 인터넷 놀이문화 쯤으로 치부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그 기저에 깔린 것이 온라인게임에서 유행하는 ‘트롤링(trolling)’이라는 행태다. 북유럽 신화 속 사람을 괴롭히는 괴물 ‘트롤’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함께 즐기는 팀 게임에서 고의로 자기 역할을 하지 않거나 다른 팀원을 방해해 자기 팀에 패배를 안기는 것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팀이 이기기 위해 내 역할을 한다’는 게임의 룰을 깨고, 팀원들의 시간과 노력을 무위로 만들면서 전체 게임을 망친다. 실력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지 못하니 스스로 판을 깨서 내가 승부를 결정지은 핵심 존재라는‘미친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화를 내고 괴로워하는 것을 오히려 즐긴다. 이 같은 행태가 유행처럼 번지다 보니 ‘민폐’를 일종의 놀이처럼 인식할 만큼 도덕성이 둔감해졌고, 급기야는 ‘살인 예고 릴레이’라는 극단적인 행태로 표출됐다.
이들은 자신이 쓴 살인 예고 글이 인터넷에서 주목 받고, 불안해진 사람들이 만남을 취소하는 등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폭염 속 중무장한 경찰이 출동하고 뉴스에 보도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화 속 양치기 소년처럼 자기 도취감에 빠졌을 법하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되는 게 싫고, 내 만족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감정이나 피해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 피의자 조선의 삐뚤어진 열등감이 이들에게서도 엿보이는 이유다.
유사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쟁일변도의 억압된 교육환경이라느니, 미래를 잠식당한 청년세대라느니,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진 불공정사회라느니 하는 사회구조적인 분석이 잇따른다. 하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내가 중요한 만큼 남도 중요하며,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기초 상식의 회복이다. 젊은 여교사의 극단적 선택으로 불거진 최근의 교권 침해 논란이나 각종 갑질 사건에서 보듯 나와 내 자식이 잘 되기 위해서라면 남의 고통쯤이야 알 바 아니라는 ‘내 자식 제일주의’가 ‘우리 곁의 예비 살인마’를 키우는 토양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2023-08-09 [1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