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크 칼럼] 인구 절벽에서 살아남기
“제 주변 20대 친구들 대부분 부산에서 살고 싶어해요. 문제는 좋은 일자리가 없다는 거죠. 공무원, 교사, 공기업 직원 아니면 괜찮다 할 직장이 없으니 다 떠날 수밖에요. 그나마 요즘은 원격근무가 가능해진 IT 업계 친구들이나 자영업자 정도만 지역에 남아있어요.”
“공공기관 지역 이전이나 균형 발전을 이야기하면 서울, 수도권의 것을 빼앗겠다는 걸로 보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수도권만으로 국가 발전을 견인할 수 있을까요? 수도권과 지역, 양 날개로 날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경제성장의 새 동력, 한 축으로 동남권을 바라봐 주면 좋겠습니다.”
최근 만난 부산의 20대, 30대 직장인의 토로다. 요즘은 어떤 모임에 가도 지방 소멸, 인구 유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간 인구 수에서도 인천에 밀려 ‘제2도시’ 위상을 뺏기게 생긴 부산의 위기감 때문일 거다.
실제로 통계청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2022년 국내인구이동통계’에 따르면 인천(1.0%)은 세종(2.7%)에 이어 두 번째로 순유입률이 높은 지역으로 나타났다. 반면, 부산(-0.4%)은 울산(-0.9%), 경남(-0.6%) 등과 함께 순유출률이 높은 지역 5곳에 포함됐다.
날이 갈수록 수도권 집중 현상은 완화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이제는 서울, 경기에 이어 충청권까지 수도권에 편입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지난해 국내인구이동통계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확인된다. 수도권과 중부권으로 인구가 순유입되는 동안 영남권은 전 연령층에서 순유출이 발생했다. 수도권으로 3만 7000명이 순유입된 반면, 영남권에서는 6만 1000명이 순유출됐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어서 지역을 떠나는 청년층의 이동도 수치로 드러난다. 부산대와 부산외대, 부산가톨릭대, 대동대학 등 캠퍼스가 밀집한 부산 금정구는 전국에서 순유출률이 높은 시·군·구 3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학교가 많은 부산은 20~24세 인구의 유입이 많은 반면, 졸업후 일자리가 없어 25세 이상 청년이 꾸준히 유출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부산의 한 도시계획 전문가는 부산의 인구 이동 패턴과 관련해 “지난 20년 간 바뀐 게 하나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균형 발전 필요성에 대해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정부가 수도권 집중화 문제를 수십 년째 방치하고 있는데 변화가 있을 수 있겠냐는 설명이다. 그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지역의 인구 유출을 막을 방법이 없다. 부산에서 나가는 길과 다리를 몽땅 끊는 수밖에….”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보탰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지역을 떠나야만 하는 청년들. 그렇다면 수도권에 사는 청년들은 과연 행복할까? 이들은 인구 과밀로 인한 높은 집값, 장거리 출퇴근 등 치열한 생존 경쟁에 시달린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0.59명에 그친다. 같은 분기 역대 최저를 기록한 우리나라 전체 합계출산율(0.79명)은 물론, 부산의 합계출산율(0.73명)보다 낮아 전국 꼴찌다.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의 획기적 정책 전환이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한다. 수도권 과밀 문제를 이대로 방치하는 건 국가 전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도권 집중을 부른 1960년대식 성장 거점 개발로는 저출생, 인구 절벽 시대를 건널 수 없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사는 기형적인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수도권 집중화 사례로 꼽히는 일본만 해도 전체 인구의 30% 정도만 수도권에 거주한다. 일본 정부는 적극적인 인구 분산 정책으로 2019년부터 지방 이주지원금 제도를 운영 중이다. 올 4월부터는 지원금을 3배로 늘려 수도권에서 지역으로 이사하는 가족에게 18세 미만 자녀 1인당 약 1000만 원(100만 엔)의 현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다만, 이런 현금 지원 방식은 실효성 논란이 있다.
보다 효과적인 대안으로 좋은 일자리가 지역에 골고루 분산될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나라도 지역 이전 기업에 세금을 깎아주는 ‘법인세 차등화’ 같은 파격적인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세계 최대 원전 밀집도로 고통 받고 있는 동남권 주민을 생각하면 ‘전기요금 차등화’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까지 보내기 위해 발생하는 송전 비용과 송전탑 인근 지역 주민의 피해까지 고려한다면 수도권이 더 높은 전기 요금을 내는 것이 마땅하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요금, 법인세 인하와 같은 직접적인 세제 혜택으로 기업 이전을 끌어낸다면 일자리 부족, 인구 감소와 같은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가 만난 한 지역 청년의 말처럼, 수도권이라는 하나의 날개로는 우리 경제도 더 이상 비상할 수 없다.
2023-02-01 [17:57]
-
[데스크 칼럼] 이재명의 당헌, 문재인의 당헌
2021년 1월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장.
그해 4월로 예정된 부산시장·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문 대통령에게 곤혹스런 질문이 던져졌다. 더불어민주당이 당헌을 바꿔 해당 보궐선거에 후보를 공천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다.
민주당은 야당 시절이던 2015년 4·29 재보선 패배 후 혁신위원회를 만들어 당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하여 재·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아니한다’(당헌 제96조)는 원칙이 만들어졌다. 당시 당대표는 문 대통령이었고, ‘문재인의 정치적 올바름’을 상징하는 조항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오거돈 부산시장,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 비위 사건으로 보궐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은 대한민국의 제1, 제2 도시를 반드시 사수하라는 강성 목소리에 휘둘려 당헌을 바꿔버렸다.
문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답했다.
“제가 당대표 시절 만들어졌던 당헌에는 단체장 귀책사유로 궐위가 될 경우 재보선에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헌법이 고정불변이 아니고 국민의 뜻에 의해 언제든지 개정될 수 있듯이 당헌도 고정불변일 수 없습니다. 제가 대표 시절에 만들어진 당헌이라고 해서 신성시될 수는 없습니다. 당헌은 종이 문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당원들의 전체 의사가 당헌입니다. 민주당 당원들이 당헌을 개정하고 후보를 내기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민주당의 선택과 당원의 선택에 대해 존중한다는 생각입니다.”
3개월 뒤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당시 경기도지사이자 대선주자였던 이재명 현 민주당 대표는 생각은 달랐다.(2020년 7월 2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정치인은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장사꾼도 신뢰를 유지하려고 손실을 감수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얼마에 팔기로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가격이 폭등해서 누가 2배로 주겠다고 하더라도 그냥 옛날에 계약한 대로 팔죠. 장사꾼도 신뢰가 중요하잖아요.(중략) 우리 당원이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면 무책임한 소리가 아니냐 하겠지만, 당연히 엄청난 손실이고 감내하기 어려운 게 분명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국민한테 약속을 했으면, 공당이 문서로, 규정으로까지 정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게 맞고요. 무공천하는게 저는 맞는다고 봅니다.”
당시 이 대표는 ‘친형 강제 입원’ 의혹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으로 대선 출마의 길이 열리면서 기사회생한 상황이었다. 누구보다 ‘선명성’이 뚜렷한 이재명스러운 발언이었다.
요즘 대선에 패배한 이 대표가 검찰청을 들락거리고 있다. 그러자 민주당에서는 또 다시 당헌 개정 문제가 불거졌다. 아니 지난해부터의 진행형이라고 해야한다.
제80조(부패연루자에 대한 제재) 1항이 그것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전당대회를 앞두고 ‘부정부패와 관련한 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각급 당직자의 직무를 기소와 동시에 정지한다’는 조항을 ‘금고 이상 유죄 판결 시 정지’로 바꾸려 했다.
대장동 개발, FC 성남 후원금 의혹 등 각종 사건에 연루된 이 대표가 기소될 때를 대비한 당헌 개정이라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나왔다. 그러자 비상대책위원회가 수습에 나서 1항은 그대로 나두고, 3항을 개정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개정된 3항은 ‘정치탄압 등 부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당무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달리 정할 수 있다’다. 원래는 당무위원회가 아닌 ‘윤리심판원’이 그 결정을 하도록 돼 있었다.
윤리심판원은 외부 인사가 원장을 맡고, 당무위는 당대표가 의장이 된다. 이 대표에 대한 직무정지 판단을, 이 대표가 의장을 돼 당무위에서 ‘셀프’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청래 최고위원 같은 친명(친이재명)계 인사들은 당헌 80조를 아예 폐지하겠다는 주장도 한다.
2년 전 문 대통령은 당헌을 꼼수로 개정하는 쪽으로 손을 들어줬다가 명분도 잃고, 선거도 패배하는 쓰라린 아픔을 맛봤다. 그게 결국 정권 재창출 실패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당이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당헌을 바꾼다면 이 대표가 좀 더 자리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장사꾼들도 신뢰가 중요하다’고 한 이 대표의 과거 발언은 또 다시 부메랑이 되어 이 대표 뿐만 아니라 민주당을 가격할 것이다.
2023-01-30 [18:35]
-
[데스크 칼럼] 계묘년 부산의 행운을 기원하며
한때 한국 사람들은 체감 나이를 실제 나이의 0.8배로 생각한다는 주장이 화제가 된 적 있다. 가령 실제 나이 40세이면 스스로는 32세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체감 나이 계산 공식의 근거는 의료나 안티에이징 기술의 발달로 육체적 나이가 20%가량 젊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0.8’이라는 상수는 유례없이 빠른 속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고령화를 근거로 산출됐다. 젊은 사람들이 20년 전보다 20%가량 줄면서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 역할을 하다 보니 스스로를 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3년 한국의 평균 나이는 34.5세였고, 2023년은 44.5세(추정치)이니, 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 같다.
부산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체감 나이 0.8배설’이 떠오르곤 했다. 이 주장이 맞다면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부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체감 나이를 훨씬 적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할 것이다.
부산은 2021년 9월부터 65세 이상 인구가 20.04%를 기록하며 전국 광역시 중에서 처음으로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20% 이상)로 진입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부산 인구(331만 7812명) 중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71만 2412명(21.5%)에 달해 그 사이 1.5%P나 늘었다.
부산이 급격하게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것은 젊은이들의 역외 유출, 특히 수도권 이동 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수도권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2011년 전국 대비 수도권 인구 비율은 49.3%(2498만 8368명)이다가 2020년에는 50.2%(2603만 8307명)까지 증가했다.
수도권의 인구 증가는 부산을 비롯해 전국의 젊은이들을 빨아들인 덕분이었다. 수도권 청년(20~34세) 인구는 전국 청년 인구 대비 2011년 52.4%(563만 5943명)에서 2020년 54.7%(544만 3155명)까지 높아졌다.
젊은이들이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10년간 부산 청년(25~34세)의 수도권 순유출 경향은 점점 뚜렷해졌다. 해마다 평균 9000명가량이 수도권으로 빠져 나갔으며, 연령별로는 대학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시기인 25~29세 순유출이 가장 높았다.
부산에 양질의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청년 인구 유출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청년 인구의 수도권 집중화 현상, 즉 일자리의 수도권 집중을 막지는 못했다.
부산시는 올해를 청년 정착을 위한 원년으로 선포하며 일자리·생활·활동·거버넌스 등 4대 분야에 2233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청년을 채용하는 430개 회사에 인건비를 지원해 2000여 명의 청년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청년들의 목돈 마련을 위해 납입한 금액의 두 배를 받을 수 있는 '부산청년 기쁨두배통장'의 신규 대상자를 모집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단기적으로나마 당장 지원이 필요한 부산의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올해는 부산 청년들에게 중요한 분기점이다. 산업은행이 정부 로드맵처럼 1분기 이전 고시 지정을 거쳐 연내 부산 이전 계획이 승인된다면, 부산은 아시아 금융 허브로 비상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올해 11월 유치 여부가 결정 되는 2030부산세계박람회의 경제적 파급 효과는 49조 원에 달하며 54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 될 것으로 추산된다. 월드컵과 올림픽 대비 4배 이상 규모다.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계기로 가덕신공항 개항 등 주요 도시 인프라가 대규모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지역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관광산업의 활성화뿐만 아니라 철도와 항만, 항공 인프라가 연계되어 최대 규모의 동북아 물류 거점으로 부산이 거듭난다면 수도권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젊은이들의 행렬을 충분히 멈출 수 있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콘텐츠에 매료된 글로벌 문화콘텐츠 기업들이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계기로 북항과 해운대 등으로 몰려와 끼 많은 부산 젊은이의 놀이터가 되는 모습도 상상해 본다.
연초가 되면 한 해 동안 행운이 함께해서 좋은 일이 벌어지길 바라게 된다. 부산이 ‘노인과 바다’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청년들에게 좋은 도시(Busan is good for young)’로 도약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간절하게 기원한다.
2023-01-25 [18:29]
-
[데스크 칼럼] “챗 GPT야, 기자생활 몇년 더 할 수 있을까”
2013년 옥스퍼드 대학교 마틴스쿨은 ‘향후 10~20년 안에 사라지는 직업과 남는 직업’ 보고서를 통해 컴퓨터 기술 발전으로 20년 이내에 현재 직업의 약 47%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기자직의 경우 20년 내 사라질 확률이 11%로 582개 직업 중에서 158위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신문은 만성화된 위기 속에서도 아직은 큰 탈 없이 한 해 한 해 생존을 이어가고 있고, 기자들도 하루하루 마감과 싸워나가는 것을 보니 보고서에서 기한으로 명시한 앞으로 최소 10년 동안은 기자직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낙관적인 전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전기가 왔다. 세계 최대 인공지능 연구소인 ‘오픈AI’가 지난해 말 인공지능 대화형 챗봇인 ‘챗(chat) GPT’를 내놓으면서 부터다.
챗 GPT는 네이버 검색처럼 키워드를 입력하는 방식이 아닌 대화하는 것처럼 물어보면 되고, 단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맥락까지 포함해 완결된 구성의 글을 만들어낸다. 대학교 레포트는 물론 전문 연구자들조차 걸러내지 못할 수준의 논문까지 작성해낸다고 하니 교육현장이 초토화될 것이라는 위기음이 벌써부터 들려온다.
글로 먹고 사는 기자라고 사정이 다를까? 해서 챗 GPT가 기자로서 대성할 만한 자질을 갖고 있는지, 기자 직업에 종언을 고할 최후의 심판자가 될지를 가늠해보기 위해 기사 작성 테스트를 해봤다. 챗 GPT 사이트에 접속해 “코로나19 이후 소비 패턴 변화에 대해 기사를 써줘”라고 쳤다. 채팅창 속 커서가 몇 번 깜빡이더니 30초도 안 돼 원고지 5매 분량의 기사를 쏟아냈다. 온라인 쇼핑, 택배 서비스, 디지털 소비 증가에 더해 지역적이고 지속 가능한 소비로의 전환까지 속칭 ‘기사 야마(핵심)’에 맞춰 완결된 기사를 써냈다. 훌륭하다고까지는 못해도, 통계 수치나 현장감만 가미한다면 당장 신문에 실어도 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특히나 기자의 제1 덕목인 마감 엄수는 두말할 것도 없지 않나? 수습기자 지원자였다면 일단은 합격을 줬을 것 같다.
내친 김에 면접까지 봤다. 좋은 기사가 뭐냐고 묻자 “정확한 정보와 타당한 인용과 증거를 제공하고, 작성자의 관점과 의견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읽는 이들이 서로 다른 인식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된 기사”라고 답했다. 기자 직업이 몇 년 후에 사라질 것 같은지 의견을 물었다. “고도화된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기사를 작성할 수 있지만, 인공지능이 작성한 기사를 검증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추가하는 것은 인간 기자의 역할이 될 것이다. 또한 인터뷰, 사실 확인, 사람들과 상호 작용 등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힘든 부분도 있을 것이다. 기자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역할과 방식으로 재정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로봇 기자’들에게 인간 기자들이 물 먹지 않으려면 어떤 기사를 써야 하는지 물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면접을 보는 게 아니라 숫제 조언을 구하는 모양새가 됐다. “기자들은 인공지능보다 더 복잡한 판단력과 창의성을 갖고 있으므로, 더 어려운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창의성을 요구하는 인터뷰, 논쟁, 칼럼, 비즈니스, 스포츠, 사회 등 인공지능이 처리하기 힘든 다양한 주제의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일부 기자들이 현재 유행하는 이슈를 따라가는 기사를 작성하는데 몰두하면서, 시민들이 중요한 이슈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게 만든다. 언론사나 기자 개인의 이익을 위한 기사나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는 기사가 만연하면서 언론이 신뢰를 잃고 위기를 초래했다”는 쓴소리까지 했다.
채팅창을 닫으면서 느낀 점은 인공지능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스마트하게 기사를 잘 써내고, 인간미 없게 입바른 소리를 잘한다는 것이다. 당장은 기존 정보를 짜깁기한 기사를 작성하는데 능통한 수준으로 보이지만, 머지않아 속보나 탐사 보도 분야에서도 인간 기자를 압도할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은 초연결사회 곳곳에 흐르고 있는 사건사고나 이상 징후 등을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신속 정확히 캐치하고, 관련 빅데이터를 심도 있게 분석해 중요한 의미를 도출하며 특종 경쟁을 주도해나갈 것이다. 인공지능이 기자의 든든한 동료가 될지, 충실한 조수가 될지 혹은 선배 책상을 빼는 매몰찬 후배가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어쨌든 신년벽두부터 기자보다 ‘기레기’라는 멸칭으로 더 흔히 불리는 직업군에 속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 ‘터미네이터’ 속에서 인류를 파멸로 이끈 인공지능의 반격이 기자직군에서는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서스펜스를 느꼈다.
2023-01-18 [18:11]
-
[데스크 칼럼] 디지털자산거래소 본격화가 ‘웃픈’ 이유
지난해 여름이었다. 정확히는 2022년 8월 9일이다. 그날 기자는 ‘디지털자산거래소, 아직도 좌고우면?’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부산일보 바로 이 지면에 게재했다. 디지털자산거래소를 만들겠다던 부산시가 1년 넘도록 거래소 청사진만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산시가 좌고우면하는 동안 부산 거래소에 대한 금융·가상자산 업계의 관심은 차갑게 식어갔다. 당시 기자는 칼럼 말미에 “부산시는 더이상 좌고우면하다 적기(適期)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애타는 마음을 적었다.
다시 겨울이 오고 해가 바뀌었다. 아쉽게도 당시 기자의 애타는 마음이 부산시에 제대로 전달되지는 못한 것 같다. 지난해 8월 칼럼 이후로도 거래소는 여전히 좌고우면, 지지부진을 반복했다. 9, 10월에 나올 것이라던 사업자 모집 공고는 해를 넘겨도 소식이 없고, 지난 한 해 동안 부산 거래소 설립을 위해 협력한다고 맺은 수많은 업무협약(MOU)는 온데간데없다. 그렇게 2022년을 흘려보내더니, 연말에 이르러서야 부랴부랴 디지털자산거래소 설립 추진위원회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거래소 설립을 추진하던 시청 전담부서의 역할 대부분을 추진위로 넘겼다.
부산시는 “이제 추진위도 생긴 만큼 본격적으로 거래소 설립을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2년 가까운 기간 동안은 마치 ‘본격적’으로 일하지 않았다는 말투다. ‘본격적’인 설립 움직임에 앞서 그저 준비운동 중인 부산시에 무작정 서두르라 재촉했으니, 그 무용한 애태움이 부산시에 전해졌을리 만무하다. 김상민 추진위원장은 거래소 구상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완전히 결정된 것은 없다”며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든 다시 청사진이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부산시의 좌고우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물론 최근 급변하는 디지털자산 시장 환경의 변화를 고려할 때 ‘원점 재검토’를 말하는 추진위의 입장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당장 금융당국이 이달 중 발표하기로 한 ‘STO(증권형 토큰) 가이드라인’에서 STO를 자본시장법 규제 아래 두기로 할 경우(이미 그런 암시는 충분히 넘쳐난다), 기존 부산 거래소의 증권형(STO)·비증권형(가상자산) 거래소 이원화 구상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자본시장법 적용을 받게 되면 기존 증권 매매를 담당하는 한국거래소가 STO 거래를 맡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너무 뜸을 들이다 밥을 태웠다”은 지적이 유독 자주 들린다. 실제로 지난달 부산금융중심지포럼에 참석한 패널들 역시 “오히려 규제 움직임이 구체화되기 전에 빠르게 거래소를 설립했어야 했다”는 한 패널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부산 거래소가 이미 구체화됐더라면 STO 규제가 부산 거래소를 고려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부산 거래소가 STO 규제를 고려해 그 모양새를 만들어야 할 상황이다.
부산 거래소가 STO 매매 기능을 포함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IEO 기능만큼은 가져와야 한다. IEO(Initial Exchange Offering)는 ‘가상자산 상장 전 검증 절차’를 뜻하는 용어로, 증권시장의 기업공개(IPO)와 유사한 개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가상자산 상장은 불법이며, 이를 허용하겠다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대선공약이다. 매매는 민간 거래소가 자유롭게 담당하더라도 상장만큼은 공공성을 띤 기관이 해야 한다.
해외 여러 나라들이 공공 가상자산거래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최근 정부 주도의 거래소를 연내 출범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민간 거래소들이 각자의 플랫폼을 통해 가상자산 매매를 하고, 정부 거래소는 하나의 전산망으로 이를 관리하는 형태가 될 전망이다. 현지 언론은 “나스닥과 유사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거래소 아래 회원사를 두고 회원사별 플랫폼으로 매매토록 하는 부산 거래소의 구상과도 닮았다. 한국으로 치면 코스피·코스닥 시장과는 별개로 가상자산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코스피·코스닥 시장은 모두 서울에 있다. 가상자산 시장만큼은 블록체인 특구 부산에 두자는 것도 크게 억지스럽지 않다.
공은 추진위로 넘어갔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많이 늦었다. 그런 만큼 추진위의 책임이 무겁다. 신속하게 방향을 정해 움직여야 한다. 지난 2년 간의 부산시처럼 계획서를 썼다 지우기만 되풀이하진 않길 바란다. 계획서는 첫사랑의 연애편지가 아니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봐야 그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시장의 신뢰만 잃을 뿐이다.
2023-01-16 [18:22]
-
[데스크 칼럼] 도민중심의 경남도정… 대권과 멀어져야
‘도민과 함께 경남의 새로운 희망을 만들겠습니다.’
민선 8기 박완수 경남도지사의 올해 신년사 제목이다. 그는 취임 6개월을 넘긴 상황에서 ‘도민 중심의 도정’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도지사의 언사가 왜 신년사 제목으로 나왔을까? 답은 과거 경남도정을 살펴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사연이 있다. 민선 8기에 이르는 동안 경남도정은 대권(대통령)과 연관이 많았다.
민선 1~7기 도지사 행보는 자의든 타의든 대권과 무관하지 않았다. 도정에 미친 영향은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많았다. 그들의 행보는 세월 속에 잊혀지고 있지만 재임 때 도정 슬로건(구호)은 남아 있다.
슬로건은 자신의 도정 철학을 집약하고 야심찬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과거 도정 슬로건을 곱씹어보면 도민 중심보다 도지사의 입신양명을 위한 메시지가 더 많았다는 지적이다. 행정이 정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휘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표적 부작용은 도지사 중도 사퇴로 인한 행정 공백과 정책 연속성 훼손이다.
1~3기 김혁규 전 도지사는 중도사퇴 명분을 ‘국가 발전의 대의를 위한 결단’이라고 밝혔다. 정계로 진출한 그는 국무총리 꿈이 좌절됐고, 대선에는 나서지도 못했다.
3~4기 김태호 전 도지사 재임시절 행보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당시 3선 도지사 공천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던 상황에서 갑작스레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도정 슬로건은 ‘세계로 미래로 뉴 경남’이었다. 재임 동안 중앙 무대로 진출하고자 하는 정치적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추진해 왔던 ‘남해안 시대’는 후임들의 흔적 지우기로 인해 물거품으로 변했다.
5기 경남도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당시 무소속 김두관 야권단일후보의 당선이었다. 그의 도정 구호는 ‘대한민국 번영1번지 경남’으로 장대했다. 하지만 그는 취임 2년여 만인 2012년 7월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위해 도지사를 그만뒀다.
5~6기 홍준표 전 도지사는 2012년 12월 대선과 함께 치러진 보궐선거로 당선됐다. 그의 슬로건은 ‘당당한 경남시대’였다. 당시 중앙 정치권에 활동하다 내려온 그는 자신의 존재감과 힘을 보여주기 위해 ‘당당한’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치러진 대선에 나서기 위해 임기를 1년 이상 남기고 중도사퇴했다. 7기 김경수 도정 슬로건은 ‘함께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경남’이다. 그는 2021년 7월 대법원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 당선을 위해 포털사이트 댓글을 조작한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를 전제로 ‘대권 후보’로 거론됐다. 그는 재임 중 구속과 낙마로 두 번의 도지사 권행대행 체제를 야기했다.
이처럼 역대 경남도지사 행보는 도민중심이 아니라 대권을 꿈꾸는 야심가들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은 도청에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있었던 셈이다. 대권 실패 원인이 설왕설래할 때마다 “(도청)터가 안 좋다”는 얘기가 농담처럼 오갔다. 근거 없는 풍수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경남도정은 대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역으로 도민중심에서는 멀어졌다. 급기야 지난해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일부지만 “대권과 무관한 도지사를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결과적으로 ‘CEO형 행정 전문가’를 자처한 박 도지사가 당선됐다. 그가 추진하는 △월 1회 도민회의 개최 △경남사회대통합위원회 발족 △남해안 관광산업 활성화 △그린벨트 해제를 통한 원전·방산 입지 확보 △시·군 순방을 통한 도민의견 수렴 △응급의료 컨트롤타워 구축 등은 실무행정이면서 도민 중심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도정 슬로건도 ‘활기찬 경남·행복한 도민’이다. 활기찬 경남은 경제활성화를, 행복한 도민은 복지실현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슬로건 자체가 대권을 연상케 하는 거창한 구호는 아닌 듯하다.
지난해 9월 진주시민과의 대화에서 그는 “도지사 마무리하면 다른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그해 12월 통영에서는 “대통령 할 생각이 없다”고 단언했다. 지난 10일 도청에서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는 “어려운 도정을 일으키는 것이 마지막 공직 봉사”라며 “중앙정치권으로 갈 생각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의 행보를 더 지켜봐야겠지만, 도민 중심의 도정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대권과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2023-01-11 [18:08]
-
[데스크 칼럼] 수도권이 우스워 보여요?
“수도권이 우스워 보이세요?”
사업하는 지인이 수도권의 한 소도시로 짐을 쌀까 고민이랍니다. ‘인구 80만도 안 되는 곳보다야 부산이 낫지 않느냐’ 했더니 피식 웃으며 이렇게 답합니다. ‘거긴 강남에서 한 시간 거리’라는 말도 덧붙이고요. 그 짧은 문답 속에 부산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듯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부산의 도시 경쟁력이란 참 우울한 수준이죠. 어쨌거나 수도권 일극체제가 된 대한민국에서 강남과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은 땅이 아닙니까. 산업은행을 김포나 의정부로 이전한다고 했어도 저리 반발이 심했을까요. 서글프지만 분명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이번 주부터 부산시가 산업은행 이전 지원을 위한 시책 보따리를 풉니다. 주택 특별공급에 지방세 감면, 직장어린이집 등의 지원이 검토될 참입니다. 물론 적잖은 도움이 될 지원책입니다.
그러나 부산살이에 ‘자부심’이나 ‘자기만족’을 불러 일으킬 요소는 보이지 않습니다. 부산에 가든, 대구에 가든, 광주에 가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나올만한 지원책입니다. 그걸 ‘이 정도면 굉장하지?’ 하는 시혜적인 태도로 전한다면 부작용만 커질 테죠.
지난주 가족과 겨울 여행으로 다녀온 경주가 떠올랐습니다. 썰렁한 보문단지와는 대조적으로 황리단길은 불황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북새통이었습니다. 해운대 해리단길처럼 웨이팅이 끊이지 않지요.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이들 ‘리단길’에서 얼마나 합리적인 가격에 식사를 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리단길’의 성공 여부는 그곳에서 얼마나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힙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에서 갈립니다.
자본주의의 천박한 풍경이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움직이고, 돈을 움직이고, 급기야 시류까지 움직인다면 그 천박함은 더 이상 천박함이 아닌 거지요.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입니다.
문현금융단지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돌아간 한 공기업 간부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동천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강제로 이전까지 시켜놓고 부산시가 인근 하천 하나 정비해 놓지 않았다는 게 그의 주된 불만이었습니다. 그의 부산살이를 힙하게 한 건 아름다운 황령산 등산로였고, 불쾌하게 했던 건 열악한 동천의 수질이었습니다.
또 다른 공기업에서는 금융단지 입주 초기 식사 자리를 찾아 ‘썩은다리’를 건너 시장을 지날 때면 자괴감마저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슷한 맥락 아니겠습니까?
판박이처럼 내놓는 이전 지원책에 고마워하고 감격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그건 타향살이를 감내한 당연한 ‘대가’라 여길 테니까요. 거기에 더해 부산살이가 만족스러울만한 ‘플러스알파’가 있어야 합니다. 요는 귀가 후 가정에서 ‘당신을 따라 부산 왔더니 이게 좋다, 저게 좋다’라는 말이 나올 만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연고 기관을 대하는 부산시의 태도가 섬세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놓친 집토끼가 어디 한둘이던가요.
프로농구 연고지를 뺏길 때도 그랬습니다. 구장 사용료가 비싸다고, 코트 관리가 엉망이라고 그렇게 하소연 해도 귀를 틀어막고 있었지요. 그 사이 KT는 차곡차곡 수원행을 준비해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어떻게 330만 명이 사는 대도시를 포기할 수 있지?’라는 건 부산의 오판이었습니다. 선수에게도, 구단 직원에게도 서울을 들락거릴 수 있는 수원은 부산보다 나은 근무지였던 겁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새해 벽두에 부산시가 기장군에 향토기업 금양의 이차전지 생산기지를 품었다는 소식은 고무적입니다. 적극적으로 산단 매각 중재에 나섰습니다. 시외로 나갈 뻔한 기업에게 한 달 만에 매수확약을 받아낸 부산시의 자세는 분명 달라진 모습입니다.
‘부산 정도면 괜찮지’하는 자신감에 도취되면 자기 객관화가 어렵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직장 종사자 입장에서는 부산이 수도권 중소도시보다도 선호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부산시의 지원 시책 보따리에 ‘감성’이라는 조미료를 주문해 봅니다. 추가적인 공공기관 이전까지 노린다면 이들 종사자의 입맛에 맞춰 ‘생 당근’이 아니라 ‘당근 코스요리’가 준비되어야 하는 게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이들의 불만을 달래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들어갈 부산의 사회적 비용도 줄어들 테니까요.
2023-01-09 [18:04]
-
[데스크 칼럼] 양산 황산공원 '변신'에 거는 기대
경남 양산시 물금읍 낙동강 둔치에 조성된 187만㎡ 규모의 황산공원은 10여 년 전까지 농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비옥한 토양이 낳은 모래감자와 대파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모래감자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러나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모래감자와 대파밭은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축구장, 야구장, 파크골프장 등 체육시설과 오토캠핑장과 자전거길, 낙동강 뱃길 등 여가시설이 만들어져 연간 수십만 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다.
농민들의 생활 터전이 공원으로 상전벽해 한 것이다. 상전벽해는 뽕나무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의 변천이 심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2023년 1월, 황산공원의 상전벽해가 또다시 예고됐다. 나동연 양산시장이 4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낙동강 황산공원 활성화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 황산공원 시설 업그레이드를 통해 더 많은 방문객을 유치, 이들의 지갑을 열어 지역 경기 활성화를 꾀하기 위해서다.
인류는 강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지금도 세계 많은 나라들이 강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관광자원으로 개발해 사람과 자연이 함께 숨 쉬는 관광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영국 북동부 게이츠헤드의 타인강이나 우리나라 서울의 한강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인구 20여만 명에 불과한 게이츠헤드는 탄광촌에서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거듭났다. 타인강을 중심으로 밀레니엄브리지와 미술관, 음악센터 등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서면서 지역 주민에게 여가·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방문객 증가로 엄청난 관광 수입까지 올리고 있다. 서울도 한강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궈낸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 일컬을 정도다.
나 시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게이츠헤드의 타인강, 서울 한강처럼 낙동강 황산공원을 ‘양산의 미래가 담긴 블루오션’이라 지칭하며 ‘머물고 싶은 복합 레저·관광도시’로의 청사진을 밝힌 것이다.
청사진의 첫 번째가 황산공원의 접근성 개선이다. 수도권 등 전국 어디에서나 황산공원 방문을 쉽게 하겠다는 것이다. 내년 초 물금역의 KTX 정차가 시작이다. 양산 ICD 교차로를 활용한 진입도로도 추가로 개설된다. 부산 을숙도와 양산 황산공원을 오가는 30인승 낙동강 생태 탐방선을 100인승 규모의 전기 유람선으로 교체한다.
두 번째가 방문객을 유인할 수 있는 시설 확충이다. 물 위에 뜨는 부상형 건물을 건립하고, 상·하수도와 그늘막, 배달 존을 설치한다. 36홀의 파크골프장을 108홀로 확장한다. 111면의 캠핑장을 160면 이상으로 늘린다. 19만 4000㎡의 친환경 생태정원도 조성한다. 수상 레포츠 시설 도입과 함께 계류장을 증설한다. 집라인과 드림 썰매, 어린이용 RC카 경기장 등 놀이공간도 확충한다.
세 번째가 시설 확충과 함께 전국 단위의 대회를 개최해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파크골프 대회를 비롯해 캠핑 페스티벌, 철인 3종 경기대회, 승마대회가 좋은 예이다. 지난해 출범한 낙동강협의체 참여 지자체와 연계한 축제 공동개발과 개최, 공동 투어프로그램 개발과 마케팅도 눈에 띈다. 낙동강 불꽃축제 공동 개최도 구상 중이라고 하니 기대감이 높아진다. 낙동강협의체는 양산시를 포함해 김해시와 부산 북구, 강서구, 사상·사하구 등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6개 지자체다. 양산시가 제시한 모든 비전이 실현되면 낙동강 황산공원은 부울경을 넘어 서울 한강공원과 버금하는 명품공원으로 탈바꿈할 것으로 전망된다.
난제도 있다. 황산공원뿐 아니라 인근인 양산신도시는 물론 낙동강협의체에 가입된 6개 지자체 모두가 골고루 혜택을 볼 수 있는 관련 프로그램 개발이나 인프라를 함께 갖춰 나가야 할 것이다.
낙동강은 또 부산과 양산시민 등의 식수원이다. 많은 방문객으로 인한 수질 오염을 포함한 각종 오염 행위 역시 증가할 것이 자명하다. 낙동강 6개 협의체는 물론 정부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낙동강의 수질오염을 막을 방법도 함께 찾아야 할 것이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해 경북 구미, 경남 창녕과 김해, 양산, 부산시 등 여러 지자체를 거쳐 남해안으로 흘러드는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 때문에 삼한시대부터 영남지방의 경제와 산업, 물류의 대동맥 역할을 담당해온 것은 물론 이 지역 문화를 발달시킨 원동력이었다. 이번 양산시의 낙동강 황산공원 활성화 발표를 계기로 낙동강협의체 6개 지자체는 물론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낙동강의 기적’을 고대해본다.
2023-01-04 [18:06]
-
[데스크 칼럼] 메시 이전에 펠레
‘페널티아크에서 공을 받자마자 등지고 있던 수비수 머리 위로 공을 넘긴다. 이어 발끝으로 공을 튕겨 차례로 2명의 수비수 머리 위로 넘긴다. 마지막엔 무릎으로 한 번, 발끝으로 한 번 공을 튕겨 골키퍼마저 머리 위로 공을 넘긴 뒤 헤더로 골문 안으로 집어넣는다.’
리프팅 기술로만 상대 수비수 3명을 제치고 골키퍼마저 리프팅으로 따돌려 골을 넣은 장면이다. 워낙 만화 같은 골이라,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1959년 8월 2일 브라질 리그 산투스FC 소속으로 뛰던 펠레가 상파울루 라이벌 팀인 CA주벤투스를 상대로 기록한 이 신기에 가까운 골은 영상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당시 현장에서 직관한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현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 있다.
또 얼마 전 아르헨티나 출신의 카투니스트 악셀(Aczel)이 출간한 〈축구 역사를 빛낸 최고의 골〉이란 책에 이 원더골에 대한 설명이 삽화와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손흥민이 푸슈카스상을 탔던 번리전 원더골(2019년)도 소개돼 있다. 70m가량을 질주하며 상대 수비수 6명을 따돌리고 터트린 이 골의 원조도 따져 보면 펠레다.
펠레가 플루미넨세와의 경기에서 산투스 골대 앞에서 드리블하기 시작해 수비수 7명을 따돌리고 넣은 원더골이 작성된 날이 1961년 3월 5일이다. 이 장면 역시 당시 중계 환경의 한계로 영상이 없다. 다만 경기가 열렸던 마라카낭스타디움에 기념판까지 설치돼 있을 만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두 장면만 봐도 펠레가 왜 ‘축구 황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로 칭송받는지 알 수 있다.
펠레는 등장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15세 때 브라질 명문 산투스에 입단한 그는 1958년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스웨덴 월드컵에 나섰다. 부상으로 조별리그는 한 경기만 뛰었지만 웨일스와의 8강전에서 결승골(1-0 승), 프랑스와 4강전에선 해트트릭(5-2 승), 결승전에선 멀티골(5-2 승)을 넣어 브라질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이 대회에서 펠레는 아직도 깨지지 않은 월드컵 최연소 득점, 최연소 해트트릭, 최연소 결승전 득점을 기록했다.
이어 1962년 칠레,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펠레는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3회 우승자’로 남았다. 1966년 잉글랜드 대회에도 펠레는 출전했지만, 상대 선수들의 집중적인 살인 태클에 부상을 당해 제대로 뛰지 못하면서 브라질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펠레의 수난은 1970년 멕시코 대회 때 레드카드가 생기고, 교체 제도가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이전에는 선발로 나선 선수는 끝까지 경기를 뛰어야 했고(다치더라도), 어떠한 거친 반칙에도 퇴장이 주어지지 않았다.
펠레는 숱한 대기록을 세웠다. 유일한 월드컵 3회 우승과 함께 월드컵 통산 12골 8도움(20공격포인트)을 남겼다. 이는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13골 8도움으로 21개의 공격포인트를 올리기 전까지 최다 공격포인트였다.
클럽과 대표팀 통틀어 통산 득점은 펠레와 브라질 측에선 1283골로 주장한다. 이 기록은 투어 경기와 친선경기 득점이 포함된 데다 오래된 기록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 국제스포츠통계재단(RSSSF)은 757골을 공식 기록으로 인정한다. 통산 득점 757골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819골)와 메시(793골)가 넘어섰다.
산투스에서 660경기를 뛰면서 643골을 뽑아 단일 클럽 최다 골 기록도 세웠다. 이 역시 메시가 FC바르셀로나에서 작성한 672골에 밀렸다. 다만 펠레가 1959년 한 해 동안 넣은 127골은 여전히 ‘1년간 최다 득점’으로 인정받는다.
지난해 메시가 월드컵 우승의 한을 풀면서 많은 팬들은 역대 최고 선수로 메시를 꼽는다. 이미 여러 기록에서 펠레를 뛰어넘었고, 그의 현란한 드리블과 슈팅을 접한 팬들은 주저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하지만 펠레에겐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오늘날 축구의 인기와 월드컵의 위상은 사실상 펠레의 등장에서 시작됐다. 펠레는 사람들에게 축구의 묘미와 재미를 알려줬다. 양발 드리블, 발리슛, 노룩·백힐 패스, 오른쪽으로 공을 치고 왼쪽으로 돌아가는 기술 등 당시엔 보기 드물었던 모든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말로만 전하던 오버헤드킥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도 펠레였으며, 발 뒤꿈치로 공을 차올려 수비수 머리 위로 넘기는 ‘레인보우 플릭’ 기술도 펠레가 처음 선보였다.
펠레는 현대 축구 시대를 연 선구자다. 그가 떠났지만, 영원한 ‘축구 황제’로 기억되는 이유다.
2023-01-02 [17:55]
-
[데스크 칼럼] 북항에 해상도시가 뜨기 전에
이르면 2028년, 부산항 북항 앞바다에는 세계 첫 해상도시가 뜬다. 5층 규모의 정육각형 모듈 3개에는 주거를 비롯해 상업과 연구 시설이 들어서고, 모듈마다 300명 정도가 살 수 있다. SF 영화 속 이야기 같지만 유엔 산하 국제기구 해비타트가 부산시와 손잡고 추진하는 프로젝트다.
해상도시는 기후 위기에 대응해 띄우는 ‘노아의 방주’다. 정부 간 기후변화 협의체(IPCC) 최근 보고서는 2100년 해수면이 1995~2014년 대비 0.5~0.9m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빙하가 급격히 붕괴하는 시나리오라면 전망치는 2m까지 올라간다.
미래는 명약관화하지만 해상도시까지 가기 전에 국제사회는 탈탄소를 위한 숙제들을 제시한다. 특히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3%를 차지하는 국제 해운업계에게 탄소중립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세계해사기구(IMO)가 당장 2023년부터 일정 규모 이상의 외항선에 대해 두 가지 강력한 규제, 현존선 에너지효율지수(EEXI)와 탄소집약도지수(CII) 적용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EEXI는 선박 엔진 성능과 에너지효율 등을 토대로 계산한 설계상 탄소 배출량이라면 CII는 실제 탄소 배출량이다. EEXI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엔진 출력을 제한하는 식으로 감속 운항을 해야 한다. CII 다섯 등급 가운데 하위 2개 등급 선박은 개선이 되지 않으면 2026년부터 운항 금지가 시작된다. 결국 해운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친환경 선박을 도입해 탄소 배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업계는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해양수산부가 대상 국적 선박을 조사해 보니 EEXI의 경우 991척 중 655척(66.1%), CII는 777척 중 251척(32.3%)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최대 국적선사인 HMM도 자체 대상 선박 79척 중 26척(33%)이 EEXI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다고 파악하고 이 배들을 일단 당분간 감속 운항할 예정이다. CII 등급은 아직 분석 단계다.
문제는 이런 규제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IMO는 당초 2050년까지 국제해운 온실가스 총 배출량을 2008년 대비 50% 이상 감축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 목표는 내년 열릴 다음 해양환경보호위원회에서 탄소중립, 즉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 제로로 상향될 가능성이 크다. 연료 소모량 규제나 탄소부담금 같은 추가 조치 도입도 곧 결정될 전망이다.
EU는 한발 더 나아간다.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권리를 사고 팔 수 있는 배출권거래제(ETS)를 2024년부터 해운 분야로 확대한다. 역내 입출항하는 모든 선박은 배출권을 구입해서 제출해야 한다. 2025년에는 EU 항만에 기항하는 모든 선박의 연료에 대해 생산부터 사용까지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을 따져 벌금을 매기는 조치도 시행한다. 5년 단위로 기준치를 강화해 2050년까지 친환경 연료 전환을 유도한다.
해운업계는 어떤 친환경 연료를 어떻게 공급받을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에 혼란에 빠졌다. HMM 김규봉 해사총괄 상무는 지난 26일 부산항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해수부의 해양환경 정책설명회에서 이런 흐름에 대해 “선사 입장에서는 CII 하나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인데, 연속해서 도입될 규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털어놨다.
지역의 중소선사들은 더욱 심각하다. 인력 부족 등으로 규제의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등급을 사전에 계산해 대비하기 어렵다. 저감 장치를 설치한다고 해도 배를 새로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시한부 수명을 고작 수년 연장하는 결과가 될 뿐이다. 그사이 세계 1위 해운사 머스크는 일찌감치 친환경 메탄올 연료를 쓰는 선박 19척을 발주하며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다. 해운업계는 친환경 신조선을 위한 정책 금융 지원과 중소선사를 위한 적극적인 컨설팅을 주문한다.
이밖에 정부 차원의 도전도 있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해 국내 최대 무역항 부산항과 미국 서부 시애틀의 타코마항 간 녹색해운항로를 구축하는 데 합의했다. 10년 이내에 이 항로에 투입되는 선박을 메탄올·암모니아·수소 등 저탄소 또는 무탄소 선박으로 전환하고 연료공급 인프라도 구축할 계획이다. 항만업계도 마찬가지다. 부산항 또한 물동량 유치를 넘어 탄소중립과 친환경 항만 조성이라는 목표를 외면할 수 없게 됐다.
북항 앞바다의 해상도시는 2030부산엑스포에서 자연과 함께 지속 가능한 지구라는 엑스포의 주제를 구현한다. 세계 7위 해운 강국이자 세계 2위 환적 항만인 부산항을 보유한 우리나라가 기후 위기라는 과제에 적극 대응하고 국제사회에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 엑스포 유치의 공감대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해운업과 해양도시 부산의 미래를 위해서도 물론이다.
2022-12-28 [18:08]
-
[데스크 칼럼] 장인화 체육회장의 4년, 벤투처럼
‘메신’으로 칭하는 것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은 메시의 ‘라스트 댄스’였다. 지난달 21일 개막한 2022 카타르 월드컵이 29일간의 축제를 마무리했다.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인 월드컵. 지역 예선을 통과한 32개국에만 허용되는 본선 진출 자격만으로도 영광이고 성취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조별리그에 포함된 4개국 중 두 나라에만 허락된 토너먼트 진출을 이룬 것은 대단한 성과이지 않은가.
이번 대회만 하더라도 과거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독일과 우루과이가 조별리그 세 경기만 치르고 짐을 쌌다. 대회 직전 국제축구연맹 랭킹 2위를 달리던 벨기에도 마찬가지 처지였다.
이런 면에서, 벤투 감독이 이끈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사상 두 번째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4년 4개월간 우직하게 한국식 ‘빌드업 축구’를 구축하고 떠난 벤투 감독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전 세계가 월드컵 열기에 한창 빠져 있던 이달 중순, 국내 체육계에도 의미가 작지 않은 축제가 펼쳐졌다. 민선 2기를 맞는 17개 광역시·도 체육회장 선거가 지난 15일 일제히 치러진 것이다.
2020년 초 막을 올린 1기 민선 체육회장 시대는 지자체장이 겸하던 지역 체육계 수장 자리를 체육인들에게 돌려줘 진정한 체육 자치를 실현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지역 체육계 발전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그 지역 체육계를 이끌게 하자는 의미를 제대로 살린다면, 체육회장 선거 역시 그야말로 축제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는 이벤트인 셈이다. 현실은 어땠을까. 정치권 유착설과 특정 후보 편향적 선거 관리, 심지어 후보자 매수 시비까지 전국 곳곳에서 잡음이 일었다.
안타깝지만 부산광역시체육회장 선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 사례와 어금버금할 정도의 알력과 뒷말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선거 과정의 시빗거리를 없애겠다며 시 선거관리위원회에 업무를 위탁한 부산시체육회 역시 불공정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다.
깜깜이 선거라는 불평도 쏟아졌다.
세 명의 후보가 출마한 부산에선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 평가할 수 있는 토론회가 열리지 못했다. 선거 운영위원회 결정으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할 수 있는 규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출마 후보들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실제 토론회가 성사되는 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선거가 치러진 17개 시·도 가운데 유일하게 인천에서만 정책토론회가 진행됐다. 지역 체육회장의 정책 결정이 엘리트 체육인뿐만 아니라 동호인 등 생활체육인들의 일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개선이 시급하다.
어쨌거나 부산에서는 지난 3년간 민선 1기 체육회를 이끈 장인화 현 회장이 연임에 성공했다. 장 회장은 투표권을 행사한 대의원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65.7%의 지지를 얻었다. 그만큼 지역 체육인들의 신망과 기대가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부산상공회의소 회장까지 겸하고 있는 장 회장 스스로 자랑스레 내세웠듯이, 만성 재정난에 시달리는 체육회 산하 여러 종목단체가 지역 기업의 후원과 지원으로 어느 정도 숨통을 튼 면도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 회장의 이런 겸직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스스로 새겨야 한다. 자칫 한쪽을 등한시했다간 그의 의욕은 한순간 과욕으로 비칠 수 있다. 그 한쪽은 무보수 명예직인 체육회장 업무가 될 것이라는 게 지역의 중론임은 물론이다.
사실 부산 체육계 수장이 팔을 걷어야 할 현안은 차고 넘친다. 긴 시간과 많은 재정이 필요한 장기 과제는 지금부터 당장 씨를 뿌려야 한다. 임기 막판 시간이 부족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변명은 구차하다.
시선이 위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열악한 체육 현장을 꿋꿋이 지키는 일선 지도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가까이해야 한다. 당장 난방비와 방한복이 부족한 곳은 없는지, 박봉에 지쳐 현장을 떠나야 하는 이는 없는지 살피는 따뜻함이 필요하다. 혹여 칭찬과 격려가 아쉬운 현장이 없는지도 찾아보면 좋겠다. 큰돈 들이지 않고 발품만 들인다면 챙길 수 있는 성과가 될 것이다.
선거는 끝났다. 내년 2월 9일 시작될 장인화 회장의 민선 2기, 벤투처럼 4년의 임기를 앞두고 있다. 4년 뒤 박수 받으며 임기를 마치는 그의 모습을 기대한다. 벤투처럼 말이다.
2022-12-21 [18:03]
-
[데스크 칼럼] "당신들을 응원합니다"
“무대가 진짜 고팠어요.” 청년1은 올여름 신진 예술인 인큐베이팅 사업에 참여했다. 공모로 선정된 부울경 청년예술인에게 부산문화회관이 제작하는 작품에 참여하고 무대에 설 기회가 제공됐다. 청년1을 비롯해 무용과 국악 분야 청년예술인들은 뜨거운 연습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8월 말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변종 호랑이의 성장기를 다룬 ‘수퍼 타이거’를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취재 때 청년예술인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연습을 할수록 무대가 더 간절해졌어요.”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계속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10월 말 대안공간 오픈스페이스 배의 기획 프로젝트 전시 ‘안녕 예술가’가 열렸다. 전시장에서 미술대학에 재학 중인 예비 청년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봤다. ‘미술을 좋아하는 내가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지속적인 활동을 위한 방법이 없어서’라는 답이 30%를 차지했다. 부산 미술계의 문제점으로는 ‘네트워크 부족’ ‘지원제도’ ‘전시공간 부재’ 순서로 답이 나왔다. 전시장 중앙에 놓인 둥근 조형물 위에 예비 작가들의 바람이 새겨져 있었다. ‘평생 작업하는 작가, 가치 있는 작가,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하는 안녕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 작가의 길을 꿈꾸고 고민하는 청년2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문화지리지-2022 부산 재발견’ 10편 연극 분야 취재를 하면서 청년 연극인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접했다. 배우의 경우 세 작품은 동시에 뛰어야 한 달 수입 150만 원 정도를 겨우 맞출 수 있었다. 생계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뛰는 배우, 출연진들 연습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서 아침 일찍 만난다는 이야기까지. 연극계의 변화에 놀라움을 표시한 독자도 있었다. “대학에서 관련 학과가 없어져 학생도 전공자도 반으로 줄었다”는 연극계 청년3의 말에서는 밖에서는 잘 안 보이는 청년 극단의 현황이 보였다.
최근 〈부산일보〉에 실린 ‘부울경 문화분권 기초 연구’ 기사에 부울경 지역 세대별 예술인 비율이 나온다. 수도권의 경우 2030 예술인이 58.5%를 차지하는 것에 비해 부울경 예술인 중 2030은 34.2%에 그쳤다. 특히 20대 예술인 비율은 14.4%로, 전국 평균보다 5%P 이상 낮았다. 연구를 진행한 부산문화재단은 이 수치를 대학의 문화예술 분야 학과 수와 연결 지었다. 수도권 대학의 문화예술 관련 학과 숫자는 1048개, 부울경은 177개로 10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지역 대학들이 순수예술 관련 학과를 폐과하거나 축소한 영향으로 예술인 양성 과정에서 격차가 발생한다. 또 전공을 마치고 현장에 나와도 뛸 무대가 부족하다. 이 때문에 청년예술인력의 역외 유출은 가속화하고, 지역 예술계는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원향미 선임연구원은 청년예술인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서 ‘지역에 예술시장이 과연 있는가’라는 부분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 청년예술인이 지역에 남기 위해서는 예술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창작자와 공연자 외에도 문화예술과 관련한 다양한 업종을 발굴·육성해서 지역 문화예술의 판 자체를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현장에 있는 청년예술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각종 정책 마련뿐 아니라 각 분야의 기관·단체 운영에 있어서도 필요한 일이다. ‘대학에서 예술 창작 외에 예술경영, 문화기획 등 실무 관련 교과목을 개설해주면 좋겠다.’ ‘부산에는 아카데미가 없어 배우나 창작자의 역량 강화를 위한 배움 기회가 부족하다.’ ‘공연장이나 뮤지션 지원 프로그램이 인디음악이라는 장르의 현실을 반영했으면 좋겠다.’ 청년예술인이 원하는 것을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신문화지리지 연극 취재를 위해 전화를 돌리다 2020년 창작단막극제 ‘나는 연출이다’에 참여한 연출가와 연결됐다. ‘돈키호테’를 주제로 한 여러 단막극 중에서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가장 많은 웃음을 줬다. 당시연출가가 누굴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났다. 작품이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다시 무대에서 볼 날을 기다리리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연출가는 “기억해줘서 고맙다”며 웃었다.
올 한해 미술, 무용, 연극 등 다양한 현장에서 청년예술인을 만났다. 힘겹지만 열심히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을 응원합니다.” 청년예술인에게 보내는 응원이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언론도 현장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을 것이다.
2022-12-19 [18:18]
-
[데스크 칼럼] 문재인 정부 경제말뚝 들어내기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시작된 이른바 ‘소주성(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최근 들어 이상만 좇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섣부른 시도’였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다. 그 정책의 핵심인 주52시간 근무제와 최저임금제 대폭 인상은 적지 않은 ‘탈’을 불러왔다.
문재인 대선 후보는 ‘2020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 1만 원 달성’을 공약했다. 근로자들이 적정 임금을 지급받게 되면 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의 여유도 가지게 된다는 장밋빛이었다. 이후 당선되면서 그해 결정된 2018년도 최저임금은 시간당 7530원으로 전년 6470원보다 16.4% 인상됐고, 2019년도 최저임금 8350원은 전년 대비 10.9% 올랐다.
하지만 가내수공업, 자영업자 등 소상공인의 경우 임금부담으로 기존 인력을 축소하거나 내보낸 뒤 직접 장사를 하는 곳이 늘어났다. 폐업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문 정부 출범 전 수도권에서 6000~7000원 하던 국밥 한 그릇이 이젠 1만 원으로 급등했고, 사회 전방위로 물가가 올랐다.
임금 올려 국민들 잘 살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2년 연속 최저임금 두자릿수 인상이후 “못 살겠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이후 속도조절론이 제기되면서 최근 최저임금은 3년째 한 자릿수 인상에 머무르고 있다.
주 52시간제도 그 못지 않다. 2018년 7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 우선 적용된 후 지난해 전면 시행됐다. 문 정부는 이 제도가 근로자들에겐 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하게 하고, 기업들에는 고용 확대가 기대된다고 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벨 풍조’가 생겨나면서 평일 저녁과 주말에 레저나 취미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근무시간 초과임금으로 생활자금을 충당해오던 일부 근로자들의 경우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임금감소에 못살겠다며 전국 버스파업 같은 노사분쟁이 촉발됐다.
이처럼 주52시간제와 최저임금 급등이 경제여건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사회적 공감대 없이 급속도로 확대 시행되면서 당초 취지의 순기능보다는 부작용 내지 역효과가 더 부각됐다.
진보 정책가로 활동해온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 등 일부 진보론자들도 “문 정부의 소주성 정책이 실패했다”고 할 정도였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교수도 지난달 방한해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했던 소득주도성장은 한국의 경제성장 배경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올해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최근들어 문 정부에서 어설프게 심어놓은 ‘대말뚝’들을 곳곳에서 걷어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13일 국무회의에서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전날 노동개혁 과제로 제시한 정부 권고안에 대해 “권고 내용을 토대로 조속히 정부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권고안은 주52시간제(기본 40시간, 연장 12시간)의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현행 ‘주 단위’에서 최대 ‘연 단위’로 확대하는 내용이다.
한전 대규모 적자를 낳은 탈원전 정책 기조도 새 정부 출범과 함께 180도 바뀌었다. 윤 정부는 오히려 ‘원전 산업 부활’을 내걸었다. 윤 정부는 7월에 3·4호기 건설 재개를 확정했다.
문 정부가 2018년 올린 법인세 최고 세율에 대해서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경제계 안팎에서 나온다. 당시 22%에서 25%로 올렸는데, 한국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외국인의 설비투자가 주요국 가운데 가장 크게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외국인 설비투자는 투자 유치 조건 등과 함께 법인세율 등 세금 부담이 낮은 나라로 몰리게 된다. 외국인 투자가 줄면 고용 창출과 기술 이전 등의 효과를 누릴 수 없어 국가 경쟁력이 약화된다. 미국은 2017년 말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크게 낮췄고, 스페인 3% 인하, 프랑스 8.3% 인하 등으로 기업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2017년 8월 문 정부에서 발표한 ‘건강보험 보장 강화 정책’도 “재정누수가 심각하고… 대다수 국민에게 그 부담이 전가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규모 손질에 나설 분위기다. 문 정부가 잘못 심어놓은 말뚝을 들어내는 데 드는 행정력과 비용도 엄청나다.
이처럼 소주성 정책 실패에 대한 반성이 절실한 상황임에도 문 전 대통령은 최근 “고용시장 충격을 들어 실패라고 단정한 것은 매우 아쉽다. 긴 안목의 정책 평가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SNS를 통해 항변했다.
2022-12-14 [18:03]
-
[데스크 칼럼] 왜소해진 정치의 '대화 불가능' 선언
“정치인은 4류, 관료·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발언이 나온 지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우리 정치 수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4류도 과분하다는 생각이 태반일 것이다. 사실 이전까지 주변에서 이런 말을 나오면 “정치만 홀로 저급한 걸까요”라고 딴지를 걸곤 했다. 그 언저리에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의 어쭙잖은 동류의식 같은 건 아니다. 복잡한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손 쉬운 책임 전가로 비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런 말과 인식이 정치 변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정치권의 퇴행에 대해서는 나조차도 딱히 변호할 말도,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문제 해결의 정점에 있어야 할 정치가 뭔 일만 생기면 경찰, 검찰, 법원으로 달려가는 게 일상이 됐다. 중요한 사회적 어젠더에 대한 논의는 한 없이 더딘 반면 가짜 뉴스, 혐오 표현을 놓고는 맹렬히 싸운다. 타협하고, 결정하는 게 정치의 본령이라는 걸 까맣게 잊은 채 일부 강성 지지층의 적대 정서에 편승해 진영의 좁은 진지만 지키려 드는 듯하다.
해프닝으로 끝나는 분위기지만 전당대회를 앞둔 국민의힘에서 ‘한동훈 차출론’이 꽤 진지하게 거론된 것은 한껏 왜소해진 여당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대통령의 최측근이 초고속 장관 승진에 이어 집권여당 대표 자리를 차지한다? 종속적 당정 관계는 물론, 여야 관계에 미칠 부작용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야당의 집중 공격을 되받아치는 한 장관의 전투력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강성 지지층에게는 그것 하나만으로 집권여당 대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니 지금의 당권주자들이 ‘성에 차지 않을’밖에. “이런 분위기면 총선 전 또 비상대책위원회에, ‘직업적 비대위원장’인 김종인이 재등장할지도 모르겠다”는 한 초선 의원의 농담이 그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재명 리스크’에서 허우적대는 더불어민주당의 처지는 더 딱하다. 자신도 인정한 최측근 두 사람이 구속 기소 되면서 대장동 의혹은 뚜렷한 실체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 대표에겐 그저 “정치검찰의 소설”일 뿐이기에 비슷한 국면에서 과거 지도급 인사들의 선공후사, 결자해지 같은 덕목은 전혀 고려 사항이 못 된다. 문제는 당의 존망이 걸린 이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단발적인 비판이 나오지만, 이 대표를 둘러싼 강력한 팬덤의 벽을 뚫고 나가기엔 역부족이다. 오히려 ‘청담동 술자리’라는 얼토당토 않은 가짜뉴스를 퍼트린 의원에게 후원금을 몰아주는 병적 징후는 더 심해졌다. 비이재명계 일각에서 뜬금 없이 이 대표의 총선 공천권 포기를 언급한 건 결국 총선 국면까지 가봐야 뭔가 바뀔 것이라는 무력한 자기고백으로 들린다.
정치가 왜소해지니 증오로 무장한 팬덤의 그립은 더 강해지고, 그럴수록 정치인은 움츠러든다. 여야 의원들이 모처럼 협치를 복원하자며 지난달 함께했던 친선 축구대회에는 “전쟁 중에 한가하게 이럴 때냐”는 강성 지지층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그게 잘못됐다고 맞서지 않는다. ‘조국 사태’ 때 소극적으로 방어했다는 비판에 시달린 민주당은 ‘이재명 사태’에서 당과 무관한 개인 비리 의혹을 엄호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지지층의 부정적 정서를 등에 업은 여권에서는 ‘이태원 참사’ 유족들 모임을 향해 “정쟁으로 소비되다 시민단체의 횡령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야멸찬 말들이 난무한다.
엊그제 ‘윤핵관’ 장제원 의원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 일방 처리에 “민주당은 정치라는 탈을 쓰고 가슴에는 칼을 품고 다니는 ‘정치 자객들’”이라며 “더 이상 민주당과는 그 어떤 협치도, 그 어떤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했다. 이것은 ‘윤심’일까? 그래 보인다. 집권 초기 “통합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던 윤 대통령은 최근 법과 원칙만 유독 강조한다. 야당과의 대화 노력은 더 이상 시간낭비라는 인식이 굳어진 듯하다. 때마침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원칙적 대응으로 지지율도 올랐다. 운 좋게 총선 전 악화된 경기마저 풀릴 조짐을 보인다면 가장 큰 과제인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할 동력을 확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정치공학적 접근이 단기간에 성공한다고 해도 협치의 가능성조차 끊어진 여야 관계가 국가의 미래에, 당면한 난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될까?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 갈수록 왜소해지는 정치는 여도, 야도 망치고, 종래에는 정치 자체를 형해화할지 모른다.
2022-12-12 [18:25]
-
[데스크 칼럼]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 '완월동'
속칭 ‘완월동’.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매매 집결지. 부산 서구 충무동과 초장동 일대에 걸쳐 있는, 부산의 마지막 남은 홍등가. 정식 행정 지명이 아니라 지도에선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이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곳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는 자리가 지난 6일 마련됐다. (사)여성인권센터 ‘살림’이 창립 20년을 맞아 ‘완월기록연구소’와 함께 ‘완월동 성매매 집결지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가 열린 장소는 부산진구 부전동에 위치한 ‘이젠센터’. 부산시 여성폭력방지종합지원센터로, 올 9월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 이후 하야리아 부대 기지촌으로 생겨난 ‘범전동 300번지’가 있던 곳 바로 인근이다. ‘해운대 609’와 함께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성매매 집결지 ‘300번지’를 코앞에 두고 열린 행사라 더 뜻깊다는 평가가 나왔다. 비교적 도심 접근성이 높은 범전동 300번지와 해운대 609는 재개발 사업으로 폐쇄됐지만, 완월동에선 여전히 25곳의 성매매 업소가 영업 중인 것으로 살림 측은 파악하고 있다.
토론회 발제자로 참여한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일제 강점기 시내 중심가에 있던 유곽을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녹정’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곳은 해방 후 1947년 완월동으로 개명됐다. 1980년대 충무동 2가와 3가로 다시 개명됐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오래된 지도 자료와 사진을 통해 완월동의 과거를 드러냈다. 1910년에 발행된 ‘최신 부산항시가도’는 완월동 일대를 ‘신(新) 유곽지’로 표기하고 있다. 1914년에서 1915년 사이 발행된 부산 지도에는 ‘녹정’이라는 유곽 이름이 등장한다. 110년도 더 된 완월동의 역사가 옛 지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완월동에서 2015년 문화예술축제 ‘완생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송진희 문화기획자는 이곳을 ‘(성)구매자, 포주, 상인이 되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힘든 공간’이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동안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지도,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던 성매매 여성들. 살림은 성매매 경험 당사자 모임 ‘나린아띠’와 함께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책 〈뻔하지도 펀(FUN)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펴내고 지난달 비공개 북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저자로 참여한 닉네임 ‘백치’는 탈성매매의 이유로 ‘죽는 게 두려워서’를 꼽았다. ‘단지 그냥 살고 싶었다’는 그는 탈성매매 후에도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 구매자와 마주칠까 땅만 보고 걷는 내 모습,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업주와 삼촌들, 사채업자, 소개업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나를 섬으로 팔아버릴까 두려움에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썼다. 그는 살림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생겼다’고 했다. 2002년 12월 6일 성매매 피해여성 지원센터로 문을 연 살림이 이름처럼 탈성매매 여성을 ‘살린’ 이야기가 책 속에 담겼다.
이송희 부산여성사회교육원 이사는 20년 전 살림의 등장을 “부산 지역 진보 여성운동의 축적 결과”라고 평가하면서도 “초기 정경숙 대표를 비롯한 주체 세력의 강한 추진력이 없었다면 운동의 전개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전 대표는 현재 완월기록연구소 소장을 맡아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완월 아카이브’라는 온라인 기록관을 여는 성과도 있었다.
‘빨간집’의 배은희 기록활동가는 “완월 아카이브가 한 번 기록물을 모은 활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될 수 있게끔 하는 업데이트 작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시민 아키비스트로 참여했던 임미화 씨는 “전북 전주 선미촌에 갔을 때 성매매 집결지가 사라지고 아카이브관과 성평등 교육관, 사회적기업, 창작과 예술의 현장으로 탈바꿈한 것에 감동 받았다”며 “개발과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라 아픈 역사를 성찰하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 활동가들의 바람과 달리 완월 아카이브 관련 예산은 최근 부산시의회에서 전액 삭감됐다. 변정희 살림 대표는 “주민참여예산제, 시정 협치 사업으로 편성됐던 예산이 애초 2억 원에서 1억 2000만 원까지 줄어들더니, 시의회 상임위를 거치면서 아예 사라졌다”며 “주민 반대를 앞세워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려는 시의회가 대변하는 주민은 대체 누구냐”고 반문했다.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을 거쳐 100년 넘게 이어져 온 끈질긴 성 착취의 역사. 완월동이 재개발 된다 해도 그 역사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지자체의 책무가 아닐까.
2022-12-07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