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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질질’ 끄는 선거법 재판, 신속하게 끝내야
지난 8일 부산 교육계에서는 다소 충격적인 판결이 있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하윤수 부산시교육감이 1심에서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벌금 700만 원을 선고받은 것. 하 교육감은 공식 선거기간 전 사조직을 설립해 선거운동을 벌였고 선거공보물에 허위학력을 기재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하 교육감은 판결이 선고된 후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법원을 빠져 나갔다. 이후 대변인실을 통해 “즉각 항소해 실망스러운 재판 결과를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지역 교육계의 우려를 감안한 듯 “지금까지 추진했던 교육정책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계와 법조계는 하 교육감의 1심 형량으로 봤을 때 2심, 3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7월 부산시교육감으로 취임한 이후 1년여 동안 학력 신장을 중심으로 야심차게 진행해왔던 하 교육감의 정책들은 추진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말들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특히 하 교육감이 2심·3심으로 확정 판결을 받기까지는 1년 정도가 더 소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검찰이 지난해 6월 지방선거와 관련해 재판에 넘긴 1448명 중 당선자는 총 134명이다. 이 가운데 광역자치단체장 2명, 기초자치단체장 32명, 교육감 2명 등 36명의 기관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공직선거법은 100만 원 이상 벌금형 등이 확정될 경우 당선을 무효로 하고 있다.
부산의 경우 하 교육감외에 기초단체장은 오태원 북구청장이 지난 5월 1심에서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다. 오 북구청장은 즉각 항소했다.
경남의 경우 홍남표 창원시장이 ‘후보 매수’ 혐의로 기소돼 1심이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달 말 공판에서는 재판 중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119에 실려나가는 소동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시작된 선거법 위반 1심 재판 선고가 언제일지 기약할 수조차 없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던 김부영 경남 창녕군수는 첫 공판을 앞두고 지난 1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숨진 김 군수는 “결백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경남 구인모 거창군수는 지난해 12월 1심에서 벌금 70만 원을 선고받았고, 김영길 울산 중구청장은 지난 5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오영훈 제주지사의 경우 다음 달 25일까지 증인 신문이 진행됨에 따라 1심 선고는 자연스럽게 11월 이후로 늦어질 전망이다. 박남서 경북 영주시장은 지난달 31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징역 3년이 구형됐고, 서태원 가평군수, 우승희 영암군수, 이병노 담양군수, 박강수 마포구청장, 이태훈 달서구청장 등도 여전히 1심 재판 중이다.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는 기관장은 상식적으로 오롯이 시정, 도정 등 일에 전념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 기관의 내부 분위기는 어쩔 수 없이 어수선해지고, 기관장의 장악력도 떨어진다. 지역 현안의 속도감 있는 추진은 차질을 빚는다. 당선무효형이라도 나오면 행정 공백을 초래하고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은 물건너갈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피해는 시민의 몫이다.
결국 안정감 있는 행정을 위해서는 선거법 위반 재판이 속도를 내야한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270조는 선거법 위반 사범의 재판을 다른 재판에 우선해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판결 선고기간도 1심을 공소제기일로부터 6개월, 2심과 3심은 앞선 판결 선고일로부터 3개월 이내로 정하고 있다. 해당 조항에는 ‘반드시’ 기간 내에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년 안에 판결을 조속히 마무리 짓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를 강제할 제재 방안은 마련돼 있지 않다.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재판은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의 선거법 위반 사범의 기소가 지난해 11월 말에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1심 선고는 모두 지난 5월 30일 이전에 끝내야 한다. 2심의 경우도 지난달 말에는 선고가 나와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법원 측은 신속한 심리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코로나19 등으로 재판 진행에 차질이 발생함에 따라 전체적으로 기간을 준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선거법 선고기한 규정은 유명무실화되고 재판은 지연되면서 ‘늑장 재판’이라는 사법 불신마저 초래된다. 사법부의 일이라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 피해는 국민의 몫이니, 입법부와 행정부가 다 같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판사 인력을 충원하든 제재 방안을 마련하든 신속한 재판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2023-09-2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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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도시 일상에 '문화라는 안단테' 스며든다면…
“건어물과 맥주, 무엇보다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좋았다.” “공간과 콘텐츠의 조화가 돋보였다.” “이런 곳을 놔두고 왜 여태 이런 생각을 못 했지.” 2023 유라리건맥축제(혹은 건어물맥주축제, 이하 건맥 축제)가 성황리에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기자는 곧바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도시 문화에 관심이 많은 기자로서는 이런 축제가 너무나 반가웠다.
건맥 축제는 지난 8~9일 부산 중구 남포동 영도대교 앞 유라리광장에서 펼쳐졌다. 이틀간 열린 축제에 방문객만 해도 자그마치 2만 명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준비한 건어물 안주 1만 5000여 개가 행사 종료 전 완판됐고, 수제 맥주 물량도 행사 중간에 모두 동이 나 추가로 확보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건맥 축제는 장소 선택이 탁월했다. 맥주 안주에 빼놓을 수 없는 건어물을 파는 부산 최대 시장이 근처에 있고, 영도대교와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서 축제가 열렸기 때문이다. 맥주 안주엔 치킨(치맥)도 좋지만, 마른 오징어와 문어, 대구포, 쥐포 등 건어물과의 만남은 이런 게 오랜 맥주 안주라는 점에서 장소성을 십분 활용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한마디로 ‘건어물’과 ‘맥주’ 여기에 덤으로 ‘바다 풍경’이 만나 대박을 이끈 셈이다.
여기다 이곳 건어물시장은 1931년 남항 매축으로 선착창이 생기면서 조성된 시장이기에 축제의 바탕이 되는 역사성과 스토리도 탄탄하게 뒷받침됐다. 짭조름한 건어물에 역사성이란 ‘시간의 켜’를 웃기처럼 얹었다고나 할까. 명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얘깃거리가 필요한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오징어·쥐포 등의 안주에 대한 추억과 기억은 가장 좋은 소재가 됐다. 또 건어물과 맥주란 콘텐츠가 장소성과 결합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영국의 도시 이론가 찰스 랜드리가 말한 ‘창조 도시’는 바로 이런 것이다. 차근차근 살펴보면 장소성과 역사성, 스토리,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건맥 축제는 참신한 콘텐츠가 있으면 원도심 지역 축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혹자는 조그마한 지역 축제 하나를 놓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얘기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게 바로 도시를 풍요롭게 하는 상상력이고, 도시를 살아있게 하는 상상력이기에 얘기하는 것이다.
가을을 맞아 도시 곳곳에서 하나둘 축제가 펼쳐진다. 특색 있는 행사도 있지만, 상당수는 엇비슷한 행사들로 넘쳐난다. 지자체들이 좀 더 고민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건맥 축제처럼 색다른 공간에, 참신한 스토리를 담은 축제를 많이 발굴하고 창조해 주었으면 좋겠다. 참신함은 엉뚱함과 상상력에서 나오고, 특정 공간의 가치는 적극적으로 창조하는 데서 나오기에 하는 얘기다. 그래서 상상력을 지역의 역량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나아가 시민들은 축제 때만 이런 행사를 접하기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 이런 문화가 함께하길 고대하고 있다. 일회성보다는 일상의 문화로 거듭나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건맥 축제를 부산을 상징하는 상시 행사로 키워나가는 것도 한 번쯤 고려해 볼 일이다.
흔히 도시를 평가하는 가늠자로 ‘매직 텐(magic ten)’이라는 게 있다. 시민들이 자주 이용하고, 또 그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도 가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곳 열 군데를 말한다. 그게 특정 거리나 광장, 시장이나 동네일 수도 있고, 카페나 대학, 공연장이나 미술관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건맥 축제가 열리는 유라리광장이 ‘매직 텐’이 되지 못하란 법은 없다.
건맥 축제가 펼쳐진 유라리광장처럼 부산 도심 곳곳에는 부산만의 오감을 보여 주고, 각종 행사를 펼치기에 적합한 공간이 많다. 이를테면 부산역 뒤 북항이 내려다보이는 덱(deck) 같은 곳이다. 수많은 외지인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부산만의 공연을 펼치고 알리기에 이만한 공간도 없다. 특히 이곳은 북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바다 쪽이 탁 트여 있어 ‘개방성’ ‘해양성’의 특색을 갖는 도시 부산의 이미지와도 잘 맞는다. 이곳에선 팬터마임이나 저글링도 좋고, 마술 공연도 괜찮다. 짧은 연극이나 한바탕 춤판이 펼쳐진다면 더 좋다. 특히 2030엑스포가 부산에 유치된다면 부산을 알리는 데, 이만한 홍보 장소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유치 전인 지금이 더 절실하고 필요한지도 모른다.
탁 트인 북항을 바라보면서 부산의 문화를 즐기고 알릴 수 있다면 더 할 수 없는 공간일 터이다. 시민 입장에선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일상에서 공연을 매개로 잠시 휴식과 힐링을 만들어 주는 ‘문화라는 안단테(andante)’가 우리 삶에 스며든다면 그걸로 족하다.
스토리가 살아있는 곳, 상상이 살아 숨 쉬는 곳, 문화라는 안단테가 스며있는 곳, 그게 부산이란 도시였으면 좋겠다.
정달식 경제·문화 파트장 dosol@busan.com
2023-09-1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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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절망보다 희망
다가가니 줄지어 벽에 매달린 작은 나뭇가지들이 떤다.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온몸을 흔든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인간을 향한 처절한 경고다. 지금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만나는 강렬한 한 장면이다.
팀 프로젝트 ‘죽은 나무에 접속하기’에 참여한 유화수 작가는 자택 앞 12그루의 나무가 사라진 사건을 이처럼 표현했다. 1996년 빌라 단지가 들어설 때 심긴 작은 나무들은 2023년 거대하게 자랐다. 이들은 올 5월 조망을 가린다고 싹둑 잘려 나갔다. 인간의 움직임을 센서로 인지한 나뭇가지들이 그토록 전율했던 이유다.
이 작은 사건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환경 파괴가 부른 기후 위기는 당장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먼 후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내 아이들의 문제다.
기상청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20년까지 30년간 부산의 8월 열대야 일수는 평균 11.2일이었다. 그런데 올 8월에는 20일로, 배 가까이 늘었다. 하루 최고 기온이 33도 이상인 폭염 일수도 심각하다. 올 8월에 8일을 기록했는데, 지난 30년 평균은 3일에 그쳤다. 벌써 내년 여름이 두렵다.
우리에게 더 큰 위기감을 주는 것은 ‘극한 호우’와 태풍이다.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사상자와 재산 피해를 낸다.
기상 관측을 시작한 1904년 이후 부산에서 해마다 1시간 안에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을 보면, 시간당 106mm가 내린 2008년 8월 13일이 1위다. 이어 2011년 7월 27일 96mm, 2009년 7월 16일 90mm의 순이다. 얼마나 더 심각해 질지 짐작하기 힘든 극한 호우는 서울 강남, 반지하 주택과 주차장, 대기업 공장, 어느 도시의 지하차도까지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해수면 상승도 ‘고작 몇 cm’라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 몇 cm가 지금껏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기후 재앙을 불러 왔고, 앞으로도 상상하기 싫은 재난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과거 기후위기는 논쟁적 화두였다. 지금도 미국을 중심으로 음모론까지 등장하며 정치적인 갈등이 벌어진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기후 위기 보고서를 작성할 때 세계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하지만 최근 기후·환경 전문가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극한 기후가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고 한다. 가타부타 논쟁도 사그라들었다. 지구의 기온 상승이 가속화하면 인류에게 희망이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 명확한 과학적 사실로 입증되어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절망적인 상황을 한탄하며 경고 사이렌만 울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망은 무력감을 부를 뿐이다. 그 주체가 개인이냐, 기업이냐, 정부냐를 가릴 처지는 더욱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행동하는 이들을 주목하고, 어떤 식으로든 참여해야 한다.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기후 위기 대응에 진심이다. 책으로, 강연으로 기후 위기의 심각함과 행동 요령을 전파하는 그는 요즘 ‘5분만 있으면 누구든 함께할 수 있는 기후위기 대응 캠페인(Five Minutes for the Future)’을 시작했다. 홈페이지 SNS 등을 통해 시민, 전문가, 기업, 조직 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선진국들은 이미 기후위기가 초래할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내다보고 다각도로 대비하며 움직이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 그런 적극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부산에서도 희망을 향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달 초 (사)자연의권리찾기가 주최한 ‘제2회 하나뿐인 지구영상제’가 영화의전당에서 5일간 성대하게 열렸다. 지난해에 이어 1만 5644명의 관객이 국내외 작품으로 기후위기를 공감했고, 국내 전문가들도 ‘ESG국제컨퍼런스’로 함께 힘을 보탰다.
특히 지구영상제 개막작 ‘레거시’는 큰 울림을 줬다. 하늘에서 본 지구의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기후위기 활동가인 프랑스 얀 아르튀스-베르트랑 감독은 5년 전 탄소 배출의 주범인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결심해 부산으로 오지 못했다. 세계인에게 전하는 그의 메시지는 이랬다.
“과학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세요. 기후 위기를 알아야 합니다. 생태를 중요시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합시다. 우리의 탄소발자국을 계산해 봅시다. 산업적으로 생산된 육식을 하지 않고, 지역 유기농 제철 음식을 먹도록 노력합시다. 지속가능한 금융을 실천하는 은행을 이용하고 기차, 버스, 자전거, 공유자동차로 여행합시다. 비행기는 예외적으로만 이용합시다. 이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탄소 배출에 무신경한 기업에 항의하고, 정부·지자체에 기후 위기 정책을 요구하는 행동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다.
박세익 기획취재부장 run@busan.com
2023-09-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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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콰트로 포트’ 가덕신공항
지난주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이 발표됐다. 부산에서 가장 관심이 쏠린 것은 당연히 가덕신공항 관련 예산이었다. 가덕신공항 2029년 조기 개항을 위한 설계비와 보상비, 공사 착수비 등 관련 예산 5363억 원이 반영됐다. 올해 130억 원에 비해 무려 40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부산의 단일 사업에 정부가 이렇게 1년에 5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한 적은 없다. 여기에 가덕신공항과 연결되는 연계 교통망 중 하나인 부산신항~김해 간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도 1553억 원의 예산이 반영됐다. 정부가 긴축 재정으로 방향을 틀었음에도 지역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가덕신공항 관련 예산이 반영된 것을 보면서, 부산의 숙원이자 역대 최대규모 사업이 이제 정말 본격화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실제 공사가 시작될 내후년부터는 연간 조 단위의 예산을 투입하게 된다.
이에 앞서 국토부가 지난달 24일 발표한 ‘가덕신공항 건설사업 기본계획(안)’에서도 기대감을 갖게 하는 부분들이 제법 보였다. 정부가 가덕신공항 건설에 상당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국토부는 가덕신공항 기본 방향으로 우선 ‘24시간 운영 가능한 공항 건설로 물류·여객의 복합-콰트로 포트 구축’이란 점을 강조했다. 4를 뜻하는 ‘콰트로’는 기존에 지역에서 주창했던 항공·항만·철도 ‘트라이(3)포트’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개념이다. 물류 측면에선 가덕신공항과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국지도 신설로 도로 기능을 보강한다. 특히 여객 부문이 눈에 띄는데, 가덕신공항에 연안여객터미널이 설치될 계획이다. 기존 항공기 자동차 열차에 여객선까지 4개 여객 요소를 다 갖추게 된다. 부산 북항이나 해운대는 물론 울산과 전남에서도 여객선을 타고 공항을 이용할 수 있다. 여기다 미래의 첨단 교통수단으로 주목받는 도심항공교통(UAM) 이착륙장도 설치된다. UAM이 상용화되면 부산은 물론 남부권 전체의 비즈니스 승객을 중심으로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 가덕신공항 건설을 전담할 조직인 가덕신공항건설공단 신설을 국토부가 확정했고, 현재 3500m 규모의 활주로 1본을 향후 수요에 따라 2본까지 확대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둔 점도 고무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과제도 많다. 국토부는 가덕신공항 항공수요를 2065년 기준 여객 2326만 명에 화물 33만 5000t으로 잡았는데, 화물 처리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 국내 공항 화물처리량(383만t)의 87.3%를 처리한 인천공항의 330만t과 이미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 2065년 기준으로는 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다 국토부의 사전타당성 검토 연구용역 결과에서 나온 TK신공항의 2060년 국제선 화물처리량 21만 3000t과도 별 차이가 없다. 부산항 신항과 연계해 24시간 이착륙이 가능한 물류 중심의 공항 육성을 기대했기에 아쉬운 점이 분명히 있다. 이는 부산시와 경남도 등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육해공 물류망 완성을 발판삼아 고부가가치 신산업 육성과 항만과 공항을 연계한 환적화물 유치로 신공항을 더 키워나가야 한다. 또 새로운 고속철도를 비롯한 교통망 구축과 산업·물류 단지 조성 등으로 부산뿐만 아니라 동남권 전체가 신공항 운영의 수혜를 더 누릴 방안들도 차근차근 준비해 가야 한다.
10조 원이 훌쩍 넘는 공항 건설 과정에서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보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재 가덕신공항특별법에는 공항 예정지역의 지역기업을 우대하게 돼 있다. 그러나 수 조원대에 달하는 부지 조성 공사를 단일공구로 발주하기로 해 규모가 작은 지역 건설업체들이 컨소시엄에 참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태다. 지역 건설업체들은 하청업체 역할에만 그치고,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 건설사들만의 잔치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지역의 우려에 대해 지난주 지역 업체 참여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지만,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부산의 건설 관련 단체들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건설협회나 주택협회 등은 가덕신공항뿐 아니라 지역의 건설·건축 관련 이슈에 대해 늘 침묵해 오면서 존재감이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공항 명칭에 대한 논의도 이제 시작되고 있다. 일부 정치권에선 신공항 주변이 이순신 장군의 무패 신화가 깃든 지역으로 ‘이순신국제공항’으로 명명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편에선 부산이라는 도시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차원에서 당연히 ‘부산국제공항’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적 항만인 부산항과의 시너지도 누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둘 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뭐가 됐든, 이제 닻을 올린 신공항 건설 사업이 명품 공항으로 완성되기까지 계속 지혜를 모아 나가자.
2023-09-0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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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기부 후진국’ 코리아
최근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 박세웅이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부산사랑의열매)의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해 화제가 됐다. 박세웅은 스포츠 선수로서 부산에서는 첫 번째, 전국적에서는 31번째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자가 됐다. 박세웅은 이날 가입식에서 “꼭 큰 금액이 아니더라도 남을 돕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기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부는 금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면서 “저의 가입식을 계기로 더 많은 스포츠인과 시민들이 나눔 실천에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프로 선수다운 큰 배포를 보여줬다.
박세웅과 인터뷰를 한 후 ‘그가 부산 스포츠 선수 1호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자였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부산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스포츠인들 중 박세웅을 제외하고 여태껏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를 한 선수가 없었다는 점이 너무 의아했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사실 박세웅은 부산 출신 선수가 아니다. 경북 구미시에서 태어났고 경북고를 나온 대구·경북 사람이다. 연고지가 부산인 롯데에서 뛰고 있으니 부산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기부를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부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즉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 수준이 전 세계에서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다. 지난 1월 영국 자선지원재단(CAF·Charities Aid Foundation)이 발표한 ‘2022년 세계기부지수’ 순위에서 대한민국이 88위를 기록해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계기부지수는 CAF가 2010년부터 매년 120여 개국, 200만여 명을 대상으로 기부와 관련한 설문조사 등을 실시해 발표하는 지표이다. CAF는 △기부 의향 △기부 금액 △자원봉사 시간 등의 항목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해 이 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한국은 코로나19 확산이 정점을 찍었던 2021년에는 110위로 사실상 꼴찌에 가까웠다. 기부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미국(3위), 호주(4위), 영국(17위)은 물론 중국(49위)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최근 10년간 한국의 순위는 2011년 57위에서 2022년 88위로 30계단 이상 하락했다. 반면 중국은 같은 기간 140위에서 49위로 대폭 상승했다. 세계 경제대국 2위로의 도약과 함께 인민이 함께 부유해지자는 ‘공동 부유’ 운동이 확산된 결과이다.
인도네시아와 케냐가 1~2위를 차지해 CAF의 기부지수가 무한 신뢰할 만한 지표는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설문조사의 경우 항목 설정과 조사 방법 등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이 88위라는 사실에 너무 실망하거나 비관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실상 세계 10위권 내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이 적어도 50위권 내에 들지 못했다는 사실은 ‘기부 후진국’ 수준임을 방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기부 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발표한 ‘공익 활동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기부 참여율과 기부 의향이 지난 10년간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13세 이상 기부 참여율은 2011년 36.4%에서 2021년 21.6%로, 기부 의향은 같은 기간 45.8%에서 37.2%로 감소했다. 보고서는 GDP 대비 민간 기부 비중이 정체된 이유로 2014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뀐 개인 기부금 공제 방식 변경과 코로나19 팬데믹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사랑의열매 등 법정기부금단체 관계자들은 민간 기부 활성화를 위해 △기부금 세제 지원 확대 △공익법인 규제 개선 △생활 속 기부 문화 확산 등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부산사랑의열매 한 관계자는 “개인 기부의 경우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한국의 상속 문화가 나눔 문화 활성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기부를 하면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러는구나’라고 ‘색안경’을 끼고 기부자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도 큰 문제”라며 “반면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의 경우 부의 사회 환원,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이 보편·일상화돼 있는 점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기부지수 선진국과 같이 소득공제 방식으로 재전환하거나 소득공제·세액공제 중 선택 적용 방식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세액공제율도 현행 15%에서 30% 이상으로 높이는 등 과감한 세제 지원이 있어야 한다”며 “생활 속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어릴 때부터 나눔에 대한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근 기부 여력과 재원이 큰 대기업의 공익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재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간 기부 활성화를 위해 규제 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나 규제는 풀고 인센티브는 대폭 늘리는 전향적인 정책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3-08-2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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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다시, ‘부산다운’ 부산을 위하여
부산은 정말 매력적인 도시다. 산과 강과 바다를 동시에 접하고 있다. 세계 그 어디를 가봐도 부산만 한 자연 여건을 갖춘 곳이 많지 않다. 여기에 공항, 철도, 항만 등 교통 인프라도 잘 구축돼 있다. 하지만 부산시민들 중 일류 도시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히려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는 타이틀이 부끄럽다”고 말하는 시민들이 더 많을 것이다.
실제로 부산의 여건은 최악의 수준이다. 한 도시의 경쟁력을 나타내는 지역내총생산(GRDP) 부문에서 부산은 거의 꼴찌 수준이다. 부산은 2964만 원(2021년 기준)으로 전국 평균(4012만 원)에 훨씬 못 미친다. 전국 17개 시도 중 15위이다. 부산보다 못한 도시는 대구와 광주 2곳뿐이다. 인구 감소도 심각하다. 부산 인구는 지난 10년간 23만 명 가까이 줄어들어 330만 5000명(7월 현재)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32만 명 이상 늘었지만 부산은 대폭 감소했다. 지난 1년 동안 줄어든 부산 인구가 3만 명 정도 된다.
일자리의 근간인 기업 사정은 더욱 엉망이다. 전국 100대 기업(2021년 기준)에 부산 업체는 단 한 곳도 들어 있지 않다. 겨우 1000대 기업에 27개 포함돼 있을 뿐이다. 그마저 일부 기업들은 부산을 떠나려고 한다. 부산으로 오는 기업은 거의 없고 떠나려는 기업만 즐비한 상황이다. “먹고살게 없어서 부산을 떠난다”는 젊은이들의 하소연에 우리 기성세대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한민국 전체가 겪는 문제이긴 하지만 부산이 유달리 심각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부산이 원래부터 ‘부실 투성이’였나? 아니다. 부산은 역동적이고 개방적이며, 다소 무모할 정도로 도전 정신이 강한 도시였다. 국내 그 어느 도시보다 결속력도 뛰어났다. 대한민국이 오늘의 눈부신 발전을 이룬 배경에는 부산의 역동성이 큰 역할을 했다. 부산은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연 ‘개방의 도시’였다. 한때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한 도시 중 하나가 부산이었고, 서울은 물론 호남이나 충청도 사람도 아무 거리낌 없이 품어준 도시가 부산이었다.
도전 정신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김영삼은 20대에 대권 도전을 선언한 뒤 온갖 역경을 딛고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 됐다. ‘부산 촌놈’ 노무현은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에서 무모하게 대권에 도전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가요와 영화, 방송 등 ‘K컬처’를 주도한 인사들 중에 부산 출신이 많은 것도 특유의 도전정신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역동성과 도전정신은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타지역 출신은 철저히 배척하고 오로지 ‘부산 토박이’만 찾는 ‘신(新) 쇄국주의’에 갇혀 있다. 부산에 자리 잡은 각종 공공기관의 장(長)은 부산 출신만 임명돼야 한다는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다. 이러다가 ‘글로벌 금융도시 부산’의 핵심인 산업은행 이전을 완료한 뒤 그 수장을 부산 출신으로 앉혀야 한다고 ‘생떼’ 부리지 않을까 걱정부터 앞선다.
정치인들은 더욱 한심하다. 상당수 부산 국회의원들은 정치인이 아닌 샐러리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정치적 도전의식은 거의 없다. 그냥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액 연봉(1억5000만 원)에 만족하고 산다. 그렇다고 결속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2030월드엑스포 유치에 부산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렇지만 적잖은 부산 정치인들은 “유치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일부 인사들은 “이번에 안 되면 5년뒤 유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엑스포 유치 지원을 핑계로 틈만 나면 외국을 드나든다. 개인플레이만 만연할 뿐 팀워크를 찾아보기 힘들다. 1년이면 세상에 완전히 바뀌는 초스피드의 시대에 5년 뒤에 엑스포를 유치한다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5년 뒤엔 중국이 엑스포 유치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 우리한테 더 힘든 상황이 될 수 있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그 핵심은 ‘부산다움’을 되찾는 것이다. 부산의 장점인 역동성과 개방성, 도전정신을 부활시키자. 대충해선 안 된다. 죽기 살기로 ‘부산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가 쳐놓은 ‘인(人)의 장막’을 당장 걷어내고 문호를 대폭 개방하자. 우리 지역의 모든 자리를 비(非) 부산 출신들에게 양보한다는 극단적인 처방까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도전의식으로 재무장하자. 또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결속력을 과시하자. 그러면 부산은 ‘대한민국 넘버2’를 넘어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될 수 있다. 부산은 그럴만한 역량과 자격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가.
2023-08-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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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인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지난해 2월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의 앨범을 보고 꽤 놀랐다. 웃는 아이들 속에서 아들을 찾으니 한 반이 겨우 21명. 학년 전체가 네 반, 다 합쳐봐야 80명 남짓이다. 창고를 뒤져 내 중학교 앨범(1989년)을 꺼내 봤다. 흑백사진 속 59명이 4열 횡대로 운동장 스탠드에 쫙 서있다. 전체가 열 반이니 약 600명. 같은 부산인데 30년 만에 참 많이 변했다 싶었다.
전국이 물난리 충격에 빠져 있던 지난달 27일 부산에 반갑지 않은, 그렇다고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뉴스가 전해졌다. 바로 ‘인구 감소’ 소식이다. 정부가 진행한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지난해 부산의 인구 330만 명(329만 6000명)이 ‘깨졌다’는 것이다. 감소율로 치면 부산과 울산이 공동 1위(-0.9%). 경남이 2위(-0.8%)를 하면서 이웃끼리 동병상련이다.
‘깨졌다’는 표현 속에 위기감이 담겼다. 인구 감소 자체가 그다지 뉴스가 안 되니 자꾸 자극적인 팩트를 찾게 되는 것 같다. 같은 조사에서 부산의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처음으로’ 70만 명을 돌파했다. 정확히 70만 2000명. 한 해 전(67만 명)보다 4.7% 증가한 것이다.
인구 감소와 그로 인한 고령화는 지역의 경쟁력 하락을 부른다고들 한다. 일할 사람은 적고, 부양 대상자는 많다는 점에서다. ‘지역소멸’이라는 말까지 심심찮게 나오는 지경이다. 부산의 ‘위기의식’은 대부분 여기에서 출발한다. 부산시나 구·군청도 어떻게 하면 이 추세를 막을까 백방으로 궁리하고 뛴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인구 감소 폭을 줄일 수 있을까. 그것이 어렵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최근 어느 책을 읽다가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지금의 부산이 우리가 간절하게 원했던 모습이라는 점이다. 인구 감소는 그 간절한 바람 중 하나였다. 언론계 20년 선배가 쓴 자서전에 이런 상황이 잘 담겨 있었다.
책에는 그가 보도한 기사가 함께 실렸다. 부산의 고질적 문제를 진단하는 기획에서 ‘인간 홍수’를 만병의 근원으로 꼽았다. 하루 226명꼴로 느는데, 교통정체 공해 주택난 등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보도 시점이 1989년이다.
간절한 바람 덕분일까. 부산 인구는 1995년 388만 명을 정점으로 줄기 시작했다. 정부의 장래인구추계를 보면 앞으로 10년 뒤 부산의 인구는 300만 명을 턱걸이 하고, 고령인구는 100만 명을 눈앞에 둘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 감소가 부산만의 현상은 아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2021년(5173만 8000명)에 줄었고 지난해에도 추세가 이어졌다. 산업화 과정에 인구가 폭증한 관성 때문인지 인구 감소는 낯설다. 누구는 노동집약적인 농경사회의 출산 습관이 바뀌는 과정이라고 분석한다.
기후변화처럼 인구 감소는 ‘상수’이자 ‘뉴 노멀’이다. 우리의 관심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까로 더 모아져야 할 것 같다. 이것이 돼야 사람이 모이고, 아이도 낳을 것이다. 세계 최저의 출생률, 최고의 자살률은 개개인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부산일보〉는 이 점에 착안해 콘텐츠를 고민한다. 올해 기획으로 고립 청년,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과 노인 주거, 유아휴직 등이 있었다.
고립 청년은 사회적 관계를 끊은 이들을 말한다. 부산복지개발원에 따르면 적게는 7500명, 많게는 2만 2500명의 고립 청년이 부산에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더 늘었다. 최근 잇따르는 무차별 범죄에서 보듯이 이들을 사회로 끌어오는 것이 과제다. 고립, 빈곤, 분노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액티브 에이징은 ‘활력 있는 나이 듦’이다. 노인이 수혜 대상이 아닌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게 역량을 높이자는 것이다. 고령친화 동네 공동체가 대표적이다. 노인이 살기 편한 도시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외신을 보니 영국에서는 고령화에 맞춰 횡단보도 보행신호 시간을 20% 늘린다고 한다. 부산은 명색이 세계보건기구의 ‘고령친화도시’(2016년 지정)다.
육아와 돌봄 환경을 바꾸는 것도 빠뜨릴 수 없다. 〈부산일보〉는 지난달 부산의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25%) 실태를 분석해 보도했다. 전국 평균(29%)보다 낮다.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육아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시점이다.
끝으로 그동안 인구 감소라는 현실 앞에서 습관적으로 ‘자기 비하’를 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물론 ‘우는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있고 ‘위기의식’이 도시 발전에 긍정적이기도 하다. 거대 이벤트와 인프라 유치를 통해 국면을 전환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은연중에 자긍심 하락이라는 부작용도 없지 않다. ‘노인과 바다’의 도시라는 자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나부터 개개 시민이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앨범 속 아이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2023-08-1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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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예쁘다는 말 대신…
지난달 26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 뮤지션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팬으로서,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인기 스타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한국 대다수 언론은 기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주인공은 아일랜드 출생의 가수, 시네이드 오코너이다. 1987년 데뷔한 그녀는 1990년 ‘낫 씽 컴페어즈 투 유(Nothing compares 2 U)’라는 노래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당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듣는 이들을 순식간에 음악에 빠져들게 했고 자신만의 감성으로 노래를 해석하는 능력도 돋보였다.
앞으로 펼쳐갈 그녀의 음악 세계에 관심이 몰릴 것을 기대했으나, 사실 수많은 매체와 대중은 음악보다 아름다운 외모에 스포트라이트를 두게 된다. 외모에 대한 관심이 싫었던 시네이드는 외모를 망가뜨리기 위해 삭발했고 이 모습으로 평생 살았다. 뮤직비디오에선 일부러 표정을 찡그려 안 예뻐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녀가 더 주목받은 건 세계적인 히트곡을 낸 이후 행보 때문이다. 가톨릭계의 아동 성추행 사건 은폐를 항의하기 위해 미국 인기 TV쇼에서 교황의 사진을 찢는 퍼포먼스를 벌여 큰 논란이 됐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국가에선 그녀의 노래가 금지곡이 된다. 걸프전 반대를 비롯해 미국의 우월주의 정책을 대놓고 비판해 이후 미국 뉴욕 공연에서 격렬한 야유를 받지만, 무반주로 담담하게 차별 반대 노래를 부른 영상은 잔잔한 울림을 전해준다.
음악계에선 시네이드가 기존 가수들의 행보를 따라갔다면, 부와 명성이 보장되는 대스타가 될 수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사실 시네이드의 행동이 더 대단해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불행하게 보냈다고 한다. 이런 그녀가 혼자의 행복보다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놀라운 학문적 성취를 일구었지만, 예쁜 얼굴 때문에 오히려 성과가 묻힌 여성의 사례도 있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선한 영향력을 전한 제인 구달 박사가 그중 한 명이다.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침팬지 연구자, 환경운동가인 그녀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여성이자 고졸,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밀림에서 4년이나 고생하며 얻은 연구 결과는 무시당했고 심지어 ‘금발 미녀는 침팬지를 좋아한다’는 성희롱에 시달려야 했다. 아프리카에 머물며 연구를 이어갔지만, 이후에도 대중은 그녀의 연구보다 연애, 결혼, 이혼, 외모 변화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제인 구달은 이제 전 세계 어린이 청소년이 닮고 싶은 인물이 됐다. 은백색 머리의 할머니지만,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20여 개국이 참여하는 환경단체 ‘뿌리와 새싹’을 이끌고 있고, 이번 한국 방문에서도 여러 행사에 참여해 환경과 변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제인 구달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은 전보다 암울하지만 그렇다고 굴복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각자의 선택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점점 더 나빠져 가는 세상에 대한 희망이자 스스로 편견을 뚫어낸 경험자의 조언이라 묵직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참석한 모임에서 신문사의 젠더데스크로 일하고 있다고 소개하니 대뜸 질문이 있다고 한다. 여성에게 칭찬하는 목적으로 “예쁘다”라고 말하는데 젠더 감성에 문제가 되는 거냐고 묻는다.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오래도록 여성에 대한 칭찬은 대부분 “예쁘다”라는 한 마디로만 수렴된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답했다.
한때 “여자는 예쁘면 다 용서된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통하는 시대가 있었다. 학창 시절, 반에서 꼴찌였던 여학생에게 선생님이 “넌 예뻐서 공부 못해도 잘 살 거야”라는 말을 대놓고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2023년 현재에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다음 달 아시안게임이 개막한다. 4년간 대회를 준비한 선수들의 반가운 메달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여자 선수들의 기사 제목에 더는 ‘미녀 ○○’ ‘얼짱 ○○’이라는 단어로만 대표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흘린 피·땀·눈물과 경기 내용은 사라지고 예쁜 얼굴로 마무리되는 건 당사자로서 억울해지는 순간이다.
더불어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여기자의 칼럼에는 내용과 상관없이 외모 품평 댓글이 달리는 것도 안타깝다. 특히 여성·젠더 관련 기사와 칼럼에는 ‘이렇게 생겼으니…’로 시작되는 악플이 자주 보인다. 그런 악플을 쓰는 본인이 가장 못난 사람이라는 걸 알면 좋을 텐데….
김효정 젠더데스크 teresa@busan.com
2023-08-0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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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BIFF의 쇄신과 도약을 바라며
부산국제영화제(BIFF) 현안을 해결하고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할 혁신위원회 첫 회의가 31일 열린다. 지난 18일 혁신위원 7명이 발표된 뒤 처음 모이는 것이다. 혁신위원에는 동의대 김이석 영화학과 교수, 영산대 주유신 웹툰학과 교수, 미인픽쳐스 안영진 대표,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방순정 이사장, BIFF 남송우 이사, 부산시 김기환 문화체육국장이 속해 있다. 영화영상도시실현부산시민연대 박재율 대표는 학회 등 해외 일정으로 혁신위 불참 의사를 밝히고 대신 부산YWCA 김정환 사무총장을 추천했다. 박 대표를 대신할 위원은 ‘혁신위원 결원이 발생하면 혁신위가 자체적으로 충원한다’는 원칙에 따라 정해질 예정이다. 이날 혁신위 첫 회의에서는 위원장 선임, 위원 결원 보충, 의제 논의와 향후 일정 정리 등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혁신위가 세부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한 사안은 이사회와 총회에서 원안으로 통과된다. 혁신위는 오는 12월 임시총회 전까지 활동한다. BIFF 쇄신과 도약의 주춧돌을 놓을 혁신위의 역할은 막중하다. 올해 인사 내홍 등을 겪은 BIFF의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비전도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5개월이라는 활동 기간 안에 다양한 쇄신책과 발전 방안을 속도감을 가지면서도 밀도 있게 제시해야 한다. 올해 BIFF는 인사 내홍을 시작으로 각종 문제가 불거지며 위기에 놓였다. 지난 5월 신임 운영위원장 임명 이후 집행위원장이 BIFF를 떠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이사장은 지난 6월 사의를 밝혔고, 이사회는 운영위원장을 해촉했다.
우선 이번 사태로 공석이 된 신임 이사장과 집행위원장 등 임원 선임을 보다 객관적·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선임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사장과 집행위원장 역할과 권한을 명시하고 인사 투명성을 높이는 정관 개정, 조직 쇄신, 합리적인 예산·회계 시스템 마련 등도 논의 대상이다.
혁신위는 30주년을 앞둔 BIFF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미래 비전도 제시해야 한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확대 등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 영화제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재점검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BIFF가 ‘아시아영화의 허브’라는 정체성을 갖고 1996년 출범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체성이 흐트러져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혁신위원인 BIFF 남송우 이사는 지난 29일 통화에서 “위원들이 아이디어와 지혜를 총동원해서 BIFF의 재도약을 모색하는 안을 제시할 예정이다. 하지만, 모든 사안을 혁신위 7명의 힘만으로 다 할 수 없다. 재무 등 의제 특성에 따라 전문위원으로부터 자문을 받을 필요가 있다. 라운드테이블, 공청회 등 어떤 형태가 되든지 열린 장을 마련해 여론을 수렴하고 시민이 바라는 전방위적인 혁신 작업도 구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남 이사는 “혁신위가 BIFF의 위기를 기회로 승화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혁신위의 순항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 개최이다. 이런 가운데 BIFF 집행부와 사무국은 지난 19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지난 2개월간 영화제를 둘러싸고 대내외로 불거진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영화제 본격적 준비에 나선 것이다.
BIFF는 이달 경영지원실, 홍보실, 프로그램실, 커뮤니티비프실, 대외협력실, 지석영화연구소,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실 등 7개 부서 22개 분야에서 자원봉사자 700명 모집에 나섰다. 특히 준비 상황에서 고무적인 점은 관객 프로그래머 신청 건수가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BIFF 커뮤니티비프에서 운영하는 ‘리퀘스트 시네마’에 6월 30일 마감 기준 80개 팀이 신청했다. 지난해 59개보다 36% 늘어난 수치다. ‘리퀘스트 시네마’는 관객이 보고 싶은 상영작을 선정하고, 배우와 감독까지 초청하는 등 개성 있는 이벤트를 기획하는 행사다.
BIFF 아시아영화펀드 출품작 수도 총 774편에 달해 지난해 521편보다 약 49% 증가했다고 한다. 아시아영화펀드는 재능 있는 한국·아시아 영화인 작품을 발굴하고, 시나리오 개발과 후반작업 등 체계적인 제작을 돕는 BIFF 지원 사업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BIFF는 부산의 자랑이자 소중히 지켜야 할 문화자산이다. 1996년 출범 후 28년간 영화인과 부산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는 물론 세계에서 손꼽히는 영화제로 성장했다. 올해 극심한 내홍을 겪은 것은 서른 살을 앞둔 BIFF가 큰 성장통을 치른 것이라고 본다. 그동안 많은 역경을 딛고 꿋꿋이 이어온 BIFF가 저력을 발휘해 올해 내홍 사태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더 높이 도약했으면 한다.
2023-07-3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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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극한 호우와 뻔뻔함
오전 7시. 폭우가 쏟아지는 한여름 출근길이었다. 바로 눈앞 교차로에 물이 점점 차올랐다. 순식간에 승용차 바퀴까지 물이 찰랑거렸다. 하수구에서 거꾸로 솟아오르는 빗물이 승용차 엔진 룸을 덮칠 것 같았다. 숨을 고르며 차를 살살 몰아 겨우 침수 구간을 빠져 나왔다. 아찔함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문사로 출근하니 곳곳에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시내버스가 물에 잠겨 멈춰선 모습의 사진이 편집국에 전송됐다. 기습 폭우에 물바다로 변해버린 부산 남구 한 도로. 20여 분 전 승용차를 몰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 현장이었다.
10여 년 전의 경험이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최근 장맛비 속에 있다 보니 문득 1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요즘 비는 그때보다 한층 더 사납다. 굵은 물줄기를 뿌리며 우르릉 쿵쾅 으르렁거린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퍼붓는 호우 속에선 어떤 돌발 상황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다 싶다. ‘극한 호우’라는 표현이 딱 맞다. 기후변화로 사나워지는 비는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장마철 내내 내리는 양보다 많은 비가 더 짧은 기간에 몰아치기도 한다. 올해 장마 기간이 3분의 2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평년 장마철 전체 강우량을 뛰어넘었다. 기상 현상이 극단적으로 치닫는데도 우리는 너무 태연한 듯하다. 부산 동구 초량동 제1지하차도에 들이닥친 빗물이 운전자 3명의 목숨을 앗아가도 국가 차원의 반성은 없었다. 그러다 3년 후 더 큰 지하차도 참사로 다시 14명이 희생되는 사태를 맞는다. 기상 이변이 보편적 기상으로 고착화되고 있는 만큼 대비 태세를 당장 뜯어고쳐야 마땅하다. 미국은 2006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국가 방재 시스템을 전면 수정했다. 국토안보부 산하에 있던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연방 정부 독립 기관으로 재편했다. 어마어마한 폭풍우에 1800여 명이 귀중한 목숨을 빼앗긴 이후의 수습책이다. 14명의 안타까운 희생도 헛되이 날려선 안 된다. 지금의 재난 대응 시스템으로는 변화무쌍한 기후변화 현상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다는 게 증명된다. 이에 여야 정치권이 총리 직속 민관합동기구 신설, 재난예방 패키지법 등을 추진하고 나섰다. 극한 호우 앞에 먹통이 된 재난 대응 시스템을 서둘러 뜯어고쳐 억울한 국민 희생을 막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극한 호우만큼이나 감당하기 힘든 게 또 있다. 비상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지도자와 공직자들의 뻔뻔함과 무능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고통이다.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 사고는 허술하고 오만한 대응이 낳은 참사로 결론 나고 있다. 20차례 이상 이어진 신고와 경고 속에서도 재난 담당 공무원들은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해당 지자체와 경찰은 신고를 묵살한 채 출동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제대로 반성하는 이가 없다. 김영환 충북도지사와 이범석 청주시장은 사고 직후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사고 닷새 이상 지나 뒤늦게 내놓은 사과에도 지하차도 참사 등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아 뭇매를 맞고 있다. 사고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단체들은 김 지사와 이 시장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뻔뻔함도 도를 한참 넘은 듯하다. 오송 지하차도 사고가 난 지난 15일 대구에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골프를 쳐도 문제없다는 인식은 몰상식 그 자체다. 당시 홍 시장은 “주말에 골프를 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어디 있느냐” “공직자들의 주말은 비상근무 외에는 자유” 따위의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홍 시장은 최근 대구시 엠지(MZ) 세대 공무원 간담회에서 주 4일제 근무 도입과 관련한 질문에 “퇴직하라”고 했다. 그는 “쉴 거 다 쉬는 공무원이 어디 있나”고 했다. 그러다 자신에 대해선 “주말에 골프를 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어디 있느냐”고 스스로 면죄부를 줬다. 참 편한 논리다. 지난 15일 대구시에는 공무원 비상근무 제2호가 발령돼 전 직원 20%가 비상 근무 중이었다. 홍 시장이 소속된 정당 국민의힘 윤리규칙 제22조는 ‘자연재해나 대형 사건사고 등으로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거나 국민과 국가가 힘을 모아야 할 경우에는 경위를 막론하고 오락성 행사나 유흥·골프 등 국민 정서에 반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들끓는 민심에 홍 시장은 마지못한 듯 사과했고, 국민의힘 윤리위원회는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징계 수위는 경고, 당원권 정지, 탈당 권고, 제명 순으로 높아진다. 국힘 윤리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충북 지자체장들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수사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지에도 시선이 집중된다. 명심해야 할 건 그들이 게을렀던 그 순간 50명에 가까운 우리 국민이 물난리와 산사태 등으로 한꺼번에 귀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2023-07-2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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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공공기관 이전 '투 톱'의 헛발질
정부가 공공기관 2차 지방 이전 기본계획 발표를 연기하겠다고 공식화했다. 대상 공공기관이 300개가 넘는 만큼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갈등 요소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 십분 양보해서 더 면밀한 검토를 위한 연기 결정이라고 아직은 이해해보려 한다. 우려스러운 점은 문제를 대하는 정부의 자세와 대처 방식이다.
공공기관 이전 연기 사실을 주무부처 수장 두 명이 은근슬쩍 흘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공기관 이전 ‘투 톱’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과 우동기 지방시대위원회 위원장이 짠 듯이 총대를 멨다. 지난달 29일 국회 상임위에 출석한 원 장관이 “시간이 필요하다”며 바람을 잡았다. 뒤이어 우 위원장이 기자들을 모아놓고 ‘갈등 때문에 합리적 결정을 못하니 총선 뒤로 미루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국민 앞에 ‘2023년 하반기 공공기관 이전’을 공언한 지 수개월 만에 뒤집는데 말 몇 마디가 전부였다.
불안과 걱정은 지난해 연말부터 똬리를 틀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 당시 우 위원장은 이르면 2023년 하반기에 공공기관이 이전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국토부도 올 초 대통령 업무보고 때 ‘6월까지 공공기관 이전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보조를 맞췄다. 그땐 우 위원장과 원 장관의 ‘콤비 플레이’에 ‘6개월도 안 걸려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냐’는 의구심을 애써 외면했다고 할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부 검토와 지자체·공공기관과의 협의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기 사실 공개 방식은 서툴렀고 성급했다.
공공기관 이전은 수십 년 진행된 국토 불균형 문제를 풀자며 제시된 해법이다. 정답이 될지 누구도 장담 못하지만 현재로선 한국의 유일한 선택지다. 지방과 수도권이 맞서야 하고 지방 간 경쟁도 예고돼 있다. 아니,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전국 지자체가 신청한 희망 공공기관 수를 더하니 400개가 넘었다. 혁신도시가 있는 지자체는 혁신도시 부흥책을 요구하고, 비혁신도시 지자체는 혁신도시 탓에 피해를 봤으니 공공기관을 달라고 맞선다. 공공기관의 불안과 반대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정부가 수시로 굳은 의지를 보이고, 강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여도 될까 말까다. 과정도 신중해야 한다는 점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전반적인 실무를 이끌 두 책임자가 초반부터 말을 번복하니 온 나라가 불안해한다. 불가피하게 연기를 결정했다면 최소한 국민의 이해를 구했어야 한다. “지자체 유치 경쟁 때문”이라는 원 장관 핑계는 구차하다. 수백 개 공공기관을 재배치한다는데 작은 소도시들도 기회를 잡으려 하지 않겠나. 촉박하게 시한을 잡은 일부터 실책이었음을 자인한 꼴이다.
지방시대위 출범을 전후해 연기가 결정된 일도 답답하다. 지방시대 실현을 이끌 실무기구가 출범 시점에 희망의 메시지를 내기는커녕 이전 연기를 확정한 모양새다. 더구나 위원장이 나서서 총선과 결부시켜선 안 됐다.
이 이슈가 총선과 연결되니 지방에서는 전 정부 때 ‘희망 고문’을 떠올리게 된다. 윤 대통령이 지방시대를 천명했듯이 문재인 전 대통령도 취임 전부터 “노무현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장담했다. 당시 여당 대표이던 이해찬 대표가 2018년 9월 국회에서 공공기관 이전을 약속했을 때 지방은 환호했다. 그는 2020년 총선 직전 부산을 찾아 총선 후 이전을 장담하며 표몰이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총선 승리 후 공공기관 이전 문제에 입을 닫다시피했다. 정권 말기엔 ‘다음 정부에 넘겨줄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는 하나마나 한 발언도 나왔다. ‘총선 후 추진’ 발언을 못 믿는 것은 이런 전례 때문인데, 현 정부에서도 공공기관 이전을 이끌 두 인물이 판박이 행보를 보인 것이다.
정치 셈법으로도 계산해 보자. 총선 후 추진 결정은 만약 여당이 총선에 패배하면 공공기관 이전은 어렵다는 협박으로 읽힐 소지도 있다. 공공기관 이전은 법률 뒷받침도 필요하니 여당이 다수당이 되지 못하면 추진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여든, 야든 내년 총선 승리가 최우선 목표인 점을 모르지 않는다. 굳이 걸림돌을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기관 이전은 국가 미래를 위한 핵심 과제로 정치와 무관하게 추진돼야 한다. 정쟁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건 다 잘 알지 않나. 여전히 윤 대통령의 지방시대 의지는 굳건할 것으로 믿는다. 이 시점에 윤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의지를 표명한다면 지방은 답답함을 추스르며 다시 인내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2023-07-1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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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다음은 누구인가
일명 ‘김건희 고속도로’ 논란이 뜨겁다.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을 둘러싸고 김건희 여사 일가 땅과 가깝게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추진한 게 아니냐는 특혜 의혹을 민주당이 제기했다. 그러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민주당이 정치 공세를 벌인다며 별안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백지화를 선언했다. 인근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고, 특혜 의혹은 여당과 야당의 설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야당이 문제 제기를 했지만, 국민이 의혹을 가지고 특혜와 관련한 합리적 의심이 드는 상황이라면 변경 이유에 대해 정부는 당당하게 설명하면 된다. 그 의무를 무시하고 일방적인 백지화로 덮으려는 것은 의혹만 더 키울 뿐이다. 여러 논란은 차치하고 주민들이 15년간 요구한, 1조 8000억 원 규모의 국책사업을 장관의 말 한 마디로 엎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정권이 내세우는 법과 원칙에 어긋날 뿐더러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 배제가 결정된 올해 수능 논란도 윤석열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됐다. “비문학 문항 등 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의 문제를 수능에서 다루면 안 된다”고 언급하면서 학생들은 물론 교육계가 혼란에 빠졌다.
굳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자면, 수능의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사교육비 경감 문제를 구조적인 문제로까지 확대하는 논의의 장을 펼쳤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수능을 150여일 앞두고 출제 방향을 직접 지시하고, 바꾸는 것은 전례가 없다. ‘공정 수능’을 위해선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데, 갑작스러운 변화는 오히려 사교육을 부채질한다. 특히 킬러 문항은 어차피 최상위권 학생들 ‘그들만의 리그’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킬러 문항을 맞추기 위해 사교육을 받는 게 아니다. 킬러 문항만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교육당국이 내세운 사교육비 경감 대책으로는 맞지도 않을 뿐더러 대통령의 말을 급하게 띄우기 위한 졸속 대책에 불과하다.
그쯤에서 그쳤으면 그나마 좋았다. 나아가 사교육 업계를 ‘이권 카르텔’로 규정했다. 연봉 100억 원을 버는 ‘일타강사’를 이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했다. 이에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은 “킬러 문항을 만든 건 교육당국이고, 사교육은 대응했을 뿐이다. 일타강사는 많은 학생을 가르쳐서 수입이 많은 것이다. 손흥민이 공을 너무 잘 차니깐 고액 연봉을 받는 것과 같다”고 일갈했다. 이후 대형 학원에 대한 세무조사가 시작됐고 유착에 대한 경찰수사도 들어갔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무겁고도 무섭다. 지금은 이권 카르텔로 통칭되고 있는데, 노동조합, 시민단체, 사교육계 등 대통령이 언급하는 집단들은 부도덕하고 이권을 챙기는 집단으로 낙인 찍혔다. ‘공정과 법치’라는 이름 하에 비리 집단으로 낙인 찍히면 검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 등 사정기관들이 총동원돼 왔다. 일사불란하다. 이 같은 패턴은 고착화돼 ‘다음은 누가 낙인 찍힐까’라는 공포심마저 든다.
비리를 저지르면 누구나 벌을 받아야 하고, 카르텔이나 폐단이 있으면 시스템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건 비단 공정과 법치를 내세우는 이 정권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정권에서도 유효하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와 윤석열 정부의 이권 카르텔은 그런 의미에서 같다. 집권 초기 적폐 청산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의 개혁성이 적폐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상당 부분 후퇴됐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래도 최소한 ‘강한 기득권’이라는 적폐의 기준은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현재 이권 카르텔 규정에 대한 기준은 잘 모르겠다.
비리를 저지르는 노조는 분명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기득권을 가지는 원청업체의 갑질이나 재벌의 독과점·정경 유착 등이 상대적으로 더 큰 문제다. 시민단체의 보조금 횡령도 문제지만, 대학교수의 연구비 횡령과 지자체·대학 등의 보조금 비리 규모가 더 광범위하다. 사교육계를 바로 잡기에 앞서 공교육 정상화에 대한 질책이 먼저 돼야 한다. 이젠 너무 식상하지만 ‘전관 예우’로 대표되는 ‘법조 카르텔’도 여전하고, 18년째 의대 정원 동결을 주장해온 ‘의료 카르텔’도 대통령이 말하는 낱낱이 걷어내야 하는 ‘킬러 규제’다.
현 정권이 주장하는 이권 카르텔 타파가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지지를 얻으려면, 마음 내키는 대로 혹은 고정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특정 대상을 악마화할 게 아니라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진 집단, 더 부패한 집단을 먼저 찾아내 바로잡아야 한다. 너무나도 뻔한 카르텔들이 존재하는데도, 곁가지만 붙잡고 있으면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음은 누구인가.
2023-07-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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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고립청년 K에게
올여름에도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왔네요. 무탈하게 잘 지내는지요. K를 처음 만난 토론회 뒤풀이가 벌써 8년 전이니, 세월 참 빠릅니다.
부산의 한 국립대에서 이른바 ‘인 서울 대학’ 편입에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나요.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꿈을 찾아 나선 20대 청춘은 누구보다 발랄하고 생기가 넘쳤어요.
그러다 몇달 전 “부산 집에서 쉬고 있다”는 K의 근황을 전해들었을 때, 복잡한 마음 숨길 수 없었습니다. 섣부르게 이러니저러니 할 일은 분명 아니겠지만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싶었어요.
‘취준 생활’에 들어간 졸업 이후에도 많은 돈이 드는 서울 생활이 이어졌다지요. 악화되는 경제 위기 속에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까지 터져 버렸으니.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힘겹게 준비한 ‘스펙’보다 당장 성과를 내는 ‘경력’을 선호하는 채용 시장으로 급격히 변해갔고, 기업들도 인원을 확 줄이거나 아예 채용문을 닫아 버렸어요. 급한 마음에 조그만 직장에 발도 들였지만 말도 안 되는 처우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나이는 어느덧 서른. 몸도 마음도 지쳐 ‘번 아웃’이 오고야 말았던 걸까요. 취업하고 결혼도 하는 ‘성공 스토리’가 들릴 때마다 주변 시선이 더 무겁게 느껴졌겠지요. 그런 시선에 나를 가두기 시작하면, 고립이 시작될 겁니다.
세상은 K같은 이들을 ‘고립청년’이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일 할 의지가 없는 청년 무직자 ‘니트(NEET)족’부터 심할 경우 장기간 칩거하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까지 붙이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립청년이 엄청 늘었다는 전문가 경고까지 더해서요. 부산에만 최대 2만 2000명이 넘는 은둔형 외톨이가 있을 거라는 조사 결과도 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청년에게 대체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고립된 청년을 경쟁의 낙오자, 인생의 패배자로 여기는 이 사회가 구조적인 모순 덩어리 아닐지.
매년 그 많은 대학의 졸업자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드러나는 걸 대학과 우리 사회가 두려워 하는 건 아닐까요. 이미 만족할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고, 4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일자리에도 대격변이 일어난 현실을 알면서도 70%가 넘는 학생들이 차별 받지 않으려고 여전히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걸 방치하는 건 아닐까요.
인구가 계속 늘고 있는 미국의 대학, 대학원생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들의 열정적인 눈빛이 잊혀지지 않아요. ‘왜 공부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하게 알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그들이 무척 행복해 보였어요.
대한민국 경제력이 세계 10위권 이내에 진입했다고 자랑하지요. 그런데 유엔이 올해 발표한 ‘세계 행복 보고서’상 한국의 행복 순위는 57위에 불과해요. 부동의 1위 핀란드와 57위 대한민국은 공부 잘 하는 나라로 이름을 날리지만, 국민이 느끼는 행복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겁니다. 불평등 속에 청년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 청년이 될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의 미래가 과연 밝기만 할까요.
대한민국의 주요 이슈는 ‘정치 프레임 블랙홀’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습니다. 수능 ‘킬러 문항’을 두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꿔보자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장은 전혀 열리지 않아요. 정치는 더 퇴보하고, 존경 받는 어른과 리더십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립청년 문제가 심각하다니 또 대책들이 나오겠지요. 연구용역을 수행하고, 조례 제정으로 각종 센터를 만들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식상한 내용일 테지요. 그런다고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힘들겠지만, 지금 K에게 ‘어떻게든 버티고,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파편화되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린 불확실성의 시대를 모두 살아가고 있어요. 국민 중 3200만 명을 넘게 감염시키고도 아직 진행 중인 코로나19 말고도, 또 어떤 강력한 감염병과 기후변화가 우리를 괴롭힐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회의 기둥인 학교에서 교사들은 이탈하고, 의대 입시 경쟁은 역대급인데 지역 병원의 필수 의료진은 태부족인 모순이 금방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이제 청년들이 소수만을 위한 선진국 말고, 우리의 행복 순위를 올려달라고,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 다시 만들어 달라고 힘을 모아야 합니다. 자살률 부동의 세계 1위 같은 치욕이 아닌, 대한민국 고립청년들에게 ‘행복 나침반’을 돌려달라고 말해야 합니다. 어쩌면 함께 손을 잡아줄 건강한 이들이 숨어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부디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K의 건투를 빕니다.
2023-07-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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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88서울올림픽의 추억과 기적
40년이 더 지났지만, “쎄울(서울) 코리아”라고 88올림픽 개최지를 발표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 서독의 어딘가에 있는 발표지 ‘바덴바덴’과 발표자 ‘사마란치’ IOC 위원장 이름은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들었다. 발표 당시 가족들이 얼싸안고 기뻐했는지는 가물가물한데,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이듬해였던가, 올림픽 관련 만화책 ‘팔팔이만세’를 학교에서 강매하고 독후감도 쓰라고 해 열심히 읽기도 했다. 외국인 맞이를 위해 청소도, 인사도 잘하고 등등 도덕책에 나올 만한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골구석에 사는 국민학교 1학년생에게 올림픽에 어떤 역할이 주어줬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온 나라가 단군 이래 제일 큰 행사 준비로 열을 올렸다.
정부와 서울시는 올림픽을 위해 한강 종합개발사업이란 거대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서울올림픽에서 새롭게 정비된 한강과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올림픽대로 등 주요 간선도로와 교량 신설, 확장은 물론 지하철 공사도 서둘러 진행됐다. 한강도 친수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은 올림픽 이후 글로벌 도시로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 발전과 함께 올림픽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대한민국이 곧 서울이고, 한국이 바로 서울이었다.
반면 부산 등 지방은 88올림픽 이후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부산은 신발 등 전통산업의 몰락 이후 대체 산업 육성에 실패하며 경제적 위상이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부산의 지역내총생산(GRDP) 비중은 전국에서 1990년 7.0%였으나 이젠 5%도 채 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경제규모는 물론 인구로도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내놓을 날이 머지않았다.
다행히 부산에도 기회가 왔다. 세계 3대 메가 이벤트인 월드엑스포 개최다. 5년마다 열리는 등록엑스포는 행사 기간이 길어 올림픽이나 월드컵보다 경제 효과가 높다. 엑스포가 열리면 6개월 동안 우리나라 인구와 맞먹는 5000만 명이 부산을 찾는 등 60조 원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부산시는 엑스포 개최를 통해, 부산을 수도권에 대응하는 한국 경제의 제2 성장축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다. 엑스포를 통해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과 창원 경주 등을 아우르는 새로운 경제 축이 만들어지면, 동남권의 발전을 수십 년 앞당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최근 <부산일보>가 진행한 30명의 릴레이 인터뷰 ‘부산엑스포 지지합니다’에 나선 주요 인사들도 이러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언론 노출을 꺼리던 지역의 원로 기업 대표들까지 선뜻 인터뷰에 나선 것은 ‘부산을 바꿀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로 더 열심히 뛰어달라는 호소였다. 한 대표는 생애 마지막 인터뷰라고도 했다.
“부산이 목숨 걸고 달려들어야 할 마지막 기회다”(세운철강 신정택 회장), “부산 시민의 열망으로 7년 뒤 부산항 북항에서 화끈한 카운트다운을 목 터지게 외칠 수 있길 바란다”(골든블루 박용수 회장), “부산만의 간절함으로 엑스포를 유치한다면 부산은 물론 대한민국의 대변혁을 이끌 수 있다”(강의구 부산영사단장), “다음 세대를 위해 월드엑스포 유치에 더욱더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삼정기업 박정오 회장), “후세들이 기댈 언덕 될 엑스포, 임전무퇴의 각오로 반드시 유치해야”(동일 김종각 회장) 등 수십 년간 부산의 산업현장을 누빈 백전노장의 인터뷰엔 간절함과 절실함이 담겼다.
이미 부산은 엑스포 유치전에 뛰어든 것만으로도 글로벌 인지도 상승 등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정부가 힘을 쏟으면서 기후산업국제박람회 등 다양한 국제행사가 잇따라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데다, 정부와 정치권, 재계, 부산시 등의 세계 전역을 상대로 한 홍보 활동으로 부산의 인지도는 최근 부쩍 올랐다. 여기에 유치전에 나서며 부산이 충분히 글로벌 행사를 치를 만한 역량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점도 큰 수확이자, 시민들에겐 자신감으로 다가왔다. 시민들의 간절함을 보여 준 국제박람회기구(BIE) 현지 실사와 준비된 엑스포 도시의 면모를 보여 준 최근 열린 4차 프레젠테이션(PT)에서 부산은 경쟁 도시들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실사와 PT가 득표로 곧바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부산은 세계를 상대로 아쉬움 없이 모든 걸 보여줬다.
2030월드엑스포 유치전은 88올림픽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당시 서울도 추격자였다. 경제 규모가 비교할 처지도 아니었던 일본이 내세웠던 나고야에 절대적으로 밀린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IOC 위원 개개인을 상대로 한 막판 치밀한 외교전으로 52 대 27, 완승을 거뒀다. 40여 년 전의 기적을 다시 만들지 못할 법은 없다. 정·재계 등 유치위 모두가 마지막까지 절실하게 나서 역전극을 이뤄보자. 부산과 지방이 부활해야 대한민국도 산다.
2023-06-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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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젠 떠나야 할 때가 됐나 봅니다"
○○○ 집행위원장 선임(2인 공동 집행위원장 체제)→○○○ 이사장 사퇴→○○○ 새 이사장 위촉(임명). 이런 시나리오도 가능했을 듯싶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얘기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2인 공동위원장(집행위원장 1인·운영위원장 1인) 체제로의 전환, 조종국 운영위원장의 등장, 허문영 전 집행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퇴라는 돌출 변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28회 영화제를 5개월여 앞두고, BIFF가 격랑에 휩싸였다.
1996년 출범한 BIFF가 2014년 영화 ‘다이빙 벨’ 사태로 인해 위기를 겪은 후, 또 한 번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 앞의 위기가 밖(정치적인 해석)에서 야기됐다면, 이번 위기는 안에서 야기됐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이번 사태엔 이용관 이사장이 한가운데 있다. 이 이사장이 BIFF 안팎의 반대에도 조종국 운영위원장 임명을 강행한 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요, 핵심이다.
지난 5월 9일 열린 임시 총회에서 운영위원장직 신설만 논의하고, 추후 후보 등을 추천받아 적절한 사람을 임명했으면 이렇게까지는 갈등이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조 위원장 임명을 강행했다. BIFF 조직 내 강한 반대도 뭉개버리고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녹취록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날 열린 이사회와 임시 총회에서 공동 위원장(집행위원장, 운영위원장) 체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발언이 잇따랐다. 이사회에 참석한 한 이사는 “두 사람의 (공동)위원장을 두는 게 과연 필요한지 모르겠다”며 새 체제의 필요성에 의문을 드러냈을 정도다. 하지만 이 또한 뭉개졌다.
논란이 된 운영위원장 신설은 이미 2018년 구성된 부산영화제 ‘BIFF비전2040특별위원회’를 통해 제안된 내용이었다고 이 이사장 측은 항변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특별위원회는 2018년 이용관 이사장, 전양준 당시 집행위원장이 BIFF 이사회 내에 만든 조직이었다. 특별위원회가 제안한 내용 역시 BIFF의 중장기적(비전2040) 추진 방향일 뿐, 굳이 반대 목소리를 뭉개면서까지 급하게 밀어붙일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이 이사장의 지나친 자기 욕심, 자기 사람 챙기기가 지금의 BIFF 사태를 만든 셈이다.
무엇보다 집행위원장이 있는데도 직제에 없는 운영위원장직을 별도로 신설해 최측근을 급하게 임명한 것은 자기 욕심이랄 수밖에 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설령 이게 BIFF 미래를 위한 충정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자기 독단이고 자기 욕심일 뿐이다. 이를 영화인들은 BIFF의 사유화라 보았고, 분노한 것이다.
BIFF 사태가 한 달을 훌쩍 넘기고 있지만, 진정 기미는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사장과 영화인들 사이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영화인들의 목소리가 ‘조 운영위원장 즉시 사퇴를 넘어 이제는 이 이사장 즉각 퇴진’으로 그 강도를 높이고 있다. ‘영화제 끝난 후 사퇴’라는 이 이사장의 말도 이젠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오늘의 BIFF가 있기까지 이 이사장의 헌신을 모르진 않는다. 그는 BIFF의 상징적 존재다. 하지만 여기까지여야 한다. 본인 입으로 “2026년 1월까지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중간에 물러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번 사태에 궁극의 책임을 지고 주저 없이 물러나는 게 맞다. 더 이상 조건을 달면 궁색해진다. 그가 결단코 BIFF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BIFF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오는 26일로 예정된 총회에서 조종국 해임안이 통과된다면, 그 칼끝은 재차 이 이사장을 향할 것이다. 그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어도 매우 시끄러울 것이다. 그땐 이미 늦었다. BIFF를 사랑한다는 말조차 무색해질 것이다.
BIFF 출범 14년째, 김동호-이용관 공동 집행위원장 체제였을 때다. 김 위원장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떠나야 할 때가 됐나 봅니다”라고. 그는 이듬해(2010년) 초 이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면서 말이다.
이번 참에 BIFF는 쇄신해야 한다. 이사장이나 집행위원장 등 임원의 역할은 새롭게 정립돼야 한다. 무엇보다 조직에 대한 진단과 재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인적 쇄신, 조직 개편, 체질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 BIFF 조직은 30년 가까이 창립 멤버 중심으로 운영됐다. 국내외 다른 영화제와 달리 대대적인 물갈이나 세대교체가 진행된 적도 없다. 이 때문에 ‘끼리끼리 문화’가 만연하다는 지적도 있다. 시민과 얼마나 잘 소통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처절한 자기반성도 있어야 한다.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최근 국내 몇몇 영화제가 잇달아 문을 닫고 있다. 일각에선 BIFF도 이렇게 될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런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BIFF가 신뢰를 되찾는다면 말이다. 그 시작은 이 이사장의 앞으로의 행보에 달렸다.
2023-06-18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