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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의 월드 클래스] 북유럽 물가 비싸냐고요?
지난해 9월 스웨덴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이케아(IKEA)는 대표 메뉴인 핫도그 가격을 5크로나에서 7크로나로 올리려다 결국 방침을 철회했다. 2크로나면 한화로 240원 정도였지만 소비자 반발이 워낙 거셌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에너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인플레이션도 세계적인 흐름이니 ‘물가 인상’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법도 한데 스웨덴 소비자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이케아가 이후 소비자 반발을 받아들여 결국 인상 방침을 철회한 사실도 놀라웠다. 기자는 이 일을 스웨덴에서는 소비자 주권이 살아있다는 하나의 사례로 이해했다. 연수를 위해 스웨덴에서 1년을 살면서 비슷한 일들을 더러 겪었다.
그러나 지난달 스웨덴에서 막 돌아와 한국 마트에 다시 간 날, 작은 통에 든 고추장을 사려다 깜짝 놀랐다. 귀국 전 마지막 여행지였던 런던의 한인마트보다 가격이 비쌌다. 고추장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1년간 수많은 생필품 물가가 사정없이 올라 있어 장바구니에 담을 것이 없었다. 국내산 당근 1개 값이 2000원, 수박 한 통이 3만~4만 원 하는 걸 보고는 빈 장바구니를 놓고 돌아섰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물가였다.
귀국 후 다들 하나같이 해오는 질문이 있다. “북유럽 물가 비싸지 않았어요?” 5년 전 스웨덴 여행 후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만 해도 “아니다. 한국과 비슷한 것 같다”고 답했는데 지금은 “한국이 더 비싸다”고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마트는 물론이고, 커피 밥값 등 외식 물가와 다른 서비스 가격도 체감하기론 그렇다.
스웨덴도 한때 인플레이션 영향으로 물가가 너무 올랐다는 기사가 연일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이내 채소와 과일 등에 붙은 세금이 감면되면서 폭등세가 꺾였다. 감자 1kg를 넘게 사도 1000~2000원 정도면 충분했고, 양파도 마찬가지였다. 당근을 봉지 한가득 사도 2000~3000원 정도면 충분했다. 유제품과 빵 그리고 생필품 종류는 대부분 저렴했다. 장바구니 두 개를 가득 담아 장을 보고서도 4만~5만 원 정도면 충분했던 걸로 기억한다. 한국에 온 다음 날 마트에서 ‘서민은 어떻게 살라는 거지’라는 의문부터 든 이유다.
수년 전부터 〈서일본신문〉에서 〈부산일보〉로 파견 오는 일본 기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있다. “한국 물가가 너무 높아져서 일본 월급을 받아 한국에서 생활하기 힘들다. 한국에 오고 싶어하지만 물가 때문에 지원을 망설이기도 한다.”
어쩌다 한국은 북유럽보다도 물가가 비싼 나라가 됐을까. 물가를 잡기 위한 정부 기능이 작동하고 있긴 한 걸까. 그동안 소비자가 너무 온순했던 건 아니었을까.
2023-09-2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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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 실사화의 벽[남형욱의 오오티티]
'내 어린 시절 우연히 들었던 믿지 못할 한마디(중략)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용기를 내 넌 할 수 있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는 그야말로 내 어린 시절 전부였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학원이 끝나면 방영 시간을 맞추려 땀나도록 TV 앞으로 달려갔다. 매번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신체 일부를 고무처럼 늘이고 줄이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 루피와 함께 보물을 찾는 해적이 되어 모험을 떠나는 상상을 했다. 커가며 자연스럽게 '원피스덕후'가 됐다. 이 만화는 1997년 시작해 2023년 현재까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20년 넘는 꾸준한 연재에 '탈덕'의 고비도 없었다.
원피스 실사화 소식에 걱정이 앞섰다. '카우보이 비밥' '진격의 거인' 등 유명 만화의 실사화가 '코스프레 쇼'라며 혹평 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피스의 아버지 '오다 에이치로' 작가가 직접 제작에 관여했다고 하니 한 줄기 희망도 보였다. 마침내 지난달 31일 넷플릭스를 통해 원피스 시즌1 총 8개의 에피소드가 공개됐다. '넷플릭스TOP10'에 따르면 원피스는 현재까지 1850만 뷰, 시청 시간 1억 4010시간을 기록하며 글로벌 TV(영어)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일단 흥행은 성공한 셈.
뚜껑을 열었다. 아는 만큼 실망감이 더 컸다. 비현실적인 원작을 현실적인 질감으로 다루려고 한 탓이다. 가장 먼저 주인공 루피의 액션 연출이 문제다. 강하고 빠르게 묘사됐던 '고무 인간'의 능력은 물에 빠진 듯 흐느적거렸다. 원작에서 보여준 호쾌한 타격감은 없었다. 다른 인물도 마찬가지다. 세 자루의 칼을 쓰는 동료 '조로'와 메인 빌런 '아론'의 액션신은 어색한 CG 범벅으로 김이 빠졌다.
원피스의 스토리 라인은 크게 4부로 구성되는데 1부당 3개의 메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각 에피소드 당 만화책 10권 분량이다. 단행본 106권까지 나왔다. 어마어마한 분량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다채로운 사건이 이어진다. 원피스의 매력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스토리다. 특히 예사로 넘겼던 인물이나, 대사, 배경이 결국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치밀한 복선 설계는 원피스에 깊게 빠져드는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실사 드라마는 평이한 전개가 이어진다. 반전도 없고 복선도 없다. 원작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졌던 인물은 아예 삭제 당했다.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것은 원피스 세계관 묘사다. 원피스 등장인물 대부분은 '해적'이다. 주요 공간적 배경이 배와 섬인 셈인데, 실사에서는 이 배경들이 꽤 잘 표현되어 있다. 하얀 염소 머리가 상징인 루피 일행의 고잉메리호, 붉은 머리 해적단의 레드포스호, 해상 레스토랑 발라티에는 '상상의 현실화'라는 실사의 매력을 잘 살렸다. 원피스 한 회당 제작비는 약 230억 원으로 알려졌다. 세트를 만드는데 제작비를 다 쓴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본다.
2023-09-1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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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철의 '금알못' 탈출기] 퇴직연금 안전·실속 잡자
물리학과 함께 생명공학의 발달로 현대문명은 ‘100세 시대’를 넘어 이제는 ‘120세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정 최소보장 정년은 2016년부터 60살로 고정돼 있고, 실제 평균 퇴직 연령은 50대 초반에 불과하다. 개인 수명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기대수명만 보면 적게는 40년, 많게는 7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퇴직 이후의 삶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 2막의 중요성이 커지지만, 노후 생활의 토대가 될 퇴직연금은 여전히 수익성보다는 안전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말 기준 퇴직연금 사업자의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중 초저위험 상품에 전체 적립금 85% 수준인 9393억 원이 몰렸다. 저위험은 806억 원, 중위험은 488억 원, 고위험은 332억 원 등이다. 가입자도 초저위험 상품이 177만 명으로 가장 많았고 저위험 9만 명, 중위험 8만 명, 고위험 6만 명 등으로 집계됐다.
금융권에서는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 당초 취지인 퇴직연금 수익률 상승이 무색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극단적인 안전성만 추구하는 초저위험 상품 중에서도 수익성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금융감독원 퇴직연금 비교공시를 살펴보면 현재 원리금 보장 상품은 총 526개로 금리는 최저 2.15%에서부터 4.90%까지 다양하다. 똑같이 원금이 보장되는 초저위험 상품이지만 이처럼 금리차가 최대 2.75%포인트(P) 차이를 보이고 있다. 2%대의 차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20~30년 장기간 복리의 마법이 더해지면 최소 수 백만원이 더 쌓인다. 가입한 상품의 금리와 다른 상품들을 비교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가입자의 연령과 투자 기간을 고려한 ‘100-나이 법칙’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30대의 경우 포트폴리오를 100세에서 30세를 뺀 70%는 수익형 자산에, 30%는 안전형 자산에 적절히 배분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목표 수익률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 퇴직 후 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익률이 물가상승률에 준하는 정도는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동기 대비 3.4% 올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입자의 관심이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에서 1000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디폴트옵션을 지정하지 않은 사람은 대상자 전체의 절반이 넘는 5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43%는 “디폴트옵션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오늘도 격무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겠지만 ‘지금의 땀’을 ‘미래의 눈물’과 바꾸는 과를 범해서는 안 될 것 같다.
2023-09-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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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치고 달리기] 한 지붕 두 가족
부산에 또 하나의 스포츠 구단이 생겼다. 부산 KCC 이지스다. 이로써 KT 소닉붐이 수원으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2년 만에 남자 프로농구 경기가 다시 열리게 됐다. 기존의 롯데 자이언츠(야구), 아이파크(축구), BNK썸(여자 농구)를 포함하면 부산은 총 4개 프로 스포츠팀을 보유한 도시가 됐다.
KCC가 합류하면서 사직실내체육관은 ‘한 지붕 두 가족’이 불가피해졌다. KCC는 홈구장을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으로 지정했다. 사직실내체육관은 여자 농구 BNK 썸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BNK는 2021년부터 사직 실내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BNK와 KCC의 공존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프로농구리그가 개막하는 오는 10월 말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 두 팀의 로커룸 같은 필수 시설의 배분, 경기장과 코트 내 광고물 재배치 등 조율해야 할 부분이 많다. 체육관의 임대인인 부산시와 임차인인 BNK, KCC는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특히 부산시의 역할은 중요하다. 부산시는 BNK와 KCC가 잘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부산시는 두 구단이 사직실내체육관에서 부산 시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경기를 만드는 데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부산시의 프로 스포츠 관련 행정은 그동안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부산 연고 구단에 대한 홀대는 팬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부산시는 부산아이파크 홈구장인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을 대형 OTT 업체에 대관하며 정작 아이파크에는 제대로 된 협의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각종 콘서트나 외부 행사로 인해 부산아이파크는 홈 구장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도 끊이지 않으며 ‘부산 연고 구단 패싱’ 논란을 일으켰다.
부산시는 2년 전 KT 소닉붐의 일방적인 연고지 이전 결정의 경험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부산 연고 구단’임을 자처했던 구단이 왜 180도 입장을 바꿔 수원으로 떠났는지 다시 따져봐야 한다. 동시에 프로 구단이 부산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필요한 지원은 무엇인지 검토해야 한다. 반대로 부산시가 구단들로부터 반드시 얻어야 할 명분과 실리는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프로농구 명문 구단인 KCC의 합류로 부산의 농구 열기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를 것으로 보인다. BNK와의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BNK, KCC 모두 각 리그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는 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부산시는 KCC의 부산 합류를 계기로 부산 시민들이 프로 스포츠를 통해 활기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2023-08-3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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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의 그림책방] 우리 동네 가게
묵묵히 동네를 지켜온 가게들이 있습니다. 한주리 작가의 <만리동 이발소>(소동)는 1927년 문을 연 서울 성우이용원을 기록한 그림책입니다. 100년 가까운 세월이 담긴 가게 안, 물건들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따뜻한 햇살과 어우러진 비누 냄새가 떠돕니다. 손님들은 따로 안내를 받지 않아도 알아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이발이 끝나갈 때 전분가루를 살짝 뿌려 들쑥날쑥한 머리카락을 찾아내고, 머리를 마지막으로 헹구기 전에 식초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만리동 이발소’ 이발사가 몇십 년에 걸쳐 만든 규칙이랍니다. 안전상의 문제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그림책에 등장하는 가게의 예전 모습은 사라졌지만, 성우이용원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 뒤에 빼곡하게 그려진 수많은 손님의 얼굴을 보면서 한 가게가 얼마나 많은 사람과 같이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우리 동네 사장님들>(논장)은 마을을 함께 만들어 가는 동네 가게를 소개합니다. 박현주 작가는 골목식당, 부부정육점, 헤어살롱, 미미슈퍼, 무지개문구, 추억사진관, 꽃집, 맵시옷가게, 문화서점, 삼만리자전거, 명장베이커리 등 다양한 업종의 동네 가게를 불러옵니다. 이들은 서로의 가게에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고, 좋은 일은 같이 기뻐하고, 힘든 일에 힘을 보태며 든든한 이웃이 되어줍니다. 작가는 ‘우리 동네 가게’에 동네를 찾아오는 과일트럭과 배달누나까지 포함시켜 더 큰 공동체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저녁밥 먹지 말고 골목식당으로 오세요.”(그림) 식당 사장님의 생일 파티에 동네 모든 사장님이 모였습니다. 환하게 불이 켜진 그림책 속 동네 모습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추억 속 동네 가게를 떠올려 봅니다. 집 근처 작은 슈퍼에 심부름 가던 기억, 아이스크림 통에서 ‘쮸쮸바’를 꺼내기 위해 발돋움을 했던 일, 시장 빵집에서 나던 따뜻한 빵 냄새, 만화잡지 사러 뛰어갔던 학교 앞 서점, 좋아하는 밥집 사장님과 눈으로 나누는 인사, 단골 가게에서 ‘오늘 좋은 물건’ 추천받기 등 우리가 자라 온 수많은 날에 동네 가게가 함께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동네 가게에서 새로운 기억을 쌓게 될까요?
2023-08-2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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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의 여행 너머] 불편해서 캠핑이다
3년 전, 캠핑용 조명을 선물받았다. 텐트도 없는데 조명이 뭔 쓸모람. 한동안 구석에 처박아 뒀다가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계곡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자는 게 소원이었던 그때. 부모님은 아들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이유를 대셨던 것 같다.
뒤늦게 소원 성취도 할 겸, 코로나 시국에 팍팍해진 살림을 아껴 텐트와 기본 캠핑 장비를 마련했다. 경남의 한 자연휴양림으로 떠나 첫 밤을 보낸 뒤, 부모님이 캠핑을 멀리하신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상 속 그림과 달리 현실의 캠핑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텐트 설치부터 화장실 이용, 요리·설거지, 잠자리까지,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도시인에겐 모든 게 불편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끝이 아니었다. 곰팡이가 안 피게끔 햇볕 바른 곳에서 텐트를 잘 말리고, 버너·식탁·의자 등 각종 장비도 부지런히 닦아야 했다.
캠핑의 실상을 알게 됐지만 포기는커녕 오기가 생겼다. 여행길을 다 막아 버린 코로나 팬데믹 탓도 컸다. 두 번, 세 번, 네 번, 요령이 생기면서 텐트 설치 시간은 비약적으로 줄었다. 불편한 잠자리와 화장실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아무리 편안한 휴양지라도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데, 캠핑족은 더 큰 고생을 사서 한다. 각자 매료된 이유가 있겠지만, 힘듦과 불편함 속에서 캠핑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텐트 설치만 해도 힘드니까 보람이 크다. ‘아기돼지 삼형제’ 동화처럼 기둥 하나 지붕 하나에 공을 들일수록 비바람 걱정 없이 든든하게 밤을 보낼 수 있다.
캠핑 경험이 쌓이면서 가족마다 역할이 생겼다. 한 명은 의자와 식탁을 세팅하고, 한 명은 취사장에서 채소를 손질하고, 한 명은 침낭과 이불을 편다. 불편함을 줄이려 손을 빌리고 발로 거들다 보면 아파트만은 못해도 아늑한 집 한 채, 맛있는 한 끼 식사 완성이다.
흘린 땀방울만큼 결과를 얻는다는 점에서 캠핑은 교육적이다. 주변에서 보고 배울 점도 많다. 모자란 물자를 나누고, 이웃을 돕는 캠핑러가 있는가 하면, 고성방가를 일삼는 ‘공공의 적’도 간혹 만난다. 캠핑장은 본보기와 반면교사가 모두 있기에,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인 셈이다. 요즘 한국사회 화두인 학교폭력, 교권침해 같은 문제도 학교 밖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힘듦을 가르치는 부모, 불편함을 인내하는 아이라면 자연스레 생활 속에 존중과 배려심이 스며들 터다.
불편하니까 캠핑인데, 요즘 캠핑장은 편의시설을 웬만큼 갖추고 있다. 취사장·샤워실에 에어컨이 설치된 곳도 제법 있다. 파행을 빚은 새만금 잼버리의 비위생적인 화장실 따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잼버리 관계자들이 준비 명목으로 해외 여러 곳을 시찰했다고 한다. 국내 캠핑장만 제대도 둘러봤어도 충분히 배울 수 있었을 것을.
2023-08-1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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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의 월드 클래스] '바비'의 실패가 낯선 서양
영화 ‘바비’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다. 바비 인형은 많은 서양인의 추억을 담은 문화적 상징이어서 개봉 전부터 관심을 받았다. 예상대로 북미를 비롯한 서구권에서 바비 흥행 성적은 뜨겁다. 지난 7일 기준 바비는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글로벌 흥행 수익 10억 3148달러(한화 약 1조 3471억 원)를 돌파했다. 바비가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는데 유독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한국이다. 7일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바비의 누적 관객 수는 지난달 개봉 이후 51만 명을 겨우 넘겼다.
서양에서는 ‘바비가 우리에게 인기를 얻고 있으니 한국에서도 당연히 흥행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걸까? 바비가 한국에서 바닥을 치자 북미를 비롯한 서양 언론은 그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상당수 서양 언론은 바비가 실패한 이유를 ‘한국 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정서’로 몰아갔다. 한 외신은 한 여성 권익 운동가의 인터뷰를 통해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한국의 많은 개인에게 더러운 단어로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남성 중심 사회와 성차별에 대한 풍자 등 바비가 많은 부분을 할애한 장면이나 대사들이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한국의 많은 관객에게는 꽤나 불편해 영화가 실패했다는 논리이다. 여기다 서양 언론은 ‘한국보다 페미니즘에 개방적인 서양 관객들은 바비를 잘 소화하잖아. 문제는 한국이야’라는 뉘앙스까지 내비치며 그들의 우월성마저 강조하려는 분위기까지 전해진다.
물론 한국에는 페미니즘을 놓고 갈등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한 영화의 실패를 페미니즘 하나로 몰고 가기에는 억지스런 측면이 강하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바비의 실패를 놓고 다양한 이유를 거론한다. 북미 특유의 블랙 코미디 화법이나 바비 문화는 한국 정서에 맞지 않아 감정 이입이 힘들다고 한다. 엉성한 스토리는 서양에는 ‘추억 팔이’로 통했으나 한국 관객에게는 실망을 안겼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처럼 흥행 실패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법한데 서양 언론 주장처럼 바비 실패의 주 원인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시선 때문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여성 영웅들’이 가득하고 ‘지질한 남성 악당’만 등장하는 페미니즘 성향의 한국 영화 ‘밀수’의 흥행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참고로 밀수는 개봉 2주 만에 손익분기점 400만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밀수의 흥행은 같은 페미니즘 성향의 영화라고 하더라도 한국과 서방이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특정 영화나 현안을 두고 서구권이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그들과 똑같은 감정을 이입하거나 즐거워하길 기대하다가 그렇지 않을 경우 이상하게 바라보는 자기 중심적 시선은 여전히 불쾌하다.
2023-08-1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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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진의 '집피지기'] 새집에 물이 샌다고?
최근 아파트와 관련된 보도가 이어진다. 사실 유쾌한 보도는 아니다. 철근 수가 부족하다거나,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에 옹벽이 무너진다거나, 주차장이 물에 잠긴다와 같은 보도다. 사실 이런 일은 자주 있지 않다. 그래서 화제가 되는 것이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내 자산 중 가장 비싼 것은 집이다. 자산의 가치도 가치지만 ‘내 집 마련’을 신축으로 했다면 기대가 크기 마련이다. 그래서 크든 작든 하자가 있다면 속이 상할 수밖에 없다. 대형 하자야 이슈가 되지만 작은 파손과 균열 등은 혼자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입주 한 달여 전에는 사전 점검을 시작한다. 내가 살 집을 미리 보는 것만으로 설레지만 냉정하게 미리 하자를 발견하고 이에 대한 보수를 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들뜬 마음에 하자를 보기 어려울 수 있으니 냉철한 누군가를 동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동행인으로는 “야 좋겠다”하며 나의 설렘을 공감해 주는 MBTI가 F(감정형)인 사람보다는 T(사고형)이 좋을 것 같다.
하자는 담보책임 기간이 있다. 벽이나 기둥 같은 내력구조부 하자는 10년간 가능하다. 도배나 타일 같은 마감 공사는 2년, 난방·창호·전기 등 공사는 3년, 방수·철근 공사는 5년이다. 담보책임 기간이 지나지 않았다면 입주 후 거주하다가 문제를 발견해도 청구가 가능한 셈이다.
“이거 고쳐주세요”하면 바로 기술자가 와서 고쳐주면 좋겠지만 내 생각과 시공사의 생각은 늘 다르다. 시공사가 하자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시공사와 시시비비를 다퉈 합의에 이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긴다. 이럴 때는 국토교통부 산하 ‘하자심사 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최근 이러한 하자가 문제가 되면서 사전 점검 제도도 보완이 되고 있다. 한 달 길게는 두 달 전에 사전 점검을 하다 보니 내부 공사가 덜 된 경우가 있다. 이게 하자인지 공사 중인 것인지 애매한 경우도 있고 사전 점검 후 입주를 하기 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 발생을 줄이기 위해 내부 공사가 마무리된 후 사전 점검을 실시하도록 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다. 또 하자 보수를 요청할 경우 시공사가 철저히 보수 공사를 이행하도록 보수 기한도 6개월로 명확히 한다는 계획이다.
하반기 부산에는 1만 6000여 가구가 입주한다. 입주를 앞둔 이들에게는 매우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설레는 마음이 하자 때문에 흐트러지지 않고, 행여나 뉴스를 통해서 소중한 나의 집을 만나는 일이 없기를 기대해 본다.
2023-07-2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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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치고 달리기] 무너진 자존심
꼬마 시절 놀이터에서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 다방구·나이먹기·말뚝박기·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할 땐 ‘이제 집에 들어오라’는 어머니의 외침도, 팔꿈치·무릎에 피가 나는 줄도 몰랐다. 마냥 즐거웠다.
놀이에서 주인공일 때는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적다, 덩치가 작다는 이유로 밀려났을 땐 달랐다. 놀이를 지켜봐야만 했을 땐 슬펐다. 서러웠다. 은연중 ‘깡다구’라는 게 뭔지 깨달았다. 더군다나 그 일이 ‘내’ 동네 놀이터에서 벌어졌을 때는 더 심각했다.
다음 달 3일 부산에서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다. 국내 한 대형 OTT 업체가 마련한 프랑스 프로축구리그 파리 생제르맹(PSG)의 방문 경기다. PSG의 상대 구단은 부산 연고 구단인 부산아이파크가 아닌 전북현대다. PSG에 합류한 이강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축구 팬들의 관심이 높다. 당연하다. 축구 팬인 나도 마찬가지다.
관심도 좋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부산아이파크 패싱’이다. 경기가 열리는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은 부산아이파크의 홈구장이다. 부산아이파크는 PSG와 전북현대, OTT업체의 잔치에서 대문 밖으로 밀려났다. PSG-전북현대 경기 부산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 팬들은 분노했다.
부산시는 지역 연고 구단 패싱 논란이 일자 ‘부산아이파크의 결정을 존중한다. 부산아이파크가 경기장 대관에 난색을 보인다면 굳이 PSG 경기를 유치할 필요가 없다’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경기는 정상 개최되는 모양새다. 20일 오전 취재 결과 부산시는 부산아이파크의 양해를 얻어 PSG-전북 경기를 정상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부산아이파크 패싱 논란은 여전히 살아있다. 해소되지 않았다. PSG-전북 경기 부산 개최가 처음 알려졌을 때와 확정이 된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놀이터 밖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하는 부산아이파크와 부산 축구 팬들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다.
부산시는 이번 경기에서 TV 등을 통해 지켜볼 전 세계 PSG 팬들에게 2030 부산세계엑스포 유치를 적극적으로 홍보한다는 계획이다. 경기 시간 중 전광판과 경기장 내 광고판이 홍보 도구로 활용될 전망이다.
부산시 체육 행정 담당자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는 반드시 성사돼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 부산 시민들의 자존심은 지켰어야 한다. 사기업에 경기장을 내주기 전 부산시민과 부산아이파크, 부산 축구 팬들의 자존심을 지킬 방안이 뭔지 먼저 검토됐어야 한다. 부산시는 지금이라도 지역 연고 구단 패싱 논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만시지탄이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2023-07-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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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의 그림책방] 두 친구
두 친구가 있다.
올리버 제퍼스의 〈날고 싶어!〉(아름다운사람들)에는 펭귄과 사람 친구가 등장한다. 둘은 늘 함께했다. 어느 날 펭귄은 생각했다. ‘혼자 힘으로 날고 싶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고, 몸에 풍선을 매달고. 날기 위한 펭귄의 도전이 시작됐고, 사람은 그 옆을 지켰다. 사람은 펭귄이 다칠까 바닥에 쿠션을 깔고, 펭귄을 돕기 위해 책을 뒤졌다. 그러다 펭귄은 ‘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서커스단의 벽보를 발견했다. 친구도 잊고 서커스단에 달려간 펭귄은 살아있는 대포알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때 알았다. ‘그렇지, 나는 원래 날기를 좋아하지 않았지.’ 그리고 두려웠다. ‘내 친구는 어디 있을까?’ 펭귄은 저기 아래에서 자신을 받기 위해 달려오는 사람을 봤다. 엉뚱한 도전을 하는 펭귄이 그의 방식대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 친구의 우정이 눈길을 끈다.
한솔 작가의 〈우리 함께 있어〉(천개의바람)에 나오는 두 마리의 새는 긍정형과 부정형으로 나뉜다. 날다가 떨어진 작은 새가 자책한다. 작은 새의 생각은 ‘나는 왜 이럴까’에서 시작해 ‘다른 내가 되고 싶다’로 옮겨 간다. 개미처럼 작아지고 싶다. 돌처럼 단단해지고 싶다. 사슴처럼 다리가 길어지면 좋겠다(그림). 그러면 들판을 쌩쌩 달릴 수 있을 거라는 작은 새에게 친구 새는 “너는 날개가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부족한 것’만 생각하는 작은 새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돌아보게 만드는 존재. “지금의 네가 좋아.” 있는 그대로 함께할 수 있는 네가 좋다는 친구의 말은 큰 힘이 된다. 작은 새도 말한다. “그래, 나도 그래.”
도전자와 응원자, 부정자와 긍정자. 그림책에 나오는 두 유형의 친구 관계를 보면서 우리 주변의 친구를 생각해 본다. 나의 도전을 응원하고, 방황을 지켜보고, 장점을 찾아주고 격려하는 친구가 옆에 있다면 당신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또 생각해 본다. ‘나는 그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 “친구야, 고마워 그리고 노력할게.”
2023-07-1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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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의 여행 너머] 선과 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두 바퀴로 국도를 달리던 중 마주한 풍경에 한동안 시선이 빼앗겼다. 아늑한 산세와 기분 좋은 바람, 다채로운 녹음. 서울에서 출발해 며칠째 계속된 자전거 여행의 여독이 일순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20년 전 기억은 지금까지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자동차로 빠르게 지나쳤다면 평생 몰랐을 장면이다.
얼마 전 경남 진주시를 여행하며 비슷한 경험을 했다. ‘탄소제로’에 도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버스터미널에 내린 뒤부터 두 발과 두 바퀴에만 의지했다. 걸어서 진주성과 촉석루, 주변 시내를 둘러본 뒤 무료 자전거를 빌려 남강 변을 달렸다. 강 건너에서 바라본 진주성과 촉석루의 위용. 물결만큼이나 잔잔한 물 내음. 기사로 다 표현해 내지는 못했지만 진주 하면 떠오르는 그림으로 저장돼 있다.
대개 성인이 되어 운전대를 잡기 시작하면 여행 방식이 단조로워진다. 소위 명소로 불리는 지점을 찍고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는 식이다. 점과 점 사이, 선에서 만날 수 있는 매력을 지나치기 일쑤다. 선상에서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사귀며, 문화를 느끼고 삶을 배운다. 해외여행에서 많은 이들이 골목길을 걷는 이유다.
최근 서울에서 부러운 선들을 만났다. 청와대 탐방 중 경복궁 주변 서촌·북촌·삼청동 지도를 펼쳤을 때다. 작은 박물관과 갤러리, 위인들 생가와 집터, 문화유산과 카페·공방 등 수많은 점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진 크고 작은 길과 만났다. 무궁무진한 볼거리에 동선을 어떻게 정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한나절, 아니 몇 날 며칠 머물러도 좋을 매력들이 곳곳에 살아 숨쉰다.
구석구석 선의 여행이 가능한 건 알알이 구슬을 잘 꿴 덕분이다. 부산은 어떤가. 각 지자체마다 관광지를 표방하며 홍보에 열을 올리지만 점들의 엮임은 헐겁다. 명소와 명소 사이는 멀고 섬처럼 동떨어져 두 발, 두 바퀴로 여행하기 어렵다. 구슬의 가치를 스스로 내버리기도 한다. 적산가옥을 비롯한 근대건축물, 피란수도의 흔적 등 서울과는 차별화한 근대문화유산을 지녔지만, 개발 논리에 밀려 시나브로 사라진 경우가 부지기수다. 도처에 널린 100년 넘은 옛길도 스토리텔링을 입히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중·동·서·영도구, 부산의 원도심 지역에 산재한 근대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 탄탄한 선으로 엮어 냈다면 해운대·광안리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섬’을 선으로 만드는 시작은 가진 자산을 제대로 파악하고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부산은 세계 도시와 견줘 어떤 매력을 지녔나. 잘 모르겠다면 이방인의 시선으로 되물어도 좋다. 진주 남강의 물 내음, 서울 한옥마을의 다채로운 골목처럼 말이다.
2023-07-0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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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의 월드 클래스] 오염수 방류 이기적인 일본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사태를 보고 있으면 일본의 태도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염수가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한국은 물론 홍콩, 중국, 남태평양 도서국 등 주변국이 일제히 반대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올여름 오염수 방류를 강행한다는 점에서다.
한국의 경우 정치권은 연일 ‘오염수 충돌’을 이어 가고 있지만 한국 국민의 85%는 방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또 홍콩 당국은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면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즉시 중단한다고 밝혔다. 태평양에 있는 18개국이 속한 태평양도서국포럼(PIF)은 지난 1월 오염수 방류 연기를 촉구했다. 중국에서는 오염수 방류 반대 의지를 보이기 위해 ‘일본 화장품 불매운동’이 진행 중이다. 일본 내부 사정도 녹록치 않다. 일본 정부는 오염수 방류로 인한 피해 보상비로 7700억 원 이상의 기금을 마련했으나 일본 어민과 지역민은 절대 반대하고 있다. 특히 일본 정부는 2015년 이들 어민들과 협의되지 않은 오염수 방류는 없다고 약속해놓고 이제 그 약속을 어길 조짐까지 보인다. 무엇보다 최근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 지지율이 연일 하락세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오염수 방류가 정치적으로도 ‘독’이 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굳이 오염수 방류를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해체·폐로 작업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오염수 방류를 서두르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일각에서는 다른 의도가 숨어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신과 연구 자료를 살펴보면 우선 비용적 측면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9년 그린피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이 고민한 5가지 방식 중 오염수 해양 방류가 오염수를 처리하는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또 오염수 방류를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실시해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의 악몽을 해소하고 원전을 과학적으로 안전하게 관리하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회복하려는 것 같다. 일본 시민단체 ‘평화와 평등을 지키는 민주주의행동’에서 활동하는 쿠보타 료는 최근 국내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일본이 원전 사고에서 완전히 회복했음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정부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비용과 자국 이미지 회복을 위해 세계적 반대 목소리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오염수 방류를 실행한다면 ‘뻔뻔함’을 넘어서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국내외 오염수 방류 논쟁에서 과학적 검증 결과는 사실 통하지 않는다. 오염수 방류에 대한 정서적 불안감이 괴담으로 이어지고 유령을 탄생시킨다. 일본이 이 유령을 잡을 대책부터 마련해야한다.
2023-06-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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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back! [남형욱의 오오티티]
검은 가죽재킷, 커다란 덩치, 짙은 선글라스 뒤로 감정을 숨긴 과묵한 ‘터미네이터’. 80년대 미국 액션 영화의 상징이었던 전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돌아왔다. 지난달 25일과 이달 5일 두 개의 콘텐츠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첫 번째는 그가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액션 드라마 ‘푸바’, 두 번째는 그의 인생 여정을 솔직하게 담은 다큐멘터리 ‘아놀드’다.
먼저 푸바는 CIA 요원이라는 직업을 평생 숨긴 스파이 아빠와, 마찬가지로 CIA 요원 선발 테스트에서 최고점을 받았지만 집에서는 착한 모범생을 연기하던 딸이 총알 빗발치는 현장에서 만나 꼬여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푸바는 ‘엉망진창’이라는 말. 상대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에 엉망이 된 부녀 관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작전 현장의 불협화음을 의미한다.
가족에게 정체를 숨긴 요원이라는 설정은 그의 과거 액션 히트작 ‘트루라이즈’가 떠오르지만, 나이 든 터미네이터는 과거에 비해 힘이 많이 빠졌다. 몸놀림은 둔탁하고 삐걱댄다. 주름진 얼굴을 덮은 흰 수염은 76세라는 나이를 실감케 한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맥이 풀려 있느냐. 그건 아니다. 모자란 액션은 가족애와 코미디로 메꾼다.
사실 그는 ‘코만도’ ‘프레데터’ ‘토탈리콜’ 등 영화를 성공시키며 액션 배우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지만, 끊임없이 캐릭터 변화를 추구했다. 겉모습은 정반대지만 속은 닮은 쌍둥이 형제 ‘트윈스’, 유치원에 위장 취업한 경찰 ‘유치원에 간 사나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분투하는 아빠의 활약 ‘솔드아웃’ 등 가족애를 그린 코미디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빛을 발했다. ‘미스터 올림피아’ 7관왕을 달성한 완벽한 육체에 대비되는 어눌한 발음. 굳게 입을 다물었던 터미네이터가 치아를 보이며 순박하게 웃는 순간, 이 괴리감에서 오는 친숙함은 관객을 매료시켰다. 푸바에서도 마찬가지다. 딸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서툴지만 고군분투하며 성장하는 모습은 이상적인 가족 코미디 그 자체다.
푸바가 이상이라면, 아놀드는 현실이다. 총 3부로 구성되어 각각 보디빌더, 영화배우, 정치인으로서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고 각 분야에서 정점을 찍었는지 회고한다. 제임스 캐머런, 실버스타 스탤론, 린다 해밀턴 등 80년대 감독과 인기배우가 출연해 생동감을 더한다.
사실 그의 가족사는 그렇게 화목하지 못했다.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당한 학대.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형. 케네디 대통령의 외조카와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가정부와 불륜으로 혼외자를 키워 이혼하는 등 인생의 고비가 많았다. 다큐멘터리는 그런 고비의 순간마다 그가 느낀 솔직한 속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과오를 반성하고, 눈물로 잘못을 뉘우친다. 아놀드는 그의 자서전이자 반성문인 셈이다. 쇳덩어리인 줄 알았던 터미네이터는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팬으로서 터미네이터의 속살을 들여다본 것 같아 기쁘다.
2023-06-2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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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철의 '금알못' 탈출기] 불법 사금융 덫 피하려면
50대 A 씨는 불법 대부업체로부터 25만 원을 빌렸다. 그런데 불과 3개월 만에 그가 갚아야 할 돈은 1억 5000만 원까지 불었다. 법정이율 20%의 250배인 5000%라는 살인적 고리가 적용된 것이다. 대부업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채무자뿐 아니라 가족과 직장동료들에게도 연락해 상환을 압박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지만 실제 최근 우리 주변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 들어 금리와 물가의 고공행진으로 서민 경제가 무너지면서 이들의 간절함을 노린 불법 사금융은 일상까지 교묘한 형태로 침투했다.
이들은 대체로 상품 광고에 교묘하게 금융정책이나 기관 이름을 섞어놓는다. 정부지원 채무통합, 서민금융 햇살론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기관을 사칭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불법 대부업체들은 이러한 문구뿐 아니라 태극 문양이나 청와대 로고 등을 이용해 마치 정부 정책 금융인 것마냥 눈을 속인다. 이러한 전화나 문자를 받고 상담을 받으면 미등록 대부업자의 고금리 대출을 받도록 안내하는 등 불법 대부 행위로 이어진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불법 금융 광고는 2018년 26만 9918건에서 2019년 27만 1517건, 2020년 79만 4744건, 2021년 102만 5965건 등 증가세를 보인다.
피해자 대부분은 몇 십만 원의 소액 생계비 때문에 유입된다. 구체적인 시장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최근 저신용자들이 불법 사금융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된 ‘소액생계비대출’이 흥행한 점을 비추어 보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연체 이력을 따지지 않고 급전을 대출해 주는 소액생계비대출은 지난 2달간 총 4만 3549건에 달한다. 평균 대출금액은 62만 원으로 월 최저임금 201만 원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금액이다.
정부는 올해부터 ‘불법사금융 척결 범정부 태스크포스’를 별도 구성하고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개인 스스로 주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소액 급전 필요시 서민금융진흥원의 금융상품 이용이 가능한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서민금융진흥원은 소액생계비 대출 외에도 생활안정자금, 창업운영자금 등 다양한 대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가족과 지인 연락처 등 과도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면 그 즉시 대출상담을 중단해야 한다. 악덕 사채업자들은 폭언과 신체적 위해 협박은 물론 채무자 주변인에게도 집요하게 독촉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거래 상대방이 등록대부업체인지 확인 후 거래해야 하며 대출 진행 후 불법 추심 피해가 발생하거나 우려가 될 경우 금융감독원과 경찰에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2023-06-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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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치고 달리기] 사우디에 눈길이 가는 이유
LIV 시리즈, EPL 뉴캐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림 벤제마…. 최근 세계 스포츠계를 움직이는 주류들이다.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는 막대한 석유 자본을 바탕으로 스포츠 변방 국가에서 단숨에 세계 대형 스포츠 행사의 ‘큰손’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랫동안 이어진 미국·유럽 중심의 주요 스포츠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남자 프로골프 투어를 지배한 미국 PGA 투어와 유럽 DP 월드투어는 7일 LIV 시리즈와의 합병을 선언했다. 세 투어가 합쳐진 새로운 투어가 출범한다. 새 투어의 CEO는 PGA 투어 커미셔너가 맡는다. LIV 시리즈를 주도한 사우디 국부펀드(PIF)는 독점적 투자자가 된다. 남자 프로골프의 터줏대감 PGA 투어가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LIV 시리즈에 사실상 세계 남자 골프의 주도권을 넘겨준 셈이다.
축구계에서도 사우디의 기세는 뜨겁다. PIF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2021년 인수했다. 뉴캐슬은 PIF의 지원 속에 세계 최고 축구리그로 평가받는 EPL에서 올 시즌 4위를 차지했다.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진출권까지 확보했다.
축구 스타들의 사우디 프로축구 리그 이적도 잇따른다. 호날두에 이어 레알 마드리드 득점왕 출신인 벤제마까지 최근 사우디 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추가로 10여 명의 선수가 사우디로 간다는 소식도 나오고 있다.
사우디는 대형 스포츠뿐만 아니라 스포츠 저변 확대에도 힘을 쏟아 ‘생활 스포츠의 IOC’인 세계생활체육연맹(TAFISA)의 2028년 대회를 개최한다. 2029년 동계 아시안게임 유치도 성공했다.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사우디의 이 같은 외연 확장은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우디의 최근 행보는 ‘오일 머니’를 기반한 ‘하드 파워’에다 스포츠·문화에 바탕을 둔 ‘소프트 파워’를 확보하겠다는 움직임이다. 사우디는 오랜 기간 축적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의 위세를 2030년 세계 엑스포에서 보여 주겠다는 심산이다.
부산으로서는 2030 세계 엑스포 경쟁 상대인 사우디의 이 같은 스포츠 분야 움직임을 잘 살펴야 한다. 스포츠는 이념·종교·국경을 뛰어넘는 하나의 언어다. 소프트 파워를 키울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한국은 10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한 국가이자 올림픽 세계 10대 강국이다. 모든 영역에서 엑스포 유치에 전력을 쏟고 있는 지금, 부산이 스포츠로 더욱 빛날 수 있는 부분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때마침 오는 16일 부산에서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페루 상대 A매치 경기가 열린다. 2030 세계 엑스포 유치도시 결정은 올 11월 이뤄진다. 사우디의 문어발식 영역 확장을 뒷짐 지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부산은 무엇을 할 것인가?
2023-06-08 [1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