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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철의 '금알못' 탈출기]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덮어놓고 쓰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흥청망청하다 보니 월급 통장은 말 그대로 ‘텅장’(텅 빈 통장) 상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투자 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을 것이란 우울한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마냥 움츠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재테크의 시작이자 기본인 종잣돈 마련이 그 첫걸음이다. 때마침 오는 6월 청년의 자산 형성을 지원하는 정부 차원의 은행 적금 상품 ‘청년도약계좌’가 출시된다고 한다. 5년간 매월 70만 원씩 저축하면 정부가 지원금을 더해 최대 5000만 원을 만들 수 있다. 총급여 7500만 원 이하, 가구소득 중위 180% 이하 등의 요건을 충족하는 만 19~34세 청년이면 월 70만 원 한도에서 자유롭게 납입할 수 있다. 총급여 2400만 원 이하는 월 40만 원 한도에서 6%의 정부 기여금을 매칭받을 수 있다. 즉 40만원씩 꼬박꼬박 납입하면 정부가 매월 최대 2만 4000원을 보조해준다는 것이다. 상대적 고소득자인 총급여 6000만~7500만 원 가입자는 정부 기여금은 한 푼도 못 받지만 이자소득에 대한 비과세(15.4%) 혜택이 가능해 일반 적금 상품보다 훨씬 유리하다.
이른바 ‘만능 통장’이라 불리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적금은 물론 주식부터 펀드, 주가연계증권(ELS)까지 다양한 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1년 동안 2000만 원까지만 납입할 수 있고 최소 3년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ISA의 장점은 세제 혜택에서 두드러진다. 일반 계좌의 경우 이자 등의 소득에 대해 15.4%의 세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ISA를 통해서라면 200만 원까지는 전액 비과세며 이를 넘는 금액은 초과분에만 9.9% 과세한다.
평소 인내와 끈기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사람에게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초단기 예금도 매력적이다. 만기를 최소 1개월부터 설정할 수 있는 상품들이다. 적금과 비교하면 이익률은 낮지만 한 달만 예치하더라도 연 3%대 금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금리 인상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초단기 예금을 통해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금융 소비자에 적합하다.
연금저축과 개인형 퇴직연금(IRP)도 필수다. 자신의 총급여가 5500만 원을 넘으면 납입액의 13.2%를 세액공제해준다. 총급여 5500만 원을 넘지 않는 경우 납입액의 16.5%까지 세액공제된다. 연금저축의 납입 한도는 연 600만 원, IRP는 연 900만 원이다. 두 상품 합산 기준으로 900만 원까지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다.
금융 시장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채굴한 원화로 현명하게 돈을 모으면서 '진짜 투자' 적기를 기다리자.
2023-03-2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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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치고 달리기] 변화하라, 한국 야구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가 열린 도쿄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대회가 ‘14년 만의 4강 진출’과 KBO 리그 부흥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카타르 월드컵에서의 성과로 되찾은 국내 프로축구 열기처럼 프로야구 열기도 되살아나길 기대했습니다.
결과는 냉혹했습니다. 3개 대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이었습니다. 과정은 참담했습니다. 세리머니 주루사에 3연속 사사구·밀어내기 볼넷이 나왔습니다. 국민은 실망했습니다. 한국 야구가 세계 야구 변방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도쿄돔에서 확인한 한국 야구는 분명 약했습니다. 강팀과의 막상막하 경기 장면은 없었습니다. 약팀에게 득점 기회를 내주는 모습은 많았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최강자들이 모인 대표팀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경기력이었습니다.
한국 야구는 바뀌어야 합니다. 바뀌어야 다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중심은 우수한 선수 육성입니다. 고교·대학 아마야구에서의 야구 교육이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아마 야구는 한국 프로야구 성장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든든한 뿌리 없는 KBO 리그 발전·국제 야구 성장은 허상일 뿐입니다.
고교·대학 야구 지도자들은 선수들의 부족한 훈련 시간을 안타까워합니다. 어린 선수들이 실력을 키울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전국 대회를 제패한 부산 지역 야구부 A 감독은 “선수들이 야구의 기본기를 다질 시스템이 없다”고 한탄했습니다. 또 다른 B 감독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충분히 훈련하지 못한 선수들이 프로야구에 진출하다 보니 KBO 리그는 하향 평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현재 한국 고교 야구 선수들은 학업 시간이 끝난 뒤에야 야구부 훈련에 참가합니다. 대학 야구 선수들도 학점 이수를 위한 기본 학업 시간을 채운 뒤 오후 늦은 시간에 팀 훈련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 속에 아마 야구 선수들이 기본기를 다지고, 체력을 기르기에는 부족한 환경입니다. 지도자들은 “제한된 훈련 시간을 활용해 선수들의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는다면 야구 실력 역시 늘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현재 고교·대학에서 땀 흘려 훈련하고 있는 선수는 곧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어 갈 재목입니다. WBC 등 국제 야구 대회는 이들 선수들이 뛰어야 할 무대이기도 합니다. 미래 한국 야구의 기둥들이 더욱 튼튼한 체력과 단단한 실력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해야 합니다. 한국 야구계는 2023 WBC에서 겪은 고통을 미래 성장의 밑거름으로 잘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2023-03-1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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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의 그림책방] 서로 존중하는 ‘나’
신학기가 시작됐다. 아이들은 신입생으로 입학하거나, 학년이 올라가 새로운 교실에서 새 친구를 만난다. 새 교실은 어떨까? 어떤 친구를 만날까? 시작에 대한 설렘과 함께 마음 한쪽에는 걱정도 생긴다. 학교에 적응은 잘할까? 친구와 잘 어울릴까?
다니카와 슌타로가 쓰고 하타 고시로가 그린 <나와 학교>(이야기공간)는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이야기다. 집에서는 하나뿐인 아이지만, 학교에서는 여러 아이 중 한 명이 된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관계를 배운다. 또 나와 다른 성격, 다른 환경을 가진 친구과 어울리는 법도 배운다.
이시즈 치히로와 기쿠치 치키의 그림책 <나의 비밀>(주니어RHK)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비밀’의 고백이다. 수학은 못 하지만 그림은 잘 그리는, 철봉은 잘 못 하지만 균형 감각이 좋은, 멜로디언 연주는 능숙하지 못해도 노래는 잘하는. 별것 아니지만 특별한 비밀 이야기는 약점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만든다. 너와 나는 ‘이래서 다르고 이래서 같다’는 것을 인정하기. 상대를 존중하면 나도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이는 가정, 학교, 사회 모든 곳에서 통한다.
<친구야! 나는 너와 달라, 친구야! 나는 너와 같아>(그림·한울림어린이)는 앞에서 뒤로는 다름을, 뒤에서 앞으로는 같음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콘스탄체 폰 키칭 작가는 다른 배경·취향·성격을 가진 21명의 친구를 등장시킨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고, 연주하는 악기가 다르고,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가 다르다. ‘나는 너와 달라. 왜냐면… 나는 손으로 말하고(수화), 너는 입으로 말하니까.’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세르게이와 비장애인 릴리는 같다. 왜냐면 둘은 친구와 음식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고 한 농구팀에서 활동한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친구, 이슬람교를 믿는 친구.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정착한 난민 친구. 서로 달라 보여도 찾아보면 같은 점이 많다.
다름으로 읽고, 같음으로 읽는 두 이야기가 만나는 장면에서 아이들은 말한다. “나는 나야.” 다르면 어떻고 같으면 어떤가.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너를 인정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교생활을 하며 아이들은 자란다. 나와 너, 서로를 존중하며 같이 자란 아이들이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어른이 된다.
2023-03-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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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의 여행 너머] 팔도강산 발도장
코로나19 대유행은 일상의 소중함, 그중에서도 여행의 가치를 일깨웠다. 전국의 문화관광시설이 문을 닫은 와중에, 너도나도 산으로 바다로 떠났다. 막혀 버린 해외 여행길의 반대급부 측면이 있지만, 국내 여행에 관심이 쏠린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3년 만에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해외 여행길이 다시 열리고 있다. 최근 운항을 재개한 부산~대마도 뱃길은 벌써 다음 달까지 예약(시범운항)이 가득 들어찼다. 여행업계의 정상화는 환영할 일이지만 해외로 발길이 몰리는 만큼 국내 여행이 다시 뜸해지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다.
지난 몇 달간 여행기자로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국내에도 매력 넘치는 여행지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현지에서 만나는 여행객들의 반응에서 우리나라 팔도강산의 가치를 새삼 발견한다. “세상에 이런 곳이…” “너무 아름답다” 같은 감탄을 들으면, 취재 아이템을 떠나 ‘좋은 곳에 잘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기 전에 와 봐서 다행이다”고 말하는 어르신도 만났다. 맞는 말이다. 한평생 내 나라, 이웃 고장의 매력을 모른 채 눈을 감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실, 여행을 하기에 우리나라는 너무 넓다. 2023년 현재 전국의 기초자치단체(특별·광역지자체의 ‘시·군·구’)는 226개. 한 달에 한 지역만 둘러봐도 20년 가까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지역마다 추천 명소를 빠짐없이 들르려면 당일치기로는 어림없으니, 구석구석 모든 곳에 발도장을 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팔도강산에 대해 알고 싶다면 욕심내지 말고 내 고장 주변부터 시작해 보자. 부산 시민이라면 부산 외곽, 경남·울산, 영·호남 등 점차 범위를 넓히면서 당일, 1박 2일, 2박 3일로 일정을 늘려 보길 권한다. 여행 계획을 세우기 막막하다면 각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관광 정보를 참고할 만하다. 문화·관광 분야를 따로 떼어 전문적으로 ‘문화재단’을 둔 지자체도 있다. 이들 홈페이지에 가면 각종 여행지 정보와 추천 코스, 지역축제 등 다양한 안내를 받아 볼 수 있다. 박물관·미술관 투어, 맛집 탐방, 체험 여행 등 주제를 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족 여행, 우정 여행, 나 홀로 여행 등 누구와 함께 하느냐도 중요하다. 사계절까지 감안하면, 국내 여행의 다채로운 매력에 빠져들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얼마 전 두 아이와 함께 취재를 겸해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성인이 된 뒤 함께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10년 뒤 그곳, 20년 뒤 그대는 어떤 모습일까. 그날을 상상하니 여행의 매력 포인트가 하나 더 늘었다.
2023-03-0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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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하의 월드 클래스] 안타키아와 바흐무트
지난 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규모 7.8의 강진으로 폐허가 된 지역은 아마겟돈(인류 멸망 최후의 전쟁터)을 방불케한다. 지진 발생 17일 만에 사망자가 4만 8000명을 넘어섰다. 아직도 현지에서 시신을 수습 중이라고 하니 희생자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절망 속에도 한 줄기 희망은 전 세계에서 구조대와 구호물자가 쇄도한다는 사실이다. 역대 최대 규모로 꾸려진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는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를 도우려고 지체 없이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립했던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중국도 구조대를 급파했다. 전쟁으로 여념이 없는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지진은 앙숙이던 국가들의 해빙 무드도 조성했다.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튀르키예와 오랜 기간 갈등했던 그리스는 튀르키예에 구조대 파견 등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스 구조대는 안타키아의 폐허에서 3명의 목숨을 구했다. 이들이 귀국할 때 이스탄불 공항에서는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는 가슴 뭉클한 장면도 연출됐다.
그런데 다소 불편하고 모순된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튀르키예 안타키아에서 북동쪽으로 1300여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가 보자. 거리마다 무너져 내리고 부서진 건물로 가득 찼다. 길바닥에는 잔해가 뒹굴고 있다. 간단한 소지품을 챙긴 주민들은 서둘러 집을 떠났다. 대체적으로 안타키아와 비슷한 풍경이다. 지진 때문일까. 아니다. 여기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피말리는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도시 바흐무트다.
오늘은 러시아가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국방부는 개전 이래 20만 명의 군인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했다. 튀르키예 지진 사망자 수를 고려하면 이런 강진이 3번은 더 일어나야 나오는 피해 규모다.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군인 뿐이겠는가.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중 숨진 민간인 711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지구 한 쪽 지진 피해 지역에서는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고 구조대원들이 집결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인간과 인간이 가공할 무기를 들고 서로를 죽이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간이 만든 재난은 자연 재난에 견줘 결코 위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단 인간의 선택에 따라서 죽음의 땅이 되거나 생명을 구하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게 차이다. 두 도시, 안타키아와 바흐무트를 통해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선택에 따라 생명을 단번에 죽일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2023-02-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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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욱의 오오티티] 정으로 봐줄 시기는 지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의 인기가 무서웠다. OTT 콘텐츠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지난달 20일 공개된 정이는 딱 나흘 동안 넷플릭스 영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승리호’ ‘고요의바다’ 등 국산 SF영화의 들쑥날쑥한 성적표 사이에서 꽤 선방한 셈. 그러나 수치적인 평가와 달리 알맹이는 뻔한 국산 ‘신파 SF’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 SF 영화는 왜 이럴까?
한 가지 분명히 해두자. ‘한국은 SF 불모지다’라는 말은 틀렸다. 한때 한국영화는 리얼리즘이 지배했다. 식민 지배와 전쟁과 냉전, 급격한 경제성장을 겪으며 오직 ‘먹고 사는 일’에만 매달린 대한민국 땅에서, SF 장르는 ‘허무맹랑한’ 영화 취급을 받았다.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났다. 우리는 배가 부르다. 현실을 벗어난 사유가 가능하다. 할리우드의 10년을 지배한 ‘마블’은 우리나라에서도 통했고, ‘인터스텔라’ 같은 과학적 개연성을 기반으로 한 ‘하드 SF’도 인기를 얻었다. ‘SF 불모지론’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이에 정(情)이 안 가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영화 내내 익숙한 장면이 이어진다. 우주에 정착한 인류가 벌이는 내전은 애니메이션 ‘건담’에서, 성별만 바뀌었을 뿐 기계로 변한 자기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면은 ‘로보캅’에서, 기억을 데이터화해 보존한다는 내용은 ‘트랜샌더스’ ‘공각기동대’에서 이미 나왔다. 등장인물이 전원이 꺼지듯 작동을 멈추거나, 몸속 기계 장치가 드러나 알고 보니 ‘내가 사람이 아니라니… ’라는 전개는 식상하다. '리스펙' 없는 오마주에는 거부감만 생길 뿐. 독창적인 설정도 있다. AI 타입이 자본의 유무에 따라 인간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A 타입부터, 정이처럼 인권을 보장 받을 수 없는 C 타입까지로 나뉘는 건 흥미롭다.
연상호 감독의 신파도 힘을 못 쓴다. ‘정이’는 전쟁 영웅 윤정이의 뇌를 복제, 최강의 전투 AI를 만드는 사람들의 갈등을 그렸다. AI 개발을 이끄는 윤정이의 딸 윤서현. 신파의 핵심은 모녀의 정이다. 그러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서현은 어머니의 기억을 지닌 AI가 모르모트처럼 쓰이다 폐기되는 과정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목숨을 바쳐 AI ‘로봇’을 탈출시킨다. 하지만 ‘인간’ 윤정이는 식물인간 상태로 여전히 병원에 누워있다. 말 못 하는 인간보다 어머니의 기억을 가진 로봇을 어머니로 여긴다는 걸까? 정이의 AI가 남용되는 게 싫다면, 설정대로 A타입 AI에 어머니를 이식하려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닐까? 정이는 시각적 쾌감을 주는 장면도, SF 장르만이 던질 수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도 없다. SF를 우리나라 감독과 배우가 만들고 연기했다고 감지덕지하며, 정으로 봐줄 시기는 오래전에 지났다.
2023-02-1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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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진의 '집피지기'] 용기보다 등기부등본
워낙 세상이 흉흉해 전세 계약을 하는데 ‘용기’가 필요한 시기다. 전세 사기 수법이 워낙 다양하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모르기에 전세 계약은 쉽지가 않다.
“보증금 떼일 염려는 없겠죠?”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집주인이나 공인중개사는 “요즘 집에 이 정도 대출은 다 있어. 괜찮아”라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다. 이 말만 믿고 계약을 덜컥할 경우 집도 잃고 안 먹고 안 입어 애지중지 모은 보증금도 잃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 순간 필요한 것은 용기보다 ‘등기부등본’이다. 등기부등본은 집을 담보로 돈을 얼마나 빌렸는지, 집주인이 계약인이 맞는지 등을 알 수 있는 서류다. 쉽게 말해 집의 신분증인 셈이다.
등기부등본는 표제구, 갑구, 을구로 구성된다. 표제구에는 집의 기본 정보인 층수, 면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갑구와 을구다. 갑구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집의 소유주가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갑구를 잘 확인하면 ‘사기꾼’에게 계약금을 보내는 일을 막아준다. 행여나 대리인이 온다면 위임장, 매도인과 대리인 신분증을 확인해야 한다.
을구는 갑구보다 난도가 좀 더 있다. 특히 숫자만 보면 어지러운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이를 확인하지 않으면 큰돈을 잃게 되니 잘 살펴봐야 한다. 을구에는 집을 담보로 빚을 얼마나 빌렸는지를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 집을 담보로 한 대출이 많으면 사고가 났을 경우 보증금을 받지 못할 확률은 높아진다. 특히 가압류, 가등기, 가처분 등이 있다면 웬만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 언제 경매에 넘어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빚이 없는 집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런 집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럼 ‘안정권’이라도 들어가야 한다. 보통 대출금과 전세금을 합했을 때 주택 매매가의 70%수준이면 안정권으로 본다. 70%를 안정권으로 보는 이유는 만약 집주인이 어떠한 이유로 빚을 갚지 못해 경매에 넘어갔을 경우 보통 80%수준에서 낙찰되기 때문이다.
또 계약 전뿐만 아니라 계약 후에도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변경사항이 없는지 꼼꼼하게 따져보는 게 필요하다. 등기부등본은 인터넷등기소에 주소를 넣고 열람하는 데 700원, 발급하는 데 1000원이면 충분하다. 용기를 조금 덜 내는 값치고는 싸다. 물론 세금 체납, 악성 임대인 경력 등은 알 수 없고 중간에 집주인이 바뀌는 것 등도 등기부등본으로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국토교통부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한국부동산원은 임차인이 전세계약을 맺을 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안심전세 앱'을 출시해 이러한 점을 일부 보완하고 있으니 등기부등본에 안심전세 앱이라면 전세 계약에서 필요한 용기는 줄어들 듯하다.
2023-02-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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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치고 달리기] 베이징의 영광, 다시 한번
‘야구 월드컵’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개막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은 다음 달 9일부터 13일까지 일본 도쿄돔에서 1라운드 4경기를 치른다. 이강철 감독이 이끄는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목표로 한다. 대표팀 선수와 코치진은 이달 중순 미국 애리조나에서 공식 훈련을 시작한다.
‘4강 진출’이라는 선명한 목표와 달리 대표팀의 분위기는 훈련 시작 전부터 어수선하다. 전 야구 국가대표 출신 추신수의 대표팀 선수 차출 관련 발언 때문이다. 그는 ‘한국 대표팀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발언의 여파는 컸다. 대표팀 주장 김현수는 “대표팀은 원해서 가는 곳이 아니다. 뽑히는 곳이다. 세대교체를 위해 인위적 발탁은 안 된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김인식 전 WBC 국가대표팀 감독도 “WBC는 어린 선수들의 경험을 쌓는 대회가 아니다”고 일침을 가했다.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전현직 국가대표들의 의견 충돌은 분명 유쾌하지 않다.
현재 한국 야구 대표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은 떨어져 있다. 2017년 WBC 대회 조별 예선 탈락에 이어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도 노메달에 그쳤다. 끊이지 않고 나오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잇따른 학교 폭력 논란 역시 팬들의 실망을 부채질했다. 팬들은 일부 프로야구 선수들의 코로나19 방역수칙 위반 논란에 또다시 분노했다.
무너진 팬들의 기대감은 관중 수 감소로 나타났다. 한국야구위원회는 관중 800만 명 회복 대신 600만 명 붕괴(2022년 607만 명)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한국 프로야구 관중 수는 2017년 최다 기록(840만 명)을 세운 뒤 내리막이다. 관중 수 감소는 한국 야구의 쇠퇴를 초래할 뇌관이 될 수 있다.
이번 WBC는 침체한 한국 프로야구 인기를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다. 국민들은 축구 대표팀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만든 기적을 야구에서도 기대하고 있다. 야구 대표팀은 이미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 경험이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다. 당시 야구대표팀은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수확했다. 일본도 쿠바도 적수가 아니었다. 2023 WBC 대표팀 이강철호의 목표는 선명하다. 베이징 때 쌓은 승리 DNA를 15년 만에 되살리는 것이다.
야구에는 어느 종목보다 열정이 느껴지는 명언이 많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는 ‘9회 말 2아웃, 패배까지 1아웃만을 남겨둔 위기 상황이다. 한국 대표팀엔 ‘역전 끝내기 홈런’이 절실하다. 관중 없는 프로 스포츠는 생명력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2023 WBC는 국민들의 갈증을 해소해 줄 기회다. 또 한 번의 ‘베이징 기적’이 반드시 필요하다.
2023-02-0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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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의 그림책방] 온기를 나눠요
설 연휴 잘 보내셨나요? 행복, 건강, 성공을 기원하는 수많은 덕담도 주고받으셨겠지요.
서정홍이 쓰고 곽수진이 그린 <덕담>(다림)은 새해를 맞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나의 다짐과 기도’가 들어있는 그림책입니다. 작가는 설 아침 내린 눈을 보며 ‘우리 올해는 저 하얀 눈처럼 깨끗한 마음을 갖자’, 까치 소리를 들으며 ‘우리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자’, 알록달록 어우러진 색동 한복을 보며 '우리도 세상과 잘 어우러지게 살자'고 이야기합니다. 덕담은 함께할 때 더 의미가 있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예쁜 복주머니에 한가득 채운 복을 다른 이들과 같이 나누는 사회에 대한 바람. 살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팽이처럼 다시 일어나자는, 함께라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격려.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당부. 세상을 향한 그림책의 덕담을 들으면 가슴에서 훈훈한 기운이 올라옵니다.
<겨울 이불>(창비)은 뜨끈한 아랫목의 온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자박자박 눈을 밟으며 집에 돌아온 아이는 훌러덩 겉옷을 벗고 이불 밑으로 쏘옥 들어갑니다. 아이가 들어간 이불 아래에는 안녕달 작가 특유의 참신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방바닥 귤, 아궁이 군밤, 불구덩이 군고구마’ 같은 간식을 먹으며 뒹굴 수 있는 ‘이불 찜질방’이 독자를 기다립니다. 추위를 피해 몰려든 곰, 너구리, 거북이 등 이웃 동물들과 함께 뜨끈하게 몸을 지집니다. “우리 강아지 왔니?” 반겨주는 할머니·할아버지와 달걀도 먹고 식혜도 나눠 마시며 스르르 잠이 드는 아이를 보면 우리 몸도 같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듭니다.
<겨울 이불>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장면은 일을 마친 아이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입니다. 할아버지가 이불 밑에 묻어둔 밥그릇을 꺼내 “밥은 먹고 다녀야지”라고 말하며 상을 차려 주십니다. “일은 힘들지 않으냐” “괜찮다” 평범하게 오가는 대화에 마음을 덥히는 온기가 묻어납니다. 이런 온기가 있어 거친 세상 앞에 다시 설 용기를 얻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까지 같이 온화해지면 더 좋겠지요? 새해 덕담처럼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온기를 나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3-01-2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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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의 여행 너머] 솥바위 발은 3개인데…
몇 년 전 미국에서 외국 기자들과 교류할 때의 일이다. “난 당신이 쓰는 폰을 만든 나라(South Korea)에서 왔어.” 삼성폰을 들고 있던 그 기자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삼성이 일본기업 아니었어?” 애국심이 발동해 ‘소니는 일본’ ‘삼성은 한국’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이 처음 만든 제품이 뭔지 알아? 쌀과 설탕이야.”
지난 연말, 여행 취재차 경남 의령군 정곡면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생가를 탐방하면서 그 기자의 놀란 토끼 눈이 떠올랐다. ‘호암 생가’에 전시된 낡은 농기구를 보면, ‘천석지기’ 집안 출신인 이 회장이 정미소 사업부터 시작한 배경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창업주 생가 하면, LG그룹을 공동 창업한 구인회 회장과 허만정 선생이 태어난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행정구역만 다를 뿐 호암 생가에서 자동차로 30분이면 닿을 정도로 지척이다. 양대 그룹 생가의 중간 지점, 남강 한가운데엔 우뚝 솟은 ‘솥바위’가 있다. 수면 아래, 솥의 다리처럼 3개의 발이 바위를 떠받치는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 솥바위 반경 20리 안에 큰 부자 3명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실제로 삼성·LG·효성그룹의 창업주가 탄생했다.
이들 생가와 솥바위를 둘러보며 외국인들도 충분히 흥미로워할 만한 여행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병철·구인회 회장은 지수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했고, 학교 운동장엔 효성 조홍제 회장까지 3명이 함께 심었다는 100년 넘은 ‘부자소나무’도 있다. 게다가 이들 창업주가 두루 나눔을 베풀었다는 미담도 전하니,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기업가 정신을 소개하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아쉬운 건 솥바위 전설에도 불구하고 생가 3곳의 콘텐츠를 하나로 엮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호암 생가 주변은 의령부자마을·부자길 등으로 홍보 중이고, 승산마을 구씨 허씨 집성촌의 고택들은 일반에 비공개다. 함안군 군북면 효성 조홍제 회장 생가는 더 동떨어져 관람객 발길이 뜸하다.
솥바위 전설은 ‘부자가 3명’이어서 가치가 있다. 의령군과 진주시·함안군, 3개 지자체가 힘을 모아 공동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해 보면 어떨까. 남강 물줄기처럼 생가 3곳에 얽힌 이야기를 촘촘히 잇는다면 세계적인 명소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행정구역 경계를 허물면 가능성이 열릴 여행지는 무수히 많다. 지난해 가을엔 낙동강벨트 6개 지자체장이 모여 낙동강관광 공동개발에 뜻을 모으기도 했다. 한 도인의 예언에 불과했던 전설이 얼마나 생명력을 지닐지는 후대에 달렸다. 또 아는가. LG 텔레비전에서 솥바위 전설을 접한 외국인들이 삼성폰 카메라를 들이밀며 한국으로 몰려올지.
2023-01-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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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하의 월드 클래스] 혐오가 비극을 만든다
“일본 사람들은 우릴 바퀴벌레라고 불렀지. 땅 속에 다시 처박아야 된다면서….”
한인 이민 가족을 조명한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드라마로 볼 때 이 대사를 듣는 한국인이라면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힐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재일한국인이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차별과 멸시를 이 한 마디에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재일한국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해충으로 불렀다는 것은 명백한 혐오이자 인종차별이다. 다음 표현도 같은 선상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쟤네들도 인간이었어? 유사 인종 바퀴벌레 아님?” “저 나라 착한 사람은 죽은 사람들 뿐이다” “저것들은 씨를 말려버려야 함”.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뱉은 말이 아니다. 최근 〈부산일보〉의 특정 국가와 다문화가정 관련 기사에 달린 살벌한 글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번에는 혐오의 주체가 한국인들이다. 혐오의 대상은 어린 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중도입국 아동·청소년에 대한 기사에 “제발 꺼져”라는 댓글이 돌아왔다. 이 밖에도 더 수위가 높은 댓글도 많지만, 지면에 그대로 인용하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5월 기자는 마스크조차 구하기 어렵고, 납세자임에도 지자체 재난지원금 지급에 소외된 난민들을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역시 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이 가관이었다. 혐오성 댓글은 특정 국가의 사람에게, 또 국내에 체류하는 아시아 국적의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향한다.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이들 외국인은 분명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이고 약자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자국주의를 내세워 한국과 잦은 마찰을 빚는 일은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문제는 혐오성 댓글이 국가와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심지어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재일한국인을 바퀴벌레로 바라보던 시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객관적인 지표만 고려할 때 한국은 이제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기사 댓글마다 혐오성 표현으로 도배되는 현실을 보면 한국이 진정한 ‘월드 클래스’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대부분 한국인은 양식을 갖추고 있는데 목소리가 큰 사람 몇몇이 혐오 댓글을 주도하는 것일지 모른다. 어찌됐든 월드 클래스의 품격은 혐오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데에서 온다고 본다. 언론도 혐오를 조장하는 기사 생산을 경계하고, 거대 포털 사이트도 ‘혐오의 굿판’이 돼 버린 댓글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023-01-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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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욱의 오오티티] 달리 가면과 하회탈
*이 글은 극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종이의집 공동경제구역-파트 2’가 지난달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로 공개됐다. ‘국뽕’ 짜깁기였던 파트 1. 부끄러움은 시청자 몫이었다. 파트 2에 대한 기대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넷플릭스 콘텐츠 중 ‘전 세계 누적 시청 수 2위’인 스페인산 원작의 첫 리메이크.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다행히 파트 2는 담백해졌다. 다짜고짜 BTS 노래에 춤을 추는 국뽕과 여배우 신체를 클로즈업하는, 80년대 ‘호스티스 영화’ 같은 촌스러움은 사라졌다. 한국판 종이의집의 모든 에피소드가 한 번에 공개됐다면 평가는 달라졌을 테다. 몰아보기라는 OTT 채널의 초심을 잊고 시청자를 늘리려 꼼수를 쓴 넷플릭스의 패착이다. 달리 가면 대신 하회탈을 쓴 강도단의 활약은 파트 1의 아쉬움을 만회했다.
한국판에서 원자 단위로 까인 ‘통일을 앞둔 한반도’라는 설정은 파트 2로 오면서 당위성을 얻는다. 강도단이 조폐국을 점령, 인질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돈을 찍어내 훔쳐간다는 설정은 원작과 같다. 다만 디테일이 추가됐다. 찍어낸 4조 원은 명목상 통일 자금이지만 실제로는 정경유착에 의한 비자금이었던 것. 이 돈을 훔치는 강도단은 자연스럽게 ‘의적’으로 인정받고, 부패 국회의원 ‘김상만’을 메인 빌런으로 내세워 긴장감도 높였다. ‘교수’와 ‘베를린’의 서사에도 입체감이 생겼다. 원작보다 분량이 줄어든 만큼 곁가지는 줄이고 두 인물의 비중을 높였다. 원작처럼 형제라는 설정은 유지한 채, 탈북 과정에서 생이별한 형제로 리메이크됐다. 진부하지만 익숙하다. 인물의 성격이 충돌하고 갈등 상황이 극한으로 치닫는 후반부, 시청자의 집중도가 떨어질 무렵 익숙함은 친숙함으로 바뀌어 몰입감을 다시 높인다.
하지만 단점도 여전하다. 해킹한답시며 보이는 의미 없는 알파벳 소스 코드, 속어와 초성 채팅이 난무하는 인터넷 방송등 한국 영화의 클리셰들은 여전히 가득하다.
특히 리메이크판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원작을 ‘복붙’해 현지화에만 집중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케이퍼 무비’의 가장 큰 핵심은 반전으로 인한 카타르시스. 한국판 제작자와 배우들이 “원작과 다르다”고 말한 순간 사람들은 새로운 반전을 기대한다. ‘강도 실패’는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원작에서 죽은 인물을 살리거나 반대로 살아남은 인물을 죽이는 것. 한국판은 베를린을 살렸다. 예상 가능한 반전이다. 더 큰 문제는 캐릭터가 가진 비장미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베를린은 죽음으로, 희생으로 완벽해지는 캐릭터다. 원작 베를린은 시즌 2에서 죽는다. 하지만 회상으로 시즌 5까지 등장한다. 살았으면 얻지 못했을 인기. ‘무지성’으로 캐릭터를 살린, 파트 2의 가장 큰 패착이다.
2023-01-0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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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철의 '금알못' 탈출기] 개미지옥 2022년 주식시장
2022년은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잊지 못할 한 해다. 2021년 불어온 주식 투자 열풍에 국민 대다수가 올라탔고 호황기를 맞으며 제법 투자를 성공한 이들도 있었지만 올해는 국내외 가파른 금리 인상 등의 악재가 겹치며 코스피가 폐장일인 29일에도 급락하며 2250선마저 내줬다. 올해 개인 투자자 순매수 금액은 전년(76조 9315억 원) 대비 3분의 1에 불과한 24조 4963억 원(28일 기준)에 그쳤다.
하지만 ‘금알못’(금융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기자를 포함한 일부 개미(개인 투자자)들은 ‘산타랠리’가 아닌 ‘사탄랠리’, 곳곳에 들어온 ‘파란 불’에도 여전히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혹자는 희망보다는 현실 도피가 아니냐고 되묻기도 한다.
이같은 상황에도 실낱같은 희망은 남아있다. ‘주식 투자 방정식’이라 불리는 ‘1월 효과’다. 특별한 호재가 없어도 새해 시작으로 주가 상승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상승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1990년 이후 코스피지수의 1월 평균 수익률은 2.2%로 나타났다. 월별로 보면 1월과 11월이 평균 수익률이 가장 높은 달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파가 몰아친 지금 같은 주식 시장에선 이러한 공식이 작동되지 않을 것이란 암울한 전망마저 나온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삼성증권이 최근 7년간(2016~2022년) 국내 상장주식의 월 평균 수익률을 분석한 결과 “1월에 주식을 사서 4월에 매도하면 수익률이 가장 높게 나왔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업종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지가 남아있다. 참고할 만한 자료를 찾아봤다. 같은 기간 1~4월 ‘모건스탠리캐피탈인터내셔널(MSCI) 코리아’ 업종별 평균 수익률이 가장 높았던 업종은 에너지(4.4%)였다. 이어 소재(3.2%), 정보기술(IT·2.4%) 순이었다. 반면 헬스케어(-1.7%), 유틸리티(-1.3%), 경기 관련 소비재(-0.9%)는 손실을 봤다.
세계 경제가 급변하고 있는 만큼 이들 업종이 내년에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이 연초 강세를 보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자. 에너지, 소재 업종은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연초 경기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의 확산이 긍정 영향을 미친 것이다. IT는 연초 세계 최대 전자·정보기술(IT) 전시회 CES를 포함해 테크 산업 전반에 대한 새로운 기술과 표준들이 등장하면서 상승세를 보였다.
유튜브 경제 채널 ‘삼프로TV’의 김동환 의장은 “투자를 승부로 여기지 않고 늘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건전한 투자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기자뿐 아니라 모두들 내년에는 ‘개미지옥’ 탈출을 위해 ‘열공’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2022-12-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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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치고 달리기] 대담한 발걸음
한국 축구가 강해졌다. 12년 만에 이룬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는 값지다. 성적만큼이나 훌륭한 성과는 또 있다. 4년 넘게 갈고닦은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은 것이다. ‘한국 축구’에 대한 믿음, 4년 뒤 2026 월드컵을 넘어 꾸준히 이어 가야 할 한국 축구 대표팀의 자산이 됐다.
‘한국 축구’는 4년 4개월 동안 정성 들여 빚은 도자기와 같다. 파울루 벤투 감독의 축구 철학이 반영된 전술·전략 위에 선수단의 피와 땀이 더해졌다. 실패도 있었고, 위기도 있었다. 그때마다 선수단과 코치진은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극복했다. 선수단은 월드컵 16강전에서 브라질에 진 뒤 벤투 감독 등 코치진과의 이별에 아쉬움과 슬픔을 드러냈다.
‘한국 축구’의 위기는 정작 카타르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찾아왔다. 벤투 감독의 후임을 정하는 문제를 둘러싼 잡음이 일었다. 일부 언론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추측성 기사들이 쏟아졌다. ‘국내파·연봉 10억 원·국가대표 출신 축구 해설가….’ 국내 축구 팬과 국민들은 분노했다. 벤투 감독과 선수단이 이룬 성과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기도 전에 후임 감독의 기준이 언급되는 것에 실망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나온 뒤 ‘후임 감독 논의는 진행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미 불은 번진 상태였다.
월드컵 16강을 이끈 선수들도 섣부른 후임 감독 논의에 불만을 드러냈다. 주전 수비수인 A 선수는 ‘감독 결정에 있어 선수의 입장을 귀담아들어 달라’고 밝혔다. 주전 미드필더 B 선수는 ‘우리의 감독님을 너무 쉽게 선택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 번이라도 더 고심하지 않을까’라며 현 상황에 대한 복잡한 속내를 밝혔다.
대표팀 선수들이 감독 선임 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선수들의 입장 표명은 선수들과 대한축구협회 사이에 한국 축구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다. 선수들로서는 감독·코치진과의 신뢰의 중요성을 체감한 상황인 만큼 설익은 후임 감독 논의가 납득하기 어렵다. 팬들 역시 이런 논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차기 감독 선임을 결정할 대한축구협회는 대담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여론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대한축구협회는 카타르 월드컵을 통해 확인한 선수단과 코치진 간의 신뢰를 이어 갈 감독을 찾아야 한다.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뚝심을 밀어붙일 감독을 선임해야 한다. 무엇보다 선수들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불어넣을 감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국 축구’는 다시 한번 성장해야 한다.
2022-12-2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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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의 그림책방] 하나에서 함께로
시작은 하나부터. 씨앗 하나에서 이야기가 출발하는 두 권의 그림책이 있다.
막달레나 스키아보가 쓰고 수지 자넬라가 그린 〈처음에 하나가 있었다〉(초록개구리)의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다음에는 파도에 실려, 그다음은 흙먼지에 쓸려. 씨앗이 모이고 모였다. 그러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씨앗들은 따로 살기로 했다. 같은 씨앗끼리만 살면 더 좋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왔든 어떤 종류이든 중요하지 않아.’ 다양한 씨앗이 모여 사니 다시 행복해졌다(그림).
키티 오메라와 킴 토레스의 〈언젠가 고요한 숲속에 씨앗 하나를〉(사파리)에서는 새가 씨앗을 가져왔다. 땅 위에 떨어진 씨앗은 온갖 색깔을 머금은 꽃이 됐다. “노란색이다.” “초록색이다.” “보라색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 색만이 꽃의 진짜 색이라고 우기고 다퉜다. 있는 그대로의 꽃을 본 아이 덕분에 사람들은 알게 됐다. ‘누구나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색깔에는 저마다의 이야기와 의미가 담겨 있다.’
첫 번째 씨앗은 함께하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줬다. 두 번째 씨앗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퍼트렸다.
〈점: 세상에서 제일 작은 점〉(내인생의책)에는 씨앗 같은 점이 등장한다. 까만 점과 그 친구들은 부유하다. 까만 점의 세계는 좋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하얀 점과 친구들은 잘살지 못한다. 그들의 세상은 부족하고 비어있다. 하얀 점은 까만 점의 세계로 가고 싶어 했다. 까만 점은 하얀 점을 받아들였을까?
지안카를로 마크리, 카롤리나 자로티 작가는 일방적 수용이 아닌 어울림의 해법을 택했다. ‘너희 일부를 받아줄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희 쪽으로 갈게’ 즉 “우리 함께하자”고 말한다. 함께하면 더 많은 것이 가능해진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고, 행복도 더 커진다. 시작은 하나였을지라도 끝은 ‘함께, 같이 행복한 사회’라고 쓸 수 있는 세상. 노력해야 이룰 수 있다.
2022-12-15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