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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늙은 사자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주위를 돌아본다
평원은 한 마리 야수를 키웠지만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눈빛은 덧없다
어깨를 짓누르던 제왕을 버리고 나니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
갈기에 나비가 노는 이 평화의 낯설음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독수리 한 마리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다
짓무른 발톱사이로 벌써 개미가 찾아왔다
-시집 〈늙은 사자〉(2016) 중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풍기는 향기에 젖어 죽음이 드리우는 그늘 속에서 팔랑대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해 의식을 갖고 죽음을 들여다보면, 죽음 역시 또렷한 의식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느낀다. 섬칫 두려운 눈길을 감지하게 되었을 때,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고 한들 어찌 지나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런 점에서 죽음을 담백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과의 응시 속에서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음을 알아채고 죽음에 목숨을 순순히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생의 완성이 어디에 있고 무엇으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깨우친 존재들이다. 하여 우리의 삶이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양면에 걸쳐 어떤 장애에도 걸림 없이 지고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방편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
2024-10-0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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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점등(點燈)
이른 아침 학교 언덕길
고요한 시선 하나 나의 내면 엿본다
고개 돌려 숲속 관찰하니 직박구리 한 마리
바로 지척에서 나를 바라본다
엄마 젖에 매달린 젖먹이마냥 동백꽃에 매달려
말갛게 나를 바라본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제 아빠 대하듯 내 눈에 제 눈 맞춘다
순간, 내 망막이 그놈의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가
환하게 점등되는 걸 느낀다 황홀하게
천 년 시간 저쪽의 도화원에 가 닿는 걸 느낀다
하, 얘 좀 봐? 나는 직박구리와 눈 맞추는 일이
가슴 떨려 못 견딜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오래 지속하면 어느 찰나 저놈이 지리산 연곡사
동부도 속으로 날아가 버릴까 얼른
눈길 거둔다 그리고는 가슴 뿌듯하게
오늘 하루 나는 직박구리의 아빠야, 자랑해대며
아이들 가르칠 일을 즐겨 구상한다
-시집 〈천 년 시간의 저쪽 도화원〉(2014) 중에서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스파크가 튄다. 튀는 불꽃은 놀라움, 기꺼움, 황홀함 등으로 번져 의식의 등불이 된다. 시인도 이를 알기에 ‘눈 맞춘’ 순간 ‘그놈의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가 환하게 점등되는 걸 느낀다 황홀하게’라고 말하고 있다. 눈맞춤으로써 깨어나는 의식의 점등(點燈)! 의식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무료한 일상은 부서지고 세상은 신비로 피어난다.
첫사랑의 눈맞춤이 그러하지 않을까? 황홀한 교감은 세계 속에 살아있는 나의 존재성을 유감없이 느끼게 하고, 생의 기쁨과 의미에 눈뜨게 한다. 그렇기에 ‘점등’은 삶의 본질에 대한 본능적 직관이다.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것에 대한 발견이다. 시인도 본능적으로 이를 ‘천 년 시간 저쪽의 도화원에 가 닿는 걸 느낀다’로 고백하고 있다. 하여 시는 불의 성령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배화교(拜火敎)처럼 의식의 불꽃을 부르고 키워내는 의례다. 김경복 평론가
2024-09-2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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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풀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2015) 중에서
참으로 놀라운 시다.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나’는 현상을 통해서 ‘향기는 풀의 상처다’란 명제를 유추해 내는 것은 보통의 통찰력이 아니다. 그 말은 상처가 곧 향기일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 속에서 상처는 고통, 악취, 죽음 등의 부정적 의미를 띤다. 그런데 상처가 향기가 된다는 발언은 상식을 넘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풀은 상처를 향기로 승화시키고, 상처는 향기가 될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역설적 진실에 눈뜨게 된다.
그로 인해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말하는 마음의 경지에 대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상처를 두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상처가 가진 영향 때문일 것이다. 실제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 생각해 보면 흉터야말로 삶의 아픔과 고난을 이기고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무늬 아닐까? 상처의 흉터로 존재의 의미를 생생하게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없다.
김경복 평론가
2024-09-1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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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첫사랑 그 사람은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시집 〈박재삼 시 전집 1〉(1998) 중에서
첫사랑은 강렬한 감각이다. 날카롭거나 뜨겁거나 짙거나 하는 것. 생의 처음에 주어지는 감각은 매우 낯설고 매워 시간을 초월하여 기억 속에 남아있다. 상대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냄새는 의식의 원판에 새겨져 있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프’게 하는 감각으로 인화된다. 무엇보다 만지고 쓰다듬던 ‘내 손에도 그 냄새가 묻어 있’음을 느낄 때는 더욱 또렷한 감각으로 인해 애틋함을 달랠 길 없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놓쳐버린 사람에게 첫사랑은 그래서 ‘울음’이다. 세계마저 그 슬픔에 동조하여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운’다. 울음 속에서 그때의 감각은 더욱 생생해지고 가슴에 사무친다. 하여 ‘첫사랑 그 사람’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심층에 잠겨 일렁이고 있다가 그리움의 감각을 타고 전율로 피어난다. 김경복 평론가
2024-09-0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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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빙벽(氷壁) / 박영근(1958~2006)
겨울산은 나뭇잎 하나 붙잡을 것이 없다
침묵의 저 가파른 칼등
바람에 끌려다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고
바위절벽에 얼어붙는다
어떤 생애의 화살이 날아와 깨뜨릴 수 있을까
흉터와 외침 위에
얼음 저며드는 벽화(壁畵)여
바람도
눈송이도
스스로 부딪쳐 불타올라
온몸으로 절벽이 된다
오오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저 겨울산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 중에서
마음만은 차디찬 상태에 두기로 한다. 연일 불볕더위가 자심한 8월의 마지막 주간, 한겨울의 얼음산을 부른다. ‘바람에 끌려다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고 바위절벽에 얼어붙는’ 모습을 그리자 가마솥 같은 더위가 급속히 냉각되는 느낌. 풀어진 몸에 소름 돋는 것 같고, 늘어진 정신에 으슬으슬 한기가 끼치는 것 같다.
상상력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시인도 겨울산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무정하고 무심한 세월 속에서 ‘바람도 눈송이도 스스로 부딪쳐 불타올라 온몸으로 절벽이 되’는 상상은, 그것도 오직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겨울산’을 떠올려 보는 것은 완벽한 세계를 품어보고 싶다는 의지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강인하고 올곧은, 그러면서 칼날같이 엄정한 상태에 이르고 싶다는 마음의 표상. 하여 ‘빙벽’은 영혼의 ‘가파른 칼등’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
2024-08-2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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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시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 시집 〈저녁 6시〉(2007) 중에서
답답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 한 번 크게 몰아쉴 ‘숨구멍’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쉼터, 편안하고 쾌적하게 꿀잠을 잘 수 있는 곳. 그곳에선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는 것이 제격이고, ‘사람들의 눈총이야 알 바 아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하는 생각에 잠겨있을 것이다. 풍요와 자유가 보장되어 삶의 활기가 넘치는 곳!
이상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별다른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거닐며 노는 것을 ‘소요유(逍遙遊)’라 할 때, 이는 동양적 전통의 오랜 꿈이다. 시인은 이를 조금 야릇하고 소탈하게 현실적 삶의 모습에서 구현해 내고 있다. 읽고 있으면 ‘마량’에 가고 싶은 생각이 물처럼 치솟는다. ‘누이의 손거울’ 같이 아름다우면서 자유로운 마량! 그런 곳에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가면, 누구나 제 알량한 여생이 거덜 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8-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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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 중에서
그리움은 잊어버리자고 애쓸수록 더 잊혀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리움에 사무친다는 말이 그런 경우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바다 기슭’은 구원의 장소다. ‘바다 기슭을 걸어보는’ 것으로 마음은 정화된다. 해소되지 않는 ‘추억’의 갈증은 사무치는 그리움의 부작용이다. 그래서 ‘하루 이틀 사흘’ 하염없이 바다 기슭을 걷는 사람은 구원과 형벌을 다 받고 있다. 그에게 그리움은 전혀 퇴색하지 않는 얼굴로 ‘여름 가고 가을 가’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어룽댄다.
그리움은 물러섬이 없다. 사람을 불러내 끝없이 헤매게 만든다. 젊은 날 박상규의 ‘하루 이틀 사흘’을 부르며 이송도, 해운대, 광안리 바다 기슭을 쏘다니던 것도 그리움의 성분 탓 아니었을까? 그리움은 독과 같아서 한 번 몸 안에 들어오면 광기에 휩싸여 천지를 떠돌 수밖에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 기구한 속성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8-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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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중에서
‘끝’은 절정의 감각이다. 완만한 기울기로 넘어감이 아니라 절벽 위에 서서 천 길 나락을 내려다보는 느낌. 절정은 이미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 것이기에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고, 만약 다음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차원을 봉인하거나 절연하여 초월, 곧 윤회로의 비약만 있을 뿐이다. 계절의 상징에서 여름도 절정의 감각을 환기한다. 여름은 뜨거운 기운으로 생명의 활동이 정점에 이르도록 하는 계절이다. 그 이후는 가을·겨울로서 ‘조락(凋落)’의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여름과 끝은 내포적 의미에서 필연적 상관성을 가진다.
한 사람이 ‘폭풍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어떠한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채 ‘절망’하게 된다면, 이것도 ‘끝’의 감각으로서 생의 절정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생의 모든 에너지가 소요되는데, 그것을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는 일로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하여 ‘여름의 끝’은 한 세계가 완성되어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가 탄생하는 일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8-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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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청산을 부른다 4-윤중호(1956~2004)
청산(靑山), 너머에 또 청산,
너머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살랑대는 바람도 푸르게 자라서
길이 되는 곳
나무등걸, 칡넝쿨, 솟을바위,
세상이 버린 멍든 가슴들이
막아선 길 끝
사람이 만든 길 끝에 서서,
울먹이며
청산을 부른다.
-시집 〈청산을 부른다〉(1998) 중에서
현실이 힘들고 각박할수록 사람들은 이상향을 찾는다. 도연명의 ‘무릉도원’이나, 제주도의 ‘이어도’, 지리산의 ‘청학동’ 전설 등이 그런 내용일 것이다. 낙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은 본능적이어서 역사 속에서 늘 나타났고, ‘청산’도 낙원의 한 표상으로 오르내렸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청산에 살어리랏다’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문제는 누가, 왜 ‘청산’을 찾는가 하는 점이다. 시인은 ‘세상이 버린 멍든 가슴들이’ ‘사람이 만든 길 끝에 서서’ ‘울먹이며’ ‘청산을 부른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청산이 버려진 자들에게 막다른 상황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장소가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곧 ‘청산을 부르’는 것은 핍박받는 자들이 현실의 모순과 불의를 부수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의지의 표출인 셈이다. 하여 청산은 혁명의 깃발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7-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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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치자꽃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 가는 고향의
슬프디 슬픈 해안통(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천막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 시집 〈울릉도〉(1948) 중에서
화엄경은 우주를 하나의 꽃으로 보면서 ‘하나의 꽃이 한 세계(一花一世界)’라 표현하고 있다. 치자꽃이 그렇지 않을까? 치자꽃이 피면 장마가 시작되고 치자꽃이 지면 장마가 그친다. 치자꽃이 피는 시기는 장대비와 함께 진한 향기가 천지를 뒤덮는 한 여름의 세계다. 장마가 잠시 물러간 날 곳곳에서 풍기는 치자꽃 향기는 얼마나 코끝을 달짝지근하게 만드는 설렘이었던가!
사랑하는 이의 눈 속에서 ‘치자꽃’이 떠오르는 것을 본 사람은 이미 한 세계를 산 셈이다. 특히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의 눈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살아 있’는 연인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운명일지 모른다. 그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아니, 그 얼마나 치명적인 아름다움인가! 김경복 평론가
2024-07-2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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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마음에 들다 / 김선태(1960~ )
너를 향한 마음이 내게 있어서
바람은 언제나 한쪽으로만 부네
나는 네가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집
대문도 담장도 없이 드나들어도 좋은 집
마음에 든다는 것은 서로에게 스미는 일
온전히 스미도록 마음의 안방을 내어주는 일
하지만 너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
나는 촛불을 켜고 밤늦도록 기다리는 사람
그렇게 기약 없는 사랑일지라도
그렇게 공허한 행복일지라도
너를 향한 마음이 내게 있어서
바람은 언제나 한쪽으로만 부네
-시집 〈그늘의 깊이〉(2014) 중에서
사랑은 ‘스며드는 것’이다. 스밈은 두 대상이 각자의 성질을 버리고 하나의 새로운 물질로 변화하는 것, 물리적인 조각 맞추기가 아니라 화학적인 용해 작용을 통해 새로운 물질로 탄생하는 것. 사랑은 음이온과 양이온이 인력에 의해 하나의 물질로 융합되듯 스며 천지의 법칙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스며들’ 수 있도록 ‘마음의 안방을 내어주는 집’이 된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촛불을 켜고 밤늦도록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도록 ‘너를 향한 마음을’ 놓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집과 사람은 사랑의 사도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대문도 담장도’ 다 열어 놓은 사랑의 집은 얼마나 그윽하고 싱그러울까! 사랑의 사도만이 언제 ‘드나들어도 좋을’ 집을 마음에 품고 있다.
김경복 평론가
2024-07-1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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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아름다운 수작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시집 〈우포늪 왁새〉(2002) 중에서
천지의 본질은 사랑이다. 모든 물질은 서로 끌어당겨 사랑을 나누고, 그 결과 진화된 존재로 분화된다. 음양의 조화가 세상의 뿌리가 되고 가지가 된다. 하여 이 세계의 변천과 확산의 바탕에는 사랑의 속성이 녹아들어 있다. 사랑의 운명선이 이 우주의 성장과 사멸의 동선이다.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이라는 시구가 바로 이 점을 갈파하고 있다. 시인은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이 ‘범성욕’에 기반하여 번창하고 생명의 고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씀바귀 꽃잎’과 ‘무당벌레’ 사이의 교감에서 발생하는 번식 과정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런 내용은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땐, 매우 ‘황홀하게 까무러칠’만한 내밀하면서도 고조된 눈뜸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 실현의 의미로 충만한 아름다움이다. 자연의 섭리를 읊는 시 중에 이러한 천지간의 비의(秘義)를 담고 있는 작품이야말로 수위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김경복 평론가
2024-07-0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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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시집 〈소주병〉(2004) 중에서
사랑은 희생이다. 자기 생명과 정수(精髓)를 새끼들에게 차곡차곡 넘겨주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은 점차 ‘비어가는’ 것, 날로 ‘쪼그려’ 드는 것. 가벼워지고 작아지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과업을 무사히 달성해 냈다는 표지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흙냄새, 술 냄새 속에 단단한 허벅지와 팔뚝으로 나를 들어 올리셨다. 꽉 차 있었다. 나이 들어 방 아랫목에만 계시게 되었을 때는 홀쪽한 볼에 끊기지 않는 기침으로 힘들어했다. 바람 같았다.
아버지는 그때 무슨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다보았을까?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지만 알 것도 같아라, 이미 저버린 생애의 슬픔을 저렇게 ‘빈 소주병이 내는 소리’처럼 안으로 울고 있었을 것임을! 세상의 아버지들은 비어서 비로소 처연한 울림통의 악기가 된다. 김경복 평론가
2024-07-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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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장마
세상 살기 힘든 날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강가에 나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이 땅에 젖어 들지 않고
젖어 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흘러가 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 내리지도 않고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그저 흘러 흘러갔으면 좋지 않을까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강가에 나가 나는
-시집 〈오래된 엽서〉(2003) 중에서
힘들다는 것은 무언가를 무겁다고 느끼는 것이다. 생활의 중압감에 마음조차 추처럼 무겁게 생각될 때가 그런 경우다. 내 존재마저도 ‘음습한 삶내에 찌들’어 버겁게 느껴질 때 우리는 ‘세상 참 살기 힘들다’라고 탄식한다. 생의 중력에 연일 먹구름이 천지를 암울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것만 같은 ‘장마’의 날들!
그럴 때 우리는 ‘흔적도 없이’,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내리지도 않고’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무심히’ 아무런 발자취도 남기지 않고 ‘강물에 젖어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 깨끗하면서도 시원한 잠적! 어지럽고 무거운 ‘장마’의 기압골을 유유히 빠져나가 버리는 상상은 얼마나 짜릿한가! 흐르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강가에 나와 생의 짐을 부리고 나도 한 방울의 강물이 되어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몸을 바로 세우고 흐린 눈을 밝게 하는 일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6-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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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높새바람같이는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시집 〈아픈 천국〉(2010) 중에서
비루한 몸, 비루한 생. 당신을 잃어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게 된 저문 하루. 그렇지만 당신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올올하고 절절해지네. 무엇이 이렇게 누추한 삶의 한가운데에서도 노을에 물들어가는 저 하늘을 쳐다보게 하는가?
‘당신과 함께’한 날은 ‘높새바람같이’ 드높고 자유로웠지. ‘당신과 함께’라서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지. 당신으로 인해 내가 더없이 아름다워졌던 구도.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은 내 안의 심장, 내 청춘의 숨결, 내 영혼의 아니마. 시간은 그 모든 것을 쓸어 ‘재가 되어가’게 하네. ‘잘 걷지도 못하’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노구(老軀)만 남겨놓게 하네.
그리워라, 내 안의 당신. 당신의 눈동자에 내가 다시 맺히면 아름다운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삶이 참 스산하다고 속삭일 수 있을까? 김경복 평론가
2024-06-18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