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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나는 낯설다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고 말할 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래가 좋아질 때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받침을 물끄러미 볼 때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할 때
소유를 자유로 바꾼 사람을 잊어버릴 때
슬픔을 이기려고 꽃 속에 얼굴을 묻을 때
목 놓은 바람 소리 나를 덮칠 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애절한 가사를 쓸 때
절망이 나를 키웠다고 고백할 때
먼 것이 있어서 살아있다고 중얼거릴 때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을 쓰고 후회할 때
흰 구름으로 시름을 덮으려고 궁리할 때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쓸 때
나는 낯설다
-시집 〈몇 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2024) 중에서
존재의 불가피한 근원적 고독과 슬픔을 눈부신 서정의 언어로 승화시키는 순간들. 문득 앞만 보고 달려온 생을 뒤돌아보며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려주는 시인의 순간들을 통해 부족하기만 한 저를 하나씩 짚어보게 됩니다.
상실이며 절망이고 슬픔이며 울음인 삶. 그러나 삶이 준 상처가 저렇듯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시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이라면 견딜 만한 것일까요.
시 쓰기가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이며,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며, 삶과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데 시보다 충분한 것은 없다던 노시인의 고백에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60년 동안 써왔던 시가 살기 위해서였다는 시인의 말에 다시 숙연해집니다. 순간순간 낯선 자신을 안아주는 일. 노시인의 겸허한 문장들이 죽비처럼 어깨를 내려칩니다. 신정민 시인
2025-05-1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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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2000) 중에서
시인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18살에 시인을 낳고 스무 살에 세상을 떠난 엄마. 그렇게 엄마를 잃은 시인이 나이 50줄에 간암 수술을 받고 투병하며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휴가를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시인은 엄마가 계신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 시를 읽고 저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는 하셨는지 딱히 할 말 없는 안부를 여쭸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배운 단어, 엄마! 부르기만 해도 괜히 눈시울부터 뜨거워집니다. 엄마라는 말에는 우리가 울었던 울음들의 위로가 담겨있기 때문일까요.
살면서 억울했던 일 하나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는 시인의 말에 콧등이 시큰해집니다. 시인이 기억하는 엄마의 냄새, 송홧가루 날리는 5월입니다. 모든 엄마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치고 싶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5-0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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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현재는 이렇게 지나간다
미래야
부르자
과거가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왔다
앉아
기다려
훈련을 시켰다
미래에게 줄 간식들을
과거에게 다 써버리면서
훈련 시킨 과거를 데리고
미래를 찾으려 나섰다
평생 쫓겨 다녀서
달리기를 참 잘하는
미래는
사실은 도망치지 않았고
문밖에서 내내 기다렸다고 했다
내가 언제 나오는 건지
나는 어색하게
과거의 손을 잡고
미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천천히 걸어서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시집 〈미래의 손〉 (2024) 중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다시 읽어 봅니다. 시간은 무엇일까요. 질서와 순서가 있는 것일까요. 어떤 곳에서는 천천이 흐르고, 어떤 곳에서는 빨리 흐른다는 시간. 나는 나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람이고, 벌써 도착한 사람인데 이런 나를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세 토막 내어 말할 수 있겠는지요. 시간은 단지 물질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 간의 움직임이라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도 애완 혹은 반려로 훈련 시킬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시인이 남긴 시간은 과거일까요 미래일까요 현재일까요. 삶이 고통이라면 시간도 고통이겠지요.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과거와 미래 때문에 현재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4-2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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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대저를 지나며
아침이면 구포다리 위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곤 했다. 늘어선 차들은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다급해진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다리 옆 통행로를 따라 걸었다. 바쁜 일은 없었지만 나도 가끔 다리를 따라 걸었다. 산꼭대기의 햇빛 받아 반짝이는 강에서 물고기들이 튀곤했다. 햇빛 등지고 대저로 들어서면 봄꽃 향기 아지랑이처럼 퍼졌다. 길가 양철 지붕 작은 집 옆엔 버드나무 그림자 드리워진 물길이 있었고 시멘트 다리 옆엔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있었다. 이따금 마을버스가 서는 정류장 가로수에서 참새들이 쉬어가곤 했다. 버드나무 그림자로 덮여 햇빛 잘 들지 않는 물길은 늘 깊고 어두웠지만 나는 고인 물 위에 고요히 떠 있는 연두색 개구리밥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도 버스를 타고 가다 물 위에 고요히 떠 있는 개구리밥들을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그녀가 시멘트 다리와 오래된 간판을 단 가게와 늙은 나무들을 고요히 바라보는 동안 햇빛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따뜻하게 비추어주었을 것이다 -시집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 (2020) 중에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지요. 북구와 강서구를 잇는 구포다리는 종종 정체 구간이 되곤합니다. 정체 구간은 삶에도 있겠지요. 이 시에서 조용한 상태라는 순우리말, 고요에 머물러봅니다.
담담한 서술을 불러내는 고요는 현실이어도 좋고 환상이어도 좋습니다. 늘 지나치던 풍경이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라고 차들이 가다 말고 섰을까요. 낙동강 가에 펼쳐진 풍경들,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이름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봄볕. 바다로 가는 풍경이 강물처럼 이야기가 되어 흐릅니다. 우린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만 하는 버스를 탄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5-04-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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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꿀벌 사원
꽃가루가 얼마나 모여야
꿀이 되는가 나는
생의 도감圖鑑 같은
두툼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밀봉된 전철 안
손잡이에 매달려
겨우 흔들리면서
꽃 찾아 강을 건너간다
세상의 꽃은 모두
벌들의 거래처, 나는
두엄에 핀 민들레와 인사하다
똥무더기를 밟기도 하고
잘못 든 건물
유리창을 들이받다
쫓겨나기도 한다
아주 쓸쓸한 날에는
분가루를 입술에 묻힌 채
유곽을 헤매기도 하지만,
모든 씁쓸한 맛이
더해진 꿀맛은 그래서
달콤하다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2009) 중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해야 꿈꾸는 삶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도 일자리를 찾아 분투하는 샐러리맨, 세일즈맨들이 꽃 찾아 강을 건넙니다. 일자리가 줄어 대졸 백수가 400만이 넘는 우리의 현실. 향기 없는 꽃은 꽃이 아니라는데 봄이 봄 아닌 것 같고, 꽃이 꽃 아닌 것 같고, 청춘이 청춘 아닌 것만 같습니다. 취업 전쟁, 스펙 전쟁의 시대에 꽃가루를 얼마나 모아야 꿀이 될 수 있겠느냐 묻는 시인의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꽃들은 한창인데 붕붕거리며 꽃을 찾아야 할 벌과 나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많은 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생태파수꾼인 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멸망한다는 말이 있던데, 달콤한 생은 얼마나 씁쓸한 절망을 딛고 일어선 꽃일까요.
신정민 시인
2025-04-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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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폭설
노인은 앉은뱅이 아내를 업고 밭으로 갔다
텃밭 한쪽 꽃방석 위에 아내를 앉혀 놓고 봄날을 골랐다
햇살의 흰 머리카락
수정 브로치를 단 민들레 곁에서 반짝거렸다
풀 한 번 뽑고
아내 한 번 쳐다보고
풀 한 번 뽑고 아내 한 번 쳐다보고
잇몸만 남은 한낮
다소곳 늙은 아내가 전하는 말
올해도 영감이 좋아하는 눈을 볼 수 있을까요
아무렴, 내년에도 볼 수 있지
감나무 그늘
노부부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텃밭의 노부부가
앞당겨 본 겨울
눈부신 봄날이
꽃잎인 듯 흩어져 내렸다
시집 〈어떤 것은 밑이 희고 어떤 것은 밑이 붉었다〉 (2020)에서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봄날 텃밭에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눈 내리는 겨울을 앞당겨보는 노부부의 대화에서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카프카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주름이 생기지 않는 마음, 친절하고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령을 극복하는 힘이 아니겠는지요. 삶은 순간순간의 있음이며 그것은 모두 한때일 것입니다. 단순한 것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고, 작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는 나이. 그래서 늙은 아내를 향한 영감님의 다정한 눈빛이 봄볕보다 따듯합니다. 긍정적인 자세로 삶을 마주하는 것. 누구나 꿈같은 인생의 봄날 지나가겠지만 두려움보다는 더 넓은 시야와 깊은 지혜를 선사해준다는 나이야말로 존경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4-0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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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쑥 캐러 가자
제비꽃 옆에 앉아 캔다 풀꽃을 세다 나이를 잊은 여자가 쑥이나 캔다 봄날에는 함부로 길 나서는 것 아닌 줄 알만한 여자 오늘은 무슨 얕은꾀나 낸 듯 들판에 쪼그려 앉았다 봄볕에 그을려 등뼈가 사라지고 머리 몸통 차츰 사라지는데 아무런 대책없이 흙이나 뒤적인다 말을 잃고 손가락을 잃고 엉덩이를 잃더니 그 여자 무덤처럼 잠잠해진다
봄볕이 캔다 갈때까지 가겠다며 칼을 품고 집 나온 가슴이나 캔다 노래를 잊은 여자 오로지 슬픔인 여자를 바구니에 캐 담는다 허리를 펴느라 잠시 고개를 돌렸는데 초록 담요 위에 따뜻한 잠 귀신이 와서 몸을 눕힌다 쑥물 들고 쑥 냄새 밴 여자를 흔들어 깨운다 천 년 잠에 귀도 입도 없어진 여자 넋을 놓고 앉았는데 봄볕이 칼을 들고 캔다 꿈인지 소설인지 모를 아지랑이만 중얼중얼 풀어지고 있다
시집 〈술병들의 묘지〉 (2013) 중에서
문득, 계절의 순서가 단지 봄이어서 싹이 움트고 꽃들이 피는 게 아니라 대지를 뚫고 오르는 생명들의 열기 때문에 날이 풀리는 것 아닌가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양지바른 곳이라면 어디서나 자라서 국도 끓이고 나물도 만들고, 향기로 해충도 쫓고 쑥뜸으로 병을 다스리기도 하는 여러해살이풀. 쑥 캐다 말고 오수에 든 여자 대신 봄볕이 쑥을 캐는 수채화가 보입니다. 없이 살던 때에 봄볕 등지고 여기저기 쑥을 캐러 다니던 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척박한 환경에서도 쑥쑥 잘 자라는 쑥. 그런데 이 쑥이 토양에 있는 중금속을 흡수하는 탓에 공기 좋고 깨끗한 곳에서 채취해야 한답니다. 생태계를 위협하는 돼지풀이나 독초인 투구꽃과도 비슷해서 잘 구별해야 한다는 흔하디흔한 쑥. 도다리쑥국이 맛있다는 벌써 봄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4-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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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오리무중
세상이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
통 모르고 살지만
무언가 쉼없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건
똑똑히 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문자가 오니까
이 정도만 알아도 사는 덴 지장이 없다
태어나고 또 죽어나가는
그 사이는, 원래
오리무중이니까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살다 죽었을까
가끔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쪽도 깜깜 오리무중이니까
문자란 게, 워낙 엄지 첫마디처럼
짤막하니까
시집 〈아픈 천국〉(2019) 중에서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의 방향이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이 와중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습니다. 누군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의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포함된 감정입니다. 뭔가 자꾸만 피폐해져 가는 개인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갖 소식을 짧고 간단하게 전해주는 스마트 폰. 예측할 수 없는 생과 사,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보내는 이 메시지는 세상이 아무리 오리무중이어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란 문구겠지요. 누군가의 삶에 대해 제대로 귀 기울여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하게 됩니다. 삶은 길다 하더라도 항상 짧은 것이며,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조용한 희망은 있다고 한 어느 싯구가 떠오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3-2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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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갑오징어와 을오징어
둘은 일관된 앙숙이었다. 둘이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제삼자가 나섰다. 제삼의 인물은 어느 편도 들 생각이 없었지만, 이쪽을 만나면 이쪽에서 저쪽을 만나면 저쪽에서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쪽은 이쪽대로 옳은 말이고 저쪽은 저쪽대로 사정이 있었으니 둘 다의 말을 종합하면 어느 쪽도 만족할 만한 말을 들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말이 너는 누구 편이냐? 둘 중 하나만 택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그는 일관되게 제삼자였다. 소주 한 병에 오징어 두 마리면 충분한 사람이었다.
시집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2018) 중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쓸 때마다 언제나 ‘을’이었던 나도 누군가에게 ‘갑’질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부터 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자들이 화해의 물꼬를 터주려는 자에게 어느 쪽인지 채근하는 것도 어쩌면 폭력 아닐런지요.
편 가르기, 그것만이 풀어야 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개개인의 의사나 능력이 반영되지 않는 갑과 을.
세상에 대한 태도나 삶에 대한 방향이 하나의 방법이나 태도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게 옳은지 아닌지 고민스러워집니다.
번번이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제삼자가 되기도 합니다. 가벼워 물에 뜨는 갑오징어의 패각으로 배를 만들어 놀았던 어릴 적 생각이나 합니다. 신정민 시인
2025-03-1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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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행복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2022) 중에서
행복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의 결과가 몹시 좋아서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우려면 얼마나 열심히 일해야 할까요. 그렇게 보람찬 하루가 계속된다면 또 얼마나 힘들까요. 그래서 어떨 땐 ‘가끔 쉬어가도 괜찮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행복이라는데 그 또한 녹록지 않은 정의입니다.
나만의 속도,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세상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말도 고민해 봅니다. 지금 내 삶에 만족하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3-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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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봄의 정치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
따뜻한 눈송이들
지난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단단히 감고 있던 꽃눈을
조금씩 떠보는 나무들의 눈시울
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
나의 딸들은
새 학기를 맞았다
-시집 〈봄의 정치〉(2919) 중에서
계절 중에서는 봄에만 ‘새’라는 접두사가 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없었던 봄이 새로운 봄이 오고 있습니다. 봄에 참여하는 생명들처럼 따듯해진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생각처럼 생각만으로도 나아진 세상이 펼쳐져 있길 기대해 봅니다. 시절을 견디고 있는 모든 것들이 새 학기를 맞는 딸들처럼 설레었음 좋겠습니다.
겨울보다 못한 봄이 올까봐 쓸데없는 걱정도 하게 되지만, 희망찬 앞날을 준비해 봅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있는 것들을 위해 꽃망울들처럼, 꽁꽁 언 땅을 밀어 올리는 어린 순들처럼 힘을 모아 봅니다. 긴 밤을 지나오는 새벽처럼 얼음 풀리는 봄을 기대해 봅니다.
생존을 위해 꽃부터 피우는 봄의 전략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계획이었다는 것, 매서운 겨울의 냉기를 거쳐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 생각해 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3-0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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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봄눈
걷다 보니 구포시장 국밥집이었다
백 년은 된 듯 허름했다
죽은 줄 알았던 김종삼(金宗三)씨가 국밥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얼굴이 말갰다
눈빛도 환했다
여전히 낡은 벙거지를 쓰고 있었다
설렁탕이며 해장국이며 깍두기를 딱딱 제자리에 갖다주었다
뜨건 국물을 가득 부어주었다
공손하였다
두 병째 소주를 시키자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왼쪽 벽을 가리켰다
‘소주는 각 1병’
삐뚤삐뚤 아이 글씨였다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2019) 중에서
언제나 말없이 점퍼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술집에 홀로 앉아 술을 즐겼다는 김종삼 시인은 후배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1950년대 시인입니다.
가난과 음악과 술을 친구 삼아 고독을 즐겼다는 괴짜 김종삼 시인에게 시인이란, 고생스럽지만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스럽고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렇다면 국밥집 아저씨도 재래 시장통에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도 시인 아니겠는지요.
시인은 시인을 알아보는 법이지요. 구포시장 어느 국밥집에 들어가 시인이 차려주는 공손한 밥 한 끼 먹고 싶어집니다. 어린이의 눈으로 순수 세계와 현대인의 절박한 세계를 함께 썼던 시인을 저도 만나고 싶습니다. 잘 살기 위해 잊고 있었던 마음, ‘공손’이란 마음을 되뇌어 봅니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있는 시인이 부럽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2-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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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봉래산 마고
홀로 되고서야 연필로 쓰던 집 주소가 생각난다
맨땅에 쪼그리고 앉아서야 기웃한 의자가 보인다
떠나고 나서야 구석구석 묵은 멍들이 선명해진다
갈 길을 잃고서야 낡은 수첩 속 빽빽한 약속들이 생각난다
이방인이 되어서야 봉래산 할매바위를 기억한다
풍경이 낯설어지자 익숙해지는 귀신들
돌아서는 모퉁이마다 수평선이 있었다 돌아 나오는 흰 여울
그물을 깁던 가난한 마고들, 어깨마다 햇미역 수북하다
오래된 슬픔을 걸치고 아직도 키가 자라는 영도 봉래산
기슭마다 물고기들 퍼덕인다 시퍼런 비탈이 그물을 친다
낡은 뉴스 덜컹대는 산복도로 마을버스 안
홀로 되고서야 잎눈 돋는 곳곳이 고향이었음을 안다
-시집 〈뿌리주의자〉(2021) 중에서
영도는 바다의 용왕과 봉래산의 마고할미를 섬기는 신화의 섬입니다.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마고(麻姑). 영도가 고향인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계를 바꾼다’는 뿌리 정신과 함께 최근 원도심에서 인문 정신을 나누어 온 〈백년어〉를 영도 신선동으로 옮기고 ‘신선시사(新仙詩社)’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새로운 신선들이 시를 읽으며 시대를 논하다”는 뜻이 담겨있답니다. 버려진 것이 새롭게 태어나고 잊힌 것이 다시 기억되는 읽고 쓰기, 그 비움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함이랍니다. 이동은 새로운 생성의 땅을 만들어가기 위한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 고향은 든든한 위로가 아닐는지요. 시를 통해 사고하고 실천하려는 이 움직임이 새로운 응시가 필요한 시대에 빛이 되어주길 바래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2-1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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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동래야류
마당 가득 달 떠올라
오색 홍등 불 밝히면
굴피나무 때죽나무 덩달아 독을 벗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놀음판에 내딛는 밤
문둥이, 양반, 할미, 악사들도 모두 나와
덧배기 굿거리로 어깻짓 흥겹다가
살별처럼 쏟아내는 말뚝이 한 소리에
눈물로 고여오는 달꽃 한 무더기
양반 아흔아홉 잡아묵고
네 하나 잡아 묵으면 등천한다
소리치던 비비새는
나 하나 잡아먹고 이제는 떠나가
동래야류 들놀음엔 빈 날개만 일렁일 뿐
보름 밤, 동래야류 들놀음판 찾아가면
수십만 잎사귀 악사석에 내려앉아
해금 젓대 바람을 켜고
그 음률 밟고 노는 탈 그림자 그곳에 있네
-시집 〈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2012) 중에서
오늘은 정월 대보름입니다. 동래야류는 정월 대보름에 부산 동래구에서 세시 민속놀이로 연행하는 들놀이입니다. 1967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고, ‘수영야류’에서 유래했지만 앞놀이와 뒷놀이 중에서 동래야류의 뒷놀이에 ‘문둥이춤’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지신밟기’로 집을 돌면서 야류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놀이꾼과 구경꾼이 함께 굿거리장단에 맞춰 덧배기춤을 추며 놀았는데 주로 동래시장 앞 네거리나 동래 금강공원 내 놀이마당에서 공연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줄다리기와 세병교 안락동 쪽에서 출발해 시장터까지 행진하는 길놀이도 볼만합니다. 마을의 풍요와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전통놀이가 상생의 의미가 절실한 우리나라의 평안으로 이어졌음 좋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2-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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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지게體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쥐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게체 아이가
숙부님 말로는 학교에 간 동생들을 기다리며
집안 살림 틈틈이 펜글씨 독본을 연습했다고 한다
글씨체를 물려주고 싶으셨던지 어린 손을 쥐고
자꾸만 삐뚤어지는 글씨에 가만히 호흡을 실어주던 손
손바닥의 못이 따끔거려서 일찌감치 악필을 선언하고 말았지만
일당벌이 지게를 지시던 당신처럼 나도
펜을 쥐고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 부리처럼 펜 끝을 콕콕거린다
비록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획을 함께 긋던 숨결이 들릴 것도 같다
이제는 지상에 없는 지게체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2020) 중에서
그리움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큰 힘이 아닐는지요. 늙고 병든 아버지의 등을 밀며 낙인처럼 찍혀있던 지게 자국을 보았다는 시인의 시 ‘아버지의 등을 밀며’가 생각납니다. 노동자로 살아왔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몸에는 그들만의 흔적이 정신과 육체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아름다운 것 하나쯤 물려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시인은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요. 시인은 늦깎이 대학생 시절에 야간 수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좋은 시집을 필사했는데요. 오른손 검지에 펜혹이 생길 때까지 필사를 했다고 합니다. 왜 시를 쓸까, 물을 때마다 좋은 시를 만나고 좋은 시인을 만났다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이 묻어있는 글씨체가 있을 겁니다. 흰 종이 위에 그리운 아버지의 이름을 적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2-04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