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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꽃에 대한 예의 / 이서린(1961~ )
저녁 해가 토해 놓은
바다에 핀 저,
꽃
출렁이며 흔들리는 붉은 덩이가
선창을 물들이다
닻 내리던 어부의
굽은 등을 물들인다
섬 모퉁이 물결 따라 사라지는 노을 꽃
장엄하게 피고 지는 생에 대한 예의로
부둣가를 서성이던 늙은 개가 조문하는
- 동인시집 〈하로동선 6집〉(2021) 중에서
바다 위에 노을이 펼쳐지면 하늘의 붉은 꽃처럼 보인다. 거대한 붉은 꽃잎의 색이 번져서 ‘선창을 물들’이고 ‘어부의 굽은 등을 물들인다’. 노을의 탄생은 맑은 날이면 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응시하는 시인의 눈길에 이르러 ‘장엄하게 피고 지는 생에 대한 예의’로 읽히기도 한다. 탄생과 죽음이 있기에 인간의 삶은 아름답다. 선창에서 일해 본 적이 있는데 새우는 죽어 등을 구부리고 선창 사람들은 죽어서야 등을 펴더라. 장엄한 것이 노을뿐이랴. 슬픔과 기쁨, 젊음과 노화를 다 겪으며, 유한한 인간의 생을 다 살아내는 이웃들의 모습도 때로 장엄해 보인다. ‘부둣가를 서성이던 늙은 개’만이 조문 온들 어떠랴. 성윤석 시인
2023-03-2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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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너머 / 임재정(1963~ )
(상략)
이것은 엄마가 잃어버린 샛길
환영 허수아비 영혼 도깨비 귀신보다 더 무서워 눈을 감는다
내겐 풍선이 들려있다
두려움도 없이 좀비처럼 풍선 안을 날뛰는, 터질 준비를
끝마친 미래
얼룩진 낮은 쉽게 세탁할 수 없는 밤이 될 것이다
비눗방울이 떠다니는 꿈에
눈꺼풀 속 한곳만 환해질까 봐 다시 눈을 뜬다
감지도 뜨지도 않은 중간이란 없어서
오늘을 끝내려고 시계를 만든 사람을 떠올렸다
- 시집 〈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2023) 중에서
전기공이기도 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이 시를 읽다가 문득 시의 마지막 문장 ‘시계를 만든 사람을 떠올렸다’에 시선이 멈췄다. 시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찾아보니, 인류사에 최초의 시계는 기원전 약 2000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해시계가 최초의 시계로 기록되어 있다. 그 뒤 별시계, 물시계, 모래시계 등이 고안되어 쓰였다. 중세 이후엔 독일의 헨라인(1485-1542)이라는 기술자가 태엽을 이용한 회중시계가 처음이다. ‘오늘을 끝내려고’ 시인이 최초의 시계를 생각하듯, 충일한 노동이 끝난 하루의 너머를 필자도 생각해봤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자의 너머에 비로소 기쁜 내일이 당도할 것이다. 성윤석 시인
2023-03-2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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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못의 대화/김예강(1961~ )
(상략)
그 길에 들자 내가 달려온 속도를 잃고
나는 멈춰 섰지요
사각의 액자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길에 밀착해서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다음의 생인지도 모르겠어요
햇살 속에서 내가 벗어놓은 옷들은
깃털처럼 날렸어요 누가 나눠 가진 걸까요
손가락 끝은 늘 간지럽습니다
숲을 찢고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
주먹 쥔 손을 펴봅니다 하얀 목련이 주먹을 쥐고 서있다니요
- 시집 〈가설정원〉(2023) 중에서
삼월도 중순. 봄 길을 걷다보면 하얀 목련들이 펑, 펑 터진 채 있다. 목련은 북쪽을 향해 핀다. 사대부들이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핀다 해서 충성스런 꽃이라 불렀다지만, 글쎄다. 많은 목련들이 북쪽 가지가 더 발달하고 꽃송이도 더 달린다고는 한다. 시인은 봄을 맞아 ‘손가락 끝’이 ‘간지럽다’. 시인은 ‘주먹 쥔 손을 펴’ 본다. 그때 눈앞에 선 하얀 목련. ‘주먹을 쥔 채 서’ 있다. 아름다운 대비다. 시를 읽고 사무실 창밖의 목련을 바라보니, 정말 목련이 흰 주먹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흰 주먹들마다 걸어가서 손바닥을 펴고 나는 보! 하고 외치고 싶다. 성윤석 시인
2023-03-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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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볕 / 육근상(1963~ )
품속 같다 무엇이든 끌어안고 있으면 한 생명 얻을 수 있겠다
겨우내 버려두었던 텃밭도 품속 따뜻했는지 연두가 기지개다 뾰족한 입술 가진 호미도 혓바닥 넓은 꽃삽도 품속 그리웠는지 입술 묻고 뗄 줄 모른다 나를 품었던 엄니도 이제 돌아가려는지 양지 녘 볕을 있는 힘껏 끌어모으신다
품속 내려놓은 어미 닭이 병아리들 꽁무니 매달고 의젓하게 마당 맴돌고 있다
- 시집 〈여우〉(2021) 중에서
꽃샘추위가 한 차례 왔다 갔지만, 산수유와 매화와 개나리가 피고 봄볕은 다시 따사롭다. 봄볕은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다. 시인은 이 봄볕을 ‘품속’으로 치환한다. 시인 백석과 이용악의 시풍을 새롭게 개선하고, 토속적인 언어로 시의 참맛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시인의 이 시도 시골의 마당 봄 풍경을 정겹게 펼쳐놓고 있다. 다시 삼월이다. 시인의 문장처럼 ‘무엇이든 끌어안고 있으면 한 생명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삼월이다. 우리 사회도 약자를 끌어안아 다시 강하게 해주고 그들이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모두가 돕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윤석 시인
2023-03-0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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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봄눈 뿜어내다 / 이주언(1963~ )
한밤중
나무의 맨살에 눈 내린다
청동방울 흔들며 뿜어내는 냉수 한 사발
열려라, 꽃문 열려라
하얀 주문을 왼다
그 소리에 잠 깨어 뒤척이는 사람들
한산춤 북소리로 어지러이 출렁인다
먼 강엔 엉덩이 치켜들고
자맥질하던 달빛,
하-얀
고요의 소란에 갇혔다
- 시집 〈꽃잎고래〉(2012) 중에서
3월에 내리는 봄눈을 본 적이 꽤 오래된 기억으로 남았지만, 봄눈은 매화 꽃잎 위에도 내려 그 운치를 더한다. 언젠가 시인은 봄눈을 만났나 보다. 봄눈 속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열려라, 꽃 문 열려라’는 주문을 걸어본다. ‘먼 강엔 엉덩이 치켜들고 자맥질하던 달빛’은 시인이 보기에 하얀 달 그늘을 지상에 펼치고, 봄을 맞는 사람들은 봄밤의 마술인 ‘고요의 소란’에 갇힌다. 춘래불사춘, 봄이 왔지만 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끝나지 않는 세계의 전쟁과 아직 벗기에는 두려운 마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불경기는 또 어떤가. 모두가 이겨내서 환한 꽃들 사이에서 만나기를. 성윤석 시인
2023-02-2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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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공중부양사/김요아킴(1969~ )
토요일, 제법 푹신한 침대는
지난 주 노동의 보상으로
달콤하다 못해 살짝 볼륨을 높인
브라운관의 환청 속으로
무언가 검은 물체가
아파트 베란다의 창문으로
한 가정의 웃음이 모두 추락한
아침햇살에 찡그린 망막으로
바람에 실려 흔들리는 생의 밧줄
절대 끊겨서는 안 될 마음으로
소스라치듯, 자는 아이들을 챙겨보며
공중에서 부양하는 그 몸짓으로
오늘 하루를 기어이 살아내야 할
- 시집 〈공중부양사〉(2020) 중에서
주말을 맞은 가장은 한 주 동안의 보상으로 푹신한 침대를 가진다. TV를 틀고 모처럼 휴식을 취하려는데 ‘검은 물체가’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추락하는 것 같다. 가장의 불안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소스라치듯, 자는 아이들을 챙겨보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난방비와 전기료 폭탄을 맞은 요즈음에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다. 불안은 불면으로 이어져 주말에도 편하지 않다는 게 많은 가장들의 일관된 하소연이다. 매달 청구되는 비용은 많고 월급은 동결되고 앉은 자리는 언제 치워질지 모른다. 가장들은 그래서, 어깨가 늘 무겁다. 공중부양보다 가족부양이 더 어렵다는 말이, 선술집에서 흘러나온다. 성윤석 시인
2023-02-2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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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연두 / 박은형(1966~ )
주남지 왕버들이 연두를 시동 겁니다
넌짓한 마음을 단숨에 뜯어내는 승냥이 떼 같습니다
늦으면 늦은 대로 연두를 따라붙으려
두툼하게 녹이 난 슬픔이나
생애 첫 연서의 무용한 형식에 대해 고심합니다
일몰의 긴 회랑이라면 눈부신 졸음
폐역의 늦은 당신이라면 단팥죽 한 그릇
빈 식탁이라면 먼지를 보여주는 흑백 한 문장
(중략)
전승된다면 사랑
죽음이라면 끄덕끄덕 자장가까지
저수지 너른 고독에 찔려 신접의 병상처럼 에는 것
내 마음을 따라잡는 연두였다고 중얼거립니다
- 시집 〈흑백 한 문장〉(2020) 중에서
물과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가 왕버들이다. 바야흐로 이 왕버들에도 다시 연두가 찾아오는 시기이다. 시인은 ‘연두를 시동 겁니다’라고 표현했다. 그 연두는 시인의 문장 ‘생애 첫 연서의 무용한 형식’처럼 보인다. 언제든 자연에는 선과 악이 따로 없고 고결함과 하찮음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일몰의 긴 회랑이라면 눈부신 졸음’ 같은 넓은 고독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자연의 여왕 왕버들은 물가에서 그 존재의 가치를 더한다. 아스피린 원료로도 쓰고 나무젓가락도 만든다. 좋은 시 한 편을 읽었으니, 창가를 열어 연두를 찾아보자. 우리들 마음을 따라잡는 연두들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성윤석 시인
2023-02-1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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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부석사 봄밤 / 고두현(1963~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가만히 손대고 눈 감다가
일천이백 년 전 석등이
저 혼자 타오르는 모습
보았습니다.
하필 여기까지 와서
실낱같은 빛 한 줄기
약간 비켜 선 채
제 몸 사르는 것이
그토록 오래 불씨 보듬고
바위 속 비추던 석등
잎 다 떨구고 대궁만 남은
당신의 자세였다니요.
-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낸 편지〉(2017) 중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부석사에서 바라본 노을은 잊을 수 없다. 시인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가만히 손대고 서서 눈을 감는다. ‘일천이백 년 전 석등이 저 혼자 타오르는 모습’이 천년의 시공을 건너와 노을로 번졌을까. 시인의 전언대로 ‘하필 여기까지 와서’ 우리는 또 영원할 것 같은 오늘을 살아가지만, ‘그토록 오래 불씨 보듬고 바위 속 비추던 석등’도 꺼지듯이 인생은 유한해서 아름다운 것이다. 2월 들어 남녘엔 벌써 매화 꽃망울 소식이 들린다. 봄이 오고 있다. 지난겨울 ‘잎 다 떨구고 대궁만 남은 당신의 자세’에도 봄이 오고 봄밤도 올 것이다. 봄 맞으러 가자.
성윤석 시인
2023-02-0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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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심야 택시 / 이영옥(1960~)
구겨진 불빛이 굴러다니는
시간에 우리는 택시를 탔어요
한번 진입한 바닥을 빠져나갈 수 없다 해도
이 깊은 밤에 할증료를 물고라도 여길 지나치고 싶었어요
알 수 없는 운명에 걸려든 걸 알았지만
누구의 꿈을 지나가는지
창문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덜컹거렸어요
도로는 텅 비어 있었고
우리는 허공에 전속력으로 멈춰 있는 사람이 되었지요
거침없는 밤을 믿으며
모든 심야택시는 오늘도 계속 달리고 있어요
- 시집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2022) 중에서
심야택시를 타고 시 경계를 넘나들던 때가 있었다. ‘구겨진 불빛이 굴러다니는 시간’들이었다. 꿈이었는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쫓아다니던 때였다. ‘우리는 허공에 전속력으로 멈춰 있는 사람’이란 구절에서 그때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 누구나 그런 시절을 건너가지 않았던가. ‘거침없는 밤’을 믿으며 거침없는 밤을 달려 나가는 시민들의 도시에서 우리는 또 ‘누구의 꿈을 지나가는지’ 모를 길을 달린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이 텅 빈 도로처럼 다시 막막한 땅일지라도 인간의 영혼은 충만해지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밀도가 생길 것이다. 인생이 다 그렇지, 라는 말은 인생이 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안고 있다. 성윤석 시인
2023-01-3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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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매혹을 숨기다/이정모(1949~)
의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건
먼저 떠난 자 뿐인 줄 알았다
별에 영혼을 숨긴들
앉지 못하는 자가 그렇게 묵고 싶었던
속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마음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살내가
삶의 깊이로 내리는 그 겨를에는
같이 놀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얼굴을 만질 수도 초월로 가둘 수도 없는 찰나
빛나기에 더욱 그립고 서러운 한순간은
왜 화들짝 놀라서 떠나기만 하는가
마음이 가까우면 닿는 곳마다 창문인데
누가 앉을 자리를 들인다는 말
미래를 위해 필요한 말이지만
언제나 지금 하는 것인 줄 몰랐다
-시집 〈허공의 신발〉(2018) 중에서
재능이 뛰어난 어린 친구들을 보면, 그 재능을 너무 일찍 세상에 드러내지 마라, 고 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결국 진 토끼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유명해졌다가 사라져버린 소년 천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가진 게 열이라면 세 개만 내보이고 사는 사람이 있고 열을, 스무 개를 가진 양 아등바등하는 사람이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매혹조차 숨기고 있다. 시인은 ‘빛나기에 더욱 그립고 서러운 한순간’도 ‘놀라서 떠나기만 하는가’ 라는 부재를 노래하면서 ‘마음이 가까우면 닿는 곳마다 창문’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슬쩍 던진다. 매혹을 숨긴 자, 의자 또한 필요하지 않다. 성윤석 시인
2023-01-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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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동백 / 강은교(1945~ )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 시·산문집 〈꽃을 끌고〉(2022) 중에서
동백이 피는 계절이 오고 있다. 동백은 나무에서 피고 떨어져 땅에서도 피고 사람의 마음에서도 피는 꽃이라 하지 않던가. 어느 해 이른 봄밤 청사포에서 해운대까지 걸어오며 길가에 무리 지어 핀 동백을 만났을 때의 감흥은 내내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붉고 선연한 동백꽃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는 동백을 만났나 보다. 떨어질 때도 모가지 채 툭 부러지는 동백을 보면 아, 이 꽃은 지는 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부서지는 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시인의 전언대로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올해도 동백을 보러 가야겠다. 성윤석 시인
2023-01-1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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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졸시/김도언(1972~ )
이름 없는 시인이
허름한 왼손으로
횟배를 앓는
늙은 개의 고독을 묘사하는 동안
아무도 행복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음을 알리던
우체부는 은퇴를 하고
노인들은 천식약을 사기 위해
약국 앞에 긴 줄을 서고
부자의 어린 아들은
중세 영어를 배우고
꽃비는 그래도 쏟아지는데
어쩌자고 당신은 아름다워서
가난한 노동자는 설탕과 소금을 먹고
오늘 하루는 자전거 바퀴처럼 서럽고
이 세계는 폭설에 에워싸인
복숭아밭처럼 외로워졌구나.
-시집 〈가능한 토마토와 불가능한 토요일〉(2022) 중에서
행을 나눴지만 한 문장으로 이뤄진 시다. 시는 한 문장이라는, 그 한 문장에서 세계가 시작되고 끝난다는 이 세계, 시의 스승들이 남겨놓은 유언 같은 시다. 시인은 이 시시한 문학판 안에서 국외자를 자처하며 소외와 고독을 즐긴다. 시인이 시를 쓰는 동안 당신은 어쩌자고 자꾸 아름답고 가난한 노동자는 설탕과 소금을 먹는다. 노인과 부자의 어린 아들과 시인의 하루가 유화 같은 한 컷으로 시에 스며들 때 이 세계는 문득 폭설에 에워싸인 복숭아밭처럼 외로워진다. 시가 위대한 건 늘 쓸모없어 보이지만, 어느덧 언어의 제왕 자리에 올려 지기 때문이다. 특허도 내지 않고 언어를 발명하는 자, 그가 시인이다. 성윤석 시인
2023-01-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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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공수 해변
밤이 목도리처럼 길다
해변이 가지고 노는 것들
달 모래 파도
압축된 해변의 서정이 길다
늦도록 고요를 꿰매는 손 그물 같다
해변으로 떠밀려 온 것들이 혈육처럼 엉켜 있다
밤의 잔물결이 해변을 간지럽힌다
해변의 몸이
한 마리 생선처럼 예민하다
*공수 해변-부산의 지명
-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2021) 중에서
시인의 전언대로 해변의 밤은 목도리처럼 길고 압축된 해변의 서정도 길다. 기장 해안에 있는 공수해변을 오래전에 가본 듯하다. ‘늦도록 고요를 꿰매는 손 그물’ 같은 먹먹한 밤이 오면 인생도 사랑도 다 옳은 일 같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다 마땅한 일 같다. 시인의 서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해변의 몸이 한 말 생선처럼 예민’해 질 때 바다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엔딩 장면처럼 거칠게 뒤척일 것이다.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시다.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을 읽고 나니, 새해의 추운 밤도 파도처럼 거칠게 오지만 결국엔 목도리를 풀어 버리듯 순해질 것만 같다. 성윤석 시인
2023-01-0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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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결국 알은 깨지는 것
진통이 막 시작된 산모처럼 바다가 복부를 움켜쥐고 심하게 몸을 비튼다 그리고 핏덩이의 알을 낳는다 바다 위를 굴러다니는 저 알이 위태위태해 보인다
(중략)
발가락이 힘차게 뻗어나간다 몇 평의 영토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오토바이를 배달시킨 짜장면이 두 채의 아파트를 맛있게 비벼 먹는다
바다는 날마다 알을 하나씩 낳는다 산적 같은 태풍이 불어오고 나는 알을 잡으려 바다에 몸을 던진다 성적 비관으로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진 어린 꽃잎처럼
그 순간에도 깨진 알에서 나온 것들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 웹진 〈같이 가는 기분〉(2022 겨울호) 중에서
26년 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필명으로 당선되었다가 사라진 시인의 신작 시를 마주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시인의 시 제목처럼 ‘결국 알은 깨지는 것’. 긴 생애의 한 자락에서 문득 시인은 다시 알이 깨지는 듯한 자신의 시심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아마 아침 바다에서 알(해)을 낳는 바다를 목도했을 듯싶다. 아침 해가 떠오른 바닷가 동네에 ‘오토바이를 배달시킨 짜장면이 두 채의 아파트를 맛있게 비벼 먹는’ 풍경의 한 컷을 펼쳐놓고 투신의 슬픔 속에서도 무심히 깨진 알(해)에서 나온 것들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본다. 분명하게 보려는 것이 시다. 성윤석 시인
2022-12-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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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하늘을 본다는 것/김현미(1970~)
저기에 무엇이 숨겨 있나 보려고
하늘을 훔쳐보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 건져 보겠다고 하늘 비친 강물에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없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을 때
그럼에도 우리들의 눈물이
아직도 뜨겁다는 것이 불가사의 해질 때
지우고 싶은 말 단 한 마디도 없는 하늘을 본다
쓰고 싶은 말 한 마디 못 새기는 하늘을 본다
(하략)
- 시집 〈호수에 조약돌 하나 던졌다 나 여기 있노라고〉 (2021) 중에서
낯선 언어의 밀도로 구성된 시가 있는가 하면, 물처럼 흐르는 언어의 시가 있을 것이다. 이 시는 흐르는 시다. 화려한 수사도 없고 시적 기술도 없다. 자연스럽게 하늘을 쳐다보게 하는 시다. 시인이 보고 있는 하늘엔 ‘하늘 비친 강물에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없고 ‘지우고 싶은 단 한마디’의 말조차 없다. 능연필연(能然必然), 능히 그러하고 반드시 그러한 우주의 덕목을 보이고 있는 하늘이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자. 추운 겨울의 하늘은 쨍! 하는 견고한 정신의 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시인의 시어처럼 우리들의 눈물은 아직 뜨겁고 그 눈물은 언제나 불가사의한 것이다. 성윤석 시인
2022-12-20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