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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심야 택시 / 이영옥(1960~)
구겨진 불빛이 굴러다니는
시간에 우리는 택시를 탔어요
한번 진입한 바닥을 빠져나갈 수 없다 해도
이 깊은 밤에 할증료를 물고라도 여길 지나치고 싶었어요
알 수 없는 운명에 걸려든 걸 알았지만
누구의 꿈을 지나가는지
창문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덜컹거렸어요
도로는 텅 비어 있었고
우리는 허공에 전속력으로 멈춰 있는 사람이 되었지요
거침없는 밤을 믿으며
모든 심야택시는 오늘도 계속 달리고 있어요
- 시집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2022) 중에서
심야택시를 타고 시 경계를 넘나들던 때가 있었다. ‘구겨진 불빛이 굴러다니는 시간’들이었다. 꿈이었는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쫓아다니던 때였다. ‘우리는 허공에 전속력으로 멈춰 있는 사람’이란 구절에서 그때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 누구나 그런 시절을 건너가지 않았던가. ‘거침없는 밤’을 믿으며 거침없는 밤을 달려 나가는 시민들의 도시에서 우리는 또 ‘누구의 꿈을 지나가는지’ 모를 길을 달린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이 텅 빈 도로처럼 다시 막막한 땅일지라도 인간의 영혼은 충만해지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밀도가 생길 것이다. 인생이 다 그렇지, 라는 말은 인생이 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안고 있다. 성윤석 시인
2023-01-3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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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매혹을 숨기다/이정모(1949~)
의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건
먼저 떠난 자 뿐인 줄 알았다
별에 영혼을 숨긴들
앉지 못하는 자가 그렇게 묵고 싶었던
속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마음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살내가
삶의 깊이로 내리는 그 겨를에는
같이 놀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얼굴을 만질 수도 초월로 가둘 수도 없는 찰나
빛나기에 더욱 그립고 서러운 한순간은
왜 화들짝 놀라서 떠나기만 하는가
마음이 가까우면 닿는 곳마다 창문인데
누가 앉을 자리를 들인다는 말
미래를 위해 필요한 말이지만
언제나 지금 하는 것인 줄 몰랐다
-시집 〈허공의 신발〉(2018) 중에서
재능이 뛰어난 어린 친구들을 보면, 그 재능을 너무 일찍 세상에 드러내지 마라, 고 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결국 진 토끼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유명해졌다가 사라져버린 소년 천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가진 게 열이라면 세 개만 내보이고 사는 사람이 있고 열을, 스무 개를 가진 양 아등바등하는 사람이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매혹조차 숨기고 있다. 시인은 ‘빛나기에 더욱 그립고 서러운 한순간’도 ‘놀라서 떠나기만 하는가’ 라는 부재를 노래하면서 ‘마음이 가까우면 닿는 곳마다 창문’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슬쩍 던진다. 매혹을 숨긴 자, 의자 또한 필요하지 않다. 성윤석 시인
2023-01-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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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동백 / 강은교(1945~ )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 시·산문집 〈꽃을 끌고〉(2022) 중에서
동백이 피는 계절이 오고 있다. 동백은 나무에서 피고 떨어져 땅에서도 피고 사람의 마음에서도 피는 꽃이라 하지 않던가. 어느 해 이른 봄밤 청사포에서 해운대까지 걸어오며 길가에 무리 지어 핀 동백을 만났을 때의 감흥은 내내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붉고 선연한 동백꽃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는 동백을 만났나 보다. 떨어질 때도 모가지 채 툭 부러지는 동백을 보면 아, 이 꽃은 지는 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부서지는 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시인의 전언대로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올해도 동백을 보러 가야겠다. 성윤석 시인
2023-01-1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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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졸시/김도언(1972~ )
이름 없는 시인이
허름한 왼손으로
횟배를 앓는
늙은 개의 고독을 묘사하는 동안
아무도 행복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음을 알리던
우체부는 은퇴를 하고
노인들은 천식약을 사기 위해
약국 앞에 긴 줄을 서고
부자의 어린 아들은
중세 영어를 배우고
꽃비는 그래도 쏟아지는데
어쩌자고 당신은 아름다워서
가난한 노동자는 설탕과 소금을 먹고
오늘 하루는 자전거 바퀴처럼 서럽고
이 세계는 폭설에 에워싸인
복숭아밭처럼 외로워졌구나.
-시집 〈가능한 토마토와 불가능한 토요일〉(2022) 중에서
행을 나눴지만 한 문장으로 이뤄진 시다. 시는 한 문장이라는, 그 한 문장에서 세계가 시작되고 끝난다는 이 세계, 시의 스승들이 남겨놓은 유언 같은 시다. 시인은 이 시시한 문학판 안에서 국외자를 자처하며 소외와 고독을 즐긴다. 시인이 시를 쓰는 동안 당신은 어쩌자고 자꾸 아름답고 가난한 노동자는 설탕과 소금을 먹는다. 노인과 부자의 어린 아들과 시인의 하루가 유화 같은 한 컷으로 시에 스며들 때 이 세계는 문득 폭설에 에워싸인 복숭아밭처럼 외로워진다. 시가 위대한 건 늘 쓸모없어 보이지만, 어느덧 언어의 제왕 자리에 올려 지기 때문이다. 특허도 내지 않고 언어를 발명하는 자, 그가 시인이다. 성윤석 시인
2023-01-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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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공수 해변
밤이 목도리처럼 길다
해변이 가지고 노는 것들
달 모래 파도
압축된 해변의 서정이 길다
늦도록 고요를 꿰매는 손 그물 같다
해변으로 떠밀려 온 것들이 혈육처럼 엉켜 있다
밤의 잔물결이 해변을 간지럽힌다
해변의 몸이
한 마리 생선처럼 예민하다
*공수 해변-부산의 지명
-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2021) 중에서
시인의 전언대로 해변의 밤은 목도리처럼 길고 압축된 해변의 서정도 길다. 기장 해안에 있는 공수해변을 오래전에 가본 듯하다. ‘늦도록 고요를 꿰매는 손 그물’ 같은 먹먹한 밤이 오면 인생도 사랑도 다 옳은 일 같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다 마땅한 일 같다. 시인의 서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해변의 몸이 한 말 생선처럼 예민’해 질 때 바다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엔딩 장면처럼 거칠게 뒤척일 것이다.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시다.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을 읽고 나니, 새해의 추운 밤도 파도처럼 거칠게 오지만 결국엔 목도리를 풀어 버리듯 순해질 것만 같다. 성윤석 시인
2023-01-0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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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결국 알은 깨지는 것
진통이 막 시작된 산모처럼 바다가 복부를 움켜쥐고 심하게 몸을 비튼다 그리고 핏덩이의 알을 낳는다 바다 위를 굴러다니는 저 알이 위태위태해 보인다
(중략)
발가락이 힘차게 뻗어나간다 몇 평의 영토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오토바이를 배달시킨 짜장면이 두 채의 아파트를 맛있게 비벼 먹는다
바다는 날마다 알을 하나씩 낳는다 산적 같은 태풍이 불어오고 나는 알을 잡으려 바다에 몸을 던진다 성적 비관으로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진 어린 꽃잎처럼
그 순간에도 깨진 알에서 나온 것들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 웹진 〈같이 가는 기분〉(2022 겨울호) 중에서
26년 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필명으로 당선되었다가 사라진 시인의 신작 시를 마주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시인의 시 제목처럼 ‘결국 알은 깨지는 것’. 긴 생애의 한 자락에서 문득 시인은 다시 알이 깨지는 듯한 자신의 시심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아마 아침 바다에서 알(해)을 낳는 바다를 목도했을 듯싶다. 아침 해가 떠오른 바닷가 동네에 ‘오토바이를 배달시킨 짜장면이 두 채의 아파트를 맛있게 비벼 먹는’ 풍경의 한 컷을 펼쳐놓고 투신의 슬픔 속에서도 무심히 깨진 알(해)에서 나온 것들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본다. 분명하게 보려는 것이 시다. 성윤석 시인
2022-12-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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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하늘을 본다는 것/김현미(1970~)
저기에 무엇이 숨겨 있나 보려고
하늘을 훔쳐보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 건져 보겠다고 하늘 비친 강물에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없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을 때
그럼에도 우리들의 눈물이
아직도 뜨겁다는 것이 불가사의 해질 때
지우고 싶은 말 단 한 마디도 없는 하늘을 본다
쓰고 싶은 말 한 마디 못 새기는 하늘을 본다
(하략)
- 시집 〈호수에 조약돌 하나 던졌다 나 여기 있노라고〉 (2021) 중에서
낯선 언어의 밀도로 구성된 시가 있는가 하면, 물처럼 흐르는 언어의 시가 있을 것이다. 이 시는 흐르는 시다. 화려한 수사도 없고 시적 기술도 없다. 자연스럽게 하늘을 쳐다보게 하는 시다. 시인이 보고 있는 하늘엔 ‘하늘 비친 강물에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없고 ‘지우고 싶은 단 한마디’의 말조차 없다. 능연필연(能然必然), 능히 그러하고 반드시 그러한 우주의 덕목을 보이고 있는 하늘이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자. 추운 겨울의 하늘은 쨍! 하는 견고한 정신의 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시인의 시어처럼 우리들의 눈물은 아직 뜨겁고 그 눈물은 언제나 불가사의한 것이다. 성윤석 시인
2022-12-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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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비틀대는 춤 / 황용순(1975~)
춤추는 물푸레나무 아래서 물들어 같이 춤출 무렵
당신은 결국 휘어지다 못해 꺾였습니다
한쪽으로 꺾인 당신 쪽으로 가 닿고 싶지만
나의 춤도 한 방향으로만 흔들댑니다
보이지 않아 당신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 시집 〈어글리 플라워〉(2022) 중에서
시인이 추는 춤은 ‘한 방향으로만’ 흔들대는 춤이지만 그 춤은 마치 눈을 가리고 홀로 추는 춤 같다. ‘춤추는 물푸레나무 아래서’ 물들었는데, 결국 물든 것은 물푸레나무일까. 물푸레나무가 추는 춤일까. 같이 춤을 추고 있는 당신, 이라는 대상도 춤을 추지만 꺾여버리고 가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모두가 춤을 추면서 살아가지만, 대화도 연대도 이젠 쉽지 않은 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분명하게 파악해 보려는 시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보이지 않아 당신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는 방향’처럼 자신이 추는 춤의 방향과 당신이 추는 춤의 방향, 당신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는 방향을 발명해냈다. 성윤석 시인
2022-12-1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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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아무도 기적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삽을 들고 목련나무 아래 서 있었다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사라진 마음은
유언일까 선언일까
푸른 돌멩이를 오래 쥐고 있으면
오래전 누군가 내 무덤 위를 막 지나간 것처럼
바닥은 조금 더 깊어졌고
밖에 누구 없나요
방 안에는 하루 종일 불이 켜져 있었다
- 시집 〈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2022) 중에서
한 사람이 삽을 들고 목련나무 아래 서 있다. 바닥을 조금 더 깊게 파려나 보다. 방 안에는 하루 종일 불이 켜져 있고 시인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사라진 마음을 생각한다. 혼자 있는 고요한 풍경 한 컷에다 시인은 ‘아무도 기적을 말하지 않았다’는 제목을 붙인다. 이 언술은 바깥의 상황이고 시인은 안에 있다. 필자도 한때 기적은 누워있는 게 틀림없어서, 일어나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기적은 어디에서 일어날까. 시인의 바깥 세계에선 아무도 기적을 말하지 않으니, 어쩌면 사람들은 기적을 말하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뒤늦게 알아차리는 어떤 기척 같은 것으로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성윤석 시인
2022-12-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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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램프 / 송승언(1986~ )
우리들의 마음속에 잿더미가 쌓여 있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생각을 헤쳐 나간다. 램프를 들고. 흔들리는 램프 안에 불이 흔들린다. 이것이 너의 표정이다. 너의 표정은 죽어 가는 사람의 숨결처럼 아득하게 퍼져 나간다. 램프를 들고 복도의 잿더미를 헤쳐 나가면 잿더미의 복도에서 램프를 들고 다가오는 사람. 그는 나에게 비어 있는 한손을 내민다. 악수할 수 없는 손을.
- 시집 〈사랑과 교육〉(2019) 중에서
램프는 BC 7만 년경 구석기 시대에 이미 나타났다고 한다. 당시에는 돌에 홈을 파고 동물기름으로 적신 이끼 같은 것에 점화하는 방식이었는데, 알래스카의 소수 부족과 에스키모족들의 램프에는 지금도 고대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시인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잿더미가 쌓여있다’라고 진술한 뒤 이 잿더미의 복도에서 램프를 들고 오는 사람을 만난다. 램프를 든 사람은 빛과 희망을 보여주는 사람이지만, 그는 곧 악수할 수 없는 손을 내민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극을 램프를 통해 보여주는 시다. 언제쯤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잿더미를 걷어내고 악수할 수 있는 손을 만날 수 있을까.
성윤석 시인
2022-11-2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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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아웃복싱/서연우(1968~ )
(상략)
2
화요일 아침 잠만 자던 그가 전화로 소리쳤다
젖 먹던 힘이 어떻게 와이드 오픈되는지
언제나 챔피언인 줄 알았다 그는
내가 그의 챔피언이 되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3
왼쪽 다리 없는 남자와 오른쪽 다리 없는 여자가 결혼식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시여
저것은 훅일까요 스트레이트일까요
- 월간 〈현대시〉(2020년 12월호) 중에서
아웃복싱은 인파이터들에겐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링을 넓게, 팔은 길게 쓰는 아웃복서들에겐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다. 또한 복싱 경기의 동선을 아름답게 하는 측면도 있다. 우리 사는 일상도 아웃복싱처럼 치고 빠지는 그림들이 아닌가.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함에는 나설 때 나서고 물러날 때 물러남이 있었다. 시인은 언제나 나의 챔피언인 줄 알았던 그가 아프자, 이젠 자기가 그의 챔피언이 되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 ‘왼쪽 다리 없는 남자와 오른쪽 다리 없는 여자가 결혼식을’ 하듯, 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한 방 먹일 수 있는 길은 서로의 아픔을 도와주는 것. 그것은 훅이자 곧 스트레이트일 것이다. 성윤석 시인
2022-11-2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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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테슬라/정여민(1985~ )
영토를 꿈꿨다. 끊임없이
존재하는 시간과 관계했다. 불순
은 차가운 기우였다. 그 막다른 일기에
수순이었다. 놓인 마
분지 위에 백묵, 같은 것
구멍의 소강이 된다. 책상에서의
허공에 불과했다. 드디어 차원에
서의 달력 한 장이 뜯겨 나온다. 십
일장(P) 남은 영혼은 사라진 채
육체와 무언가를 바라보는 무의미한 눈(雪)
답답한 징계위원회장의 고통을 바라
보다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쌓인
곁가지들과 소통할 수 없는 연기를 꺼내지만
불을 붙일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이 적막한 촌(村)은 거꾸로 세운 손가락을
끊임없이 세워낸다. 그때의 망설임은
흔적이 없다.
- 웹진 〈시인광장〉(2019년 8월호) 중에서
테슬라는 세르비아계 미국인 전기공학자. 에디슨이 전기의 직류 쪽이었다면 테슬라는 교류 쪽으로 알고 있다. 전기 발명의 근원을 제시한 탁월한 과학자. 지금은 일론 머스크의전기차 회사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젊은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며, 전기가 주위에 흐르는 듯 한 인상을 받았다. 시인은 전에 보지 못한 세계와 시어를 가진 개성적인 시 한 편을 선보였는데, 관념적인 세계를 관념적인 언어로 철저하게 파악하려는 시도가 신선하다. 이런 시도는 위험하지만, 유의미한 세계를 획득하는데, 연속적으로 성공한다면 그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다. 자신만의 언어 영토를 가져 보는 게 모든 시인들의 꿈 아니던가.
성윤석 시인
2022-11-1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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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i에게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중략)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지난겨울 내가 내다버린 나무에서 연둣빛 잎이 나고 연분홍 꽃이 피고 있는데 마음에 들 수밖에. 지난겨울 내가 만난 젊은이가, 아니 돌멩이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돌멩이가 되었다. 우는 돌멩이 옆에 웃는 돌멩이 이거나 외치는 돌멩이 옆에 미친 돌멩이 같은. 그는 어떨 땐 울면서 외치면서 노래를 한다! 나는 눈을 감고 허밍을 넣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 시집 〈i에게〉(2018) 중에서
도처에 울음과 어이없는 죽음이 생긴다. 사회가 오징어 게임 세트장 같다. 구멍이 숭숭 뚫린 사회는 허술하고 그 사회 속의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시인은 ‘밥만 먹어도 내가 모질게 느껴진다’라고 고백한다. 결국 곁의 사람은 돌멩이가 되었다. 커다란 슬픔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에 빠진다. 돌멩이가 된 곁의 사람은 ‘그는 어떨 땐 울면서 외치면서 노래를 한다!’ 곁의 사람이 울 땐 그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밖엔 없는 줄 알았다. 시인은 여기에서 펄쩍 뛰어 오른다. 시인은 ‘나는 눈을 감고 허밍을 넣지’라는 놀라운 시적 세계를 들려준다. 그 뜀은 도약이고 시어가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미학이다. 성윤석 시인
2022-11-0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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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애면글면
건너 바다는 치사량의 색을 벼리는 중 물결은 어떻게 붉은 색에서 코발트까지 넘실거리는 파문을 가시광선의 서랍 속에 쟁이었던가 자신이 왜 아름다운지 생각하는 래터럴 라인*이 뭉클해지면, 하늘은 바다의 며칠, 햇빛과 바다가 뒤바뀌면서 상형문자에 가까운 백열등 점등이 빨라지니까 바다는 열 마리의 들쇠고래 백 마리의 들쇠고래 천 마리의 들쇄고래의 지느러미와 합쳤기에 파도는 한 마리 들쇠고래의 뼈이면서 또한 불빛과 종소리가 교대로 솟아나며 고래 울음위의 노을까지 모두 파도의 명랑이라는 바다
*laterral line: 측선 혹은 옆줄이라고 한다. 어류의 몸 양옆에 머리에서 꼬리 쪽까지 줄 모양으로 길게 배열된 촉각기관이다.
- 시집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2022) 중에서
밀도가 꽉 찬 시를 쓰는 이 시인의 신작시를 만나면 늘 경이롭다. 애면글면은 약한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애를 쓰는 모양을 이름인데, 그 모양은 바다의 모양이기도 하고 인간의 삶이 늘 가지는 모양이기도 하다. 이 시를 읽으며, 들쇠고래의 주 먹이가 오징어라는 사실과 어류의 몸통 옆줄이 사실은 ‘길게 배열된 촉각기관’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바다를 대상으로 놓고 이처럼 탁월하게 그려낸 시가 또 있었던가. 게다가 ‘고래 울음 위의 노을까지 모두 파도의 명랑이라는 바다’라니! 시가 가지는, 높고 깊은 경지의 언어는 언제나 인간의 정신을 고양한다. 성윤석 시인
2022-11-01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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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계단이 많은 실내/김미령(1975~ )
네게 가는 도중에 너 비슷한 사람을 본다 그는 그 비슷
한 사람들과 모여 속삭이다 금방 헤어지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라는 생각은 들지않는다
여러 개의 복층으로 이루어진 높은 천장 아래
서로 다른 모양의 계단과 크고 작은 복도가 하나의 단
면으로 읽혀지는 순간의
너의 위치
너는 동쪽 계단을 내려가고 나는 북쪽 계단을 올라와
우리가 만나기 직전일 때
계단의 끝에서 또 다른 공간이 생겨난다면
나는 다시 어디로 연결될 것인가
(하략)
- 시집 〈우리가 함께 있다는 소문〉(2021) 중에서
시인들의 신작 시집을 읽을 때 시인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읽는다. 어떤 시인은 폭력을 얘기하고 있고 어떤 시인은 죽음을 얘기하는데, 한 권의 시집이 한 편으로 읽히는 시집이 좋은 시집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부산을 대표하는 젊은 시인 중 한 분이기도 한 이 시인의 시집을 오래 곁에 두고 읽었다. 시인은 개성적이게도 인간이 공간을 차지하는 위치나 동작에 천착하여 오래 회자될 시집을 펴냈다. 인간의 동작이 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삶, 도주, 새로운 인식들이 다른 세계에 눈 뜨게 했다. 시인은 ‘다시 어디로 연결될 것인가’.
성윤석 시인
2022-10-25 [1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