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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그리운 곳으로부터 바람은 분다
덩치 큰 산짐승들이 내려와 인간의 살림을 뒤질 것이다
기꺼이 마음을 잃겠다는 각서라도 써야 할 것이다 이 사랑
은 무모하고 무용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들엔 이유가 없다 밤의 검은 창문을 두드리는
이 무국적 바람은 어딘지 기시감이 있다 그날 습한 바람은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 낮고 느리게 울며 발목을 감았지
그것은 지표면의 것이 아닌 지구 내부 맨틀로부터 뛰쳐나온
거대한 짐승의 미친 열정이 내뱉는 신음 같은 것 지독한
번민의 날들을 부러 게으르게 지나고 있다 나의 사랑 더,
더, 더 쓸모없어질 테다 여름이 응집된 열매들은 만추의 빛
을 입고 자정 너머에서 부스럭거리고
-시집 〈청색에 흘린 청색〉(2026) 중에서
마음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듣고 있던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 볼륨을 조금 더 내려봅니다. 사랑이야말로 무모하고 무용해서 아름다운 것. G단조의 선율에 실려가며 사랑이란 이름으로 주고받는 상처에 대해 묻고 또 묻게 됩니다. 세상을 떠도는 바람이 있어 인간의 본성을 다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지나기도 합니다. 존재의 근원적인 상처, 깨지기 쉬운 영혼의 현실을 떠돌게 됩니다. 그래서 비련의 히스클리프를 목놓아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달려오는 나만의 기억, 그 호명 앞에서 잠시 숨을 멈추어봅니다. 사랑도 지독한 번민도 더 쓸모없어져 보겠다는 다짐은 마치 가을이 주는 이상한 선물 같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인간의 살림을 뒤져야하는 산짐승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밀려옵니다. 신정민 시인
2026-10-0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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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쇄
바다는 무얼 저리 찍어내는가
파도, 파도 밀어가며 저리 찍어내는가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
다도해 꽃밭에 피워낸 섬, 섬, 섬들
등대 불빛 서너 움큼, 파도 소리 예닐곱 장
몰려갔다가 흩어지는 어린 물고기떼 까지
빠짐없이 찍어내는 바다의 쇄
밀물에 한 쇄, 썰물에 두 쇄
쉬지 않고 찍어내는데
판판이 살아있는 개정판 찍어내는데
-시집 〈시 한 편 읽을 시간〉 (2025) 중에서
‘쇄’는 책의 내용 변화 없이 추가로 인쇄할 때마다 같은 책의 출간 횟수를 세는 단위입니다. 시인은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며 바다가 주변의 풍경들을 인쇄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바다는 쉬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찍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이야기들. 매일 다른 파도와 다른 물살로 판판이 다른 이야기들을 살려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책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합니다. 가보지 못한 세계, 배우지 못한 세계를 들려주고 보여주면서 사람을 발전하게 하고 진화시킵니다.
위대한 사람 중에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합니다. 지식을 갖는다는 건 힘을 갖는 것. 인공지능이 대세인 지금 인간이 기계보다 나을 방법은 책뿐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건 스스로 알고 배우는 것. 순간순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바다도 한 권의 책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9-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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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나뭇잎이 떨어지는 까닭
가을날 나뭇잎이 떨어지는 까닭은
나무의 강물이 멈추기 때문이라고
어느 늙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나무 안에도 강이 있어
점점 차가워지는 강이 흐르고 있어
얼기 전에 몸을 닫아야 하는 나무의 사연을,
나뭇잎으로 가는 줄기의 물길 다 끊어
말라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나무의 사연을
어느 늙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세상 곡기 다 끊고 깡마른 저 겨울 裸木
새로운 봄이 되는 적빈(赤貧)의 사연을
어느 붉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시집 〈풀꽃 친구〉(2026) 중에서
익숙한 것들이어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놀라움과 신비스러움을 우린 종종 놓치곤 합니다. 살기 위해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 나무처럼 내 안에도 흐르는 강물이 있겠지요. 가장 아름다울 때 떠날 줄 아는 내려놓음의 세계, 이 가을에 나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곰곰해집니다.
기다리는 바람이 없어 나뭇잎을 떨구지 못할 때 나무는 스스로 몸을 흔들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 얘기도 시인의 늙은 나뭇잎이 들려준 것이었을까요. 나뭇잎으로 가는 물길을 끊어야 하는 마음, 세상 곡기를 끊기 시작한 가을 나무처럼 가을엔 좀 가난해져도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단풍이며 낙엽이 살아남기 위한 나무의 몸부림 같은 것이라니 이번 가을은 좀 적적해도 괜찮겠단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가고 오는 시절도 여행이어서 낯설어도 좋을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 서성여보는 것도 좋을 가을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9-2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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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화이트 노이즈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으로 본
은하들은 다 자그만 술잔처럼 보인다
태초에 건배가 있었다
존재의 다발을 아무렇게나
난장판 술판에 풀어놓은
잠이 안 올 때는
가만히 귀 기울인다
밤하늘을 비틀비틀
영원히 배회하는 거인의
긴 한숨 소리
귓바퀴를 맴돌아 술처럼 고인다
취생몽사인가
몽생취사인가
아무렴 어떠한가
웅크려 잠든 그 모습이
멀리서 보면
난쟁이별처럼 안쓰럽다
-시집 〈네가 봄에 써야지 속으로 생각했던〉 (2025)
화이트 노이즈는 모든 주파수가 골고루 섞여 있는 소리입니다. 마치 모든 색이 섞인 흰색 빛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빗소리나 파도소리 처럼 귀에 거슬리지 않는 소리가 그 예입니다. 주변의 불규칙한 소음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주기 때문에 공부나 업무 집중을 돕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돌발 소음을 덮어주어 뇌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하고,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불면증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을 때 시인은 귀를 기울입니다. 술에 취해 밤하늘을 배회하는 누군가의 긴 한숨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온갖 파동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어떤 보람이나 이룬 일 없이 보내는 취생몽사도 꿈꾸듯 살다 취한 듯 죽는다는 몽생취사도 안쓰럽기만 한 마음을 가늠하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9-1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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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옛날 이야기
할머니한테
옛날이야기를 들었으면서
자신의 옛날이야기는 왜 자기 자신한테
들려주거나 듣지 못하는가
상처도 추억도
그 어떤 참혹한 기억도
꽃은
작년의 꽃을 기억 못하며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러기에
저렇게 핀 것이다
꽃은
꽃의 옛날이야기다
-시집 〈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 (2026)
잊는다는 건 삶의 무게를 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마음의 방어이자 치유의 과정입니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생존과 자아 정체성을 이루는 기억, 과거의 경험을 저장하고 현재에 다시 떠올리는 정신 과정은 우리의 성장을 돕고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게 해줍니다.
개인의 특정한 사건이나 경험에 대한 순간의 감정이면서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기도 하는 기억. 그런 기억이 우리에게 없다면 감각적인 삶과 현재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꽃이 옛날이야기로 다시 피듯 망각 또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불필요한 정보를 잊고 중요한 정보에 집중하기 위한 진화의 전략.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생존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기억과 망각 사이에 있는 옛날이야기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9-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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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버스에서
임산부와 함께 앉게 되었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동행하게 되었네
아이와의 인연으로
내 인생이 길어지자
나는 무상으로 어려지네
버스가 조금만 덜컹거려도 미안한 마음 일고
따갑게 창문 통과하는 햇살 밉다가
길가에 핀 환한 코스모스 고마워지네
아이가 나보다 선한 나를
내 맘에 낳아주네
나는 염치도 없이 순산이라네
-시집 〈물빛인쇄소〉 (2026) 중에서
우리의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성선설이란 시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묻곤 하는데 이 시들이야말로 사람은 선하다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인은 감정이 메말라 가는 것을 느낄 때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을 돌아봤다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아이들의 정직한 울음이 부럽다고 했습니다. 생명들은 함께 동행하면서 서로를 위로해 줍니다.
인간에 대해 애정을 쏟게 하고, 인간의 좋은 점을 찾아주고,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임을 알게 해줍니다. 사람의 선한 본성을 강조한 이 작품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과의 동행에서도 드러납니다. 시 한 편이 우릴 선하게 만들어 줍니다. 신정민 시인
2026-09-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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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그리운 벌레들
곤충 채집통에 벌레들이 들어 있다
풀무치, 여치, 베짱이, 풍뎅이, 메뚜기, 방아깨비, 무당벌레……
이들이 여기 있다니
여름이 되어도 보기 어렵던 벌레들이었다
그리운 풀벌레들의 정겨운 이름을 외워본다
함께 사는 세상
어제오늘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어느 해부터 보기 어렵던 그들
그들은 사라진 친구들처럼
이 세상에 이제 없는가
그들을 찾아 풀밭을 거쳐 콩밭까지 들어간다
누구는 벌써 치매를 앓는다는데
벌레들도 그래서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아픈 몸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벌레들의 그리운 이름을 불러본다
-시집 〈모루 도서관〉 (2026) 중에서
기후변화와 서식지 파괴로 인해 여름 곤충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는 생태계 먹이사슬 붕괴와 식물 수분 감소로 이어져 지구 환경과 먹거리 생산에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저 작은 곤충들의 다양한 세계가 무너지면 인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자명한 일입니다. 작은 생명에 대한 시선, 노력하면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지만 최근 27년 동안 비행 곤충의 75퍼센트가 사라졌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합니다.
멸종생물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가까운 미래를 추측해본다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생태계의 기본 구성요소인 곤충이 사라지지 않도록 친환경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라진 생명들처럼 사라진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노시인의 회상 또한 존재의 그리움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6-08-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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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정오의 총알
방충망에 매미가 붙어있다. 두 마리였다가 세 마리였는데 지금은 한 마리가 붙어있다. 붙어 있을 뿐이다. 조금 전까지 요란하게 울어댔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울지 않는다. 얼굴을 꿰맨 것 같은 배와 날개를 꿰맨 것 같은 매미는 포복을 멈춘 몸이다. 망에서 더이상 흩어지지 않는다. 너는 어디서 왔는가,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나는 너와 마주하고 있다. 너는 비로소 차분해진 것인가, 언제든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망에 붙은 벌레를 떼어낼 필요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방충망을 가볍게 치니 매미는 정오의 총알처럼 솟아오른다
-시집 <정오의 총알> (2026) 중에서
매미는 왜 하필 한여름에만 짝을 찾는 걸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온도에 민감한 매미가 30도 이상에서만 활발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긴 시간을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보내다가 지상에 나와 우화를 하고, 짝찾기 세레나데를 외치는 것입니다. 수컷은 자신의 몸을 북처럼 때려서 소리를 내고, 암컷은 저 뒤엉킨 울음소리 속에서 자신의 짝을 찾아낸다는 게 신비롭습니다. 시인은 방충망에 죽은 척 움직이지 않는 매미를 바라보다가 가벼운 충격에도 솟구치는 목숨이 마치 총알처럼 튕겨져나간다고 말합니다. 정지되어있는 듯 하지만 어느 한순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쳐나가야 하는 강렬하고 돌연한 생의 움직임, 생에 필요한 에너지와 반전, 그 강렬한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해냅니다.
2026-08-1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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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밤이 켜졌다
보름달 떴다고
나가서 보름달 보라고
남쪽 친구가 전화를 했다
전화기 들고 밖으로 나갔더니
신도시 아파트 단지 사이 밤하늘
샛노란 밤의 눈동자
보름달 보이지?
그래, 보여!
그렇구나, 우리 눈빛이
지금 저 달에서 만나는 거로구나
푹푹 찌는 열대야 심야
밤이 켜졌다, 밤이 꺼졌다
-시집 〈꿈을 꾸게 하는 꿈이 있다〉 (2026)
같은 대상, 같은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한 시공간에 있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볼 때 아무리 멀리 있다 할지라도 거기서 만날 수 있다는 것. 어두운 밤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는 달을 같이 보자고 전화하는 친구와, 바라보고 있는 달에서 친구를 만나는 시인과, 이 시를 읽고 있는 사람이 밤의 눈동자 속에서 함께 만나고 있다는 것, 열대야보다 힘 있는 이야기가 아닐런지요.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이 깨달음은 점점 소원해지고 있는 정서적 합일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달이 있어 어둡지 않은 밤, 마음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우리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장소인 것입니다. 오늘 밤하늘 같이 바라보자 전화하는 친구가 되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6-08-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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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기차에 대하여
달리는 기차를 본다 멈추지 않는 기차를
멈추지 않아 아무나 탈 수 없는 기차
그만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는 기차
기차의 속도로 달려야만 탈 수 있다
내리고 싶을 때 내리는 자는 치명상을 입는다
세워주지 않는 저 기차에 우리 모두가 이미 타고 있다
탈 수 없는 기차를 이미 타고 있는 것은 악몽이다
기차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몸을 던져 연료가 되는 자들이 따로 있을 뿐이다
기차를 세울 수 없는 것은
기차의 목적지는 기차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있는 사람은 기차를 탈 권리가 없다
기차의 목적지는 달리는 속도에 있다
저 기차가 왜 우리에게 있을까
아무도 목적지를 묻지 않을 만큼
우리는 내릴 수 없는 기차를 타고 있다
-시집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 (2025)
이 시를 읽으면 영화 ‘설국열차’가 생각납니다.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결코 평등하지 않은 열차 안의 세상이 끝없이 궤도를 달리던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우린 내리고 싶을 때 내릴 수 없는 기차를 타고 있는지 모릅니다. 멈추지 않는 기차의 연료가 되어야만 하는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린 주어진 현실 극복 의지를 가져봅니다. 내 생의 기차는 내가 운전자라는 것, 기차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속도로 달린다는 것, 인간적 가치보다 성장과 경쟁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목적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 가끔 멈춰 서서 달려온 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달리는 데만 뜻을 두고 있진 않는지도 함께 자문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8-0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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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방에 들어온 음악
흰 고양이보다 어린
소녀가 피아노를 친다
음정을 고치고 소리의 간격을 조정한다
옆집은 창을 닫아도
나는 귀를 열어둔다
어린 너는 소리를 배우는 중
더 만져보아라 높낮이가 너를 두드리도록
주저앉아 우는 것이 사랑이다
너는 건반 위를 뛰어다녀라
누르는 곳마다 소리 나는 노래가 된다
서투른 곡이라도 따라 부르자
내 방에 들어온 음악이 나가지 못하도록
나는 너의 노래에 갇히고 싶을 뿐
기다리는 날마다 점점 늘어난 귀
노래는 나에게 와 사그라들고
나는 이제 불협화음에 익숙해진다
-시집 〈비가 시를 고치니 좋아라〉 (2026) 중에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공감이며 존중입니다.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듣는다는 건 나의 생각과 편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다는 건 단순히 듣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리듬에 합류한다는 것. 그러다 사랑의 노래에 함께하고 싶다는 것. 그러다 불협화음에 익숙해질 줄 아는 마음을 마련하게 됩니다. 마음이라는 방에 들어온 것들. 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전언에 닿기도 합니다.
단순히 귀에 들어오는 소리를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것 말고 상대방의 감정, 표정, 숨소리에까지 집중하여 내면을 이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 너의 존재와 이야기는 나에게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누군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7-2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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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서른
삶을 밀려 쓴 것 같다
답지가 아닌 타인을
계속 들춰보고 싶다
맞아, 삶엔 답이 없다
알아, 그래도 있지 않을까
깨지지 않는 것만으로
더는 이해받을 수 없다
그 온도에 물이 끓는단다
그전에 멈추면 안 되는 거란다
멈춰도 오래 따뜻할 수 있다
뜨겁지 않은 체온으로
사람을 데울 수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안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삶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집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2025) 중에서
서른은 스물과 마흔 사이에 있는 애매한 나이입니다. 어른이 된 것 같지만 아직 배우고 채워가야 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나이. 공자는 마음이 확고하게 서서 세상의 유혹이나 흔들림에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가치관과 기초를 확립하는 나이인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했습니다.
인생이라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시기이지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수많은 기대로 힘든 시기이기도 합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가정을 이루고 출산과 육아를 시작하기도 하는 서른은 삶에 와닿는 사회적 문제들을 직접 느끼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빌려 쓴 것 같다고 토로합니다.
삶에 답은 없지만 타인을 안아주는 사람의 온도만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7-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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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비 오는 날
마당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말입니다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 미꾸라지가 바둥거리면서 떨어지지 말입니다 미꾸라지 주둥이가 뾰족한 것은 물에 얼굴을 갈면서 거꾸로 기어오르기 때문이지 말입니다 구름의 벼랑에서 꽃이 피는 줄 알아 냇가에서 힘껏 솟구치지 말입니다 수염으로 물길을 읽다가 제 몸무게 때문에 떨어져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지 말입니다 빗방울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장대하게 떨어지지 말입니다 빗방울들은 미꾸라지에게 왕관을 씌워주며 엎드려 흘러가지 말입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으면 빗방울들이 온통 미꾸라지 같지 말입니다
시집 〈모든 날씨들아 쉬었다 가렴〉 (2025)
강한 회오리바람이나 용오름이 물고기들을 상공으로 들어올렸다가 바람이 약해지면 땅으로 떨어뜨리는 ‘물고기 비’라는 기상 현상이 있습니다. 시인은 소나기 속에서 왕관을 쓴 미꾸라지들을 보기 위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봅니다. 구름의 벼랑에 피는 꽃을 보려고 힘껏 솟구치는, 수염으로 물길을 읽는 미꾸라지들. 잉어목 미꾸리과 미꾸리속에 속하며 한반도 전역에 서식하는 미꾸라지들은 환경 상태를 나타내주는 지표동물이기도 합니다. 생태계에서 송사리와 더불어 모기 유충을 잡아먹음으로써 여름 불청객인 모기의 수를 줄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실 미꾸라지는 물을 맑게 하는 이로운 생물입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미꾸라지들을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긴 더위를 해결해줄 비가 좀 왔으면 좋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6-07-1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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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옥수수가 익어가는 여름
방학을 맞아 서울서 내려온 아들과 함께 읍내에 간다
도로변의 밭에선 옥수수가 한창 익어간다 도시인의 휴가철에 맞춰 딸 수 있게 비닐하우스에서 일찍 모종을 길러심은 녀석들이다
달콤한 과자와 빵이 넘쳐나는데도 사람들은 옥수수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옥수수에서 사람의 이나 하모니카를 보기도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읍내로 들어서니 옥수수를 삶아 파는 가게가 판을 벌였다 가게 앞에 내놓은 솥에서 달큼한 냄새가 풍겨온다
어린 시절 텃밭에 가득했던 그 옥수수다 흐름 속에도 흐르지 않는 것이 있음을 본다
시집 〈별 볼 일 없는 데만 가게 된다〉 (2026)
한여름 어느 날엔가. 이제 막 살이 차오르기 시작한 옥수수를 위하여 햇살들은 맹렬하고, 비는 쏟아지고, 바람은 또 그렇게 지나가는 거겠지요. 알알이 들어찬 옥수수의 저 단물은 어디서 온 걸까요. 익어가는 옥수수 냄새가 불러오는 향수. 사람의 마음에 둥근 여백을 만들어주는 자연과 소박한 일상이 평화를 허락하는 일이라는 시인의 여름을 읽으며 올여름 휴가를 미리 그려봅니다.
세월은 빠르고, 때론 잔인하며, 돌이킬 수 없지만, 그 세월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자연의 순리 속 사람 사는 일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켜온 마음과 사랑과 우정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워지는 것들이고,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어설픈 시도들을 잠시 멈추고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을 헤아려 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7-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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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그 생에도 보리똥나무가 있을까(장철문 1966~)
그날 아침, 그와 나는
한쪽 어깨에 햇살을 받으며
보리똥을 따 먹고 있었다
그 아침에
그가 한 말도
입었던 옷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스포츠머리와
흰 치아를 드러낸 미소와
말소리만은
아직 진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생을
그와 함께했다는 것은
이것으로 명백하다
내가 이생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에 실패한다면
또 어느 생에서
그와 함께 보리똥을 따 먹을 수 있을까
한쪽 뺨과 어깨가 따습던
그 아침에
보리똥나무 가지를 흔들던
자디잔 웃음소리를
아껴 먹는 생의 식량으로 삼을 수 있을까
시집 〈식당 칸은 없다〉 (2025)
내가 아껴 먹는 생의 식량은 무엇일까. 시인의 말처럼 아무 것도 아닐 거라 여겼던 그러니까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의 순간순간들 그리고 그 순간들을 함께 하는 사람의 미소와 웃음소리, 따스한 햇살과 어깨 따듯한 아침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응원이자 성장이며 교감일 것입니다. 유대의 순간들, 그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생의 허기와 결핍이 그러한 순간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향해 오고 있는 무수한 떨림들. 이번 생을 함께 하고 있는 명백한 것들, 나의 존재들이 떨림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 주어진다면 다음 어느 생에선가 지금과 같은 순간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짚어보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6-30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