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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홍범도 장군의 또 다른 유산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철거)에 대한 논의로 소란스럽다. 누구 결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 소란은 감수할 수 있다는 듯, 어느 날 자연스럽게 흉상 철거 논리가 흘러나왔다. 철거를 결정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논리가 굳건하며 또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하긴, 그들의 논리에도 근거가 있기는 하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홍범도는 부적격의 인물일 수도 있는 논리가 그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 중 어느 일군의 사람들은, 홍범도를 존중하지도, 그의 삶을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홍 장군 흉상 이전 논의로 소란
그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 있어
대의·역사보다 사익·편견 우선
홍 장군 민족 앞날 위해 희생
무엇을 생각하고 경계해야 할지
지금 우리의 모습 성찰하게 해
일본의 위엄과 목소리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에게, 홍범도는 그리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있다. 대대로 부와 명예를 누렸고 일제 강점기와 유신 체제를 지나면서도 부와 명예를 악착같이 지켜냈던 이들에게, 여전히 홍범도는 가난하고 미천한 종의 자식일 수 있다. 홍범도가 남긴 유산은 많지만, 흉상 논란을 통해 아직도 이 땅에는 대의나 역사보다는 사익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 점은 또 다른 유산이 아닐까 한다. 더욱 고마운 것은, 죽은 홍범도가 겪는 모든 수모 역시 우리가 지금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역에 묻혀서도, 고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시간이 흘러서도, 우리가 늘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 빈민으로 태어나 한글조차 익히지 못했으면서도, 그는 어떠한 지식인보다도 민족의 앞날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다. 위기에 처했을 때도 지조를 잃지 않았으며, 배운 자들도 좀처럼 하지 못했던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세상’에서 우리가 누구를 경계하고 우리의 삶이 누구로부터 위협받고 있는가를 다시금 알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협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과정에도 망령처럼 살아나고 있고, 사익을 위해 국정을 농락하는 모습에도 여전히 살아나고 있으며, 개발과 출세를 위해 이력을 세탁하고 친일을 비호하며 이를 비판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범죄자 프레임으로 덧씌워 세상을 속이려는 자들의 처세에도 분명히 살아나고 있다. 나는 2021년 8월 19일 ‘공감컬럼’에서 홍범도 유해 귀환을 접하며, 다음 자문을 던진 바 있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를 모셔오는 방법만이 최상의 예우였는지. 혹 그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여전히 힘겨운 삶을 구가하는 남은 고려인들에 대한 우리의 예우는 충분했는지. 나아가서, 그렇게 어렵게 정착하면서까지 자신을 지켜야 했던 홍범도 자신이 그곳이 아닌 과연 이곳에 다시 묻히기를 과연 원했을지. 이 질문에는 그 누구라도 선뜻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을 충실히 던진 이후에 그의 유해 송환을 추진했는지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묻고 싶다. 우리는 이 질문을 충분히 수행하고 그의 유해를 모셔 온 것인지. 과연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홍범도라고 주장할 권리가 남아 있는 것인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아도, 우리는 그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의 국익을 해치는 이들을 ‘반일종족주의’의 헛된 유산처럼 몰아가는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홍범도 장군을 이 땅에 모실 자격이 없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그래서 홍범도 장군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한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역사의 시간과 그 그늘에서 비겁하게 기생했으면서도 여전히 오만하게 살아나는 누군가를, 이제는 똑바로 보아야 할 때라고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늘, 우리는 홍범도를 헤아릴 자격이 없었지만, 언제나, 그는 우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2023-09-2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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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바다를 그릵다
지난 8월 나와 동료 몇 명이 부산시청 전시실에서 ‘바다를 그릵다’라는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전시 포스터에는 ‘건축가와 함께 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건축가인 나와 최윤식 선생이 속한 ‘도시그림’ 어반스케치 팀이 주축이 되어 연 전시였기 때문이다.
전시회를 여는 초대장에 이렇게 적었다. ‘2023년 제11회 부산해양레저축제의 하나로 부산의 어반스케쳐들이 바다로 나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푸른 바다와 그 위를 가로지르는 브릿지, 물살을 가르는 요트와 태양을 즐기는 사람들. 부산의 여름 풍경은 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작은 그림 몇 점을 모아 여러분께 선보입니다. 작열하는 태양의 계절, 맑고 푸른 바다 그림을 보면서 여름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부산시가 주최하고, (사)한국해양레저네트워크에서 주관한 제11회 대한민국 해양레저 축제(KIMA 2023)가 부산 소재의 해수욕장 일대에서 열렸다. 해양레저의 저변을 확산하고, 해양 강국 코리아의 비전을 실현코자 기획했다고 한다. 우리 전시회는 그 행사의 하나였다.
제목으로 붙인 말 중에 ‘그릵다’란 말이 생소할 지 모르겠다. 우리말 ‘그리다’와 ‘읽는다’가 합쳐진 일종의 조어(造語)로, ‘어떤 대상의 의미를 읽고 나서 그것을 그린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내 생활 주변의 것들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것들을 그려본다는 어반스케치 본연의 목적과 잘 부합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우리 팀은 이번의 일로 바다를 다시 한번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고, 나는 바다에 요트가 떠 있는 풍경 몇 점을 그려서 액자에 넣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그 대상을 사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가까운 바다의 색이 짙습니까? 먼 곳이 짙습니까?” 어떤 분이 내게 물었다. 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유심히 관찰해 보십시오. 어떨 땐 수평선 가까이가 짙고 어떤 날은 내 발 앞의 물이 짙습니다.”
이어 우리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게 되고,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늘과 바다의 만남만큼 운명적인 것이 있을까? 둘이 만나지 않으면 풍경은 완성되지 않는다. 어쩌면 내 그림 모두가 거기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다시 물과 요트에 집중한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물의 색으로 채운다. 내 그림 속 바다의 색은 푸른색에 약간의 녹색이 섞인 색으로 그려져 있었고, 나는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저건 분명히 무엇이 비추어진 모습이 아니라 깊은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본연의 색임이 분명하다. 해초의 색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면 플랑크톤과 같은 미세한 것들이 뿜어내는 색일까?
물의 색은 무엇이 만드는가? 그것은 직접적인가 아니면 빛과 조합하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자연의 결과물인가? 그림을 그리다 말고, 나는 바다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고, 먼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가끔 하늘과의 경계에 시선이 머물기도 한다.
한 달여의 작업 후에 전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척 설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장의 하얀 벽에 우리가 그린 그림이 하나, 둘씩 걸리자, 벽은 온통 파란 바다색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바다뿐만 아니라 요트와 브릿지와 집,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진 이 도시의 그림들이다.
시청에 오신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림을 본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다. 아마 그들이 바다의 도시에서 이루어 온 지난한 혹은 뭉클한 삶에 대한 이야기이지 싶다. 그들의 틈에 슬쩍 섞이어 엿듣기라도 할까 보다.
일주일 간의 전시회가 무사히 끝났다. 양손에 액자를 들고 전시장을 나오는 길은 늘 아쉬움의 시간이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이번 전시회로 나는 바다와 그것에 둘러싸여 있는 이 도시를 얼마나 더 사랑하게 된 것일까?
2023-09-1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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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시작과 끝
직장 동료가 한탄했다. 이젠 아이들이 TV 드라마조차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TV 안 보면 좋은 현상 아니냐? 라고 반문했더니 동료는 나보고 구석기 시대 사람이냐며 핀잔을 준다. 요즘엔 가족이 함께 거실에 있어도 각자 휴대전화 보는 풍경이 새롭지도 않다고 했다.
지금의 아이들은 주로 몇 분, 혹은 몇 초 분량으로 만들어진 소위 ‘숏폼’이라 부르는 동영상을 본다고 한다. 실시간에 수백 개씩 생성되어 전송되는 SNS의 동영상, 유튜브 동영상. 이를테면 좋아하는 연예인이 등장한 쇼 프로, 혹은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처럼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부분만 편집한 것이라고 했다.
동료는 정해진 방송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드라마나 긴 시간 집중해야 하는 영화 따위는 보지 않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내용이 괜찮다는 소문이 나면 줄거리만 소개하는 동영상을 보거나, 또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만 편집한 것을 본다고 했다.
그 참 큰일이네, 하는 얼굴로 고개 끄덕이던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사실, 내가 그러고 있었으니 말이다. 퇴근하면 식사 마치고, 잠시 뉴스를 보다가 슬며시 짧은 동영상을 선택하곤 했었다. 요즘엔 TV와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니 편하게 앉아 언제든 유튜브를 볼 수 있다. 그러잖아도 피곤한데, 심각한 것보다는 마음 편히 웃는 시간이 좋다는 이유로, 혹은 빠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런 동영상을 봤다.
시대가 변했고, 늙으나 젊으나 사는 게 힘들어 그런 걸 어쩌랴 싶긴 했다. 그러다, 문뜩 정말로 심각한 변화가 다가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떠올렸다. 시작과 끝의 구분이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
따지고 보면 우리 문명의 발달은 시작과 끝을 알려는 모든 노력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 인간의 시작과 종말은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인류의 시작과 끝을 규명하기 위해 수많은 학문이 생겨나고 발전하였다. 수학, 생물학, 언어학, 역사학, 사회학 등등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이 세상 전부의 기원에까지 눈을 돌렸다. 우주의 시작을 알려 하고, 우주의 끝을 상상하고, 심지어는 빅뱅 이전엔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 고심한다. 우리는 시작과 끝을 알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었다.
사실, 시작과 끝을 명백하게 나눌 수 있는 건 세상에 많지 않다.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너무 길다. 그래서 우리는 시작과 끝을 각자의 기준으로 판정해야 하는 법을 익히고 깨달아야 했다. 시작을 인식할 수 있어야 끝을 가늠할 수 있으며, 끝을 판단할 수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의 반복이 바로 이 세상의 원동력이자 미래였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시작만 반복될 수 있다. 또한,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을 중시할 때도 있다. 그나마 둘 중의 하나는 가졌기에 세상은 나름의 무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어 언제나 진행 중인 상태라면 어떨까? 새로운 생산과 창조는 사라지고, 끊임없는 소모와 퇴행만 반복될 것이다.
짧게 편집한 동영상은 껍질과 씨앗을 빼고 먹는 과일처럼 달콤하고 재미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외면하기는 어렵다. 매몰차게 끊는 것도 유난스럽지 않은가. 대신에 조금 줄여서 볼 작정이다. 얼마나 줄일지는 차마 밝히지 못하겠다. 이러나저러나 보긴 할 텐데, 조금 불안하기는 하다. 시작과 끝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 남아있는 세상이 온다면? 시작을 알 필요 없고, 결말도 궁금하지 않은 시대가 닥쳐올까 싶어 쓸데없이 불안하다.
2023-09-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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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돌아갈 수 있다면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부터 방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아이의 책가방을 이제서야 열어보았다. 애초에 아이는 방학 숙제를 마지막에 몰아서 하겠다는 계획을 내게 발표했었다. 방학 첫날 ‘숙제 미루기’라는 이상한 계획을 세우는 것에 말문이 막히기는 했으나 알아서 하라고 그저 내버려 두었었다. 아이의 가방을 열자 사탕 껍질, 찢어진 색종이 같은 각종 쓰레기들과 함께 방학 숙제가 적혀 있는 안내장, 1학기 생활통지표, 그리고 일기장이 보였다. 한 학기 동안 집에 일기장을 가져온 적이 없어서 일기를 쓰고 있는 줄도 몰랐었기에 내심 궁금증을 갖고 공책을 펼쳤다. 담임 선생님이 지침을 주셨던 건지, 단순히 하루의 일과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에 따라 생각을 펼쳐나가는 방식의 글이 적혀 있었다. ‘무인도에 가져갈 세 가지’ ‘돈으로 살 수 없는 두 가지’ ‘화가 날 때 푸는 나만의 방법’ 등 흥미로운 주제에 따라 펼쳐진 아이의 생각을 읽다가 피식거리며 웃기도 하고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일기를 읽게 되었다. 아이는 글을 이미 완성했다가 그 위에 커다란 가위표를 치고 아래쪽에 새 글을 써놓았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 쓰는 것 자체를 무척 귀찮아하고, 좀처럼 고쳐 쓰는 법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먼저 썼던 글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내가 만약 과거로 갈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후회되는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왜냐하면 그 일을 후회하지 않도록 고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에 친구와 싸운 적이 있는데 화해를 못하고 헤어져서, 그 친구와 싸우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그 아래에 다시 쓴 글은, 정조 임금의 독살설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사실인지 궁금해서 그 시대로 돌아가 확인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뒤의 글보다 앞의 글에 아이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느꼈고, 왜 그 글에 굳이 가위표를 친 것인지 가만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정법의 실현 불가능성 때문에 그 친구와의 일이 더 속상하게 느껴져서 그런 걸까, 하고.
사실 나야말로 과거를 계속해서 곱씹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모든 걸 고치고 싶다고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몇 년 전 남동생네 가족이 우리 집에 모처럼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동생이 옷을 너무 많이 가져왔길래 겨우 이틀 자고 갈 거면서 장기 숙박할 것처럼 옷을 챙겨왔냐고 놀리듯이 말한 적이 있었다. 내 말에 올케가 푸념하듯 덧붙였다. “옷 냄새에 민감해서 조금만 땀 흘려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갈아입는다니까요. 빨래가 너무 많이 나와요.” 그 말에 나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괜히 딴청을 부렸다. 옷을 어떻게 말려야 냄새가 안 나는지 몰랐던 그때. 나는 늘 저녁때가 되어서야 빨래를 했고, 방 안에 대충 널어놓아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구겨진 옷을 동생은 며칠씩 입고 다녔다. 그리고 학교에서 ‘냄새나는 아이’로 놀림을 받았다는 것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힘들어도 아침 일찍 일어나 빨래를 할 것이고 햇살과 바람에 바싹 말라 좋은 냄새가 나는 옷을 동생에게 입힐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벌어진 사건은 돌이킬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파생시킨다. 그 이후 동생의 마음속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나는 모르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늘 슬프고 두렵다.
인간의 무지와 무관심, 이기심이나 잘못된 선택으로 이 세계에 벌어져버린 사건들과 거기서 파생되는 나쁜 결과들을 생각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의 바다 속에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생각하면 가슴에 무거운 추를 단 것만 같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야 할까. 실현 불가능한 슬픈 가정법에는 그저 가위표를 칠 수밖에 없는 걸까.
2023-08-3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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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리가 학교에서 찾아야 하는 것들
오랫동안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모든 말에는 다 때가 있다고들 하는데, 그 하지 못했던 말도 어느새 할 때가 된 것 같다. 요즘, 대학생을 가르치다 보면, 난감한 경험을 겪는 일이 과거보다 더 잦아졌다. 그 이유를 요약하자면, 과거에 비해 요즘 학생들의 자립심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대학생을 가르친 경험에 의거한다면, 요즘 대학생들은 자기 주도적 학습이나 생활에 대한 관심이 낮은 편이고 부모와 주변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런데 자기 주도적 삶이나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까닭은 부모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의 부모들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자녀를 감싸는 경우가 흔하며, 그러한 자녀를 나무라는 교사(교수)를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학생들이 자립하여 독립된 개체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도, 그 준비를 부모가 오히려 해치는 경우도 있다. ‘설마’ 하는 독자들을 위해 실례를 들어 보겠다.
어느 날, 3시간 연강 수업에서 2시간째 무단 이석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학생이 수업을 빼먹고 몰래 교실 밖으로 나간 경우에는 금방 티가 난다.
무단 이석한 학생에게 성적상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통보하고, 그렇게 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수업에서 몰래 도망친 학생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성적 상의 불이익을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해당 관련 기관에 투서를 시작한 것이다. 학생이 이유 없이 수업을 빼먹고 해당 수업의 교사(교수)가 이를 지적했다면, 학생은 응당 잘못을 사과하고 교육적 처벌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이러한 불이익 자체를 감수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녀의 부모였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행동을 사주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을 코치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유리한 협상 결과만을 받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해당 학생과 부모는 수업과 교육의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이익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자신의 자식이 귀하다는 이유로, 회피 요령과 협박 기술을 가르치는 부모는 근본적으로 학생을 망칠 수밖에 없다. 학생과 부모에 대한 실망을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악착같이 시행한 민원과 그 민원을 통해 얻은 부당 이득은 과연 그들에게 이롭기만 한 걸까. 한번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요즘 교실은…. 교사를 우습게 알고 학교 교육을 지배하려는 학부모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요즘 대학에서도 엄마에게 물어보고 수강 신청을 바꾸어야 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고, 과제물을 엄마에게 맡기는 학생들도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교실은 분명 정상은 아니다.
다음 학기에도 나는 학생들을 나무라고 야단을 칠 생각이다. 학생들이 그 야단을 짜증이나 화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교실에서는 똑바로 앉도록 시킬 것이며, 수업 시간에는 컴퓨터 게임이나 채팅을 하지 못하도록 제지할 생각이다. 출석만 부르고 도망치는 학생은 반드시 찾아내서 그에 대한 불이익을 줄 것이고, 과제물을 베끼거나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에게는 낙제를 줄 것이다. 그래서 요령으로 세상에서 이익을 얻고 교육 자체를 우습게 여길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꿔 줄 생각이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그들과 부모들이 이러한 훈육을 정당한 교육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학생뿐만 아니라 부모도 다시 교육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오늘 고민하다 내일 죽음을 생각하며 강단에 서야 하는 모든 가르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은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서라도.
2023-08-2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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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건축문화제와 인문적 관점
가을이 오면 부산국제건축제가 열린다. 제법 연륜이 쌓였고, 이번에는 국제도시로서 위상을 더해가는 부산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부산의 잠재력과 가능성 발굴'이라는 주제로 진행된다고 한다. 건축가의 입장에서 건축문화제는 시민을 향해 '여러분은 건축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라고 말을 꺼내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문화제를 볼 때마다 시민의 보편적 관점에 축제가 어떻게 적응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건축은 관람 대상물이기에 앞서 사람이 살아가는 용기(삶의 도구)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접촉하는 것이 건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건축 속에 살고, 매일 건축을 바라보고, 또한 내 집 하나 갖기를 소원하며 산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집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다.
건축 대하는 시민 인식 다양해져
사회·역사적 역할과 환경 문제 등
최근 인문학적 관점의 분석 더해
건축과 도시, 더 많은 토론 필요
올해 건축문화제가 그 장이 되길
생각이 다양하듯, 건축에 대한 의문 또한 많다. 그것은 공감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축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제는 우리 사회에도 그런 대화가 필요하다. 건축을 더이상 그저 바라보는, 혹은 생활하는 개인적인 용기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좀 더 진보적인 시각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했듯이 건축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실로 다양하다. 기술 즉 엔지니어링으로서의 건축, 예술로서의 건축, 사회적 용기로서의 건축, 또한 문화로서의 건축. 건축은 많은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다. 근래에 들어 또 하나의 시각이 생겼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의 건축 바라보기가 보태어진 것이다. 건축을 단지 기능과 안전, 아름다움의 관점을 떠나서, 건축의 존재 이유, 사회적 역할, 역사적 역할, 지리적 문제, 환경의 문제, 나아가 인간과의 관계로서의 건축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인문학과 건축이 자연스럽게 융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건축은 나와 무관하게 여겨질 수 있다. 타인의 재산이며, 내가 어쩐다고 하여 바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지어진 대로, 제공해 주는 대로 수용하면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건축이 타 분야의 예술과 다른 점은 설령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으며, 결국 공적인 입장에서 쓰이고 바라보아진다는 데에 있다. 기술이나 예술에 편승한 이기적인 건축이 사회에 미친 악영향에 대한 건축가의 반성이며, 사용자인 시민들의 관점이 단지 크고, 아름다운 건물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아가 이 시대의 평가는 나와 내 주위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므로, 개인의 건축이 사회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건축과 도시는, 정치와 사회 문제, 나아가 여타 문화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다양하게 토론되어야 한다. 세금으로 지어지는 공공건물에 대한 시민의 생각은 물론이고, 개인의 자본이 이루어 내는 건축의 도시적 횡포에 대하여도 지적하여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시민 의식이다.
당대의 건축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 의하여 열심히 담론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건 한가하게 고궁을 거닐듯이 유물로서의 지나간 건축을 바라보는 추상적이고 정적인 행위와 다른 것이어서, 현실 속에 잠재되어야 할 매우 동적이며 일상적인 행위여야 한다. 그 담론의 중심에 시민이 서고, 주위에 올바른 건축가가 있고, 학자의 양심이 있고, 언론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이들 모두가 대등한 자격으로 건축을 다루어 가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적 건축이다.
축제란 구성원의 의지와 함성이 한곳에 모이는 장소이며 시간이다. 나는 이번의 건축문화제가 그런 인문학적 관점의 토론장이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하여 건축인들이 모이는 잔치가 아니라, 먼저 시민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2023-08-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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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모순적 인간
세상은 한쪽으로 움직인다. 이 흐름은 모든 물질에 적용되는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뜨거운 것은 차갑게 식는다. 모여진 것은 흩어지고, 멈춘 것은 다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즉, 모든 것이 균일해져 더 변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세상의 기본원칙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물질이 제 형태를 스스로 만들고, 혼자 움직이고, 심지어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들게 되었다. 기적도 기적 나름이지 이건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이렇듯 생명체는 세상의 물리법칙과 반대되는 과정으로 탄생했다. 무한대에 가까운 확률을 초월하여,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생명체는 탄생 자체가 모순이다. 이런 생명체의 진화 과정도 엄청나다. 타 생명체를 포식해 양분을 얻는 방식으로 선회한 것부터가 그렇다. 안정과 자생을 넘어서는 이기적 유전자의 탄생인 것이다.
다른 개체를 삼켜 몸을 불린 생명체는 또 한 번 모순적 선택을 한다. 바로 자신의 몸을 구별하여 암컷과 수컷으로 나눈 것이다. 짝을 찾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이 조치는 마치 목적 달성을 위해 우회로를 찾는 탐험가처럼 치밀했다. 이로 인해 본능과 욕망, 혹은 목적과 의지라는 엄청난 모순을 만들어냈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모순을 생성해 낸다. 그 모순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 어쩌면 수억 년 동안 가장 효율적인 모순에 성공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고, 약육강식을 거슬러 약자를 보호하려 한다. 때론 희생적 행동을 서슴지 않고, 무의미한 것에 호기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순적 행동은 확정된 미래로 가지 않기 위함이다.
바늘 끝에 앉은 한 마리 박테리아에게도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있다. 선택의 가능성에는 선택적 모순도 포함된다. 선택적 모순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모순이 있고, 상식 이하의 퇴행적 모순도 있다. 이기적이고 퇴행적인 모순의 결말은 인간의 화석화이다. 인간이 공룡이나 암모나이트, 삼엽충처럼 수백만 년 뒤에 화석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인간은 번영할 것인지, 자멸의 길로 빠질 건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뉴스를 보면 퇴행적 모순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전쟁은 끊이지를 않고 어떤 분쟁지역에선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참극이 벌어진다. 이상기후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폭염과 홍수가 일어난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의 모순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물론, 세상 어디서든 비극이 일어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나는 방관자가 되기를 원한다. 나에게만 나쁜 일이 생기지 않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개인일 뿐이지 않은가.
방관자 특유의 무책임한 걱정은 나의 일상이다. 퇴행적 모순이 인간을 뒷걸음질 치게 했다면, 긍정적인 모순은 두 배가 더 필요할 것이라 한탄한다. 한탄하면서 우리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꿔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만을 바란다. 나 대신 희생해줄 누군가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나는 아닐 테니 상상도 힘들다.
아내가 멍한 얼굴로 앉은 나를 재촉한다. 나는 고차원적인 사색을 방해받았다는 시늉을 하며 베란다에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겨 나온다. 페트병 분리수거함에 잘못 던져 넣은 맥주 캔을 다시 끄집어내다 퍼뜩 생각을 떠올린다. 지하철역에 칼을 휘두르는 남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도망쳐야 하지?
2023-08-1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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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견딜 수 없는
일주일에 두 번 요가원에 간다. 요즘은 요가원이라고 하면 리빙 잡지에 나올 법한 깔끔하고 모던한 공간을 떠올리지만 내가 다니는 곳은 전혀 그렇지 않다. 건물은 오래되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허름한 마룻바닥엔 낡은 요가매트만 깔려 있을 뿐, 외적인 호감으로 수강생을 끌어 모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강료가 저렴하고, 북적이지 않으며, 본래의 목적에만 충실하다는 느낌이 있어 나는 그곳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요가를 시작할 때는 사실 좀 가벼운 마음이었다. 운동을 하긴 해야겠는데 너무 힘든 건 하기 싫고, 뭔가 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 정도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가를 스트레칭과 명상 정도로 여겼던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금세 알게 되었다. 특정 자세를 유지한 채 고른 숨을 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력이 필요했다. 명상? 힐링? 어림도 없었다. 나는 런지 자세로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선생님이 제발 숫자를 빨리 세기만을 바랐다. 플랭크 자세로 바닥을 노려보며 왜 돈을 내고 벌을 받고 있는가 자문했다. 게다가 내 요가 선생님의 교수법은 스파르타식이다. 도중에 자세 유지를 포기하고 싶어도 선생님이 무서워서 그럴 수도 없다. 선생님은 그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카운팅의 마지막 숫자에 뜸을 들인다. 요즘 같은 찜통더위에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나는데, 없는 근력을 쥐어 짜내며 특정 자세를 버텨내고 있노라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티셔츠는 축축하게 젖어온다. 요가는 원래 더운 나라의 운동이기 때문에 인도처럼 더워야 몸이 부드럽게 풀린다며 냉방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오직 힘들다는 생각, 그것 하나뿐. 명상 같은 건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일상의 고민 따위 들어설 틈도 없이 육체가 힘드니까, ‘아, 힘들다. 그만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만 모든 상념이 집약되니까, 어쩌면 그것을 명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순간마다 짧게 숨 돌릴 틈을 주기 때문에 그나마 한 시간을 버텨낸다. 발라아사나, 일명 아기 자세라고도 하는데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엎드려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보통은 10초, 길어야 30초 정도 쉴 뿐이지만, 그 짧은 휴식이 나머지 고된 시간을 견디게 해 준다. 아기 자세로 엎드려 쉬는 그 순간 나는 생각한다. 이 정도면 되는데.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힘든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나고, 이렇게 숨 돌릴 틈만 있어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런데 그 틈조차 주지 않는 세계는 너무도 비정하지 않은가, 하고.
요가 수업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역시 맨 마지막, 사바아사나 자세를 취할 때이다. 송장 자세라고도 하는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로 눈을 감고서 몸을 이완하는 것이다. 고요하고 어두운 수련실에서 힘을 빼고 누워 있으면 마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끔은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다. 그날의 수업이 힘들었을수록 나는 사바아사나 자세에서 아주 오래 멈춰있고 싶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견디던 시간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 이제 더는 이 악물고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인생에서 언젠가 다가올 죽음의 순간도 그런 느낌일까, 눈을 감고 생각한다. 그건 안도감일까, 쓸쓸함일까, 또 다른 슬픔일까.
이십 대 시절 나는 몇 년간 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기쁨과 보람도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밥도 차려 먹지 못한 채 엎드려 울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누군가는 끝내 버티지 못했다. 죽음은 언제고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그보다 먼저 무너지고 마는 이들의 견딜 수 없는 삶을 생각하면, 앞서 그 시절을 살아내면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2023-08-0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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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에어컨이 사라지자 생각나는 것들
에어컨이 고장 났다. 워낙 오래된 에어컨이었던지라 언제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번 여름만 무사히 넘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기에 실망감 역시 적지 않았다. 직전에 다녀갔던 AS기사가 한 말이 기억이 났다. 가스가 새고 있어 조만간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한다는 충고였는데, 기사의 말대로 정말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더위를 날려주던 시원한 바람이 사라지고 간신히 뜨거운 바람만 뿜어내는 에어컨은 곧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더위가 집을 점령했고 습기가 가시지 않은 공간이 되면서, 집 안에서 일을 하는 것도, 책을 읽은 것도, 심지어는 자는 것도 어려워졌다. 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에어컨이 꼽히고 있으며, 그 위력이 핵의 공포를 알린 원자탄이나 삶의 아이러니를 깊게 체현시킨 〈고도를 기다리며〉에 버금가는지도 저절로 체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에어컨이 이 세상에서 특유의 매력을 뽐내는 시기는 약 100년 남짓이다. 개인 에어컨은 1940년대에 보급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90년대를 넘어서야 에어컨의 진정한 보급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에어컨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아니 어떻게 이 여름을 지냈을까?
탁족하고 파탈한 채 정자에 앉아 있는 선인의 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우아하게 정자를 차지했고 그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을 즐길 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늘어났고,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호사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줄어드는 과정에서 파탈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정자와 같은 사적 공간은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모여 살면서도 더위를 쫓는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모여 살았다. 동네에 모여 살고 마을에 모여 살고 유원지와 산에 모여 지냈다. 돗자리를 펴든 텐트를 치든 평상을 깔든 그들은 그곳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음식을 나누고 모깃불을 나누면서, 무료하지만 견뎌야 하는 시간을 함께 견뎠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 그 시절 그들의 방식은 요원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시절을 겪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여름을 나고 있음에도, 그 시절의 방법은 폐기되었다. 모여서 모닥불을 피울 수도 없고, 서먹서먹한 사이에서 수박도 나누어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파탈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계곡에 발을 함부로 담글 수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 시절 그렇게 정다울 수 있었던 삶을 버린 대가로 에어컨을 얻고 그 에어컨을 마음껏 켤 수 있는 경제력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대신 그 대가는 참혹할 수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에어컨은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 중 하나이다.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은, 그렇게 냉방된 공간 바깥에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들의 작은 공간만을 쾌적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바깥의 공유 공간을 파괴하고 있는 셈이며, 결과적으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하는 공간을 망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에어컨의 위력을 실감하는 시대에서, 과거의 믿음을 함부로 고수하기 어렵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는 더위 속에서 일을 해야 하고,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고, 가족을 돌보아야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이들에게 에어컨을 버리고 과거의 모닥불로 돌아가 함께 더위를 나누면서 그렇게 환경을 보호하자고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에어컨이 잠시 없었던 세상에서, 에어컨이 아예 없었던 세상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을 따름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그 과정을 솔직하게 적어보고 싶었다. 잠시지만, 에어컨이 사라지자 든 생각이었다.
2023-07-2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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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개공지와 건축문화
부산시는 건축물 내의 노후화된 공개공지에 대한 새단장(리모델링) 공사비를 지원하는 소위 ‘공개공지 활성화 지원 시범사업’을 올해 처음으로 추진한다고 한다. 공개공지란 규모 이상의 건축을 하려면, 일정 면적의 공지를 공적으로 개방해야 한다는 건축법의 용어이다. 사적인 건축에서 공적 공간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이는 개인의 건축에 조경면적을 의무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의 건축에서 외부 공간(outdoor space)을 강제함으로써 작은 공간들을 모아 도시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이다. 자칫 사유권의 침해일 수도 있으므로, 완화 장치로 법적 용적률 상향과 같은 인센티브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취지에 못 미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나의 소유로 되어있는 공간은 여전히 나의 것이며, 불특정 다수인이 드나드는 것이 건축주로서는 불편하다. 그러니 정성 들여 관리할 리가 없다. 하물며 교묘하게 영업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개인 소유의 공간에 강제하는 공적인 개념이란 여전히 미성숙한 시민의식이다.
공(公)적인 거리에 대한 사(私)적인 집의 태도란 어떤 것인가? 건축이 문화로 서려는 데에 대한 첫걸음과도 같은 질문이다. 모여서 도시와 환경을 이루고, 하물며 자연과도 어울려야 하는 개별의 건축은 처음부터 공적인 물건이었기에 그렇다.
사유물이 공적인 장치로 예속됨에 대한 제어 장치가 건축법에 있다. 건폐율, 용적률, 건축선 후퇴, 공개공지의 제공 등이 이에 속한다. 즉 개인적 욕심을 무던히 정제하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법의 구속에 따라 만들어진 건축과 제공된 공적인 공간의 대부분은 여전히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공공건물의 경우에는 공론이 생기지만 개인의 건축일 경우에는 법규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그 이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 공적 의식의 진보이며, 그때부터 건축은 문화가 된다.
다른 말로, 문화적이라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참된 인식에서 발로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일 때에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당대에 건축이 문화로 설 수 있음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타의 예술은 개별적이므로 구상단계에서부터 이미 문화적이다. 하지만 건축은 그러하기가 쉽지 않다. 완성 후에 주변과 어울려야 하나의 문화를 이룰 수 있으니 말이다.
여전히 건축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건축이 가지는 목적과 역할과 영향에 대하여 개적인 관점으로 평가된다. 지극히 이기적이며 편협하다. 그러므로 건축을 문화로 규정하려면, 결국 건축이 대중에게 주는 보편적이고 공리적인 관점에서 먼저 논의되어야 함이 더욱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문화를 이루어 가는 많은 건축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건축가 김종규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사옥(초량동 소재)에는 여타의 건물과 다른 공지가 보행자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공개공지에 건물의 기둥이 없고, 바닥의 높이차가 없을뿐더러, 보도의 재료를 이질감이 생기지 않게 공개공지로 끌어들임으로써 터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건물인지 길인지 구별이 없는 공간이 편안하게 보행자에게 제공되고 있다. 나는 이 건축에서 개별의 터와 건축이 도시 문화에 자신의 일부분을 기꺼이 제공하려는 모범적 공적 개념을 보았다. 건축이 도시 문화가 되는 접점이 거기에 있었고, 건축은 내게 비로소 문화로 인식되었다.
부산시의 이번 조치를 환영한다. 동시에 우려하는 마음도 있다. 힘들게 마련한 예산이 건축주들의 건물 단장 비용으로만 쓰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시민의 공적 의식이 나날이 진보해야 함은 물론이다.
2023-07-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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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갈대 같은 인간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이 그의 저서 〈팡세〉에 쓴 말이다. 내가 보기에도 갈대는 이리저리 휩쓸리기 일쑤인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다.
인간의 특성을 정의한 지식인은 많다. 데일 카네기라는 작가는 자신의 저서 〈인간관계론〉에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라는 말을 썼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라 했다. 이 말은 너무나 감정적인 인간이기에 이성적 사고 능력을 잊지 말라는 강조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당연히 사람은 다양하다. 이성적 성향일 수 있으며, 감성이 예민한 이도 많다. 이들 모두가 감정과 이성의 테두리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는 이유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자아로 발현된 의지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특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를 흔드는 비이성적 충동은 어디서 나왔던 말인가. 그 행동이 순수하게 나의 감각과 생각에서 우러나온 것일까?
쇼핑 중에 불현듯 물건 하나를 슬쩍 하고픈 충동이 생기고, 무덤덤했던 이성에게 돌연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순전히 내 판단의 결과라 할 수 있을까? 나를 자극하는 또 다른 뭔가가 내 몸 안에 있는 게 아닐까?
사람의 감정과 행동은 내분비물질, 즉 화학물질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사람은 인체 내에서 분비되는 극소량의 물질로 행복해지거나 만족감을 느낀다. 과학자들은 그 실체를 찾아내려 애를 썼고, 기어코 몇 종의 물질을 찾아냈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등이 그렇다.
사람은 즐거움과 행복, 기쁨이라는 것에 아주 관심이 많은 족속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인체 특정 조직에서 분비되는 물질과 유사한 천연물질을 찾아내고야 만다. 우리는 그것을 마약이라 부른다. 주술, 혹은 고통을 줄이고 우울증, 불면증을 치료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마약이 오직 도취만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합성마약의 등장과 함께이다.
중증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처방되는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이 많다는 뉴스가 요란하다. 펜타닐은 흔히 온당치 않은 사람이 취급하였던 합성마약과 차별되는 순수 의료용이었다. 의사의 처방전만 있으면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오남용의 편법이 되었을까.
현재 미국에서는 청장년층 사망 원인 1위가 펜타닐 중독이라는 말이 있다. 멀리 볼 것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펜타닐 오남용이 심각하다. 심지어 ‘우리나라 청소년들 10명 중 1명은 펜타닐을 경험했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전적으로 믿기 어려운 수치이지만, 마약류 오남용 문제가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다.
마약을 접하게 하는 가장 큰 동기는 무엇일까? 아마도 호기심과 자만심일 것이다. 중독과 부작용의 위험성은 대부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느낌인지 딱 한 번만 경험해보고 중단할 수 있는 자신의 의지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약은 애초부터 인간의 의식을 무너뜨릴 용도로 만들어진 물질이다. 기능 자체가 감각과 정서를 왜곡시키는 물질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의지는 마약과의 싸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극소량의 화학물질에 지배당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23-07-1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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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죄와 용서
가톨릭 신자인 나는 최소 일 년에 두 번은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죄를 뉘우치고 같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부족한 인격 탓에 결국 또 유사한 죄들을 저지르고 만다. 때문에 매번 비슷비슷한 죄의 항목들을 고해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 채 미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고해성사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남아서 나를 무척이나 괴롭게 한다.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가 되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이미 스스로를 용서하고(혹은 잘못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그 죄로부터 벌써 해방되었는데, 왜 상처를 받은 사람은 오랜 시간 아픔을 홀로 견디면서도 도리어 용서하지 못했음을 괴로워해야 하는가. 그런 의문 때문에 나의 고해성사는 시작도 끝도 괴로움투성이다.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풀어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의 해묵은 죄는 여전히 반복되는 것이다.
기억력이 나쁜 편이지만 그날 그녀가 입고 있던 청바지의 밝고 환한 색감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울면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청바지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놓치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의 최선이었다. 이미 결심을 끝낸 어른의 차갑고 완고한 힘을 이겨낼 도리는 없었다. 이제 나는 그 시절 그녀의 나이를 훨씬 넘어서버렸지만, 그래서 그때의 그녀를 어른의 마음으로 이해해볼 수도 있겠지만, 죽을힘을 다해 붙들었던 바짓자락을 끝내 놓치고 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열 살짜리 여자아이로 되돌아가 울어버리게 된다. 그녀는 왜 내가 잘 때 몰래 떠나지 않고, 햇빛이 반짝거리는 한낮에 그토록 환한 옷을 입고 내 손을 뿌리치며 갔을까.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였을까, 그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천진한 난폭이었을까. 나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고, 그녀는 아직도 내게 그날의 일을 사과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움으로 가득 찬 마음에 대해 여러 번 고해를 하면서도, 맺힌 것을 여전히 풀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죄라는 것이 다만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그것뿐이겠는가. 내가 그 반대편에 서 있었을 수도 있다. 나의 무심함과 자기중심성과 안이한 타협과 가벼운 언행들이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거나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데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명백히 잘못했는데 스스로는 여전히 죄인 줄도 모르며, 구체적으로 뉘우치지 못하고 있는 일들. 그런 일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아는 죄만 고백하고 그것을 용서받는 일이 과연 타당한 일인지 의구심이 든다. 물론 고해성사의 마지막에는 이런 구절을 읊게 되어 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하지만 알아내지 못한 죄를 용서받아도 되는 걸까.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그 무지의 죄악이야말로 진정 용서받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의문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으므로 나는 고해소를 나와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질 줄 알았는데 미움도 분노도 용서할 수 없는 일들도 자꾸 늘어만 간다. 우리의 불안과 고통을 그저 괴담이라고 퉁치며 한가한 먹방 이벤트를 여는 이들에게도 분노만 쌓이고 도무지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으니 나의 죄는 이렇게 또 축적되는 것인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데 천진하게 기여하는 사람, 끝내 뉘우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마저도 신은 용서할까. 나는 아무래도 그러지 못할 것 같다.
2023-07-0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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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인류와 지구의 '공동' 오염수
연일 정치권에서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두고 설전이 이어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괴담’이라고 치부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민의 염려를 앞세우고 있다. 양쪽 모두 자신들의 주장이 옳으며, 상대의 주장은 정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사실 시민 입장에서 보면, 정부의 조치는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일본 오염수 방류에 대한 면밀한 조사나 검토보다는 정치적 이득을 위해 양보하고 있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양보’가 아니라 ‘굴욕’이라고 표현할 만큼, 이 쟁점에 대한 정부와 집권 여당의 태도는 무조건 비호 일변도이다.
이러한 현실은 시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오염수 방류에 대한 정책을 확정하기 이전에 정부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국민을 차분하게 설득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정부가 하는 정책이 대부분 그렇듯, 졸속으로 처리하고 강압으로 밀어붙여, 그사이에 존재했어야 할 국가적 동의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결과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국익의 유무를 떠나, 이러한 정책은 시정되어야 할 정책이 아닐까 한다.
더구나 방류와 얽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권도, 시민들도, 심지어는 학자들도 지적하지 않고 있다. 현재 논의가 오염수 방류가 한국과 주변 국가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되지 않는지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그들의 편을 드는 학자들은 오염수 방류는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쪽은 오염수 방류로 인한 국익의 손실을 걱정하고 있다. 이 역시 어느 한 방면에서 보면, 타당한 논리이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옳든 그르든 간에, 오염수 방류는 생태계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다. 바닷물에 희석되면 문제가 해소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 과연 인간이 바다에 그러한 물질을 버릴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다에 사는 고래나 물고기들에게 물어보아야 하고, 바다를 구성하는 많은 주변 환경(설령 무생물일지라도)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인간들 주장에만 치우쳐, 어엿하게 지구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 자체를 생략하고 있다. 인간 중심의 논의로만 전 지구적 환경과 생태계 구성원들의 안위와 의사를 결정하는 일은 제고되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오염수 방류는 더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애석한 일이고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물인 오염수를 지금의 형태로 방류하는 선례를 남긴다면 인류는 똑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고 말 것이다. 불행하게 다시 동일 사태가 일어난다면(후쿠시마 원전은 최초의 원전 사고가 아니었다), 그때의 우리는 다시 말할 것이다. “그러면 바다에 가져다 버리면 되지”라고. 원자력 발전소를 지으면 안 된다는 생태적 합의를 더욱 강하게 무시할 것이고, 사고가 발생하면 같은 방식으로 해결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내세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작은 이익을 위해 내린 결정이, 과연 인류와 지구의 안전한 미래를 보장하는 결정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오염수의 문제는 버리고 버리지 않고의 차원에서만 논의될 수 없는 문제이다. 미래에 이러한 문제가 일어났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총체적 물음을 함축한 문제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인간들이 인간 중심의 사고만 가동하여, 그것도 ‘피아’를 간신히 식별하는 ‘소아(小我)’의 경계에서만 전 지구적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어쩌면 마지막 순간을 놓치지 않을 기회 말이다. 함께 논의한다는 말은, “결정하니 따르라는 말”도 아니고, “우수한 우리가 판단했으니 잘 모르는 너희는 가만있으라”라는 말도 될 수 없다. 그 말은 “인간을 넘어 모든 이들이 함께 숙의하고 그 미래를 강구한다”는 말이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2023-06-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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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꽃밭에서
꽃의 끌림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꽃밭에는 늘 사람들이 붐빈다. 가까이 얼굴을 대고 꽃냄새에 취해보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꽃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컷 정도는 카메라에 남긴다. 꽃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사람들의 그것을 압도한다.
꽃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부터다. 하지만 꽃을 가까이하지 못한 것은 집에서 마당이 없어지고 난 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동요 ‘고향의 봄’ 노래만 가슴 한구석에 남긴 채 꽃에 대한 탐심은 그날 이후로 아득해졌다. 꽃을 잃었다기보다는 꽃과 함께 나누는 소소한 일들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 나뿐일까? 꽃밭을 잃은 사람들은 텔레비전 뉴스로 꽃 소식을 접한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찾아다니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매화·산수유·벚꽃의 시절이 지나면 진달래 철쭉의 시간이 온다. 그리고 장미·수국의 시간을 거쳐, 코스모스와 국화의 계절을 또 맞이한다. 마당을 잃은 사람들은 앞다투어 차를 몰고 꽃밭으로 향한다. 마치 나비와 벌의 본능적 움직임과도 같이.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수국꽃을 만난 것은 뜻밖이었다. 늘 지나다니면서도 눈치채지 못하였는데 어느새 꽃 잔지가 열렸다. 활짝 핀 꽃의 분망함에 한동안 어찌할 줄을 몰랐다. 감정을 놓칠세라 얼른 스케치북을 열고 그림을 그린다. 크게 한 송이, 또 무리를 지은 꽃밭을. 그리고, 그 사이를 여유롭게 걸어가는 하얀색 강아지와 젊은 여성을. 꽃밭에 파묻힌 사람들은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꽃에 몰두한다. 꽃밭을 몽땅 자신만의 방으로 옮겨 놓으려는 듯, 사방에서 찰깍찰깍 소리가 하늘을 날아다닌다.
수국은 대표적인 여름꽃이다. 청보라 빛깔의 수국 옆에 앉으면 금방이라도 땀이 식혀질 듯 신산하다. 낱낱의 꽃이 모여 둥근 형태를 이루는 특이한 꽃이다. 오묘한 색깔의 꽃은 개별적으로도 예쁘지만, 무리 지은 모습이 더 볼만하다. 토양 성분에 따라 흰색이었던 꽃이 점점 청색, 붉은색, 보라색으로 변해가는 신비로움 마저 있으니,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충분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수국 축제 소문이 들리고, 사람들의 앨범에는 수국꽃이 점령하게 된다. 부산에는 영도 태종사 수국 군락이 장관이라 소문이 나 있다. 바야흐로 붉은 장미가 시들해지고, 그늘이 그리워지니 수국의 시간이다.
꽃밭에서 나는 잠시 아버지 생각을 하였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아동문학가 어효선이 글을 쓴 동요 ‘꽃밭에서’를 들어보면, 정성스럽게 꽃밭을 가꾸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식구들에게 계절마다 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던 애틋한 마음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꽃밭을 가꾸는 일은 늘 아버지의 몫이었고, 우리는 그 꽃을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 꽃을 가꾸는 아버지. 마당과 함께 우리가 잃은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우리 동네 수국꽃밭. 전임 구청장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것이 올해 들어 만발하니 이런 장관을 이룬다. 멀리 가지 않고, 내 집 앞에서 꽃의 축제를 보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오래된 마을에 벽화를 그리자던 어느 시장님보다, 이렇게 꽃밭을 가꾸어 놓은 구청장이 더 멋있는 아침이다. “그래! 맞아. 꽃을 심으면 될 일이었어.”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집 마당에서 꽃밭을 다듬으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행정이란 결국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남이 기웃거리든 말든 동네에 사는 우리가 즐거우면 된다. 도시를 가꾸는 일은 작은 데에 있나 보다. 좁은 길모퉁이마다 꽃이 피는 길. 도로가 시원하게 뚫린다던 거창한 도시계획이 그만 무색해진다.
2023-06-2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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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달의 뒷면
저녁 길을 걷다가 문뜩, 높다란 빌딩 사이의 보름달이 유난스러워 시선을 빼앗길 때가 있다. 밝은 달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아 새삼 멀뚱히 쳐다본다. 저 달이 원래는 없었는데, 내가 쳐다보니 나타났을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가당찮은 의심은 갑자기 홱, 돌아보면 제자리를 찾아 허둥대는 달을 목격할지 모른다는 망상으로 번진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놀이처럼 허겁지겁 자리를 옮기는 달에게 잡았다! 하며 소리쳐보고 싶기도 하다.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긴 해도 나름 과학적 근거는 있다.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번듯하고 논리적이긴 하다. 하지만 과학은 의외로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다. 중력은 왜 서로 잡아당기는 건지. 전기가 흐르면 왜 전기장이라는 힘이 생기는지. 빛은 왜 직선으로 움직이고 속도가 일정한지를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나 혼자만의 그런 질문에 빠져 정작 중요한 설명을 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덕분에 성적은 늘 겸손했다. 겸손해진 김에 그런 질문과도 잘 타협했다. 원래 그렇다는 것. 그게 바로 과학 법칙이고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
그런데, 아무리 겸손하게 받아들이려 해도 아리송한 과학 분야가 있다. 바로 양자역학이다. 이 학문의 시작이자 기본으로 간주되는 ‘물질의 이중성’부터가 그렇다. 물질은 입자의 성질도 있고, 파동의 성질도 가졌다고 한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시험에 나오는 항목이니 무작정 머릿속에 담았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볼수록 점입가경으로 빠져드는 이론이다. 멀쩡히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이 파동이 되기도 한다니. 이게 말이나 되나?
물론, 중요한 전제가 있다. 관찰자가 보고 인식할 때는 입자로 존재한다는 것. 평소에는 확률 파동으로 존재하던 것이, 관찰자, 즉 의식을 가지고 인식할 때는 온전한 물체로 수렴한다고 한다. 솔직히, 이해한다는 범주를 넘어서는 현상이다. 하지만, 물질의 기본을 다루는 양자역학에서는 이것을 기정사실로 여긴다.
근데, 여기에 정말 흥미로운 것이 있다. 바로 관찰자의 역할이다. 관찰자는 바로 ‘나’가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쳐다봄으로 해서 저 달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달은 무조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한대의 확률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며, 만약 내가 무한대의 횟수로 돌아본다면 한번쯤은 달이 없는 하늘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보고 있는 달을 내가 못 봤다면, 그 순간 내 세상엔 달이 없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 ‘달’이 나에게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만약 내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면, 나의 세상은 시간도 다를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속도를 가진 것은 그 속도만큼의 다른 시간을 가진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순간에 서로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찰로 서로를 존재하게 하거나, 혹은 사라지게 만든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이를 존재하게 하고 혹은 사라지게 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가족과 직장, 우연히 쳐다봄으로 해서 존재하게 된 배달 오토바이, 혹은 떠들썩한 뉴스로 인식하게 된 스포츠 팀이나 연예인이 내 세상의 전부일까?
부인하고 싶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 잃어버린 세상이 훨씬 많다. 하지만 좁디좁은 나의 세상에서도 소외된 달의 뒷면만큼은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만약 내가 휘영청 뜬 달을 쳐다봤다면, 그 달의 뒷면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2023-06-15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