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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반려가족
뉴스나 인터넷 매체에선 종종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강조한다. 새로운 것이라 그런지 이름 자체도 낯설다. 뉴노멀 시대, 메타버스 시대, 워라밸 시대….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명석한 사람들의 구분법이겠지만, 나에겐 뭐든 버겁다. 산업화 시대, 핵가족 시대는 옛말이 된 걸 인정한다. 인터넷, 디지털 시대는 지금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귀에 익은 웰빙, 친환경, 인공지능 시대에서 비대면 시대까지 겹치게 되었으니, 복잡하게 뒤섞인 이 세태를 표현할 뭔가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을 만도 하다.
아무튼 세상이 워낙에 급변하니 알아서 맞춰가라는 의미로 ‘뉴노멀’을 받아들였다. 혼자서 그렇게 멋대로 해석하니 까다로울 것도 없었다. 저녁 먹고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돌던 중에 곧바로 실감할 수 있었다.
함께 걷던 아내가 마주 오는 젊은 여자를 보더니 반색하며 인사했다.
“어마! 두부네? 두부 안녕?”
인사하는 아내 시선에 꿀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인사한 것이 아니라 두부 다섯 모쯤 되는 강아지에게 인사한 것이다. 아내 다리에 엉겨 붙는 강아지를 보니 이미 구면인 듯했다. 아내는 그제야 여자에게 슬쩍 눈인사를 한다. 멀뚱히 서 있던 젊은 여자도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여자가 자리를 뜨자 아내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저녁 먹고 동네 산책하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 근데, 사람 산책이 아니라 강아지 산책이다. 강아지끼리 꼬리치고 냄새 맡고 서로 왈왈대면 멀뚱하게 서 있던 두 주인이 인사를 나누더라. 오히려 동네 사람 사귀기엔 참 좋아 보이더라. 위층에 몇 호, 아래층의 몇 호에서도 강아지가 있더라. 그러면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 눈꺼풀이 두 번째로 끔벅이는 순간 아내는 덧붙였다. 내 직장을 따라 생면부지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어언 4년. 코로나 탓에 동네 사람과 제대로 사귀지도 못했다. 게다가 두 딸이 취업하여 멀리 떠나니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개와 함께 살면 우울증도 개선되고 정서에 큰 도움이 된단다. 아내 말을 한 귀에 걸치고 나는 대뜸 떠올렸다. ‘그래서 개는 누가 돌보나?’
물론 나도 개를 좋아한다. 개뿐만이 아니라 동물을 다 좋아한다. 어릴 적엔 열대어와 잉꼬를 키웠고, 토끼도 길렀다. 우리 집엔 메리라는 개가 있었고, 그 뒤로 쫑, 또 메리, 마지막엔 복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가 있었다.
그 당시엔 애완동물이라 불렀다. 지금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반려동물이다. 가족의 일원으로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사는 동물. 동물이라 차별받는 것도 거부하며 사람만큼 번듯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기준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새로운 가치가 바로 뉴노멀 아닌가.
그러니 반려가족을 얻기 위해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내 개인 시간은 줄어들고 계획에 없던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매일 산책시키다가 개똥을 주워 담고, 새로 장만한 소파와 쿠션을 포기하고, 불불 날리는 털과 지린내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줄줄이 떠오르는 포기 목록을 감당하기 어려워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에서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경험이 많은 듯한 한 지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거, 판단 잘해야 돼요. 순위에서 또 밀려날 수 있어요. 요즘 부인들은 집에 불이 나면 강아지만 안고 피신한답디다.” 그렇게 말하고 와하하 웃는다. 나도 덩달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정말 예리하고 세심한 지인이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어쩌랴. 수순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나는 뉴노멀 시대에 살고 있다.
◇약력: 201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2년 소설집 〈원 그리기〉 출간
2023-03-2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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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수평 맞추기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일들에 후순위로 밀려버려서 매번 못하게 되는 것이 있다. 내게는 영상 시청이 그런 일 중 하나다. 영화도 드라마도 참 좋아하지만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일단 소설을 쓰는 시간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니까. 노트북을 열면 반나절은 금세 지나가 버린다. 마감일이 정해진 다른 일거리가 있을 때에는 그 시간마저도 확보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눈앞의 책들은 서로 자신을 먼저 펼치라며 아우성을 치고, 먼지와 빨래와 설거지거리는 치우고 돌아서면 미스터리하게도 또 쌓여 있는 것이다. 요즘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의 감정소모전과 그로 인한 마음 수양의 시간도 상당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보고 싶은 영화들은 체크만 해두었다가 결국 막이 내릴 때까지 보러 가지 못하고, OTT에는 하트 표시를 해둔 콘텐츠들이 늘어만 간다. 그러다 며칠 전 급체를 하는 바람에 꼬박 하루 동안 토하고 먹지 못한 채 누워 있게 되었는데, 그 덕에 모처럼 넷플릭스를 종일 시청했다. 몸이 멀쩡한 상태에서는 우선순위에 있는 일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으니, 가끔은 이렇게 아픈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날 내가 보았던 영상은 사이비 종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여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급체를 한 상태로 위장을 부여잡고 보기에는 어쩌면 적절치 않은 영상이었을 것이다. 보는 내내 속은 더 울렁거리고 두통도 점점 심해졌으니까.
방송이 이슈가 되니 그에 대한 기사도 연이어 나오고 있다. 방송을 본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의 충격적인 실상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교주와 신도들을 비난한다. 그런데 어떤 말들은 그 비난의 초점이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맞춰져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집단인데 왜 그곳에 있었던 거냐는 식의 비난들. 그런 식으로 피해자를 탓하는 말들이 쌓이면 가해자의 잘못은 교묘하게 묻혀버린다. 비단 이런 상황에서 뿐만이 아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왜 가해자와 단둘이 있었느냐고 캐묻고, 그때는 가만히 있어놓고 왜 이제 와서 고발하느냐고 진의를 의심한다. 약취와 유인을 당한 미성년자에게 왜 모르는 사람을 따라 거기까지 갔냐고 추궁하고, 부모에게는 아이 교육도 제대로 안 시키고 대체 뭐한 거냐고 힐난한다. “네가 당할 만하게 행동했으니까 피해를 당한 거지.”라는 식의 2차 가해는 상대에 대한 특별한 악의도 없이, 천진하고도 무구하게,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라는 듯이 벌어진다. 힘겹게 가해자의 마수로부터 빠져나오고 겨우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 입을 연 피해자들은 그 순간 더욱 상처 입고 움츠러든다.
모든 상황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정중앙에 서서 판단하는 것은 얼핏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시소의 한쪽 편에는 거구의 성인 남자가, 다른 한쪽 편에는 어린 소녀가 타고 있다고 치자. 높이 올라간 채로 내려오지 못해 울고 있는 소녀에게 “시소에 탄 네가 문제지. 그러게 거길 왜 올라갔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공정함은 시소의 가운데 서 있을 때가 아니라, 약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시소의 수평을 평평하게 맞추어줄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어린 소녀가 앉았던 자리에 나를 대입해보는 마음, 그 애의 어떤 약한 부분을 건드렸기에 소녀가 시소에 앉게 되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마음, 그리고 “거기서 내려오지 못했던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다독여주는 마음. 피해 사실을 힘겹게 증언하는 이들을 볼 때 우리에게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조차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며 과거 일제 강점의 피해자였던 우리 민족을 질책하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피해자의 상처를 진심으로 어루만지고 위로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싶다.
2023-03-1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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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침묵의 봄, 폭력이 오는 소리
지난 일요일에 집 밖을 나서니, 나들이객들이 봄이 오는 세상을 이미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들의 표정까지 화창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새 늘어난 양지의 세상보다, 아직은 어둠이 드리운 음지의 세상이 더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었을까. 봄이 오는 소리는 분명 들려오지만, 세상의 구석구석에는 오지 않는 봄으로 아직도 앓아야 하는 진통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와는 제법 떨어져 있다지만, 세상 저편에는 1년째 전쟁 중인 곳이 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정의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죽고 죽이는 폭력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지울 길이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세상 저편에선 1년째 전쟁 지속
폭력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전망
학교 폭력과 한·일관계에도
힘에 대한 맹신 도사리고 있어
바로잡지 않으면 또 다른 폭력 노출
공정과 상식 작동하는 사회 돼야
한국 내의 고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공정이나 상식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위계와 폭력으로 얼룩진 곳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친구를 학대하고 타인의 자식을 정신적으로 압살하는 부모들이 등장했다. 학교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키겠다고 남의 아이를 죽이는 부모들은, 어쩐 일인지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위계 문제는 줄어들지 않는다. 경제적 실리를 앞세워, 자신의 잘못된 가치관을 세상을 위한 행동인 양 선전하는 무리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후손들에게 불편한 관계를 물려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왜곡된 역사관을 세상에 버젓이 통용시키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공정과 상식으로 바꿔 부르고자 하는 듯했다.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툼이 아이들 사이에서 단순히 치고받는 우발적 사고로 끝나지 않고, 그 폭력 뒤에 힘의 행사를 우열 관계에서 응당 발생할 수 있는 당연한 처사로 믿는 비뚤어진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학교 폭력 뒤에는 힘센 부모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거나 상대 아이의 부모가 약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사면받을 수 있다는 힘에 대한 맹신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힘에 대한 맹신은 우리와 주변 국가 사이에도 작용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했고 그 결과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이를 힘의 논리로 포장하여 잘못을 감추거나 관점의 차이로 몰아붙여 과거 행동 자체를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태도가 동일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진실로, 용납할 수 있을까. 실리나 경제나 미래 같은 말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를 건너뛰고 진실을 호도하는 이들의 이익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이 우리의 숙적인 이유는, 과거 35년의 역사 때문만도 아니고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 때문만도 아니다. 그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부정하고, 그들의 과거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태도 뒤에, 언제든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기 합리화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학교 폭력을 함부로 무마할 수 없고, 논문 표절을 역시 외면할 수 없고, 주가 조작과 각종 비리를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덮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힘의 행사가 교실에서, 법의 테두리 내에서, 정부 정책에서, 외교 관계에서 계속 자행될 것이고 그 문제를 바로잡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폭력에 시달릴 위험까지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는 공정과 상식의 사회가 아니라 위계에 따른 힘의 논리가 더 크게 작동하는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는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다시 오고야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봄은 왔지만, 그 소리도 들리지만, 이 봄을 좀처럼 화창함 그 자체로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 아주 약간은 알 것 같기도 하다.
2023-03-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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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전시장에서
부산시청 맞은편에 높은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을 때의 기분은 잊지 못하겠다. 무심코 바라보던 황령산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마치 영화 ‘주만지’에서 좌충우돌 달려오던 코뿔소, 코끼리 등을 연상케 했다. 공룡 같은 건물이 시청 앞마당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현상설계를 통하여 좋은 안을 뽑아, 남 못지않게 현대식 시청을 만들겠다고 하던 시장님의 목소리가 엊그제 같았는데.
공적 건물이 거대하고 화려하여, 시민을 향하여 권위적이거나 위압적인 데에 대해서는 지금도 반대한다. 그렇다고 하여, 여느 상업 건물처럼 아무렇게나 취급된다면. 그것은 시민의 자존심 문제이다. 공적 건물이므로 개별의 건물로 존재하지 않고, 그 주위는 물론 도시 전체의 맥락을 이루어야 한다. 건축가의 계획안에는 분명 황령산에서 동래와 금정산으로 이어지는 도시 축 하나쯤은 그어져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고층 아파트에 갇혀 있는
부산시청 주변 모습 아쉬움
우암동 소막마을 등 그림 전시회
‘왜 이런 그림 그리나’ 시민 질문
시민 기억 허물어 버린 개발 논리
옛 마을 10분의 1이라도 남기길
굳이 유럽의 잘 된 도시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서울만 보더라도 공적인 건물의 자세를 생각할 수 있다. 있던 자리를 지켰다는 것은 둘째로 하고. 금싸라기 같은 자리의 큰 부분을 욕심 없이 광장으로 비워 두었다는 사실. 시민들은 거기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며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대표팀의 경기 때에는 ‘대한민국~’ 하고 함성도 함께 지르며, 때론 삼삼오오 모여서 정치적 시위를 하기도 한다.
부산 시청 주변의 경우 아쉬움이 많다. ‘과연 도시계획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이라도 모아 그 땅을 사 버렸더라면 하는 자조조차 생기는 것이다. 옛터를 버리고 넓은 곳을 찾아 나선 시청이 높은 아파트 사이에 다시 갇히고, 맥락을 잃어버린 것이다.
최근 필자의 전시회를 둘러보러 온 어느 분이 물었다. “선생님은 왜 이런 그림을 그리세요?” “아~ 예. 이런 풍경들이 사라지는 것들이 아쉬워서요.” 매축지마을, 우암동 소막마을, 그리고 재개발로 비워진 해운대 중동마을. 내가 그린 오래되고 낡고 초라한 모습의 동네 그림을 두고 나눈 대화이다. 대화는 도시의 전역에 빽빽이 들어서는 아파트와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도시 풍경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십수 년 전, 재개발의 열풍에 부산의 전역이 전국 건설회사들의 각축장이 된 적이 있다. 이른바 브랜드 상품들이 휩쓸던. 그리고 그 열풍이 사그라질 즈음에는 부산의 건설사들이 후발로 우후죽순 아파트들을 지어내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도시적 맥락 따위에는 관심이라도 있었을까? 그러기에 건설사는 시청의 앞마당과 같은 그 부지에 얼마나 많은 세대수의 집을 지어낼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 아닌가. 시장실에서의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던 시장님의 심경에 대하여 짐작할 수 없으니 그 또한 안타깝다.
대화는 더 이어졌다. “그들은 이제 부산 땅에서 돈도 많이 벌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시민들을 위하여 최소한의 염치는 가지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요?” “땅을 사서 집을 지어 파는 경제 행위를 어찌 탓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제어하고 염치를 가질 때 그 경제는 건전하고 이룬 자본은 빛이 납니다.”
나는 건설사의 눈에 소막마을, 매축지마을, 중동마을이 단순한 땅 몇 평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그것의 소멸을 안타까워하고 그림으로 그려 놓을 생각을 하듯. 건설사 사장님에게도 힘들고 아팠던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쯤은 기억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땅의 어느 한 부분은 옛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장소로 남겨 두면 어떨까?
도시계획을 수행하는 관료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옛 마을의 십 분의 일, 있던 그대로 남겨 놓기.’ 그리고 건설사 사장님에게는 이런 말씀 드리고 싶다. “그동안 시민의 기억을 열심히 허물어 간 데에 대한 속죄라 생각하십시오.”
2023-03-0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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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리의 상상력이 닿는 곳
여행 유튜브를 즐겨본다. 게으른 몽상가의 기질을 타고난 내게는 참 좋은 세상이다. 나는 편안하게 안방 침대에 누워 나 대신 누군가의 경험을 생생하게 대리 체험한다. 하루에 여러 나라, 여러 곳을 둘러볼 수도 있지만 나는 대체로 한 장소에 대한 여러 유튜버의 브이로그를 보고 그것의 총합을 취한다. 내가 직접 하는 여행보다는 덜 하겠지만 여행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에너지에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나는 곧잘 새로운 여행지에 빠져 며칠 동안 영상을 탐한다. 지난주 나는 치앙마이를 다 가본 것처럼 알게 됐다.
내가 아는 소설가는 구글 지도만 보고 여러 도시가 배경인 장편 한 편을 썼다. 또 다른 작가는 친구가 보내 준 메일 몇 통과 이미지 사진으로 뉴욕 이민자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써냈다. 경찰서 유치장을 실감 나게 쓴 작가는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몇 년 전 다큐 프로그램 제작자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적이 있다. 심사위원들은 입을 모아 분명 방송 쪽 일을 하는 사람일 거라고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어떤 작가는 생생하게 경험한 장소에 대해서는 오히려 잘 못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의 경험은 상상력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소설을 쓸 때 자기 체험과 인터뷰, 자료 조사는 꼭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경험과 자료가 있다고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건 몇 줄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넘치는 경험과 인터뷰, 자료가 참고에 그치고 버려질 때, 나머지 빈 곳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상상력에는 힘이라는 말이 자주 붙는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마음속으로 그려내는 힘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어떤 사물이나 공간, 상황을 우리가 본 것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그려낸다. 구체적 체험보다 더 선명한 상상적 체험을 남기는 글은 많다. 하지만 유튜브로 이러한 상상력을 보충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화면 속에서는 대부분 좋은 것들만 편집되어 제공되기 때문이다. 어둡고, 위험하고, 힘들고, 지치고, 냄새나는 것들은 적당히 걸러진다. 아마 조회 수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인 것 같다.
한파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고독사 기사를 종종 마주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아버지가 숨진 쪽방에서 4개월 후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한다. 쪽방에는 여전히 각종 고지서가 쌓이고 있다고 한다. 밀린 공과금이 알리는 죽음들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파트 수신함에 우편물이 쌓여 있으면 나는 상상하게 된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올해 한 지자체에서는 동별로 ‘대문 살피기의 날’을 지정했다. 통장과 반장이 지역 내 모든 가구의 대문과 우편함을 살펴 고지서, 전단이 쌓여 있는지 확인하고 위기가구를 늦기 전에 발굴하기 위함이다.
김현은 〈분석과 해석.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이라는 책에서 “모든 예술 중에서, 소설은 가장 재미있게, 내가 사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반성케 한다. 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은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라고 했다.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아니라도 나는 우리가 이웃과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상상했으면 좋겠다. 자기 죽음을 신고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그래서 지금도 ‘우편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상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상상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하다고 믿고 싶다.
2023-02-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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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당신의 이름
“엄마, 박지성이 죽었어.” 아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그렇게 말했다. 박지성? 내가 아는 그 박지성? 얼마 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멀쩡히 해설까지 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나보다 나이도 적을 텐데? 인터넷에서 가짜 뉴스라도 본 거 아니야?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아이가 자기 방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어항을 가리켰다. 한 자짜리 사각 어항의 구석진 곳에 체리새우 한 마리가 뒤집힌 채 죽어 있었다. “쟤가 박지성이야?” “응.” “나머지 애들은 이름이 뭔데?” “메시, 호날두, 손흥민.”
아이가 키우고 있는 체리새우의 몸길이는 2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그 작은 생물체들에게 각각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분간이 가능한가? 나는 죽은 체리새우를 건져내며 얘가 박지성인지 어떻게 아냐고 아이에게 물었다. “잘 보면 다 특징이 있어. 전부 달라.” 나는 죽은 박지성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명에는 경중이 없었고, 죽은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그 이름은 내 손 위에 무겁게 얹혀 있었다.
문득 지난달에 보았던 ‘페르시아어 수업’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포로로 잡힌 유대인 질은 총살당할 위기에서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다. 수용소의 독일군 대위가 페르시아인을 발견하면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명령해 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 동생이 있는 테헤란에 가서 평범하게 식당을 운영하며 살겠다는 꿈을 가진 대위 코흐는 질에게 목숨을 살려줄 테니 주방에서 일하면서 매일 저녁 자신에게 페르시아어 단어를 가르치라고 제안하고, 질은 살아남기 위해 그날부터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그러나 기록할 펜과 종이도 없는 상황에서 매일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누적된 단어들을 모두 기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질이 그런 상황에 절망할 무렵 대위 코흐는 수감된 유대인의 명단 정리를 그에게 맡기는데, 질은 그 이름들을 보며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일에 힌트로 삼는다. 이를테면 막스(Max)라는 이름에서 M을 뺀 악스(Ax)를 ‘죽음’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변환하는 식으로.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2차 세계대전은 끝났고 독일은 패배했다. 그러나 진상 조사는 언제나 쉽지 않다. 영화의 끝부분에서도, 수용소 관련 문서들은 나치에 의해 대부분 불태워져 사라졌기 때문에 수용소의 실태 조사는 생존자의 기억에 겨우 의존하여 이루어지게 되는데, 바로 그 때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며 기억해 두었던 희생자들의 이름이 질의 입에서 호명된다. 그가 2840명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이름들은 ‘수용소 희생자’로 묶이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개별성과 특별함을 가진 각각의 존재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비극의 현장에서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하며, 많은 경우 방관자와 구경꾼으로 남는다. 방관자와 구경꾼들은 쉽게 이런 말을 한다. 지겹지도 않아요? 그만 좀 합시다.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옵니까? 막말로, 나라 구하다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
이미 상처 입은 이들의 가슴에 또다시 가해지는 린치…. 막말인 줄 알면 하지 말아야 되는 거 아닌가? 모든 생명은 존엄하고, 이름 불릴 자격이 있으며, 개별적으로 아름답고 특별하다. 그런 존재들이 국가의 폭력으로, 전쟁과 재난으로, 사회적 참사와 자본주의 시스템의 결함으로 어느 순간 이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잃어버린 이름들을 잊지 않고 불러주는 것은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3-02-1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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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영화관에 가는 이유
이모를 따라 처음 들어간 극장은 어둠 속에 웅크린 곳이었고, 드문드문 사람의 머리가 보이는 곳이었다. 희미한 냄새도 났던 것 같다. 늦게 들어온 관객들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찾아야 했는데, 실수로 고개라도 들며 화면에 비친 자기 그림자에 무안해해야 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본 영화는 ‘삼국지’였다. 덥수룩한 장비와 익살맞은 소년 캐릭터가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아야 했던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 우리가 극장에 왔을까?”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이모를 따라 들어올 때만큼 빠르게 극장을 빠져나갈 때도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요즘 그때 막연했던 질문이 간혹 떠오른다. 팬데믹 이후 많은 이들이 혼자 영화를 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우리는 이제 거실에서, 방에서, 컴퓨터 앞에서, 그리고 휴대전화로, 유튜브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질문의 한 형태로, ‘우리가 이제 영화관에 갈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되찾을 수 있겠다. 우선, 최신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끌어낼 수 있다. 세계 인구의 몇 분의 일이 가입했다는 한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회사의 영화 콘텐츠 서비스도 최신 영화 개봉 순위에서는 적어도 한두 달 이상 뒤처져 있다. 영화 제작에 투여되는 자본의 논리를 고려하면, 영화는 영화관에서 먼저 개봉하고 그 이후 다른 곳에서 서비스되어야 한다. 그러니 최신 영화 때문이라도 영화관에 가지 않을 수 없다는 답이 찾아질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대답은 은근히 시간이 해결해준다. 개봉 영화를 당장 보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한두 달만 견디면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인과의 데이트나 사교 목적으로 영화관에 간다는 답변도 예상할 수 있다. 쥬세페 토르나토레는 ‘시네마 천국’에서 영화관에 몰려가는 쏠쏠한 재미들을 보여 주고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일을 한다. 연인을 만나기도 하고, 세상의 소식을 듣기도 하고, 즐거움을 찾기도 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도시에는 이러한 기능을 대체할 개별적 장소들이 너무 많다. 굳이 영화관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아야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이도 있고, 스크린이 커서라는 대답도 들은 기억이 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토록 많은 영화관이 성업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1년 동안 영화의전당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환한 세상에서 팬데믹의 좁은 세상까지 따라다니던 질문과 더 깊게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왜 우리는 영화관에 가는가? 아직 만족스러운 답은 찾지 못했지만, 이 질문이 지금 세상에 필요하다는 확신은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화관을 이용하던 전통적인 이유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끊임없이 늘어났다. 오래된 영화부터 최신 영화까지,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영화에서 소수 관객만 열광하는 영화까지, 보편적인 소재와 주제로 다듬어진 영화에서 극단적인 전문성으로 무장한 영화까지. 하지만 영화는 언제나 더 많은 이들이 보아줄 때 언제나 더 많은 자부심을 갖는 장르였다. 그러한 영화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영화관은 이제 새로운 생존의 이유를 궁리해야 할 때이다.
더구나 우리는 팬데믹 이후의 세상을 다시 사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그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더 의미 있는 것들을 선택할 특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감히 우문을 던져 본다. 여러분의 영화관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만의 영화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곳에서 볼 수 있는 남다른 영화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3-02-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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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도시에 대한 동물적 상상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게오르그는 어느 날 제 몸이 거대한 벌레로 바뀌었음을 알아채고 비로소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방 밖의 식구들은 아무 관심이 없으니 철저하게 홀로이다.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모든 궁리와 방안은 오로지 자신만의 몫이며, 울이 되었던 타인과의 관계란 무척 허무한 것임을 알게 된다.
‘엘리펀트 인 더 룸(elephant in the room)’. 코끼리가 방에 들어가는 엉뚱한 상상 또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거대한 코끼리가 좁은 방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우선 둔한 걸음걸이로 인하여 방안의 가재도구들이 박살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한 상상은 영화 쥬만지에서 한 장면으로 연출되었다. 마술 가방에서 나온 야생동물들이 집을 향하여 돌진하고, 관객들은 숨을 죽여야만 했다. 갇힌 코끼리의 답답함은 또 어떠할까?
코끼리를 방에 넣는 상상에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집과 방이란 사람들의 물건과 코끼리의 언발란스를. 그러한 생각이 코끼리를 다시 들과 숲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데에 미친다면 영화의 교훈은 성공이다. 반면, 좁은 방 안에서 점점 몸집이 커져 몇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방 안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을 상상하는 게오르그의 실존적 허무는 어떠했을까? 방 안의 코끼리가 육체적 괴로움에 어쩔 줄 몰랐다면, 카프카의 게오르그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명절을 맞아 부모님 산소로 향하는 길. 부산의 동쪽 끝에서 서쪽으로 향하면서 문득 카프카의 벌레와 쥬만지의 코끼리를 생각하였다. 이 도시가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고 있기에 유유히 차 안에서 도시 전체를 관망할 수 있다. 마치 방 안의 코끼리를 방 관찰하듯이.
장산, 백양산, 황령산이 아니더라도 영주동, 수정동 산복도로에만 올라도 수많은 구릉과 골로 연속된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의 나처럼 차를 타고 해안도로, 광안대교, 부산항대교, 남항대교, 을숙도대교를 지나다 보면, 마치 연의 꼬리와 같이 길고 독특한 도시가 한눈에 든다. 사는 곳을 이처럼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도시가 또 있을까?
도시 풍경은 시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건축가와 도시계획가가 먼저 안목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지만 오랜 도시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도시계획만이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건물 하나하나가 모여 도시가 이루어지듯 결국 시민들의 안목은 중요하다. 도시 사랑. 그것은 참된 시민의 의무이며 역할이다.
시민들이여! 질식할 정도로 꽉 차 버린 이 도시를 관찰해 보시라. 구릉과 골의 구분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 구릉은 깎이고, 골은 모두 콘크리트로 덮였다. 천혜의 해변은 50~60층 건물의 앞마당에 불과하며, 육지의 끝마다 건물이 들어차 시민들은 길을 잃었다. 천편일률적으로 길기만 한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특성을 잃고,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언덕과 코파카바나 해변이 겹쳐보곤 하던 나의 환상은 기억의 저편에 있다.
나는 산과 바다에서 이 도시를 바라볼 때마다 카프카의 벌레와 쥬만지의 코끼리를 발견하게 된다. 질식할 만큼 꽉 차버린 집들과 줄어드는 도시의 인구.
용적의 욕심에 건물은 도로에 큰 그늘을 만들고, 좁은 틈으로 건물 사이 바람은 드세어졌다. 사람들은 높은 집과 좁은 방에 갇혀 버렸고, 밖으로 나오면 길을 잃는다. 재개발 열풍이 도시의 질서와 사람의 삶을 흐트려 놓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하물며, 집이 늘어나자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떠나버리고, 욕망의 찌꺼기가 쌓인 곳에 점점 불빛이 사라지고 있으니 더 큰일이 아닌가.
2023-02-0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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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어바웃 타임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큰 아이는 방학에도 학원 다니기에 바쁘다. 최근 우리는 아이와 대학 입시에 대해 말한다. 아이는 몇 달 전과 달리 진지해졌다. 그 태도만 봐도 아이에게 한 살을 더 먹는 일의 무게가 유난히 큰 한 해 같다.
나는 가끔 큰 가방을 메고 학원 앞에 내리는 아이가 부러울 때가 있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겠지만 나는 열일곱 살이 좋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예쁜 숫자다. 열일곱은 무언가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나이, 실수해도 되는 나이, 실패가 너무 당연한 나이, 실연을 당할 수 있는 나이, 아무것도 늦지 않은 나이라고 아이에게 말한다. 아이는 공부해야 되는 나이이잖아요, 라고 떨떠름하게 대답한다. 아이의 스트레스가 느껴진다. 나는 그런 아이의 스트레스마저 부럽다. 아이처럼 누군가 학원 앞에 나를 내려다 주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그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학원을 마치고 친구들과 먹던 떡볶이, 함께 보던 영화, 서로 주고받던 편지 같은 좋은 것들만 떠오른다. 내 말에 아이는 그게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럼 엄마도 학원 다녀요, 라고 말하고 학원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린다. 학원이 아니라 그 나이 때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부러운 거였는데 아이에게는 놀리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올해는 만 나이가 도입된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모두 젊어진다는 슬로건이 눈에 띈다. 인터넷에서 만 나이 계산 프로그램에 들어가 내 나이를 확인했다. 두 살이 어려졌다. 열일곱은 아니지만 기분이 좋았다.
만 나이 도입을 두고 호칭의 문제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생일이 지나면 친구가 아니라 형이 되는 일이 애매해질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친구 사이의 호칭은 같은 해에 학교에 들어왔는냐에 따라 많이 결정되므로 크게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또 만 나이 도입에 예외는 있다. 정년이나 국민연금 수령에도 변화가 없다고 한다. 청소년 보호법과 병역법 그리고 초 중등 교육법은 기존 연 나이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한다. 술이나 담배를 사는 나이와 입대를 하는 나이, 초 중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이는 연 나이로 한다고 한다.
내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나이를 반긴다. 나도 내 나이가 변함없음을 말하고 기뻐한다. 한두 살 어려지는 일이 가능한 이런 일은 다시없을 일이지 않는가. 나는 지난해 나이를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 그건 선물 같다. 비록 변하는 건 숫자일 뿐이고 내 신체 나이와 기억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시간 여행자가 된 것처럼 두 번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자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 놓친 사랑과 재회하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돌아간 과거에서는 다른 변수와 결과가 발생한다. 다시 살아봐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곳으로 인생은 우리를 데려놓는다.
“이제 난 더 이상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다. 하루를 위해서라도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이 멋진 여행을 즐길 뿐이다.”
영화는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없는 우리의 삶이 소중한 이유를 알려준다.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열일곱을 지나지 않고 자신의 나이에 이르지 않는다. 모두에게 그 나이가 있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모여 인생이 여행이 되는 것 같다. 열일곱 아이의 시간도 나의 시간도 그래서 다 좋은 나이라고 생각된다.
2023-01-2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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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귤 한 박스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사 외에도 조상의 산소에 가서 지내는 묘사(墓祀)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먼 친척들이 산소에 모여 제단에 상을 차리고 절을 하는 일은 텔레비전에서나 보여주는 옛 풍습인 줄로만 알았었다. 이를테면 ‘○○ 고택의 종갓집을 찾아서’ 하는 식의 별 인기 없는 프로그램 말이다. 친정집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어쩌다 마음이 내키면 명절날 작은 상에 평범한 음식 몇 가지와 조부모가 생전에 좋아하셨다던 초콜릿, 담배 등을 올려두고 절을 하는 게 전부였다. 가진 경험이 그뿐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방식이 일반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것저것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집은 요즘 드물 것이다, 라고. 그런데 세상에, 결혼을 하고 첫 제삿날이 되니 어디선가 병풍과 제기(祭器)가 나왔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이 차려지고 홍동백서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웠는데 묘사에 따라갔더니 문중의 어른들이 도포를 입고 유건까지 쓰고서 제사상 앞에서 축문을 낭독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치 관광지의 체험 행사에 온 것처럼 신나게 사진을 찍어댔다. 문중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다. 일을 하러 온 거냐, 놀러 온 거냐, 하고.
묘사에 쓸 음식은 집안마다 순서를 정해 돌아가면서 준비를 했다. 당연히 우리 차례도 돌아왔다. 묘사 하루 전날 음식 준비를 도우러 시가에 갔더니 시어머니가 나에게 근처 마트에 함께 다녀오자고 하셨다. 장을 좀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함께 따라나서면서 평소와 좀 다르시네, 하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웬만해선 내게 일을 잘 시키지 않는 분이었다. 평소에 부엌일을 돕겠다고 옆에서 서성이면 언제나 “할 거 없다.”는 말이 전부였다. 내가 가사 일에 그다지 소질이 없음을 일찍이 간파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 나를 딸처럼 아끼는 마음이 더 큰 거라고 나는 혼자 속으로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소질과는 딱히 상관없는 단순한 심부름 같은 것도 잘 시키지 않으셨고, 장을 볼 때도 “무거운 건 배달시키면 되고, 별로 살 것도 없다.”며 혼자서 총총 다녀오시곤 했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마트에 함께 가자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고, 나는 그것이 추후에 묘사 음식 준비를 나에게 물려줄 것이니 장을 보는 일부터 보고 배우라는 암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트에서 시어머니는 사야할 품목들이 인쇄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문중의 총무가 보내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중 대부분은 이미 샀다고 줄이 쳐져 있었고, 남은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의아스러웠다. 아예 처음부터 하나하나 같이 장을 보는 것이라면 몰라도, 미리 다 준비해놓은 상태에서 얼마 안 되는 품목을 마저 구매하는 데 굳이 나를 데려올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때 시어머니가 내게 물으셨다. “귤은 얼마나 사야 되겠노?” 나는 품목이 인쇄된 종이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고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엑셀로 정리된 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귤 1 box’.
나는 그 순간 좀 울컥했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아무 귤이나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로 한 박스 사면 될 것 같아요.” 우리는 그 귤을 카트에 싣고 계산대로 갔다. 나는 ‘박스’를 굳이 ‘box’라고 표기한 그 사람이 미웠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자신이 읽을 수 없는 어떤 글자들을 마주치는 이들의 당혹스러움에 대해 생각했고, 혼자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나 형식을 맞닥뜨린 이들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게는 낯설고 어려워지는 순간이. 나는 미래의 나에게 꼭 붙어 팔짱을 꼈다. 시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환히 웃어주었다.
2023-01-1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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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인류의 새로운 시작
〈신의 지문〉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레이엄 핸콕은 맹렬하게 학술 탐사와 저술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전공은 고고학으로, 그중에서도 그는 1만 2000년 전에 사라졌다는 초고대 문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사하고 보도하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는 1만 2000년 이전에 이미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형성한 바 있었는데, 그 문명은 외형적으로는 사멸되었지만 그 흔적은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문명의 흔적은 주류 고고학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증거들이기도 한데, 1만 2000년 전에 수렵 생활에 하던 인류로서는 도저히 건설할 수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건축물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레이엄 핸콕은 유사 고고학자 혹은 사이비 학자로 비난받기도 한다. 그의 주장은 인류가 신석기를 거쳐 진화했다는 주류의 발전론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많은 관련 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허구적 창작으로 치부하거나, 상징적 해석에 대한 오해로 간주하기도 한다. 솔직히 나에게는 1만 2000년 이전 초거대 문명이 있었다는 주장의 진위를 가늠할 학문적 역량은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의 이면이 존재할 수 있고 어쩌면 그렇게 숨어 있는 진리가 세상의 모습을 더 올곧게 보여 줄 수 있다는 기대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그러한 존재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 기대를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레이엄 핸콕의 이야기를 한 것은 그가 했던 이야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남아 있는 불가사의한 거석 문명의 흔적이, 대부분 그날, 그러니까 지구가 멸망 직전까지 간 그날의 참상을 후대가 기억하도록 만든 기념물이거나 그날의 공포를 재현하지 않기 위한 방어책 중 하나라고 말한다. 고대의 문명은 초거대 문명을 이룬 자신들조차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던 그날의 피해를 기억하고 그 피해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일종의 조치를 수립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레이엄 핸콕은 현대 인류는 그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고고학이 과거의 유물과 인류의 유산을 통해 인간의 삶과 정신 궤적을 추적하는 학문이라면, 그들이 기억하고 남겼을 ‘그날의 기억’을 회복하고 그들의 주장대로 대비하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인류는 집단으로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그날의 기억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레이엄 핸콕과 같은 고고학자들은 인류의 과거를 낱낱이 캐내어야 한다고 믿는 눈치이지만, 그날의 공포를 체험했던 인류로서는 어쩌면 그날의 기억을 가급적 잊고 싶어 했기 때문은 아닐까.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 모두는 과거 기억과 결별하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 하지 않는가. 만일 망각이 없고, 새로운 시작이 없다면, 인류는 더 큰 위기에 봉착해야 할지도 모른다.
1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은 이를 현실적으로 대변한다. 우리는 1년이 지나면, 묵은 것을 버리자고 말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1년을 맞이하면, 안 좋은 것은 잊고 다가오는 것에 집중하자는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수많은 시간을 통째로 없앨 수야 없겠지만, 우리를 처참하게 했던 기억을 망각의 그늘 밑에 놓아두고 싶어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1년을,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모든 기억을 통째로 잊은 것처럼 행동할 수야 없지만, 지난 1년을 그리고 그 이전의 수많은 ‘1년들’을 뒤로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1년을 건설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시간이 온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충실한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2023-01-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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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새해 그리고 영산암
스케치 여행을 다녀오자는 동료의 말에 또 마음이 설렌다. 몇 해 전, 2박 3일의 건축 기행과 올 초에 가족여행을 하였음에도 안동 기행은 늘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 선비 문화와 건축 유산이 섞여 있는 도시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일정의 첫 순서를 봉정사로 잡았음은 물론이다. 오래전부터 내 마음의 안동 제 일경은 봉정사이다. 겨울 산을 향하는 마음이 바쁘다.
사찰을 기행하고 감격하는 것은 대체로 지금과 같은 때이다. 고즈넉하고 호젓한 느낌, 계절로는 만추의 가을이나 삭풍의 겨울 사찰이 인상 깊다. 봄 화엄사의 화려함이나 여름 송광사의 분주함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의 봉정사. 나는 지금 그걸 보러 왔나 보다.
마음속 ‘안동 제1경’ 봉정사
40대의 필자 고개 숙이게 한
만세루 등 경내 곳곳 복원 공사
건축가들 추앙하는 최고의 공간
영산암 마루에서 풍경 스케치
옛사람 솜씨에 단련되는 마음
이전에도 그랬는데, 오늘도 경내의 곳곳이 수리 중이다. 하지만 사찰의 완벽한 전경을 내 스케치북에 다 담지 못한다 하여 무엇이 문제가 될까? 복원 후의 말끔한 모습을 상상하며, 곳곳에 둘러쳐 있는 공사용 차단막 또한 아름답게 보기로 한다. 설령 복원이 원형에서 조금 빗나간들 어쩌랴. 사찰은 창건의 역사와 관계없이 엄연히 종교가 이루어지는 현세의 도량이니 현대적이고 실용적이어도 무방할 것이다.
한때 문화재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 편견이 있었다. 폐허가 된 파르테논이나 피라미드의 장엄을 기대하듯 단청이 벗겨지고 솔이끼가 앉은 고전을 느끼려는 건축 문화적 욕심을 어쩌겠는가? 하지만 전통 사찰이 가지는 보존과 사용 사이의 혼돈과 고민을 이해하고부터 생각을 바꾸기로 하였다. 세월이 흐르니 사고의 독단도 허물어지나 보다. 이제는 그 변화마저 아름답게 보이니, 원형을 똑같이 보존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던 시절이 아련하다.
40대의 나를 고개 숙이게 하였던 만세루 또한 복원 공사 중이다. 거기에 서서 들판의 노란색을 바라보던 때를 기억한다. 그것들은 익은 벼와 소국(小菊)의 물결이었다. 사찰을 등지고 인간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산의 골을 타고 올라오던 곡물과 거름의 냄새가 향긋한 차 향기와 다름없이 상쾌하다는 것을 알았다. 주변 마을의 농가 수익을 올려주는 소국이 결실의 들판에 가을빛을 더욱 보태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인간 세계의 향기이며, 어쩌면 극락정토의 궁극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세루 아래의 통로가 복원공사로 막히니, 요사채를 오른쪽으로 돌아 산을 더 오른다. 왼쪽의 경내는 뒤로 미루고 더 오르면 마침내 영산암. 뭇 건축가들로부터 우리나라 최고의 공간이라 추앙받는 곳이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ㅁ자 모양을 하고 앉은 건축이 마치 중부지방의 양반집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노송과 툇마루, 건물 모서리의 틈으로 보이는 산의 풍경. 뛰어난 건축가의 솜씨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많은 건축가가 이곳의 공간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건물을 재창조하곤 하였다.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건축적 장소임이 분명하다.
영산암 마루에 한참을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이루지 못한 건축에의 열망, 내 가족의 소사. 스케치북을 꺼내어 잠시 마당과 나무의 풍경을 스케치하였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기웃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또 언제 여기에 올까? 뜬금없이 옛 스님들이 부러워진다.
늘 자신감으로 오르지만, 매번 수가 죽어 내려간다. 건축, 그림, 글. 오늘도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내려가야 할까 보다. 하지만 훗날 다시 오르리라. 40대의 호기는 없어도, 능인, 의상과 같은 고승들의 체취와 빼어난 옛 건축가의 솜씨가 여전히 무지렁이인 나를 시험하고 단련시켜 주시니 나이가 무슨 문제일까?
2023-01-0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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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여름의 커튼
새벽에 잠이 깼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인지 비교적 일찍 잠이 들었다. 침대 옆 창에는 얇은 여름 커튼이 달려 있다. 커튼을 교체하는 일에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는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할 수 있을까? 이런 사소한 일에도 결심이 필요한 나이 듦과 게으름을 누가 알까 봐 부끄럽다. 커튼을 통과해 날이 서서히 밝아오는 것을 보는 일이 새삼 신기하다. 아침이 온다고 말한다.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겨울 새벽의 한기를 느끼며 아이를 안아본다. 아이는 금방 몸을 뒤척이며 자기 방으로 가버린다. 어릴 때는 한시도 품에서 떠나지 않아서 오히려 내 쪽에서 밀어내곤 했는데 그런 시간이 이제는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깨어있지만 오랜만에 불안하지 않다. 언젠가 본 영화에서 주인공은 똑같은 매일이 반복되는 하루를 살았다.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이런 날이 계속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여전히 뼈 아픈 충고가 있고 겹겹이 실패가 있고 이유 없이 흘려보낸 과거가 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아침이 오고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지만 일과를 시작하기까지 아직 여유는 있다.
나는 한 해를 보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조용히 혼자 보내는 방법도 있겠고 여럿이 함께 보내는 방법도 있다. 여행을 갈 수도, 쓰고 있던 소설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내년의 계획을 적어볼 수도 있다. 어떤 방법이든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감사하는 일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건 내게 지나온 시간이 있고 앞으로의 시간이 있기에 가능한 일 같다. 올해를 살아냈고 내년을 살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마음.
지난주 나는 송년 모임에 대한 전화를 받았다. 코로나로 지난 이 년 동안 내게 연말 모임은 없었다. 꼭 필요한 모임도 대부분 취소됐다. 아쉬운 마음에 지난해 온라인으로 비대면 송년 모임을 했다. 줌을 켜 놓고 화면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자주 엉켰고 고정된 배경과 얼굴이 중심이 된 화면은 범죄자의 머그샷처럼 보였다. 그날 나는 친구들 집의 벽지 모양을 알았다. 분위기는 금방 식었다. 직접적인 온기가 없어서인 것 같았다. 한 시간 남짓 얘기를 나누다 우리는 농담처럼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자, 라고 말했다.
내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 올해는 좀 다른 방법의 모임을 해보자고 했다. 고기와 술이 중심이 되는 먹고 마시는 것이 다인 풍경을 좀 바꿔보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망년회의 망에 대해 수다를 좀 떨었다. 망년회의 망이 망할 망(亡)인지 바랄 망(望)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둘 다 아니었다. 한 해 동안 일어난 온갖 괴로운 일을 잊자는 잊을 망(忘)이었다. 망한 절망의 한 해도 아닌, 뭔가를 애타게 바라야 할 마음도 아닌, 그저 잊으며 비우는 것이라는 뜻이 단순해서 오히려 깨끗하고 편안했다.
어떻게 비울까? 누군가 집게를 들고 계속해서 고기를 굽는 일, 돌아가며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건배사를 나누는 일, 이차로 노래방에 가는 일, 숙취로 깨어나는 다음 날. 대신에 다 같이 흑백 사진을 찍으러 가는 일, 옛날 영화를 함께 보는 일, 한 권의 책을 정해 좋았던 구절을 함께 읽으며 한 해를 보내는 일, 불멍을 하며 캠핑장에서 밤을 새우는 일, 야간등산을 하며 별을 보는 일.
그렇게 모여 우리가 죽는다면?
날이 완전히 밝았다. 왜 그곳에 놀러 갔냐고 묻는 폭력이 떠오르고 왠지 그런 이야기들이 무서운 꿈처럼 느껴진다. 살아남아서 우리는 그런 얘기들을 한다.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제는 없는 내일의 확신에 대해, 살아있지만 매일 그날을 반복해서 사는 지옥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올해 일어났던 누군가의 어이없는 죽음과 진행 중인 싸움에 대해, 생의 안전에 대해서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여름의 커튼을 아직은 바꾸고 싶지 않다. 살아남아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다.
2022-12-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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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세상의 모든 열아홉
수능이 끝난 지 한 달이 조금 더 지났다. 그 사이 수능 성적이 발표되고 대입 전형이 진행되고 있다. 수능 성적표가 나오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만점자에 대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만점 비결부터 시작해서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지원했는지, 초중고 시절은 어떠했는지, 사교육은 어느 정도 받았으며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했는지, 심지어는 부모의 직업까지 인터뷰 기사에 모두 나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대학 입시란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해 더 배우기 위하여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넘어서 훨씬 복잡하고 거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러한 매스컴의 호들갑과 대중의 관심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비록 만점자가 아니라 해도 수능을 친 학생들에 대해 어른들은 평소보다 관대하고 포용적이다. 그동안 시간을 쪼개 쓰고 잠을 줄여 가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보아왔기 때문에, 또 앞으로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짧은 시간만큼이라도 실컷 놀고 쉬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베푼다. 놀이공원이나 외식업체, 여행?레저 시설 같은 곳에서는 수험표를 가지고 오면 할인해주는 이벤트도 한창이다.
나 또한 고3 수험생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공부를 아주 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치열하고 힘들게 그 시기를 보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고생했던 아이들에게 어깨를 토닥이며 지금 이 시간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수능과 대학 입시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마음에 걸린다. 수험표 지참 할인 이벤트 같은 것을 볼 때 마냥 훈훈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몇 년을 일했었는데, 그곳에서는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단순히 공부에 대한 재능이나 의지가 없어서인 경우도 있었지만, 진로 결정에 대한 명확한 줏대를 가진 아이들도 있었고,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경우도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국어를 가르치던 내게, 취업 지원 서류로 낼 자기소개서를 봐달라고 가져왔다. 시작과 마무리가 매우 어설펐으며 문장은 비문투성이였지만, 그래도 진솔하고 절실했다. 나는 아이들이 써온 자기소개서를 보고 몰래 조금 울기도 했다. 순탄치 않은 성장 과정을 서툰 문장으로 가감 없이 나열해놓고 “선생님, 틀린 글자 없어요?”라며 말똥말똥한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 아이들에게는, 평범한 고3 수험 생활도, 수능이 끝난 겨울의 해방감도, 수험생에 대한 세상의 관대함도 누릴 기회가 없었다.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한 아이일수록 빠르게 취업이 되어 2학기에는 이미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였다. 자기소개서에 조손가정임을 밝히며, ‘귀사에 취업하게 되면 열심히 돈을 벌어 할머니께 효도하고 싶다’고 썼던 아이는 한 대기업의 반도체 생산직 노동자가 되어 먼 도시로 떠났고 졸업식에도 오지 못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자기가 원하던 기업체에 취직이 되어 기쁘게 떠났지만, 어떤 아이들은 취업이 잘 되지 않아 불안정한 아르바이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했다. 여러 이유로 일찌감치 학교를 떠난 채 소속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삶의 형태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다수가 걷는 길로 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선택일 수도 있고,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일 수도 있다. 밤을 새워 공부를 했든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밤샘 작업을 했든 혹은 위태롭게 흔들리며 밤거리를 쏘다녔든, 세상의 모든 열아홉들은 치열하게 자신의 마지막 청소년기를 살아냈을 것이다. 그러니 수험생이 아니었던 아이들의 어깨도 따뜻하게 토닥여주는 어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수고했다고, 우리가 책임지고 지켜주지 못한 세상에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고 존재해준 것만으로도 그저 고맙다고.
2022-12-2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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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천천히 걷는다는 것의 의미
요즘은 길에서 일부러 걷고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년 전 올레가 유행하면서 전국 곳곳에 걸을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늘어났다. 일상에서 걷고자 하는 이들이 늘자, 그들의 걷는 속도에 맞추어 관광 방식마저 변화하였고, 관광지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까지 걷기 좋은 길이 확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길들의 명칭도 다양해서 둘레길, 해파랑길, 소리길, 해안길 등 지역의 특색과 개성을 살린 이름이 곳곳에 붙어 있다.
20년 이전의 세상과 비교하면, 현재 상황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차를 갖기 위하여 집중할 때가 있었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자가용은 부의 척도이지만, 어느 한때는 스스로 중산층에 들기 위하여 집집마다 차를 구입하고 그 차를 세상에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때는 관광과 여행의 중심을 차가 차지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세상을 돌고자 했고, 차도를 따라 관광지를 찾는 데에 열중했다.
지금도 여전히 자동차 보급이 늘고 있고 여행을 떠날 때 차를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는 중장거리 이동용이고 정밀한 관광은 눈으로 하고자 하는 이들도 역시 늘었다. 그러한 이들은 오래된 골목길을 걷고, 자연과 어우러진 길을 일부러 탐험한다. 먼 길을 걷기 위하여 혹은 산길을 타기 위하여 며칠에 걸쳐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인생의 목표 중 하나로 이러한 길들을 연속적으로 방문하는 일을 수립하기도 한다. 느리게 움직이고 천천히 보게 하는 걷기가, 삶의 다른 차원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된 삶에 맞게 다른 것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령 공원을 만들어 운동과 산책을 장려하는 도시 정책이 우대받고 있고, 반려견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자 그 길과 공원의 곳곳에서 정자와 쉼터가 지어지고 있다. 본래 그 자리에 토성이 있거나 읍성이 있으며 그곳은 성곽의 길이 될 것이고, 그 도중에 오래된 누정이 있었으면 새로운 관망지를 얻은 조망의 길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길과 여행과 사람과 자연을 전체로 묶는 인식의 새로운 지평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처럼 2000년대 우리는 천천히 걷거나 자기 힘으로 움직이면서 주위를 다른 눈으로 보는 방식에 제대로 터득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빠르고 효율적인 삶의 이면에 숨어 있는 느릿한 정취도 찾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더 신속하게 모든 것을 시행해야 하는 업무 시간과 노동의 직분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삶의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에 대한 사색과 무관하지 않다. 현실에서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쪼개 써야 하지만, 그렇게 간직된 시간을 자신만의 길 위에 온전히 쏟아붓는 가치와 기쁨과 자기 확인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작은 정자를 발견하고 그 이름에 놀란 기억이 난다. “**노을정” 그곳은 노을이 아마도 예쁜 곳일 거다. 아직 그곳에서 노을을 볼 여유는 만들지 못했지만, 해당 지명에 한글 ‘노을’을 결합하여 이러한 이름을 만든 변화는 저절로 생각을 멈추게 한다. 앞으로도 그곳에서 노을을 보기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모아야 하겠지만, 1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위에서 노을을 한 번쯤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자기의 길을 걸어 1년을 마무리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시간이 길이라면 그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될 것이다. 2022년 한해도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2022-12-15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