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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MZ를 배우는 MZ
“요즘 MZ세대들은 이런 말 쓴다며?” 최근 이런 얘기 들을 기회가 많았다. 처음 몇 번은 당황스러웠지만, 이젠 꽤 변죽 좋게 “아유, 그럼요” 하며 받아친다. 적극적인 동조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극적인 방어다. 나는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않는 회색지대 MZ이기 때문이다. ‘제 생각은 좀 달라요’ 하며 MZ세대와 스스로를 분리하는 ‘요즘 애들’이 있는가 하면, ‘저는 MZ세대처럼 말하고 행동해요’라며 트렌드세터(유행 선구자)를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침묵함으로써 ‘MZ세대’ 이미지에 조용히 편승하는 편에 속한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인터넷으로 MZ를 배우는 MZ가 되어 가고 있다.
자기 주관과 개성이 뚜렷한 세대. 아마도 요즘 온라인 세상에서 그리고 있는 MZ세대의 모습인 듯하다. OTT 플랫폼 쿠팡플레이에서 공개되는 코미디 프로그램 ‘SNL’은 20대 사원들을 현실감 있게 그려 내 대중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채 노래를 들으며 일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되려 상사를 눈치 보게 만들고, 의례적으로 막내들이 해 온 행동들(수저 놓기, 물 떠오기, 자진해서 심부름하기)을 하지 않는다. 물론 과장이고, 속으로야 한 번쯤 생각해 봤을 상황이다. 대놓고 과장된 캐릭터들이 등장해 불편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그게 웃기다. 불편하면서도 짜릿하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요즘 애들’에 편승하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문제의식은 있는데 용기는 없는 마음을 콘텐츠가 대변해 준다.
사실 현실에서 미디어 속 MZ세대처럼 할 말 다하고, 남들 신경 안 쓰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을 실제로 본 건 손에 꼽을 정도다. 어쩌면 남을 지나치게 신경 쓰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더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요즘 애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 속 MZ세대는 사실 실체가 없다. 어디를 가나 회자되는 MZ 밈(유행 콘텐츠)도, 사실 온라인 세상에 존재하는 모방 콘텐츠의 산물일 뿐이다. MZ세대의 이미지는 왜곡된 채로 일반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MZ 문화가 트렌드를 지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MZ세대 문화를 향유하는 것에 일종의 이익이 따라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MZ세대로서의 이미지가 먹힐 때 휴가를 쓰자”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 있다. 나에게 주어진 정당한 휴가인데도 상사 눈치를 보고 쓸지 말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있는데, 이왕이면 MZ세대 문화가 유행처럼 퍼져 있을 때 휴가를 쓰자는, 웃기지만 다소 슬픈 이야기다. 노동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눈치 보기’가 팽배한 경직된 사회 속에서 ‘눈치 없는 척’ 휴가를 쓰는 건 누군가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 놓인 노동자에게 새로운 문화는 ‘요즘 애들처럼 한 번 해 보자’ 하는 용기를 줄 수 있다. 조직도 중요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도하게 눈치를 보며 쉬지 못하는 상황은 피하자는 것이다.
<불안>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만화가들은 우리가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어색한 측면들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이 지점이야말로, 현대인들이 MZ 콘텐츠를 소비하고 즐기는 이유가 아닐까. 꼰대 같은 상사를, 책임감 없는 누군가를, 배려 없는 타인을 대신 일갈하고 자신의 행동도 돌아보게 만드는 것. 이것이 유머 콘텐츠의 순기능이다.
사실 MZ세대 문화는 전 세대가 즐기고 향유할 만한 문화다. 우리는 모두 답답한 일상에서 ‘사이다’ 같은 일침을, 비상식적인 규칙에 대한 반기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당당한 태도를 꿈꾼다. 지금의 MZ와 멀어 보이는 기성세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언젠가는 청년이었다. 미디어를 통해 본 X세대는 지금의 MZ보다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이끌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그 당시 새로웠던 문화가 지금의 기성문화가 된 것뿐이다. 새로운 세대는 기성세대와 충돌하고 화합하면서 변화를 도모할 수밖에 없다. MZ도 MZ 문화를 배우는 이 상황에, 다른 세대라고 배우지 못할 건 없다.
결국 중요한 건 ‘MZ세대의 문화’가 아니라 ‘변화하는 자세’다. 청년으로서 지금은 MZ 문화가 편하고 즐겁지만, 앞으로 나이가 들었을 때 새로운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새로운 문화가 내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대를 비판한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것들은 계속 등장하고 세대는 변한다. 비록 실체 없는 세대론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세대의 출현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 변화에 민감한 어른이고 싶다.
2023-02-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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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사적 욕망의 정치
모든 사람은 건강하고 부자 되고 자기실현을 하고 싶어 한다. 이런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문제는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에는 개개인의 ‘사적 영역’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공동의 ‘공적 영역’도 존재한다. 개인의 사적 욕망이 서로 격하게 갈등하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사익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개인은 없으며 행복할 수 있는 개인도 없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사익과 공동체의 공익과 공동선은 항상 미묘한 경쟁 관계 속에서 조화로운 공존을 형성해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 국가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사익과 공동체의 공익이 조화롭게 실현되는 사회가 좋은 국가공동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좋은 국가공동체인가? 그렇다고 답할 국민은 별로 없을 듯하다. 요즘 대한민국은 사적 욕망의 정치가 난무하고 있다. 대통령도, 정당도, 정부 부처도, 국민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익만 팽배하고 공익과 공동선은 실종됐다. 0.7% 포인트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은 야당과의 협치를 거부하고 취임 8개월이 지나도록 야당 정치인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검찰과 경찰, 감사원, 국정원, 국방부, 통일부 등을 총동원한 사정 정치와 공안 정치로 전임 정부와 야당 대표를 몰아치고 있다.
공동체 사적·공적 영역 함께 존재
사익과 공익 경쟁하면서 공존해야
대한민국 사적 욕망의 정치만 난무
대통령 정치 보복·정치 실종 자행
정치 무관심, 민주 시민 자세 아냐
국민이 민주적으로 다시 깨어나야
대통령은 개인의 사적 욕망보다 공익과 공동선에 최우선적으로 복무해야 하는 자리 아닌가? 대통령이 대한민국 공동체의 공익과 공동선을 위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공익과 공동선은 번영과 국민의 행복 그리고 평화 등을 포함한다. 이런 것들을 전력으로 추구해도 모자랄 판에 대통령이 정치 보복과 정치 실종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국민의힘이 진정 번영과 국민의 행복과 평화를 추구한다고 보기 어렵다. 국민의힘은 결국 물가 폭등, 복지 감소, 서민 생활의 어려움, 대내외 경제적 침체, 한반도 안보 불안을 가져왔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여러 심각한 실책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율은 국민의힘에 뒤지고 있다. 민주당이 이재명 사법 리스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검찰을 통한 사정 정치와 공안 정치로 전 정부와 이재명 대표를 압박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민주당은 이재명 지키기가 아니라 공익과 공동선과는 거리가 먼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국민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 주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그리고 한동훈 장관의 실언이나 불법 의혹, 이상 행적과 같은 문제에 선차적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믿음이 가는 야당의 모습을 스스로 훼손해 왔다. 이런 모습은 야당이 추구해야 할 공익과 공동선과는 괴리감이 있다.
정부 부처도 예외는 아니다. 검찰, 경찰, 감사원, 국방부, 통일부 등의 최근 행적은 보고 있기에도 민망하고 부끄럽다. 정치적 독립을 외치고 그 누구라도 죄가 있으면 수사하고 기소하겠다던 결기를 보이던 강골 검사들은 현 정부에서 다 어디로 갔나? 지금 검찰은 정치적 독립을 누리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을 듯하다. 대통령 가족들의 불법 의혹에 대한 수사는 감감무소식이고, 대장동 50억 클럽 고위 법조인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기껏 얻어 낸 경찰 독립과 수사권 독립은 현 정부 들어 거의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경찰은 다시 행안부 장관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지만 조용하기만 하다. 이외에도 감사원은 대통령 사정 정치의 손발이 되었고, 국정원 역시 공안정국의 도구로 되돌아갔다. 국방부는 급속한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 야기한 국방상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언급도 표출하지 못하고 있고, 통일부는 반통일부와 분단지속부에 가깝게 변신했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공적인 공민(公民)이 아니라 사적 욕망의 화신에 가깝다. 현 정부 들어 퇴행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국민은 전반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하다. 심지어 사적 욕망에 빠져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국민도 존재한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무관심과 무기력함은 대한민국 공동체의 공익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민주 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좋은 국가공동체는 국민 개인의 사적 영역과 국민 공동의 공적 영역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공동체다. 개인의 사적 욕망도 중요하고 공동체의 공익과 공동선도 중요하다. 하지만 일반 국민이 아닌 대통령과 정당, 정부 부처는 공익과 공동선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이들이 사적 욕망의 정치에 빠져 있다면 이건 정말이지 나라의 큰 우환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이 다시 민주적으로 깨어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23-01-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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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정책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은 '저출산' 대책
두 살배기 아이를 키우는 후배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육아휴직에 이어 무급휴직까지 신청할 만큼 업무 복귀 의욕이 크고 자기 일에 대한 애정도 있는 친구였다. 어린이집 대기 순번은 줄지 않고, 돌 갓 지난 아이를 키우면서 전일제(풀타임) 근무는 부담스럽고, 마냥 휴직을 하고 있기에는 파트타임 일이라도 찾아야 하는 처지라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 했다. 대기 순번이 길다고 하기에 국공립 어린이집인가 했더니 아파트 안 작은 사립 어린이집이란다. 그마저도 배 속에 있을 때 대기 순번을 걸어 놓아야 겨우 입성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같은 부산 안에서도 태어나는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동(洞)에 유일한 국공립 어린이집을 폐원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사립 어린이집마저 1년 넘게 기다려도 줄을 서야 하는 지역이 있으니,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지역이 대체 어디인가 싶다. 거기다 후배는 파트타임 일자리가 없어 여전히 구직활동 중이다.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 1등 도시가 부산이라는 기사를 공유했더니 헛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한창 자기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가야 할 청년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후배 앞에 놓인 상황을 보며,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절로 헤아리게 된다.
육아 부담에 경력 단절하는 ‘육아맘’
아이 낳아 키울 자신 없다는 청년들
합계출산율 0.81명 최저 한국 현주소
저출산고령화위 부위원장 해임 논란
정치엔 뜨거운 관심, 정책엔 무관심
저출산 극복 장기 비전·대안이 중요
‘저출산’의 원인이라고 손꼽히는 고용불안이나 출산·육아 부담, 교육비와 주거 부담, 일 생활 조화의 어려움 등은 뭐 하나 쉬운 대책이 없다. 국가의 명운이 걸렸다고 할 만큼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을 거론한 바 있는데, 3대 개혁 과제 모두 ‘저출산’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2021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8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는 상황에서 그만큼 ‘저출산’ 대책은 적응과 완화라는 두 방향 속에서 중대하면서도 시급한 국가 과제이기도 하다.
얼마 전 나경원 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내놓은 헝가리식 ‘저출산’ 대책이 언론의 주목을 한 번에 받은 바 있다. 아이를 낳으면 부동산 대출 빚을 탕감해 주겠다니, 솔깃한 대책이었다. 대출이자가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오르기만 하는 요즘에 말이다. 실제 다른 나라에서는 출산율 제고 효과를 본 파격적이고 적극적인 정책 제시였다. 거기다 한국은 육아 보조금 비율이 OECD 국가 중 최하위이기도 하다. 나 전 부위원장은 “돈을 준다고 출산을 결심하지는 않으나, 돈 없이 해결되는 ‘저출산’ 극복은 없다”며 정책 추진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표 선거와 맞물린 대통령실과의 갈등 속에 결국 취임 석 달 만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됐다. 치열한 정치적 공방이 연일 이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실에서 즉각적으로 반박하며 해임까지 할 정도로 나 전 부위원장의 ‘저출산’ 대책 발언은 중대한 실책이었는가, 혹은 여당의 치열한 당권 경쟁 속에서 당대표 선거가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는가, 혹은 애초부터 감투 나눠 주기식의 잘못된 인사였으며 유력 정치인의 스펙 쌓기용에 불과했는가. 그 어떤 논쟁거리도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대통령실과 ‘저출산’ 타이틀을 단 정치인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대조적으로 ‘저출산’ 정책에 대한 차가운 무관심,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실은 나 전 부위원장이 내놓은 저출산 대책에 즉각적으로 반박할 정도의 적극성으로 저출산 대책 그 자체에 대한 장기적 비전과 대안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제시했어야 하지만 그런 모습은 전혀 보여 주지 못했다. 정책이 실종된 무책임한 정치에 시민들은 심한 피로감과 냉소를 느끼고 있다. 유력 정치인인 나 전 부위원장 역시 스스로 부총리급이라 자임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의 소임을 출마 여부만큼이나 고심하였는지 의문이다. 여론 역시 다르지 않다. 언론에서 ‘저출산’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봐도, 나 전 부위원장과 대통령실 그리고 국민의힘 당대표 출마를 둘러싼 기사가 대부분이다. 국가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과제로서 심도 깊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정책은 실종되고 ‘저출산’이라는 말 자체가 진흙탕과도 같은 정치판의 싸움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2021년 기준 31.12%로, OECD 39개 회원국 중 가장 큰 것으로 발표되었다. 26년 연속 최악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 사회는, 정부는 아는가. 이 현실 속에서 오늘도 수많은 여성들이 독박육아를 마치고 육퇴(육아퇴근) 중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자신의 직장을 여전히 찾고 있다. 이들을 위한 정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2023-01-2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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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그래도 희망이다
2030 월드엑스포 유치에 대한 시민의 열망이 크다. 여론조사는 열에 여섯이 이를 낙관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 또한 올해 그 염원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오는 4월에 세계박람회기구(BIE) 실사단이 부산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에 대비하여 부산은 개최 예정지인 북항을 단계에 따라 인프라를 조성하는 한편 도시 브랜드를 고취하기 위한 여러 기획을 제시하고 있다. 도시 브랜드 슬로건을 20여 년 써 오던 ‘다이내믹 부산’에서 새롭게 ‘부산 이즈 굿’으로 바꾸었다. ‘다이내믹 부산’이 내포한 역동적 이미지를 이어받으면서 보다 성숙한 도시를 표상하는 의미를 수용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2030 월드엑스포의 주제인 ‘자연과 지속가능한 삶’에 상응하는 ‘기후산업국제박람회(WCE)’를 오는 5월에 부산시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중앙부처가 협업하여 해운대 벡스코에서 개최한다. 세계가 직면한 최대 이슈인 기후 위기에 대응하면서 부산의 이미지를 이에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 그 효과가 기대된다.
새 도시 브랜드 성숙한 의미 수용
엑스포도 기후 위기 대비 초점을
인천공항 개항 후 인천 급속 발전
대구도 ‘투 포트 시티’ 전략 전환
가덕 신공항 절대 흔들려선 안 돼
동천 등도 북항 개발과 연계해야
2023년 세계경제포럼(WEF)에 대비하여 지난 11일 공개한 ‘세계 위험 보고서’는 향후 10년간 세계 경제를 위협할 첫째 요인으로 ‘기후변화 완화 실패’를 내세웠다. 둘째가 ‘기후변화 적응 실패’, 셋째가 ‘자연재해와 이상기온 현상’, 넷째가 ‘생물다양성 손실과 생태계 붕괴’라는 점에서 작년에 이어 ‘기후 위기’는 앞으로도 가장 중대한 위험으로 인식된다. 무엇보다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세계가 격변하고 분열과 격차가 심해졌다는 점이 당면한 현실이다. 불균등과 불평등이 더욱 커지면서 세계가 기후 위기에 공동 대응하는 기후 행동에 실패할 공산이 높아졌다. 벌써 그 징후가 UN이 목표한 기후 상승 저지선인 1.5도를 상회하여 1.8도에 이른 데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를 주제로 내세운 2030 부산월드엑스포가 세계를 설득하고 대비해야 할 과제가 뚜렷하다.
지금 부산은 2030 월드엑스포에 도시의 명운을 건 느낌이다. 올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결판이 난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이탈리아 로마, 우크라이나 오데사가 경쟁 대상 도시이다. 사우디의 경제력, 이탈리아의 유럽주의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정세 변동 등의 요인이 있어서 부산으로서도 쉽지 않은 국면이다. 한국의 경제력과 문화력을 극대화하고 최적의 개최 장소가 부산이라는 이미지로 세계를 유인한다는 전략으로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대목에서 기후 위기라는 지구적 위험을 상기하는 개념을 두루 기입할 필요가 있겠다. 기후 위기는 환경은 물론 경제, 도시공간과 건축, 문화와 식생활 전반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세계적이고 사회적인 합의와 행동의 실패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긴급하기에 근본적인 위험을 실감하지 못하는 맹목이 현실이다.
부산은 지금 2030 월드엑스포 유치와 가덕도 신공항 조기 건설을 연계하고 있다. 사실 전자가 아니라도 후자는 국가적 과업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인천국제공항이 인천을 변화시키고 있는 지표가 분명하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3년간 4단계 개발을 추진하였고 2025년에 이르면 여객과 화물에서 미국 애틀랜타 공항과 중국 홍콩에 버금가는 수위 공항이 될 전망이다. 공항은 첨단 산업을 유인하고 사람을 불러들인다. 영종국제도시 30만, 송도국제도시 35만, 청라국제도시 15만의 증가로 조만간에 인구 340만에 육박하여 부산을 앞지를 공산이 크다고 한다. 최근 인천은 120년 전 제물포항에서 시작된 해외 이민을 기념하여 하와이에서 ‘인천의 날’을 선포한 일이 있다. 인천과 하와이를 연결하는 태평양 시대를 궁리한다. 중국과 교역하는 황해시대에 그치지 않고 그 영역을 확장하려 한다. 대구 또한 이에 질세라 ‘투 포트 시티’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경북 군위군을 편입하여 대구 신공항경제권을 확립하고 포항항을 거점으로 동해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이다. 과감하게 분지에서 바다로, 세계로 나가려는 의지를 표출한다.
다행히 가덕 신공항 기본조사와 설계가 착수되었다. 적어도 제2의 중추적인 국제공항이 남부지역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다른 무엇에 앞서는 국가적 과업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2030 월드엑스포와 연계할 수는 있으나 필수조건은 아니라 생각한다. 수도권에 대응하는 메가시티 연합의 붕괴 이후에 남해안 벨트가 부상하고 있다. 해역은 당연히 존재하는 사실이지만 부산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이와 더불어 육지의 바다인 강과 하천을 하나로 통합하는 시각도 요긴하다. 낙동강 유역과 수영강 유역은 물론 보수천, 초량천, 동천 등 수많은 하천은 해역으로 이어진다. 북항 2단계 개발과 동천 유역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바다를 살리고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도시 모델이 2030 부산월드엑스포로 부산 북항에서 실현되기를 염원한다.
2023-01-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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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유튜브에 포획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지난해 7월, 국민의힘 혁신위원회에서 주최한 ‘의견 수렴 경청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에게 당의 혁신 방향을 구하는 자리였다. 나는 비록 국민의힘 당원은 아니었지만, 여당이 상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현재 청년들이 국민의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엇을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경청회에서 나온 의견은 다양했다. 특히 유튜브에 대해선 패널마다 견해가 엇갈렸다. 나는 당이 정치 유튜버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면 편협한 사고에 빠질 수 있고 결과적으로 일반적인 국민의 시선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유튜브가 대세인 만큼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정치 유튜버들과 협업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패널은 “유튜버들의 영향력이 이미 웬만한 언론을 뛰어넘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정치판의 유튜버 전가의 보도 맞나
콘텐츠 아닌 플랫폼이라는 사실 간과
구독자 수 아니라 합리적 주장이 중요
보수 강경 유튜버들 최고위원 출사표
눈앞의 팬덤 유혹에 포획되지 말고
평범한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사실 그 자리에 참석한 패널들뿐만이 아니라, 정치판에서는 이미 유튜브가 전가의 보도처럼 여겨지고 있다. 뭐만 하면 유튜브로 홍보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유튜브의 영향력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선 후보들이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다. 문제는 그게 어떤 채널인가다. 당시 화제가 된 채널 중 정치를 다루는 채널은 없었다. 주식, 공부, 게임 등 각 영역에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있던 채널에 후보들이 출연해 소통한 게 신선하게 비쳤을 뿐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런 채널들과 편향적인 정치 채널을 동일시하고 있다. 유튜브는 포털사이트와 같은 플랫폼일 뿐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유튜브가 막 등장한 2006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당신(You)’을 선정하며 “‘당신’이 글로벌 미디어 영역을 파고들고, 디지털 민주주의의 기초와 틀을 세웠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유튜브는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매체였다. 개인이 방송국인 시대, 그 시대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대중매체가 독점해 온 ‘언론 권력’이 분산되고 온갖 다양성과 창의성이 만개하는 시대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그 대가가 따른다. 권력이 해체되면 그만큼 권위와 책임도 분산되는 법이다. 게다가 유튜브에는 기성 매체에 가해지는 제재들이 상당수 적용되지 않는다. 조회수가 곧 수익으로 직결되는 구조는 필연적으로 자극적인 콘텐츠를 낳는다. 각종 음해와 선동이 예사로 행해지고, 때로는 없던 일을 만들어 상대를 공격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오는 쾌감은 거대한 팬층을 형성케 한다. 유튜브가 정치라는 몸통을 흔드는 꼬리(Wag the Dog)가 된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민주주의는 늘 범위가 아닌 강도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열혈 구독자층을 확보한 유튜브 채널들이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정치는 점점 더 외딴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온갖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는 국민의힘 전당대회만큼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이미 부정선거 의혹 등으로 규모를 키운 채널 ‘가로세로연구소’의 김세의 대표가 최고위원 출마 의사를 밝혔고, 김건희 여사 팬클럽 전 대표이자 채널 ‘강신업TV’를 운영 중인 강신업 변호사도 일찍이 당대표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147만 명이나 되는 구독자를 보유한 채널 ‘신의한수’ 신혜식 대표의 최고위원 출마 선언장에는 정우택 국회부의장, 김기현 의원 등 당내 중진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얼굴도장을 찍기도 했다.
그런데 147만 명이 아니라 그 두 배의 구독자를 확보한다고 한들, 정치 유튜버들이 정당에 꼭 승리를 안겨 주는 건 아니다. 팬층이 두껍다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일례로 2019년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청년층 당 지지율이 바닥을 기자 유튜버들과의 소통을 대폭 확대했다. “청년들이 유튜브를 많이 본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단언컨대 황교안 대표가 초청한 유튜버들의 채널을 구독하는 청년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보편적인 청년들이 수용하기엔 너무 극단적이었다. 유튜버들을 극진히 모신 결과는 2020년 제21대 총선 참패였다. 심지어 보수정당은 선거 이후에도 부정선거 의혹을 거듭 제기하는 극우 유튜버들을 떼어 내느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어쩌면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그들이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고 성장했는지 살펴볼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유튜브 팬덤 너머 평범한 국민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그들에게 포획될 것인지를 말이다. 물론 이는 다른 정당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2023-01-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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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일본의 침략사와 적 기지 공격 능력
삼국사기는 5세기 100년간 왜가 신라를 17차례 공격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의 5년에 한 번꼴이다. 이처럼 왜는 빈번하게 신라를 공격해 왔고, 심지어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이자, 제16대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인 우로를 불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나 식민지의 기억은 선명하지만, 고대부터 끊임없이 한반도를 침략해 온 왜나 일본의 모습은 생소할 수 있다. 사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391년부터 왜가 신라를 공격하였다거나, 대방 지역을 침입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결국 400년에 광개토대왕이 보·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고, 이 남정을 계기로 김해의 가야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왜는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2만 7000명의 병력과 수백 척의 선박을 보내 신라·당 연합군에 맞섰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협공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났다. 바로 663년에 있었던 백강구 전투다.
이 패전을 계기로 왜는 국가개조 사업에 착수해 나라 이름도 일본으로 바꾸고, 군주도 천황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자신들은 당과 대등한 국가이며, 신라와 발해는 자신들보다 하위의 국가라는 허구 의식을 만들어 내었다. 고대 일본은 실제로는 당에 조공을 행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당과 대등한 국가라고 생각하는 모순을 범하였고, 이야말로 일본이 보여 주는 이중성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고압적인 자세는 신라와 새로운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변화를 감지한 신라는 722년에 경주와 울산 사이의 모벌군에 관문성을 쌓아 일본이 침입할 수 있는 길을 막았다. 731년에는 일본의 병선 300척이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입해 오자, 성덕왕이 군대를 보내 격파하였다.
이처럼 갈등이 고조되어 가는 과정에서 경덕왕은 부산 일대의 지명을 개정하였다. 현재 부산포와 당감동 일대를 일컫던 대증현을 동평현으로 고쳤고, 울산 서생면의 생서량현을 동안현으로 바꾸었다. 동쪽 즉 일본과의 갈등을 평안하게 하겠다는 의도였다.
기장이라는 이름도 이때 생겼다. 기장이라는 말은 〈상서〉 ‘태갑편’에 보인다. 은나라 재상 이윤이 왕인 태갑에게 늘어놓은 쓴소리를 담은 글에서, 사냥꾼이 쇠뇌를 쏠 때는 화살 끝이 목표를 제대로 겨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쏜다고 하였다. 즉 기장은 목표를 맞추기 위해서 쇠뇌를 겨눈다는 말이다. 당연히 목표는 일본이다.
이때 거칠산군이라고 불렸던 수영강 일대도 동래군으로 바뀐다. 거칠산군은 내산군(萊山郡)이라고도 하였는데, 래(萊)도 거칠다는 뜻이다. 동안현과 동평현의 경우를 생각하면, 역시 동쪽에 있는 나라 일본을 의식한 결과이다.
동래는 동안현과 동평현, 기장현을 거느리고 일본의 침입을 막는 중심지였다. 이처럼 부산의 중요한 지명은 일본의 침입을 막는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곳도 부산이었다.
그런 일본이 작년 12월에 적 기지에 대한 공격 능력을 갖추기로 했다. 패전 70년 만에 오로지 방어만 하겠다는 원칙을 무너뜨리고, 외국의 군사 목표를 타격할 수 있는 전투기나 호위함, 순항미사일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 견제가 심화하고 있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 군비 확장에 나선 모습이다.
일본은 앞으로 5년간 국방예산으로 43조 엔을 투입하여 토마호크 미사일, F35A 전투기에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 SM-6 장거리 함대공 미사일, 이지스함 2척, 조기경보기 5척을 구입하고, 극초음속 미사일의 개발과 양산, 방위통신위성 정비 등 광범위한 군비 확장을 예고했다. 우리나라의 2022년 국방예산이 54조 원이 조금 넘은 점을 생각하면, 올해부터 연간 국방예산이 우리보다 60%나 많아지게 된다.
그중에서도 5조 엔을 써서 페르시아만 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에서 미국이 가장 먼저 사용했던 토마호크 미사일을 500발이나 구입하기로 했다. 개전과 동시에 적의 수뇌부, 미사일 기지 등을 선제 타격해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주변 국가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 용어는 ‘반격 능력’으로 바꾸었지만, 실상 일본이 의도하는 것은 선제 타격 능력이다. 또 영국, 이탈리아와 함께 차세대 전투기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조종사의 지시가 없어도 인공지능이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시스템을 탑재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은 중국과 북한을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간주하고 있지만, 역사상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한 동아시아 국가는 몽골뿐이다. 일본이 가장 많이 침략한 지역이 한반도였고, 우리를 가장 많이 침입한 나라 역시 왜구까지 포함하면 바로 일본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의 공격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2023-01-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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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새해맞이 갈등을 대하는 자세
몇 달 전 서면 포장마차에서 곰장어 한 접시를 시켜 지인들과 도란도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 한 명이 자리에 앉으면서 포장마차 주인아주머니를 향해 “느그가 뭔데 세금 한 푼 안 내면서 코로나 지원금을 받냐”고 큰소리를 내면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뭔가 사고가 날 것 같은 불길한 기운 속에, 주인아주머니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아이고 나라에서 준다 카는데 그라믄 안 받을끼가 우짤끼고, 자자, 내가 소주 한 병 쏠께”라고 하자, 아저씨는 이내 멋쩍은 웃음으로 누그러졌다. 소주 한 병으로 손님들의 평화를 깨지 않는 노련한 아주머니의 대처가 감탄스러웠다.
갈등관리이론의 대가인 토마스 킬만 박사는 갈등의 당사자일 때 갈등에 대응하는 유형으로 자신의 목표와 타인과의 관계라는 두 가지 관심사의 정도에 따라 경쟁대립형, 회피형, 타협절충형, 협동형, 양보순응형 등 5가지로 분류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한 열망이 더 클수록 경쟁대립형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커지고, 타인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면 양보순응형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갈등이 있을 때 스스로가 어떤 유형으로 반응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해 왔는지를 안다면,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갈등 속에서 스스로를 보완해 나갈 수 있기에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경쟁대립형은 주로 응급 상황이나 빠른 의사 결정이 필요할 때 유용한데, 갈등 상황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 태도를 보이기에, 조직의 융합을 저해하고 반감과 저항을 초래하게 될 위험이 크다. ‘난 몰라’식의 회피형은 갈등 자체를 피하는 것이다. 사소한 문제이거나, 개입할 경우 효과보다 비용이 클 때 오히려 회피하는 것이 더 유용할 경우도 있지만, 조직 내에서 무책임하다는 인식을 주게 된다. 타협절충형은 이해관계를 적절히 배분함으로써 갈등을 빠르게 처리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데, 해결 방안을 고민하지 않고 ‘적당히’에 안주하게 될 우려가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양보순응형은 대체로 다수의 결정에 따르나,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있고 상대가 잘못 알고 있는 경우에는 최악의 전략이 될 수 있다. 협력형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서로가 원하는 해결책을 찾는 유형인데, 갈등 해소 만족도가 높지만, 높은 비용이 지출되는 단점이 있다. 포장마차 주인아주머니의 갈등 해소는 언뜻 보기에는 갈등을 회피하는 유형 같아 보이지만, 손님들의 평화를 지키면서 자신의 영업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소주 한 병을 서비스로 제공하면서 갈등을 누그러뜨린 절충형 내지 협동형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 손님도 포장마차 매상을 올리고 갔으니 주인아주머니는 진정한 승리자가 된 셈이다.
변호사는 각종 송사에서 누군가의 갈등을 해결해야 되는 직업이다. 하지만 당사자들 사이에 변호사가 개입하면서 갈등이 더 커지기도 하고, 판결로 어떤 결과를 받는다 한들 강제적인 해결은 될지언정 당사자들의 갈등을 해소하기는 쉽지 않다. 보통 소송에 임하는 변호사들은 경쟁대립형의 투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고, 각종 증거를 수집하고 전략을 세워 상대를 ‘악의 존재’로 만들어 의뢰인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합의나 조정을 권유하는 변호사는 되레 무능한 변호사로 비치고, 오로지 이기는 싸움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분쟁이 어느 정도 경과되고 쟁점이 정리되고 나면, 경쟁형은 빛을 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이혼소송의 경우가 그런데, 조정절차를 통해 당사자들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어 각자 원하는 것을 얻고, 양보와 타협을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앙금도 적고, 미성년 자녀들이 있을 경우, 추후 면접 교섭이나 양육비 지급에서도 수월하며 경제적으로도 당사자에게 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 연차가 쌓이면서 이기고도 찜찜한 경우를 접하게 되면서 합의나 조정을 잘 이끌어 내는 자가 진정한 실력자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되는 이유다.
비단 소송 과정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 그 어디에서나 있는 갈등에 대하여 어떻게 갈등을 마주하고 해결해 나가는지는 인생의 가장 큰 과제이다. 어떤 대응 방법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고, 적재적소 원칙에 따라 갈등에 대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정하고 밀고 나가야 할 때도 있고, 모른 척 덮고 넘어가야 할 때도 있으며, 시간이 걸려도 대화와 소통으로 협상이 필요할 경우도 있다. 2023년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여야는 새해 첫 회동부터 평행선을 달리고 있고, 남북한 갈등도 고조되고 있다. 지난해 해결되지 못한 과제들로 갈등은 더 심화되는 분위기다. 새해를 맞아 그동안 얽히고설킨 갈등은 풀어내고 화합과 소통이란 새 출발을 위해서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같은 ‘소주 한 병’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2023-01-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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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칼럼] 지금 부산에 없는 한 가지
‘얼어 죽어도 아이스’의 줄임말인 ‘얼죽아’는 추운 날씨에도 아이스 음료만 고집하는 것을 뜻한다. 20대까지는 얼죽아에 동참했지만 30대가 되고부터는 겨울에 아이스 음료는 손도 시리고 배도 아파서 멀리하게 됐다. 이제 날이 추우면 몸을 녹여 주는 뜨거운 음료부터 찾곤 한다. 한겨울 카페에서 아이스를 주문하는 것이 젊음의 상징으로 비친다면 패션에는 얼죽코가 있다. ‘얼어 죽어도 코트’의 줄임말인 ‘얼죽코’는 아무리 추워도 패딩이 아닌 맵시 나는 코트를 입으며 스타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말한다.
겨울이 따뜻한 부산에서는 얼어 죽지 않고도 코트를 입으며 멋쟁이가 될 수 있다. 서울에 대비해 확연하게 눈에 띄는 광경은 투명 스타킹을 착용한 여성들이다. 부산에서는 12월에도 투명 스타킹에 치마 입은 패션을 자주 볼 수 있다. 계절에 상관없이 각선미를 뽐낼 수 있는 건 춥지 않은 겨울 덕분이다. 서울에서는 10월 말이면 검정 스타킹이 등장해 12월부터는 기모 스타킹과 나아가 발열 레깅스를 신고 그 위에 치마 대신 바지를 주로 입는다. 얼죽아와 얼죽코를 외치는 젊은이라도 투명 스타킹은 엄두 내기가 쉽지 않다.
한반도 닥친 한파·폭설에도
부산 겨울은 따뜻하고 포근
여유롭고 온화한 미국 서부
기후 등 부산과 유사점 많아
교육·일자리에서는 차이 커
청년 유인할 대안 고민해야
단연 부산의 포근한 겨울은 축복이다. 매년 심해지는 한파에 시달리며 시베리아가 되어 가는 서울과 비교해 겨울철 부산은 어느 곳보다 살기 좋다. 광안리와 해운대가 북적이는 여름을 성수기라고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북쪽의 추위를 피해 겨울에도 부산을 찾을 것 같다. 특히 코로나 이후로 원격 근무가 확산하면서 일과 휴식을 병행하는 ‘워케이션’ 트렌드가 생겨났다. 부산시는 올해 부산역 바로 옆의 아스티호텔을 워케이션 거점 센터로 구축해 본격적인 부산형 워케이션 활성화 사업을 추진한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면 미국의 동부와 서부 관계가 서울과 부산에 나란히 대입된다. 대개 미국 동부 사람들은 날씨 좋은 서부로 떠나 여름휴가를 보내거나 겨울나기를 한다. 동부지역에게 서부는 여유로운 휴양과 온화한 겨울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라면, 서부에게 동부는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그 자체다. 올겨울 눈폭탄 사이클론이 미국 전역을 휩쓸며 쑥대밭을 만들 때에도 서부는 그나마 괜찮았다. 마찬가지로 이번 겨울 한반도를 냉동고로 만든 북극한파와 폭설에도 부산은 평온했다.
부산과 미국 서부는 기후적 매력의 유사성 외에도 여러 지점에서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있다. 예컨대 서부에 할리우드가 있다면 부산 역시 영화의 도시다. 국내 최초의 국제영화제로서 부산국제영화제를 매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있으며 영화산업의 인재 양성소인 한국영화아카데미가 부산에 있다. 부산이 이끄는 커피와 원두 산업은 월드바리스타 챔피언을 배출한 모모스커피를 필두로 컴포즈, 더벤티, 텐퍼센트, 블루샥 등 전국권 카페 프랜차이즈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이다. 미국에서도 많은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들이 서부에 고향을 두고 있다. 블루보틀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탄생하였고 스타벅스가 캘리포니아주는 아니지만 서부의 시애틀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했다. 해양스포츠를 거의 즐기지 않는 동부와 달리 서부는 여름이면 서핑객들로 붐비는데 서핑하면 또 송정해수욕장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러나 부산과 미국 서부는 지역의 인구 구성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청년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캘리포니아와 달리 부산은 고령화 진행이 심각하다. 자이언츠라는 야구팀 이름마저 사이좋게 공유하는 샌프란시스코와 부산은 어떤 차이로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걸까.
딱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스탠퍼드대학교라고 생각한다. 부산에 스탠퍼드가 없다. 실리콘밸리는 최초에 캘리포니아주가 기업 유치를 노력한 덕도 보았지만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스탠퍼드와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캘리포니아대학교 등 지역의 우수한 대학교와 졸업생들이 있었다. 부산에도 대학교는 많다. 명문 부산대를 비롯해 다수의 지역 대학교가 있고 가까이에 유니스트와 포항공대도 있다. 그러나 부산대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고 지역 인재들은 서울과 수도권으로 떠나간다.
캘리포니아에서 스탠퍼드가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다. 전통적으로 미국에서 좋은 대학교라면 동부지역부터 꼽았지만 하버드와 맞먹는 스탠퍼드의 위상과 스탠퍼드가 주도한 창업생태계로 동부 학생들이 오히려 서부로 대학 진학을 희망하게 되었다. 날씨도 화창하고 살기도 좋은 덕에 서부에 정착하는 졸업생이 많아졌고 유학생도 대거 유치하면서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대학 전체가 활기를 띠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청년 세대를 붙잡고 이주와 정착을 결심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동기는 역시 교육과 일자리다. 부산에 스탠퍼드가 등장할 날은 언제인가.
2023-01-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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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새로운 변곡점 맞은 블록체인
2022년이 저물어 가며 블록체인 산업은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테라-루나 사태부터 시작되어 FTX의 파산까지, 디지털 자산 생태계는 큰 보릿고개에 접어들었다. 투자금을 유용하던 수많은 크고 작은 블록체인, NFT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수사선상에 올랐다. 그 와중에 이더리움 블록체인은 2.0을 선언했고, 비트코인은 이미 전 세계가 주목하는 투자 수단 중 하나라고 해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트코인 논문을 냈던 나카모토 사토시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상상하건데 나카모토는 금융 위기와 함께 기존 금융 제도의 높은 비용과 과도한 정보 요구 등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이 괴짜는 블록체인 기술, 해시 등을 접목하여 ‘불특정 다수의 자율적 참여로 유지되는 화폐 발행 및 원장 보존이 가능한 온라인 결제 시스템’을 고안하여 전자적 화폐, 즉 ‘비트코인’을 세상에 선보였다. 누구나 컴퓨터로 비트코인을 켜서 참여하면 자동으로 시스템의 보안성을 향상하는 동시에 비트코인이라는 보상책을 받는다는 당근과 채찍은, 가히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비트코인이 원하던 화폐의 기능은 점차 멀어져 갔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비트코인을 사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올라 버렸다. 거래 수수료로 써야 하는 비트코인을 계산해 보니 어지간한 화폐의 거래 수수료보다 비싸졌다. 그래서 비트코인매거진 편집장이었던 비탈릭은 차세대 비트코인인 이더리움을 만들게 되었다. 비탈릭이 ‘화폐 기능을 되돌리자’란 구호를 외치며 비트코인의 철학을 계속 염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지털 자산 생태계 큰 보릿고개 돌입
투자금 유용 등 줄줄이 수사선상 올라
비트코인 비싸져 화폐 기능 멀어지고
위·변조 방지 기능 기술적 가치 탁월
거품 꺼지면서 투자 수단 매력 높아져
인프라 활용한 사업 모델 고려해야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 버린 비트코인은 화폐 기능은 잃어버렸지만, 높아진 비트코인 가격 덕분에 수많은 채굴자가 원장인 데이터를 10년 넘도록 견고하게 지키게 되었다. 비트코인 블록체인의 데이터는 이제 누구도 위조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비트코인 블록체인은 유사 이래 위·변조를 막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록 수단인 셈이다. 어찌 보면 개인 간 거래 가능한 전자화폐의 기능을 찾던 소가 뒷걸음치다 기록이란 쥐를 잡아 버린 셈이다. 낮은 수수료의 화폐를 만들고자 했던 블록체인의 효용은 시간에 따라 쌓인 기록이 가치로서 발휘되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수호하는 수많은 불특정 다수가 이 시스템을 유지하게 되었다.
2017년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가격이 급등하면서 ‘가격이 오르는 코인’이란 수사로 수많은 자칭 블록체인 전문가가 등장했다. 그들은 금융이 생소한 대중을 상대로 무법 지대인 코인을 사서 투자하라고 현혹했다. ‘돈이 되는 신기술인데, 코인은 가격이 오른다’는 핑계로 수많은 사업이 생겨났다. 그 틈새를 노려 ‘블록체인 기술과 코인은 분리해야 한다’를 외치는 호객꾼도 나왔다. 5년이 흐른 지금, 아직까지 제대로 된 서비스는 하나도 없다. 앞서 살펴본 블록체인의 시스템도, 철학도 부재한 탓이다.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이 외치던 미래는 돈만 긁어모은 뒤 시장을 왜곡시켰다.
무엇보다 산업을 보릿고개로 이끈 것은 자칭 전문가들이 만들었다는 프로젝트의 연이은 실패다. 블록체인 산업의 역풍, 코인으로 주목받던 테라는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어려운 단어로 무장해 위세를 떨쳤지만 비즈니스 모델이 무너지면서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되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한 철옹성 같았던 대형 거래소인 FTX는 하루아침에 파산하며 개인 이용 고객이 보관 중이던 디지털 자산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더불어 찾아온 세계 경제의 침체는 이 보릿고개가 절대 짧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비트코인이라는 디지털 자산이 만들어 낸 블록체인 기술의 효용’을 곡해한 수많은 사업이 좌초되면서 관련 산업계는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이야말로 블록체인 산업 생태계의 변곡점이라 생각한다. 우선, 비트코인은 전자화폐보다 데이터 보호의 기능인 기술적 효용 가치가 큰 시스템으로 성장했다. 데이터는 보통 관리자가 쉽게 정보 변경이 가능해 여러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때 비트코인 블록체인은 이를 방지하는 원천적 기술이 될 수 있다. 또한, 세계적인 경기 침체의 도래와 함께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디지털 자산의 거품이 상당수 꺼졌다. 그렇기에, 다른 투자 수단보다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여태껏 기업들은 고객 및 기업 데이터 보호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다. 특히 금융기관은 일반 기업들보다 훨씬 큰 비용을 지불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곡해한 사업의 병폐가 드러난 이 시점에 블록체인의 효용 가치를 시스템에 적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공개형 블록체인의 대표 격인 비트코인, 이더리움의 인프라를 활용한 여러 가지 사업 모델을 적극 고려해 볼 시점이 아닌가 싶다.
2022-12-2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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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배제사회와 고독사
지난해 고독사로 유명을 달리한 이는 3378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1.1%에 해당한다. 보건복지부의 최근 발표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고독사는 매년 9%가량 증가하는 추세이다. 작년의 경우 고독사로 인한 남성 사망자는 여성보다 5.3배에 달하며, 50대와 60대가 전체 고독사의 52.1%를 차지하고 있다. 50~60대 남성이 고독사의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2017년부터 5년간 지역별 고독사 추이를 보면 인구 10만 명당 고독사 발생률이 가장 높은 지역은 부산으로 9.8명에 이르러 전국 평균(6.6명)보다 1.5배나 높았다. 1인 가구 비율이 부산보다 훨씬 높은 서울은 고독사 비율이 전국 평균 수준에 머물러 1인 가구비가 높다고 고독사가 더 많이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리나 허츠의 저서 〈고립의 시대〉에 따르면 외로움이 인체에 미치는 유해한 영향은 알코올 중독과 비슷하며 매일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다. 지속적인 고립은 극한의 스트레스와 만성 염증 유발로 관상동맥질환, 뇌졸중, 치매로 이어질 확률이 높고 조기 사망 위험을 30%나 증가시킨다. 그래서 고립은 위험하다.
고독사 매년 9%씩 증가 추세
10만 명당 발생 비율 부산 최고
무한경쟁·각자도생 사회구조
50~60대 남성 위기 몰아가
사회적 고립 대응센터 설립
‘고독생’ 대처 예방 노력 절실
고독사에 관심을 두는 나라는 일본과 영국 정도지만 양상은 다르다. 일본의 고독사 주 유형은 노인이며, 영국은 노숙자의 사례가 많은 데 비해 우리는 전 연령대에 걸쳐 고독사가 빠르게 증가하고, 남성 50~60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고독사 위험군의 사례를 분석해 보면 사회경제적 취약성과 관계의 단절이라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또 고독사 위험군은 일자리, 소득, 관계, 주거 단절의 네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냉혹하고 치열한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경제구조가 아직 일할 수 있는 50~60대 남자를 실직이나 불안정 고용 상태로 내몰면서 소득 중단과 빈곤 상태로 추락시키고 있다. 경제적 파탄과 질병으로 초라해진 가장들은 가족들과 원만한 관계 유지도 어렵고 이혼 등으로 급속히 고립 상태에 접어든다. 위기의 독신 가구 다수는 상처 난 마음을 알코올로 달래면서 고독감에 젖어 열악한 주거지에서 영양이 부실한 채 허약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어쩌다 이들을 찾는 이웃과 공공 영역의 방문자에게도 관계의 문을 제대로 열어 주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위기 시 도움을 청할 이웃의 비율이 매우 낮은 고립 최고 위험 국가에 속한다. 1인 가구 비율은 서구보다 다소 낮지만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고 비자발적이며 높은 취약성을 가진 독신 가구라는 점에서 위기 정도가 높다. 현실의 사회보장체제도 경제 능력이 없는 아동과 노인, 수급자 중심이라 청년이나 중장년의 사회안전망은 엉성한 편이다. 이윤 추구와 효율성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노동시장에서 도태되는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회배제(social exclusion)를 경계하며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을 중시하여 포용국가계획을 독려하던 유럽 국가와 달리 우리는 고위험의 배제국가인 것도 잊고 그저 경쟁력만을 부르짖고 있다. 중장년의 고독사 시대 뒤에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청년 고독사 예비군이 있다. 멈출 줄 모르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향후 배제국가의 위험을 더욱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에 수립될 사회적 고립 및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은 보다 실효성 있는 방안이 많이 제시되길 바란다. 먼저 고독사에 가장 많이 노출된 중장년 남성과 청년세대가 지역사회로 발걸음을 내디디고 재기의 용기를 내도록 포용적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고독사 위험군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 맞춤형 정책을 펼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다. 취약 고립 가구가 발견되면 우선 식사라도 할 수 있게끔 긴급 지원을 시작해야 한다. 그 뒤 사회복지관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함께하면서 관계기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 뒤 공동체의 경험을 확대하고 점차 역량 개발을 통해 자활과 안정적인 삶이 유지되게 단계적 실천이 작동해야 한다. 대개 취약 1인 가구가 집중된 기초지자체일수록 재정이 부족하다. 이들 지역이 적극적 사업을 펼치게 재원을 공급하는 일도 정부의 중요한 책무이다. 고독사 위험 국가인 우리나라와 고독사 최고 발생 도시 부산은 영국처럼 고독부장관을 임명하는 등 전 국가적 총력을 기울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회적 고립 대응센터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진단과 효과적인 사업을 해야 한다. 사회적 고립 가구의 발굴도 중요하지만, 고독사를 낳는 고독생(孤獨生)에 대처하여 예방적인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취약한 고립 가구에 따뜻한 손을 내밀며 연대의 실천을 하는 포용국가가 배제국가보다 훨씬 건강한 미래를 약속한다는 것은 복지선진국의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2022-12-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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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정치와 칼
12월 11일 국회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야당 의원들만이 참석한 본회의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가결했다. 국무위원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의결된 것은 헌정 사상 8번째이고, 1년이 채 안 된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박진 외교부 장관에 이어 두 번째다.
국회에서는 장관 해임 건의를 둘러싼 여야의 첨예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고, 법적 논란도 적지 않다. 국회를 통과한 국무위원 해임 건의의 구속력은 물론 해임 사유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 이상민 행안부 장관 해임 건의
발의 때마다 위법·위헌 논쟁 격화
헌법재판소, 법적 구속력 없다 결정
헌법 이론 아닌 정치적 상황이 변수
제대로 사용할 때 치명적 무기 의미
명검의 가치 사장하는 정치 아쉬워
이 법적 논란은 헌법 제63조가 ‘국회는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이 해임 건의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발의에 의하여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 구속력이나 해임 사유 등에 대해 규정하지 않고 있음에 기인한다.
국회의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 건의권은 대통령이 갖는 국무위원 임명권에 대한 국회의 통제장치로서, 변형된 대통령제의 제도적 징표다. 국무위원 해임 관련 규정은 1952년 헌법에서 민의원의 ‘국무원 불신임 결의’로 처음 도입되었지만, 현행 헌법에서와 같이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의 형태로 규정된 것은 제3공화국 헌법에서부터였다.
다만 제3공화국 헌법은 국회의 해임 건의가 있을 때에는 대통령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응하도록 규정했다는 점에서, 제4·5공화국 헌법은 ‘해임 의결권’을 규정하고 국회의 해임 의결을 대통령이 반드시 따르도록 했다는 점에서, 현행 헌법 규정과 차이가 있다.
현행 헌법은 국회의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 건의 의결이 대통령에 대해 법적 구속력을 갖는가에 대해 정한 바 없다. 때문에 국회의 견해를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은 것이 대통령의 정당한 행위인지가 위법·위헌 논쟁으로까지 격화된 바 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사유의 하나로 등장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헌법재판소는 ‘해임 건의권’의 의미를, 임기 중 아무런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대통령 대신에 그를 보좌하는 국무위원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추궁함으로써 대통령을 간접적이나마 견제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회의 해임 건의는 대통령에 대해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는 단순한 해임 건의에 불과하다고 결정했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국회 해임 건의 수용 여부는 국회의 결정을 정치적으로 존중할 것인지의 문제이지 법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실제로 이전에 국무위원 해임 건의가 수용되었던 경우들도 당시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해임 건의권은 제도적으로 해석하고 운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국회의 해임 건의가 전혀 기속력이 없다고 해석하면 정치적 행위로서의 해임 건의는 헌법 규정이 없어도 가능한 것이고, 반대로 국회의 해임 건의가 기속력이 있어서 대통령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면 국회해산 제도가 없는 현행 대통령제 정부 형태의 구조적인 골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해임 건의권 행사 사유에 대해서도 헌법은 규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탄핵소추 사유와 달리 직무 수행상의 위헌·위법적인 경우는 물론 스캔들이나 업무상의 무능력 등 정치적 책임을 추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임 건의의 사유와 횟수에 있어 아무런 제한이 없는 국회의 해임 건의권은 오히려 무의미한 전시적인 통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의 해임 건의가 갖는 기속력의 강약이나 그 사유의 정당성은 해석론이나 헌법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해임 건의가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정치 상황의 여러 변수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이곳에 우리 국회의 해임 건의권의 개방성과 정치성이 있다.
우리 헌법은 국회에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 건의를 의결함으로써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촉구할 수 있는 강력한 칼을 주었다. 그런데 이 칼은 극히 정치적인 사용법을 지녔다. 그래서 이 칼은 꼭 써야 할 때를 가려서 제대로 꺼내 들어야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초등학교 사회 개념 사전에 의하면, 정치란 사람들 사이에 서로 생각이 다르거나, 혹은 다툼이 생겼을 때 이것을 해결하는 활동이라고 한다. 어린이들이 배우는 이러한 정치의 의미를, 정치를 업으로 하는 국회의원들은 오히려 모르는 것 같은 여의도의 정치가 명검의 가치를 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22-12-2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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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사람아, 아 사람아
사람은 동물과 다르다. 동물은 사람이 지닌 이성과 측은지심, 그리고 증오와 혐오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이성과 측은지심을 상실하고 증오와 혐오에만 빠진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비유적으로 짐승이라고 불러왔다.
이태원 참사가 되살아나고 있다. 정부 주도의 국가 애도 기간이 있었지만, 유가족들의 의사 확인 없이 마련된 분향소에는 희생자들의 영정도 위패도 없었다. 정부는 유가족들이 단체로 행동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유가족들에게 서로의 전화번호도 알려 주지 않았다. 정부는 유가족들이 모이고 단체행동에 나서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식적이고 비정한 정부의 의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사람이 슬프면 슬픔을 표출하고 함께 나누고, 대다수 사람이 분노하면 분노의 대상을 징계하고 처벌해야 한다. 그게 상식이고 사람의 도리고 인륜이다. 자고로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정부는 유가족들이 모여 슬픔을 함께 나누지 못하게 했고,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책임자 문책과 처벌에도 인색하고 느렸다. 대통령은 명확한 진상규명 이후 책임자 문책과 처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런 대통령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국민은 많지 않을 듯하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질 수 없고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데, 이는 유가족과 국민의 정서와는 너무 다른 판단이다. 국민은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도 묻고 법적 책임도 물으라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대통령은 해외순방길에 나서며 재난 안전 관리 총책임자인 행정안전부 장관을 오히려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했고, 역시 책임지고 문책받아야 할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 등 고위직 공무원이 아직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을 진두지휘 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유지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특별수사본부가 이들 고위직 공무원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듯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현 정부의 의도와 태도는 누가 봐도 상식과 도리, 인륜과는 거리가 멀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수 정치인들의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다. 장제원 의원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는 “애초에 합의해 줘서는 안 될 사안이었고, 민주당이 요구한 국정조사는 정권 흔들기와 정권 퇴진 운동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특별수사본부의 수사가 이리 지지부진한데, 정쟁을 빌미 삼아 여야가 합의한 국정조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을 핵심 윤핵관이 하고 있는 것이다. 권성동 의원은 “세월호처럼 정쟁으로 소비되다가 시민단체의 횡령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했고, 송언석 의원은 이태원 참사 현장 300m 거리에서도 시신이 발견되었다면서 참사의 원인이 압사가 아니라 마약에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반복했다.
권성동 의원의 말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대다수 건전한 시민단체에 대한 악의적인 모욕이다. 이태원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아직도 그날의 악몽 같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이런 아픔을 다시 후벼 파는 발언을 한 것은 정말이지 비인간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특별수사본부는 참사의 원인에 마약 관련성은 없다고 밝혔다. 송의원은 이런 경찰 수사 결과도 부정하는 황당한 발언을 한 것이다.
이들의 언어는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짐승의 언어이고 폭력이다. 어쩌다 우리 정치가 이렇게 보수와 진보라는 양 진영으로 나뉘어 인간성마저 상실했는지 암담하다. 이들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이태원 참사는 국가의 대응 실패에 의한 압사가 아니라 사적인 축제나 마약 등에 의한 개인적인 일탈 사고다. 그러니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책임이 없다. 세월호 참사처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당과 시민단체와 유가족들이 있다. 이들의 정치적 야욕에 휘둘리면 안 된다.
이태원 참사는 이들의 주장처럼 정쟁의 문제,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이 많은 젊은이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그런 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사람의 도리와 인륜을 거스르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그런 비인간적이고 매정한 정치는 해서도 안 되고 오래 갈 수도 없다.
“매일 밤 우리 아이 유골함을 끌어안고 잔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이런 절규가 모여 추모가 되살아나고 있다. 희생자들의 영정이 놓인 시민분향소가 이태원에 마련된 것이다. 사람아, 아 사람아. 도대체 이 나라 정치가 어쩌다 이리 인간성마저 상실한 짐승의 정치가 된 것인가? 한탄과 한숨만 나오는 좌절의 시절이다.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보다 사람의 도리와 인륜에 기초해야 한다.
2022-12-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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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해양 세계의 상상력을 옹호하며
지난 주말 해운대 달맞이 언덕 추리문학관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문학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다섯 시간에 걸쳐서 펼쳐졌다. 전국을 아울러 문학관이 전혀 없던 시절에 사비를 출연하여 세웠으니 헌신적이고 선각자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관장인 김성종 작가가 한국 현대 추리 문학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해운대 달맞이 언덕에서 발신하는 문학적 의의가 매우 크다. 그만큼 추리문학관이 지역사회가 함께 유지하고 가꾸어 가야 할 중요한 문화자산임에 틀림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단지 선구적인 건축물을 두고 말하기보다 추리문학이 우리가 사는 부산과 연계되는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추리문학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현대의 과학 정신에 기초한다. 범죄의 원인을 규명하고 사건을 추론하는 과정이 근대성의 한 양상이라 하겠다. 여기에다 김성종 추리소설의 서사적 스케일이 더해지는데 해운대 혹은 부산에서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세계로 그 무대가 이월하고 귀환하며 변환한다. 적어도 이러한 창작 방법을 자극하고 추동한 데 부산의 특이성이 어느 정도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해항도시(seaport city) 부산이 작가의 상상력을 열린 전망으로 이끌지 않았나 한다. 월러스 J 니콜스도 해양이 주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푸른 정신(blue mind)'이라고 한 바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작가 또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의 자유로운 몽상이 창작의 동력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개관 30주년 맞은 추리문학관
해항도시, 작가 상상력 이끌어
해양문학 부산 고유의 특징
개항 150년 부산항 평전 나와야
서울 중심의 일극 체제에 맞서
대양 향한 개방 정신 길러야
우리 부산의 문화를 통어하는 근저에 해양 근대성(maritime modernity)이 자리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서 말한 추리문학의 근대성을 포함하여 다양한 모더니티가 포진하고 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온 요산 김정한과 향파 이주홍이 전개한 리얼리즘이 있다면 영도 출신 김소운이 전개한 한·일 간의 문학번역이라는 매우 근대적인 활동이 또한 자리한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제국의 바다에 갇힌 한국이 대양(ocean)으로 나아가는 전환을 이루면서 해역 세계의 전망을 확보한다. 주지하듯이 한국전쟁에서 부산항의 존재가 지닌 의미는 지대하다. 해항 네트워크가 UN과 세계를 접속한다. 이러한 가운데 피란지의 실존적이고 자기 반영적인 모더니즘이 크게 활성화한다. 일본이 빠져나가고 미국이 들어온 병참기지 부산의 시장과 거리는 가난과 기만, 우울과 퇴폐, 삶과 죽음이 교차하였다. 섬이 된 분단체제에서 1960년대 이후의 근대화 과정은 해양으로 가는 길과 분리되지 않는다. 상선과 원양어선이 출항하고 귀항한 장소도 부산항이다.
해방은 해양의 해방이고 근대화는 해양화라는 등식이 그 어느 지역보다 확연한 도시가 부산이다. 상선을 타고 어선에 종사한 이들이 써내는 해양문학의 전통도 부산만의 자산이다. 해방 전의 바다는 관부연락선이 왕래한 해협이 주무대일 뿐이다. 현해탄을 왕래한 경험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되었다. 이병주가 관부연락선을 공부하여 소설을 쓴 소이도 이 해협의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 대양적 전환(oceanic turn)이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부산은 해역세계를 품게 되었다. 아시아 지중해를 지나서 태평양과 인도양과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가운데 천금성의 해양소설과 김성식의 해양시가 탄생하였다. 오늘날 상선의 대형화, 첨단화,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서사가 줄어든 반면 원양어선의 조업 과정에서 다채로운 서사가 발생하고 작품으로 생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본격적인 해양문학(maritime literature)도 부산만의 특성이다.
부산항이 부산신항으로 이전하면서 재개발의 과정에 있으니 그 역사를 새롭게 쓴 지도 오래다. 개항 이후 150년 부산항의 생애가 궁금하다. 누군가 부산항 평전을 써 주면 좋겠다. 아울러 이를 새롭게 태어나는 북항에서 유형적 형태의 건축과 조형물로 새겨 주면 좋겠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누구나 부산을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산항 없는 부산을 상상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비록 동래와 기장과 낙동강 유역을 아우르는 광역도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부산항은 부산의 속성을 집약하는 공간이다. 부산의 해양 근대성을 가능하게 한 창구이자 관문이다. 부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곳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은 도시가 바다와 연계하고 해양 세계를 옹호하며 해역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말로 서울 중심의 일극 체제에 맞서는 지역 회생의 강력한 벡터를 만들어 가는 첩경이다. 부산의 문화 또한 이와 같아서 항상 해양으로 열린 상상력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바다로 가는 모든 강과 하천을 살려 바다와 맺는 착취적 관계를 청산하면서 대양과 세계를 지향하는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정신을 길러야 한다.
2022-12-1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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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크리스마스의 이웃
월드컵이 열리는 카타르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설렘 가득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 세 번째로 맞는 기념일이지만 재작년이나 작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위드 코로나’로 일상이 많이 회복되어 송년회로 연말 분위기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다양한 연말 공연과 축제 소식도 들린다. 언뜻 보면 마스크를 쓰지 않던 그때의 크리스마스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이고, 많은 부분이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2022년의 크리스마스가 예년의 크리스마스와 같을 수 있을까. 그러기엔 올 한 해 너무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다. 예수를 믿건 그렇지 않건, 전 세계인들은 세상에 사랑을 전하려 애썼던 한 인간, 예수의 탄생일을 저마다의 모습들로 기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한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기부금을 전하고 봉사 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떠나 온 인류가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날이다.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한민국 사회가 바라보아야 할 이웃은 누구일까.
코로나19서 회복 못 한 사람들
아직도 심리적 아픔 겪는 개인들
그리고 이태원 참사 유족들까지
다사다난한 2022년 마지막 달
우리 사회가 품은 여러 이웃에
조그마한 온기라도 보태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웃은, 코로나19로부터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이웃이다. 취업 시장이 얼어붙어 3년째 취업난을 겪고 있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다. 그뿐만 아니라 자영업자들은 영업장을 닫았고, 아직도 생계 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기사도 보았다. 이렇게 코로나19는 개인의 경제적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코로나가 개인의 건강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 여전히 병상에 누워 있는 고위험 환자들이 있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있다. 코로나19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도 많다. 이렇듯 코로나19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올해 정부나 지자체가 가장 먼저 돕고 개인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이웃들이다.
두 번째 이웃은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고립감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느끼는 주변인들이 있다. 특히 낮보다 밤의 길이가 긴 겨울철, 쉽게 자신의 동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소식을 많이 접한다. 내면의 상처는 쉽게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아픔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청년들의 마음 건강을 위해 지자체의 무료 상담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고 각종 정신 건강을 위한 온갖 서적과 영상들이 넘쳐나지만 정말 필요한 이들에게 가닿는지는 모를 일이다. 숨이 멎기 직전 심폐소생술로 사람을 살려 내듯,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들어 주는 개인의 노력들이 심폐소생과 맞먹을 정도로 큰 힘을 가진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들은 적 있다. 지자체는 마음 건강을 지킬 수 있을 만한 대비책들을 마련하고, 개개인은 주변 이웃들에게 다가가는 연말이 되면 좋겠다.
세 번째로 떠올리고 싶은 이웃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태원 사고 유족들이다. 불과 두 달 전 너무나도 안타깝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떤 말을 보탤 수 있을지 먹먹한 심정이다. 가장 먼저 정치는 정치를 해야 한다. 사고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고를 의도한 이들은 없겠지만 공적 책임의 부재가 있었다는 사실은 드러나고 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진상 규명과 별개로 슬픔에 잠겨 있는 유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더 들릴 수 있는 연말이 되길 바라 본다.
크리스마스는 사실, 당연한 것을 다시 보는 새삼스러운 날이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국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게 정치가 제도로 보완하는 일은 크리스마스가 아닌 일상에서도 꼭 필요한 일들이다. 하지만 바쁜 일상은 정작 중요한 것을 잊게 만들기도 하고, 가끔은 공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만든다. 지금과 같은 시즌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영 이웃들에게 눈을 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라는 날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수를 기록하는 많은 문서들은 그가 귀족이나 부자들이 아닌 고아와 과부, 노예들의 벗이었음을 일제히 보여 준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예수의 정신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한다. 한 해를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온기가 전해지길 바라 본다. 작은 기적을 만들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아야겠다.
2022-12-0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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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제1호 반도체 특화단지, 부산에 지정돼야
최근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TV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로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드라마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고래를 이길 수 없다는 임원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으로 밀어붙이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일화가 나온다. 드라마 속 회장은 고래 같은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시 새우와 같이 작았던 삼성의 덩치를 키우는 전략을 선택한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30여 년간 세계 1위를 지켜 오고 있는 삼성도 새우와 같이 미약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러한 일은 산업 생태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사례이다.
정부는 지난달 ‘제1차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를 열고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초격차 확보 및 기술·인력 보호가 필요한 반도체를 첨단전략산업으로 선정하였다. 글로벌 첨단산업 육성 경쟁에 대응한 국가첨단전략산업법 제정과 컨트롤타워로서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 설치에 따른 후속 조치로 진행된 것이다. 첨단전략산업 선정에 따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를 지정하여 입지 확보, 인프라 구축, 기술·인력·금융 등 맞춤형 패키지를 지원함과 함께 반도체 특성화대학원을 통해 5000여 명의 반도체 석·박사 인력을 양성할 계획이다.
산업 생태계 형성은 시간과 전략 필요
글로벌 첨단산업 정책 수도권에 치중
규제 완화로 반도체 기업 이전 활성화
정부 지원 통해 지역 신산업 육성
부산, 파워반도체 산업 발전 꿈 이뤄야
자동차·조선 융합한 신성장 동력 가능
문제는 첨단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정부의 반도체 육성 전략은 수도권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하는 ‘K-반도체 벨트’에 집중되고 있다. 파워반도체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 중인 부산뿐만 아니라 광주·전남, 대구·경북 등 반도체를 지역 특화산업으로 키우고자 노력하는 지역이 소외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 이대로라면 부산을 비롯한 남부권 지역의 반도체 산업 육성은 미완의 꿈으로 남을 것이다.
부산도 ‘새우’와 같은 반도체를 육성하려는 야심 찬 시도가 있었다. 메모리 반도체에만 관심을 쏟던 10년 전부터 부산시는 부산테크노파크를 중심으로 파워반도체 클러스터를 기획하였다. 그 결과 2017년 부산대 내 장전단지와 2019년 동남권 방사선 의·과학 산업단지 내 장안단지에 파워반도체상용화센터(반도체센터)를 구축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반도체와 관련하여 부산테크노파크에 MEMS/NANO부품생산센터(멤스센터)와 스마트전자부품기술지원센터(스마트센터)가 있었다. 멤스센터는 반도체센터의 전신으로 남아 있으나, 팹리스 기술을 지원했던 스마트센터는 문을 닫았다. 부산에 산업 기반이 약하여 지원 성과가 미흡하고 후속 사업이 없어 문을 닫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은 미약하고, 어린 것은 유약하다. 그래서 미성숙하지만 성장 가능성이 있는 걸음마 단계의 산업을 유치산업(幼稚産業·Infant industry)이라는 이름 하에 보호하는 것이다. 유치산업은 초등학교 입학 전인 미취학 아동의 성장 단계이므로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스마트센터도 당시에 잘 컸다면 현재와 같은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 부산 지역의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그만큼 지역에서 신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하는 것이 지역에 관련 산업 생태계가 없다는 중앙부처의 뻔한 반대 논리이다. 이에 대해 삼성이 반도체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나라에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있었느냐고 되묻고 싶다. 설혹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 해도 스마트센터와 같이 성과 압박 때문에 중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아기에게 우유를 급히 먹인다고 금방 성인이 될 수 없듯이 새롭게 시작하는 산업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지역에서는 소중한 신산업을 정성껏 키우고 그 산업에 미래를 의탁하고 싶어 한다. 정부가 지역의 성장 동력이 잘 자라도록 기다려 주고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이것이 지역균형발전의 기본 철학이 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는 그간 정성과 노력을 쏟았으나 후속 지원이 시급한 파워반도체상용화센터가 있는 부산에 제1호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를 지정해야 한다. 특화단지 지정은 반도체 기업에 걸림돌인 입지 규제를 완화하고 기반 시설 조성 지원이 가능하므로 부산으로 반도체 기업이 이전할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아가 부산에 파워반도체 산업의 육성뿐 아니라 지역 주력산업인 자동차·조선 산업과 융합하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할 것이다. 부산의 산업 체질을 전환하는 데 이번 특화단지 지정이 중요한 기회이다. 부산시도 특화단지 지정을 위해서 모든 논리와 행정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야 부산의 신성장 동력 창출을 위한 파워반도체 산업 육성이라는 꿈이 꿈으로 남지 않게 된다.
2022-12-05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