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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수도권-비수도권 갈등이 다가오고 있다
얼마 전 광주의 한 언론인을 만나 박지원 전 의원의 총선 출마를 놓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박 전 의원의 나이는 올해 81세. 나이가 전부는 아니라지만 3김 시대부터 정치를 해 온 ‘올드보이’의 귀환에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광주·전남 지역 언론인들 사이에서는 박 전 의원의 출마가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지역을 대표해 목소리 내 줄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광주의 현역의원 군은 송갑석 의원(서구갑)을 제외하면 모두가 초선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에서는 그들이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 중앙 정치에 휩쓸리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초선 무능론’이 팔순 넘은 원로 정치인을 다시 소환하게 한 것이다.
사실 국회에서 지역 이슈가 실종된 건 의원 개개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구조적 문제도 크다. 수도권 비중 자체가 커졌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4년 3:1이었던 국회의원 선거구의 인구 편차를 2:1로 조정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인구가 가장 많은 선거구의 인구수가 가장 적은 선거구 인구수의 2배를 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침 각종 뉴타운과 신도시가 완성되며 수도권 인구가 증가했다. 동탄신도시로 유명한 경기도 화성시는 2010년 50만 명을 넘긴 인구가 올해 100만 명 진입을 바라보는 상황이 됐을 정도다. 인구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의석도 증가 압력을 받는다. 지역구 전체 의석이 늘지 않는 한 수도권 의석이 증가하는 만큼 비수도권 의석은 축소된다. 표의 등가성이라는 원리 앞에 지역 정치인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수도권에 기반을 둔 의원들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기에 앞서 자기 지역의 대리인을 자처한다. 그들이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해 주길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국회의원이 본인 지역구를 챙기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씁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정부가 수도권에 소재한 공공기관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라치면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이 결사반대에 나선다. 지역에 철도·도로 등 사회기반시설을 구축하는 사업에는 예산 낭비 프레임이 따라붙는다. 부실한 준비로 세계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새만금 잼버리 사태 이후 기다렸다는 듯 지역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한 예산 낭비 목소리가 제기된 게 그런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예산은 필요한 곳에 알뜰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지역 예산을 경제성과 효율성의 잣대로만 측정한다면 지역균형발전은 요원하다.
수도권 인구가 절반을 넘어서고 덩달아 무당층의 중요성도 증가하면서 각 정당은 수도권 민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럴수록 비수도권 지역의 요구는 뒷전으로 밀린다. 이런 상황에서 비수도권 정책에 대한 수도권의 견제, 그에 따른 대립의 심화를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조귀동 작가의 신작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이 문제와 관련해 한국 사회가 직면할 갈등을 이탈리아의 사례에 비추어 예견한다. 그는 이탈리아 우파 포퓰리즘 정당 북부동맹(LN)의 성공 배경에는 지역 간 격차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지역민들의 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탈리아의 산업은 밀라노가 있는 롬바르디아를 비롯한 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남부는 산업 배치에서 소외돼 있고 그만큼 재정자립도도 낮다. 일례로 북부동맹이 성장하던 1992년, 이탈리아의 주 가운데 세금과 사회보장료를 지출보다 더 거둔 곳은 롬바르디아와 라치오(로마)를 포함한 네 곳에 불과했다. 나머지 지역은 이들이 거둔 세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조 때문에 북부에서는 노동자와 중하위 계층을 중심으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왜 우리 세금을 다른 지역과 나눠 쓰느냐는 것이다. 북부동맹은 이런 분노를 잘 조직해 1987년 1석에 불과했던 의석을 7년 만에 118석으로 늘렸다.
수도권으로 사람과 기업이 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소위 ‘잘나가는’ 이들 지역은 많은 인구와 넉넉한 세수를 바탕으로 중앙 정치에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비수도권 지역의 목소리는 소외된다. 지금까지의 지역 갈등이 영호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갈등이었다면 앞으로의 지역 갈등은 경제력 차이에 기반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갈등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 우리 정치는 수도권 표심이라는 커다란 이익을 버리고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대의를 선택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국가균형발전을 이루지 못하고서는 지역소멸과 저출산·고령화 등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23-09-2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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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오픈이노베이션과 부산 블록체인 클러스터
9월 초 서울 내 특급호텔은 해외에서 몰려온 투숙객들로 만실이었다. 대규모 파티가 도심 곳곳에서 열렸고, 서울 시내 웬만한 호텔의 라운지는 연일 이어지는 투자 설명회 열기로 뜨거웠다. 아시아 최대 규모 아트페어인 ‘키아프·프리즈 서울’, 아시아 최대 규모 블록체인 콘퍼런스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 국내 최대 패션 행사 ‘서울 패션위크’가 모두 같은 주에 열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패션, 문화예술과 블록체인 기술이라는 3개의 큰 축으로 기획된 서울의 전시 클러스터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처럼 잘만 기획하면 서로 다른 이종 비즈니스의 클러스터(군집화)는 서로 간에 시너지를 내며 기대 이상의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영역의 기술과 자원을 활용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오픈이노베이션 전략’이라고 부른다.
지난주 부산시는 부산의 블록체인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Target 2026 블록체인 부산’ 계획을 발표했다. 금과 은, 부산국제영화제 IP(지적재산권)등 가치를 지닌 자산이 토큰화돼 24시간 거래되는 블록체인 거래소를 설립하고, 부산을 블록체인 기술 도시로 성장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블록체인업 100곳과 이 기업들을 지원할 블록체인 펀드를 설립하겠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비즈니스를 위한 기술기업을 한데 모으고,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디지털 자산을 거래하고, 이를 지원하는 블록체인 펀드를 설립하는 내용이다. 그야말로 부산을 블록체인 산업 ‘클러스터 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청사진이다.
9월 서울 특급호텔 투자자들로 만실
키아프·블록체인·패션 위크 열려
모객·투자 유치 서로 시너지 효과
부산, 클러스터 생태계 조성 급선무
대학·연구소·기업·펀드 유기적 결합
다양한 업종 연결해 신산업 창출해야
부산에서 만들어지는 블록체인 클러스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선 미국 보스턴의 바이오클러스터가 떠오른다. 보스턴의 바이오 클러스터는 지역 소재 명문대(MIT, 하버드)를 중심으로 연구소, 병원, 1000개 이상의 기업 등이 군집한 세계 최강의 바이오 클러스터이다. 연구기관, 병원, 기업, 지원기관, 벤처펀드가 하나의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대학교 연구실을 통해 바이오 연구가 집적되고,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할 기업 및 펀드들이 모이자, 주정부는 세제·금융 지원을 통해 선순환 벤처투자 생태계를 육성했다. 인력·자본이 매칭되면서 참여 주체 간 정보 교류·협업을 통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부산도 지역대학, 연구소, 기업 그리고 투자펀드와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자생적인 블록체인 클러스터 생태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첫발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의 대학, 연구소·기업의 잠재력은 충분하다. 항만 물류 시스템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는 대표적인 혁신 사례는 부산대 김호원 교수 연구팀이 개발하였다. 전투기의 역공학기술을 개발하는 세계적인 하드웨어 보안전문가 고려대 이중희 교수는 부경대의 드래곤밸리에 ‘블록체인 하드웨어 보안연구소’를 설립하고 안드로이드 OS통제기반 블록체인 하드웨어 월렛 개발에 성공했다. 부산이 블록체인 특구로 지정된 이래, 많은 블록체인 기업이 본사 또는 지사를 부산에 열며 블록체인 사업을 준비 중이다. 여기에 ‘Target 2026 블록체인 부산’ 계획을 통해 발표된 것처럼 블록체인 기술기업 100개의 유치와 부산 디지털자산거래소 설립이 된다면 블록체인 기술 분야에서의 클러스터 효과가 본격화 될 것이라고 본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스위스의 추크나 미국의 실리콘밸리처럼 블록체인 기술기업들이 모여들며 클러스터 효과를 내기 시작한 도시들과 경쟁하려면 부산 블록체인 클러스터만의 경쟁력이 필요하다. 부산의 블록체인 클러스터도 부산의 다양한 산업의 시너지 효과를 고려하는 오픈이노베이션 방식으로 추진하며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블록체인 기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립된 첨단기술 산업분야이지만, 인터넷 기술처럼 다른 산업을 더욱 더 발전시키는 마중물로 쓰일 수 있다.
점과 점이 만나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만나면 면이 된다. 부산에 조성되는 산학연 블록체인 클러스터가 부산의 현재를 대표하는 조선·항만·물류인프라 산업과 부산의 미래 먹거리로 떠오르는 이차전지 산업과 만났을 때는 그런 극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부산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지스타와 같은 훌륭한 문화예술 콘텐츠가 있다. 앞으로 만들어질 부산의 블록체인 기술 클러스터에 부산만의 문화예술 콘텐츠가 결합한다면 부산은 세계의 투자자들을 불러 모을 특별함을 가질 수 있다.
앞으로 만들어질 부산 블록체인 특구 클러스터에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예술 콘텐츠 산업과 부산의 현재를 상징하는 조선, 항만, 물류인프라 산업과 부산의 미래를 대표하는 이차전지 산업을 연결하여 새로운 지식·기술을 창출하는 오픈이노베이션 방식으로 부산 블록체인 클러스터의 경쟁력을 강화하자.
2023-09-2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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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문화관광도시 부산이 되려면
‘그린 스마트 도시 부산’을 구현하기 위한 부산시의 정책 중에 ‘누구나 찾고 싶은 문화관광 매력 도시’라는 항목이 있다. 작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관광 100선’ 중에 부산의 명소 8곳을 선정했다. 태종대, 해운대와 송정 해변, 감천문화마을, 용두산·자갈치 관광특구, 용궁구름다리와 송도 해변, 오시리아 관광단지, 엑스더스카이와 그린레일웨이, 광안리 해변과 SUP 존이 그곳이다. 이 정도면 문화관광 도시로서 구색을 갖춘 듯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감천문화마을을 제외하면 부산의 역사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빼어난 자연경관만 관광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이런 관광지만 돌고 나면 관광객들은 부산을 어떻게 생각할까. 해수욕과 생선회를 즐길 수 있는 도시로만 여기진 않을까.
산, 강, 바다로 둘러싸인 부산은 훌륭한 경치 외에도 많은 것을 갖고 있다. 부산은 성곽·봉수·왜관·고분·사찰의 도시이기도 하다. 성곽만 봐도 동래읍성을 비롯해 배산성·동래고읍성·좌수영성·금정산성·부산진성·다대진성·기장교리읍성·기장읍성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만 해도 부산왜성(증산왜성)·자성대왜성·기장죽성리왜성·구포왜성·가덕도왜성·죽도왜성·눌차왜성 등이 있다. 이렇게 많은 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산시민도 많다. 이 성들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혹은 일본의 침략으로 생겨난 것이다. 황령산 봉수를 중심으로 가덕도부터 기장까지 해안을 따라 늘어선 봉수도 유사한 용도였다.
한편, 평화로울 때는 일본인과의 교역을 위한 왜관이 운영됐다. 그렇게 부산은 대마도가 보이는 국경에 위치하면서, 숱한 침략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국방의 교두보였다. 이런 부산의 역사는 경관 위주의 관광만으로는 알 수 없다.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만 한다.
현재 동구도서관과 증산공원이 있는 공간이 바로 증산왜성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총사령부 역할을 한 곳이다. 전망대가 선 곳은 일본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본환’이고, 그 아래로 게이트볼장이 있는 곳이 본환을 감싸는 ‘이환’이다. 그 바깥을 따라 걸어보면 임진왜란 당시 쌓은 성벽의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면 ‘증산왜성’이라고만 쓴 팻말이 있을 뿐, 이곳이 당시 만들어진 왜성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안내판은 없다. 증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시루를 거꾸로 엎어 놓은 왜성의 모습에서 비롯됐다. 부산포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부산진성 안과 밖의 건물을 다 허물고 수백 채의 새집을 지은 광경을 목도하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최근 부산진성으로 이름을 바꾼 자성대도 조선 후기에 부산진성을 새로 쌓으면서 왜성을 성안으로 포함한 것이다. 2개의 성문만 부산진성을 복원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여기저기서 60~70도로 경사지게 축조된 일본식 성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성대 앞바다가 바로 충무공이 부산포해전을 치른 현장이고, 10월 5일 부산시민의 날은 바로 부산포해전이 벌어진 날이다.
조선은 왜성의 견고함을 눈여겨보았고, 조선의 수군진이 위치한 곳에 있는 왜성은 파괴하지 않고 재활용했다. 전쟁 당사자였던 조선도 그대로 살려뒀는데, 현재의 우리가 일본 잔재라며 없애버리자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왜성은 임란이라는 전쟁에 대한 다시 없는 물증이며, 우리에겐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증산왜성을 살펴 보고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안용복을 기념하는 부산포 개항 문화관, 부산여성 교육의 출발점인 일신여학교, 부산 3·1운동의 중심지였던 부산진교회, 임란 때 전사한 부산진 첨사 정발 장군을 기리는 정공단, 조선 후기 부산진이 있었던 자성대와 조선통신사 역사관 정도만 둘러봐도 부산의 특성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서너 시간 정도 걸리는 부산 문화·역사 탐방을 위한 코스를 다양하게 개발하고, 각 코스의 정보를 제공하는 팸플릿을 영어·중국어·일본어 등으로 엮어 역이나 공항에 비치할 필요가 있다. 직접 가보지는 않더라도, 부산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기회에 방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부산시민들이 부산의 문화·역사에 관심을 갖는 일이다.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애정을 갖지 않는 도시라면, 다른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주변의 문화유적에 관심을 가지고, 관광객들에게 간단하더라도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냥 매력적인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경관이나 유적뿐만 아니라 부산시민들도 매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찾고 싶은 도시 부산을 만드는 일은 부산시민인 우리가 반드시 함께해야만 한다.
2023-09-2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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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불꽃 튀는 증인 신문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이 선서문을 낭독하는 순간 법정의 공기는 무거워진다. 변호사 업무 중 가장 긴장되고 순발력을 요하며, 박진감이 넘치는 순간은 상대방이 신청한 증인을 반대 신문할 때이다. 증인이 예측할 수 없는 질문을 준비하고 히든카드로 숨겨 둔 증거를 제시하며 증인의 허를 찔러 판세를 뒤집어야만 한다. 상대한테 유리한 진술을 해 왔던 증인을 법정에 세워, 증인석에서 거짓을 증언했을 때, ‘위증죄’로 처벌될 수 있는 위험 부담을 안겨 주고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단 몇 분 만에 끝나는 변론 절차와 달리 증인 신문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증인의 출석을 담보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에, 법원에서는 증인 신청을 받아 주는 것에 소극적이다. 특히 변호인이 검사가 제출한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부동의 하여, 다수의 증인 신문을 진행해야 할 때엔 재판부에서는 ‘정말로 반대 신문이 필요하냐’라고 싫은 내색을 드러내는 경우도 더러 있다.
정치인들이나 고위직 관료의 형사 사건에서 증인이 수십 명 되고, 수년간 재판을 이어 가는 상황을 보면, 딴 세상 이야기 같기도 하다. 피고인에 관한 공소 사실을 입증할 만한 CCTV 영상, 사진, 메시지 등 직접적인 물증 없이 정황 증거 및 그에 부합하는 진술에 주로 의존하여 기소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검사와 변호인 간에 불꽃 튀는 증인 신문이 진행된다. 뇌물죄 사건에서 수사기관에서 돈을 건넸다고 진술한 자의 진술이 법정에서 번복될 경우 검사와 변호인 간에는 치열한 공방이 이루어진다.
수사 단계에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던 자들이 법정에서 선서를 하고 나서는 진술을 번복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런 경우, 검찰은 증인과 피고인이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의심을 품고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달라고 부탁받았나요. 최근에 피고인이나 변호인과 만난 적 있나요” 등의 질문을 하고는 피고인과 증인의 통신 내역을 조회하고, 통화 내역을 두고서 피고인과 사전에 말을 맞춘 것이라고 반박한다. 애당초 증인의 말 한마디로 뒤집힐 사건이었으면 기소하지 말았어야 마땅하다. 형사소송법은 검사나 변호인이 증인을 사전에 만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
가끔 의뢰인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면, 사전에 증인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진실을 알아야 변론에 더 큰 힘을 실을 수 있고, 의뢰인이 혹여나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면 설득해서 변론 방향을 바꿀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호인이 재판 전에 증인을 만난 후 증인이 진술을 번복하여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증인을 회유했다고 오해를 사기에 변호인으로서는 매우 조심스럽고 차라리 사전 면담을 포기하는 길을 택한다. 반면, 검찰사건사무규칙은 검사가 증인을 미리 만나 신문을 준비할 수 있다고 규정화 되어 있어서, 예전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에서 뇌물 공여자를 검찰이 재판 전 두 차례 면담을 한 것을 두고, 대법원은 검사가 증인 신문 전에 증인을 소환해 면담했다면 회유나 압박 등으로 증인의 법정 진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을 검사가 증명하지 못하면 증인의 법정 진술은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공판에 앞서 증인을 소환·면담함으로써 증언 내용에 영향을 주는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다. 대법원이 검사든 피고인이든 공평하게 증인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듯이, 검찰이 수차례 조사한 참고인에 대한 증인 신문을 하기 전에, 증인에 대한 접근 기회는 양측에게 동일하게 주어져야 마땅하고, 그 만남 자체에 의혹을 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형사 사건에서는 대부분 해당 사건의 피해자가 증인석에 서는 경우가 많다. 범죄 피해자로서, 낯선 법정에서 판사, 검사, 그리고 방청객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기억해 내서 증언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죄를 다투는 변호인으로서는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피해자에게 예리한 질문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반대 신문을 할 때, 지나치게 피해자를 몰아세우거나 모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양해야 하고, 이는 자칫 피고인에게도 불리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꽃 튀는 증인 신문을 긴 시간 진행하고 나면 진이 빠지지만, 그만큼 변호사 업무의 생동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의뢰인을 믿고 하는 나의 주장이 진실에 가깝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혹여나 모를 ‘진짜 피해자’에게 나의 질문이 상처가 되지는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재판에 임할 뿐이다.
2023-09-1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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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공교육과 잘 지내는 법
누군가와 사랑할 때 서로 마음의 크기에는 차이가 없음에도 각자가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관계에 어둠이 드리우곤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상호관계 전문가인 개리 채프먼은 사람마다 사랑의 주파수를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주파수가 상대방의 주파수와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갈등이라고 진단한다. 즉, 상대를 무척 사랑하고 있음에도 그가 지닌 사랑의 주파수가 나의 주파수와 달라 내 사랑의 감정이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개리 채프먼은 책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 사랑의 주파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 어떤 사람은 인정하는 말을 들을 때 관계에서 충만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스킨십을 통해, 또 다른 사람은 선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다. 5가지 사랑법이 단독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행위는 위의 속성을 모두 포함한다면 더욱 좋다. 하지만 개인에 따라 선호하는 사랑 표현 방식과 우선순위는 각자 다르게 나타난다.
5가지 사랑법은 사람이 지닌 가치관의 대표적인 범주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범위를 확장해 볼 수 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진로를 고민하고 퇴사를 결정할 때, 그것이 인간관계가 아닌 직장과의 관계였지만, 이 책을 떠올렸다. 직업을 정하는 것은, 혹은 인생에 상당 시간을 보내는 직장과 맺는 관계는, 비록 대인관계는 아니지만 친밀한 관계만큼이나 많은 헌신과 책임감이라는 일종의 커미트먼트(Commitment)를 요구한다. 어떤 가치들이 내게 우선하며 직장은 내게 어떤 가치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합의점을 찾는 것이 직업적 행복에 기여할 것이다.
그렇다면 채프먼이 말한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방향성으로 대칭시켜 해석하면, ‘5가지 인생의 언어’ 쯤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직업과의 관계에 나름대로 사랑법을 적용해 상상해 본다면, 인정하는 말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자아성장과 자아실현의 욕구다. 함께하는 시간은 소위 ‘워라밸’이라고 지칭되는 일과 삶의 균형과 시간적인 여유로움이다. 선물은 물질적이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보상이다. 봉사는 사회에 공익적인 가치를 나누고 실천하는 것이다. 스킨십은 조직 내에서 타인과 관계 맺으며 느끼는 소속감이나 네트워킹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교사라는 직업은 아마도 다른 사람보다 봉사와 스킨십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택할 것 같다. 봉사로는 학생들을 지도하고 그들의 성장을 돕고 배움을 가르치며 보람을 얻을 것이다. 스킨십은 매년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고 동료 교사나 학부모와 관계 맺고 소통하며 사제간의 정을 나누고 소속감을 느낄 것이다. 물론 좋은 선생님,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인정하는 말도 중요할 것이고, 정시에 출퇴근하며 삶과 일이 균형을 갖추는 것도, 근로에 따른 적절한 보상도 중요할 것이지만, 다른 직업군보다도 공교육에 종사하는 교사라는 직업은 직업윤리 측면에서도 봉사와 스킨십의 가치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근래 교사의 고충을 반영하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연달아 이어졌고 지난주 공교육 멈춤의 날이 있었다. 앞서 사랑의 언어를 차용한 인생의 언어를 빌려와 사회적 가치관 차원에서 교권 위기의 문제를 떠올려보고 싶다. 오늘날 교사가 직업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하위에 두었던 가치라면 선물, 즉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보상으로 짐작된다. 지난 10년 동안 사기업의 임금인상과 비교하여, 공무원 임금구조를 따르는 교사의 처우는 실질적으로 해마다 악화되어 왔다.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 위해 교사노조의 파업이 빈번한 외국과 달리 한국에서 교사의 파업은 유례가 없었다.
반면 우리 사회는 선물이라는 가치를 우선하는 쪽으로 변해 왔다. 그 결과 학부모와 학생은 공교육을 이해(利害)의 관점에서 서비스 거래처럼 여기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사교육과 달리 공교육은 여전히 공공성과 봉사, 보람, 희생, 육성, 사회화, 인연과 같은 정량화하기 어려운 많은 가치를 포용한다. 공교육을 구성하는 관계 주체들 간에 주파수가 어긋나는 지점이다.
앞서 상대의 주파수를 알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배려해야 한다는 걸 이야기했다. 공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공교육이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공적 가치와 그에 맞는 적절한 관계의 언어가 고려되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공공성에 기반한 관계의 문법은 교육 당사자인 교사에게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사랑이든, 직장이든, 어떤 관계라도 폭언과 폭행, 갑질이 상호 간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약속이다. 사회적으로 교사의 역할을 긍정하고 인정하고 신뢰하고 나아가 존경하며 직업이 지닌 가치를 환기하는 노력은 공교육과 잘 지내는 가장 기초적인 사랑법이다.
2023-09-1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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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홍범도 장군 논란 유감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거의 4년 만에 카자흐스탄을 9일간 다녀왔다. 톈산산맥에 둘러싸인 분지로 도시매연 문제가 심각했던 알마티는 시내버스를 전부 천연가스 버스로 바꾸어 공기가 맑아져 있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남하한 러시아인 1만여 명이 도심의 호텔과 아파트를 차지하여 숙박난이 심하고, 소비물가도 15~30%가량 올라 있었다. 모처럼 찾아간 카자흐스탄을 여행 중일 때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홍범도 장군이 누구시던가. 일제강점기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를 이끈 애국·애족의 상징이자 독립국가연합(CIS) 40만 고려인 디아스포라를 대표하는 정신적 지주가 아닌가. 그분은 21세기의 우리에 훨씬 앞서 세계를 개척하고 세계 인민과 협력해 나간 국제인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반이나 계속되고, 세계 블록화와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등이 가속되면서 경제적 국제정치적으로 중요성이 점차 증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홍범도는 중앙아시아와 한국을 잇는 국제 협력의 상징이다. 대한민국의 중요한 ‘국제자산’이다. 그는 우리의 영웅인 동시에 카자흐스탄의 영웅, 나아가 중앙아시아의 영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격의 그분은 크질오르다에서 조선극장 수위, 화부 등의 굴곡 많은 삶을 사시면서도 “내가 봉오동과 청산리의 그 홍범도다”라는 말씀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대학과 시민사회에서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 극동과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면서 누구보다 홍범도 장군을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크질오르다의 장군 묘소에 참배하러 갔다가 억새풀이 묘를 덮어버린 게 안타까워 현지 고려인협회에 벌초 기계를 사드리기도 하고, 교육부의 ‘인문 역량 강화사업’(CORE) 땐 학생들을 현지로 인솔하고 가서 그분의 우국충정 앞에 같이 엎드리기도 하였다. 가끔 카자흐스탄의 한국 기업에 취업해 나가는 졸업생이 있으면 꼭 묘소를 참배하고 술 한 잔이라도 올리기를 당부하였다.
애초부터 일이 잘못 꼬였다. 2021년 8월에 그분의 유해를 크질오르다에서 굳이 파서 서울로 옮긴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그분이 지닌 복합적인 여러 상징성을 무시하고 좁은 국수주의에 함몰되어 일을 저지른 게 패착이었다. 그분은 알마티 1140km 북서쪽, 그 제2의 고향에 그대로 남아 고려인의 영웅으로, 한국인의 진취적 기상을 대표하는 분으로, 한민족과 중앙아시아 100여 민족의 친선과 우정의 상징으로 그대로 계속 계셨으면 훨씬 더 좋았다는 게 필자의 확신이다. 굳이 대통령 전용기를 보내는 쇼까지 하면서 그분의 고향인 평양도 아닌, 남쪽의 대전 현충원으로 모시고 올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흉상 철거와 군함 이름 개칭 논의는 더 고약하다. 이건 2차 가해다. 유해 이장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역사와 인물에 대한 평가가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와 세계관에 따라 이렇게 요동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극우파들은 홍 장군이 소련에 살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몸을 맡기고 공산당에 가입한 것만 가려내어 그분의 사상과 삶 전체를 깎아내리고 매도한다. 정말 어이가 없다. 아니, 그분에게 다른 선택권이 있었겠는가. 그 당시의 소련 사회주의는 약소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는 ‘복음’이기도 했지만, 나라도 없는 유랑민들, 그것도 간첩 혐의가 덧씌워진 오갈 데 없는 백성을 소련 땅에서 이끌면서 지도자로서 다른 수가 있었겠는가. 그것도 무시무시한 스탈린 체제 밑에서 말이다.
친일파들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 친일파들이야 본인들의 선택으로 일왕 만세를 외쳤겠지만, 홍범도에겐 레닌주의와 소련 공산당 외에 다른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방편과 목적은 구분해야 한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동포 사회의 이익을 도모하여 지도자로서 공산당에 가입한 게 잘못이라면, 물고기가 물에 사는 것도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시대와 인물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수단과 목적을 구분해 가며, 큰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육사에서 철거하고 예비 장교들에게 그분을 존경하지 말라는 건 청년들에게 “나라를 뺏겨도 너희들은 애국하지 말라” “지도자가 되더라도 너희들은 자기 백성을 버려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홍범도 장군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꼴을 보려고 내가 그렇게 만주를 떠돌고 소련 땅을 전전하며 투쟁했던가.” “이놈들아, 날 더는 욕보이지 말고 원래 있던 크질오르다로 도로 데려다 놔라!”
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2023-09-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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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비짓부산 패스'로 부산 여행 올 패스!
2020년 1월은 부산의 관광산업 측면에서 볼 때 역사적인 해였다. ‘관광 뉴딜’이라 불리는 국제관광도시 사업에 전국 최초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와 부산시가 2025년까지 총 1400억 원을 투입해 관광거점도시를 육성하여 서울에 집중되는 외국인을 지역에 분산시킴으로써 관광 산업의 미래를 지역에 열어주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의 선정 과정에서 부산과 인천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으나, 부산이 선정된 주요한 요인은 새로운 시설을 짓는 것보다는 기존의 관광 자원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지가 주된 평가 기준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로 ‘국제관광도시 부산’ 선정 3년 차로 사업이 추진되며, 선정 기준에 걸맞게 인지도 상승 등의 성과가 속속들이 결과를 내고 있다. 미국지리학회가 발행하는 자연·문화유산 탐사 전문 매체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이 부산을 ‘2023년 세계 최고 여행지 25곳’으로 선정하고 ‘2023년 꼭 여행해야 할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 도시’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국가 대신 도시 단위로 선정된 것은 아시아에서 부산이 유일하다. 일본 대형 여행사 ‘HIS’의 인기 해외 여행지에도 그동안 순위권 밖이던 부산이 4위에 올라 다양한 상품을 개발 판매 중이다.
시와 부산관광공사가 국제관광도시 부산을 전 세계에 세일즈하기 위해 부산 최초 ‘부산 관광 브랜드’와 즐기고(Play), 일하고(Work), 살고(Live) 싶은 도시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세계인에게 부산을 국제관광도시로 브랜딩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 개별 관광객이 딱 여행하기 좋게 관광지 162곳에 공공와이파이를 설치했고, 가성비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부산의 유료 관광지 30여 곳과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외국인 관광객 전용 관광패스 ‘비짓부산패스(VISIT BUSAN PASS)’도 운영하고 있다.
관광 패스는 전 세계 외국인 여행 필수 아이템으로 이미 해외 주요 관광 도시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개발되어 운영되고 있다. 대중교통이 비싼 일본에서 오사카 ‘주유 패스’를 구입하면, 버스와 전철 등 모든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고 시내 관광지 40여 곳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또, 40곳 이상의 시내 점포와 시설에서도 할인 등 특전을 받을 수 있다. 쇼핑 천국 홍콩 여행에 만능 카드로 통하는 ‘옥토퍼스’는 가성비를 강조하는 할인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매하여 사용할 수 있는 편리성을 강조한다. 교통카드 기능뿐 아니라 스타벅스, 맥도날드 등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각종 상점에서도 쉽게 결재할 수 있다.
한국 최초 외국인 전용 관광 패스는 서울관광재단에서 카드 한 장으로 서울 여행이라는 개념으로 ‘디스커버 서울 패스’를 2016년 하반기에 출시해 판매 5개월 만에 5000장, 1년 5개월 만에 2만 장이 팔렸다고 한다. 부산의 경우 국제관광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비짓부산패스’가 개발되어 활발히 판매되고 있다.
외국인 전용 관광 카드로 보다 저렴하게, 보다 편리하게, 믿을 수 있는 정보와 독특한 경험을 선물하는 콘셉트로 24시간 카드와 48시간 카드가 절찬리에 판매 중이다. 아직은 시범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사업은 관광특구에 집중된 관광객을 100여 개가 넘는 가맹점을 연결하여 부산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지역 균형발전과 관광객 체류를 늘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으로 추진되고 있다.
시범 운영 중인 비짓부산 패스는 지난달 15일까지 3만 43장이 팔렸다. 이는 지난 2월 비짓부산 패스 시범 운영을 시작하면서 잡았던 목표 수량(1만 5000장)의 배를 넘는 수치다. 24시간과 48시간 2종류를 시범 판매 중으로 48시간 판매 비중이 전체 판매의 72.3%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구매 국가는 대만과 홍콩이 전체 외국인 구매의 74%를 차지하였으며, 온라인 여행사(OTA: Online Travel Agency)를 통해 구매하는 것으로 최근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이는 패스를 통해 체류를 늘릴 수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비짓부산 패스를 통해 방문하는 유료 관광지는 부산 엑스더스카이 전망대, 해운대 블루라인파크 해변 열차, 스카이라인루지 부산, 송도 해상케이블카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시범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비짓부산 패스는 내달부터 공식적으로 정식 운영할 계획이며, 현재 2가지 종류를 좀 더 확대하고 디자인도 새롭게 단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전 세계 외국인 개별 관광객 대상 시범 운영 흥행에 이어 국제관광도시사업의 특수가 아닌 레거시로 외국인 관광객 유치의 마중물이 되어 부산 여행의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하길 간절히 바란다.
김지우 부산관광공사 글로벌마케팅팀 선임매니저
2023-09-0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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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스테이블 코인 노려야
블록체인 기술이 각광을 받으면서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암호화폐는 전통적인 화폐 시스템에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실물 자산과 연동되지 않아 실체에 대한 의문이 든다는 이유로 가상자산으로 불리며, 애물단지 취급을 받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실물 자산과 연동되는 디지털 화폐로 관심이 옮겨 가면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통화인 CBDC 및 실물 자산과 연동되는 스테이블 코인이 급부상하고 있다.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는 말 그대로 한국은행과 같은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화폐를 디지털화한 것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안정적인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달러와 같은 안정적인 자산에 가치를 연동시켜 지불수단 역할을 수행한다. CBDC와 스테이블 코인은 실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금융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기존 화폐 시스템에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
이 둘은 기능 면에서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목적과 운영 방식에서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CBDC는 국가의 공식 통화이며,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관리한다. CBDC는 기존의 현금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화폐의 안정성과 권위를 유지하면서 디지털 경제에 더 적합한 화폐 형태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디지털 형태이기 때문에 전자 결제와 금융 기술 혁신에 보다 적합하게 작동할 수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하지만, 변동성이 매우 높은 통상의 가상자산과 달리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달러·유로 등의 다른 자산과 연동된다. 이러한 연동을 통해 가치의 변동성을 줄이고, 지불수단으로서 사용성을 확대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기업이나 금융 기관이 발행하고,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여 신뢰성과 투명성을 제공하는 점에서 CBDC와 다르다.
한국은행은 디지털화폐를 통한 차세대 결제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목표로 CBDC 발행을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지난 5월부터 CBDC 금융 기관 연계 실험을 마치고 인프라 구축 방안도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은행이 CBDC 결제 시범 지역 선정을 놓고 고심인 가운데 부산을 포함해 제주·인천이 후보지로 검토되고 있다.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려는 부산으로서는 CBDC 결제 시범 지역으로 선정되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CBDC는 어차피 지방 정부가 선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만이 할 수 있다. 종국적으로는 국가 전체적으로 확대 사용되다가 국제적인 결제 시스템과도 연계되어야 한다. 부산이 주도해 가기에는 애당초 규모와 난이도 면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CBDC와 함께 디지털 화폐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되는 스테이블 코인에 대해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가치 안정성이 확보되어 실제 상거래나 금융 활동에 적용 가능하다. 금융 시스템에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나 개인도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금융 강국 외에 인도네시아, 필리핀이나 동유럽 국가와 같은 금융 접근성이 떨어지는 국가로의 확장성도 확보된다. 특히, 부산은 항만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기 위해서 국제 거래에서도 경쟁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존 금융시스템이 갖는 결제 속도나 전송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 스테이블 코인을 통해 부산이 이러한 경쟁력을 갖추고 국제 거래를 주도해 나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테이블 코인은 가치 유지의 담보가 되는 자산이 달러·유로 같은 특정 자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산들의 조합을 통해 가치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다. 사용자들은 각자의 필요와 용도에 적합한 스테이블 코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는 기존 금융 시스템에 혁신을 가져와 더 빠르고 경제적인 금융 거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과 일본은 이미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법적 포섭과 규율에 대해 고민하면서 규제의 영역 내에서 양성화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작년 말에 각국의 스테이블 코인 규제 및 규율 방안에 대해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부산시는 디지털자산 통합 거래소를 기획하고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통합 거래소에 담을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금융과 항만물류의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부산에 새로운 날개를 달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변화와 그 흐름 속에서 답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2023-09-0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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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현실판 조커는 없다
영화 ‘조커’는 성공한 영화다. 불특정 다수를 죽이는 미치광이를 주목받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비행 청소년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아서’를 지켜봤다. 그리고 잠재되어 있던 내면의 분노가 어떻게 한 인간을 잡아먹는지 그 처절한 과정에 숨을 죽였다. 훌륭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적으로 말이다. 주인공 아서의 행동이 대단하거나 멋져서가 아니다. 인간을 좀먹는 심리를 세밀하게 표현했고, 악의 평범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조커’가 훌륭하다 평가받는 이유였다고 본다.
영화는 허구지만 현실을 반영한다. 반면 현실에다 영화를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영화 ‘배트맨’이나 ‘조커’에서 보이는 ‘조커’ 캐릭터는 영화적 인물일 뿐, 현실에 있어 마땅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난 8월 일본에서는 현실판 조커가 되고 싶다고 조커 복장을 한 채 방화를 저지르고 흉기를 휘둘러 10여 명을 다치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 여자친구가 다른 남성과 결혼한 일로 실의에 빠져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스스로를 영화적 인물로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거리에서 칼을 휘두르면서 ‘열심히 살아 보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그랬다’는 식이다.
뉴스가 보도되자 인터넷이나 SNS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그런 논리라면 나는 사람을 열 명도 더 죽였을 것이다….” 환경이 범죄의 이유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화가 난다고 남을 해치는 건 야만적이다. 다만 이 범죄들을 단순히 미치광이의 소행으로 치부하고 덮어 둘 수도 없다. 그들이 무섭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게 여러모로 확인되고 있어서다.
관객들이 ‘아서’의 심리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이입할 수는 있었던 걸 보면, 분노는 컨트롤하기 어려운 감정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 분노는 아무 죄 없는 무고한 생명을 앗아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한다. 잔인하게도 분노 앞에 인간성을 내려놓은 이들은 “왜 그러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일이 잘 안 풀려서요”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것이 유일한 변명인 셈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총기 난사나 칼부림을 막기 위해 가해 심리를 파악해서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은, 불만 많은 가해자를 이해하거나 서사를 만들어 주자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때로 분노에 질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자는 관점에서 시작하자는 의미다. 모두가 영화 ‘조커’의 스토리와 연출에 감탄할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조커’ 캐릭터 그 자체에 공감하게 하였는지를 파악해 보아야 의미가 있다. 그래서 가해자들의 계층과 경제적 상황, 심리에 대한 연구는 불가피하다.
수많은 테러가 자행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테러나 범죄 심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회적 소외를 받는 사람에 대한 대책과 사회 안전망 강화’다. 프랑스의 대테러 정책을 다룬 한 논문에서는 프랑스가 강경한 테러 대응법에도 2015년 이후 테러를 막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테러의 최근 양상이 그간 지역적인 이유였던 것과는 달리 사회적 계급 갈등과 관련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집중적으로 사회적 소외 계층이나 은둔형 외톨이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미국은 범죄 억제의 일환으로 소외 계층에 대한 교육과 복지 체계를 확대하고,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직을 신설해 각종 범죄와 극단적 선택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2021년 일본에도 ‘고독’ 담당 각료가 임명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 있다. 우리나라도 개인의 고독과 외로움, 소외로 인한 분노 감정을 다루는 국가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테러형 범죄는 ‘괴물’이 된 누군가의 일탈이 아니라 평범한 얼굴의 주변인 또는 스스로의 모습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특별하거나 이상한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접근하면 대책을 찾을 수 없다. 그건 특별한 게 아니라 비틀린 것이고, 그 비틀림은 보편적이라는 사회적 공감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가 괴롭거나 소외당하고 분노감을 느낄 때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남들에게도 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는 특별하거나 대단히 악한 인물이 아니다.
영화 ‘조커’ 속 아서는 위풍당당하고 대담하며, 일부 세력으로부터 추종을 받는다. 반면 현실판 조커를 꿈꾼 일본의 범죄자는 징역 23년을 선고받았고, 지난 2월 미국에서 총기 난사로 아이들을 죽인 범죄자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실에는 조커가 없다. 분노에 져서 자신과 타인을 파멸시킨 불쌍한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2023-08-3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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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투표하지 말라는 정치
요즘 이런 질문이 많다. 왜 윤석열 대통령은 극우 정치를 하는가? 그러면 중도층이 윤 정부에 등을 돌리고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하기 어려울 텐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윤 대통령이 극우정치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간단하다. 대통령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결단의 정치고 나쁘게 말하면 독재 정치다. 검사 시절부터 윤 대통령은 안하무인식 독불장군 행보를 보여 왔다. 대통령이 된 이상 독불장군에게 조언이나 쓴소리하기는 더 어렵다. 객관적인 참모들은 쫓겨나거나 입을 다물고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만 곁에 남는다. 지금 대통령 곁에 힘 있는 사람들은 ‘공산당 기관지’ 발언을 한 이동관 방통위원장 후보자처럼 극우 성향의 돌아온 MB맨들과 극소수 극우 유튜버처럼 전직 대통령을 빨갱이라고까지 지칭하는 극우 인사들이다. 그 결과는 대통령발 극우 정치의 일방통행과 폭주뿐이다.
윤 대통령이 극우정치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분히 선거공학적이다. 지금 우리 유권자들은 연령에 따라 특성이 명확하다. 20~30대, 40~50대, 60대 이상 등 크게 세 가지 범주의 투표 세대가 존재한다. 잘 알다시피 40~50대는 진보 성향으로 민주당 지지층이 다수인 반면, 60대 이상은 보수 성향으로 국민의힘 지지층이 절대다수다. 문제는 20~30대다. 전통적으로 20~30대는 진보 성향이 다수였지만 지난 대선 전부터 서서히 보수화되기 시작했고, 지난 대선에서는 이준석 당시 당 대표가 20대 남성(이대남) 표를 끌어오는 데 성공하면서 국민의힘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취임 이후 윤 대통령은 특유의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을 행사해 왔고, 그 결과 통합과 소통의 정치는 한국 정치에서 사라졌다. 중도층은 실망하고 이들의 대통령에 대한 지지 철회는 지속되었다. 이대남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 논쟁을 통해 20대 여성과 이대남을 갈라치고 이대남의 표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지만, 이들에게 약속한 여러 대선 공약은 취임 이후 상당 부분 사라졌다. 예컨대, 대표적인 친 이대남 정책인 여성가족부 해체는 계속 늦어지면서 현재 유야무야 상태다. 상황이 이러니 이대남은 윤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적지 않게 철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내년 총선 전략은 몇 가지로 정리될 수밖에 없다. 첫째, 이대남의 지지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지난 7월 6일 윤 대통령은 ‘청년정책 점검 회의’를 주재하고, “국정의 기본 방향이 청년 정책이다” “청년들 덕에 당선됐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내년 총선에서 청년 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한 포석에 나선 것이다.
둘째, 40~50대 민주당 지지층을 정치 혐오층이나 무관심층으로 만들어 내년 총선에서 투표를 덜 하게 만드는 것이다. 진보 성향의 40~50대 유권자를 정치 혐오층과 무관심층으로 만드는 방법은 상식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극우정치를 활성화하는 것이고, 정치를 이성과 상식을 벗어난 악다구니 정치, 적반하장 정치, 남 탓 정치, 갈등과 혐오의 정치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윤 대통령과 여당의 정치는 바로 이런 정치다. 게다가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국회의원들에 대한 검찰의 지속적인 수사와 기소, 그리고 피의사실 언론 공표는 야당에 대한 실망과 비판을 계속 증폭시켜 왔다. 여야 모두에 대한 정치 혐오감과 무관심을 키우는 것이다.총선 투표율이 떨어지면 국민의힘이 유리하고, 투표율이 올라가면 민주당이 유리하다. 셋째, 60대 이상 유권자는 보수 성향의 유권자가 절대적인 다수다. 이들에게 극우 정치는 반감과 비판보다는 시원하고 옳은 정치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윤 대통령의 극우정치는 당연히 60대 이상의 전통적인 보수층을 강하게 규합하는 효과가 크다.
내년 총선에 임하는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전략은 이렇게 보인다. 나라가 부강하고 민생이 편안한 정치가 아니라, 좋지 않은 방법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정치다. 이런 정치의 핵심은 야당 핵심 지지층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무관심하게 만들어 투표를 안 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에게 이런 식으로 투표하지 말라는 정치는 참정권을 통제하는 것으로 대의 민주주의의 최고 원리를 부정하는 행태다. 이런 정치는 나쁜 정치고 반드시 개선되어야 하는 정치다.
권력은 힘을 행사하지만 책임 또한 져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책임은 기본적으로 선거를 통해 묻는다. 정치 혐오와 무관심은 안 된다. 투표를 안 하게 만드는 정권을 투표로 평가하고 책임을 묻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이게 권력자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중우(衆愚)가 아니라 능동적인 주권자의 바른 자세다.
2023-08-2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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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다음은 없다
사건(事件)과 사고(事故)는 자주 함께 쓰는 말이지만 다른 뜻을 품고 있다. 영어로 ‘사고’는 accident라고 쓰는 반면 ‘사건’은 주로 incident라고 쓴다. 사고가 어떤 의도가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일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면, 사건은 역시 평소에 없었던 뜻밖의 일이지만 의도나 고의성을 갖고 벌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고라 하더라도 막을 수 있었던 일을 막지 못할 때,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가 반복될 때,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폭염과 폭우로 재난이 일상이 되었던 여름, 오송지하차도 참사는 3년 전 벌어진 부산에서의 초량지하차도 참사를 떠올리게 했다. 시민들의 신고에도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누군가는 또다시 이태원 참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기시감을 견디며,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지는 사고 속에서 더 이상 우연적인 요소만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얼마 전 파리바게뜨로 유명한 SPC그룹의 한 계열사 빵 공장에서 끼임 사고가 발생해 50대 여성 노동자가 숨졌다. 또 다른 계열사의 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끼임 사고로 숨졌던 일이 불과 10개월 전이다. 다른 공장에서도 손가락 끼임과 골절 사고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사고 경위와 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의문점들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 경위를 파악할수록 어떻게 한 사람의 목숨이 오갈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설비가 충분한 안전장치나 안전 수칙 없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 때문에 많은 언론과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이번 사안이 기업 경영 및 생산방식에 기인한 구조적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20대 여성 노동자의 사망 사건 경위를 밝히는 과정에서 장시간 노동이 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면서 휴무일조차도 카톡 선착순으로 신청해야만 했던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그뿐인가. 사고가 일어났던 그날에도 기계를 흰 천으로 덮은 채 공장은 계속 가동되었다. 동료가 죽은 자리에서 노동자들은 밤새 샌드위치를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이번 사고로 숨진 노동자 역시 하루 11시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당 이은주 의원실과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에서는 법률 검토 내용을 발표하면서 처음부터 안전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았다. 공정의 안전표준작업서에는 리프트 설비의 위험 요소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위험에 대한 작업 안전 수칙이나 관리 기준이 없었다고 밝혔다. 안전보건교육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안전 수칙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설비 가동 시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도 충분하지 않았다. 장시간 노동의 피로를 견디지 못한 상황 속에서 안전장치도 없이 24시간 돌아가는 빵 공장에서 사고는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최근 OTT로 보게 된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는 우발적 사고라 여겨질 수 있었던 한 죽음이 사실상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영화는 2017년 전주의 한 특성화고등학교와 콜센터에서 일어난 실화를 다루고 있다. 고등학생 ‘소희’는 학교의 현장실습으로 대기업의 하청업체 콜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고객들의 폭언과 업무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자살을 택한다. 소희를 보호해 주는 안전장치는 어디에도 없었다.
학교는 자신이 현장실습 보낸 학생이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청업체는 진상 고객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콜센터 노동자들의 실적을 압박하고, 대기업은 조금이라도 더 이윤을 짜내기 위해 하청업체를 압박한다. 학교와 교육청은 취업률을 높여 지원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기 위해 학생들을 일터로 내몰았다. 어제까지 같이 일하던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콜센터는 영업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죽음이 흰 천으로 덮인 빵 공장에서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기시감이 밀려온다. ‘소희’의 죽음을 수사하던 형사는 말한다.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이라는 사람이 없어.”
지난해 부산에서 발생한 산재 사망 사고는 30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추락과 깔림, 끼임 사고로 매달 2명 이상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중대재해처벌법에 의해서는 단 한 건이 기소되었다. 처벌과 기소만큼이나 노동환경의 구조적 개선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콜센터 현장에서, 빵 공장에서 벌어진 이 사고는 개인에게 일어난 개별적이고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다. 이미 과거에 반복되었지만 앞으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회적 사건이다. 다음은 없다.
2023-08-2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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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과연 인류세인가?
내년 8월 부산에서 국제지질학총회(IGS)가 열리며 여기에서 새로운 지질시대를 비준한다. 그러면 약 1만 1700년간 계속되어 온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로 공식화한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로 인류가 사는 지구 환경이 엄청나게 바뀌었음을 뜻한다. 인류세는 2000년 2월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 지구권-생물권 프로그램(IGBP) 회의에서 네덜란드의 대기 화학자인 파울 크뤼천이 처음 쓴 말이다. 그는 “우리는 이제 홀로세가 아닌 인류세에 살고 있다”라고 충격하였는데 인류를 뜻하는 ‘Anthropos’에 시대를 뜻하는 ‘cene’을 덧붙여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신조어가 탄생하였다. 지질시대의 명명 권한을 가진 국제층서학위원회(ICS)는 2009년 그 산하에 인류세 워킹그룹(AWG)을 만들어 인류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2019년 AWG가 인류세의 시작을 1950년대로 결정한 바 있다. 이 시기부터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어 인간 활동과 환경변화의 속도가 극적으로 증가한 소위 ‘거대한 가속’(great acceleration)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2014년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인류세는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 인간의 활동이 기후와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시대’로 정의되어 있다. AWG는 지난 7월에 캐나다 크로퍼드 호수를 인류세의 시작을 보여 주는 표준 지층으로 지정하였다. 이 호수에 인간이 지구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한 증거가 퇴적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인류세의 공식화 여부는 올해와 내년의 국제층서위원회가 실시하는 투표로 결정한다. 여기에서 60% 이상의 찬성으로 가결되면 내년 8월 부산에서 열리는 IGS가 이를 비준하는 동시에 인류는 새로운 지질시대에 살게 된다. 인류세에서 인간은 지구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킨 행위자인데 이와 같은 인간의 힘이 기후 위기를 초래하여 자연의 힘과 충돌하고 있는 형국이다. 인류세를 의미하는 핵심 척도는 곧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화이다.
과연 인류세인가? 작금의 기후 위기가 과장되었다고 말하거나 이 또한 과학기술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원인 또한 급속한 산업화에서 찾는가 하면 대규모 경운(耕耘) 농업과 토양의 사막화에서 찾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인간의 행위에서 비롯한 결과임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관이든 낙관이든 이제 인류는 지구 행성의 역사와 미래를 책임지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은 단지 이용하거나 인간의 배후에 신비로 존재하는 대상만은 아니다. 그 힘은 언제든지 인간이 만든 세계를 붕괴시킬 수 있다. 인류세는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이 수시로 충돌하며 마침내 그 극단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시대 개념을 내포한다. 이러한 점에서 인류세와 기후 위기에 관한 진지하고 지속적인 숙고가 간절하다.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변화의 여러 징후는 빈번하다. 지난해 8월 유럽에 500년 만의 최악의 가뭄이 와서 9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또한 겨울에 맞은 이상 고온은 알프스와 피레네의 고산지대의 눈을 녹여 스키장이 문을 닫는 상황을 불러왔다. 이와 더불어 산불이 평년에 비할 때 3배 이상 늘었다. 기후와 관련하여 ‘전례 없는’ 혹은 ‘극한’이라는 수식어는 전 세계를 망라하여 매우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올해 7월 들어 이탈리아에서 40도가 넘는 기록적 폭염을 맞으면서 이를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지기 ‘케르베로스’로 명명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한 희생이 매우 컸다. 미국에서도 40도가 넘는 폭염에 사람이 쓰러지거나 의식을 잃는 한편 이란의 공항은 67도를 찍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이상기온은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영구동토를 위협하고 있어 그 속에 매장된 메탄과 이산화탄소가 방출하거나 바이러스 등이 활성화할 공산이 크다. 남아메리카도 40도에 육박하여 겨울이 사라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끓는 지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되었다.
기후 위기는 폭염의 지속뿐만 아니라 폭우와 폭풍을 동반하는 양상으로 극단화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기후변화는 해류의 이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멕시코 만류가 멈추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끔찍한 예고가 있다. 남극의 빙하가 녹고 해수 온도 상승으로 해류의 순환이 붕괴한다면 그야말로 대재앙의 시대가 열릴 수밖에 없다. 세계의 격변은 20세기와 같이 인간의 역사에만 아니라 지구의 역사에도 심각하게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인류사뿐 아니라 ‘지구사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후 위기와 인류세에 처하여 새로운 공부와 행동이 요청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미래는 오지 않은 내일이 아니며 이미 우리에게 도착한 현실이다.
2023-08-2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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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정치개혁이라는 착각
오랜만에 ‘동물 국회’를 다시 본 건 4년 전이었다. 2019년 4월, 국회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선거제도 개편과 공수처 설치 등을 포함한 검찰 개혁 법안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두 사안은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논의에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의당 등 군소 야당들과 합의해 해당 법안들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했다. 패스트트랙에 지정된 안건은 상임위 심의 등의 절차를 거쳐 본회의에 자동 상정된다. 한국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이 법안 접수를 막기 위해 국회 의안과를 육탄 봉쇄하면서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주먹다짐이 오갔고 쇠 지렛대와 망치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동물 국회’의 등장은 2011년 가을 한미 FTA 비준안 정국 이후 8년여 만이었다. 당시 국회는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물리적 대치가 끊이지 않자 이를 근절하기 위해 국회선진화법을 도입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엄격한 국회선진화법이라 할지라도 선거제도 개편을 둘러싼 갈등을 막을 수는 없었다.
되돌아보면 그때 정치권은 선거제도 개혁에 뭐라도 씌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많은 이들이 선거법만 바꾸면 한국 정치에 일대 변혁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 미래는 장밋빛이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현행 소선거구제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갈등과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졌다. 2020년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이 제도의 도입에, 혹은 반대에 사활을 걸었다.
몸싸움을 불사하며 우여곡절 끝에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한국 정치를 바꾸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비례대표 의석 확대는 국민 반발에 대한 우려로 처음부터 손도 대지 못했다. 논의 과정에서 지역구 의석과의 연동률은 절반으로 줄었고, 그마저도 비례 의석 47석 중 30석에만 적용하자며 캡(cap·상한)을 씌웠다. 급기야 거대 양당이 위성 비례 정당을 출범시킴으로써 제도를 도입한 의미 자체가 무색해졌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들은 초선 의원이고 최고위원이고 할 것 없이 막말 등 온갖 구설에 오르내렸다. 지금도 21대 국회에는 ‘역대급 비호감 국회’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다.
정치권에서 개혁,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많은 노력은 대개 선거 방식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 국회의원을 어떻게 선출할 것인가, 당 대표를 누가 뽑을까 하는 것들이다. 올해 초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는 비례성과 대표성 강화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을 논했다. 그들은 선거구 크기, 비례대표 선출 방식 등에 따른 세 가지 개편안을 제시한 바 있다. 최근 활동을 마친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회도 다르지 않았다. 혁신위는 지난 10일 대의원제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혁신안을 제안한 뒤 활동을 종료했다.
국민의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느냐는 중요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소선거구제에서 비롯되는 사표 발생을 줄이고 국회 구성의 불비례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이게 개혁의 전부가 되면 곤란하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문제는 이것이 전부로 인식되며 여타 논의를 모두 잠식한다는 데 있다. 패스트트랙 정국만 보더라도 여야의 강 대 강 대치 속에 협치가 실종되면서 각종 민생법안이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렸다. 스쿨존 어린이 교통사고에 신경도 쓰지 않던 국회가 선거 직전 비판 여론에 직면해 졸속으로 ‘민식이법’을 처리했던 사건은 유명하다. 20대 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폐기된 법안은 무려 1만 5000여 건에 달한다.
누구를 위한 개혁이고 혁신인가? 이 물음 앞에 정치권의 개혁론은 공허하다. 소선거구제냐 중대선거구제냐, 대의원이냐 권리당원이냐 하는 논쟁들은 보통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논쟁이 벌어지다 보면 어느새 국민의 뜻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저마다의 유불리만 남는다. 그쯤 되면 선거제도나 전당대회 룰을 바꾸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이런 주객전도는 국민 눈에 밥그릇 싸움으로 비칠 뿐이다.
이참에 정치권이 한 발짝 떨어져 지금의 상황을 진단해 봤으면 좋겠다. 국민은 아무 관심 없는데 우리만 에코 체임버(반향실)에 갇혀 선거제도 개편만이 정치개혁이요 혁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러는 사이 진정 국민이 원하는 일들은 등한시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를. 어쩌면 평범한 국민은 국회의원, 당 대표를 어떻게 뽑는가 하는 문제보다 정치인들의 저질스러운 발언을 근절하고 지역민들 눈살 찌푸리게 하는 정치 현수막을 줄이는 게 더 정치 혁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랬지만, 결국 정답은 민의와 더욱 가까워지는 데에 있다.
2023-08-1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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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블록체인 코워킹·코리빙 플레이스를 부산에
필자는 블록체인 비즈니스를 한다.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에 본사가 있었다. 2년 전 대한민국 블록체인특구 부산으로 본사를 옮기다 보니 자연스레 서울에는 있지만 부산에는 없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아쉬운 것이 같은 관심사를 갖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업무와 주거 공간을 공유하는 코워킹(co-working), 코리빙(co-living) 블록체인 커뮤니티의 부재이다.
서울에는 '로컬스티치'라는 코워킹·코리빙 공간이 있다. 예술이나 문화계에 종사하는 크리에이터들이 주로 거주한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입주자들이 함께 살며 사무실을 공유하니 자연스레 협업을 하게 된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먹고 잠을 자다 보니,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찾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며 시너지를 낸다.
서울, 예비 기업가 커뮤니티 활성화
'논스’ 통해 46개 블록체인 회사 창업
24시간 먹고 자면서 공부하고 토론
대학·스터디 모임으로는 대체 불가
열정적 동료들과 작업해 시너지 효과
교육·기업·일자리 창출 공간 필요
서울에는 '논스'라는 코워킹·코리빙 블록체인 커뮤니티가 있다. 블록체인 철학과 기술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먹고 자고, 라운지에 모여서 블록체인에 대해 24시간 끊임없이 공부하고 토론한다. 블록체인을 공통분모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업무 공간, 주거 공간, 지식을 공유한다. '논스'에는 주거와 업무 공간 이외에 함께 토론하고 네트워킹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라운지 공간이 있다. 논스 입주민들은 라운지에 모여서 연사를 초빙하여 교육을 듣고, 네트워킹을 한다. 자연스레 비즈니스 기회가 싹이 튼다. 이를 통해 DSRV, 해치랩스 등 46개 블록체인 기업이 탄생했고, 300개의 일자리가 나왔다.
코워킹·코리빙 블록체인 커뮤니티가 꼭 필요한 이유는 무궁무진하다. 첫째, 아직은 블록체인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고, 지역 대학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블록체인 분야를 일생의 '업'으로 삼고자 하는 기업인을 양성하기 위해서다.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교실 수업이나, 가끔씩 만나서 공부하는 블록체인 스터디 모임을 통해서는 블록체인 기업가를 양성하기 어렵다.
새로운 지식을 공부할 때는 하루에 한 시간씩 1년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하루에 10시간씩 한 달을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블록체인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은 학교에서 강의를 통해서 배우면 늦다. 교실에서 배우는 지식은 기초 지식이거나 이미 지나간 과거의 트렌드다. 비즈니스가 될 수 있는 정말 새롭고 따끈따끈한 기술은 가르쳐 줄 선생님을 찾기 쉽지 않다. 이런 기술은 산업을 모니터링하면서 찾고, 스스로 공부하다가 모르는 부분을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토론하며 답을 찾아가면서 배울 수 있다. 이런 '찐' 공부의 필요 조건은 블록체인에 대한 본인의 열정과 함께 길을 걸어갈 동료이다. 이런 동료들과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며, 공부하고, 미래의 사업을 함께 구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시너지 효과가 나겠는가.
부산에는 이런 열정을 가진 블록체인 기업인들을 품을 수 있는 코워킹·코리빙 공간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이들은 서울로 간다. 물론 부산에도 블록체인을 공부할 수 있는 지역 대학이나 부산시에서 준비한 입주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만난 부산지역 예비 블록체인 기업인들의 대부분은 지역 대학에 속하지도 않고, 아직 블록체인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산에는 블록체인에 대한 공부 열정 하나만 가지고, 블록체인을 미래의 업으로 삼고자 하는 '찐(legit)' 블록체인 예비 기업가들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품을 수 있는 방식은 함께 먹고 자면서 공부하고 창업을 준비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산에 블록체인 코워킹, 코리빙 공간을 설립할 수 있을까? ‘로컬스티치’는 서울 도심의 낡은 호텔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다. 170여 개의 객실이 5개월 만에 가득 찰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기획, 홍보, 디자인은 운영업체가 부담하고, 리모델링 비용은 건물주가 부담하면 큰 자본 없이도 코리빙·코워킹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다. 코리빙·코워킹 공간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운영업체와 건물주가 나눈다.
이렇게 도심의 오래된 건물을 활용해서 코리빙·코워킹 공간을 설립한다면 큰 자본 없이도 건물주 입장에서는 낡아서 수익률이 저조한 건물을 새롭게 꾸며서 건물의 가치를 높일 뿐만 아니라 수익도 낼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부산시 입장에서도 오래된 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블록체인 특구 산업을 키울 수 있는 좋은 정책이 될 수 있다. 부산의 건물주님들이여! 건물의 가치도 올리면서 수익을 보고, 부산 블록체인 특구 산업에도 기여할 수 있는 코워킹(co-working), 코리빙(co-living) 공간 설립을 검토해 보지 않겠는가.
2023-08-1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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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모든 학문은 가설이다
지구의 물이 위태롭다. 최근 전라도에 평균 강우량의 3배에 가까운 장맛비가 내렸고, 중국 북부에는 사흘 만에 1m 가까운 비가 내렸다. 북극의 빙하가 녹고, 남극에선 비가 내린다고 한다. 온난화를 넘어 열대화가 진전되면서 유동적인 상태의 물이 많아졌고, 이상 기후나 국지적인 폭우로 이어지는 듯하다. 하긴 지구 자체가 물의 행성이다. 지표면의 71%가 바다이고, 인체는 절반 이상이 물이다. 물은 삶의 원천이자, 지구의 특별한 조건이다.
그런데 지구의 물은 어디에서 왔을까. 지구의 형성 과정에 수천 도에 이르는 고온 상태를 거쳤기 때문에 물은 외부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계가 주목한 게 물이 있는 혜성이고, 혜성의 물이 지구 물의 근원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유럽우주기구(ESA)는 1994년 로제타호라는 혜성 탐사위성을 발사했다. 10년 동안 64억㎞를 날아간 위성은 ‘64P 츄류모프-게라시멘코 혜성’에 착륙선을 내려보냈다. 그 결과, 혜성의 물은 지구의 물보다 중수소 비율이 4배가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혜성의 물은 지구의 물과 달랐다. 과학계는 다시 소행성을 주목하면서 새 가설을 세우는 중이다.
가설 설정과 검증은 학문의 출발
사회과학·인문학도 예외는 없어
역사적 사실의 설명도 마찬가지
구체적·객관적인 증거 꼭 갖춰야
한일 고대사 비판, 특히 근거 필요
프레임에 기반한 일방 주장 안 돼
그렇다면 물은 몇 도에서 끓을까. 대부분의 독자는 100도라고 답할 것이지만, 이 질문은 과학적이지 않다. 제대로 된 질문이라면, 순수한 물은 1기압 상태에서 몇 도에서 끓느냐고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물이 끓는 현상은 물속의 기체가 빠져나오는 과정일 뿐, 물 자체가 끓는 게 아니다. 순수한 물은 105도 이상의 초가열 상태를 유지하면서 한 번씩 튀어 오를 뿐이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고 여기는 것은 일상적인 상태의 물을 이용하는 데 불편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이처럼 물이라는 분명한 실체가 있는 자연과학조차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행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자연과학이 이럴진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각 학문에서 세운 여러 가설이 일정 기간 사실처럼 통용되다가도, 나중에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곤 한다. 가설을 넘어서 방편도 통용된다.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방편이다. 삼국사기는 온조가 소서노와 우태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실었고, 지은이인 김부식조차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겨 두는 것을 ‘존의(存疑)’라고 한다. 전통 역사학의 중요한 미덕이다.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한다. 고구려의 정식 국호는 고려다. 그러나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고구려라고 할 뿐이다. 김해(金海)는 김해라고 하면서, 금관(金官)은 금관이라고 한다. 이 또한 방편이다. 다만, 많은 사람이 그것이 방편인 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유튜브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일부 인사들이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은 하나뿐이라고 강변한다. 물론 실체적 진실은 하나일지 모르지만, 무한히 많은 사실에 대한 사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진실을 알아내기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사실은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김해의 수로왕이 기원 42년에 즉위했고, 임나는 반드시 일본열도에 있었고, 마한은 9년에 반드시 멸망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류이고, 식민사학의 논리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수로왕과 탈해가 도술 경쟁을 벌였고, 패배한 탈해가 계림(신라) 쪽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그런데 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은 기원 8년이다. 그러면 수로왕은 태어나기도 전에 탈해와 도술 경쟁을 펼친 셈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종합하면, 수로왕의 즉위는 42년 이전이어야만 한다. 42년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61년에 마한 장수 맹소가 보이고,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는 3세기 후반까지 마한이 보인다.
이처럼 해괴한 주장으로 조회수를 올려 돈을 벌고 있는 유튜버들은 머지않아 내부 분열로 자멸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은 서로 다른 데다, 자기주장이 가설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갈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나가 일본열도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대마도, 규슈 북부, 오카야마, 와카야마, 도쿄 등 주장들로 나뉜다. 유튜버끼리 서로 자기주장이 진실이라고 버티면, 보는 사람들도 편이 갈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지, 구체적인 증거는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한편 기존 가설을 비판하려면 근거가 있는 대안도 있어야 한다. 식민사학이라는 프레임을 씌울 게 아니라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대중은 현혹되기 쉽다. 미망을 버리고 참된 배움에 입문해야 유튜버의 돈벌이 놀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23-08-09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