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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철의 어바웃 시티] 2030부산엑스포와 도시의 미래상
부산 시내 곳곳에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의 부산 유치를 지지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다음 달 부산 실사를 앞두고 지역에는 긴장감도 느껴진다. 부산을 위한 좋은 국제행사라는 생각을 넘어 박람회 유치는 지역을 근본적으로 혁신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부산시민, 특히 우리나라 국민에게 부산엑스포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박람회가 부산에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우리는 박람회 유치를 위해 무엇을 도시 미래상으로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실제 주변의 시민들은 물론 필자가 접한 전문가들조차 박람회 유치와 도시 발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엑스포 유치의 진정한 의미 알아야
부산만의 새로운 어젠다 도출 중요
시민과 함께 미래 사회상 공유 핵심
부산엑스포에 대한 관심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당시 부산시는 강서구 ‘맥도’를 개최 예정지로 내세우고 중앙정부에 유치계획서를 제출했다. 맥도 일대는 김해국제공항과 인접하고, 인근 에코델타시티 등의 대규모 개발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외곽 확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과 주변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노린 건설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아니냐는 시민사회의 비판도 함께 제기됐다.
2018년 국가사업화가 결정되었지만, 이듬해 강서구가 아닌 북항 재개발이 이루어지던 현재 동구 지역으로 박람회 유치 계획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변경은 오히려 박람회 유치의 정당성을 강화했다. 부산의 숙원인 쇠퇴해 가는 도심 재구조화와 부활을 함께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1800년대 중반 산업혁명 시기 선진국은 세계박람회 개최를 경쟁하듯 유치하며 자국의 도시 문명을 과시했다. 보통 세계 첫 박람회로 인정하는 1851년 런던박람회에서는 규격화된 주철 구조물과 유리만으로 만들어진 대형 건물인 ‘수정궁’ 등의 선진과학 건축물이 선보였다. 이에 뒤질세라 1889년 파리박람회에선 지금도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이 건설됐다.
1893년 시카고박람회는 도시계획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당시 산업화가 한창이던 시카고에서는 열악해진 도시 환경을 개선하려는 열망이 매우 높았다. 이에 박람회 동안 건물 대부분을 유럽풍으로 건설하고 페인트도 하얗게 칠했다. 일명 백색 도시(White City)라고 불렸다. 극단적이긴 했지만 이런 도시 환경 개선에 대한 열망은 미국 도시계획사에서 유명한 ‘도시 미화 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의 시발점이 됐다. 토지이용 계획 등 물리적 도시계획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고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시카고는 물론 다른 미국 대도시들의 현재 번영이 100년 전 시카고박람회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여기서 나온다.
이후 100여 년간 세계박람회 개최를 통해 캐나다 몬트리올(1964), 일본 오사카 (1970) 등 많은 곳이 도시부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도시 부흥은 각국의 균형발전 성과로도 이어졌다.
금세기 들어 세계박람회는 미래 사회를 선도할 새로운 도시 미래상을 선보이고 있다. 2010년 중국 상하이박람회에서는 녹색도시(Green City)라는 주제가 제시됐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세계박람회에선 도시 미래상의 제시가 주된 주제였다.
그렇다면 부산엑스포가 제시하는 도시 미래상은 무엇인가. 2030부산세계박람회의 주제는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항해’다. 포괄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면이 분명히 있지만 도시의 구체적인 미래상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1893년 시카고의 백색도시에서 2010년 상하이 녹색도시로 이어진 100여 년간의 도시 미래상 변화가 부산에서는 어떻게 제시될지 아직 불분명해 보인다.
부산의 강력한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제시하는 도시 비전인 ‘네옴시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개최지인 리야드와는 직접 관련은 없어 보이지만, 1400조 원 규모의 도시개발 프로젝트는 그들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혁신할 구체적인 도시의 미래상을 선보였다. 이 프로젝트는 척박한 사막 환경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고자 길이 170㎞, 높이 500m의 친환경 수직 도시를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인류의 미래 도시 프로젝트가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부산엑스포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 다만, 그 전제 조건이 있다. 부산의 혁신적인 도시 미래상은 부산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사우디에 비해 우리의 강점은 역시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몇몇 지도자나 소수 엘리트만이 정하는 도시 미래상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공유하는 미래상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현재 우리가 가진 강력한 장점이다. 함께 힘을 모으고 부산과 대한민국,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준비할 시기다.
2023-03-2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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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의 핵인싸] 방사선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방사선’이라는 말에 지레 겁부터 먹지만, 사실 우주는 방사선으로 가득하다. 지구의 대기 환경이 상당량의 우주 방사선을 막아 주고 있는 덕분에 우리 생태계가 존재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상당량의 방사성 동위원소들이 상존하고 있다. 방사선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방사선을 막연히 두려워하거나 정치적 흥정으로 삼기 이전에, 우선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방사선은 높은 에너지를 갖는 소립자들의 흐름이다. 첫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뢴트겐이 진공관 실험 중 우연히 발견한 ‘미지’의 방사선, 엑스(X)선도 상당한 에너지의 광자(빛알갱이)의 흐름이다. 전기를 띤 입자(전자)가 빛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은 현대 물리학의 시발점이 됐을 뿐만 아니라, 생체조직에 대한 엑스선의 투과력은 의료계에 대혁명을 가져왔다. 엑스선이 뼈를 완전히 투과하지 못한 것은 행운에 가까운 일이다. 방사선마다 그 에너지와 물질과의 상호작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사성 물질이 붕괴할 때 방출되는 방사선인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도 각각 ‘+2가’의 전하를 띤 무거운 헬륨 원자핵, ‘-1가’의 가벼운 전자, 엑스선보다도 높은 에너지 광자의 흐름이다.
방사선은 피하는 것만이 능사 아냐
과학적 이해 기반해 활용 모색해야
연구 인프라 갖춘 부산 가능성 커
알파선은 상호작용이 가장 활발해서 공기 중에서도 수cm만 진행할 수 있으며 휴지 한 장으로도 간단히 막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 전 라돈 침대는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는데, 이는 흡입할 경우 치명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베타선은 ‘-1가’의 전하를 띤 가벼운 전자의 흐름으로 물질과의 상호작용이 알파선보다 훨씬 적어서 어느 정도의 투과가 가능하지만 플라스틱이나 유리, 가벼운 금속으로도 차폐가 가능한 반면, 질량이 없고 전하도 띠지 않는 감마선은 투과력이 상당하여 사실상 차폐가 어렵다. 또한 중성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어서 물질들과 전기적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거의 모든 물질을 유유히 뚫고 들어가 직접적인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서 원자력 발전이나 핵폭탄에서 인공 핵분열을 유도하는 데 활용된다.
이와 같이 방사선은 입자의 종류와 피폭되는 대상과 방식에 따라 인체 조직을 교란시키는 파괴력에 차이가 있어서 적절히 통제될 필요가 있다. 유럽행 비행기를 타고 대기의 상층부를 지나는 것과 흉부 엑스선 촬영은 비슷한 정도의 방사선 피폭 효과가 있다. 그래서 비행기 조종사나 승무원 등 항공업계 종사자들에게는 항공 시간의 제한이 있다. 단층촬영(CT)과 같이 다량의 엑스선에 노출되는 일도 의료적으로 그 주기가 통제되어 있음은 물론, 방사선 관련 종사자들도 연간 최대 피폭량이 엄격히 정해져 있다.
하지만 엑스선이 적당한 투과력으로 의료계에 혁명을 일으켰던 것처럼, 방사선이 갖는 특수한 투과력과 상호작용이 항상 나쁘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엑스선보다 에너지 조절이 훨씬 용이한 중성자를 이용하면 복잡한 기계 내부나 유체의 흐름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정밀한 비파괴 검사가 가능하다. 심지어 양전자방출진단(Positron Emission Tomography, PET)과 같이 특정 화합물에 반감기가 짧은 방사성 동위원소 표지를 붙여 인체에 직접 주입하면 특정 부위에서 감마선이 발생하는데, 이를 스캔하면 특정 생체활동이나 병변을 진단할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방사선 암치료는 실용화된 지 오래다.
새삼스럽게 방사선에 대한 이해와 그 활용을 얘기하는 것은 첫째, 방사선은 반대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정체와 효과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무지로부터 벗어나 하나씩 이해하고 잘 활용하는 일이야말로 인류를 역사적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는데, 방사선의 경우 원전과 연관된 정치적 이슈로만 다루어졌을 뿐 과학적 실체에 대한 이해는 두려움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운 실정이다. 무척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방류도 규탄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문제에 대한 냉정한 이해와 연구를 통한 합당한 대처가 필요하다.
둘째, 마침 방사선 검출 기술의 연구개발 및 의료·산업적 응용은 아직도 세계적인 블루오션 분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인공지능과 반도체 나노기술이 널리 각광받고 있지만, 세계 최대 밀집 원전단지의 지근거리에 있는 대도시로서 방사선 과학·기술과의 접목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 심지어 기장에는 동남권원자력의학원과 방사선동위원소 생산시설 등 방사선 연구개발의 인프라가 이미 구축된 상태다. 원전에 대한 정치적 흥정과 거래가 아니라, 일반인들의 방사선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실용적 수요에 따른 특화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한다.
2023-03-2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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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미안합니다
대학에서 퇴임이 가까워졌을 때 먼저 정년을 맞았던 선배들이 농담 삼아 가장 먼저 해 준 조언은 ‘어르신 교통카드’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많이 다녀 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일을 많이 했으니 좀 내려놓으라는 충고쯤으로 받아들였는데, 무료로 전철을 이용하는 혜택을 직접 누리게 되면서 그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전에 비해 얽매이는 일이 적어진 탓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일이 많아졌고, 또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가벼움에서 더 자주 전철을 이용하게 되다 보니 나름의 재미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이용하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교통카드를 넣을 때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맞아 주는 지하철의 뜻하지 않은 환대에 곧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승객들에게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아마 나 혼자였으면 크게 당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시간대에는 앞에서도 그리고 옆에서도 계속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들려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눈을 감아도 옆에 카드를 넣는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를.
공교롭게도 많은 생각이 교차하던 시기에 도시철도 무임승차 국비 지원을 둘러싼 논란이 제기되었다. 대구시는 무임승차 연령을 만 65세에서 70세로 상향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하였고, 서울시는 정부가 국고로 손실분을 보전해 주지 않는다면 요금 인상이나 연령 상향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부산시도 무임승차 손실분에 대해 국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했다.
오랫동안 굳어져 온 정책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존속 의미는 없을 수 없기에 정책의 변화에는 폭넓은 검토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노인들의 무임승차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사회적 편익보다 정말 큰 것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저울질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논쟁이 일어나던 시점에 부산에서는 올 들어 1월에만 서울·경기·인천의 수도권 3개 시도로 799명의 20·30대 젊은 층의 순유출이 있었다. 작년 1월보다도 더 늘어난 규모이고, 순유출 규모 자체는 서울이 컸지만, 증가세는 인천과 경기도가 훨씬 가팔랐다는 해설이 있었다. 앞으로는 경기와 인천으로 유출되는 청년들이 더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는 시사이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근년의 설문조사 결과가 갑자기 생각났다. 매 학기 수업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는데, 표본의 크기나 대상이 일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응답 결과는 놀라운 일관성을 보여 주었다. 오랫동안 동일한 설문내용으로 조사를 하기 때문에 이것은 학생들의 인식 변화를 볼 수 있는 주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시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몇 년 전에 새롭게 넣었던 ‘졸업 후 어디에 취업하고 싶은가’ 하는 설문에 대한 응답 결과가 떠올랐다. 짧은 기간이기에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약간의 변화는 감지되었다. 물론 항상 부산에 남고 싶다는 응답이 가장 높지만 미세하게 수도권으로 가고 싶다는 응답 비율이 높아지고 있었다. 결국 부산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나타나는 응답이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닌 학생들이 부산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다른 여러 조사에서도 많이 나왔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지 못하고 기다리던 학생들의 인내심이 조금씩 고갈되어 가면서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부산을 떠날 결심’을 하는 것을 설문조사를 통해 확인하는 마음은 무거웠다.
오늘날의 부산을 만든 나이 든 세대도 물론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모두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면서 살 수 있는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그 실패는 젊은이뿐만 아니라 결국 다시 우리 노인들에게도 돌아온다. 젊은이들이 떠나면 나이 든 세대도 결국 부산을 떠나게 된다.
지난 몇 년간 가까이 지내던 친구 둘이 자녀들을 따라 경기도로 이사를 갔다. 올 상반기에는 또 두 명의 친구가 손주들을 보아 주기 위해 몇 달간 부산을 떠나 경기도에서 지내다 오겠다고 얼마 전 연락이 왔다. 행정적인 관점으로 보면 주민등록은 부산에 있지만 잠시나마 경기도의 생활인구로 편입되는 셈이다. 일자리가 있는 부산을 만들지 못한 자괴감 때문인지, 요즘에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듣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에 대해 마음속으로 ‘미안합니다’라고 응답한다.
2023-03-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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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영의 법의 창] 지방의회 의원의 투잡 현실 바로보기
지난달 ‘헌정사 첫 현역 기초 의회 의원의 군 복무’가 입법 미비 논란으로 이어져 보도된 바 있었다. 해당 의원 본인이 겸직 허가를 받았다고 답변한 것에 대해서, 병무청이 직접 보도 자료를 통해 그런 사실이 없었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사실 기초 의회 의원뿐만 아니라 지방의회 의원의 겸직과 관련한 문제를 지적하는 보도는 한두 번의 문제도 한두 해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주민들에게 ‘투잡 뛰는 기초 의회 의원’의 현실은 더 이상 낯선 상황이 아니다. 무엇이 주민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방자치의 제도적 의미를 직접 실행해야 할 기초 의회 의원들의 이런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2003년 지방자치법 개정 전까지 지방의회 의원직은 명예직이었다. 이는 지방자치 사무가 주민이 주된 직업을 가지면서 수행하는 시민적 자치행정이라는 이해를 전제로, 지방의회 의원의 봉사와 명예·업무의 비전문성 등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지방자치의 제도적 선진국으로서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유럽의 여러 나라들(영국·프랑스·독일)도 지방의회 의원직을 명예직으로 운영하고 있다.
성실·공정성 위해 지방의원 유급화
과도한 겸직 관행 이해 충돌 우려
겸직 허용 범위 근본적 개선 필요
그러나 오늘날 행정의 전문성, 의원의 품위 유지와 직무에의 전념성 확보, 의원으로서의 근무시간이 많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 2003년 개정 지방자치법은 ‘지방의회 의원의 직을 명예직으로 한다’는 조항을 삭제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방의회 의원들에게 월정 수당이 지급되게 되었고, 지방의회 의원의 직이 유급직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의회 의원의 직을 직업이 아닌 봉사직으로 두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런데 기초 의회가 개의되면 논의되는 반복적 논쟁 거리가 의원들에게 지급되는 월정 수당의 적정성을 이유로 한 수당 인상 문제였다. 그리고 인상 반대의 주된 논거로 제시되곤 하는 게, 유동적 근무시간이라는 점과 겸직이 허용된다는 점이었다. 현행 지방자치법상으로 지방의회 의원의 겸직은 금지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한 허용된다. 법은 지방의회 의원에 대해 겸직금지의 경우를 규정하되 그 외의 겸직에 대해서는 신고 의무를 두고 있다.
이러한 금지 대상이 아닌 직의 겸직 허용 구조 하에서 계속되었던 문제점이 지방의회 의원의 겸직으로 인한 이해 충돌 문제였다. 그래서 2021년 개정 지방자치법은 지방의회 의원의 겸직은 허용하되, 겸직 신고 내용을 연 1회 이상 공개하고, 지방의회 의장은 지방의회 의원의 겸직 행위가 지방의회 의원의 의무를 위반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그 겸한 직의 사임을 권고하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지방의회 의원의 겸직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지방의원 2명 중 1명 겸직, 4명 중 1명 유급 겸직’이라는 조사 결과를 보면서, 지방의회 의원의 겸직이 과도한 것은 아닌가, 개정 지방자치법이 의도한 겸직 내용 공개를 통한 이해 충돌 방지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의 우려가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직무 수행의 전념성 확보와 직무 집행의 공정성 확보가 우리 지방자치의 핵심적 근간임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지방의회 의원들의 성실의무와 영리 행위 금지 의무의 배경이다.
부산 전체 기초 의원 중 절반가량(49.1%)이 적어도 ‘투잡’을 뛰고 있고, 생계 등을 위해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논란이 적잖고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이젠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법제 개정을 시작해야 한다.
지방의회 의원직을 유급직으로 유지한다면 장기적으로 지방의회 의원들의 의정 활동비 등 보수액을 주기적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으로 조정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회 의원직을 유급직으로 한 것이 의원들의 직무 전념, 이권 개입 방지, 품위 유지 등을 고려했던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생계유지’가 이유가 되는 투잡인을 만들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국회의원의 영리 업무 및 겸직금지를 둘러싼 2013년도의 논쟁의 결과처럼, 이해 충돌이 발생하는 직종을 특정하기 어렵고 포괄적 이해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회의원의 경우와 같이 의원의 겸직 및 영리 업무 금지 도입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
당장 전면적인 겸직금지가 어렵다면, 겸직금지 범위 개선을 고민해 봐야 한다. 겸직금지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 유능한 인사의 의회 진출이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고, 너무 좁게 설정하면 의회 활동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 따라서 겸직금지 범위 설정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겸직 허용 구조는 현실적으로건 제도적으로건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개선이 진행되어야만 한다.
2023-03-0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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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민의 기후 인사이트] 심각한 해수면 상승, 부산의 운명은?
세계가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에 시달리고 있지만 영하 60도 혹한의 땅 남극만큼은 끄떡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극에서조차 마침내 심각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 국립 설빙데이터센터는 남극 바다의 얼음 면적이 올해 2월 13일 기준 191만k㎡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192만k㎡보다 작은 수치로, 2년 연속 최소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문제는 남극 바다 얼음의 급격한 감소로 그동안 수천 만 년 동안 남극 대륙 위에 고스란히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대륙 빙하가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남극 대륙을 빙 둘러싸고 있던 바다 얼음이 사라지게 되면, 대륙의 빙하는 따뜻한 바닷물과 파도에 직접 노출돼 외곽부터 빠르게 녹아내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균 두께 3000m가 넘는 대륙 빙하는 그 육중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으깨지며 남극 바다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남극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거대 빙하의 파편들은 따뜻한 바닷물에 녹으며 해수면을 상승시키게 되고, 그 결과 지금까지 경험해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해수면 상승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게 기후 과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남극 바다 얼음 면적 역대 최소
전례 없는 해수면 상승 가능성
부산 해안가 위험 대책 세워야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해 보자. 과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남극 대륙의 빙하가 전부 녹아내려 바닷속으로 흘러들어 갈 경우 해수면이 무려 56m나 상승한다고 한다. UN은 해수면이 1m만 높아져도 지구촌에서 10억 명 이상의 이재민이 생긴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56m라니, 정말 가공할 만한 수치이다. 이렇게 되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경우 강원도 태백시 정도만 살아남을 뿐 나머지 국토는 대부분 물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남극 빙하가 전부 녹아내리는 건 극단적 가정일 뿐 기후 과학자들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예측한 미래 시나리오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최근 발간된 권위 있는 기후분야 보고서인 IPCC 6차 보고서에서는 현재 수준 정도에서 탄소 배출량 증가가 멈춘다면 금세기 말에 이르러 해수면이 1.1m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탄소 배출을 더 늘려 가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다면 금세기 말까지 해수면이 2m 정도 상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 역시 인류 문명에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수면은 얼마나 상승했을까. IPCC 6차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지구 평균 해수면 높이는 약 20cm 정도 상승했다고 한다. 비록 20cm이지만 이로 인해 국토의 상당 부분이 이미 물에 잠긴 나라들이 많다. 인도양 천혜의 휴양지 몰디브는 국토 면적의 80%가 해발 1m 이하다. 만약 해수면이 지금처럼 상승한다면 수십 년 안에 지도에서 거의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 역시 비슷한 운명으로, 2000년에 이미 공항이 있던 섬 하나가 물에 잠겨 버렸다. 적도 지역 섬나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름다운 물의 도시 베네치아나 해발고도가 낮은 네덜란드도 위기에 처해 있긴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상황이 어떨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해수면 상승에 매우 취약한 국가이다. 이는 세계기상기구가 발표한 태평양 해수면 동향 보고서에서도 확인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해수면 상승률이 지구 평균보다 약 1.5배 빠르다. 이 추세가 유지된다면 2030년께 한반도 국토의 5% 이상이 물에 잠길 가능성이 있다. 국가적 대비가 시급한 이유다.
해수면의 점진적인 상승이 태풍 같은 기상재해와 결합되면 또 다른 심각한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 가뜩이나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한 상황에서 해안가에 강력한 폭풍 해일이 들이닥치는 경우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2016년 부산 해운대 해변가에 태풍 차바로 인해 거대한 해일이 고층 아파트를 덮치는 일이 발생했다. 필자는 이 사례가 자연이 우리에게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미리 귀띔해 주는 경고라고 생각한다. 특히 부산의 경우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들 중에서도 특히 지대가 낮은 지역이 많다. 해운대를 비롯하여 낙동강 하구 지역에 위치한 명지국제신도시, 가덕신공항 등은 이대로라면 머지않은 미래에 상습 침수 지역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후변화가 초래할 미래는 아직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해수면 상승만큼은 예외다. 반드시 닥칠 확실한 위험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심각한 피해가 선명하게 예상되는 오늘 바로 준비하지 않으면 해수면 상승은 수년 내 해양도시 부산의 미래를 위협하는 새로운 요인으로 급부상하게 될 것이다.
2023-02-2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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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희의 위드 디자인] 챗GPT, 새로운 도구의 등장
지난 11월 오픈 AI가 챗GPT를 공개한 후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5일 만에 100만 명, 두 달 만에 1억 명이 가입했다고 한다. 구글이 검색엔진이라면 챗GPT(Generated Pre-trained Transformer)는 생성적 사전 학습을 기반으로 한 채팅 서비스다. 에세이도 써 주고, 프로그램 코딩 숙제도 하고, 책이나 논문 요약도 가능하다. 똑똑한 비서와 대화하는 것 같다. 애매하게 질문해도 일단 답이 나온다. 말투와 문법이 너무 완벽해서 일단 그럴듯해 보이지만 엉뚱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허당끼도 있다.
나도 궁금하던 차에, 칼럼을 한번 챗GPT로 써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챗GPT와 디자인과의 관계에 대한 에세이 개요를 쓰세요”했더니 5초 만에 개요가 나온다. 물론 영어가 빠르고, 유료로 이용하면 내용은 더욱 정교해진다. 힘이 쭉 풀렸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는가? 개요 잡는 데도 일주일 이상 걸리기에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이라고는 없는 챗GPT의 일단 던지고 보는 글쓰기 실력에 주눅이 들어 버렸다.
꽤나 충격적이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보니, 2010년 아이폰을 처음 사용해 보고 느낀 충격과도 비슷하다. 2009년 삼성에서 아이폰에 대응해 내놓은 첫 스마트폰인 옴니아는 스마트폰이라고 하기엔 총체적 난국이었다. 전혀 스마트하지도 않고 복잡했다. 그런데 2010년 아이폰으로 바꾸고 나의 첫 반응은 삼성은 곧 망하겠다 싶었다. 새롭고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 터치감과 처리 속도, 너무 편하고 쉬웠다. 인터넷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런 애플의 놀라운 사용성의 혁신으로 인해 스마트폰은 우리의 삶을 바꿔 놓았다. 새로운 서비스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 같은 챗GPT의 첫인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스마트폰 이후 최대 인터페이스의 변화가 예상된다. 인터넷의 발전 이후, 검색엔진,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생활의 전반에 녹아들어 있다. 우리에게 이미 다가온 기술인 AI를 챗GPT는 사람들이 사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서비스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후 특히나 메타버스를 포함한 모든 디지털 환경에서 사람과 상호 소통하는 방식, 즉 UI(사용자 환경)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전의 인공지능 서비스가 생활 가까이에서 느껴지지 않았다면, 챗GPT 이후에는 쉬운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둘째, 질문의 중요성, 글쓰기의 중요성이다.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채팅의 결과가 달라진다. 그림 그려 주는 AI 도구인 ‘미드저니’로 그린 그림이 미국 미술 공모전에서 디지털아트 부문 1등을 했다. 작가는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계속 지시하는 말을 바꿔 가면서 그렸는데 총 40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결국은 어휘력과 문장력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자료를 찾아 주고, 그림을 그려 주지만 AI는 사람의 지시를 받는다.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질문은 인간이 한다. 인간 중심 디자인인 디자인 씽킹에서도 제대로 된 질문은 필수적이다. 스티브 잡스가 고객조사를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걸로 유명하지만, 기존의 마케팅 조사에서는 질문의 방식이 잘못되었기에 제대로 인사이트를 뽑아내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를 위해서, 인간의 무의식까지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질문의 힘이다. 여전히 제대로 된 질문을 요하는 사용자 인터뷰 기술은 필수적이고 AI와 공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셋째, 자료 수집 시간이 줄어들어 업무 생산성이 올라갈 것이다. 최근 2030 직장인들이 챗GPT 공부에 진심이다. 관련 유튜브 조회수도 폭발적이고, 온라인 강의 플랫폼에도 챗GPT 강의의 인기가 높다. 디지털전환의 시대다. 어느 분야든 자신의 업무에 신기술을 적용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제대로 AI를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많은 일들에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AI가 창의적인 일까지는 못할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상당한 수준으로 창의적인 지능까지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창의성의 요소 중 하나인, 패턴을 찾아내는 일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특히 분석력은 아주 뛰어나다. 그럼에도 아직 한계는 있다. 새로운 혁신의 방법론으로 디자인 씽킹은 “분석적 사고에 기반한 분석적 숙련과 직관적 독창성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분석적 사고와 직관적 사고가 50 대 50으로 조화를 이룰 때 디자인 씽킹이 일어난다. 분석된 데이터와 정보와 지식 위에 지혜가 쌓이는 순간, 직관적인 뇌의 활동이 일어난다. 우리 인간은 더욱 직관력과 상상력의 능력을 연마할 떄이다.
도구가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새로운 도구가 다가오고 있다. AI가 발전할수록 창의성과 직관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 도구가 인간의 창의성과 직관력을 키우는 데까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지켜보자.
2023-02-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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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철의 어바웃 시티] 불황과 도시
고물가에 놀란 직장인들의 소비가 급격히 줄고 있다. 심지어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대학원생들도 배나 오른 가스 가격에 놀라 소비를 줄이려 도시락을 챙겨 온다고 한다. 부산 도심인 광복동 거리의 1층 점포에 나붙은 ‘임대’ 표시가 최근의 불황을 잘 대변한다. 부산을 비롯한 전국 아파트 가격의 하락은 물론 경제성장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산업용 전력 소비량은 두 달째 감소세다. 바야흐로 ‘불황의 시대’다.
도시 위기, 경기 불황과 함께 도래
실업·빈민 증가로 도심 활력 쇠퇴
기업 유치·도시 재생의 혁신 중요
불황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유효수요 부족 등으로 생산과 소비가 쇠퇴 또는 침체하는 상태를 말한다. 불황은 기업의 쇠퇴·도산으로 이어져 실업과 소비 위축을 유발한다. 이는 경기침체로 이어져 경제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로 이어진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초유의 경제 비상사태인 대공황이 대표적이다. 당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규모 토목 공사 등 ‘뉴딜 정책’으로 불렸던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이후 자본주의 경제에서 케인스식 정부 개입은 세계적인 불황에 대처하는 국가 역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출현한 불황은 달랐다. 오일 쇼크 등 에너지 가격 급상승으로 인한 경기침체는 단순한 케인스식 유효수요 창출로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경기침체 상황에서도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상태에 빠진 것이다.
당시 가장 고통을 겪은 계층은 도시 서민이었다. 도시에선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노숙인 등 도시 빈민이 증가했다. 또 자치분권으로 나아가던 도시 단위에서는 재정 위기가 초래됐다. 도심 인구 축소, 기업 도산, 외곽 확산에 대한 과도한 인프라 투자와 관리비용 증가는 도시정부의 재정 위기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도시정부는 불황으로 인한 서민의 고통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복지·사회서비스 예산을 대폭 줄여야 함은 물론 파산하는 지자체도 생겼다.
이처럼 도시의 위기는 불황의 역사와 항상 함께한다. 중세 이전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도시 빈민은 근대 도시화 이후 불황의 시기와 함께 많이 늘어났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도시 내에는 수많은 실업자와 노숙인을 수용하는 판자촌인 후버빌(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이름을 딴 것)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 형성된 뉴욕의 할렘가, 브롱크스 지역의 불황은 도시 빈민 지역을 더 확장했다.
이런 지역에서는 가난과 질병, 폭력 등 사회문제가 집중되었다. 해결책 제시는 도시정부의 책무였다. 임대아파트 제공, 공공 교통수단 도입, 도시빈민 지역의 복지 증대 등이 집중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불황이 나은 결과였다. 1970년대 불황과 지방재정 위기 이후엔 케인스식 국가의 역할은 축소됐다. 오히려 시장과 도시정부의 혁신이 요구되었다. 시장의 혁신은 기업 혁신으로 이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 IT기업들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혁신 기업의 출현은 많은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고, 이들 기업이 자리 잡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는 새로운 도시 르네상스를 맞았다. 동시에 도시정부는 도심으로 기업과 인구 유입을 위해 도심재생 사업을 시작하였다. 스마트성장 정책(smart growth)이라고도 하는 도시혁신 정책에는 지역경제, 주택·거리 개선 사업 외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주택, 대중교통 정책이 포함되었다.
최근 아파트 가격 하락이 내 집 마련의 좋은 시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마냥 기쁜 소식도 아니다. 가격 하락이 시장경제 시스템을 통한 자연스러운 수급 조절이나 국가균형발전 등의 정책 효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기침체로 인한 불황은 실업, 노숙자 양산, 도시재정 위기 등 더 심각한 도시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고유가·고금리 속 불황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단순한 일자리 창출 등 기존 중앙정부의 역할로는 한계가 있다. 기업과 도시의 혁신으로 이어져야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도시정부에서는 도심으로의 혁신기업 유치와 도시재생 등을 통한 도시혁신의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자영업 중심 도시인 부산은 도심 내 1층 상가를 매입·관리하는 프랑스의 파리시 도시공사의 혁신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과도한 외곽 확산 개발은 재고돼야 한다. 외곽 지역 도시개발에 따른 과도한 인프라 투자는 도시재정 위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사회서비스 축소로 귀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마음 편히 집에서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점심은 주변 가게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그런 일상적 삶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2023-02-1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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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의 핵인싸] 여전히 뜨거운 감자, 원전
탈핵정책을 5년 만에 뒤집어 친원전으로 돌아선 줄만 알았는데, 전기값을 비롯한 모든 에너지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때 아닌 혹한에 난방비 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지고 있다. 당장의 생존이 염려될 지경이다. 탄소중립을 내세워 친원전 정책으로 회귀하고 있는 에너지 정책은 타당한 것일까. 원전을 통한 에너지 생산의 경제적 효율과 안전성 모두 괜찮다고 백 번 양보하더라도, 과연 이대로 괜찮을 것인지 아주 현실적인 몇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핵폐기물에 대한 대책이 있는가. 원자력은 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대신, 수십만 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방사성폐기물을 내놓는다. 단순히 꽁꽁 막아 잘 쌓아 놓는 임시저장고, 영구처분장치의 문제가 아니다. 원전 내 저수고에 잠긴 폐연료봉(고준위 방폐물)이 차곡차곡 쌓여 더 이상 쌓을 공간이 없어질 때까지 40년간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은 직무유기와, 임시저장고 없이는 원전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대국민 협박을 다 참아 낸다 하더라도, 또(!) 이대로는 안 된다.
지난 40년간 방관하다가 이제야 다급히 화장실 문고리 앞에 선 것 같은 약속을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외의 원전 선진국들도 최근에야 40년 만에 고준위방폐물의 영구처분장치를 마련했다는 위로도 말이 안 된다. 세계 대부분의 원전은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핵폐기물의 재활용이 가능하고, 재활용 후 핵폐기물의 양도 1/10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재처리시설이 없이 생성된 핵폐기물을 있는 그대로 쌓아 놓아야 한다. 우리와 비슷한 1970년대에 원전 가동을 시작해서, 핵폐기물의 양도 우리보다 훨씬 적은 나라들조차도 가동 10년도 채 안 된 1980년대에 이미 고준위방폐장 준비를 시작했다. 당연히 지을 때부터 쏟아져 나올 핵폐기물을 생각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영구처분장치 공론화와 입지 선정 및 건설에 수십 년이 소요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국민 협박 끝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임시저장고를 앞으로 몇 개나 더 ‘임시에 임시’ 딱지까지 붙이면서 늘려 가야 할지, 생각만 해도 답답해진다. 이제라도 나중이 아닌 당장의 핵폐기물에 대한 단·중·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대도시를 지척에 둔, 세계 최대 밀집도의 원전을 언제까지 고집할 것인가. 건설 당시만 해도, 영남지역의 남동임해공업단지 건설로 제조업과 철강업 등 산업적 전기 수요가 클 때였지만, 지금은 어떤가. 원전 밀집지역에서 넘치도록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 등 전기 소모가 막대한 타지로 송전하기 위한 송전탑 시비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당연히 핵폐기물도 밀집돼서 생산될 것이고, 고준위 방폐물을 멀리까지 운반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에, 비록 추후 논의 예정이라고는 하나, 어차피 저장시설은 결국 원전 밀집지역 인근이 최우선 후보지일 수밖에 없다. 원전 운영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위험부담을 갖고 있는 마당에, 수요도 없는 곳에 원전을 밀집시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부작용을 밀집시키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국가정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핵폐기물의 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으면서도 핵무기 개발이 힘든 새로운 핵연료 재처리 방식이라거나, 선박이나 우주선, 심지어 전기충전소에까지도 사용 가능한 소형 원자로의 개발 등, 아주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먼저인 것이다. 무턱대고 친원전 회귀와 원전의 가동 연장처럼 과거로 되돌아갈 일이 아니다. 사실 최근 EU에서 원자력이 친환경에너지로 분류됐다고 대서특필 됐지만, 선결돼야 하는 현안을 필수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고저항성 핵연료의 사용’과 ‘핵폐기물의 안전한 처리대책’이 그 조건인데, 해외의 원자력 선진국들조차 여전히 원자로의 근본적 핵심 위험요소와 핵폐기물의 위해성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의 경우 비록 핵력과 방사선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대규모 인명 살상과 에너지 생산에 성급히 활용됐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해외의 선진국들은 핵력과 방사선의 연구·개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우리는 당장의 효율적 응용과 임기응변의 대책 마련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을 뿐, 창출된 재화를 근본적인 새로운 질문과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초연구에 재투자하는 일에는 대단히 인색한 실정이다.
말이 아닌 혁신적인 생각과 행동이 필요하다. 생각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의 정보와 데이터를 토대로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드러나게 해야 미래의 과오를 최소화할 수 있다. 에둘러 정책과 방침부터 먼저 정하고 시작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2023-02-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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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낙동강을 건너는 법
세계의 큰 도시들은 대부분 강을 끼고 성장하였다. 강물이 도시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면서 도시는 대개 남북이나 동서로 나뉘어져 있다. 어느 쪽이 먼저 발전되었느냐에 따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되기도 하고, 주거지역과 산업지역으로 기능이 분화된 곳도 있다. 그럼에도 도시의 양쪽은 각각의 특색을 지니면서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어 있다.
인구 300만이 넘는 대도시로서 부산도 낙동강을 끼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낙동강은 부산의 가운데를 흐르지 않았다. 낙동강은 부산과 인근지역을 가르는 경계였으며 그래서 부산 사람들은 낙동강을 건너가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서울이나 대구와 같은 전통적 도시를 제외하면 우리나라 도시의 계보는 매우 단절적이다.
세계적 도시들 큰 강 양안을 끼고 발전
낙동강 서쪽은 아직도 이질적 거리감
양안 경제적 통합 균형 잡힌 시각 필요
전통적인 도시를 대신하여 바닷가에 위치한 항만들이 주요 근대도시로 많이 성장하였는데, 이것은 근대화의 힘이 우리 내부의 힘이 아니라 바깥으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인들의 이주가 활발하였던 부산에는 해양으로부터의 힘이 육지의 힘을 압도하면서 바닷가에서부터 도시가 만들어졌다. 낙동강을 옆으로 밀어 두고 부산이 발전했던 이유이다.
그 결과 급속한 근대도시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을 넘어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흔히 구포다리라고 불렀던 구포대교가 준공된 것은 1933년이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출발하는 구포에서는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는데, 다리의 건설로 물자가 구포에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부산 산업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인근 경남이 중화학공업 벨트로 성장하던 시기에도 구포다리는 부산과 경남을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1996년 1월 왕복 4차로의 구포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구포다리는 부산과 인근 경남 지역의 화물과 세월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하여야 했다.
1978년 제4차 행정구역 확장 때 김해군 대저읍·명지면·가락면의 일부 지역이 부산시에 편입되고, 1989년 제5차 행정구역 확장 때 김해군 가락면·녹산면, 창원군 천가면이 부산시에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구포다리 하나에 의존하여 낙동강을 건넜다.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완공되어 물동량의 이동을 거들었지만, 하굿둑은 원래 안전한 식수의 취수가 목적이었고 온전히 물동량의 이동을 위한 교량은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구포다리 하나로 견뎌 온 놀라운 사실의 이면에는 수도권 중심의 교통정책 탓도 있지만, 부산과 인근 지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강하게 통합되어 있지 못한 사정도 작용하였다.
이후 부산의 가용 용지가 한계에 달하면서 낙동강 너머 넓은 땅을 활용하려는 노력들이 강력하게 대두되었고, 경남 지역으로의 물동량도 늘어나면서 낙동강을 넘는 일이 중요해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낙동강에 다리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지금 낙동강에는 8개의 다리가 건설되어 있다. 지하철 3호선교와 부산김해경전철교를 포함하면 현재 낙동강에 놓여있는 다리는 10개에 이른다. 지하철과 철도 교량 4개를 포함하여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28개인 서울과 비교하여도,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이젠 숫자에서는 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낙동강 너머 강서의 빈 공간을 채워 가려는 큰 사업들이 잇달아 발표되고 있다. 명지지구에 인접한 지역에는 이미 에코델타시티가 건설되고 있고, 녹산산단 위쪽에는 국제산업물류도시가 예정되어 있다. 이어 얼마 전 대저 일원에 조선·해양산업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는 연구개발특구 추진 일정이 구체화되었다. 이 사업들이 모두 추진된다면 강서의 큰 공간들은 사실상 모두 채워진다고 보아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서는 무언가 아직은 이질적이고 보조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구포다리 하나에 의존하였던 낙동강 다리가 10개로 늘어났지만 아직 낙동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마음에 부산을 오간다는 느낌이 크지 않은 것이다. 물론 강서 지역의 곳곳을 채울 산업단지들이 모두 완공되고 나면 강서의 위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또 주거단지가 확충되면 인구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낙동강 양안을 부산의 미래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의 큰 도시들이 일찍부터 갖추었던 것을 부산은 아주 늦게 채워 가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팽창의 시대가 아닌 축소의 시대에 이루어 나가야 한다. 서울이 한강을 건너듯이 부산도 낙동강을 건널 때 광역도시 부산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낙동강을 온전히 건너기 위해서는 낙동강 양안을 끼고 발전하는 부산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2023-01-3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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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영의 법의 창] 계묘년, 국회도 변해야 한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 통계에 따르면 2021년 말까지 21대 국회에 발의된 법률안은 총 1만 9020건이었고, 이 중 현재까지 미처리 상태로 계류 중인 법률안이 1만 3598건이다. 21대 국회가 그동안 처리하지 않고 있는 법률안이 71%를 넘고 있다. 정기국회는 물론이고 임시국회를 수시로 개의하면서도 정작 꼭 해야 할 국회의 업무는 정체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국회는 우리 헌법 질서 내에서 가장 중심적인 입법기관이고, 국회의 헌법적 기능 중 가장 우선되는 기능과 역할이 입법 활동이다. 민주화 이후 국회의원에 대한 의정 활동 평가가 이루어져 왔다. 시민단체나 언론, 그리고 정당 공천심사에서까지 이러한 의원의 의정 활동 평가가 반영된다. 그런데 제도 도입 취지와 달리 이 평가의 초점이 정량 평가에 더 주목함으로써 우리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이 ‘더 많은’ 입법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입법의 양적인 측면에서 우리 국회의 입법 활동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 국회의 법안 발의는 선진 의회민주주의 국가들보다 적게는 2배, 많게는 90배가 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입법의 양적 성과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 국회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적어도 통계수치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양적 실적에 치중한 이러한 결과가 양적 수치에 비례하는 질적 평가를 동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더 많은 입법이 아니라 국회가 입법 활동을 통해 보여 주는 국가정책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에서 쌓이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국민이 필요로 하는 입법 내용인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어서다. 그래서 이젠 의원에게 가장 중요한 본연의 업무인 입법 활동의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 양(量)이 아니라 대의의 질(質)과 내용이 우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안의 양적 폭증이 가져오는 여러 문제들은 결국엔 국회라는 헌법기관의 신뢰도와 능력에 대한 평가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젠 입법 활동의 내용과 질을 담보하기 위한 개선책을 국회 스스로 강구할 때다. 대의의 실패도 심의의 실패도, 더 이상 심화되거나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언론과 SNS 등 여론의 주목을 끄는 법안이나 여론 영합적 법안, 민생과는 거리가 있는 법안들의 발의와 통과가 많아지는 것도 문제다. 특별법의 증가로 균형을 잃은 입법 과잉의 문제도 이젠 개선해야 할 때다.
또한 정당과 국회는 각기 그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정당이 의회를 대체할 수는 없다. 물론 의회 내 정당의 역할 강화는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정당 내부의 응집력 강화와 정당 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정당 간 타협의 정치는 사라졌다. 당론이 의원의 의정 활동을 구속하면서 국회 내 당파적 갈등은 거의 상시화 되고 그 결과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법으로 만들어 내는 국회의 입법 기능은 때때로 혹은 수시로 마비 상태에 빠지는 상황에 이르게 되곤 한다. 국회의 대의적 기능 회복을 위해 입법 교착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는 정당에 대한 개혁론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국회에게 인정되는 광범위한 입법 재량권은 입법의 시기와 내용을 국회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입법이나 개선 입법이 필요한 경우인지 혹은 필요하다면 어떤 입법 내용을 결정해야 하는지를 국회 스스로 적실성 있게 판단해서 행동하라는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권한인 것이다. 그 책임감의 무게를 국회는 스스로 그리고 제대로 감당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결정은 차치하고라도, 반드시 입법을 해야만 하는 경우까지도 적잖게 방치하고 있다. 국내 거주 주소를 신고하지 않은 재외국민을 투표 대상에 포함하지 않아서 헌법불합치 결정된 국민투표법 조항, 유기 아동과 관련한 보호출산특별법안, 부양의무 불이행 상속인의 상속권 박탈 규정과 동물이 물건이 아니라는 규정을 담은 민법 개정안, 허위 난민 신청 알선자 처벌 규정 등을 담은 난민법 개정안, ‘낙태를 불법은 아니되 합법도 아닌 상황’으로 만들고 있는 낙태죄 처벌 조항 개정 규정과 촉법소년 연령 상한을 13세로 하향한 형법·소년법 개정안 등.
“국가의 구성원들이 서로 연합하고 결합해 하나로 통합된 생명체가 되는 것은 바로 입법부 안에서 이루어진다. 입법부로부터 공화국의 여러 구성원이 상호 영향을 미치고,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 연결된다. 따라서 입법부가 무너지거나 해산되면 국가의 해체와 죽음이 이어진다”던 존 로크의 말을, 계묘년엔 우리 국회가 명심했으면 한다.
2023-01-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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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민의 기후 인사이트] 위기의 시대, 탄소중립보다 중요한 것
전쟁, 식량난, 물가상승, 경기침체 등 국제 정세가 현기증이 날 만큼 어지럽게 돌아간다. 하지만 이런 위기 속에서도 에너지 전환의 시대는 소리 없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미 태양광 에너지의 효율이 화석 연료의 에너지 효율을 넘어섰고, 우리나라 기업들은 애플, 구글,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신재생 에너지로 생산한 제품만 납품하기를 강요받고 있다. 뒤늦게 무서움을 알아차린 우리 기업들은 지금 악전고투 중이다. 에너지 전환 시대로 넘어가는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은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
정부가 시급하게 나서야 할 일은 우리 기업이 신재생 에너지를 마음껏 사용하여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RE 100’(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운동)과 탄소중립 같은 압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분산형 전력망의 확충, 스마트 그리드로의 전면적인 전환 등 국가적인 재생 에너지 인프라를 확충하는 게 중요하다.
재생 에너지 인프라 확충 시급
기업들은 ESG 혁명 동참해야
전문성 가진 리더의 역할 절실
지난 정부에서는 태양광과 풍력 에너지 생산 설비를 늘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맞는 노력을 시작했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분명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지난 정부가 놓친 부분이 있다. 태양광·풍력 발전 설비 용량이 증가한다고 해서 곧바로 우리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많아도 도로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어렵게 생산된 신재생 에너지가 송전망 부족 때문에 산업단지로 제대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현재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의 거대한 태양광 단지에서 생산된 전기가 정작 전기가 필요한 수도권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정부 관계자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문제는 오직 국가만이 해결할 수 있으며 원전 확대냐 탈원전이냐 하는 케케묵은 이슈와는 전혀 무관하다. 어찌 되었건 원전으로 100% 새로운 에너지 세상을 만들지 못할 바에야 OECD 꼴찌 수준인 우리나라의 재생 에너지 생산 능력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이 전기가 적재적소에서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정부가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늦어질수록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기업이 해야 할 일을 살펴보기에 앞서, 기업이 기후위기의 주범임을 명확히 하자. 우리나라의 경우 소위 ‘10대 기업’들과 이들에게 전력을 공급하는 한국전력의 탄소 배출량을 합하면 우리나라 전체 탄소 배출량의 70%에 육박한다. 결국 기업의 배출량을 잡는 것이 기후위기 극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기업의 배출량을 잡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필자는 기업들의 비즈니스 마인드를 재정립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는 기업으로 하여금 기후위기로 황폐화하고 있는 세상을 다시 지속가능한 세상으로 만드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이미 세상은 우리가 좋건 싫건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같은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환경(Environment), 사회(Society), 지배구조(Governance)의 앞 글자를 딴 ‘ESG 혁명’이다. 우리 기업들이 용기를 내어 새로운 기업 환경에서 살아남는 선택에 하루빨리 과감하게 동참할 것을 주문한다.
개인들에게는 기후위기 해결에 필요한, 좀 더 거대하고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기를 권하고 싶다. 텀블러 사용하기, 자전거와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 시민 각자의 각성과 실천도 중요하지만, 기후위기 문제는 결국 시스템을 통째로 뜯어고쳐야 하는 문제이다.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중국을 보자. 중국 공산당은 지난해 말 18개 성의 당서기들을 대부분 이공계 전문가로 교체하였다. 15명의 당서기가 이공계 대학을 나왔고, 이들 중 13명이 석·박사 학위를 가진 과학기술자 출신이다. 덩샤오핑·후진타오·시진핑 주석 모두 이공계 출신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국회의원 중 이공계 출신이 20년 전에 5% 수준이었는데 지금에서야 겨우 10% 수준에 도달했다. 이래서야 어찌 하루가 멀다하고 발전하는 ICT 트렌드를 따라잡을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에너지 전환의 핵심을 꿰뚫는 정책들이 입안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급변하는 세상에 살아 남느냐 도태되느냐의 문제가 더없이 중요하게 됐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야흐로 과학기술의 세상인 것이다. 전문성을 가진 이공계 리더들의 활약이 빛날 때 진정한 기후위기 극복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2023-01-1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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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희의 위드 디자인] 디자인은 스타일링이 아니라 전략
얼마 전 프로젝트 최종 발표회에 참석한 기관의 대표가 “뭐 하는 회사입니까?”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했다. “UX(사용자 경험) 리서치 기반의 디자인 회사입니다” 했더니 “디자인 회사에서 나올 결과물이 아닌데…” 한다. “저희는 디자인 전략을 합니다” 라고 답변했다. 결론은 결과가 좋다는 것이었으나 도대체 디자인답지 않은 디자인을 하고 있는 우리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또 한 기관의 담당자는 우리 회사 이름에서 디자인을 빼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한다. 프로젝트 승인 과정에서 왜 디자인 회사가 전략기획 과제를 진행하느냐는 질문을 계속 받는다고 한다. 설명하느라 상당히 번거롭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례 모두 디자인을 ‘스타일링’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디자인을 형태나 미적 요소로만 보는 편견은 내가 디자이너로 일하는 지난 30년 동안 계속 겪어 온 일이지만, 이곳 부산에서는 유독 더 강한 편이다.
일단 디자인을 3가지 레벨로 이해해 보자. 첫 번째 레벨은, 교양으로서의 디자인이다. 자신의 집을 장식하거나 가구의 위치를 변경하거나, 어떤 옷을 입을지 선택할 때 요구되어진다. 디자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높은 나라는 디자인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일본, 영국 등이 그러하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캘리그래피의 아름다움을 알고, 서체 디자인을 이해했기에 컴퓨터 폰트의 아름다움에 의문을 가질 수 있었고, 이러한 디자인 이해는 디자인 혁신을 가져왔다. 스티브 잡스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두 번째 레벨은 디자인 교육을 받은 전문 디자이너의 레벨이다. 실무 디자이너들은 주어진 문제, 즉 많은 제약의 상황 가운데서 적절한 해결책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많은 경우 상사나, 조직이나, 클라이언트에 의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한다. 디자인 교육이 이러한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디자인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세 번째 레벨은 다학제적, 융합적 디자인 싱킹이다. 디자인 싱킹은 단순히 물건의 외형을 디자인할 뿐만 아니라 소위 말해서 ‘사악한 문제’라고 알려진 어렵고 복잡한 시스템과 서비스 문제들을 다룬다.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과 협력하며, 비즈니스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며 사용자 중심의 프로세스와 디자이너의 도구로 창의적이고 협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레벨이다
많은 경우, 디자인을 첫 번째, 두 번째 레벨로만 이해하고, 더 좁게는 미학적인 해결책을 내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삼성에서 최초로 디자인 부사장이 된 정국현 부사장은 “디자이너이기를 거부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 디자인 인식이 부족했던 90년대, 2000년대, 이 말은 전통적인 디자인의 역할에서 벗어나라는 것이고 주도적으로 여러 부서와 협업하며 혁신을 이루라는 말이었다. 점점 확대되고 융합되어 가는 산업 안에서 디자이너도 비즈니스 프로세스에서 폭넓은 역량을 확보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디자인 싱킹 역량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길러졌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도하며 시장에서 성공하는 혁신적인 과제들이 진행되었다.
기존의 디자인이 전술의 단계에 있었다면 디자인 싱킹은 전략이다. 좋은 디자인은 그냥 ‘디자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즈니스에서의 실행력과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성과를 달성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훌륭한 디자인이 탄생한다. 디자인, 기술, 비즈니스 전략의 효과적인 결합으로 혁신적인 디자인이 나온다.
이런 역량을 갖춘 디자이너가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디자인 결과물을 잘 전달하고 설득할 뿐 아니라, 비즈니스 감각과 리서치와 분석 능력을 갖춘 디자이너 출신 창업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에어비앤비, 핀트레스트, 배달의 민족의 창업자가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별히 ‘고객 경험’이 중요한 테크 창업 분야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디자인은 계속 진화되고 있다. 융복합과 디지털의 시대, 디자인은 무엇일까? 디자인 업무는 점점 세분화되고 파편화되어 가지만, 점점 더 종합적이고 융합적이고 전략적인 디자이너의 역량이 요구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전통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경계를 허물고 혁신의 협력자로 성장해야 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디자이너이기를 거부하는 디자이너, 전략적인 디자인으로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디자이너, 다양한 분야와 융합하며 창의적으로 협력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응원을 보내며 2023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디자인의 인식 확산을 위해서라도 회사 이름에 디자인이라는 이름은 유지할 생각이다.
2023-01-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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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의 핵인싸] 융합과 분열의 미학
오랜만에 눈길을 걸었다. 뽀드득 발끝에 뭉쳐지는 눈 덩어리와 호젓한 눈바람이 모처럼의 고향 냄새로 코끝에 와닿았다.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폭설과 한파의 와중에 수도권 본가에 다녀온 덕분이다.
정반대로 보이는 핵의 융합과 분열
질량 차이 면에선 본질적으로 같아
일상에서도 적절한 균형감 필요해
눈 풍경의 낭만을 깨뜨리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손바닥에 내려앉으면 어느새 녹아 없어지는 이 연약하고 얇은 눈송이는, 나노미터 크기의 물 분자들이 온도와 습도에 따라 얼어 굳으면서 최적화된 육각형의 결정구조를 이룬 것이다. 전자 뭉치인 원자들이 합쳐진 분자는 우리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결정체다. 눈을 뭉쳐 본 적이 있으면 누구나 알겠지만, 눈송이들을 뭉쳐서 주먹 크기만 한 눈 덩어리로 동그랗게 만드는 것과 이미 뭉쳐진 몇 개의 눈 덩어리를 합치는 일은 많이 다르다. 눈 덩어리 몇 개를 붙여 놓은 것처럼, 전자 뭉치인 원자들이 합쳐진 분자는 규칙적이지만 울룩불룩한 모양이다. 뭉쳐진 원자의 개수에 따라 꺾쇠, 사면체, 피라미드 등 다양한 모양이 되고, 거대한 나선 구조의 사슬이 되기도 한다. 한 산소 원자의 양쪽에 비스듬히 수소 원자가 뭉쳐진 꺾쇠 모양의 투명한 물 분자들이지만, 크리스털 결정들로 제각각 얼어붙으면 난반사를 일으켜 하얀 눈꽃 세상을 만든다.
색깔이나 단단함 같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현상들은 전자들 때문이지만, 원자의 중심에서 이 전자들을 전기력으로 붙들고 있는 핵은 원자의 질량과 전기적 중성에만 기여할 뿐 사실상 우리의 일상에서 직접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눈가루처럼 떨어져 나가거나 들러붙기 일쑤인 전자 뭉치에 가려져 있고, 원자 크기의 십만 분의 일에 불과한 핵력의 범위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전자들끼리의 전기적 반발력만 느낄 수 있다. 전자를 하나씩 모두 떼어 낸다(원자를 최대로 이온화시킨다) 해도, 양전하를 띤 핵들은 서로 전기적으로 반발해 밀쳐 낸다. 하지만 온도가 수천만 도까지 올라가면, 핵들의 운동이 엄청나게 활발해져서 핵력이 작용할 정도로 가깝게 되고, 마침내 전기적인 반발력을 넘어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초고온 상태에서 수소와 같이 가벼운 핵들이 합쳐져 무거운 핵으로 변하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내놓는데, 이를 핵융합 에너지라고 한다. 중력으로 뭉친 우주의 먼지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별의 탄생 원리이며, 지금도 태양 중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원자력 발전에 이용되는 우라늄과 플루토늄같이 무거운 핵이 쪼개지는 핵분열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에너지 효율이 훨씬 높고 방사성 폐기물이 나오지 않아서 꿈의 청정에너지라고 부르는 ‘인공 태양’의 원리도 바로 이것이다.
핵융합과 핵분열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융합 또는 분열 전후에 반드시 질량 차이가 난다는 면에서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핵이 합쳐지면서(쪼개지면서) 분명히 전체적인 개수는 그대로인데도, 어떻게 합쳐져(쪼개져) 있느냐에 따라 미세한 질량 차이가 발생한다. 수소 핵융합의 산물인 헬륨 핵의 질량은, 융합 전 수소 핵들의 질량을 합친 것보다 작다. 분열하기 전 우라늄 핵의 질량은, 분열 후 생긴 핵들의 질량을 합친 것보다 크다. 즉, 융합이나 분열 이후에는 항상 질량이 줄어든다. 사라진 질량(결손 질량)은,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에너지-질량 등가원리(E=MC2)에 따라, 그만큼의 에너지로 발산된다. 결손 질량이 발생하는 방향으로 융합이냐 분열이냐가 결정되고, 또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발산되는 에너지가 달라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철(Fe)보다 가벼운 핵들은 핵융합을 통해서 상당히 큰 결손 질량이 생기고, 철보다 무거운 핵들은 핵분열을 통해서 약간의 결손 질량이 생긴다. 핵융합이 핵분열보다 에너지효율이 훨씬 큰 이유다. 수소의 융합으로 탄생한 별들은, 최초 질량에 따라 진화의 정도가 차이는 있지만, 무거운 핵종으로 핵융합을 거듭하여 결국 최종적으로는 철에서 끝난다. 또한 철보다 가벼운 원소들은 별의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반면, 철보다 무거운 핵종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 여전히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최근 미국의 연구진이 190여 개의 레이저를 이용한 핵융합을 통해서, 투입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의 에너지 생산을 최초로 성공시켰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자기장을 이용한 토카막과는 방법이나 규모가 크게 다르지만, 놀랄 만한 쾌거다.
핵가족을 넘어 1인 가구의 수가 4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까지 서구식 개인주의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과연 우리 삶의 최적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1회 용품처럼 에너지 과소비만 부추기며 공동체가 사라진 인간의 위기만 가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적절한 융합과 분열의 미학이 필요해 보인다.
2022-12-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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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아주 특별했던 시대의 마감
세상의 변화를 재빨리 읽는 것은 쉽지 않다. 변화의 흐름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야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도 그랬다. 돌이켜 보면 미국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대선에서 이긴 것도 범상치 않은 변화의 예고였다. 트럼프를 연호하며 강력한 지지 그룹을 형성하였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전에 민주당을 찍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한 지지는 일자리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산업공동화로 일자리를 잃어버린 백인들이 트럼프 현상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는데, 이에 트럼프는 중국과 무역 전쟁을 일으키고 미국 기업들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당장 중국에서 물건이 들어오지 않으면 소비자들의 장바구니가 가벼워지고, 높은 인건비 때문에 기업들이 미국으로 돌아오는 것에 주저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었다. 트럼프에 이어 민주당의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트럼프가 열었던 정책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아시아에 주도권을 내주었던 반도체를 통째로 미국으로 가져오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30여년 동안 미국이 스스로 외쳤던 자유주의와 세계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30년은 매우 특별한 시기였다. 세계화의 이름으로 국제무역을 그렇게 시장에 무제한적으로 맡겼던 시기는 거의 없었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완수하고 세계의 유일한 공장으로 군림하던 19세기 중·후반 약 30년 동안 인류는 유사한 무제한의 자유무역 시대를 구가한 적이 있었다.
지난 30년에 다시 이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그 어떤 시기에도 상품은 물론 자본과 사람까지 이렇게 자유롭게 이동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돈은 아시아 특히 중국으로 몰려들었고, 중국에서 세계의 가장 큰 노동시장과 결합되어 그 어느 곳에서도 만들 수 없는 많은 상품을 가장 싸게 세계에 공급하였다. 세계 각국이, 엄청난 유동성의 공급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플레이션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값싼 제품의 무제한 공급 때문이었다.
이러한 세계화라는 말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정을 담당했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세계화라는 말을 처음으로 던졌던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1995년 10월 캐나다와 유엔 방문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제 ‘세계화와 일류화’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한 말이 효시였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2년 후 한국은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였는데, 이것은 세계화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세계화 때문이었다. 세계화 시기 동안 중국은 본격적인 대외 개방 정책을 통하여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이러한 중국에 소나기 수출을 함으로써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트럼프가 쏘아 올린 중국 압박은 관대했던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끝났음을 선언한 것이다. 사실 저임금에 기반한 경공업에서 시작하여 이제 첨단산업으로까지 올라선 중국에 대해 그동안 미국은 이상하리만치 관대했다. 그러다가 G2로 올라선 중국의 위협에 대해 미국이 뒤늦었지만 강한 견제를 하면서 세계경제의 틀을 새롭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부산의 미래와도 무관하지 않다. 새롭게 전개될 세계질서가 부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대체로 탈중국화의 흐름이 지배할 때 부산항의 위상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세계화의 종언이 어떤 흐름을 만들어 낼지 주시하면서 미래를 차분히 준비해 가야 하는 시점이다.
항만과 공항은 이제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부산을 성장시킬 핵심적인 두 기둥이 될 것이다. 그와 함께 부산이 채워야 할 것은 그동안 너무 약화된 산업적 기반이다. 그런데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람과 문화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마침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은 ‘지역균형발전의 핵심 중의 핵심은 교육 문제’라면서 지방대학에 대한 권한을 시도지사에게 넘기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제 지역의 인재를 길러 내는 일에 지역이 더 이상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부산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부문이 바로 대학이다. 한발 앞서 지역대학과 소통하면서 지역대학을 성장의 동력으로 키워 나가는 준비를 하여야 한다. 아주 특별했던 지난 30년간의 세계화의 종언이 부산의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묻고 있다.
2022-12-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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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바보야, 문제는 돌봄이야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큰 이변이 없는 한 부산에서 노후를 보낼 것이다. 그 전에 부모님의 노후부터가 걱정인데, 자식들을 키워 내고 생계를 책임지시느라 여기저기 안 아프신 곳이 없다. 가끔 연차를 내어 병원에 모시고 다녀오지만, 지속적으로 도움이나 간병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을 안 해 본 자식은 없을 것이다. 유능한 직장 여성인 나의 동료는 아이를 낳고 1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업무에 복귀했다. 아이를 돌보는 데에는 친정 엄마 찬스를 썼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직장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골병이 들었다. 아이는, 그리고 어머니는 누가 돌봐야 할까? 결국 동료는 직장을 포기했다.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사회는 누구나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가능한 법이다. 과거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주로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던 돌봄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고령화 사회, 가족 구조의 변화, 공적 돌봄 서비스에 대한 욕구 증가로 꾸준히 공적 서비스로 변화해 왔다. 출산과 육아의 문제만큼이나 돌봄은 이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현실은 육아와 돌봄 모두 여성 노동자의 자리를 위태롭게 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공적 돌봄이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난 바 있는데, 많은 여성들이 육아나 돌봄의 문제로 직장 생활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돌봄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공적 돌봄 역시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돌봄 노동자의 92.5%가 여성이다.
부산시의 경우 돌봄 실태 및 돌봄 노동자의 실태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최근 부산여성노동포럼 주관으로 ‘요양보호사의 노동 인권,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부산의 돌봄 현실, 그중에서도 돌봄 노동자의 현실을 중심으로 실태조사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반가운 일이었다. 부산여성노동포럼은 부산 지역의 다양한 여성들 앞에 놓인 노동환경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짚어 보고 해결 방안과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공론장을 만들어 가자는 취지로 생겨났다. 첫 번째 주제로 돌봄 정책을 제시하게 된 것은 그만큼 부산에서의 돌봄 노동의 현실 개선이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노동인권연대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이번 부산시 요양보호사 실태조사는 부산시 재가장기요양기관에 근무하는 요양보호사 216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전국 조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돌봄 노동자의 저임금과 고용불안정의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초과근무수당이나 장기근속장려금은 현실성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부당 대우 등 노동환경의 문제도 제법 큰 비중을 차지했다. 언어폭력 경험 37%, 기타 비인격적 대우 38.5%, 신체 폭력이나 성희롱 성폭력 경험도 20% 가까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부당 대우 가해자의 경우 서비스 이용자 및 그 주변인의 비율이 전체의 절반에 달했다.
토론자들은 부산시가 얼마나 돌봄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무관심한지 지적하기도 했다. 일례로 부산시의 요양 시설 종사자 복지수당 지원 현황을 살펴보면 2008년 6월 이후 근무자에게 지급하는 복지수당은 월 6만 원으로 전국에서도 최저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회복지법인에만 해당하며 60세 미만자에게만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요양보호사들 상당수가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업체에 고용되어 있으며 평균 연령이 60세임을 감안할 때 처우 개선 제도가 얼마나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부산에도 돌봄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기요양 관련 조례는 마련되어 있지만, 돌봄 현실과 돌봄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반영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요양보호사인 장기요양요원, 즉 돌봄 노동자의 처우 개선이나 실태 조사 항목은 빠져 있는 상태다. 또 전국 대부분 지역에는 돌봄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서비스원이 있지만 부산은 시장 공약인데도 아직 이행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서울, 경기, 울산, 경남 지역에는 돌봄 노동자를 위한 장기요양지원센터가 있어 돌봄 노동자의 권리 침해에 관한 상담 및 지원,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지원, 건강 관리를 위한 사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의 진입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가파른 지금, 대도시 중 최초로 고령사회에 진입한 부산의 경우 돌봄은 더욱 더 중대하고 시급한 사안이다. ‘노인과 바다’라는 부산의 별칭이 더 이상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조례 개정과 정책 개선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모두를 살리는 돌봄이 부산의 중요한 정책 과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부산시와 시의회의 책임 있는 역할을 기대한다.
2022-12-14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