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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도시 부산, ‘빅(Big)’과 ‘품격’ 사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근 국내 주요 도시들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이는 부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배경에는 좋은 도시디자인이 곧 그 도시의 경쟁력이자 얼굴이 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디자인 자체가 도시 간 경쟁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산시는 최근 ‘부산을 바꾸는 빅 디자인(Big Design)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26년까지 도시를 새롭게 디자인해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총 610억 원을 투입한다. 행복한 시민, 매력적인 도시를 목표로 도시 비우기 사업, 품격 있는 부산 거리 디자인 조성, 글로벌 야간 관광 명소화,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시민 관점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가 배려받는 도시 조성, 공공디자인 시민 참여 확대 등 총 8개 분야를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빅’, ‘품격’을 바라보는 관점의 논란과 더불어 화려한 수사(修辭) 뒤에 따르는 공허함이 있다.
■과연 ‘빅’이라 할 만한가?
부산시는 품격 있는 부산 거리 디자인 등 8개 분야 중점 과제를 통해 부산을 디자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빅 디자인 프로젝트다. 하지만 아쉽게도 깊게 와닿지 않는다. 중점 과제를 살펴보면 종전 부산시가 추진했던 디자인 개념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 배려 디자인 등은 이전에도 강조돼 왔던 개념이다. 이는 도시디자인에 있어 기본이다. 그런데도 빅 디자인이라는 게 다소 낯 뜨겁다. 빅 디자인 허브센터 등 부산시는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만들고 디자인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부산 시민에게 더 필요한 것은 풀과 나무, 길, 공원, 벤치가 있는 도시 환경이다.
빅 디자인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확행적 접근’이 오히려 중요하다. 도시 비우기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확행적 디자인에 오히려 더 가깝다. 도시디자인이나 공공디자인의 역할은 간결하고 편안한 환경을 조성해 자연과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행 방해 요소를 보행 공간에서 분리하는 도시 비우기는 부산을 ‘걷고 싶은 도시’, ‘걷게 하는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길이 좁아서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광장이 있고 걷고 즐길 수 있는 자연과 문화가 있다면, 그 도시는 살고 싶은 도시, 사랑받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도시디자인이 시행된다면, 애써 ‘빅’을 강조하지 않아도 시민들에게 디자인 프로젝트가 ‘더 크게’ 다가올지 모른다.
■도시 품격은 어디서 오는가?
부산시는 291억 원을 들여 국제공모 우수디자인으로 선정된 가로등, 벤치 등 공공시설물을 부산의 관문 지역과 관광지 등에 설치해 품격 있는 거리 디자인 조성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품격 있는 거리라는 표현은 주관적이고 모호하며,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품격 있는 거리의 기준은 무엇이고, 또 누가 판단할 것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를 의미한다. 이는 매우 상대적이다. 품격의 높고 낮음을 판가름할 기준은 개개인의 시선에 있다.
도시의 품격과 시민의 삶을 결정하는 척도는 화려함이 아니다. 거리의 디자인은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성, 그리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 흔히 내로라하는 세계적 문화도시인 빈, 런던, 뉴욕, 파리의 공통점은 ‘걷기 좋은 도시’라는 것이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걷기 좋은 도시, 서울’, ‘쉼이 있는 도시공간’을 모토로 산책로와 공원, 벤치를 확대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 도시나 사회가 건강하려면 공통의 추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야 한다.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카페가 아니라, 공원과 벤치와 같은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많을수록 살기 좋은 도시다. 휴게 공간이 많은 도시가 곧 걷기 좋은 도시이자 살기 좋은 도시인 것이다. 흔히 도시 전문가들이 벤치의 디자인이나 그 속에 깃든 배려를 통해 그 도시가 지향하는 정신이나 철학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제공모 우수디자인 작품을 거리에 설치했다고 해서 그 거리가 품격 있는 거리가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벤치는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여기서부터 스토리가 담기고, 사람 중심의 도시디자인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도시는 살기 좋은 도시, 품격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품격은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 가듯이, 품격 있는 도시 또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다양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술성 높은 공공시설물 하나 더했다고 품격이 딸려오는 건 아니다. 도시의 품격은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삶을 떠나 논할 수 없다. 외국 디자이너의 예술성 높은 공공구조물 하나에 부산이란 도시의 품격이 좌우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용자 중심의 도시디자인 돼야
디자인은 단순히 간판을 정비하고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산에 필요한 디자인은 공공분야 혁신의 한 방법으로서, 부산 시민의 생각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스위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공서비스디자인이다. 8개 중점 과제 중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공디자인은 경제적 가치보다 시민의 안녕과 행복 같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공간의 질적 수준을 높여주는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가 아닌, 수요자와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 디자인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주민들의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수렴하는 것은 물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도시디자인에 있어서 건강한 시민의식에 기초한 참여는 필수적이다. 부산시의 공공서비스디자인 시민참여 프로그램 운영은 이런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시민들의 참여로 도시가 모습을 갖추어가는 과정은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부여하고 도시에 대한 애착을 갖게 만든다. 시민들이 필요에 의해 디자인 개선안을 만들고, 그 의견을 따라 시행된다면 실용성과 활용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도시디자인은 단순히 2차원적 공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3차원, 4차원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도시기본계획과 함께 가야 하며, 문화, 복지, 안전, 교육, 환경 등 다양한 분야와 연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디자인 도시 부산이 성공할 수 있다. 도시디자인은 우리의 삶과 문화가 담긴 도시의 영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단순히 멋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과 공간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도시 전문가들은 흔히 “사람이 느끼는 편안함의 정도가 바로 도시디자인의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부산시가 만들어가야 할 품격 있는 도시는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부산시가 추구해야 할 디자인 도시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철학이 있는 도시디자인, 사람을 향하는 도시디자인을 통해 도시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살아 있는 도시, 살맛 나는 도시가 될 것이다.
2024-1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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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조선업 몰락 교훈 잊은 트럼프
미국령 푸에르토리코가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로 인해 괴멸적 타격을 입었을 때 일화다. 고립된 주민들은 식량과 음료수, 연료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시 뉴올리언스에 정박해 있던 노르웨이 선적 그린피스 선박이 구호품을 운반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외국적 선박의 국내 운항을 금지하는 존스법에 발목이 잡혔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존스법이 미국 해운업을 보호하고 있다’는 고집을 피우며 버텼지만 재난 상황이 심각해지자 사상 초유의 ‘10일 면제’ 조치를 발동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열흘 만에 컨테이너 53개에 물자를 싣고 푸에르토리코에 기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도주의 활동조차 보호무역의 규제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은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의 정수로 꼽힌다.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인이 소유하고, 미국인 승무원이 일하는 선박만 미국 내 항구를 오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자유무역에 반하는 이 보호 조치가 104년간 이어지면서 조선과 해운 분야는 경쟁이 없는 시장으로 전락했고 조선업은 쇠퇴했다. 미국은 상선은 고사하고 군함조차 건조와 유지·보수·정비(MRO, Maintenance, Repair and Overhaul) 분야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윤석열 대통령에게 조선 분야에 협조를 요청한 까닭이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면서 징벌적 관세와 강한 달러를 밀어붙일 참이다. 경제 전쟁 중인 중국뿐만 아니라 동맹인 한국과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무역주의를 거스르는 과잉 보호 탓에 조선·해운산업이 몰락한 교훈을 잊었나? 미국발 무역전쟁 광풍에 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커져만 가고 있다.
■ 과보호가 빚은 경쟁력 상실
존스법은 ‘연안무역법’(Merchant Marine Act) 제27조를 지칭한다. 미국 내 해상 운송 권한을 미국 선박에 한정하는 규제다. 당초 전쟁이나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선박 건조 능력과 필수 인력을 유지하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고비용과 경쟁력 저하의 악순환에 빠져들면서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항구와 내륙 수로에서 시장 경쟁이 사라지자 선박 운송료의 고삐가 풀렸다. 화주들은 저렴한 도로와 철도 수송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화물 수요가 줄어들자 해운업계는 신규 선박 발주를 하지 않게 되고 조선업계는 일감이 줄어 쇠락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상업용 선박이 4만 척 있지만 55%가 미시시피강에서만 운항하는 바지선이다. 2010년 이후 건조된 선박 10척 중 9척이 바지선과 예인선이었을 정도로 편중돼 있다. 1000t 이상 원양 선박은 노후화 탓에 2000년 이후 193척에서 99척으로 감소했다. 미국 컨테이너선 4척 중 3척이 20년 이상, 65%는 30년 이상 노후된 선박이다. 미국에서 대형 선박 건조가 줄어든 것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느린 공정 탓이다. 미국 싱크탱크 카토(CATO)는 2017년 <존스법 : 미국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부담> 보고서에서 미국 내 피더선 건조 비용이 1억 9000만~2억 5000만 달러(우리 돈 2660억~3500억 원)인 반면, 한국, 중국 등에서는 3000만 달러(우리 돈 420억 원)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카토 보고서는 가동 중인 124곳의 조선소 중 군함, 잠수함, 원양 화물선, 시추 장비 등 중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중대형 조선소는 22곳에 불과하다면서 한국과 일본, 중국이 제각각 1000~2000곳씩 보유하고 있는 것에 비교했다.
존스법은 군함의 건조와 정비에 차질을 준 것에서 나아가 군사 기동력까지 약화시켰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은 군수 물자 수송을 외국적 상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책임자인 한 장성은 의회에 출석해 “외국 선박의 지원 없이 존스법을 따르는 미국 선박만 투입했다면 수송에만 3개월이 더 걸렸을 것”이라며 존스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 밀주업자와 침례교회 동맹
미국 조선·해운업계는 고정된 국내의 상선 및 군함 수요를 독점하기 때문에 최소 이익이 보장된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해외로 수출하는 미국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외국적 선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조선·해운업계의 취약성이 가중되는 구조다. 전 세계 선박 건조는 중국과 한국이 주도하고 있는데, 올해 10월까지 점유율에서 중국이 65%, 한국이 26%를 차지했다. 미국 조선산업의 점유율은 0.1% 수준으로 의미가 없어진 상태다.
자유무역주의 전도사였던 미국이 과잉 보호를 고집한 결과는 참담하다. 하지만 조선·해운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존스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비효율·고비용을 이유로 폐지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번번이 국익을 앞세운 규제론에 밀린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상황을 두고 ‘밀주업자와 침례교회’ 이론까지 등장한다. 이해가 엇갈리는 집단에 의해 금주법이 지탱된 데 대한 비유다. 검은 돈을 벌게 되는 밀주업자와 도덕적 권위를 얻는 복음주의 교회. 대척점에 선 두 집단이 금주법을 지킨 아이러니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카토 보고서는 외부 경쟁자가 퇴출된 뒤 업계와 규제 기관, 정치인들끼리 기득권이 공고화됐다고 분석한다. 미 의회 16개 위원회와 6개 연방 기관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얽혀 존스법을 관리·감독하면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 후퇴 모르는 보호주의
현재 미국 해군은 노후화에다 유지·보수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존스법에 의거 수리를 하려면 미 본토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일이 소요되고 현지 조선소의 비용과 기술도 한계에 다다랐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지만 보호주의는 요지부동이다. 존스법을 완화하거나 폐지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대신 동맹국을 끌어들여 해결하는 임시방편이 동원된다. 한국과 일본 민간 조선소에까지 미 해군 함정 MRO를 맡기는 식이다. 경남 거제의 한화오션 등이 속속 미국 MRO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조선업 수주에 청신호이긴 하나 미국 정부가 자국 조선소와 일자리 보호를 핑계로 언제 돌변할지 몰라 안심할 수만은 없다. 취임 전부터 벌써 이차전지 보조금 폐지론을 흘려 한국 기업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약속했던 반도체 보조금도 마찬가지. ‘트럼프 2.0’ 행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를 핑계로 과거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 대처해야 한다.
■ 무역전쟁 불가피… 불확실성 커져
‘트럼프 2.0’ 행정부는 강경 보호무역주의를 공언하고 있다. 미국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징벌적 고율 관세를 무기로 삼겠다는 식이다. 선거 유세 때 국내 산업 보호와 해외에 뺏긴 일자리 회복을 위해 모든 수입품에 10~20% 관세를 매기겠다고 공약했다. 특히 중국에는 60% 관세를 물리겠다고 엄포를 놨다. 관세 부담을 안겨 생산 거점을 미국으로 옮기게끔 강제한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적 관세 장벽에 중국과 유럽은 보복할 것이고, 따라서 전 세계적인 무역전쟁은 불가피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무역전쟁이 발생하면 2026년까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1.3% 감소할 것으로 경고했다.
하지만 휘발유 세금을 올리면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에게 부담이 돌아가는 것처럼 관세 장벽의 부메랑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관세 전쟁의 효과 분석을 보면 결국 자국 기업과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콜롬비아대, 프린스턴대가 공동으로 발표한 <2018년 무역전쟁이 미국 물가와 복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고율 관세로 정부 세수가 늘긴 했지만 오른 세금만큼 제품 가격이 인상됐다. 결국 그 부담은 미국 기업과 소비자들에 고스란히 전가됐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와 관료 중 고율 관세 정책의 효율성에 찬성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트럼프 2.0’ 행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을 태세다. 이미 첫 번째 임기 때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돌연 탈퇴한 전력이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까지 탈퇴하는 초강수를 둘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자유무역주의를 무시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전면화할 것이다. 모순 덩어리인 존스법이 조선·해운업을 몰락시키고도 100년 넘게 건재하는 것처럼 미국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무너뜨릴 보호주의 깃발을 내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무역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벌써 전운이 감돈다. 미군 MRO 수주로 한국 조선업에 ‘반짝 호황’이 올 수는 있겠으나 나머지 산업 전반의 기상도는 흐림 일색이다. 수출 주도로 경제 성장을 일군 한국 경제 앞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장기 불확실성 시대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한국은 비상한 각오와 대비책이 필요하다.
2024-11-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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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은행 역대급 ‘이자 장사’ 누가 판 깔았나
최근 두 달에 걸쳐 국내 은행들의 당기순이익이 ‘역대급’을 기록했다. 거칠게 요약하면, 예금 금리는 내려가는데도 대출 금리는 되레 올라간 결과다. 예대 금리차(예금과 대출금리 차이)는 은행 수익성과 직결된다. 이 격차가 올해 하반기 들어 더욱 벌어지자 은행들이 가만히 앉아 배만 불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 배경에는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모든 피해는 이자 부담이 커진 서민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태가 심각하다.
■ 은행권 역대급 ‘이자 장사’
올해 하반기 들어 은행들은 시장 금리 인하를 반영해 예금 금리를 발 빠르게 내렸다. 지방은행이 먼저 시작했고 눈치 보던 시중은행이 나중에 가세했다. 그렇다면 대출 금리도 함께 인하하는 게 당연한데 웬걸 대출 금리는 오히려 인상하는 추세다. 정부가 가계대출 억제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예대 금리차는 지난 8월에 이어 두 달 연속으로 크게 벌어졌다. 덩달아 은행 수익도 크게 늘었다. 5대 금융지주사의 올해 3분기 누적 순이익은 16조 원 규모로, 2022년에 기록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3분기 누적 이자 이익 총액으로 따지면 37조 원을 훌쩍 넘기는 수준이다. 금리 조정에 따른 막대한 수익 논란에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눈총을 받는 이유다.
물론 대출 규제를 종용하는 정부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은행권의 고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측면을 감안한다 해도, ‘팩트’는 변하지 않는다. 막대한 이윤을 가져가는 것은 은행이요, 그만큼 이자 부담을 더 떠안는 것은 소비자라는 사실.
■ 이자 수익이 90%라니
어찌 보면 은행업이란 게 원래 그렇다. 돈으로 영업을 하는 일이라 ‘이자 장사’로 수익을 취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런데 왜 대중들의 시선은 곱지 않을까. 예금 금리는 시중 상황에 맞게 재빠르게 내리면서도 대출 금리는 정부 눈치를 보며 제대로 조정하지 않는 얄미운 행보 때문이다.
국내 은행권의 이자 이익 쏠림이 어느 정도인지는 외국 사례와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국내 4대 은행의 전체 영업이익에서 이자 이익이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90%에 달한다. 이자 이익 외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이와 달리 미국 4대 금융그룹(JP모건체이스·뱅크오브아메리카·씨티·웰스파고)의 이자 이익 의존도는 50%대에 머문다. 나머지는 투자를 통해 돈을 벌고 있다.
은행은 수익을 지향하지만 일반 사기업과는 성격이 다르다. ‘신뢰’와 ‘공공성’이 존립 근거인 만큼 사회적 책임 또한 요구된다는 뜻이다. 고금리 수익에만 목을 매는 방식은 지양하고 이자 이익 외의 영업 확대를 꾀하는 게 바람직하다. 고금리로 확보한 이자 수익의 규모가 크면 그 일부의 사회 환원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 오락가락 정부 정책도 한몫
은행 이자 수익의 확대는 이자율의 영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대출 총량의 급증에 따른 것이다. 지난 10월 기준으로 1년 새 늘어난 4대 은행의 대출 규모는 100조 원에 육박한다. 우리 사회의 빚이 눈덩이처럼 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대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 사회 구조적 문제를 상징하는 현상이다. 집값만 보더라도 소득으로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아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자영업자도, 기업체도 다르지 않다. 빚의 악순환에 대출만 계속 쌓이는 형국이다.
이렇게 빚지는 사회를 만들어놓은 정부는 대출을 풀었다 조였다 하는 단순 정책만 반복하고 있다. 그마저도 지난 1년간 잇단 실기(失期)로 점철됐다. 2023년 10월 윤석열 대통령의 지적에 따라 금융 당국은 대출 이자 부담을 낮추는 방안을 은행에 주문했더랬다. 은행이 마지못해 대출 금리를 내렸으나 정책 의도와 달리 부동산 시장이 출렁거렸다. 대출 규모가 급증하면서 부동산 거래가 늘어나고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다.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들의 금리 부담을 덜어주려던 취지가 현실에서는 엉뚱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둘러싼 논란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DSR은 대출자의 전체 금융 부채 원리금 부담을 소득 수준과 비교한 지표다. 금융 당국은 가계대출 억제를 위해 DSR을 강화하는 2단계 시책을 지난 7월에 시행하려다 2개월을 미뤘다. 그 사이에, 돈을 더 빌려놓자는 대출 심리가 자극받았고 실제로 대출 급증과 아파트 가격 급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융감독원이 정반대 카드를 꺼낸 것이다. 지난달부터 은행권에 대출 축소, 심사 강화 같은 강력한 규제를 요구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은행권의 역대급 이자 수익이다.
■ 서민들 고충 언제까지
정부가 가계부채 억제와 부동산 시장 활성화라는 상반된 정책을 동시에 펼친 탓이 크다. 창과 방패를 함께 쓰는 격인데, 당연하게도 시장은 혼란을 피할 길이 없다.
문제는 내년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정부가 서민 주거비 부담 경감 명목으로 내년에 55조 원 규모의 부동산 정책 상품을 공급하겠다고 밝힌 게 얼마 전이다. 그렇게 되면 올해도 동일한 현상이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가계대출 급증-부동산 시장 불안-은행권 이자 폭리로 이어지는 현실이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지금 정부가 모순된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이를 섬세하게 관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부동산 부양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정책 수정을 하지 않으면 가계부채, 은행권 이자 장사 등의 문제는 해소되기 힘들다. 무엇보다 서민들의 피해와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는지 그게 걱정이다.
2024-11-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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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플라스틱 종식 부산선언?
플라스틱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고 위험한 발명품이다. 기적의 소재로 불리며 우리의 일상과 산업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지만 이제는 악마의 물질로 취급받으며 지탄의 대상으로 변했다. 플라스틱 남용에 따른 환경오염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전 지구적 문제가 됐다. 마침 25일부터 부산 벡스코에서 유엔 플라스틱 국제협약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5)가 열린다. 플라스틱 오염에 대한 구속력 있는 국제협약을 만들기 위한 자리인데 이번 부산 회의가 마지막 정부 간 협상이어서 어떤 결론에 이를지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기적의 소재에서 악마의 물질로
플라스틱의 역사는 당구공에서 시작됐다. 1863년 뉴욕타임스에 당구공을 만들 물질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상금 1만 달러를 주겠다는 광고가 실렸다. 당시 당구공은 코끼리 상아로 만들었는데 당구 인기가 높아지자 무분별한 밀렵으로 코끼리 개체 수까지 줄어들고 당구공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것이다. 당시 미국 발명가이자 인쇄기술자 존 하이엇이 천연 합성수지 플라스틱 셀룰로이드를 이용한 당구공을 만들었다. 물론 너무 잘 깨져 상용화까지 가지는 못했다.
이후 1907년 미국 화학자 베이클랜드가 페놀과 폼알데하이드를 이용해 ‘베이클라이트’라는 물질을 만들었는데 이게 인공 플라스틱의 시초다. 플라스틱은 결합력 강한 탄소를 여러 형태로 결합해 만든다. 오늘날 대부분의 플라스틱은 석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를 이용해 생산하는데 에틸렌이나 프로필렌 같은 기초 원료를 만들고 결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탄소의 강한 결합력은 플라스틱이 쉽게 변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쉽게 분해되지 않고 썩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플라스틱 남용은 지구와 생명체를 병들게 하는 환경오염의 대명사가 됐다. 또 제조와 폐기 과정의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변화의 주범으로까지 부상했다.
∎2060년이면 연간 생산량 12억 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플라스틱 연간 생산량은 2020년 4억 3500만 톤이었는데 2040년이면 7억 3000만 톤, 2060년에는 12억 3000만 톤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연간 폐기량은 2020년 3억 6000만 톤에서 2040년 6억 1000만 톤으로 늘어난다. 반면 재활용률은 6%대에 불과하다. 바다와 강으로 흘러드는 플라스틱이 2040년이면 300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플라스틱 온실가스 배출량 비중은 전체의 3.8%지만 2050년이면 15%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코스타리카 해변에서 코에 빨대가 박힌 채 발견된 바다거북이, 뱃속에 플라스틱을 가득 삼킨 채 죽은 펠리컨, 생수병 뚜껑 고리에 입이 걸린 거북이는 플라스틱 환경오염을 고발하는 상징적 장면이 됐다. 태평양 심해에서부터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플라스틱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다고 한다. 바다로 흘러든 플라스틱으로 매년 바닷새 100만 마리와 해양 포유동물 10만 마리가 죽어 간다. 해양생물에 축적되고 대기에 부유하는 미세 플라스틱은 결국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강제력 있는 감축안 도출할 수 있나
세계 175개국 대표들은 2022년 3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유엔환경총회(UNEP)에서 급증하는 플라스틱 오염을 규제하기 위한 국제협약을 2024년까지 마련하기로 결의했다. 글로벌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2015년 파리기후협약 이후 최대 친환경 합의(그린 딜)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따라 구체적 협약안을 만들기 위한 정부 간 협상위원회 회의가 네 차례 진행됐고 부산에서 마지막 5차 회의가 열리는 것이다. 플라스틱 생산 규제, 우려 화학물질 규제, 문제성 플라스틱 규제 등이 쟁점인데 결국 정부 간 합의를 통해 강제적 플라스틱 감축 목표를 정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네 차례 회의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 입장 차가 여전히 커 합의에 이르기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플라스틱 생산 단계부터 감축해야 한다는 강성 그룹인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야심 찬 목표 연합(HAC)’과 재활용·폐기물 관리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약성 그룹 ‘플라스틱 지속가능성을 위한 국제연합(GCPS)’이 대립하고 있다.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 아프리카 도서국 등이 HAC에 속해 있고 러시아,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생산국과 산유국을 주축으로 GCPS를 이룬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의 정책 변화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환경단체들은 부산 회의를 앞두고 플라스틱 생산과 사용, 폐기 등 전 주기에 걸친 감축 목표와 구체적 로드맵을 설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 지속적이고 일관된 정책 중요
국가 간 논란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큰 틀의 시대적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플라스틱 산업과 사용 비중이 높은 우리로서는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세계 4위 에틸렌 생산국이고 석유화학이 국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주요 수출국이기도 하다. 친환경 플라스틱 연구개발, 고부가가치화 등 산업적 측면에서의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정부의 플라스틱 정책에 대한 중장기적 로드맵 수립과 일관되고 지속적인 추진이 중요하다. 정부가 플라스틱 빨대를 금지하고 종이 빨대로 전환했다 다시 빨대 등 1회용품 규제 의무를 해제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과정에서 산업계와 자영업자, 소비자들이 겪었던 혼란을 다 기억할 것이다. 정부는 정부 간 플라스틱 협상 과정에서도 당초 플라스틱 생산 감축안에 부정적이거나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최근 부산 회의를 앞두고 감축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부산 회의를 계기로 플라스틱에 대한 전향적 정책 전환과 산업 혁신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2024-11-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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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주 6일 근무냐, 주 4.5일 근무냐
우리나라에 주 5일 근무가 도입된 때가 2002년 4월.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당시 정부 부처에 시범 도입된 이 제도는 이후 2004년부터 1000명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됐고 2011년 7월부턴 5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도 적용됐다. 주 5일제 시행은 여가 확대 등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주 5일제에 최근 균열이 생기고 있다. 주요 대기업이 임원들을 대상으로 주 6일제 근무를 확대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반대로 주 4.5일제 근무가 일부 지자체를 중심으로 도입되고 있다. 사회의 각 영역에 따라 주간 근무 형태도 분화하고 있는 셈이다.
■ 대기업은 주 6일, 지자체는 주 4.5일
올해 4월부터 삼성그룹 임원진은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를 선택해 출근을 시작했다. 전반적인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회사 경영의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임원들이 근무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그룹에서 따로 지침을 내리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마 회사 분위기상 ‘계약직’인 임원들이 주말 근무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조직과 실적 관리가 엄격하기로 이름난 삼성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 여겼던 주 6일 근무가 최근 들면서 다른 대기업으로 점차 확산하는 추세다. SK이노베이션은 이달부터 임원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 ‘커넥팅 데이’를 시작한다. SK이노베이션 임원 50여 명과 SK에너지·SK지오센트릭·SK엔무브 등 계열사 임원들이 토요일 오전 회사로 출근해 전문가 강연이나 워크숍을 한다는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 측은 통상적인 주 6일 출근과는 다르다고 강조했지만 어쨌든 토요일 출근 자체가 회사 임직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조직 내부의 기강이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회사 차원의 조치로 여겨질 수 있다. 게다가 국내 굴지의 기업이 비록 임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지만 주 6일 근무 확산은 다른 기업에도 연쇄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의 주 6일 근무와 정반대의 기류도 늘고 있다. 바로 주 4.5일 근무인데, 특히 관공서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강원도 정선군이 올해 9월부터 4개월간 주 4.5일 근무를 처음 시작한 이후 경기도가 광역지자체 차원에서 강력하게 이 제도의 도입을 검토 중이다. 공청회 등 관련 절차를 밟는 중으로 내년 3월 시범 추진 일정까지 밝힌 상태다. 이 외에도 금요일 오후 퇴근, 유아 자녀를 둔 직원들의 주 4일 출근 등 각 지역 사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4.5일 근무 형태가 출현하고 있다.
■ 주간 근무 형태도 양극화?
대기업 임원들의 주 6일 근무는 아무래도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임원들의 주말 업무를 위해서는 실무 담당자들의 보좌·협조가 필수적인데, 이미 직원들의 주말 근무가 불가피해진 곳도 있다고 한다. 급변하는 기업 환경 변화에 대응한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간다고 해도 20년 만의 주말 근무가 아무래도 우리나라 직장 문화를 더 경직되게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과 여가의 균형을 추구하는 시대 흐름과도 어긋난다.
특히 지자체를 중심으로 주 4.5일 근무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과 일반 관공서의 주간 근무 형태가 확연히 갈라지는 현상을 국민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주목된다. 이미 주 5일 근무가 대세로 굳어진 상황에서 여건 변화를 이유로 주 4.5일 근무와 6일 근무가 양립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지도 논쟁거리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핵심적인 가치를 놓고 노동계와 재계, 국민들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일 가능성도 높다.
예나 지금이나 휴식과 노동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 늘 최고의 고민거리였다. ‘아포리아’, 어쩌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일 수도 있다. 다만 둘 중 어느 것도 희생할 수 없는 만큼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 맴도는 일이 인류의 몫인 듯싶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4-11-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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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5060 남자는 외롭다
■홀로 살다 쓸쓸히 죽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홀로 죽음, 즉 고독사를 맞은 사람이 3700명에 이른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7일 발표한 ‘고독사 사망자 조사 결과’에 나타난 수치다. 그런데 고독사한 이들의 54%가 50~60대(이하 5060) 장년층 남성이다. 5060 여성 고독사 사례는 남성의 5분의 1 정도에 그친다. 5060이면 삶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인데, 왜 이 시기에 유독 남성의 고독사가 많을까.
고독사는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사회적 고립 상태로 생활하던 사람이 자살, 병사 등으로 임종을 맞이한 경우를 칭한다. 이는 ‘고독사 예방법’에 규정된 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사회적 고립 상태’다. 고독사가 늘어나는 주요 원인으로 1인 가구, 즉 홀로 사는 사람의 증가를가 꼽힌다. 하지만 혼자 살지 않더라도 심리적으로든 어쨌든 주변인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사회적 고립 상태다. 관계가 끊어졌음은 곧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처지라는 말이다.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 증가 속도도 5060 남성에서 특히 빠르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자살률은 지난해 27.3명으로 전년 대비 평균 2.2명(8.5%) 늘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50대와 60대 남성의 증가폭이 각각 4.9명(11.6%)과 5.2명(12.6%)으로 평균치를 크게 웃돌았다. 5060 남성에게서 고독사가 많고 자살률이 높다는 건 그만큼 이들이 외로움에 겨워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외로움에 부서지다
남자 나이 50줄에 들어서면 사회생활의 정점을 지나게 되고 일의 중심에서 밀려나면서 박탈감이나 소외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형편에 실직이나 퇴직, 사업 실패 등을 겪고 가정까지 파탄에 이르면 자의든 타의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진다. 경제적 궁핍 역시 위험 수준에 이른다. 지난해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람 중 86%가 50대 이상 장년이고, 이 가운데 60% 이상이 홀로 사는 남성이라는 통계도 있다. 생물학적으로도 50대가 되면 남성 호르몬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에 안 좋은 변화를 겪는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조사에 따르면 남성 호르몬이 부족한 남성의 56%가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5060 남성들은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주변에 도움 청할 줄을 모른다. 설사 자존심과 체면을 제쳐두고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도 딱히 요청할 데가 없다. 관계의 끈이 약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맺어졌지만, 일을 그만두거나 줄인 후에는 그런 관계가 필연적으로 줄어든다. 여성들이 직장은 물론 지역 공동체에서도 개인적인 교류가 활발한 것과는 달리 남성들은 직장 등 조직 이외의 관계에는 익숙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비근한 예로, 흔한 교류의 장소인 카페를 가장 적게 이용하고 카페에 들어가더라도 가장 빨리 나가는 이들이 5060 남성이라는 보고도 있다. 요컨대 5060 남성은 외로움에 가장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 것이다.
■동년배 보며 그나마 위안?
5060 남성의 고독사와 자살과 관련해 전문가들의 진단과 처방은 이미 숱하게 나와 있다. 국가와 지역공동체가 사회안전망을 더욱 촘촘하게 다져야 한다거나, 청년·노인층과는 달리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5060 남성을 위한 맞춤형 예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사회적 연결을 복원시켜 줘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원론적인 논의에 그치는 것들이라 정작 5060 남성들의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고독사나 자살 같은 극단적인 경우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5060 남성들은 문득문득 외로움을 절감한다. 그럴 때마다 친구라도 찾자 싶어 전화기를 들지만 이내 머쓱해진다. 오랜 친구들은 가까이 없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오래 두고 사귀지 않아 깊은 정이 없다. 일로 만난 지인은 결국은 일 때문에 만날 뿐, 일이 끝나면 서로 보지 않을 사이다. 도대체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하는 생각에 속으로 쓴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 5060 남성도 많다”고 힐문하면 딱히 대꾸할 말이 궁색하겠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스침은 어찌할 수 없다.
그나마 한 줄기 위안은 있겠다. 자기가 그런 것처럼 외로움에 겨워하는 비슷한 처지의 5060 남성들이 옆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쓸쓸히 삶을 이어가는 ‘또 다른 나’를 바라보며 술잔이나 기울일 밖에!
2024-10-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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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1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Hamas) 전쟁이 1년을 넘었다.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한 분쟁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에 이어 이란의 대리 세력인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및 이라크의 친이란 시아파 군벌의 참전과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습으로 확전됐다. 이스라엘은 지난 7월과 9월 이란과 레바논 영토에서 하마스 정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와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를 각각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32년간 헤즈볼라의 수장이었던 나스랄라의 죽음, 연이은 최고 지도부의 피살로 헤즈볼라는 리더십을 상실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서로 직접적으로 보복 공격을 감행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이 임박해지면서, 하마스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쟁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디지털 트로이 목마’ 등장
새로운 공격 수단이 등장했다. 이스라엘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무선호출기 수천 대를 동시에 폭발시키면서 무기로 활용했다. 9월 17일 레바논 전역에서 헤즈볼라가 사용하는 무선호출기가 연쇄 폭발해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2800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9월 18일에는 무전기 폭발로 20명이 사망하고 450명이 부상했다. ‘디지털 트로이 목마’로 호칭되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가 가시화된 것이다.
디지털 트로이 목마 사건은 헤즈볼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다. 헤즈볼라 최고 지도자와 상당한 양의 무기가 일시에 제거되면서 전쟁의 상황, 중동의 세력 균형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스라엘로서는 ‘당신들이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다 보고 있다’라는 정보력을 과시한 셈이다. 이번 공격으로 헤즈볼라 내부는 물론이고, 이란 등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차질을 빚게 됐다. 헤즈볼라는 지휘·통신 라인이 붕괴된 탓에, 비축해 둔 미사일과 로켓을 이스라엘에 전략적으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리전’의 몰락, 전면 나서는 이란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의 발단인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은 이란이 그린 큰 그림에 따라 대리 세력들이 지원하고, 하마스가 행동으로 옮긴 ‘계산된 모험’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란은 수십 년 동안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이란은 지난 40여 년간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앞세우고 자신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대리전, 즉 ‘그림자 전쟁’을 전개했다. 대리전쟁이란 한 국가가 직접 전쟁을 하지 않고, 그 우방국 또는 기타 국가나 집단이 대신하여 타 진영이나 다른 국가와 싸우게 하는 전쟁을 뜻한다.
실제로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이란과 테헤란의 정권에 대한 대리인, 보험의 성격이었다. 이스라엘과 갈등에서 이란의 ‘국가 보험’ 역할을 했던 헤즈볼라는 예멘에서 후티족을 훈련시키고,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조력했다. 중동 전역의 다른 분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란은 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헤즈볼라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대리인으로 활용했던 헤즈볼라 지도자부터 총사령관, 정예부대 수뇌부까지 대거 제거되면서 해당 보험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된 상황이다.
■이스라엘, 어디를 어떻게 더 세게 반격하나?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궤멸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이란은 지난 1일 미사일 180발을 이스라엘을 향해 발사했다. ‘약속 대련’ 느낌의 보복마저도 실패로 끝났다는 평가다. 상당수 미사일이 발사 단계 또는 비행 도중에 실패한 것으로 관측됐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는 공격 직후 “이란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무기체계에서 압도적 우위를 과시하고 있다. 이미 지난 4월 1차 공격에서 이란의 대공미사일 시스템과 방공망을 무력화했다. F-35 라이트닝 스텔스 전투기와 첨단 탄도미사일 체제로 이란 전역을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한 셈이다. 또한, 헤즈볼라가 이란에게서 받아 비축한 미사일과 로켓 12만~20만 기 중 상당수가 파괴되면서 이란으로서는 대리인을 통한 협공 수단이 애매해졌다.
이제 최종 반격에 나설 이스라엘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미국 대선 전에 이란 공격을 감행하고, 공격할 표적을 결정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란에 곧 대응할 것"이며 "정확하고 치명적인 대응"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스라엘로서는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이 정리되면서 방어 위주에서 최대 공격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이제는 ‘어디를, 얼마나 세게 공격하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미사일 생산기지와 우라늄 농축시설 타격 등 어려운 군사작전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체 GDP의 20%를 차지하는 페르시아만 정유시설, 원유 수출 터미널 등 경제 인프라까지 보복 대상에 올려놓고 있다. 또한,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제거하거나 신정 정권에 타격을 주는 등 다양한 공격 방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 전문가들은 “이란에 대한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이란의 전쟁 의지를 꺾을 수 있는 대담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이란 정권이 국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것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심상치 않다는 관측도 한 배경이다. 실제로 네타냐후 총리는 이란 국민을 상대로 “이란 정권이 핵무기와 외국 전쟁에 낭비한 막대한 돈을 모두 당신들 자녀의 교육, 건강, 국가 인프라, 물, 하수 등 필요한 것에 투자했다고 상상해 보라”는 내부 분열용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있다. 이란을 안팎에서 흔들려는 전략이다.
이스라엘은 이란 정권 교체, 핵시설 파괴 등이 힘들다면 최소한 레바논과 접경지역인 이스라엘 북부지역의 피란민 6만여 명을 귀환시키겠다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는 구소련과 동유럽 출신 유대인 인구 유입이 급증했다. 이들의 정착촌 확보를 위해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 지역에서 헤즈볼라의 완전한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스라엘로서는 북부 접경지역에 안전지대를 만든 뒤, 자국 피란민을 복귀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어떤 경우든 이스라엘로서는 군사력을 투사해 중동의 판도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활용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2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이 변수
이스라엘은 중동전쟁으로 확전되는 것을 극구 만류하는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을 갖고 있다. 11월 5일 미국 대선까지 2주 남짓 남았다. 미국의 권력 교체기에 이스라엘을 통제할 국제적인 외교 수단조차 없다. 설령 이스라엘이 핵과 정유시설 파괴 등 ‘과도한 보복’을 해도, 대선이 코앞인 미국 정치권에서 구두 비판 외에 적극적으로 막아설 의지나 여유, 주체가 불분명하다는 뜻이다. 이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미국 대선 이전에 이란 공격을 감행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 싱크탱크(The Washington Institute for Near East Policy think tank) 연구 책임자인 데이나 스트룰 전 미국 국방부 중동 담당 차관보는 최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은 지금이 중동 지도를 재편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역량과 리더십을 계속 발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리더십 소멸로 새로운 중동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라고 분석했다.
■이란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이란은 지난 40여 년간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미국을 중동에서 몰아내는 것을 정권의 핵심 이익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포대와 이를 운영할 약 100명의 군인을 추가로 파견했다. 두 개의 항모전단이 지중해에 배치되는 등 미군의 개입이 훨씬 많아지고 있다. 현재도 이라크와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 미군 4만 명이 주둔하고 있다. 쿠웨이트에서 오만에 이르기까지 아라비아반도에는 미군기지들이 배치돼 있다. 이란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상황이 질주하고 있는 셈이다.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미국의 유일무이한 중동 교두보인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란의 개혁·개방과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 회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현재의 전쟁 상황은 이란과 미국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안 교수는 “하마스가 시작한 갈등의 파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지켜봐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중동 사태가 주는 시사점
이란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대만해협, 한반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무기 재고가 소진되고, 추가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이란의 입장에서 러시아와 주변 집단에 대한 무기 지원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란의 탄도미사일 비축량과 이란제 드론이 1, 2차 공격과 예멘 후티 반군과 헤즈볼라 무기 지원으로 바닥을 보이게 되면, 북한에까지 손을 내민 러시아로의 무기 수출은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 결국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국가 간 관계여서 중동의 대리전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러시아와 중국도 북한을 이용한 동북아시아 대리전 전략의 효용성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 전쟁에서 보듯 대리전쟁 전략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시사점을 주기 때문이다. 향후 국제 정세의 변경에 따라 이들 국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보복을 선언한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파괴하는 시도를 한다면, 북한 입장에서도 상당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는 기고문에서 “깡패 국가는 몽둥이에만 반응한다”며 “지금이야말로 누군가 이란 핵시설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할 때이며, 그게 이스라엘일 수 있다”라고 했다. 강경파 입장에서는 북한을 떠올릴 수도 있는 솔깃한 대목이다. 그만큼 한반도 위기의 변동성에도 영향을 준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
전쟁 발발 1년이 지나면서 전 세계인이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와 고향을 떠나야 하는 난민의 상황에 둔감해지고 있다. 전쟁과 봉쇄로 인해 사실상 감옥으로 변해버린 가자지구 상황은 이젠 언론에도 띄엄띄엄 보도되는 실정이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지상전이 이어지면서 레바논 주민 120만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이 전쟁터에 갇힌 것이다. 또한, 1년 전 하마스의 불시 공격으로 이스라엘인 1200여 명이 숨졌다. 또, 붙잡혀간 인질 100여 명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이번 중동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024-10-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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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그냥 쉬는’ 청년 세대
중국의 Z세대 뤄화중(駱華忠)은 초경쟁 사회에서 ‘번아웃’됐다고 느꼈다. 31세이던 2021년 4월 회사를 그만 두고 ‘탕핑’(躺平)주의 선언을 블로그에 올렸다. 탕핑은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신조어다. 뤄화중은 쓰촨(四川)성에서 티베트까지 2000㎞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2년이 넘도록 직업이 없어 놀고 있지만 잘못됐다는 생각은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미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탕핑이 정의다”(Lying flat is justice)라고 말한 뒤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탕핑족은 중국의 청년 세대에 주어진 극도의 경쟁 환경에 대한 반발감에서 생겨났다. ‘996’으로 대표되는 과로 사회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중국 회사들은 법정 근무 시간을 어긴 채 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 근무제를 강요하는 게 예사다. 이런 가혹한 직장 문화와 함께 21%가 넘는 높은 청년 실업률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짓누르고 있다. 모진 사회경제적 조건이 강요되고 있으니 MZ세대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성공에 대한 강박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안분지족, 즉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오는 것이다. 탕핑은 단순히 구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사회의 압박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발전했다.
졸업 후 취업을 통해 기성 사회로 편입되는 전통 경로를 벗어나는 현상은 중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영미권의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일본의 ‘사토리 세대’(悟り世代)는 직장에서 희망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국의 ‘N포 세대’와 유사하다. 한데, 최근 고용 통계에서 청년 세대의 ‘쉬었음’ 비중이 역대 최고를 기록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취준’도 아닌 자발적인 ‘백수’ 상태의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사회 현상이다. 해석과 대책이 필요한 대목이다.
■ 쉬는 청년 46만 명 역대 최고 수준
통계청의 8월 고용동향을 보면 15~29세 청년의 ‘쉬었음’ 인구는 지난해 8월(40만 4000명) 대비 13.8% 늘어난 46만 명이다. 또래 인구 집단의 5.3%를 차지하는,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규모다. 직전 6월 42만 6000명, 7월 44만 3000명과 비교해도 확연한 증가 추세다. 2016년 8월 24만 5000명에 비하면 무려 87.8% 폭증했다. 이후 2017년 8월 29만 6000명, 2019년 37만 8000명 등 증가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비대면, 휴업이 늘면서 비정상적인 폭증이 있었다. 2020년 8월 46만 7000명, 2021년 44만 5000명. 팬데믹 종료 후 ‘그냥 쉬는’ 청년 인구는 원상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내 반등세로 돌아서 역대 최고치 수준을 기록한 것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통계청 고용 조사의 ‘쉬었음’ 항목은 질병이나 장애가 아닌 이유로 구직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쉬는 경우다. ‘쉬었음’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돼 실업률 통계에서 빠진다. 실업자로 분류되면 구직 활동을 하는 경우지만 ‘쉬었음’ 청년은 취준생조차 아닌 상황을 의미한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구직을 단념하고 고용시장 밖으로 이탈하려는 추세가 강화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8월 청년 고용률은 46.7%로 역대 최고치였다. 청년층 고용지표는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실상은 플랫폼 고용이나 단순 노무직 증가가 두드러진 결과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었다고 보기 어렵고, 일자리 미스매치와 고용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그냥 쉰다’는 청년 증가세를 허투루 봐서는 안 된다.
■ ‘그냥 쉬는’ 세대 이해하기
영미권에서 Z세대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미로 ‘눈송이’(snowflake)란 속어가 쓰인다. 회사에서 불평만 터뜨리는 젊은 세대가 눈송이처럼 연약하고 쉽게 바스러진다는 뜻이다. 나약하고, 예민하고 한심한 존재라는 의미의 비아냥이다. <꼰대들은 우리를 눈송이라고 부른다>의 저자 해나 주얼 미국 워싱턴포스트 비디오저널리스트는 눈송이 세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부당한 지시에 항의하고,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고,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주저 없이 사표를 던진다.
직업에 대한 가치관이 기성세대와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 2일 지역노동사회연구소 주최 ‘지역 청년 일자리 및 유출 현황과 과제’ 세미나에서 2030세대 815명 중 51.5%가 ‘프리터’(freeter)가 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설문 조사가 발표됐다. 프리터는 고정된 직장을 갖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면서 생계를 잇는 사람을 말한다. 학업과 취업의 과도한 경쟁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위험 수위에 다다른 결과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라이프 사이클에서 젊은 세대의 이탈이 시작됐다고 봐야 된다.
■ 변화 받아들이고 사회도 바뀌어야
탕핑의 기수 뤄화중은 기성세대가 정해 놓은 규칙을 박차고 나가자고 선언했다. 아마도 그전에 무수히 많은 문제 제기를 했으나 기성세대는 귀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대한 절망이 결국 사회 밖으로의 탈주로 나타났으리라.
뤄화중이 비판하는 ‘숨막히는 경쟁과 위계 사회’에서 한국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국 청년 세대의 ‘쉬었음’ 급증 현상을 한국판 탕핑으로 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이유다. 개인적인 나약함이나 부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규직, 대기업에 높은 임금이면 야근이나 주말 근무, 위계나 부당한 관행이 강요되는 직장 문화가 당연시되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 세대는 차라리 ‘쉬었음’을 선택한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수평적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기성세대에 거슬리는 언행을 할 가능성도 높다. 이들을 별종 인간으로 취급해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해결책에 다가갈 수 있다.
쉬는 청년들을 사회에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책은 기성세대가 쥐고 있다. ‘눈송이’라고 비꼬거나 낙오자로 취급하는 대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쉬었음’을 선택하면서 무언의 외침을 하고 있다. 이들을 고독과 은둔의 세상에 방치하면 세대 간 괴리가 커지고, 사회 불안 요인으로 이어진다.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걸린 문제다. 그들이 사회로 나올 수 있는 통로를 열어야 한다.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2024-10-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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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일궈온 ‘문화도시 영도’ 헛되게 하지 마라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2019년 부산 영도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제1차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됐다. 지난해 9월 7~10일 영도구는 전국문화도시 의장도시 자격으로 봉래동 물양장에서 ‘2023 전국문화도시 박람회 &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김기재 영도구청장은 “영도 문화도시 사업이 종료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조직과 공간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며 “이는 자발성에 기반한 문화도시 사업의 발전 가능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영도구청은 내년부터 이 사업을 주관한 영도문화도시센터 예산을 편성하지 않겠다고 밝혀 ‘문화도시 영도 사업’이 종료 위기에 처했다. 만약 김 구청장이 언급한 조직과 공간이 혹여 ‘영도문화도시재단’ 설립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재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기에 문화도시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문화 지속성의 관점에서 영도 문화도시 사업을 절대 일몰(종료)해서는 안 된다. 사업 종료만이 능사가 아니다.
■문화도시 영도 5년간의 성과
영도구는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되면서 2020년부터 5년간(내년 2월 종료) 총사업비 160억 원(실제 집행은 140억 8000여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이 예산은 국비 50%와 시비 및 구비 각각 25%로 구성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영도문화도시센터는 구민을 주요 문화 주체로 삼아 문화 자생력을 키우고, '예술과 도시의 섬, 영도'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고령화, 청년 감소, 환경오염 문제를 문화 프로젝트로 해결하고, 지역 이미지 개선을 위한 브랜딩 사업을 통해 주민들에게 영도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자 했다.
지역 예술가들이 문화도시 사업을 계기로 협업하고, 어르신들은 산복도로, 깡깡이마을, 흰여울마을, 동삼동 등지에서 글쓰기, 그림 그리기, 도자기 만들기, 노래 부르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센터에서 주도한 각종 문화 사업은 지역 주민들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중요한 마중물이 됐다.
이전에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영도구 대평동 일대에 문화 예술을 입힌 깡깡이 예술마을 프로젝트 등 일련의 문화사업이 있었지만, 5년간의 법정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는 놀라웠다. 영도구의 특성을 살린 시각 브랜딩과 글자체(영도체) 개발로 국내 최초 세계디자인어워드 4관왕에 올랐고, 방문 예술활동·예술치유 공간 운영으로 외로움 완화에 기여해 문체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영도 기획자 학교를 운영하며 매년 30건 이상의 문화 창업 지원, 영도 문화유산 자료를 담은 아카이브 개설, 어린이 문화활동 거점 공간 조성, 깡깡이 예술마을 투어 프로그램 운영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3월에는 전국 24개 문화도시 중 ‘최우수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업을 주관한 영도문화도시센터에 대한 평가도 놀랍다. 첫해인 2020년 미흡(3등급)에서 2023년 최우수(1등급)로 평가가 상승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는 주요 도시 지표로도 확인됐다. 문화 분야 사업체 수와 거주 예술인 수가 크게 증가했으며, 2023년 부산사회조사에서는 구민의 문화여가시설 및 여가 활동 만족도가 원도심 중 1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많은 지역 주민이 “문화도시 사업 덕분에 영도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았다.
이처럼 문화도시 사업으로 지역 이미지를 향상하고 주민 삶을 개선하는 성과를 냈음에도 사업 종료 결정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사업은 종료하면서, 재단은 만들겠다고
지난달 20일 열린 ‘2024년 영도문화도시 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영도구는 문화도시 사업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추진위원들은 사업의 지속성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영도구는 “내년부터 정부 지원 예산이 없다. 문화도시 사업을 계속하려면 자체 예산을 투입해야 하지만 재정 여건 등의 현실적인 어려움이 일몰의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김태만 추진위원장은 “사전 논의 없이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전했다.
영도구는 연간 30억 원의 예산 중 7억 5000만 원을 분담해왔으나, 이마저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영도구의 재정자립도가 9.3%로 열악한 점은 이해할 수 있지만, 9개월 전에는 영도문화도시재단을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만큼, 단순히 예산 문제로 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도문화도시재단 설립의 취지는 좋지만, 초기 비용과 운영비가 더 많이 드는 재단 설립이 오히려 센터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 이쯤 되면 구청의 예산난은 단순히 핑계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이 든다. 향후 재단을 설립하더라도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를 고려했을 때 영도문화도시센터는 지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재단으로 흡수·전환되는 게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문화는 지속성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문화도시 사업은 첫 5년이 끝난 후 지자체가 예산과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이를 알고 있는 영도구가 지난 5년간 후속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영도의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와 기여를 무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지역 주민과 문화 활동가들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역 문화 발전이 저해될 수 있다. 문화도시 사업이 종료되면 그동안 쌓아온 유·무형의 성과가 사라질 위험이 있다. 주민들과의 관계를 형성해온 만큼, 종료 결정은 지역 사회의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주민들은 사업 종료 소식에 반발하고 있다. 김지영 영도구 의원은 “문화도시 사업을 계속할 의지가 있다면 일몰을 선언할 것이 아니라 지방 소멸 대응 기금을 활용한다든지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 게 맞다”고 얘기한다. 부산문화재단과 부산시도 영도 문화도시 사업 활성화에 관심이 있어 얼마든지 연계도 가능하다.
■영도문화도시센터 가치 인정받아야
도시는 에너지가 넘칠 때 매력적이다. 도시는 사람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이에 부합하는 매력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도시의 고유한 역사와 환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할 때, 도시는 활력이 넘친다. 영도문화도시센터는 영도의 역사와 자연을 활용해 지속 가능한 문화유산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센터는 이를 통해 영도를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변화시켰다. 앞서 언급했던 성과가 이를 말해 준다.
영도 문화도시 사업은 전국적으로도 우수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주민 80%가 정책 지속을 원하고 있다. 김지영 의원은 이 사업이 영도와 같은 소멸 도시에서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업 진행 중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영도는 새로운 문화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플랫폼과 인적 자원을 구축했다. 지난 5년간의 성과가 모두 사라질 경우, 문화정책의 특성상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지난 5년의 문화도시 사업으로 도시·문화적 자본이 축적됐다”며 “이 자본을 어떻게 활용할지 이제 고민할 때”라고 얘기한다.
문화 정책은 장기적 비전과 일관성이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주민과 문화 단체에 혼란을 주고 안정적인 문화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영도 문화도시 사업은 지역소멸 등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서도 지속되어야 한다. 센터는 영도 문화도시 사업을 지속가능하게 해 준 ‘중심 앵커’였다. 5년간 지역 문화에 기여한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전국적으로도 우수 사례로 손꼽히는 영도 문화도시 사업이 단지 재정적 이유로 중단된다면 이를 지속시키기 위한 재원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이를테면 지역 기업과의 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자금을 유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주민 참여 기금 조성이나, 영화 촬영 장소 제공과 같은 수익형 사업도 고민해 볼 수 있다.
국비 지원이 사라진 상황에서 영도문화도시가 어떻게 성과를 이어갈지 부산 시민들은 주시한다. 아직 여지는 있다. 일몰 결정이 나도 12월까지 예산을 수립하면 지속 가능하다.
그동안 영도구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만들어온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가 이어지도록 영도구청의 정책 변화와 함께 예산 배정을 촉구한다. 문화는 도시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주는 주요한 요소다. 또 도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활기차게 미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자 가치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고 활기차게 하는 힘은 바로 문화에서 나온다. 영도구청의 사려 깊은 결정을 기다린다.
2024-10-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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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로또 당첨금 ‘얼마면 되니’
로또의 상징성은 ‘인생 역전’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비루한 일상과 불안한 미래를 한 방에 반전시킬 수 있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 로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로또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또에 당첨됐는데 집 한 채도 살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다. 최근 1등 당첨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당첨금이 3억 원 남짓에 불과하자 이게 무슨 ‘인생 대박’이냐는 볼멘소리까지 들린다. 결국 정부가 로또 당첨금 규모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에 나선다고 한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생각함 홈페이지를 통해 ‘로또복권 1등 당첨금 규모 변경,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는 제목의 설문조사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국내 로또 발생 초기 사행성 논란
로또(lotto)는 이탈리아어로 행운을 의미하는데 ‘제비뽑기’를 뜻하는 라틴어 롯(lot)에서 유래했다. 복권을 뜻하는 영어 로터리(lottery)도 이 말에서 나왔다. 1530년 이탈리아 제노바공화국에서는 90명의 정치가 중 추첨을 통해 5명의 대표의원을 선출했는데, 이를 본떠 피렌체 지방에서 90개의 숫자 중 5개를 추첨하는 ‘5/90 로또 게임’이 생겨났다. 당시 도시국가였던 피렌체는 공공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번호추첨식 복권인 ‘피렌체 로또’를 발생했는데 이게 근대적 의미의 복권 시초다.
우리나라에서 로또가 처음 발행된 것은 2002년 12월 2일의 일이다. 당시 로또 가격은 게임당 2000원이었다. 1등 평균 당첨금이 35억 원을 웃돌았고 무제한 이월 규정으로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수백억까지 손에 쥘 수 있었다. 2003년 4월 12일, 당첨금 이월로 1등 당첨자 한 명이 사상 최대인 407억 2000만 원을 차지하면서 그야말로 ‘로또 광풍’이 불었다. 정부는 사행성 논란이 거세지자 로또 당첨금 이월 횟수를 제한하고 2004년 8월 한 게임당 가격을 2000원에서 1000원으로 내렸다.
∎인생 역전 퇴색된 우리나라 로또
로또는 사실 정해진 확률 게임이다. 우리나라 ‘로또 6/45’는 1부터 45까지의 숫자 중 6개를 고르는 방식이다. 1등 당첨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이다. 1만 6000년 동안 빠지지 않고 매주 10장씩 구입해야 1등에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이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데 내가 당첨될 확률이 거의 없지 거의 매회 당첨자는 나온다. 현재 로또는 회당 약 1억 1000만 건이 판매돼 1등 당첨자는 평균 12명, 1인당 1등 당첨 금액은 평균 21억 원 수준이다. 당첨자가 무더기로 나오면 당첨금은 크게 줄어든다. 7월 13일 제1228회에는 1등 당첨자가 무려 63명이 나왔다. 1등 당첨금은 4억 1993만 원(실수령액 3억 1435만 원)에 불과했다. 인생을 바꾸기에는 턱없는 수준이다. 로또 발행 20년 동안 3억 원이던 서울의 평균 집값은 13억 원으로 4배가량 뛰었다.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자산 가격은 크게 올랐는데 로또 당첨금은 제자리걸음이니 대박의 꿈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미국 로또인 파워볼의 경우 조 단위 당첨자 탄생으로 화제가 되곤 한다. 파워볼은 1부터 69가 적힌 흰색 공에서 5개, 1부터 26이 적힌 붉은색 공에서 1개를 선택하는데 이를 모두 맞히면 1등이다. 파워볼 잭팟 확률은 2억 9220만 1338분의 1이다. 우리 로또보다 36배나 어렵고 이월 제한이 없다 보니 당첨자 없이 상금이 이월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조 단위 당첨금도 가능하다. 결국 확률 게임이다.
∎ 명당론·번호 예측 과학적 근거 없다
로또 무더기 당첨이 나올 때마다 조작설이나 음모론이 확산하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다. 로또를 구입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굴절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위 ‘로또 명당’도 마찬가지다. 로또 추첨일이 가까워질수록 전국의 로또 명당에는 긴 줄이 이어진다. 그러나 로또 명당도 구매자 비율에 따른 상대적 확률일 뿐 크게 유의미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전국의 로또 명당을 표본 분석한 결과 전체 매출액과 당첨자 비율에 있어 일반적 로또 판매점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로또 명당 주인이 로또 맞았다는 말이 맞는 셈이다.
독특한 알고리즘으로 당첨번호를 맞출 수 있다며 로또 마니아들을 유혹하는 예측 업체도 마찬가지다. 2022년 6월 있었던 1019회차 로또 1등 당첨자 가운데 42명이 수동으로 번호를 맞췄는데 당첨번호 예측 업체에서 1등 당첨번호의 6개 숫자를 분석해 내놓은 번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출연 빈도를 이용한 로또 번호 예측은 이미 로또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상식이 된 이야기지만 이 또한 검증되지 않았다. 출현 횟수가 상위에 속하는 숫자와 그렇지 않은 숫자의 출현 빈도 차이가 유의미할 정도로 크지 않다. 로또 당첨번호는 애초에 정보가 없는 수열에 불과할 뿐이다.
∎당첨 확률 낮추거나 게임비를 올리거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복권 당첨금에 대한 여론 수렴에 들어간 만큼 어떤 방향으로 개편안이 나올지 주목된다. 로또 당첨금 개편은 당첨 확률을 낮추거나 게임비를 올리는 방안이 대안으로 이야기된다. 서울대 통계연구소는 1~45에서 6개의 번호를 고르는 것에서 1~70에서 6개의 번호를 고르는 것으로 바꾸면 1등 당첨 확률이 1억 3111만 5985분의 1로 약 16배 낮아져 당첨금이 높아지는 효과로 이어질 것이라 했다. 조세재정연구원은 게임당 가격을 1000원에서 2000원으로 상향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세금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3억 원까지 22%, 3억 원을 초과하면 33%의 세금을 부과하는데 이를 낮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24% 세율로 원천 징수하고 추가로 주정부가 별도 세금을 가져간다. 반면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캐나다 호주 일본 등 국가에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꿈에는 세금이 없다’는 말인데 로또 마니아들은 퇴색한 인생 역전의 의미를 보완할 현실적 대안으로 주장한다.
복권위는 다음 달 25일까지 설문조사 결과와 전문가 의견을 취합해 당첨구조를 손질한다는 계획이다. 기재부 내에서는 현 당첨금 수준이 적정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으로 알려져 개편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사행성 조장이나 근로 의욕 감퇴 등 부정적 여론도 부담이다. 하지만 로또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해 개편 목소리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로또는 사는 순간 절반을 손해 보는 게임이다. 이런 수학적 명징성에도 불구하고 로또의 효용 가치는 서민의 빈 주머니를 따뜻하게 해주는 소박한 환상에 있는지도 모른다. 로또의 효용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구조개편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2024-09-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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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쇠퇴의 길로 접어든 ‘전통 추석’
추석 명절이 낀 제법 긴 연휴가 지났다. 추석이 되면 으레 ‘민족 최대의 명절’, ‘오곡백과가 풍성한 한가위’ 같은 상투어가 등장하지만 요즘은 딱히 가슴에 와닿지 않는 느낌이다. 추석이 되어도 고향길 대신 개인 여행을 떠나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느는 추세다. 추석은 이제 ‘전통 명절’이라기 보다 사실상 ‘여행 또는 휴가철’로 더 효용 가치를 지니는 듯 여겨진다.
■ 갈수록 사라지는 명절 분위기
근래 수년간 전통 명절 추석의 퇴보는 두드러지고 있지만 올해의 경우 이런 경향은 더 짙어졌다. 특히 추석이 있는 9월 중순은 절기상 가을인데도 오히려 8월보다 더한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계절적으로도 과연 앞으로 전통적인 개념의 추석이 지속될 수 있을지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갖게 됐다. 더구나 폭염이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는 예측은 이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추석 아침에 차례를 올리는 경우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경제적 부담이 만만찮은 데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추석에 평소 잘 먹지도 않은 음식으로 차례를 올리는 것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젊은 층의 거부감은 훨씬 더하다. 그러니 아예 추석 당일 차례를 올리지 않는 게 큰 흐름으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봐도 작년까지는 차례를 올렸지만 올해부턴 이를 생략하는 집이 무척 많아졌다. 한국리서치가 추석을 앞두고 18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9%가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했다. 다른 기관의 조사 결과도 거의 60% 정도로 이와 비슷했다.
대신 벌초나 성묘가 차례나 제사를 대체하는 분위기다. 대행업체에 맡기거나 아니면 친지나 가족들과 현장에서 만나 함께 벌초나 성묘를 하는 것으로 추석 행사를 갈음한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추석 차례 장면은 아마 쉽게 보기 어려운 모습이 될 것 같다.
■ 여행·휴가 등 개인 활동 더 선호
추석 때 흔히 언급되는 ‘민족 대이동’이라는 말도 그 의미가 변했다.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행선지는 이제 고향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장년 이후의 세대라고 해도 지금의 고향은 더는 예전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이 아니다. 또 고향에 가더라도 뵐 수 있는 친지나 동네 어른들도 많이 없다. 젊은 층은 대체로 도시에서 태어나 고향이라는 의식 자체가 희미하다. 이런 고향을 굳이 도로가 북적이는 시기에 찾을 간절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도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SK텔레콤이 AI 기반 설문 서비스인 ‘돈 버는 설문’을 통해 변화된 추석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를 지난 17일 공개했는데, 1021명의 응답자 중 추석 연휴에 고향이나 가족·친지 방문 계획이 있다고 답한 경우는 42.7%에 그쳤다. 나머지는 대부분 휴식이나 여행 등 개인 여가 활용을 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추석 문화 자체가 편의성 위주로 급변하는 모습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대세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차례나 고향·친지 방문 등 추석 명절을 상징하던 전통적인 관습이나 의례는 이제 추석의 주류가 아니다. 그런데 젊은 층은 물론 예전의 전통적인 추석 문화에 익숙한 장년층 이상 세대들도 이런 추세를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달라진 사회경제적인 여건과 함께 변화하는 세태를 감안하면 전통적인 추석 풍습 등 문화를 이제 더는 고수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일부에선 여전히 이런 변화를 걱정하는 시각이 있기는 하다. 전통적인 추석의 본질은 외면하고 개인적인 편의성만 추구한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추석과 관련한 전통 풍습은 현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점점 희미해지는 추석 명절의 분위기를 되살리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아무리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문화라고 해도 시대와 세태의 변화로 인한 영고성쇠는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4-09-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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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콘크리트 묘지? ‘장묘 문화’ 어디로…
10년 전쯤이었나. 전남 지역의 한 야산에 시멘트 묘지가 등장해 화제가 된 적 있다. 그런데 지금도 형태는 다르지만 콘크리트 묘지는 심심찮게 보인다. 고령화 사회가 깊어지고 벌초가 갈수록 힘들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장묘 문화 전환기의 상징적 모습,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
■ 관리 힘들어 시멘트로…
시멘트 묘지는 10여 년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장묘 양식이다. 2013년 전남 지역의 어느 문중에서 선산 묘지 일대를 시멘트로 두른 모습이 여러 매체에 뉴스로 보도된 바 있다. 멧돼지 등 산짐승으로부터 훼손을 막는다는 취지였다. 당시 봉분에 잔디를 심고 주변은 시멘트나 인조 잔디로 포장한 묘지가 적지 않았다. 또 다른 농촌 지역에서는 묘 주변 바닥을 시멘트로 덮은 뒤 초록색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봉분까지 아예 인조 잔디를 올리거나 페인트로 도색한 경우도 있었다.
시멘트 묘지의 등장은 묘지 관리의 어려움을 웅변하는 현상이다. 묘지 벌초가 고된 작업인 데다 멧돼지 등 산짐승에 의한 무덤 훼손도 심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매장보다는 화장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깔려 있다.
최근에는 또 다른 형태의 콘크리트 묘가 등장해 이목이 쏠렸다. 유골함을 땅에 묻은 평장묘인데, 묘 주변 바닥을 콘크리트로 타설하고 위에 쇄석(잘게 부순 돌)을 깔았다. 봉분도 없고 주변엔 잡초도 자라지 않아 묘역이 깔끔한 게 특징이다. 10여 년 전 시작된 시멘트 묘지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자 새롭게 나온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석재 업계에 따르면, 이런 형태는 어느 정도 대중화돼 있는 상태라고 한다.
■ “예의 아니다” “현실 수용을”
시멘트 묘지. 여기에 대해서는 “조상에 대한 예가 아니다” “관리 고충 생각하면 이해된다” 등 여러 견해들이 교차한다.
유림계는 당연히 콘크리트 타설을 반대한다. 흙은 뭇 생명을 품는 대지의 상징이다. 그래서 땅의 기운은 예로부터 신앙처럼 여겨졌다. 사람이 죽은 뒤에 흙에 묻히는 것도 본래의 자연으로 다시 돌아감을 의미한다. 묘지는 떠난 자와 남은 자를 잇는 역할을 한다. 조상의 묘를 섬기고 찾는 일의 소중한 뜻이 여기에 있다. 흙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삭막한 시멘트 묘가 망혼에 대한 예의일 수 없다는 한탄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풍수지리 쪽에서도 시멘트가 지기(地氣)를 망쳐 후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본다.
하지만 묘지 관리가 쉬운 방식으로 세태가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농촌의 노령화, 벌초를 비롯한 선산 관리, 산짐승 출몰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다. 후손들은 대부분 외지에 있고 묘지를 지켜온 사람은 고령이 되어 간다. 관리가 지속되기 힘든 건 당연하다. 1년에 여러 차례 벌초를 해야 하는데 일꾼 구하기도 어렵다. 콘크리트 묘는 집안끼리 의논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상충된 입장과는 별개로 콘크리트 묘가 환경 훼손으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시멘트나 페인트·석재·인조 잔디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환경이나 미관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갈등이 빚어질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 바람직한 장묘 문화는
묘지 관리 문제는 한국의 전통적 봉분 매장 중심의 장묘 문화에서 비롯한다. 변화하는 장묘 문화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예가 콘크리트 묘다. 전통적 가치는 지켜내고 싶은데 벌초는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 그 가운데 나타난 전환기의 장묘 방식이란 뜻이다.
지금은 화장 문화가 대세다. 전국 화장률은 지난해 기준으로 91.9%에 이른다. 장례 유형도 마찬가지다. 2023년 통계를 보면, 화장 후 봉안이 35.2%, 화장 후 자연장(수목·화초·잔디에 묻는 장례)이 33.2%, 화장 후 산분장(산·강·바다에 뿌리는 장례)이 22.6%, 매장이 8.5% 순이다. 매장 사례가 가장 적음을 알 수 있다.
장례와 장묘 문화는 앞으로 더 거센 변화의 바람을 맞을 것이다. 한때 매장 중심의 장례가 주류였다면 이제는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조상을 기리는 소중한 전통을 계승하되 후손들이 거부감 없이 흐름을 이어갈 방법은 없을까. 환경도 살리고 추모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문화의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이 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2024-09-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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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비엔날레 더부살이 이제 그만!
여전히 더부살이는 계속되고 있다. 부산비엔날레 얘기다. 지난 8월 16일 개막식과 함께 시작된 2024 부산비엔날레가 오는 10월 20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부산근현대역사관, 한성1918, 초량재 등 지역 4곳의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다. 2002년부터 부산비엔날레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후,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는 단 한 번도 비엔날레 전용관을 보유한 적이 없다. 2002년부터 2016년까지는 부산시립미술관을 중심으로, 2018년부터 현재까지는 부산현대미술관 등에서 더부살이 전시를 하는 실정이다. 부산현대미술관을 지을 당시에는 비엔날레 전용관으로 활용될 예정이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부산현대미술관은 비엔날레 메인 전시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용관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부산비엔날레의 역사는 더부살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부산비엔날레조직위 사무실도 부산시청에서 동래구 사직동(아시아드주경기장 내), 그리고 동구 초량동으로 이전을 거듭하며 더부살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부산시가 퐁피두센터 분관 부산 유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지역 문화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거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새로운 것만 추구하거나 외국의 문화나 명성에만 기대는 것은 올바른 문화 행정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제 부산시는 부산비엔날레의 더부살이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좌표를 살피고 나아갈 길을 점검해야 한다.
■ 비엔날레 전용관 왜 필요한가
부산비엔날레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 미술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 행사는 국내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지역 문화 발전을 선도해 왔다. 특히 국제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양한 미술적 시도를 통해 지역의 문화적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광주비엔날레와 함께 국내 양대 비엔날레로 자리매김했다. 2022년에는 영국 현대미술 전문지 프리즈(Frieze)로부터 세계 10대 전시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다.
부산비엔날레는 그동안 부산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부산문화회관, F1963, 부산항 제1부두 등 지역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해 왔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세계 미술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관람객 입장에선 장소의 신선함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보다는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 예술가들은 매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불편함이 발생한다. 비엔날레의 일관된 정체성과 지속 가능한 운영이 어려울 수 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전용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비엔날레가 운영되다 보니 자칫 전문성이 축적되지 않고 휘발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관람객 입장에서도 매번 다른 장소에서 전시를 관람해야 해 일관된 예술적 경험을 얻기 어렵고, 교통 편의성 문제도 존재한다. 특히 비엔날레 주 전시장인 부산현대미술관은 접근성이 떨어지고 다른 전시 공간과의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비엔날레는 흥행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데 교통 불편과 흥행은 대척점이다. 관람객의 편의성, 흥행성을 기반으로 한 전용관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전용관의 파급 효과는
미술계에서는 비엔날레 전용관이 지역 문화와의 연계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 예술 작품을 통해 주민과의 소통을 증진하고, 지역 문화 자산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용관은 또 지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도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전용관을 통해 비엔날레 기간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작가 레지던시(창작 스튜디오), 작가 교류, 시민 소통 또는 교육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전용관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비엔날레 기간에 현대미술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산비엔날레의 일부 전시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면서, 미술관은 비엔날레 준비 기간을 포함해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5~6개월 비엔날레 측에 임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전용 공간 확보가 비엔날레 행사 운영의 안정성을 높이고,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전용관은 부산비엔날레의 정체성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비엔날레의 질적 향상을 가져올 수 있어서다. 전용관이 마련되면 상시적인 작업 공간이 확보돼 비엔날레 행사 때보다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일 수도 있다. 여하튼 전용관의 건립은 비엔날레의 안정적 운영 기반 조성, 세계적 수준의 부산비엔날레 이미지 구축, 전시행사 이외 다양한 비엔날레 행사 개최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부산비엔날레는 단순히 문화관광 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을 넘어, 이제는 문화예술 생태계의 발원지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행사 기간만 반짝하는 비엔날레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 국내외 전용관 활용 사례
성공적인 비엔날레들은 어떻게 전용 공간을 활용하고 있을까. 12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1895년부터 지아르디니와 아르세날레 두 전시 공간에서 전시를 이어오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아르세날레는 역사적인 조선소를 개조한 공간이며, 지아르디니에는 각국의 국가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고정된 전시 공간 덕분에 지
속적인 인프라 투자와 효율적인 운영도 가능했다.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도 1951년 이후 이비라푸에라 공원 내 시시리오 마타라조 파빌리온에서 꾸준히 전시를 이어오며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1932년 시작된 미국의 휘트니 비엔날레 역시 고정된 공간에서 비엔날레를 개최함으로써 그 위상을 꾸준히 높여왔다. 이들 비엔날레는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히며, 전용 공간이 안정적인 운영과 미술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비엔날레와 함께 인지도를 자랑하는 광주비엔날레도 1995년 첫 시작부터 전용관을 갖고 출범했다. 최근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습도와 온도에 민감한 작품을 수용하지 못하게 되자, 광주비엔날레 측은 2027년 완공 예정인 새 전용관을 현재의 비엔날레 전시관 주차장 위치에 건설 중이다. 광주는 전용관에서 주요 작품을 소개하고, 인근 광주시립미술관과 대인시장, 광주극장, 무각사 등 광주의 특징적인 장소에도 전시를 배치했다.
■ 다시 전용관 진지하게 고민할 때
부산비엔날레는 이제 전용관을 확보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전용관을 새로 짓자는 것이 아니라,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착실히 준비하자는 것이다.
전용관을 새로 짓는 대신, 2022 부산비엔날레에서 사용된 북항 1부두 창고와 같은 지역의 옛 창고 건물을 재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부산에는 교통 편의성도 뛰어나고 비엔날레의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가 제법 있다.
부산비엔날레는 이제 전용관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예술가의 참여를 유도하고, 부산비엔날레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나가야 한다. 전용관을 통한 지속 가능한 미래 구축은 부산을 넘어 국내는 물론, 국제 미술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부산비엔날레를 베네치아 비엔날레나 휘트니 비엔날레처럼 세계적인 행사로 성장시키려는 꿈이 있다면, 부산시는 비엔날레의 더부살이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화 도시를 꿈꾸면서 부산비엔날레에 전용관 하나 없는 현실은 치명적이다. 앞으로 30년, 100년을 내다보는 문화 정책, 문화 행정을 기대한다. 아울러 부산시의 문화 행정이 퐁피두센터 분관과 같은 외형적 화려함만 좇지 않기를 바란다.
2024-09-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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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한국은 해리스와 트럼프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할까
11월 5일, 불과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을 전 세계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7월 13일 암살 미수 사건 직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듯한 분위기가 원점으로 돌아온 상황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후보로 지명한 이후 한 달 사이에 판세에 큰 변화가 생겼다. 해리스 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근소한 우위를 보이는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어떤 반전 드라마가 펼쳐질지 예측불허의 상황이다. 극심한 양극화와 포퓰리즘, 감정싸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 대선의 주요 쟁점은 '팍스 아메리카'에 입각한 대외 정책보다는 범죄율, 이민, 인플레이션, 낙태, 교육, 성소수자 정책 등이 핵심이다.
■싱거운 승리 & 숨 막히는 접전
트럼프의 승리로 싱겁게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대선은 최근 롤러코스터 모양새다. TV토론 바이든 참패(6월 27일)→암살 시도로 피 흘리면서도 주먹 불끈 쥔 트럼프(7월 13일)→트럼프의 귀환을 선언한 공화당 전당대회(7월 15~18일)→바이든의 대선 후보직 전격 사퇴(7월 21일)→해리스 후보 선포와 민주당 전당대회(8월 19~22일)로 급변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전국적으로 해리스와 트럼프 지지가 각각 46%, 45%로 해리스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다. 7개 경합주 중에서 선벨트(Sun Belt) 경합주에서는 2 대 2 동률을 이루고, 3개 러스트벨트(Rust Belt) 경합주에서는 해리스가 우세한 모양새다. 선거 판세의 주요 지표인 선거자금부터 변화가 감지된다. 민주당은 해리스 부통령으로 교체된 지 불과 3주 사이에 5억 달러가 넘는 선거자금이 모였다. 그중 60% 이상이 경합주에서 그것도 신규 기부자들로부터 쏱아졌다고 한다. 해리스 부통령이 후보로 나서며 여성과 젊은 층, 유색인종의 결집이 두드러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23~2024년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에서 연구년을 보낸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지금은 해리스가 따라잡는 듯 보이지만, 트럼프가 예전 선거에서 모두의 예상을 꺾고 힐러리를 이겼듯이 투표함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안 교수는 “첫 번째 TV토론 이후의 민심 향방, 해리스에 대한 집중적 공격, 지지층 결집 등이 향후 대선을 판가름하게 된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 188년 동안 미국 대선에서 현직 부통령이 승리한 경우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일부에서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판독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이민·에너지’ 이슈에서 민주당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 과연 해리스가 우위를 차지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갑자기 등장한 해리스에 대해 트럼프 진영과 언론의 끈질긴 검증으로 약점이 드러날 경우 지지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과 서민 경제난
미국 대선의 핵심 이슈는 고물가이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5.7%를 기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때는 연평균 1.9%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해리스 부통령을 공격하는 핵심 포인트가 ‘바이든 정부에서 물가가 살인적으로 올랐다’였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파괴적인 인플레이션 위기를 즉각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대형유통점 코스트코에는 저렴한 기름을 넣기 위해 아침부터 차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생활물가와 임대료 상승으로 서민들의 가처분소득이 줄어들면서 미국 한인 교포들은 “외식 가격이 너무 올라 식당에서 밥 한 끼 사 먹기가 두려울 정도”라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에 대응해 물가를 잡겠다며 지난 16일 “연방정부 차원에서 식료품 바가지를 제재하겠다”는 경제 대책을 내놓을 정도다.
■반이민 정책 강화될 듯
두 후보 모두 불법 이민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비슷하다. 대처 방법의 강도에 차이가 날 뿐이다. 친이민 성향의 민주당도 합법 이민 기회를 유지하거나 일부 확대하자는 정도이지, 불법 이민자를 관용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 러스트벨트를 중심으로 불법 이주자들이 원주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범죄를 저질러 미국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여론이 드센 탓이다. 미국 내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6%가 더 높은 수준의 국경 강화 정책을 원한다고 대답했을 정도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의 국경 및 이민 정책이 완전히 재앙이라면서 재집권 시 국경 강화는 물론, 불법 이민자 수색 및 대량 추방, 대형 수용소 건설을 공언하고 있다. 또한, 해리스를 '국경 차르(czar·황제·최고 책임자)'였다면서 이민 정책의 실패를 공격하고 있다.
■“차에 물건을 두고 내리지 마세요!”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에서도 경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정책 때문에 차량을 깨고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 노상 방뇨 등 경범죄가 횡행하면서 주민은 물론이고 관광객들마저 불안해하고 있다. 대부분 민주당 텃밭인 캘리포니아, 뉴욕 등 대도시가 많은 주에서 범죄율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마약 관련 범죄도 심각하게 증가해 미국 LA 도심의 6차선 도로에서 마약에 취한 사람이 좀비처럼 도로를 막고 서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LA 다운타운에서조차 한 블록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는 것이 위험할 정도라고 한다. 공화당은 경범죄자들은 처벌하지 않는 민주당 정책을 비판하면서, 처벌을 강화하고 강력범죄 교도소 신설, 범죄 소탕에 주방위군 동원을 주장하고 있다.
■“저 사람들 이상하잖아요, 안 그래요?”
해리스 부통령이 선정한 부통령 후보 팀 월즈와 트럼프가 선정한 JD 밴스 부통령 후보의 싸움도 관전 포인트다. 미네소타 주지사인 월즈는 흙수저 출신으로 주 방위군에서 복무한 뒤 교사와 풋볼코치 등을 거쳤다. ‘따뜻한 이웃 아저씨’라는 이미지를 가진 월즈는 전당대회에서 프롬프트를 보지 않고 연설할 정도로 말솜씨가 뛰어나다. 풋볼코치로 휴식시간에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는 즉흥연설을 하면서 닦은 실력이라는 중평이다. 이에 비해 오하이오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같은 흙수저이지만, 아이비리그 출신 변호사로 실리콘밸리에서 부를 쌓은 밴스의 경우 권력지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트럼프 반대파로 정치적으로 성장한 뒤, 권력을 위해 친 트럼프로 돌아섰다는 지적이다.
월즈 주지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을 두고 한 말이 미국 정치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발언으로 ‘해리스, 월즈, 민주당=정상’ ‘트럼프, 밴스, 공화당=비정상’이란 프레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해리스도 여성의 낙태권을 공격하는 트럼프와 밴스를 여성혐오론자나 성차별주의자라고 공격하는 대신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불렀다. 상식과 비상식의 구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중국과의 패권 전쟁은 강경해질 듯
트럼프와 해리스 두 후보 모두 ‘중국 억제’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부보좌관을 역임한 매트 포틴저는 포린어페어스 기고문 ‘대체할 수 없는 승리’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며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것”이라면서 “미국과 중국은 이미 냉전 상태에 돌입했고, 명확한 목표는 중국 정부가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끔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오브라이언도 ‘힘을 통한 평화의 귀환’ 기고문에서 “중국을 군사적·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적”으로 규정했다. 정당과 관계없이 누가 당선되더라도 중국산 수입품 관세 부과, 첨단 기술 수출 통제 등 기술 패권과 무역 전쟁이 불가피할 조짐이다.
■경제 불확실성 더 커져
대선 여부에 따라 주식시장이 출렁이고 있다. 트럼프는 바이든 정부의 핵심 정책인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축소 및 폐기를 예고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한 IRA를 폐기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30년까지 미국 승용차량 판매의 50%를 전기차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연방 보조금이 철회되거나 감소해 인센티브가 없어지게 되면, 대미 투자를 결정한 한국 자동차업체와 배터리 회사들도 투자 전략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
■동맹정책, 외교 롤러코스터 타나
미국의 정권교체는 대외정책의 가장 큰 불확실성이다.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되면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기조가 대체로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리스는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해외에서 미국의 안보와 가치를 확고히 증진하겠다"면서 바이든의 바통을 이어받겠다는 기조를 밝혔다. 해리스가 집권하면 각종 문제를 점진적으로 해소하는 정책을 추진하겠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 국제정치가 예측불허의 전장으로 변하게 된다.
트럼프는 일방적, 예측불가능한 형태로 대외정책을 처리할 위험성이 높다. 주한미군 분담금 인상 요구, 주한미군의 역할 조정, 독자적 미북 협상 추진 등이 우려된다. 트럼프는 관세 인상과 보호무역정책, 다자주의에서 양자주의로 전환, 고립주의로 바뀌는 추세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내세워 이념과 가치, 동맹과 신뢰를 추구했던 것에서, 이익 추구가 전면으로 나서게 된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임석준 교수는 “한국의 입장으로서는 예측 가능한 해리스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현재 바이든 행정부에서 주창했던 다자주의동맹 등 국제 관계를 이어가야 한국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이번 대선의 결과에 따라 향방이 엇갈릴 전망이다.
■한국의 고민은 깊어지고
해리스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혹은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국제 정세가 요동칠까. 11월 5일 선거 결과에 따라 많은 국가와 기업,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다. 확실한 사실은 어느 정당이라도 대중국 압박과 미국 중심주의는 한층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인 한국이 어떤 스텝을 밟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안상욱 교수는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한국의 해외 원자력발전소 건립 사업 등 경제적 이해관계에서도 미국 정부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을 수 있다”면서 “대선 이전에 두 후보 진영과의 정책적 조율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2024-08-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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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건국절 논란은 왜 안 사그라질까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이후 불거진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대통령실은 정부가 건국절을 제정할 의사나 계획이 없었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하지만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 역사단체들은 대통령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김 관장 등의 지명을 철회하는 등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이라고 한다. 건국절 논란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뉴라이트가 촉발한 건국절 논란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확립된 건국의 날인 만큼 이를 기념하자”는 게 건국절 주장의 요체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는 곧 이승만 정부다. 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논리로 연결된다.
건국절 주장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건 이명박 정부 때다. 2006년 <반일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씨 등 뉴라이트계(극우와 상당 부분 겹친다) 인사들이 언론 매체를 통해 건국절을 주장하자, 2007년 당시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는 국경일 개정 법안을 발의했고, 2008년 국무총리 산하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출범했다. 시민단체와 야권의 반발이 거세 유야무야됐지만 이후에도 건국절 주장은 이어졌다. 2014년 당시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건국절 제정 법안을 새로 발의했지만, 역시 흐지부지됐다.
건국절을 반대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지목한다. 이는 현행 헌법에 명확히 규정된 바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건국절 주장은 오히려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흔드는 꼴이 된다. 이들은 또 건국절을 수용하면 1919년 이후 우리 독립운동사가 모두 사라지고, 따라서 친일파도 없는 게 된다고 강조한다.
■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하지 않겠다고 직접 나서 단정적으로 말한 적도 없다. 건국절을 반대하는 이들은 그런 이유로 여러 정황을 살펴 윤 대통령에게 의구심을 나타낸다.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에 대한 윤 대통령의 태도가 그중 하나다.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추진은 건국절 논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안이다. 이는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이 지난해 7월 19일 이 전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국부”라고 말한 데서 충분히 증명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에 건립 기금 500만 원을 기부하면서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의 성공을 응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독립운동과 광복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인식도 논쟁 대상이다. 2022년 취임 후 첫 광복절을 맞은 윤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우리의 독립운동은 끊임없는 자유 추구의 과정으로서 현재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경축사에는 ‘자유’가 무려 33번 언급됐다. 윤 대통령의 ‘자유’는 ‘반공’ 또는 ‘반북’으로 대체할 경우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실제로 이날 언급된 ‘자유 추구의 과정’은 ‘공산 세력에 맞서 자유국가를 건국하는 것’을 일컬음이었다.
윤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일관된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고 독립운동을 정의했고,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한반도 전체에 자유 민주 통일 국가가 만들어지는 그날, 비로소 완전한 광복이 실현되는 것”이라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공산 세력’ ‘자유 추구’ ‘건국 운동’ 등은 건국절을 주장하는 뉴라이트계 인사들이 흔하게 동원하는 단어들이다. 윤 대통령은 비록 건국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런 정황이 이명박 정부 시절 건국절 추진 움직임이 재연될 수 있다는 의구심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뉴라이트 성향 윤 대통령의 사람들
윤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온전히 혼자만의 것일까. 관련해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19일 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주위에 역사에 대한 이상한 견해를 부추기는 이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 것. 아닌 게 아니라 윤 대통령 주변에 뉴라이트 성향, 특히 이명박 정부 때 인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실제로 윤 대통령 집권 후 요직에 기용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그 지적이 그리 틀린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 뉴라이트를 이끌던 핵심 인물들을 국가안보실장, 국정상황실장, 방송통신위원장,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에 앉혔고, 이런 경향은 역사·교육 관련 국책 기관의 수장 임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국가교육위원장, 국사편찬위원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이 죄다 편향된 역사 인식을 가진 뉴라이트 계열의 인물들이다. 이번 광복절에 파란을 일으킨 독립기념관장도, 본인 주장과는 무관하게, 뉴라이트 성향 인사로 분류된다.
■반국가세력 vs 일진회 같은 인사들
윤 대통령이 지금껏 보인 역사 인식이 윤 대통령 개인을 넘어 그의 주변에 포진해 있는 집단의 인식에 연유한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이 “있지도 않은 건국절 계획” “억지 주장” 운운하고 심지어 “엄정 대응할 생각”이라고 을러대도, 윤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이런 인물 배경이 바뀌지 않는 한 건국절 논란은 사그라질 수 없는다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건국절 논란이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지난 13일 알려졌다. “국민 민생과는 동떨어진 불필요한 이념 논쟁이라는 취지”라고 대통령실은 해명했지만, 뉘앙스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윤 대통령의 과거 발언 때문이다.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2월 윤 대통령은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 왜 필요한지 모른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혹 “건국절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국민은 먹고사는 데나 신경 써라”는 뜻은 아니었는지….
‘두 쪽 난 광복절’ 사태에도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철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윤 대통령은 자신 주위에 포진한 뉴라이트계 인사를 내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아니, 이전보다 더 강고한 태도를 보인다. 지난 19일 국무회의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강조한 게 그렇다. 이날 ‘을지 자유의 방패’ 연습을 계기로 열린 국무회의였다고는 하지만, 가슴 한편에 섬찟함이 가시지 않는다. 반국가세력은 누구를 지칭하며, 항전 의지는 또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뜻인가.
이종찬 광복회장이 지난 20일 “대통령 주변 옛날 일진회 같은 인사들을 말끔히 청산하라”고 요구했다. 일진회는 구한말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 정책에 적극 호응한 대표적인 친일단체다. 묻게 된다. 윤 대통령이 말한 반국가세력이 문제인가, 이 회장이 언급한 일진회 같은 인사들이 문제인가. 어느 쪽이 실체인가.
2024-08-24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