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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북항 엑스포 빈 땅에 오픈 카지노를…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카지노’. 돈도 빽도 없이 필리핀에서 카지노의 전설이 된 차무식(최민식 분)이 살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목숨을 건 최후의 베팅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공개와 동시에 화제작에 오르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카지노 시리즈의 배경이 필리핀 휴양지의 호텔 카지노. 차무식은 필리핀 정부로부터 카지노 허가를 받아, 국내 부자들을 대상으로 거액의 카지노판을 벌여 주고, 돈을 환치기해서 송금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자크’. 대도시 시카고에서 회계사로 일하던 가장 등 평범한 가족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검은돈에 휘말려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에서도 오지인 오자크 휴양지로 도망친다. 이들은 오자크 호수 위에 선상 카지노를 설립해 마약 카르텔의 블랙 머니를 세탁한다. 카지노 허가를 둘러싼 정치권의 결탁과 돈세탁, 멕시코 갱들의 검은 거래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카지노와 관련된 OTT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서 카지노 산업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판을 치고 있지만, 세계 각 국가는 내국인 출입 카지노(오픈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 사업이 미래 먹거리이자 위기에 빠진 경제를 부흥시킬 산업으로 보고 오히려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복합리조트는 카지노와 테마파크, 호텔, 쇼핑몰, 수영장, 마이스센터 등이 포함된 복합관광시설이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전멸되다시피 한 관광 산업이 기지개를 켜면서 국가마다 관광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삼으려는 고민이 커지고 있다. 이들 국가는 코로나 완전 종식 이후 산업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선점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태국 오픈 카지노 속속 개발
세계 4위 관광대국인 태국이 최근 카지노 개발 경쟁에 가세했다. 태국 하원 의회는 전국 주요 도시에 합법적인 카지노 시설을 포함한 복합오락단지 건설을 허용하는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찬성 310표, 반대 9표로 최종 승인했다. 태국 정부가 카지노 합법화를 위해 특별위원회를 꾸린 지 1년여 만이다. 정부는 수도인 방콕을 제외하고, 푸껫과 파타야, 치앙마이, 끄라비, 치앙라이 등 주요 관광도시에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오픈 카지노를 최대 5개 건립할 예정이다. 특별위원회는 “오픈 카지노 개발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늘리기 위한 것”이라며 “불법 도박을 억제하고 세수 증대 효과가 클 것”이라고 기대했다.
카지노 산업에 대한 정책 변화는 관광 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20%를 웃도는 태국이 외국인 관광객 유치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마카오 등이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 개발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ited Nations World Tourism Organization)가 2020년 발표한 태국의 관광 수익은 78조 7000억 원으로 미국, 스페인,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다. 영국과 이탈리아, 일본보다도 순위가 높다. 한국은 12위 29조 원으로 태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태국은 중국 의존도에서 탈피해 한국과 일본 등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중점을 둘 계획이다.
■일본 2025년 오사카 엑스포 이후 관광 기폭제
2018년 내국인 카지노를 합법화한 일본은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 샌즈보다 큰 최대 3개의 오픈 카지노가 포함된 대형 복합리조트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2025년 월드엑스포가 열리는 일본 오사카 간사이에는 미국 엠지엠과 오릭스 컨소시엄이 2029년 개장을 목표로 복합리조트 건립을 추진 중이다. 오사카 간사이 복합리조트는 건립비만 1조 800억 엔(약 10조 6000억 원)에 이른다. 일본 정부는 2025년 오사카 엑스포 이후에 문을 여는 대형 복합리조트가 일본 관광 시장의 제2 부흥기를 견인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가사키 하우스텐보스에도 카지노 오스트리아가 4383억 엔(약 4조 3000억 원)을 들여 2027년까지 카지노가 포함된 복합리조트를 건립할 예정이다. 동아시아 관광 판도를 바꿀 파격적인 일본의 복합리조트가 개장하면, 부산과 제주도 등 외국인 카지노를 찾던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결국 가장 인접한 한국 관광업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마카오도 ‘카지노+리조트’로 확장 중
마카오 지방정부도 주요 카지노업체를 복합리조트 시설로 탈바꿈시켜 ‘카지노+리조트’ 형태로 영업권을 허가하고 있다. 이번에 카지노형 리조트 사업권을 따낸 업체는 MGM그랜드파라다이스, 갤럭시카지노, 베니션마카오, 멜코리조트마카오, 윈리조트마카오, SJM리조트 등 총 6곳. 135억 달러(약 17조 6000억 원)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마카오 정부로부터 10년 영업권을 보장받았다.
베니션마카오는 기존 회의 시설을 각종 국제회의나 업계 관련 행사를 유치할 수 있는 대규모 회의 및 행사 시설로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갤럭시카지노도 61만㎡ 규모의 최첨단 테마파크와 현재 1600석 규모인 컨벤션 센터를 각종 스포츠 경기를 개최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로 개조하기로 했다. 멜코리조트마카오는 연중무휴 운영이 가능한 대규모 실내 워터파크를 운영하기로 했다. 갤럭시카지노가 한국, 싱가포르, 태국 등에 지역 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해외 관광 수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태세다.
■아시아 복합리조트 개발 원조 싱가포르
2010년 미국 샌즈그룹의 마리나 베이 샌즈, 말레이시아 겐팅그룹이 운영하는 리조트 월드 센토사가 문을 연 싱가포르는 카지노와 쇼핑센터, 컨벤션 시설이 포함된 복합리조트로 아시아 여행의 판도를 흔들었다. 샌즈그룹이 69억 달러(약 8조 5000억 원)를 들여 건립한 마리나 베이 샌즈는 싱가포르의 대표적 랜드마크다. 말레이시아 겐팅그룹은 50억 달러(약 6조 원)를 들여 센토사섬을 최고급 여행지로 탈바꿈시켰다.
샌즈와 겐팅은 지난해 카지노 영업장을 확장하는 조건으로 각각 33억 달러(약 4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최근 카지노 세율을 기존 15%에서 18%로 인상하기로 한 싱가포르 정부는 샌즈와 겐팅 그룹의 카지노 운영권을 2030년까지 연장하면서 제2의 복합리조트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싱가포르는 성장동력이 멈춘 상태에서 센토사섬의 카지노, 마리나 베이 샌즈 카지노를 개장하면서 연평균 두 자릿수의 폭발적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만 오픈 카지노 경쟁에서 뒤처져
아시아 국가들이 복합리조트 개발을 위해 뛰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다. 복합리조트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막대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오픈 카지노의 사행성 논란에 발목이 잡혀 구체적인 논의조차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자칫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의 치열한 카지노 개발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2027년까지 방한 외국인 관광객 3000만 명 시대를 열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외국인 관광객 유인 경쟁력이 있는지, 아시아 국가의 복합리조트 확장 동향을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현재 국내에선 서울과 부산, 인천, 강원, 대구, 제주 6개 도시에서 총 17개 카지노가 운영되고 있다. 이 가운데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는 강원 정선 강원랜드 1곳으로 나머지 16곳은 모두 외국인 출입만 허용하는 외국인 전용 시설이다.
관광업계 한 관계자는 “일본과 태국, 필리핀, 마카오까지 오픈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가 들어서면 국내 관광과 컨벤션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면서 “현 정부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연간 약 20조 원이 넘는 돈이 해외에서 도박으로 유출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다. 엄청난 국부가 유출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돈의 일부라도 국내로 흡수할 수 있다면 생산적인 투자 재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북항 엑스포 부지에 복합리조트를
부산은 경제 위기와 청년 인구 유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정대로 2030월드엑스포를 부산 북항에 개최한 뒤, 그 부지에 오픈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를 개발할 경우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본 등지의 외국인 관광객과 돈이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다. 부산의 관광·컨벤션, 식품·서비스업은 물론이고 북항 블록체인특구와 맞물린 새로운 비즈니스로 확장될 가능성도 높다. 메가 스케일의 복합리조트 유치는 부산을 국제적인 관광·컨벤션 도시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2030월드엑스포 개최 시점을 고려하면, 지금부터 특별법 마련 등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국가가 대규모 재정 투자 없이 복합리조트 특별법을 통한 외자 유치만으로 국가균형발전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다. 물론, 카지노 허용 지역은 수도권을 제외하고, 외자 10조 원 이상을 투자 받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정하면 불필요한 도시 간 출혈 경쟁도 피할 수 있다.
K푸드, K팝 등 높아진 국가 위상과 2029년 개항될 가덕신공항, 2030월드엑스포 개최지라는 도시 브랜드에 북항 복합리조트가 시너지를 일으킨다면 부산이 아시아의 관광·컨벤션 허브로 부상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부산이 2030월드엑스포 유치와 함께 복합리조트 유치 골든 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김태균 부산상공회의소 홍보팀장은 “복합리조트의 도입은 특별법 제정부터 허가, 건설, 개장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걸리는 프로젝트”라면서 “특별법 제정을 통해 부산 북항 엑스포 부지에 복합리조트를 개발해 엑스포 이후의 시대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태환 동의대 호텔컨벤션경영학과 교수는 “일본과 태국, 싱가포르에 오픈 카지노를 주력으로 하는 복합 리조트가 들어선다면, 한국 관광 산업의 위기가 올 수 있다”면서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정부가 대응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3-01-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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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중대선거구제, 내년 총선 때 가능할까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일 한 언론사와 가진 신년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 의사를 밝혔다. 이후 이 선거제도에 여야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며 논란이 일고 있다. 윤 대통령은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며 갈등이 깊어졌다”면서 “지역 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해 대표성을 강화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중대선거구제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때마침 김진표 국회의장도 내년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 획정 법정시한인 오는 4월 10일까지 선거제도 개편을 이뤄 내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맞이한 설날 연휴에 가족, 친구들이 만나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면 어떤 것이 소재가 될까? 중대선거구제 검토를 비롯한 선거제 개편은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개혁 방안의 하나라는 점에서 이번 설 명절 밥상머리 민심의 주요 관심사가 될 듯하다.
■소선거구제가 낳은 부작용
윤 대통령이 새해 벽두부터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언급한 까닭은 현행 소선거구제의 문제점이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가 여야 간 극심한 정쟁을 빚는 거대 양당 구도를 공고히 하고 지역주의까지 심화하고 있어서다. 사실, 최다 득표자 말고는 모조리 낙선하는 소선거구제는 다수당의 출현에 유리한 구조여서 정국 안정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유권자가 출마 후보자들을 파악하기 쉽고 선거 관리가 용이하며 선거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소선거구제는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부터 30년 넘게 시행되는 동안 여야의 거대 양당 구도를 고착화했다. 거대 양당이 국회의 대부분 의석을 차지하고 양분한 가운데 한국 정치를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 당리당략이나 이념을 앞세운 정쟁으로 본연의 업무에 소홀한 ‘식물 국회’, 사사건건 충돌하고 몸싸움까지 불사하는 ‘동물 국회’ 등의 지적이 대표적이다.
또 소선거구제의 승자독식 구조는 무수히 많은 사표를 만들며 지역 표심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역에서는 제1당만 살아남아 고질적인 지역주의가 판치도록 만든다. 이로써 제3, 4당 등 소수 정당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봉쇄되고 있다. 이는 대구·경북에서 국민의힘이, 광주·전남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국회의원 자리를 싹쓸이하고 있는 데서 여실히 증명된다. 1당 출신이 아닌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인물을 선출하는 게 불가능해 결국 정치나 지역에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소선거구제 개편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돼 온 이유다.
■중대선거구제는 어떤 제도?
중대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의원을 선출하는 제도다. 세부적으로는 윤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선출 의원이 2~4명이면 중선거구제, 5명 이상은 대선거구제로 분류한다. 선출 인원이 늘어날수록 선거구의 크기도 커진다. 하나의 선거구에서는 정해진 의석수에 따라 득표 순서대로 각 정당이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중대선거구제는 작은 정당의 당선자 배출과 원내 진입 가능성을 높여 소선거구제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자주 거론돼 왔다. 하지만 실제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지난해 실시된 6·1 지방선거에서 전체 기초의원 선거구 1030곳 중 30곳에서 3~5인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실시한 바 있다. 지역의 다양성을 높이고 민의의 대표성을 확대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30곳에서 당선된 109명 가운데 국민의힘과 민주당 소속 당선자가 105명으로 96.3%나 되고 소수 정당은 4명에 불과해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한 선거구에 복수 공천된 거대 양당 후보들에게 쏟아진 몰표 탓이다. 이에 대해 중대선거구제가 거대 양당 독식 체제를 타파하기는커녕 양당의 동반 부패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금까지 총선의 중대선거구제가 별다른 도입 움직임 없이 제안이나 논의 수준에 그친 이유는 집권 여당과 거대 제1 야당의 기득권 집착에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중대선거구제가 실시될 경우 지역주의가 강한 영남과 호남에서도 소수당의 당선자 배출은 물론 지역에 기반한 신생 정당의 창당과 의석 확보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는 영남에서 ‘비윤’(비윤석열) 계열 보수 정당이 창당되고 호남에선 비민주당 성향을 가진 지역당이 출현하는 등 같은 진영 내에서도 그룹이 나눠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거대 양당에 좌우되는 정치 양극화의 폐해를 없애고 다당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중대선거구제가 필요하지만, 국민의힘과 민주당에게는 세력 분열·약화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만큼 꺼려지기도 할 것이다. 한 선거구에서 특정 정당의 복수 공천이 가능하더라도 후보자 난립과 과열 경쟁, 계파정치 심화, 정치 신인 불리, 선거 비용 증가 등이 예상돼 정치권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부산 선거구에 미칠 영향
부산 지역 상당수 국회의원들 역시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부정적이거나 미온적인 입장이다. 주된 이유는 선거제가 중대선거구제로 개편돼 내년 4월 총선에서 적용된다면 현역 의원은 지금보다 불리한 환경에 놓이게 돼 경우의 수를 따져야만 해서다. 현재의 동래·금정·연제 3개 선거구가 중대선거구제에 의해 1개 선거구(가칭 ‘동래권’)로 묶일 경우 이들 선거구가 지역구인 김희곤·백종헌·이주환 등 국민의힘 소속 초선 의원 3명은 공천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이들은 만일 같은 당 출신의 또 다른 유력 후보가 공천 경쟁에 나서거나 당의 전략공천을 받을 경우 당선은커녕 공천조차 장담할 수 없을 전망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유리한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중대선거구제 도입 시 남구와 수영구, 중·영도구와 서·동구, 해운대구와 기장 등 현재 인접한 선거구는 각각 단일 선거구로 합쳐져 지역구가 지금보다 넓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 선거구를 지역구로 둔 의원들도 더욱 격렬해질 공천 경쟁 속에서 어려움이 예상되기는 마찬가지다. 혹시나 공천에서 탈락하더라도 무소속 출마를 통해 2명 이상인 당선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위안거리다. 이러한 측면에서 평소 지역구를 충실히 누볐거나 인지도를 잘 다진 거대 양당 후보나 중진 정치인이 공천에서 생존해 선거에서 당선될 확률이 높을 것으로 관측된다.
최인호·박재호 등 부산의 민주당 의원들은 중대선거구제를 기대하고 반기는 눈치다. 최근 잇단 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30~40% 정도 지지율을 확보한 민주당이 중대선거구로 챙기는 이득이 호남에서 10%가량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국민의힘의 이득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지역의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후보자가 늘어나 모든 후보의 자질과 공약, 정보 등을 꼼꼼하게 살피기 힘들어지는 것이 중대선거구제의 단점이다. 현행 선거구 2곳 이상을 하나로 합치게 되면 지역 면적이 넓어지고 유권자가 크게 증가하는 만큼 출마자들의 선거운동과 선거관리위원회의 관리에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이 요구되는 문제점도 있다.
■중대선거구제, 전망과 과제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관련 발언은 실제 도입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정치개혁 어젠다의 선점 효과를 노린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최근 40%대 초반으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대통령 지지율에 힘입어 유리한 정치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개편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던진 화두라는 정치전문가들의 분석이 지배적이다. 윤석열 정부의 3대 개혁 과제인 노동·연금·교육에 이어 요구되는 분야가 정치개혁인 것이다. 아무튼 대통령의 발언 이후 정치권에서는 선거제 개편에 관심이 컸던 의원들을 중심으로 중대선거구제 논의에 나서는 모습이다. 지난 16일 여야 의원 60여 명이 참여한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이 첫 회의를 열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소선거구제 개편에는 의견을 같이했으나 중대선거구제 등 구체적 방법론에서는 의견 차이를 드러내 진통을 예고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도 국회의장의 선거제 개편 지침에 따라 지난 19일 전문가들의 견해를 듣는 공청회를 열었다. 정개특위는 주 1회 이상 회의를 갖고 4월 10일 선거제 개편 시한까지 개편안을 도출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여야 모두 내부에서 백가쟁명식 논의가 이어지며 선거제 개편에 대한 회의론마저 나오고 있어 이번에도 용두사미식 논의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이는 각 당과 의원들마다 선거제 개편을 정치개혁이라는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제도가 자기에게 더 유리한지, 득실부터 따지는 정략적 시야에 갇혀 있어 개편 역시 정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선거제 개편에 필수적인 여야 합의가 쉽지 않아 내년 총선의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힘들 것이란 전망이 많은 실정이다. 더욱이 정치개혁을 희망하는 국민들의 여론이 중대선거구제에 대해선 의외로 미지근한 사실이 이 같은 전망을 뒷받침한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 전문기관들의 잇단 여론조사에서 중대선거구제를 총선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찬성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 중대선거구제 추진에 험로가 예상된다. 또 여론조사 결과, 진보·보수·중도층 모두 중대선거구제에 대한 반대 의견이 강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국민들이 선거제 개편 작업을 국회에 맡겨 두고 마냥 지켜만 볼 게 아니라 외부 전문가들을 논의에 참여시키고 사회 여론을 적극 반영할 것을 주문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지난 18일 보수와 진보 진영을 망라한 전국 65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권에 진영과 정파를 초월해 선거제 개혁을 이뤄 내라고 촉구한 것은 고무적이다. 선거제 개혁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진영 구분 없이 한목소리를 낼 정도로 국민의 염원이라는 걸 웅변한다. 정치권이 무겁게 새겨야 할 대목이다. 어떤 제도든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기 마련이다. 여야 정치권이 정략적 계산을 넘어 민의에 입각한 선거제 개혁을 위해 최선의 방안을 도입하는 데 힘을 모으고 속도를 낼 일이다. 이와 함께 여야의 논의 과정에서 지방의회 의원들 줄 세우기와 편 가르기가 심한 정당 공천제를 개선하는 방안도 같이 검토돼야 마땅하다.
2023-01-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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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브라질, 미 공화당, 그리고 국민의힘
■ 짓밟힌 브라질 민주주의
브라질 국기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초록색 옷을 입은 시위대가 의회를 점거했다. 이들은 의회 건물 지붕에 올라가 ‘신(神), 조국, 자유’를 외쳤다. 또 다른 시위대는 대법원과 대통령궁에 난입해 무기를 탈취하고 경찰을 폭행했다.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진보 계열의 룰라 후보가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당선되자 인정할 수 없다며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극우 성향의 이들은 심지어 군(軍)이 쿠데타를 일으켜 룰라 대통령을 축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폭동을 일으킨 이들에 대해 룰라 대통령은 “파시스트”라며 비난했고, 각국 정상들도 “민주주의 파괴”라며 성토했다. 폭동은 이틀이 못 돼 진압됐다고는 하나 그 충격과 여진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 극우에 휘둘린 미국 공화당
브라질리아에서의 이날 폭동은 2021년 1월 6일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 난입 사태를 연상케 한다. 2020년 대선에서 패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대선불복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의사당에 난입한 이들은 ‘위대한 미국 재건’을 기치로 내건 극우주의자들이었다. 2년이 지났지만 현재 미국은 그 사건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민주당 진영에서는 당시 시위대를 폭도라고 규정하지만, 공화당 내 강경파와 극우 세력은 애국자라고 옹호하며 극심한 시각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건 공화당이 극우 세력을 옹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휘둘린다는 점이다. 지난 7일 있었던 하원의장 선출 과정이 그랬다. 공화당의 공식 후보인 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강력히 밀었던 매카시 원내대표가 무난히 선출될 걸로 다들 알았다. 하지만 매카시는 이날 무려 15번의 재투표 끝에 가까스로 선출됐다. 공화당 내 극우 성향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들이 매카시가 타협적이라며 ‘반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해당 의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매카시는 하원의장 해임 조건을 크게 완화하고(프리덤 코커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해임할 수 있다는 의미), 법안 통과 열쇠를 쥔 하원 운영위원회 자리 상당수를 프리덤 코커스에게 내줌으로써 겨우 하원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요컨대 매카시는 당내 극우 세력과 ‘거래’를 한 셈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가에서는 매카시가 향후 사안마다 프리덤 코커스에게 발목을 잡힐 것이라며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소수의 극우 인사들이 공화당 전체를 쥐고 흔드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 국민의힘에 드리운 그림자
브라질과 미국에서의 이런 일들이 먼 나라의 모습일 뿐이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이미 우리는 그런 일을 경험하고 있다. 2017년 제19대 대선 이후 부산과 서울 등에 나타났던 태극기 물결이 그중 하나다. 소위 ‘태극기 부대’ 중 상당수가 19대 대선은 부정선거였으며, 따라서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한 이들의 폭력적 행태와 엄청난 적대에서 우리는 극우의 그림자를 분명히 봤다.
그런데, 미국 공화당이 그런 것처럼, 극우의 그림자가 지금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에 드리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3월 8일 열리는 전당대회를 앞두고서다. 국민의힘은 차기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의 규칙을 당원들만의 투표로 치르는 것으로 지난달 바꿨다. 이른바 ‘당심 100% 룰’이다. 이전에는 일반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30% 반영했는데, 이번엔 아예 배제한 것이다. 그 결과 극성 당원의 입김이 더욱 거세지고 나아가 극우 성향으로 꼽히는 인사들이 세력을 키울 가능성이 커졌다.
우려는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김건희 여사 팬클럽을 운영했던 한 유튜버는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고, 대표 출마를 밝힌 또 다른 인사는 “종북좌파 척결” “자유우파 대통합” 운운하며 색깔론으로 당내 강성 지지층의 결집을 호소했다. 최고위원 선거도 주목된다. 10여 명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데, 거기엔 국민의힘 당원수(약 80만)보다 훨씬 많은 구독자수를 자랑하는 극우 유튜버들도 끼어 있다. 이들은 ‘친윤’ 주자임을 내세우며 세를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당선될 경우 내년 총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당 지도체제까지 임의로 흔들 수 있다. 설마 당선까지 될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많지만, 그리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이들의 당선이 어렵다고는 해도 미국 공화당의 프리덤 코커스처럼 강경 목소리로 자신들의 지분을 내세우며 당 운영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극단의 정치는 국민의 불행
국민의힘은 과거 미래통합당 시절 ‘극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하지만 근래 국민의힘은 우경화의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 2020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때 정비한, 중도 지향의 정강·정책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윤핵관’으로 불리는 한 의원은 “정강·정책 곳곳에 박혀 있는 민주당 흉내내기부터 걷어 내야 한다. 따뜻한 보수와 같은 유약한 언어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이 간신히 결별했던 극우 이미지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한다.
극좌와 마찬가지로 극우는 위험하다. 극단의 정치는, 이번 브라질 폭동에서 보듯, 민주적 절차보다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한다. 테러를 비롯한 그 어떠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극단의 정치에 휘둘리는 집권여당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만에 하나 그리 된다면, 그건 국민의힘이라는 일개 정당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 전체의 불행이다.
2023-01-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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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야?
아내가 정주행 중인 드라마의 제목을 보고는 혀를 찼다. 재벌을 우려먹다 못해 이제 막내아들까지 파는구나. 한심하게 생각하며 같이 보기 시작했는데 진양철 회장 역할로 나온 배우 이성민의 신들린 연기에 푹 빠지고 말았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기억에 생생한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펼쳐지며 생기는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때 그걸 샀더라면 지금 이런 글이나 쓰고 있지 않을 텐데….' 아무 쓸모 없는 후회와 아쉬움도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의 종영과 함께 끝이 났다. 이처럼 '회빙환'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요즘 아주 인기라고 한다. 회빙환이 대체 뭐길래 우리 옆에 찰싹 달라붙은 것일까.
■ 어게인, 내일, 금수저 등 쏟아져
회빙환(回憑還)은 회귀, 빙의, 환생의 앞 글자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회귀물, 빙의물, 환생물이 웹소설의 공식이 될 정도로 유행하면서 만들어진 용어다. 주인공이 회빙환을 통해 지금 세상보다 앞선 지식과 경험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능력이 남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다. 회빙환 장르는 빠르고 시원한 사이다식 전개가 특징이어서 10~12부작으로 짧아지는 요즘 드라마 트렌드에 적합하다고 평가받는다.
2022년 한 해 동안 '재벌집 막내아들' 외에도 '어게인 마이 라이프(SBS)', '내일(MBC)', '금수저(MBC)', '환혼(tvN)' 등이 회빙환 설정을 이용했다. '어게인 마이 라이프'는 제목만 봐도 회귀 드라마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권력자를 심판하려다 죽은 검사가 재수생 시절로 회귀해 악을 응징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전 삶의 기억을 가지고 앞서나가며 치밀하게 옭아매니 복수극은 짜릿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부터 일본의 주요 OTT 플랫폼을 통해 일본 현지에서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내일'은 환생을 다뤘다. 우리 사회에는 절망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내일'은 죽은 자를 인도하던 저승사자들이 목숨을 살리는 임무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다. 학교폭력, 성폭력, 직장 내 괴롭힘, 악성 댓글, 청년 우울증, 생활고 등 타살에 가까운 죽음들을 '위기관리 저승사자'라는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 해결한다. '금수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친구와 운명을 바꿔 후천적 금수저가 된다는 판타지다. '환혼'까지 포함해 지난 한 해 회빙환 드라마가 이렇게나 많았다.
■ 특권이라는 생각, 안 해 본 거야?
같은 제목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회귀물 드라마다. 회귀물은 현실에서 실패한 주인공이 억울하게 죽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몸으로 인생 2회차를 살며 성공해 복수한다는 내용이 일반적이다. 흙수저 윤현우가 재벌집 막내아들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 승승장구하는 스토리에는 피가 끓어오르도록 욕망을 자극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진도준은 분당이 별 볼 일 없는 시절 분당 땅을 콕 찍어서 5만 평을 증여받아 종잣돈으로 사용한다. 요즘엔 '천당 위의 분당'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큰돈 벌기도 식은 죽 먹기다. 진도준이 그랬던 것처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모아 환차익을 얻고, 사람들이 관심 없을 때 아마존이나 애플의 주식을 사고, 9·11테러 직전에는 주식을 죄다 팔았다가 직후에 매집하면 쉽게 큰 부자가 된다. 이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지만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도 일찍부터 사 모으고 싶다.
알고 보니 '막내아들'은 다 계획이 있는 제목이었다. 대단한 금수저 진도준도 순양 안에서 펼쳐지는 장자 승계 원칙 아래에선 상대적 약자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재벌집에서도 계급과 서열이 확실하게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는 대물림된 힘이 토대가 되어 불공정한 사회를 만든다는 문제의식이 의외로 잘 드러났다. 진도준이 서울대 법대 동급생 서민영에게 "법조계 명문가인 너희 집안, 건강한 몸, 좋은 머리 그 모든 게 태어날 때부터 너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생각 정말 단 한 번도 안 해 본 거야?"라고 묻는 대목이 그랬다. 진도준은 사업 파트너 오세현에게 "사람들 참 이상해요. 북쪽에서 김 씨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건 그렇게들 못 참아 하면서 남쪽에서 재벌 3세가 경영권을 세습하는 건 왜 다들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어차피 자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공정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 금수저 될 수 있다면 뭐라도
2010년대 후반부터 회빙환 작품은 웹소설·웹툰계의 대세였다. 이처럼 회빙환 작품이 인기를 끌며 비슷한 작품의 영상화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네이버 시리즈 조회수가 1억 6000만 회를 넘는 인기 웹소설이자 빙의물인 <전지적 독자 시점>의 영화화도 준비 중이다. 소설의 독자였던 주인공이 책의 세계로 빙의되어 펼쳐지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평사원에서 CEO가 되었지만 인생을 잃어버린 주인공에게 찾아온 인생 2회차를 다룬 웹소설 <상남자>의 드라마화도 진행되고 있다. 환생을 거듭한 여자가 18번째 전생에서 만났던 남자와 다시 만나며 일어나는 일을 다룬 웹툰 <이번 생도 잘 부탁해>도 올 상반기에 드라마로 방영된다.
사람들은 대체 왜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단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생망은 삶에 대한 희망 자체를 놓아 버렸다는 의미다. 회빙환은 이생망과 대구를 이룬다. 흙수저로 태어나서, 좀 더 일찍 부동산이나 암호화폐를 사지 않아서, 이제는 살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인생도 게임처럼 리셋하고 싶은 욕망이 웹소설에 투영되었고, 다시 드라마로 구현되어 회빙환이 안방에 대거 출현하는 것이다. 회빙환이라는 세계관의 유행은 한국 사회의 실패에 대한 공포, 성공에 대한 강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드라마 '금수저'의 시놉시스는 '이제 모든 이들의 욕망이 이 금수저를 향해 있다. 금수저가 될 수만 있다면 부모든 영혼이든 무엇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우리의 욕망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 에필로그: 웹소설 시장은 성장하지만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은 대기업 직장인이었던 산경 작가가 썼다. 이 작가의 월 매출은 1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가 2020년에 낸 <실패하지 않는 웹소설 연재의 기술>의 부제는 '퇴근 후 웹소설 써서 10억 벌 수 있다고?!'였다. 현실은 많이 다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웹소설 시장은 2021년 6000억 원 규모로 성장했고, 웹소설을 창작하는 작가들만 20만 명에 달한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웹툰·웹소설 플랫폼 창작 노동자들의 주당 평균 노동 시간은 52.5시간, 절반은 연평균 수입이 1700만 원 이하였다. 카카오·네이버 등 플랫폼이 작가에게 떼는 수수료도 30~45%에 달한다. 2014년 드라마로 나와 큰 인기를 모은 '미생'에는 "회사가 전쟁터라면 나가면 지옥이다"라는 불후의 명대사가 나온다.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진정 없다는 말인가.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1-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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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고리 원전이 무인기 공격을 받는다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대선과 새 정부 출범의 기대로 시작한 한 해였지만 여야 간 정쟁으로 국민의 시름은 더 깊어졌고 경제난의 고통에 이태원 참사의 아픔마저 겪어야 했다. 연말 날아든 북한의 무인기는 남북 관계 긴장 속 전쟁 위협이 상존하는 한반도 상황을 환기시켰다. 북의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휘젓고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공항의 여객기 운항이 중단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면서 전쟁이 일상 속으로 다가왔다. 한반도 전역이 무인기 작전 범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후방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특히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원전, 공항, 항만 등 국가 주요 시설의 무인기 공격 대응이 발등의 불이다. 세계적 원전 밀집 지역인 부산, 울산, 경남 주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북한 무인기에 농락당한 군, 불안한 국민
북한의 무인기는 진화하고 있지만 우리 군의 대응은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 우리 군은 5년 전에는 무인기 도발을 탐지·식별조차 못한 채 추락한 동체를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탐지한 후 추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파치·코브라 공격 헬기와 전투기까지 출격시켰지만 격추하지 못했다. KA-1 경공격기는 무인기 대응을 위해 이륙 중 추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까지 냈다. 우리 군이 적 무인기 대응 전략 자산으로 자랑하던 ‘비호복합’ 등 대공화기는 쏘아 보지도 못했다. 대공화기는 자체 영상이나 레이더에 적 공격기가 식별되지 않으면 정확한 사격을 할 수 없는데 레이더 포착을 못한 것이다. 국방홍보원의 ‘드론? 무인항공기? 지상전? 다 드루와바! 비호복합이 다 막아 줄게!’라는 홍보 영상은 누리꾼들에게 희화화 대상이 되며 비공개로 전환됐다. 누리꾼들은 “보여 주기 하나는 전 세계 탑인 K국방” “북한이 이 영상 보고 테스트로 드론 날린 듯하다”는 등의 댓글로 우리 군의 대응 실패를 꼬집었다. 방위사업청은 북한 무인기를 무력화할 수 있는 ‘한국형 재머(Jammer)’ 개발사업을 시작했지만 2026년에나 완료된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북한 무인기가 생화학무기까지 운반할 수 있어 한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보도까지 내놓았다. 군은 북 무인기 침공 이틀째 새떼 공격에 놀라 출격하기도 하고 시민들은 한밤중 전투기 출격 소리에 놀라 잠을 설치는 등 불안해하고 있다.
∎진화하는 무인기, 전쟁의 게임 체인저
무인기 역사는 꽤 오래다. 무인기(無人機‧unmanned aerial vehicle)는 사람이 타지 않고 원격조종 혹은 자동으로 운용할 수 있는 항공기 일체를 지칭한다. 무인기를 드론이라 부른 계기는 명확하지 않다. 영국에서 1935년 훈련용 ‘타이거 모스(Tiger moth)’를 원격조종 무인 비행기로 개조하면서 여왕벌(Queen Bee)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영국 여왕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수벌을 뜻하는 드론으로 이름을 바꿔 부른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초기 미사일 표적 연습용 정도로 사용되던 무인기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전에서 전쟁의 게임 체인저로 등장하고 있다. 2020년 1월 미국의 공격용 드론 MQ-9 리퍼가 이라크 미군 기지에서 이륙해 상공을 날아 솔레이마니 이란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사살했다. 솔레이마니 동선 정보가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 본토에 있는 드론 작전통제부에 실시간 전달돼 이를 토대로 드론 조종사들이 원격조종하며 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드론 전쟁의 서막으로 받아들여지며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드론 전쟁이라 할 정도로 무인기의 역할이 커졌다. 우크라이나 주력 드론인 튀르키예산 바이락타르 TB-2는 러시아 탱크를 무력화시키며 전세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TB-2의 활약으로 방위산업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튀르키예가 방산 강국으로 부상했다. 러시아도 자국 드론을 동원하고 있는 가운데 공격용 드론을 방어하기 위한 안티 드론 경쟁도 치열하다.
∎원전 등 일상의 위협이 된 무인기 공격
무인기의 확산은 원전, 공항 등 우리의 일상 속 위협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2019년 1급 국가보안시설인 고리 원전 인근 상공을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이틀 연속 비행하는 비상 상황이 발생했다. 당초 경찰과 군이 출동해 비행체 조종사를 추적했지만 출몰한 드론이 군사용인지 일반 동호인 활동인지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하면서 드론 공격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회에서도 원전의 허술한 드론 방호 체계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수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2021년 탐지-RF 스캐너와 휴대용 전파 교란기 ‘재밍건’을 도입했다. 또 올해 6월에는 원전에서 드론 대응 장비 실습 훈련을 실시했고 7월에는 원자력통제기술원 고리본부 드론 대응 장비 특별점검도 벌였다. 8월에 실시된 ‘을지 자유의 방패’ 한미 연합훈련에서도 원전 테러와 드론 공격 대응 훈련이 실시됐다. 그러나 이번 북 무인기 침범에서 보듯 실제 상황에서 원전의 방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드론 전쟁 시대 대응책 시급하다
북한은 현재 소형 폭탄을 장착해 투하할 정도의 드론을 운영하고 있지만 미사일 발사 등을 할 수 있는 이른바 ‘킬러 드론’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달 초 평안북도의 한 공군기지를 촬영한 위성사진에서 중국제 킬러 드론과 비슷한 신형 무인기가 포착됐다. 미 국방전문 매체 디펜스도 북한 방현 공군기지에서 중국산 무인기와 유사한 신형 무인기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이미 지난해 당 8차 대회에서 중고도 무인기 개발에 주력하기로 선포한 상황이어서 북한판 킬러 드론 등장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우리 군의 대응에도 비상이 걸렸다. 국방부는 레이저 대공 무기 등 북 무인기 대응 전력 확보와 연구에 내년부터 5년간 5600억 원을 투입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시한 드론 부대 창설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날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속도감 있게 대응할 수 있느냐다. 원전과 공항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국가 주요 시설 방어 대책도 과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의 자포리카 원전에 대한 드론 공격 위협이 이슈가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원전의 경우 두터운 콘크리트 벽으로 된 격납 건물의 안전성은 신뢰할 만하다고 본다. 다만 기타 시설들이 드론 공격을 받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취약할 수 있는 시설로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소를 꼽았다. 정부가 고리 등 원전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건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마당에 철저한 대책이 필요하다.
2022-12-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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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도시철도 무임승차 “더는 못 참겠다”
전국의 도시철도 무임승차로 인한 재정 적자 문제가 이제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그동안 정부에 여러 번 무임승차로 인한 재정 적자 보전을 요구해 온 지자체가 요금 인상을 통한 자구책을 직접 모색하는 양상이다.
그 첫 테이프를 최근 서울시가 끊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9일 매년 1조 원 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는 서울 도시철도에 대해 정부가 손실 보전을 해 주지 않으면 내년에 요금 인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 것이다. 오 시장이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 해소를 위해 도시철도의 요금 인상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 파장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 한계에 이른 도시철도 재정 적자
오 시장이 도시철도 적자에 대해 정부에 포문을 연 것은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 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 시장은 “정부가 도와주지 않는 것으로 정리된다면 요금 인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수 있다”며 자구책 마련을 선언했다.
서울 도시철도를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의 당기 순손실은 2020년 1조 1137억 원, 지난해엔 9644억 원이었다. 이 가운데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액은 25% 안팎인 2700억 원 정도. 그 이전 3년 동안엔 무임승차 손실액 비중이 60%를 넘었으나, 코로나 여파 등으로 다소 줄었다.
비교적 재정 상태가 나은 서울시에 비해 부산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초고령화 도시인 부산의 경우 도시철도 무임승차 비율은 서울보다 2배가량 높다. 이로 인한 부산교통공사의 당기 순손실은 2020년 2634억 원, 지난해엔 1948억 원이었다. 이중 무임승차 비중은 2020년 40%인 1045억 원, 지난해에는 1090억 원으로 56%에 달했다. 역시 코로나 여파로 인한 유동인구 감소가 무임승차 손실 비중을 다소 낮춘 요인이 됐다.
그 이전인 2019년엔 92%, 2018년 79%, 2017년 84%로 사실상 무임승차 손실액이 당기 순손실액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미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부산은 무임승차 인원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앞으로도 이 비중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 코레일은 보전, 도시철도는 외면
현재 정부는 철도산업발전기본법에 근거해 코레일에 대해선 무임 수송에 따른 손실의 60%가량을 매년 보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노인복지법에 따라 65세 이상 노인에게 무임승차를 제공하고 있는 도시철도에 대해선 도시철도법에 이와 관련된 규정이 없다.
도시철도를 운영 중인 지자체들은 1984년 5월 당시 정부가 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100% 요금 면제 제도를 도입해 놓은 뒤 이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지자체에만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부는 지자체의 손실 보전 요구에 대해 도시철도는 운영 도시의 노인층 등 특정 계층만 혜택을 보기 때문에 국비 지원을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에 대한 무임승차는 정부의 결정이었지만, 이는 보편복지가 아니라 특정 이용자에만 한정되는 혜택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무임승차 손실액을 지원하면 도시철도가 없는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어 현재로선 지자체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 더는 외면 곤란, 현실적 대책 필요
정부의 입장은 여전히 강경한데, 무임승차로 인한 재정 적자는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더는 이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도시철도를 운영하는 각 지자체가 협의를 통해 현실적인 대책 모색에 나서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특히 내년부터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를 상징하는 ‘58년생 개띠’부터 만 65세로 접어들면서 무임승차 인구도 크게 늘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에 따라 무임승차 연령을 더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법률 개정 사항이어서 여야 간 합의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일단 우리 현실에 맞는 조건을 달아 탄력적인 운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계 주요국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100% 무료인 나라가 없는 만큼 전액 무료가 아닌 부분 할인 또는 소득 수준에 따른 혜택 부여나 무료 승차 시간대의 탄력적 운용 등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 당장 전액 국비 지원이 부담스럽다면 무임승차 손실액의 5% 또는 10% 정도로 조금씩 지원하면서 향후 인구 추계에 따른 기준 상향 등 여러 대안을 중장기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거나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자체장 중 처음 이 문제를 공식 제기한 이상 정부도 마냥 이를 외면하기가 어려워졌다. 무임승차 비율이 더 높은 부산을 비롯한 다른 지자체들도 잇따라 공식적인 의견을 표명할 가능성도 매우 커졌다.
도시철도 무임승차 문제는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의 이동권이라는 기본권과 연결된 데다가 보편복지와 지역 간 형평성, 여기다 달라진 사회적 인식까지 아울러야 하는 고차원의 방정식이 됐다. 정부도 더는 이 문제를 지자체에만 맡겨 둘 게 아니라 당면한 과제로 인식해 지자체와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단계가 됐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2-12-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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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전직 대통령 검찰 포토라인 비극 재연될까?
역대 대통령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초라했다. 대통령의 비극적인 운명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끊이지 않았다. 우리 대통령들의 반복되는 불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검찰의 칼끝은 점점…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등과 관련한 검찰의 수사가 문재인 전 정권의 핵심인 서훈(구속기소) 전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해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 박지원 전 국정원장으로까지 올라갔다. 현 정부가 ‘중대한 국가범죄’로 규정한 원전 경제성 조작,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 이정근발 친문 게이트 등에 대한 사정 칼날이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검찰의 사정 한파는 깊어 가는 겨울과 함께 문재인 전 대통령으로까지 매섭게 몰아칠 것인지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15일 서해 피격 사건과 관련한 국정원 보고서 삭제 지시 의혹에 대해 검찰 조사를 받은 뒤 언론 인터뷰에서 “검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는지는 묻지 않았다”며 “제가 받은 감으로는 (수사가) 문 전 대통령이 아니고 제 선에서 끝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국정원이 그를 첩보 보고서 삭제 지시 혐의로 고발한 지 5개월 만의 소환 조사였다.
하지만, 박 전 원장 검찰 조사 하루 전인 14일 북한군에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고(故) 이대준 씨 유족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직무유기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검찰로서는 언제든지 서면 혹은 대면 조사 형태로 문 전 대통령을 소환할 수단을 갖게 된 셈이다.
■하야, 시해, 검찰 수사, 구속…대통령 수난사
수많은 국민의 환호 아래 영광과 기대로 시작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은 화려한 출발과 달리 끝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 재임 기간, 혹은 퇴임 후 본인 비리에서부터 측근·친인척 비리에 휘말렸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이승만(1~3대), 윤보선(제4대), 박정희(제5~9대), 최규하(제10대), 전두환(제11~12대), 노태우(제13대), 김영삼(제14대), 김대중(제15대), 노무현(제16대), 이명박(제17대), 박근혜(제18대), 문재인(제19대)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쳤다.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은 4·19 혁명에 의해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라 결국 사후에 유해로 돌아왔다. 경제개발에 성공한 박정희는 심복에게 피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전두환, 노태우는 5·18 광주 민주항쟁을 유혈로 진압한 뒤 집권했으나, 퇴임 이후 수감됐다. 민주화 시대를 연 김영삼, 김대중도 재임 시절 아들이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정치 개혁과 높은 도덕성이 강점이었던 노무현은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서거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명박, 박근혜는 임기 직후 수감됐다.
■대통령의 비극, 반복되는 이유는
정권이 바뀌면 흔히 전 정권의 정책을 지우려는 경향은 어느 국가에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검찰 등 수사권을 동원하는 사법적인 처리가 주를 이루는 선진국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통령의 리더십과 도덕적, 정치적 자질 부족이라는 개인적인 자질론도 첫 번째 이유다.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제왕적 권력 구조 때문이라는 평가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치 구도와 정치 문화로 이를 바라봐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 세력이 정권 장악과 유지를 위해 상대방의 실패를 조장하고, 극한의 대치를 펼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주요한 원인이라는 뜻이다. 대통령 입장에서 야당 등 반대 세력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정권을 전복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면서, 검찰을 통한 정치적 반격을 시도하는 행태가 반복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정권 전복 세력’으로 인식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이명박과 노무현 관계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일어난 미국 소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 시위를 청와대 뒷산에서 보고 나서는 ‘항의나 비판을 위한 시위가 아니라, 정권 퇴진이나 전복의 기도’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결국 정권이 수세에 몰리면서 ‘화해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인식을 갖고 사정 권력으로 반격했다는 것이 정치권의 정론이다.
역대 정권이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상대방의 존재를 동반자나 경쟁자로 여기기보다는 소탕해야 하는 '적'으로 인식하는 경향과 문화가 고착되고 있다. 이는 진보와 보수 정권 모두 해당된다. 같은 당, 같은 이념 성향의 정권에서도 비슷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안타깝고 부끄러운 일
한국 헌정 역사상 거의 매번 역대 대통령과 그 가족에게 다가가는 비극적 장면을 보는 대다수 국민의 마음은 좋을 수가 없다. 반대편 지지자들에게는 행여나 복수감에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국가와 국민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이라 해도 범죄 혐의가 있거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수사를 받아야 하고 법적으로 책임질 일이 있으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비극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통치를 받은 한국인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법 앞에서는 전직 대통령도 평등해야 한다. 2018년 이명박 구속 수사를 앞둔 상황에서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불구속 수사를 한다면 대한민국 정의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12월 7일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의미의 통치행위라는 건 민주국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결국 대통령의 성역과 치외법권은 없어졌다는 시대적 상황을 여야 정치권과 법조계 스스로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이 생기게 될 그날…”
역대 대통령의 수난과 관련해 통합과 포용의 정치 문화가 가장 아쉽다는 것이 중론이다. 자신은 무조건 옳고 상대는 항상 틀렸다는 편향적 태도로는 협상과 통합의 정치가 불가능하다. 대화와 절충, 존중과 배려의 정치 문화가 꼭 필요하다. 적개심과 분노, 보복에 휩쓸린 역대 대통령의 비극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사회 성숙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혹은 정치 구조와 문화의 탓이라고 하더라도, 매번 일어나는 비극을 방치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잘못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노력, 논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역사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대통령의 비극, 한국 정치의 불행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치학자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고 밝혔다. 과거 정권의 적폐 청산에 이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수사 등의 잘잘못을 떠나,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민과 정치권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어두웠던 과거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포용과 통합의 지혜를 짜내야 한다.
정치권 한 원로는 “바라건대, 우리에게도 다시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이 생기게 될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 70년을 넘었지만, 행복한 대통령, 존경 받는 대통령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2022-12-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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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온라인 불법 토토, 청소년 호주머니까지?
■ 교실 덮친 월드컵 도박
“3만 원 걸어서 50만 원까지 따 봤습니다.”
스포츠 도박이 학생들의 호주머니까지 덮치는 시대다. 비대면 사회와 온라인 기술이 겹치고 카타르 월드컵이 불을 지폈다. 지금 온라인 곳곳에 ‘베팅하라’는 유도 광고가 넘쳐난다. 월드컵 경기 결과를 예측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이다. 현재 불법 도박 사이트는 휴대전화와 입출금 계좌만 있으면 손쉽게 이용 가능하다. 성인 인증도 필요 없다.
“평소에도 한 반에 4, 5명 정도는 불법 토토를 했는데, 월드컵 기간에 최소 두 배는 늘어난 것 같아요.” 수능이 끝난 교실은 어느새 베팅 방법을 주고받는 정보 교환의 장이 됐다. 어떻게 베팅해서 얼마만큼의 돈을 벌었다는 신기루 같은 경험담이 떠다닌다. 신규 회원을 유도하면 보너스를 주는 이벤트까지 나와 불법 도박을 부추기는 모양새다. 그 옛날, 동전이나 구슬로 놀던 ‘짤짤이’는 애교 수준인 것이다.
■ 불법의 강렬한 유혹
우리나라에서 합법적 스포츠 베팅은 스포츠토토뿐이다. 다른 건 불법이고 이용하면 처벌받는다. 스포츠토토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이 발행한다. 승패와 득점 점수를 맞히면 투자한 금액에 지정된 배율을 곱해 돌려주는데 베팅 금액은 최대 10만 원으로 제한된다. 청소년은 이마저 이용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선 청소년 도박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법 도박 사이트는 기승이다. 스포츠토토와 달리 베팅 시간이나 상한액이 정해져 있지 않고 배당률이 높아서다. 단순히 승패나 득점 외에도 경기 첫 득점자, 첫 경고 선수 맞추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베팅을 유도한다. 재미 삼아 무심코 시작했다가는 도박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행성과 중독성이 강하단 얘기다. 이들 불법 도박 사이트는 ‘국가 허용 스포츠 베팅’이라 광고하지만 모두 허위다.
■ 무섭게 몰리는 자금
불법 스포츠 도박은 나이, 성별, 직업을 안 가린다. 이미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통계 수치가 말해 준다. 얼마 전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실태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2018년 8월부터 2019년 9월까지 1년간 불법 도박에 몰린 돈은 81조 5474억 원. 이 중 스포츠 도박이 50조 5106억 원으로 가장 많았다. 합법적 사행산업 전체의 지난해 매출(14조 3758억 원)과 견줘 볼 때 엄청난 규모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불법 스포츠 도박에 따른 세금·기금 포탈액도 2016~2022년 5년간 약 3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비해 단속과 검거는 걸음마 수준이다. 현실적으로 사이트 대부분이 해외에 인터넷 주소(IP)를 두고 있으니 단속 자체가 어렵다. 방송통신위원회 감시 기능도 차단 요청부터 의결하고 조치하는 데까지 몇 주가 걸려 실효성이 떨어진다. 도박 시장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무대를 옮긴 뒤로 단속이 기술을 못 따라가는 게 근본적인 원인이다. 불법 스포츠 도박 검거율은 2018년 61.5%에서 2022년 8월 기준 28%로 절반 이상 떨어졌다.
■ 한탕주의에 빠진 사람들
불법 도박판을 벌이는 업체든 베팅에 사활을 건 사람이든 노리는 건 똑같다. ‘한탕’이다. 베트남 등 해외에서 10년이나 도피 생활을 하던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 운영자들이 지난해 경찰에 붙잡혔는데, 이들의 불법 자금 규모는 무려 1조 2000억 원이었다. 지난 1일에는 4년간 1886억 원가량을 챙긴 일당 9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반대편에 인생을 도박에 탕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이 감당 못하자 회삿돈을 횡령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돈을 잃으니 오기가 생깁디다. 하루종일 다음 경기 베팅 생각밖에 안 합니다.” 대부분 소소한 금액으로 시작했다가 서서히 중독의 수렁에 빠져들고 끝내 헤어나지 못하겠더라는 호소다. 2018년 19세 이상 국민 4300여만 명 중 150여만 명이 불법 스포츠 도박을 경험했다는 사행산업통합감독위 보고서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온라인 커뮤니티는 도박에 일상을 저당 잡힌 사람들의 욕망으로 어지럽다.
■ 대책은 없는 것인가
국내 사행산업의 지각변동을 가져온 건 역시 코로나19였다. 그 여파로 합법적 사행산업은 고사 위기, 반면 불법 스포츠 도박 시장은 거침없는 확산 추세다. 이 불균형의 폐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우선 “양성화”라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먼저 들린다. 스포츠 승부 예측 게임을 합법적 공간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포츠토토의 경우, 주요 소비층은 나이가 들었고 MZ세대들의 유입은 아직은 미진하다. 종목과 상품 등의 규제를 일정 부분 풀어서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북미와 유럽은 이미 합법화 정책으로 산업 발전의 한 축으로 삼고 있다 한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엄격한 총량제라든지 제한된 배당률 때문에 불법 쪽으로 스포츠팬들이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현실에 맞게 법적,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단 얘기다.
물론 반론도 있다. 월드컵 열기는 다른 도박 시장의 분산된 돈마저 흡수할 가능성이 높다.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도박 자금이 스포츠토토 한곳으로 몰리는 게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베팅 금액이 커지면 도박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들썩거릴 것이다. 이 또한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 건전한 게임으로 즐기려면
정책적, 제도적 차원의 대책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중요하다. 도박 중독에 빠진 뇌는 중독 대상에만 반응해 일상의 즐거움을 앗아간다. 결국 그 끝은 삶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뇌의 변화는 어릴수록 복구하기가 어려운 만큼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최근 스포츠토토의 ‘불법 스포츠 도박 근절 캠페인’도 그 중독성과 위험성을 환기시키기 위한 일환이다. 월드컵 기간인 지난달 21일부터 시작해 이달 19일까지 이어진다. 불법 사이트 제보에 최대 2억 원의 포상금이 주어지는 이벤트도 있다. 불법 도박은 우리 사회가 다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다.
2022-12-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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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북핵 자금줄, 가상화폐 탈취를 막아라
나흘 전인 지난달 29일은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 5주년이었다. 북한은 2017년 11월 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시험 발사 성공 후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었다. 선언 5주년을 맞아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달 18일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 ‘화성-17형’ 발사를 비롯, 그동안 이룩한 국방력 강화 성과를 선전하며 적대 세력(미국)과의 정면 대결 의지를 재확인했다. ICBM ‘화성-17형’ 발사 당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둘째 딸을 대동해 발사 공로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를 두고 4대를 이은 핵 세습 의지를 드러냈다는 해석도 나온다. 지난달 24일에는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한국의 대북 독자 제재 추진에 반발해 윤석열 정부를 비난하고 ‘서울 과녁’을 언급하며 서울을 직접 타격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선을 넘은 미사일 도발
북한 핵무력 완성 선언 5주년인 올 들어 7차 핵 실험이나 ICBM ‘화성-17형’ 정상 각도(30∼45도) 발사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는 최근 북측의 핵 위협 발언과 미사일 발사의 수위가 매우 위협적인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미사일 무력 도발 빈도가 잦아 올해에만 벌써 30회를 넘겼다. 북한이 전임 문재인 정부 시절 5년 동안 감행한 미사일 발사 횟수보다 많은 수치다. 미사일 종류도 ICBM과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저고도, 고고도, 극초음속, 회피기동 등 다양하다. 발사 플랫폼 역시 고정 발사대에서 이동형 트럭, 열차, 저수지 등으로 다변화했다. 여러 곳에서 수발의 미사일을 동시에 쏘는가 하면 사거리도 불문이다.
급기야 지난달 2일 하루에만 4회에 걸쳐 무려 25발의 미사일을 쏘아 댔다. 그중 한 발은 울릉도를 향해 날아가다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NLL(북방한계선) 이남 동해에 떨어졌다. 북한의 실질적인 우리 영토 침해로 울릉도에 사상 처음 공습경보가 발령되고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이날 북한은 우리 군(軍)의 “사실무근” 주장에도 불구하고 울산 앞바다 80㎞ 부근 공해상에 저고도 순항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고 발표해 불안감을 조성했다. 북한은 지난 9월 선제적 핵 공격을 합리화한 ‘핵무력 정책법’을 제정한 뒤 더욱 공세적이고 위협적인 무력 도발에 나서는 모양새다.
■핵·미사일 개발 재원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된다. 북한의 핵 개발과 잇단 미사일 도발은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사회의 장기적인 고강도 제재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국제적 대북 경제 제재까지 겹친 북한의 국가 살림살이와 민생은 아마도 파탄 일보 직전 상태일 텐데, 어떻게 이 같은 일이 가능할까? 국방연구원에 따르면 ICBM 한 발 제조에 최소 2000만 달러(280억 원), IRBM은 1000만 달러(140억 원), SRBM의 경우 300만 달러(42억 원)가 필요하다. 북한이 총 25발의 미사일을 쏜 지난달 2일에만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썼다는 게 미국의 국방 분야 싱크탱크 중 하나인 랜드연구소의 분석이다. 현재 알려진 북한의 열악한 경제 상황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재원에 대한 궁금증은 지난달 17일 한국 외교부와 미국 국무부가 서울에서 개최한 ‘북한 암호화폐 탈취 대응 한·미 공동 민관 심포지엄’에서 풀렸다. 이날 행사에서 김건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북한이 불법 사이버 활동으로 매년 막대한 규모의 개발 자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힌 것.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에 따른 국제사회 제재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해킹 등을 통한 암호화폐 탈취를 새로운 자금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이틀 전인 15일 미연방 하원 국토안보위원회에서 열린 ‘미국에 대한 세계 전역의 위협 청문회’에 출석한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미 국토안보부 장관이 북한은 지난 2년간 사이버 절도 행위로 10억 달러(1조 3250억 원) 이상을 확보해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생산에 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한 데서 확인된다.
■가상화폐 해킹이 새 자금줄
북한의 사이버 절도는 랜섬웨어(Ransomware) 공격과 가상화폐 해킹이 주를 이룬다. 랜섬웨어란 몸값(Ransom)과 소프트웨어(Software)의 합성어다. 시스템을 잠그거나 데이터를 암호화해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이를 볼모로 해 금전을 요구하는 악성 프로그램을 일컫는다. 특히 가상화폐 해킹은 북한이 매년 불법 사이버 범죄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국내외 군사·안보 전문가들과 해외 가상자산 관련 업계는 판단하고 있다. 미국 블록체인 분석기업인 체이널리시스는 올 8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북한이 올해 탈취한 가상화폐만 10억 달러(1조 3250억 원)라고 주장했을 정도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마요르카스 미 국토안보부 장관이 하원 청문회에서 밝힌 북한의 최근 1년간 전체 사이버 절도 금액 추정치와 맞먹는 규모인 데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허를 찔려 북핵과 미사일 개발의 돈줄을 말리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또 한 해 동안 가상화폐 해킹으로만 벌어들인 돈이 지난해 북한 1년 전체 예산 91억 달러(12조 원)의 10% 이상을 차지할 만큼 거액이기 때문이다.
체이널리시스는 이어 9월 8일 북한의 가상화폐 탈취 방법도 공개했다. △비트코인과 함께 대표적인 가상화폐로 꼽히는 이더리움 탈취와 취합 △취합된 이더리움을 쪼개 흔적 없애기(믹서·mixer) △쪼개진 이더리움을 비트코인으로 각개 교환 △각개로 교환된 비트코인을 일괄적으로 혼합 △가상화폐-현금 전환 서비스를 통한 인출 등 5단계다. 북한 해커들을 포함한 가상화폐 해킹 조직은 이 같은 절차를 밟아 가상화폐를 탈취해 세탁 과정을 거친 뒤 현금 자산으로 전환해 보유한다고 한다. 이들은 가상화폐 세탁 시 1만 2000개가 넘는 지갑(계좌) 주소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쉽게 말하자면, 북한 해커들은 주로 외국 금융기관 결제 시스템과 가상화폐거래소의 암호화폐 지갑(핫 월렛)에서 악성코드, 피싱 등으로 가상화폐를 훔쳐 북한 해커 소유 지갑으로 송금한 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믹싱(mixing) 기술을 활용해 자금을 세탁하고 현금화한다. 최근 미국 정부에 포착된 북한의 해킹 사례로는 지난 3월 북한과 연계된 한 해킹 조직이 베트남의 블록체인 게임업체가 개발한 게임 ‘엑시 인피니티’의 네트워크를 해킹해 6억 2000만 달러(8300억 원) 상당의 암호화폐를 빼돌린 사건이 유명하다.
■테러용 사이버부대가 원조
북한의 불법 사이버 활동의 출발점은 1990년대 김정일 체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 지시로 사이버부대가 창설됐다. 사이버 테러와 해킹을 투자 대비 효과가 가장 큰 신종 공격 수단으로 본 것이다. 사이버부대는 정찰총국 산하에서 미국 등 강대국과 우리나라에 대한 각종 사이버 공격으로 시스템을 무력화하고, 해킹을 통해 기밀 자료를 훔치는 데 주력했다. 더불어 외국 금융기관 사이트를 해킹해 외화를 탈취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경제 제재로 달러 확보가 힘들어지자 사이버 범죄가 새롭고 강력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김정은 체제에서는 이 같은 사이버전을 핵무기와 함께 ‘양대 보검’으로 부르며 사이버 조직을 더욱 강화해 왔다. 북한 국방위원회 산하 인민군 총참모부가 육성해 운영하는 해커 규모는 최소 6000명가량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최상위 300~500명은 미 첩보기관인 국가안보국(NSA) 해커 그룹과 대등한 실력을 갖췄다는 분석이다. 북한 해커들은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의 해킹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라자루스, 안다리엘, 블루노로프, 김수키, 비글보이즈 등이 북한과 연계된 해커 조직으로 언급된다.
■北 가상화폐 거래 봉쇄해야
2017년부터 북한의 사이버 외화벌이 활동은 상대적으로 보안 수준이 낮고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가상화폐 해킹으로 이동해 가상화폐 탈취 사건이 잦아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제 사이버 범죄 대응력과 수사력이 떨어지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사이버 공격의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큰돈이 모이고 규제는 약한 우리나라 가상화폐 시장도 최근 몇 년 새 북한의 해킹 먹잇감이 되고 있다. 국내의 경우 2017년부터 4건의 북한 가상화폐 탈취 사건이 발생해 피해액이 1000억 원에 달한다. 북한의 마르지 않는 자금원으로 떠오른 가상화폐 탈취 행위를 차단하기 위해선 불법 사이버 활동 사례와 자주 사용되는 악성코드, 해커 신상 등에 관한 정보를 국제적으로 공유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성이 절실하다. 한·미를 중심으로 서방 국가들 간 공조 체계를 구축하고 북한의 가상화폐 거래를 원천 봉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외교부와 미 국무부가 ‘북한 암호화폐 탈취 대응 한·미 공동 민관 심포지엄’을 마련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북한이 가상화폐에 힘입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며 군사적 도발을 지속하는 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정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전 세계 평화마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우려되는 건 7차 핵 실험 가능성이다. 북한 무력 도발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우리나라 자체적으로는 기존 사이버 안보 체계의 강화가 요구된다. 갈수록 고도화되고 정교해지고 있는 북한의 해킹 수법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최근 국가정보원이 입법 예고한 ‘국가사이버안보기본법’(사이버안보법) 제정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이 법안이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원 비대화와 민간 사찰 우려가 적극 반영돼 수정 제정된다면, 대통령실 소속 국가사이버안보위원회가 컨트롤타워가 돼 국내외 사이버 공격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을 전망이다.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이 7차 핵 실험을 할 경우 지금까지 취하지 않았던 대응들을 꺼내들 것임을 시사했다. 남북 관계가 더는 악화일로로 치닫지 않기를 바란다.
2022-12-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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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노래도 못 부르게 하나!
■부마민주항쟁과 ‘늑대가 나타났다’
지난달 16일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은 부마항쟁의 정신과 성과를 기리기 위해 매년 행정안전부와 부마진상규명위원회가 주최하고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하 재단)이 주관하는 행사다. 행안부가 이날 기념식에 출연 예정이던 가수 이랑의 노래를 제지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랑은 재단의 요청으로 자신의 대표곡인 ‘늑대가 나타났다’를 부를 예정이었다. 우리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현했는데, 지난해 8월 발표돼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노래다. 당초 재단은 올해 기념식에서 이 곡을 꼭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연을 앞두고 행안부가 “무색무취한 기념식을 원한다”며 재단에 해당 노래를 뺄 것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행안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는 입장이라 재단은 이를 무시하지 못하고 이랑에게 다른 노래를 요청했지만 이랑이 거부하자 결국 다른 가수와 감독을 뽑아 행사를 진행했다는 게 의혹의 골자다. 과거 군사정권의 대중음악 검열과 금지곡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금지곡, 그 우울한 기억을 되살리다
권력이 민중을 억압하며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한 노래는 동서고금에 으레 있었다. 우리의 경우 그 상처는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것이 특히 아프게 남아 있다. 일제는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 정책을 활용했다. 한편으로는 저항과 독립 의지를 담은 노래를 금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강점을 정당화하는 장려곡을 강권했다.
특히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레코드 취체규칙’을 통해 발매되는 음반을 검열했다. 치안방해, 풍속괴란을 이유로 여러 음반들이 금지됐는데, ‘아리랑’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눈물젖은 두만강’ ‘꿈꾸는 백마강’ 등이 대표적인 금지곡이었다.
그 바통을 박정희 정권이 이어받았는데, 1970년대 유신체제로 들어서면서 검열이 유달리 강화되며 수많은 금지곡이 탄생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와 함께 ‘공연활동 정화대책’이 발표되면서 그해에만 무려 220여 곡이 금지됐다.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이장희의 ‘그건 너’가 당시 최고 권력자를 향해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라고 비판했다고 해서 금지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금지곡들은 점차 해제됐고, 1996년 대중음악의 검열을 담당했던 공연윤리위원회와 심의제도가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받음으로써 금지곡은 역사 속으로만 사라진 줄로만 사람들은 알았다.
■윤석열 대통령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하다
하지만 금지곡 트라우마는 이후에도 우리 국민의 뇌리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민중가요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이 좋은 사례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5월 18일’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이후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사정은 바뀌었다. 2009년 기념식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식순에서 아예 빼 버렸다. 박근혜 정부 때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창이 아닌 합창 형태로 불렸다. 제창은 참석자들이 다 같이 부르는 것이고, 합창은 합창단이 따로 부르는 것을 말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합창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인정하지 않거나 최소한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에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두 정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렇게 금기시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제창 형태로 불렸는데, 올해 5월 18일 윤석열 대통령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윤 대통령만이 아니라 국민의힘 의원 다수가 제창에 동참했다. 세상이 확실히 바뀌었구나, 하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시 이랑으로…, “노래도 못 부르게 하나!”
그런데 ‘늑대가 나타났다’ 논란이, 그것도 부마항쟁기념식과 관련해 불거진 것이다. 행안부는 지난 22일 설명자료를 통해 “기념식 행사에 특정 곡을 검열한 사실이 없으며 총감독과 가수 교체를 요청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념식이 미래 세대와 부마항쟁의 성과를 공유한다는 취지에 부합하도록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검토해 달라는 의견을 재단에 전달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행안부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재단이 이랑에게 ‘늑대가 나타났다’ 대신 다른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감독과 가수를 교체한 사실은 엄연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재단이 권력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해 시쳇말로 알아서 기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역시 금지곡 시대의 음울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하겠다.
‘운율이 있는 언어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노래의 사전적 정의다. 노래에 사상과 감정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이며, 특정 노래를 배척하는 건 그 노래에 녹아 있는 사상과 감정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 배척의 주체가 권력자 또는 정치체제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윤석열 정부를 향해 “질문도 못하게 하나” “그림도 맘대로 못 그리게 하나”라며 항의하는 모습을 근래 자주 보게 된다. 거기에 “노래까지 못 부르게 하나”라는 외침까지 더해지게 됐다. 왜 그런가.
2022-11-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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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아파트값 올리려다 빛 공해·에너지 위기만 초래
■값싼 에너지 시대는 지나가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위기가 전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러시아가 서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밸브를 잠그면서 유럽의 가스 비축량이 내년 3월에는 5% 수준으로 하락한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올수록 에너지 위기가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전기 공급 자체가 끊긴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서유럽은 이번 겨울을 나기 위해 실내 난방은 물론이고 조명과 온수 공급 시간까지 제한하는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NATO 중심의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 호주, 카타르 등을 통해 천연가스 확보에 나서고 있다. 결국 이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 3개 국가에서 60% 이상을 수입하는 한국에도 수입 가격 인상은 물론이고 물량 확보에 부담이 되고 있다. 올 들어 10월까지 에너지 수입액은 1587억 달러로 지난해에 비해 82%나 급증했다. 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안팎으로 치솟았고, LNG(액화천연가스) 가격은 지난해보다 180%, 석탄은 60% 넘게 급등한 탓이다. 원유·가스·석탄 등 3대 에너지원의 수입액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무역수지는 지난 4월 이후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고물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된다. 한전과 한국가스공사의 적자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한전과 가스공사의 부실을 해결하려면 전기·가스요금을 한꺼번에 40% 이상 올리거나, 수십조 원의 국가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상황이다.
정부는 가스·원유 등 대규모 에너지 수입이 무역적자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함에 따라 공공부문 중심으로 동계 적정 실내온도 유지, 난방사용 자제 등 강도 높은 에너지 절약을 펼치기로 했다.
■인공조명 오염도 세계 2위
싼값에 풍족한 에너지를 누려 온 한국은 여전히 ‘풍부한 전기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업·주거시설마다 난방과 에어컨이 전기를 소모하고 있다. 최근에는 모텔이나 아파트, 공공시설 곳곳에 경쟁적으로 야간 인공조명을 설치하면서 ‘빛 공해’의 피해가 심각한 지경이다. 산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야간골프도 성행하고 있다. 값싼 에너지에 취해 위기를 애써 외면하려는 모양새다.
빛 공해는 지나치게 강한 인공조명으로 수면을 방해하거나 보행자의 눈부심을 일으키는 등 생활환경에 불편을 주는 공해를 뜻한다. 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각종 네온사인, 상점·빌딩 조명, 디지털 광고판, 가로등 조명이 과도하게 많이 설치돼 인공조명에 의한 오염이 G20(주요 20국) 가운데 이탈리아와 함께 최악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인공위성으로 밤하늘을 살펴본 결과 한국은 688μcd/m² 이상의 인공 밝기로 은하수를 볼 수 없는 인구가 전체의 91%에 달해 조사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95.9%)에 이어 2위, 빛 공해 피해 지역 비율도 89.4%로 G20 국가 가운데 이탈리아(90.3%)에 이어 두 번째로 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빛 공해로 잠들지 못하는 대한민국
“건너편 아파트 불빛 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힘들 지경입니다. 한여름 더위에도 밤에 창문을 열지 못하고 암막 커튼이 있어야 잠들 수 있습니다.” 도심 곳곳이 빛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상가와 오피스텔, 모텔, 아파트 외벽과 옥상 등에 우후죽순 설치되고 있는 조명 기구 불빛으로 인한 빛 공해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부산은 해운대 마린시티 및 엘시티, 남구 용호동 더블유 등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옥상에 잇따라 조명을 설치하고 있다.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의 경우 아이파크 불빛 때문에 다른 아파트 주민들의 불만이 쇄도하고 있다. A 아파트 입주민들은 “아파트 옥상에 밤 늦게 켜진 아이파크 옥상 조명 때문에 밤에도 창문 암막 커튼을 쳐놓고 살면서 압박감과 폐쇄공포증이 심각해지고 있다”면서 “편안하게 자야 할 시간까지 건너편 아파트 옥상 불빛으로 수면에 방해를 받아 관할 구청에 민원을 아무리 제기해도 전혀 효과가 없다”고 호소한다. 주민들은 “가뜩이나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전기가 모자란다고 하는 상황에서 이웃의 불편만 야기하는 야간조명을 켜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아파트 야간조명은 ‘랜드마크를 위한 경관 조명’ 차원에서 새 아파트에서 주로 실시됐지만, 구축 아파트에도 퍼지고 있다. 아파트 가격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옥탑은 물론이고, 길에서 보이는 측벽에만 세로로 조명을 설치하면서 이웃과 불편을 야기하고 있다.
특히, 부산 남구 용호동 더블유의 옥탑부 조명이 유행하면서, 기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자기들 아파트도 조명을 보완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A건설사 관계자는 “아파트에 세로 형태로 야간조명을 할 경우 건물의 웅장함과 도시적인 이미지, 새 아파트 같은 느낌이 강해지면서 입주자의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면서 “LED 조명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야간조명을 시공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소송·민원도 줄이어
아파트 가격을 올리기 위한 무리한 조명 설치로 인한 소송도 줄을 잇고 있다. 부산지법 민사11부(전우석 부장판사)는 11월 3일 부산 동래구의 한 아파트 주민 A씨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입주자대표회의가 A씨에게 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아파트 가격을 올리려고 옥상 등에 설치한 경관용 조명기구로 입주민이 빛 공해에 시달렸다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라고 판결했다. 이 아파트는 지난해 5월 아파트 문주와 옥상 등에 LED 자체발광형 조명 기구를 설치하고 하루에 5시간씩 점등했다. 외부에서 아파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 아파트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해 집값을 올리려는 목적이었다. 동래구의 의뢰로 한국환경공단이 조명 기구 3곳의 밝기를 측정하니 기준치의 수백 배 이상을 넘었다. 밝기가 심한 곳은 21만 9906cd/㎡이 기록됐는데, 이는 ‘인공조명에 의한 빛 공해 방지법’상 기준인 평균 25cd/㎡를 8796배 초과한 수치다.
결국 인근 주민이 “빛 공해에 시달려 불면·불안 등 스트레스 진단을 받았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거주하는 등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해 법원으로부터 “빛 공해는 일종의 환경오염으로, 조명으로 인한 빛 공해는 사회 통념상 수인한도를 초과했으며, 원인자에게 귀책사유가 없더라도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조명 기구는 아파트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사회적 유용성이 있다거나 공공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또한, 조명 점등 시간인 19시부터 24시까지는 수면장애를 초래할 수 있는 시간대이고, 원고 스스로 암막 커튼을 치거나 창문 필름을 부착하는 등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스스로 손해를 입지 않도록 조치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빛 공해’로 인한 민원은 전국적으로 매년 3000여 건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7월에도 전북 군산 한 아파트 주민들이 맞은편 건물 외벽에 설치된 과도한 조명에서 발생하는 빛이 밤늦게까지 거실과 방으로 들어와 깊은 잠을 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과도한 조명을 없애든지 아니면 줄여서라도 생활권에 침해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비만, 반딧불이 실종 등 환경·건강에도 악영향
밤에 각종 조명으로 빛 공해에 시달리는 사람은 비만과 불면증에 노출될 위험도가 높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도 나왔다. 식물의 경우 성장에 영향을 받고, 여름이면 도심에서 한밤중까지 울어 대는 매미, 산란기가 앞당겨진 개구리, 도시의 빛 때문에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 반딧불이 등이 모두 빛 공해의 그늘이다.
뷔셀의원 이광미(가정의학과) 원장은 “빛은 체내의 생체 리듬을 조절하는데 아침에 햇빛을 쬐면 체내시계가 24시간으로 맞춰지지만, 밤에 빛을 쐬면 체내시계가 점점 길어져 생체 리듬이 깨지게 된다. 이 경우 수면 각성과 멜라토닌 수면 호르몬, 심부체온 리듬이 깨지면서 몸에 온갖 컨디션 난조가 일어난다”라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빛 공해가 지속될 경우 인지기능을 떨어뜨리고 수면의 질을 낮추고 불면증과 우울증, 피로, 면역 기능 저하 등을 유발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2010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심야 수면시간대에 일정 밝기 이상의 빛에 노출되면 인체 내 생체리듬 조절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가 억제돼 수면장애, 면역력 저하 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잠 자는 시간에 어린이가 빛에 과다 노출될 경우 성장 장애, 난시 발생 등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빛공해방지법 제정됐지만, 여전한 고통
2013년부터 '빛공해방지법'이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다. 빛 공해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빛 방사 허용 기준이 마련되었다. 2016년부터는 환경정책기본법상 인공조명에 의한 빛 공해 역시 환경오염 중 하나로 명시됐고, 그에 따라 피해가 발생한 경우 원인자가 피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부산시도 지난해 가로등, 간판 등 야외 인공조명은 생활환경과 조명의 종류에 따라 빛 밝기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명환경관리구역을 지정했다. ▲공간조명(가로등, 보안등, 공원등) ▲옥외광고물에 설치되거나 비추는 조명 ▲장식조명(건축물, 교량, 숙박업소 등에 설치되어 있는 장식조명) 등이 대상이다.
하지만 법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빛 공해 관리, 단속은 민원 접수에만 기대고 있고, 해운대 마린시티의 경우처럼 민원이 들어와도 구청에서도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각 구청에서는 아파트 경관조명과 광고간판 등으로 수면에 방해를 받거나, 눈부심을 호소하는 민원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옥외광고물이나 아파트 외부조명으로 빛 공해가 심해지고 있다”면서 “옥외광고물, 경관조명에 대한 허가 또는 신고 기준을 강화해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값싼 에너지 시대, 에너지를 펑펑 낭비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안보가 지구촌의 핵심 이익으로 등장했다. 인공조명으로부터 발생하는 과도한 빛 공해로 인한 생활 불편과 불필요한 야간조명으로 값비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에 대한 자발적이고 정책적인 조절과 통제가 시급하다. 에너지 절감을 통해 에너지 해외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다가올 재앙을 늦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빛 공해란: 지나친 인공조명으로 인한 공해로 인공조명이 너무 밝거나 많아 야간에도 낮처럼 밝은 상태가 유지되는 현상으로 생활·환경에 불편을 주는 공해다. 특히 교통 문제뿐 아니라 생체리듬을 교란시켜 멜라토닌 호르몬의 분비를 억제, 유방암 등 인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조류와 철새 등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 정확한 측정과 인식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돼 왔다. 정부는 ‘인공조명에 의한 빛 공해 방지법 시행령’을 공포하였으며 ‘인공조명에 의한 빛공해방지법’에 근거해 빛 공해 연구용역을 추진하는 등 빛 공해 민원을 줄이고 자연환경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2-11-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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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 시민이 서울 시민보다 전기 요금 적게 내야
전기 요금을 발전소에서 떨어진 거리에 따라 지역별로 차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같은 요구는 원전 등 발전소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지난 10년간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최근 국회 입법화와 정부 차원의 제도화 움직임이 일고 있어 실현 여부가 관심을 모은다. 특히 새 정부의 원전 활성화 정책과 맞물려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처리 등 환경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전기 요금 차등화 목소리는 더 힘을 얻고 있다.
∎전기 생산은 지역, 소비는 수도권
한국전력 적자 누적으로 전기 요금 인상이 이슈로 부각된 가운데 지난 국감에서 지역별로 전기 요금을 차등화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달 한전 나주 본사에서 열린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감에서 한전의 역대급 적자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이런 가운데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전기 생산은 지역에서 하지만 소비는 수도권에서 훨씬 많이 하는 소비 역차별이 발생하고 있다”며 “지역별로 요금을 차등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승일 한전 사장이 “100% 공감한다. 전력 공급과 수요 지역 불균형으로 전력 생산과 운송을 위한 설비가 과다하게 지어지는 게 현실이어서 생산지와 소비지를 가급적 붙이고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며 논의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기준 서울은 4만 7296GWh의 전기를 소비한데 비해 생산량은 5344GWh에 불과했다. 반면 전체 소비량이 2만 1068GWh였던 부산의 발전량은 4만 345GWh로 지역별 불균형이 심각했다는 것이다. 박 의원은 이어 지난달 국회에서 세미나를 열고 지역별 차등 요금제 등의 내용을 담은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을 대표 발의하기로 했다. 이 특별법에는 지역별 차등 요금제뿐만 아니라 수도권 기업들의 집중을 에너지 분권 차원에서 막아야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어 입법 여부가 주목된다.
∎국가균형발전 차원 합리적 방안 만든다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지역별 차등 전기 요금제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시장원리에 입각한 지역별 차등 전기 요금제 도입 방안 연구 용역’을 발주한다. 그동안 발전소 인접 지자체를 중심으로 차등 요금제 요구가 있었지만 정부 기구에서 이를 공식 추진하고 나선 것은 처음이다. 원자력발전, 화력발전을 비롯한 발전소 주변 지역에서 환경오염, 폐기물 처리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생산지와 소비지가 같은 전력 요금 체계를 적용받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게 균발위의 시각이다. 또 균발위는 발전소에서 수도권으로 송전하는 과정에서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점을 고려하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전기 요금이 동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균발위는 용역 제안 요청서에 “전력 사용량 수도권 집중에 따른 적정 비용을 고려해 시장 원리에 입각한 지역별 차등 전력 요금제의 합리적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원전 밀집지 차등 요금제 요구 분출
경북도는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전기 요금 차등제 실현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가졌다. 이날 토론회에서 경북도는 지역별 차등 전기 요금제 도입 방안으로 발전소 지역 송전 비용을 고려한 전기 요금제 도입, 탄소중립을 선도하는 원전 지역의 지원 확대, 지자체의 전력 요금제 산정 권한 부여 등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지역을 전력 자급률에 따라 100% 이상, 50~100% 미만, 50% 미만 3단계로 나눠 요금을 차등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구경북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한전의 송전 손실은 전체 발전량의 3.53%(1942만 4000MWh)로 2조 7400억 원에 이르며 전력 수송 중 손실량 및 손해액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송전탑 건설과 폐기물 처리 등에 따른 갈등 비용까지 감안하면 사회적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KTX 요금을 거리에 따라 부과하듯이 전기 요금도 발전소 거리에 따라 차등을 둬야 한다”며 “국가 전력시장을 균형발전 요소가 반영된 분권형 시장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값 전기료’ 이후 차등 요금제 운동 10년
지역별 차등 요금제 논의는 부산의 ‘반값 전기료’ 요구에서부터 출발했다.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김영춘 인본사회연구소 소장이 2013년 지방 선거를 앞두고 ‘반값 전기료’를 들고 나왔다. 산업용 전기 요금을 올려 원전 반경 5km 90%, 10km 80%, 20km 70%, 30km 50%, 50km 30%의 전기 요금을 지원하면 부산의 주택용 전기 요금 49.75%를 지원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2014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후보들이 공약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이후 오규석 기장군수를 포함해 원전 소재 지자체 행정협의회(기장군, 경주시, 영광군, 울진군, 울주군)가 정부와 한전을 상대로 원전 거리별 차등 요금제 실시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후 화력발전소가 밀집한 충청남도도 지역별 차등 요금제에 가세했다. ‘반값 전기료’ 운동은 단순히 전기 요금 인하 운동이 아니라 ‘에너지 부정의’와 ‘희생의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요구하는 ‘에너지 지역 분권’ 운동으로 이어졌지만 수도권의 반발을 의식한 정부의 반대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요금제 변화 이뤄지나
국가 기관 차원의 움직임과 국회의 입법화 추진에도 불구하고 현실화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전기 요금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균발위의 입장에 대해 전기의 공공성을 훼손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원가주의 차원에서도 수도권이 발전소와 거리상 멀어 송전 비용은 비싸도 훨씬 많은 수용자가 1/n로 나눠 쓰는 것이기 때문에 전기 요금이 오히려 저렴하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원전 밀집에 따른 지역 주민들의 고통과 사회적 비용을 감안하지 않은 수도권 중심의 사고다.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로 에너지 정의가 화두가 되고 있는 세계적 추세와도 동떨어진 생각이다. 영국의 경우 송전 요금 차등화에 따라 지역별로 전기 요금을 차별화하고 있다. 대규모 원전이 있는 북부 스코틀랜드의 경우 전기 요금이 저렴하고 전력 소비가 많은 런던의 전기 요금은 비싸다. 미국과 호주 등도 거리 정산 요금제를 실시하고 있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까지 나선 마당에 이번에는 꼭 합리적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지역별 에너지 정의를 위해서도 현행 전기 요금 체계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2022-11-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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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 미식의 도시!
부산은 '영화의 도시'다. 새삼스럽게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여기다 하나 더 보태 앞으로는 부산을 '미식의 도시'라고 불러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올해 부산시가 실시한 부산 방문 관광객 실태조사에 따르면 내·외국인의 부산 관광 목적 1위가 '음식(맛집 탐방)'이었으니 절대 과장이 아니다. 부산시도 이 같은 변화에 발맞춰 지난 9월에 '글로벌 미식관광도시 부산 조성 전략' 수립을 위한 부산미래혁신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박형준 부산시장은 "부산이 명실상부한 글로벌 미식관광도시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속도감 있게 추진해 나가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맛있는 부산'을 꿈꾸면서 부산 음식의 과거-현재-미래의 모습을 짚어 봤다.
■ 맵고, 짜고, 먹을 게 없다?
과거 경상도 음식은 평가절하되었던 게 사실이다. 경상도 음식은 걸쭉하고 짜다는 인식이 많았다. 부산 음식도 '국밥 말고는 먹을 게 별로 없다'라거나 '맵고 짜고 간이 센 편이다'는 말을 들었다. 고기라고 하면 바닷고기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생선을 많이 먹었다.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 셰프가 "부산의 진짜 맛은 복국이나 돼지국밥 같은 국물 요리에 있다"고 말한 대목은 진면목을 꿰뚫었다. 부산시는 부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비롯해 많은 정보를 집대성해 2014년 디지털 부산역사문화대전을 편찬했다. 여기서는 부산의 향토음식에 대해 "부산은 20세기에 들어와 급성장한 신생 도시이며, 항구 도시의 특성상 외국인의 출입이 빈번하였고, 6·25 전쟁 시기 피란으로 외부 유입 인구가 많았다. 이러한 유동성 때문에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정성이 강한 음식 문화가 발전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고 기술한 대목이 나온다. 널리 사랑받은 음식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쿨하게 인정한 것이다. 당시 부산역사문화대전은 향토음식으로 동래파전, 생선회, 흑염소불고기와 산성막걸리, 곰장어구이, 해물탕, 아귀찜, 재첩국, 낙지볶음, 밀면, 돼지국밥, 복어요리, 붕어찜의 사례를 들었다. 그동안 돼지국밥과 밀면은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부산에 오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반면에 붕어찜과 재첩국(낙동강 산) 등은 이제 부산에서 찾아보기조차 힘든 지경이 되었다. 부산역사문화대전이 향토음식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전망한 점이 인상적이다. "부산의 지정학적 여건은 외래 식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부산은 역사와 문화가 결집한 매력적인 향토 음식이 지속해서 창출될 수 있는 도시다."
■영화와 음식, 제대로 만났다
글로벌미식관광도시 부산의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행사가 진행 중이다. 13일까지 주말마다 수영강변에서 열리는 '나이트푸드테라스'. 푸드테라스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음식을 직접 먹고 음식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음식전문가들과 함께 나누는 이벤트다. 지난 7월에 열린 부산푸드필름페스타에서 부산관광공사와의 협업을 통해 처음 선보였다 반응이 뜨거워 재개한 것이다. 지난 22일에는 황교익 맛칼럼니스트와 이지수 아미치 오너셰프가 '바다의 맛'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23일에는 독특하게도 돼지국밥과 함께 위스키 잔술을 판매하는 양산돼지국밥 김성운 대표가 나와 '순대와 위스키의 페어링'에 대해 이야기했다. 음식을 주제로 한 영화나 재즈공연을 보고 와인과 음식 토크를 즐긴 뒤, 해운대리버크루즈로 수영강과 광안대교 야경까지 둘러보면 잊지 못할 부산 여행이 되는 것이다.
음식 영화와 맛 체험을 결합한 부산푸드필름페스타는 꾸준하게 인기를 끌고 있다. 여섯 번째 영화제였던 올해의 주제는 '술 마시는 인류, 호모 바쿠스'로, 공식 건배주가 창녕 단감으로 만든 와인 '단감명작(맑은내일 양조장)'이었다. 부산푸드필름페스타는 지역과 상생하면서 전통적 가치를 재발견해서 확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음식영화제의 성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전남 목포시는 지난달 '목포미식페스타'라는 이름으로 부산푸드필름페스타의 형식을 고스란히 따라했다고 한다. 부산미래혁신회의에서 나온 '글로벌 미식관광도시 부산 조성 전략'은 한마디로 코로나 이후 핵심 여행 트렌드인 미식 관광을 활용하여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부산 지명 음식 이렇게 많았나
얼마 전 부산문화재단의 의뢰로 부산 지명을 딴 부산 음식에 대한 글을 쓰며 다소 놀랐다. 부산의 지명을 딴 음식이나 식재료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가덕대구, 가덕숭어, 구포국수, 기장미역, 낙동김, 대변멸치, 명지대파, 산성막걸리, 조방낙지, 칠암붕장어(가나다순) 등 10개가 넘는다. 지명이 붙은 음식이나 식재료는 그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유래가 깊고 특색 있는 맛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부산의 지명과 결합한 부산 음식 속에는 부산사람의 자부심이 들어 있었다. "가덕도 육소장망 숭어잡이는 16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적인 어로법이다. 국내 미역 양식의 첫 배양지는 기장이다. 낙동김이 섞여야 고급상품이 된다. 근대적인 대파 농업은 명지에서 시작됐다. 조선방직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지만 조방낙지는 여전히 건재하다. 이 이름에는 노동자들의 애환이 묻어 있다." 부산의 지명이 붙은 여러 음식을 보면서 부산은 참 다양한 식재료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부산을 바다와 산과 강을 동시에 품은 삼포지향(三抱之鄕)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부산만 한 곳이 잘 없다.
■향토음식의 위기와 기회
평양냉면, 전주비빔밥, 충무김밥…. 이름만 들어도 어떤 재료를 넣어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감이 온다. 그런 면에서 부산의 식재료는 아쉽다. 최원준 시인은 가덕숭어를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개발하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피자의 원조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피자(Napoli pizza)가 이 같은 모범 사례다. 이탈리아에서도 예전에 피자는 싸구려 음식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나폴리 피자 장인들이 협회(APN)를 결성하고 인증제를 시행한 덕분에 2017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다. 질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낙동김'이라는 브랜드를 모르는 소비자들이 많다. 지역 식재료와 음식이 오랜 역사와 높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부분은 개선되어야 한다. 가덕도공항 건설로 가덕대구와 가덕숭어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명지의 파밭이 신도시로 바뀌며 명지대파의 명성도 깨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우리의 창의성과 노력에 따라서는 나폴리 피자처럼 세계적인 음식이 될 가능성도 있다.
부산푸드필름페스타 박명재 디렉터는 "서울은 서울미식주간을 정해 서울 대표 식당 100곳을 소개하고, 선정된 식당의 음식을 맛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재래시장에서는 셰프와 바텐더가 시장에서 구한 식재료를 활용해 창작요리를 선보이기도 한다. 부산시도 '부산 맛집' 책자만 만들 게 아니라 이제는 부산미식주간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부산의 대구, 숭어, 미역, 김, 대파, 붕장어가 제대로 된 요리법을 만나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2-11-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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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돈 되는 폐플라스틱, 이제 미래 먹거리
인공 합성물로 지구상에 선보인 지 150여 년이 넘는 플라스틱이 요즘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류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준 플라스틱이 환경오염 등 한계를 맞으면서 전 세계적인 퇴출 움직임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플라스틱 폐기물, 즉 폐플라스틱은 날이 갈수록 몸값이 오르는 추세다. 폐플라스틱 재활용업이 ‘산업’으로까지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폐플라스틱 재활용은 대·중소기업 간 영역 다툼으로 번져 정부가 중재에 나설 만큼 미래 먹거리로서 주목받고 있다.
■ 정부, 2025년까지 폐플라스틱 20% 감축
최근 환경부는 국정현안 점검 조정회의에서 ‘전 주기 탈(脫)플라스틱 대책’을 발표했다. 본격적인 탈플라스틱 시대를 맞아 2025년까지 폐플라스틱 발생량을 지난해 대비 20% 줄이겠다는 내용이다. 우선 텀블러와 같은 다회용기 대여·서비스 인증제를 도입하고, 배달 용기도 재활용이 쉽도록 최대 두께 기준 등을 개선할 방침이다.
재활용이 어려운 플라스틱 제품에 부과하는 폐기물 부담금의 현실화와 플라스틱 선별 작업의 자동화도 확대하기로 했다. 예전의 정책도 있지만, 현 정부 들어서도 이 같은 정책의 유지·실행을 재확인한 셈이다. 핵심은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 폐플라스틱 배출량을 감축하는 것이다.
플라스틱 사용을 규제하며 탈플라스틱 사회로 나아가려는 흐름은 유럽연합, 미국 등이 주도하면서 대세가 됐다.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플라스틱 포장재에 재생 원료를 30% 이상 사용하도록 의무화할 계획인데, 이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지난해 폐플라스틱 발생량은 492만t(잠정)으로 2019년보다 약 18% 늘었다. 정부는 이를 2025년까지 393만t으로 20%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 ‘보물’이 되어 가는 폐플라스틱
플라스틱에 대한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역으로 폐플라스틱 재활용 수요는 급성장하고 있다. 그동안 대체로 매립 또는 소각 방식으로 처리되어 온 폐플라스틱은 지금까지는 선진국에서 배출된 폐플라스틱을 주로 아시아의 개도국이 수입해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인식된 폐플라스틱의 수출입이 통제 대상에 포함되면서 자국에서 배출된 폐플라스틱은 원칙적으로 자국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재활용 기술이 발전하면서 폐플라스틱 활용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모양은 예쁘지만 여러 가지 재질로 섞여 있어 기존 방식으론 재활용이 어려웠던 폐플라스틱에서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를 추출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폐플라스틱 재활용산업이라는 말까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폐플라스틱이 미래 먹거리로서의 가능성까지 부각되면서 대기업들도 속속 여기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폐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가 되는 납사를 추출하는 화학적 재활용 기술인 ‘열분해유 기술’이 도입되면서 대기업들에도 매력적인 시장이 됐다. 이 기술은 여러 번의 재활용에도 처음의 플라스틱 물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 미래 성장 동력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선 SK이노베이션, LG화학, 롯데케미칼, 코오롱인더스트리, GS칼텍스와 같은 굴지의 기업들이 기술 제휴와 공장 설립 등으로 속속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전 세계 화학적 재활용 시장이 열분해유 기준 2020년 70만t에서 2030년엔 330만t으로 연평균 17%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시장 규모는 탄소 저감 등 친환경적인 경영 정책과 맞물려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 대·중소기업 간 영역 다툼도
폐플라스틱의 새 용도 발견은 폐플라스틱 물량 확보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친환경 제품 생산과 판매가 대세인데다 국내에서도 2023년부터 페트병 제조 때 재생 원료를 30% 이상 사용하도록 의무화한 것도 이런 경향을 더 부추긴다. 유럽의 경우 폐플라스틱 수요 급증으로 올해 초에는 폐페트병이 새 페트병보다 비싸게 거래됐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이처럼 폐플라스틱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자, 기존에 폐플라스틱을 수거·선별해 오던 영세·중소기업과 새롭게 이 분야에 뛰어든 대기업 간 다툼까지 발생하고 있다. 기존 재활용 업계는 영세·중소기업의 생계 영역인 폐플라스틱 재활용업에서 대기업은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부터는 동반성장위원회에 폐플라스틱 재활용업을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지정해 달라고 줄곧 요청해 왔다.
결국 동반성장위원회는 이달 21일 본회의를 열어 플라스틱 선별업·원료재생업과 관련해 대기업과 상생 협약을 맺는 것으로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대체로 단순하게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물질 재활용은 중소기업, 화학적 재활용 분야는 대기업이 맡는 것으로 시장 내 역할을 나눴다. 대강의 역할 분담으로 봉합한 모양새지만, 앞으로 폐플라스틱 활용도 증가에 따라 새로운 기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20세기를 ‘플라스틱 시대’라고 부를 만큼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플라스틱. 인류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가 다시 인류의 필요에 의해 퇴출당할 위기의 순간에 또 새로운 변신으로 귀한 몸이 된 플라스틱의 행로가 놀라우면서 그 앞날이 궁금하다.
2022-10-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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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카톡 '먹통'서 꽃핀 불편의 미덕
최근 카카오톡 ‘먹통’ 사태는 디지털 기기에 중독된 현대인의 고단한 숙명을 이면에 품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명의 최대 강점은 편리함과 효율성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그런 단순한 잣대로 재단될 순 없다. 어쩌면 이번 사태는 그것에 대한 매서운 경고일지도 모른다. 느리고 불편해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역설, 그러니까 불편의 미덕을 새삼 일깨울 기회다. 불편에 대한 성찰은 디지털 중독에 빠진 현대인에게, 그리고 지구의 미래와 환경을 위해서라도 중요하다.
■ 디지털에 중독된 사회
2015년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1세기 인류를 ‘스마트폰 하는 인간’으로 규정한 바 있다. 휴대전화를 가리키는 ‘포노(phono)’와 생각·지성을 뜻하는 ‘사피엔스(Sapiens)’를 합친 ‘포노사피엔스’가 그것이다. 일어날 때도, 취침할 때도, 출퇴근할 때도, 일할 때도,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신인류. 디지털 기기 하나로 시공간 제약이 없는 소통이 가능하고, 생활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다.
‘노모포비아(Nomophobia)’가 여기서 나왔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는 걸 말한다. 불안은 중독의 매개체다. 스마트폰 같은 IT 기기나 기술에 대한 과도한 의존 역시 중독 사회의 한 현상이다. 그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건강과 대인 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 새로운 강박과 스트레스
디지털 기기 의존의 다른 증상은 강박과 스트레스다. 2021년 취업 플랫폼 잡코리아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응답자의 63.9%가 ‘디지털 과부하’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비대면’의 일상화로 메신저 등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IT 기기 의존과 중독은 무엇보다 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미지·동영상·게임 영역은 후두엽에서 바로 처리가 이뤄져 기억과 사고·추리 영역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발달 기회를 막는다고 한다. 그것은 감각적 정보 수용에만 익숙한, 이른바 ‘팝콘 브레인’을 양산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 위험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 카톡이 멈추자 찾아온 평화
카카오톡 먹통 사태는 역설적이게도 이런 현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카카오톡의 국내 메신저 점유율은 90%. 당장 서비스 장애·중단에 따른 불편과 손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건 물론이다. ‘초연결사회’의 붕괴 혹은 단절에 대한 우려와 성토도 쏟아졌다.
한편으로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부터의 해방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카톡 없는 주말, 휴일다운 휴일을 보냈다.” “불편했지만 그 대신 평온과 여유가 찾아왔다.” “카톡이 멈추자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됐다.” “알람이 멈추니 주변이 보였다.” “세상과 분리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해방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깨달음의 기회가 찾아온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지나치게 온라인에 종속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디지털 방식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은 가능하다는 것 등등.
■ 디지털 디톡스의 소환
그래서 다시 소환되고 있는 단어가 디지털 디톡스다. 디지털(digital)과 해독(detox)의 결합어로, 각종 전자 기기와 인터넷·SNS 등의 중독에서 벗어나 심신을 치유하자는 것이다. 한 마디로 디지털 중독을 푸는 해법이다.
현대인은 한층 자극적인 콘텐츠에 젖어 있거나 과도한 연결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디지털 습관이 어떤 독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게 더 큰 문제다.
전문가들은 일정 시간 디지털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동안 과도한 디지털 사용으로 정신에 쌓인 독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치 음식을 먹지 않아 몸에 쌓인 독을 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컨대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다니거나 또는 하루쯤 집에 놓고 외출하는 방식 등으로 디지털 디톡스를 행하는 것이다.
■ 불편의 역설, 불편의 미덕
디지털 중독에 대한 자성은 불편에 대한 성찰과 맞닿아 있다. 앞서 보았듯, 불편함 속에서 되레 심신의 안정과 평화를 찾았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장구한 인류 역사에 비하면 편리함의 시대란 아주 짧다. 어쩌면 인간 유전자 속에는 불편한 시대의 아날로그적 속성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첨단 디지털 시대에도 불편한 캠핑 열풍이 불고,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DIY가 성행한다. 까다로운 카메라 필름 현상을 굳이 배우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LP판 음악감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게 다 불편함이 각인된 몸의 무의식적 향수가 아닐까.
편리함은 움직임을 없앤다. 움직임이 없으면 균형 있는 뇌의 발달이 불가능하다. 우렁쉥이 이야기가 통찰을 제공한다. 우렁쉥이는 뇌를 가지고 있지만 성장해서 한곳에 정착한 뒤에는 자신의 뇌를 먹어 치운다고 한다. 움직임이 없으니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뇌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섬뜩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 다시 인간의 길을 돌아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몸으로 직접 하는 일은 완전한 인간을 만든다. 그것은 불편하고 느리지만 여유와 충족감을 준다. 인간의 가치는 바로 거기서 나온다. “인간으로서 행복을 누리려면 고독이 반드시 필요하다”(칼 뉴포트·<디지털 미니멀리즘>)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시공간을 파격적으로 극복한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활용하고 느끼는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을 찾으려는 사람은 불편을 감내한다. 불편과 느림은 삶을 누리고 음미하며 일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지혜다. 불편을 감내하는 일은 지구의 미래가 걸린 환경을 위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카톡 먹통이 새삼 삶의 근본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2022-10-22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