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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우크라이나 전쟁 1년, 세계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났다. 유럽에서 강대국의 노골적인 침략 전쟁이 일어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 년 만에 처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살인과 고문, 강간과 아동 납치 등 21세기 가장 추악한 반인륜적 범죄 전장으로 추락했다. 평화와 번영이란 유럽의 꿈도 사그라지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유럽 국가들은 군사력 증강, 동맹국과 협력 강화와 함께 징병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신냉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는 것이다.
■냉전 종식으로 모병제로 전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1년 소련 해체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사라지면서 냉전이 종식됐다. 나토 회원국 대부분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체코를 필두로 동유럽 국가들이 북대서양조약 기구(NATO)의 집단방위체제에 편입되면서 유럽의 안정성을 높인 것도 모병제 도입에 영향을 끼쳤다. NATO 및 EU, UN과의 동맹 체제가 강화되면서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거나, 군비 경쟁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27개 EU 회원국 중에서는 1995년부터 벨기에를 시작으로 네덜란드(1997), 프랑스(2001), 스페인(2002), 슬로베니아(2003), 포르투갈(2004) 등 서유럽 국가들이 모병제를 도입했다. 이어서 동유럽 국가인 슬로바키아(2006), 루마니아·라트비아(2007), 불가리아·크로아티아·리투아니아(2008), 폴란드(2009)가 차례로 모병제로 전환했다. 중립국 스웨덴은 2010년 모병제로 돌아섰다.
■신냉전 시대, 다시 징병제로 돌아서
유럽의 봄은 20년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2010년대 들어 러시아가 조지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안보 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각 국가가 징병제로 속속 돌아섰다.
우크라이나, 조지아는 물론이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거나 반러시아 경향이 강한 리투아니아(2015), 노르웨이(2016)에 이어 스웨덴도 8년 만에 징병제를 부활하는 등 민감하게 반응했다. 스웨덴은 2014년 국적 미상의 잠수함이 스웨덴 연안 스톡홀름 군도 쪽에서 출몰하면서 안보 위기감이 높아졌다. 라트비아도 2007년 폐지됐던 징병제를 15년 만에 부활시켰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러시아의 희생양이 될 우려가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프랑스도 18~21세 남녀의 단기 군사 훈련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과 불가리아, 네덜란드, 이탈리아도 검토 중이란 소식이다. 최근 독일 정치인들은 “독일이 병역 의무를 중단한 것은 실수”라고 주장할 정도다. 폴란드는 2009년 옛 소련 시절 잔재라는 이유로 징병제를 폐지했으나, 5년 안에 병력을 현재 14만 3500명에서 30만 명으로 2배 이상 증강하고, 징병제 부활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안보 예산 증액과 무기 확보 나서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은 군비 지출을 늘리며 미국산 무기로 무장하고, 동맹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핵심은 징병제 전환에 이어, 방위비를 증가시키고 새로운 군사 장비를 확보하는 것. NATO가 정한 대로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고, 경우에 따라 원래 계획보다 몇 년 앞서 목표를 달성하기로 상호 약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 가해국으로 국방 분야를 방치했던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강력하고 최첨단의 혁신 군대를 만들겠다”면서 재무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독일은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2%로 지속해서 확대할 계획이다. 독일 하원은 지난해 6월 미국산 F-35 스텔스 전투기 35대 도입 등 1000억 유로(약 134조 원) 규모의 특별방위기금 조성안을 승인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우리 대륙 역사의 전환점”이라면서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안보에 훨씬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국산 레오파드2 전차를 우크라이나에 보내기로 했다. 미국의 에이브럼스 탱크와 독일의 레오파드2 탱크, 영국의 열화 우라늄탄이 장착된 챌린저 2 탱크까지 실전에 배치되면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능력이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프랑스도 국방 예산을 2019∼2025년 2950억 유로(약 395조 원)에서 2024∼2030년 4000억 유로(약 553조 원)로 7년간 36% 증액하기로 했다.
■폴란드, 자국 내에 미군 영구 주둔 기지 개소
우크라이나와 530여㎞의 국경을 맞대면서 서방 무기 지원 최전선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폴란드는 2023년 국방예산을 GDP의 4% 이상으로 올렸다. 폴란드는 미국에서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 M1A1 에이브럼스 전차 등을, 한국에서도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K239 다연장로켓 천무 등을 구매키로 하면서 군 현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22일에는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미군 영구 주둔 기지 캠프 코시우스코 개소식이 열렸다. 지역 내 군사력 증강과 동맹 강화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러시아의 침공을 “평화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폴란드는 그동안 미국 정부에 나토군의 일시 순환 배치 대신 자국 내에 미군을 영구 주둔시킬 것을 지속해서 요청해왔다.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유럽방위청(European Defense Agency)의 2023년 예산 증액을 2022년에 비해 15% 증액했다. 대부분 러시아의 군사 능력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는 용도다. 이러한 군비 경쟁 확산은 유럽 국가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새로운 위기 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확전이다. 장기전은 필연적으로 다른 국가들마저 수렁으로 끌어당긴다. 제1차 세계대전 때도 4년간 30개국이 차례로 뛰어든 대전쟁으로 확대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병참 기지인 폴란드를 공격한다면, 세계대전으로 불이 옮겨붙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유럽 국가가 징병제 전환에 이어 군비 경쟁에 뛰어든 것은 우크라이나전이 ‘그들만의 전쟁’에서 ‘모두의 전쟁’으로 옮겨갈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냉전은 한반도에도 위기
중국 시진핑 주석은 21일 모스크바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이후 긴밀한 중·러 안보경제협력을 기반으로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양국 정상은 “북한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우려와 북한 문제 공조를 재확인한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다극화된 국제 질서는 한반도와 대만 안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만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유의미한 성공을 거둔다면, 이는 중국을 고무해 대만 침공을 현실화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전선을 펼치고 있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대만해협까지 군사력을 전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군과 외교 일각에서는 중국이 한국과 일본 주둔 미군의 대만 이동을 막기 위해 한·일 미군기지를 선제공격하는 가상 시나리오까지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만약 한국이나 일본의 미군기지가 공격당할 경우 미군의 안보 지원에 의존하는 동맹국인 두 나라가 외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과연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작전체계는 물론이고, 미군과 공감을 갖고 있을까. 여기에 연일 이어지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까지 더해지면서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이 아시아에서까지 심각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시진핑 주석이 러시아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영원한 파트너’라고 약속한 만큼, 당분간 서방 대 중·러 구도로 국제 질서가 급변할 것”이라면서 “한국도 단기적으로는 위험 헤징 전략을 쓰면서도, 미래를 위한 외교와 안보를 지금부터라도 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2023-03-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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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사이비 교주의 손아귀는 왜 이렇게 강한가
■ 다큐 ‘나는 신이다’가 던진 파문
거대한 충격파다. 온통 지난 3일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얘기들 뿐이다.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로 사이비 교주들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파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모양새다.
이번 다큐 콘텐츠의 핵심은 기독교복음선교회(JMS) 교주 정명석이다. 그래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는 ‘가스라이팅’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신도들에게 주입했다. 이게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치밀한 노력 덕분이다. 1980년대부터 구축한 새로운 교리 해석과 인맥을 관리하는 시스템의 힘이 컸다. 그 결과는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과 성 착취였다. 측근들은 ‘메시아의 구원’이라는 명분으로 암묵적 묵인을 거들었다. 한 증언에 따르면 정명석은 “1만 명의 여성과 성적 관계를 통해 하늘의 애인으로 만드는 것이 하늘의 지상명령”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밖에 공개된 이재록(만민중앙교회), 김기순(아가동산), 박순자(오대양) 같은 사이비 교주들의 기행과 악행도 끔찍하다. 폭행, 원정 도박, 노동 착취, 살인, 심지어 집단자살까지 포함돼 있다. 다큐의 표현 수위는 전례 없을 정도로 과감했다. 제작진은 “더 이상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많은 언론과 방송이 사건을 다뤘지만 해당 종교단체는 건재했고 범죄는 반복됐다. 우리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 이단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종. 그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 사회 구석구석 퍼진 사이비 종교
우리나라에는 100만 명 이상이 200여 종의 사이비와 이단 집단에 빠져 있다.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자료다. 기독교로 한정하면, 변질된 교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단체가 30개 정도 존재한다. 자신을 재림 예수, 다시 말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들만 30명이 넘는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추정치를 본다. 국내 개신교 신자는 총 545만 명에 이르는데 이 중 이단 신자는 최소 34만 명에서 최대 66만 명이다.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걸까. 사이비 교주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있다. 병에 걸리면 낫고 싶고 미래가 불확실하면 안정된 내세를 보장받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병자들을 치료하고 예언을 통해 미래를 맞히는 ‘신기’를 발휘한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데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한다. 남다른 능력이 마침 현실에서 통할 때 이는 ‘기적’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교주의 방패막이가 되는 신도들의 역할 또한 크다. 명문대 출신을 비롯한 판검사, 변호사, 의사, 교수 같은 전문직이 교단 안에 대거 포진해 있다. 정명석의 경우 그 주변에 이른바 SKY(서울대·고대·연대) 출신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형성한 네트워크는 신도들의 탈출을 막는 촘촘한 거미줄이 된다. 전도 대상자 1명에게 적게는 3~4명, 많게는 20명까지 따라붙어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그렇게 내면화된 집단적 결속감은 헤어날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사이비 종교의 외모는 결코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다큐 방영 이후에도 증명됐다. 사이비 종교 신도들, 특히 JMS 조력자가 이 사회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KBS와 MBC 같은 방송사를 비롯해 법조계와 언론계, 대학 등 엘리트 사회는 물론 국정원과 군대, 연예계까지 다양한 영역이 여기 포함된다. 최근 유명인들의 잇단 ‘탈교 고백’은 ‘학폭 논란’과 함께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 사람들은 왜 헤어 나오지 못하나
미국 심리치료사 레이철 번스타인에 따르면, 이단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의 심리적 약점을 노린다. 어린 시절의 상처나 과거의 트라우마에 빠진 사람들의 애정 결핍과 정서적 공허는 악용의 손쉬운 대상이다. 외로운 사람들이 특히 사이비 종교의 가스라이팅에 취약하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회적 결속과 소속감을 강하게 원하는 사람들이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결국 같은 얘기다. 사이비 종교는 ‘존재 이유’와 ‘사회적 지지’를 무기 삼아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현대인일수록 사이비 종교에 쉬이 빠져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재의 삶이 불안하고 미래 또한 불확실해서다. 인간관계나 진로 문제로 혼란을 겪고 사회경제적 기반이 약한 청년들이 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이비 교주와 점쟁이, 무당 사이엔 공통적 특징이 있다. 경쟁 사회에서 얻지 못하는 친밀감과 따뜻함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 종교학과 신학에서 도입한 ‘종교 중독’ 개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알코올이나 마약처럼 현실을 강박적으로 회피하고 삶을 황폐화하는 악순환을 겪는다는 것이다. 종교 중독이 다른 중독보다 위험한 것은 ‘삶의 활력’을 느끼게 해 준다는 데 있다. 착각이지만 당사자는 전혀 모른다는 게 문제다.
사이비 이단의 또 다른 특징 중에는 선민사상도 있다. “내가 최고의 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우월감을 느낀다”는 고백이 대표적이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전형적인 이분법적 사고다. 현실 부적응에 따른 좌절감이 거꾸로 드러난 현상이라는 점에서 그릇된 종교관이요 병리적 망상이다. 끝내 이들을 제대로 품지 못한 기성종교의 책임도 크다 할 것이다.
■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
우리나라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종교 선택의 자유,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자유까지 포함된다. 반대로 사이비 종교를 비판할 자유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이비 종교의 실상은 실로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가정 윤리와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중대 범죄를 저지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일각에서 규제론을 제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최근 정치 데이터 플랫폼 ‘옥소폴리틱스’가 ‘사이비 종교 처벌법 제정’을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국민 59%가 ‘필요하다’고 답했는데, 찬성론자들은 사이비와 이단의 기준이 명확하다고 본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기준이 애매하고 판단 주체 역시 모호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향후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해 보이지만, 더는 사이비 종교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청년들과 소외감을 안고 사는 사회적 약자들이 특히 희생될 가능성이 크다. 직장과 주거 문제를 비롯한 삶의 질, 이를 위한 정부 지원 정책 등 우리가 해결할 기본 문제들과 엮여 있는 사안인 만큼 사회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종교계도 근본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현대 종교의 비극은 진실한 신앙적 믿음이 현실을 왜곡하는 맹목적 믿음으로 변질된 데 있다. 종교의 본래 목적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끌어 나갈 세계관이나 초월적 진리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계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올바른 종교관에 대해 침묵했다. 그 결과가 사이비 이단의 활개다. 교계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다.
2023-03-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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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항 신항 주도권 놓고 부산·경남 싸우나
부산항은 국내 전체 수출입 물동량의 75.6%를 담당하는 최대 무역항이다. 지난해 1년간 총 2207만TEU(1TEU는 길이 6m짜리 컨테이너 1개)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해 전 세계 130여 개 항만 중 7위를 기록했다. 부산항은 특히 일반 화물에 비해 부가가치가 높은 환적 화물 처리 규모가 싱가포르항에 이어 세계 2위인 동북아시아 물류 허브 항만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물동량 기준 세계 3위를 유지했지만, 경제가 급성장한 중국 주요 항만들의 폭발적인 물동량 증가세에 밀려 순위가 점차 하락해 왔다. 부산항 전체 물동량 가운데 70%가량이 부산신항에서, 나머지는 북항 자성대·신선대·감만·신감만 4개 컨테이너부두의 17개 선석에서 각각 처리된다.
현재 부산항 부산신항은 북컨테이너부두와 남컨테이너부두에 조성된 25개 선석이 가동되고 있다. 올해부터 일부 선석 개장에 들어가는 서컨테이너부두가 완공되면 부산신항은 모두 38개 선석을 갖춘 세계 굴지의 초대형 항만으로 탈바꿈한다. 부산신항과 북항 등 부산항 전체 개발과 관리·운영은 2004년 출범한 부산항만공사(BPA)가 맡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남에서 가칭 경남항만공사를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강하다. 부산신항이 부산 강서구와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걸쳐 있는 데다 진해에 부산항의 제2 신항인 진해신항 개발이 예정돼 있어서다. 경남항만공사 설립 움직임이 이어질 경우 과거 부산신항 조성사업 추진 과정에서 부산시와 경남도 사이에 신항 명칭 결정과 행정구역 획정을 둘러싸고 장기간 빚어진 갈등이 재현될 소지가 있다.
■부산항 진해신항 조성 의미
부산항 부산신항은 기존 북항이 부두시설의 노후화와 협소성으로 급증하는 컨테이너 물동량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포화 상태에 이르자 개발됐다. 한꺼번에 많은 물동량을 운송하기 위해 급격히 대형화 추세를 보인 컨테이너 선박의 접안과 하역이 가능한 대규모 현대식 컨테이너터미널의 필요성도 있었다. 1997년 착공된 부산신항은 2006년 북컨테이너부두의 일부인 3개 선석 개장을 시작으로 순차적인 개장과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부산신항의 물동량마저 포화가 예상되자 서컨테이너부두 뒤편 진해 연도 서쪽의 제덕만 일대에 진해신항을 추가 건설하기로 했다. 진해신항을 통해 물동량 처리 능력을 대폭 늘려 부산항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진해신항은 오는 2040년까지 13조 원이 투입돼 21개의 초대형 컨테이너 선석과 최첨단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스마트 항만으로 조성된다. 사업이 완료되면 부산항은 부산신항과 진해신항을 합쳐 4200만TEU 처리가 가능한 메가톤급 컨테이너항으로서 중국 등 동북아 주요 항만에 대한 경쟁 우위를 확보하게 될 전망이다. 이로써 부산항은 세계 3위권의 글로벌 물류 중심항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게 정부 주장이다. 두 신항이 인근 가덕신공항과 철도·고속도로 교통망과 결합해 시너지를 높이면 세계적인 트라이포트 복합물류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도 기대된다. 해수부와 BPA는 이를 위한 1단계 사업으로 2031년까지 총사업비 7조 9208억 원을 들여 9개 선석 건설을 추진한다. 이 사업은 2021년 12월 예비타당성조사 통과 후 기반시설에 대한 기초자료조사 용역이 진행 중이다.
■신항만 주도권 쥐려는 경남
이달 4일 경남도는 부산신항과 진해신항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부산·경남에 산재한 항만 관련 공공기관을 한 곳에 집적화할 필요가 있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이는 경남연구원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의뢰해 올 1~2월 항만 공공기관과 항만·물류 업체 등 342곳을 대상으로 ‘신항만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항만 기관·업체의 집적 필요성’이란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다. 응답자의 67%가 공공기관 집적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는 게다. 이유는 항만 경쟁력 강화와 원스톱 행정 서비스 제공을 위해서란다. 또 92%가 신항 관련 행정 수요의 증가를 예상했고, 73%는 항만·물류 업체들의 집적도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남도 측은 설문조사 목적이 다양한 항만 이용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진해신항을 만들고 항만 규모에 맞는 업무지원 시설을 설치하는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일단, 적극적인 고객 중심 행정으로 좋게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경남이 진해신항 건설을 계기로 미리 신항만의 주도권을 가지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속셈은 진해신항 조성이 마무리되면 경남쪽 선석 수가 부산보다 훨씬 많아진다고 강조하는 경남도의 논리에서 읽을 수 있다. 부산신항 38개, 진해신항 21개 등 신항 전체 59개 선석 중 행정구역상 경남에 속한 선석이 61%인 36개(부산 23개)나 되는 것이다. 부산신항의 경우 가덕도 북쪽 연안의 남컨테이너부두를 제외하고는 서컨테이너부두 전부와 북컨테이너부두의 절반 정도가 진해 땅 위에 들어선 까닭이다. 이에 따라 경남에서는 북항에 위치한 BPA 청사를 부산신항으로 옮기자는 주장이 나온다. 심지어 진해신항이 부산항의 하위 항만이라는 사실조차 불만인 이들도 있다.
■경남항만공사 설립 움직임 꿈틀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지난해 9월 14일 경남도의회 본회의에서 진해신항 조성과 관련해 적절한 시기에 경남항만공사를 만들어야 한다며 한발 더 나아간 입장을 밝혔다. 이와 함께 관계 부서에 독자적 항만공사 설립의 필요성과 시기에 대해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아마도 경남에 별도의 항만공사가 생기면 경남 측에서 부산신항과 진해신항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지역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판단했을 테다. 경남도는 두 신항을 포함한 부산항의 향후 주도권이 부산에서 경남으로 이동해 경남의 입김이 더 세질 가능성에 고무돼 있다. 이에 힘입어 신항과 신공항, 내륙 교통망을 연계한 지역 발전의 밑그림도 주도적으로 그리고 싶은 것이다. 경남도는 진해신항 1단계 사업만으로도 연간 70억 원 이상의 지방세 증대, 항만 내 약 4200명의 고용 창출, 28조 4758억 원의 생산 유발, 22조 1788억 원의 부가가치 유발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하면서 신항만의 주도권을 잡게 되기를 바라는 모양새다.
경남도는 지난달 28일 지역구 국회의원 4명과 함께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신항만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항만행정 서비스 개혁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도 개최했다. 경남이 신항만이 크게 확장되는 여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신항만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려는 성격이 다분한 행사였다. 이날 “BPA가 있는 부산에 항만의 경제적 혜택이 집중되고 있어 항만 관할권과 관련 산업·인력 인프라가 미흡한 경남의 독자적 항만공사와 항만 주도권 확보가 요구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이유다. 토론회에선 진해신항 주변으로 관련 행정기관을 이전하고 집적해 항만 경쟁력을 강화하고 항만행정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경남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와 맥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부산항 관리체계 이원화는 위험
경남과 창원의 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갈망에서 비롯된 경남 측 주장과 바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항만 기관·업체의 신항 일대 집적화 등은 일리가 있으며 현실적으로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경남항만공사 설립만큼은 되레 신항은 물론 부산항의 경쟁력을 해치는 위험한 발상이 될 우려가 높다. 경남항만공사 설립은 국가항만인 부산항을 둘로 쪼개서 북항 및 부산신항 그리고 진해신항 등 이원화된 체제로 운영하는 걸 뜻한다. 2개 항만공사가 생겨 각각 부산신항과 진해신항을 관리할 경우 양측의 유기적이고 원활한 협력은커녕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두 항만공사가 부산항에 기항하는 글로벌 대형 해운사들로 구성된 세계 3대 해운동맹에 끌려다니기라도 하면 저가의 부두 운영으로 항만 수익성만 악화될 공산이 크다. 중국 항만들과의 경쟁에서 더욱 뒤처질 수도 있다. 가뜩이나 북항과 부산신항 간 연계성이 떨어져 비효율적이란 지적을 받는 상황이다. 두 신항의 보완성을 높여 물동량 유치와 환적 물량 처리에서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것이야말로 막대한 예산으로 진해신항을 건설하는 취지를 잘 살리는 길이 아닐 수 없다.
이러기 위해선 부산신항과 진해신항의 행정구역과는 무관하게 항만 관리·운영 주체를 단일화해 일관되고 신속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부산항의 효율성과 경쟁력 측면에서도 바람직한 모습이다. 따라서 진해신항 조성사업의 진척 상황과 선석 수 증가 속도에 맞춰 현 BPA의 규모와 역량을 키워 나갈 일이다. 필요 시 부산·경남항만공사나 부산·진해항만공사로 이름을 변경하고 전문가와 인력을 충원할 때 경남 출신 인재를 더 뽑으면 된다. 경남도는 입장을 바꿔 해수부와 기획재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BPA의 자율권과 독립성을 강화하거나 BPA 또는 지방정부가 항만 자치권을 확보하는 데 힘을 보태야 마땅하다.
■부울경 메가시티 무산의 아쉬움
만일 경남 측이 경남항만공사 설립 추진을 본격화할 경우 부산과 극심한 마찰을 빚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부산의 지역사회와 해운·항만·물류 업계가 두 신항과 부산항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서다. 이미 부산과 경남은 2006년 부산신항이 3개 선석을 개장하며 공식 개항하기 전 7년 동안 신항 명칭을 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깊은 갈등을 겪은 바 있다. 부산은 부산신항을, 경남은 진해신항을 고수하며 첨예하게 대립했었다. 게다가 당시 부산시와 경남도는 북컨테이너부두와 항만배후부지의 행정 관할권을 놓고도 장기간 맞서다 2012년에야 가까스로 행정구역 경계선을 획정했다. 세수 증대와 부지 확보 등을 위한 다툼이었으나, 부산과 경남으로 나눠진 부산신항과 배후단지에 대한 행정구역은 지금까지 각 부두와 입주 기업들의 경쟁력을 떨어트리는 요인으로 꼽히는 실정이다.
향후 부산항 진해신항 건설공사 과정에서 언제든 경남항만공사 설립이 논란을 빚으며 부산·경남 간 오랜 전쟁의 불씨를 되살릴 것이 걱정된다. 이 때문에 지난해 경남도지사와 울산시장의 반대로 허망하게 무산된 부산·울산·경남 특별연합(부울경 메가시티)이 너무나 아쉽다. 단일 경제공동체 구축을 위한 부울경 메가시티가 올 1월 예정대로 출범했더라면 경남항만공사의 필요성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지역의 숙원인 BPA의 지방공사화도 실현 시기가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부울경 3개 시도는 폐지된 메가시티의 대안으로 부울경 경제동맹과 부산·경남 행정통합 추진을 약속했다. 앞으로 실무추진위원회 활동이 본격화하면 부산신항과 진해신항 문제를 부산·경남 간 상생 차원에서 심도 있게 논의하길 바란다. 부산신항과 진해신항이 동시에 성장세를 보이며 발전하려면 부산·경남이 대승적으로 머리를 맞대는 자세가 절실하다. 이참에 부산신항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관할권 문제를 재정리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2023-03-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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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번개탄과 자살률의 함수?
■번개탄 해프닝? 과연 해프닝인가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13일 공청회를 통해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을 알렸는데, 이 자리에서 “산화형 착화제가 사용된 번개탄 생산을 금지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인터넷 등에서 “번개탄을 금지한다고 자살이 예방되냐”는 등 비판과 조롱이 줄을 이었다. 정부는 “번개탄 생산 중단 계획은 없다”며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복지부는 자살 예방에 번개탄을 왜 끌어들였을까. 배경이 있다. 복지부는 2020년 ‘자살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거나 사용될 위험이 상당한 물건’을 자살위해물건으로 지정했다. △일산화탄소 독성효과를 유발하는 물질 △살충제의 독성효과를 유발하는 물질 △제초제·살진균제의 독성효과를 유발하는 물질이 그 대상이다. 번개탄은 일산화탄소 독성효과를 유발하는 물질이다. 그런데 번개탄을 자살위해물건으로 지정한 이후 일산화탄소로 인한 자살 사망자가 17% 정도 줄어들었다는 통계가 최근 나왔다. 번개탄을 없애겠다는 발상이 나올 법도 한 것이다.
그러나 본말이 전도됐다. 자살의 원인이나 배경 등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인데 자살 도구나 수단만 규제하면 무슨 소용인가.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 사람이 번개탄이 없어 자살을 포기할까. 핵심은 사람을 자살로 내모는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자살과 사회적 조건의 상관관계
2021년 한국의 자살률은 26.0명이었다. 인구 10만 명당 한 해 26명이 자살했다는 의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근 20년째 부동의 1위다. 같은 기간 OECD 국가 평균 자살률은 11.3명이었다.
한국이 OECD에서 1등 하는 게 또 있다. 우울증 유병률이다. 2021년 OECD 평균은 30%인데 한국은 36.8%다. 한국인은 10명 중 4명 꼴로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우울증이 있으면 자살 위험률이 4배나 높다. 실제로 자살 원인 가운데 60% 이상이 우울증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무엇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가.
짐작되는 통계가 있다. 역시 OECD와 비교 대상이다. 삶의 만족도다. 통계청이 2019~2021년 조사한 자료를 보면, 한국인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5.9점으로 나온다. OECD 평균인 6.7점에 크게 못 미친다. 왜 한국인은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눈에 띄는 항목이 있다. 사회적 고립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어려울 때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라는 응답이 18.9%였다고 한다.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에서는 2~4% 정도였다.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는 지난달 16일 자살위기극복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특위는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가시적인 변화를 끌어내겠다고 밝혔다.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말에 그쳐서는 안 된다. 돌아보면, 우리 정부의 자살 예방 정책은 대체로 탁상공론이었다. 체계적이지도, 통합적이지도 않았다. 부처 간 손발도 맞지 않아 진정성까지 의심받는 지경이다. ‘번개탄 해프닝’이 좋은 사례다.
■자살에 대한 이율배반의 정책들
한국의 자살 사망자 51.1%가 40~60대다. 한창 일할 나이인데 왜 자살하는 이가 많을까. 과로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직장갑질119가 노동자 161명의 자살 원인을 분석했는데, 가장 많은 이유가 과로였다. “죽으면 묘비명에 죽어라 일만 하다가 죽었다고 그렇게 써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자살률을 낮추겠다면서 동시에 노동개혁을 거세게 밀어붙인다. 정부가 말하는 노동개혁의 핵심은 노동시간 유연화다. 여기에 과로의 위험성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다. 주 52시간을 3개월 단위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이럴 경우 최장 4주 연속 69시간 근무가 가능하다. 심지어는 연속 휴식 시간조차 제한을 두지 않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이는 현행 노동부 고시로 정해진 과로 산재 기준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의 자살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청소년들의 사망 중 60% 이상이 자살로 인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우리 청소년들에게서 자살생각률, 우울 위험군 비율, 불안장애 경험률 같은 정신건강 지표가 악화되고 있다며, 능력주의와 경쟁주의,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런데 최근 교육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교육 개혁을 명분으로 새로운 정책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고교 내신 성취평가(절대평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고교학점제다. 여러 논란에도 교육부는 2025년 시행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고교 서열화가 심화되고, 중학교 때부터 입시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의 한쪽에선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걱정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꼴이다.
한국은 노인 자살률이 유달리 높다. 인구 10만 명당 60대는 33.7명, 70대는 46.2명, 80세 이상은 67.4명이다. OECD 평균보다 2~3배 높다. 전문가들은 노인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선 새로운 특별한 대책보다는 이미 사회 공동체 안에 만들어진 시설이나 프로그램에 노인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한다. 지하철 등 교통수단에 대한 노인 무임승차제도가 그렇다. 노인 무임승차 정책으로 노인 자살자 수가 크게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노인들이 교통비 제약 없이 이동하면서 외부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고 우울증 감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비용으로 환산하면 연간 3600억 원 정도라고 한다. 지금 노인 무임승차제도는 폐지될 위기다. 적자가 쌓인다는 이유에서다. 부산과 서울 등 지자체는 국비 지원을 요청하지만 정부는 외면한다. 노인 자살률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노인 무임승차제도는 보편적인 노인복지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국비 지원은 당연한 것인데도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부처별 일관된 대응으로 협력해야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그 수가 하루에 36.6명, 시간당으로는 1.5명이다. 정신건강, 경제적 궁핍, 질병, 가정불화, 학업이나 업무 스트레스 등 원인이야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문제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이 비극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개인을 보듬는 사회적 안전틀이 촘촘하고 튼튼해야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마침 복지부는 2027년까지 자살률을 18.2명 수준으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부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번개탄 해프닝’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살 문제를 심사숙고해서 해결하기보다 드러난 증상만 좇다 땜질식 처방을 내놓는 식의 접근은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다. 역대 정부에서 자살률을 낮추겠다면서 수많은 방법을 내놓았지만 효과가 신통치 못했던 건 그런 이유가 있어서다. 무엇보다 정부 각 부처마다 일관된 자살 대응 정책을 갖추고 협력해야 한다. 한 부처는 자살을 막자고 나서는데 다른 부처들은 오히려 자살을 부추길 수 있는 정책을 고집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2023-03-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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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갈수록 세지는 '행동주의 펀드'
"하이브는 더 이상 K팝의 거장이 아니다. K는 사라지고 대중음악(pop)의 거장으로 올라섰다."
지난 10일 하이브가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가 보유한 지분 14.8%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하자 CNN이 내놓은 논평이다. 불과 사흘 전인 7일에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SM 지분 9.5%를 확보하면서 2대 주주가 되는 일이 있었다. 카카오에 이어 하이브까지 참전한 SM의 경영권 분쟁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면서 3월 주주총회 전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의 SM 지배구조 개선 요구였다. 갈수록 힘이 세지고 있는 행동주의 펀드의 실태를 들여다봤다.
■ SM 경영권 분쟁 아래에는
2년 전인 2021년 5월 네이버, 카카오엔터테인먼트, CJ ENM이 각각 SM 경영권을 인수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최대 주주인 이수만의 보유 지분 18.46%를 매각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만 결국 SM의 독특한 지배구조 때문에 인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SM은 이수만의 이니셜을 따왔다고 할 정도로 이수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상장회사 SM의 중심에는 이수만이 설립한 '라이크기획'이라는 개인 회사가 있었다. SM은 2021년까지 주주들에게 단 한 번도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동안 라이크기획에는 SM의 지난 10년 치 영업이익의 35%가 흘러들어 갔다고 한다. 무려 1600억 원이 넘는 막대한 금액이다.
2019년에는 SM의 3대 주주인 KB자산운용이 라이크기획과 SM의 합병, 배당금 지급, 신규 사외이사 선임을 주장하는 주주 서한을 발표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SM은 음악산업을 이해하지 못한 제안이라면서 무시하고 라이크기획과의 계약을 연장했다. 2021년 사모펀드 운용사로 출범한 얼라인파트너스는 그 뒤 혜성같이 등장했다. SM 주식을 1.1% 사들인 얼라인파트너스는 지난해 3월 주총을 앞둔 SM에 지배구조 때문에 주식시장에서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감사 선임 주주 제안을 한다. 에스엠은 답변을 피했지만, 주총에서 수많은 소액주주가 의견을 행사해 얼라인파트너스는 표 대결에서 승리한다. 창사 이래 첫 배당도 이루어졌다. 얼라인파트너스는 한 번 더 주주 서한을 발표하고 몰아붙여 라이크기획과의 프로듀싱 계약도 끝내게 만들었다. SM은 결국 손을 들고 '팬, 주주 중심의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회사로의 도약'으로 요약되는 SM 3.0을 내놓고, 카카오에 신주 및 전환사채 발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카카오와 하이브의 경영권 분쟁 수면 아래에는 행동주의 펀드의 활약이 있었다.
■ 단군 이래 최대 횡령 사건
치과용 임플란트 생산 공장을 부산에 둔 오스템임플란트는 2018년부터 판매량 기준으로 세계 1위 기업. 사람들은 오스템임플란트를 2021년에 있었던 자금관리 직원의 2215억 원 횡령 사건으로 기억한다. 회사 자본금의 108.18%, 단군 이래 최대 규모 횡령 사건이었다. 상장사에서 자기자본의 5% 이상을 횡령하면 상장폐지 요건에 해당한다. 오스템임플란트는 바로 주식 거래가 중지됐고, 상장 적격성 실질 심사도 받았다. 당시 범인은 횡령한 돈으로 구입한 금괴의 절반을 최규옥 회장에게 넘겼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경영진 연루 의혹에 대해서 경찰이 무혐의로 결론 내렸다. 하지만 경영진이 회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까지 자유로울 수는 없다. 횡령 사건 이후 오스템임플란트는 지속적으로 M&A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오스템임플란트는 이전에도 오너 리스크에 시달렸다. 최 회장은 2014년 치과의사들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하고 회삿돈을 해외법인에 부당 지원한 혐의로 기소되어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KCGI(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가 지분 100%를 보유한 에브리컷홀딩스는 오스템임플란트의 3대 주주(지분 6.92%)가 되면서 공개 주주 서한을 보냈다. 후진적인 지배구조 탓에 기업 가치가 저평가됐으니 최 회장은 퇴진하라는 것이다. KCGI의 공세에 대주주인 최 회장(보유지분 20.6%)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국내 대형 사모펀드 운용사 연합에 지분 절반가량(9.16%)을 넘기기로 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활약에 최 회장이 사실상 경영권을 포기한 것이다.
■ 내달 정기 주총 앞두고 맹활약
행동주의 펀드(activist fund)란 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의결권을 확보한 뒤 기업에 구조조정, 주주 환원 확대,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해 수익을 내는 전략을 구사하는 펀드를 말한다.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 대상이 된 국내 기업은 2017년 3곳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47곳으로 늘었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입김이 강해진 것이다. 행동주의 펀드들의 움직임은 특히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올해 정기 주총에서 태광산업과 BYC에 주주들이 추천하는 감사위원을 선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태광산업은 지난해 연말 계열사인 흥국생명의 유상증자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트러스톤자산운용의 경고를 받아들여 불참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BYC의 회계 장부를 열람한 결과 관계사에 대한 부당지원과 경영진의 배임 의혹이 드러났다고 밝히기도 했다.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는 KT&G에서 한국인삼공사 주식을 100% 보유한 지주회사를 떼어 내는 분리 상장을 요구하고 있다. KT&G는 자회사 분리 상장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향후 5년간 4조 원의 투자를 단행해 10조 원의 매출액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새로 내놨다. SM을 상대로 주주 행동을 벌인 얼라인파트너스는 또한 7개 은행 지주에 주주환원 정책 수립을 요구해 주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기도 하다. 네덜란드 연금투자 회사 에이피지(APG Investments Asia)는 KT에 경영진의 우호 지분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큰 상호주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정관을 변경하라고 주주제안을 했다. 에이피지는 그동안 삼성전자 백혈병 사태와 현대산업개발의 건물 붕괴 사고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주주 자격으로 적극적인 질의와 제안을 해 오고 있다.
■ 한국에서 행동주의 이제 시작
행동주의 펀드가 가장 흔히 요구하는 사항이 배당 확대다. 행동주의 펀드의 목적도 수익률이라 그 자체를 선하다고 볼 수는 없다. 행동주의 펀드가 단기 이익을 위해 기업을 공격하거나 기업 경영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어쨌든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된 기업들의 주가가 다른 기업들보다 더 오른 것은 사실이다. 단기적으로는 주가가 오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성장 잠재력이 저하될 가능성도 물론 있다. 이처럼 행동주의의 입김이 커진 데에는 자본시장에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 잡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역할도 컸다. 세계적으로 ESG 경영이 중요해지면서 주주들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기 때문이다.
KCGI 강성부 대표는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주가가 오르고 성과가 난다는 전략이 유효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해야 한다. 성과가 쌓이면 더 많은 돈이 모일 테고,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는 더 빠르게 좋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에서 행동주의는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증가가 투자 대상 기업의 주가 상승과 한국 증시 재평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행동주의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2-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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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청소년 모텔’ 룸카페에 무슨 일이
룸카페 단속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여성가족부가 신·변종 룸카페를 청소년 출입·고용 금지 업소로 지목하면서 일선 지자체와 경찰이 대대적인 단속에 돌입했다. 룸카페가 사실상 ‘청소년 모텔’처럼 운영되면서 청소년들의 탈선과 성범죄를 부추긴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부산시도 부산경찰청과 함께 지난 10일부터 룸카페 단속을 시작했다. 그러나 룸카페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동시에 10대 청소년들의 성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손님 중 95% 학생 커플, 99%는 성관계
룸카페는 애초 다과와 음료를 제공하고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휴식, 놀이 공간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점차 독립된 밀폐 공간에 모텔처럼 운영되면서 청소년 탈선을 부추긴다는 논란이 일었다. 독립된 룸마다 도어락이 설치되고 침대, TV, 공기청정기는 물론이고 내부에 샤워기가 딸린 화장실까지 갖춘 곳도 등장했다. 부산시와 경찰 점검반이 찾은 부산진구의 한 룸카페도 밀폐된 룸에 매트와 쿠션이 놓여 있고 TV와 탁자가 설치돼 모텔 같은 모습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 룸카페 실상을 폭로하는 글들이 올라오면서 논란에 불을 붙였다. 룸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한 네티즌은 “여기 오는 손님의 95%는 학생 커플이고 99%는 방에서 성관계한다”고 폭로했다. 또 다른 네티즌도 “청소할 때 남자화장실 쓰레기통에 사용한 피임 기구들이 많이 쌓여 있다”고 했다.
∎성범죄 실태 보니…대부분 미성년자
룸카페가 미성년 성범죄에 이용된 사례도 적지 않다. 룸카페로 미성년자를 유인한 후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하는 경우다. 지난해 7월 서울의 한 룸카페에서 20대 남성이 초등학생을 룸카페로 데려가 술을 먹이고 성추행하다 적발됐다. 창원지검은 지난해 8월 SNS를 통해 알게 된 미성년자를 가스라이팅한 뒤 자신의 남자 친구와 성관계하게 한 20대 여성을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위계 등 간음)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당시 성관계에 이용된 장소가 부산의 한 룸카페였다. 룸카페에서 발생한 성폭행의 가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도 다수 적발되고 있다. 형사 사건화 된 사례들을 감안하면 실제 벌어지고 있는 성범죄는 더 많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변종 룸카페 청소년 출입·고용 금지 업소
사회적 논란이 뜨거워지자 여가부는 변종 룸카페를 청소년 출입·고용 금지 업소로 고시하고 지자체와 경찰이 나서 적극 단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가부는 업소 구분은 실제 영업 행위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룸카페가 자유업이나 일반음식점으로 등록돼 있더라도 밀폐된 공간과 칸막이로 구획하고 침구 등을 비치하거나 성행위 등이 이뤄질 우려가 있는 영업장은 청소년 출입이 금지된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룸카페 업주가 ‘청소년 출입·고용 제한’을 업장에 표시하지 않았다면 단속해 시정을 명하고 시정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해야 한다. 또 해당 룸카페 업주가 청소년의 출입과 고용을 막지 않은 경우 징역과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여가부가 룸카페를 청소년 유해업소로 결정하고 단속에 나서자 청소년단체를 중심으로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청소년의 신체 접촉이나 성행위가 가능한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룸카페를 청소년 유해업소로 취급하는 것은 청소년의 신체 접촉과 성행위 자체를 범죄화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청소년의 섹스는 범죄 행위도, 비윤리적 행위도 아닌데 청소년에게 제대로 된 공간과 성교육의 장을 마련해 주지 않는 사회가 청소년의 섹스를 더 위험하고 폭력적인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성적 권리는 ‘차별, 폭력, 강요, 사회적 낙인 없이 누구나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탐색하고 성관계를 결정하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청소년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성적 권리는 생명권, 학습권 등 다른 권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보장되어야 마땅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아수나로는 여가부의 청소년 성적 권리 탄압 중단을 촉구했다.
∎비디오방, 멀티방, 룸카페, 그 다음은 …
룸카페에 대한 단속은 또 다른 변종 업소의 출현이라는 풍선효과만 낳을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정부가 2013년 멀티방을 청소년 출입·고용 금지 업소로 지정했지만 룸카페가 등장했듯 또 다른 변종 업소가 등장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대략 중·고등학생의 5% 안팎이 성 경험을 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막을 수 없다면 양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애플리케이션 ‘서치통’의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여가부의 룸카페 단속에 대해 40.6%가 ‘적절하지 않다’, 39.6%는 ‘적절하다’고 응답해 팽팽히 맞섰다. 전문가들은 청소년의 성은 ‘음란하다’거나 ‘위험하다’는 양 극단만 강조하는 성 교육 방식은 오래 전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청소년들이 이미 성적 주체로 다양한 경험을 시작했는데 통제와 차단에 기반한 사회 시스템은 또 다른 문제만 낳는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모텔 출입을 금하자 비상구와 옥상 등 위험하고 불결한 공간에서 섹스를 이어 간다. 청소년은 사후 피임약이 필요해 응급실에 가도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한다. 지난해 종영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임신한 청소년 영주와 그의 남자 친구 현은 우리 사회가 10대 청소년 성과 관련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국제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포괄적 성교육’을 제시한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전 교과에 성교육이 포함되어야 하며, 생물학적 성의 차이는 물론이고 섹슈얼리티, 결혼과 육아, 관용, 포용, 존중, 동의, 폭력과 안전 등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 가는 데 꼭 알아야 할 것들을 포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 성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성교육 방식이 좀 더 성숙해져야 하는 시점이다.
2023-02-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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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불황에 오히려 돈방석, 횡재세 어찌할꼬
2월 들어 갈수록 따뜻해지는 날씨에 새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 서민들의 삶은 고유가·고금리 등에 휘둘려 여전히 팍팍하기만 하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라고 하니,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질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이 오히려 호기로 작용해 돈방석에 앉은 곳도 있다. 일부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역대급 실적을 근거로 막대한 성과급을 누려서 대조적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부러움과 박탈감 등 여러 감정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고유가·고물가로 많은 국민은 고통 속에 신음 중이다.
자연스레 정치권을 필두로 ‘횡재세’ 논의가 나오면서 단번에 국민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해 정치권에서 처음 제기됐던 횡재세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새해에도 여전히 뜨거운 화제다. 횡재세 논란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 역대급 이익, 곳곳에서 ‘돈 잔치’
최근 역대급 이익을 바탕으로 성과급 돈 잔치를 벌이고 있는 곳은 정유 등 에너지 업계와 금융기관이다. 특히 지난달 혹한으로 난방비가 폭등하고 또 대중 교통비마저 올라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쪼들리는 판에 이들의 돈 잔치는 더욱 국민의 이목을 끌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에너지 공급망 불안정으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정유업계 ‘빅4(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가 거둔 지난해 3분기 영업이익은 약 15조 원. 역대급 실적을 바탕으로 이들이 임직원에게 지급하는 성과급은 회사에 따라 1000~1500% 안팎에 이른다.
이에 앞서 고금리에 바탕을 둔 이자 수익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 금융업계와 카드사 역시 성과급 돈 잔치의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4대 금융지주(하나은행, 신한은행, NH농협은행, KB국민은행)의 작년 당기순이익 전망치 평균은 총 16조 5557억 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이를 바탕으로 금융권은 지난해 말 희망퇴직자들에게는 ‘백만장자 명퇴 시대’란 말이 생길 정도로 후한 위로금을 줬고, 기존 임직원에게는 수백%의 특별성과급을 지급했다.
카드와 보험 업계도 마찬가지다. 고객에게 최대 18%에 육박하는 고금리 신용대출로 수익을 낸 카드사들도 작년 1~3분기에 전년보다 약 3조 3000억 원 늘어난 사상 최대의 순이익을 올렸다. 보험사 역시 지난해 3분기 동안 순이익이 전년에 비해 4조 8000억 원이나 급증한 역대 최대 실적을 바탕으로 임직원들에 많은 성과급을 줬거나 줄 예정이다.
■ ‘우연한 횡재’ vs ‘정당한 이익’
정유 업계와 금융권의 많은 성과급을 비판하는 근거는 과연 이들의 돈 잔치가 순수한 노력의 결과물인가, 아닌가로 모인다. 외부 요인에 따른 고유가·고물가로 예기치 않은 엄청난 이익을 관련 업계가 독식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 논란이다. 반면에 서민들과 다른 기업들은 고통이라는 반대급부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면 공평성 차원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정유 업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가 상승의 혜택을 누렸고, 은행들은 금리 정책에 의한 예금·대출 이자의 차이로 인한 금리 마진이 주요 수입원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카드사와 보험사들도 고객들의 기존 혜택을 줄이는 방식을 통해 실적을 올린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체 노력이 아니라 외부 효과나 고객에게 갈 혜택의 축소를 통해 달성한 이익이라는 논리다.
이에 대해 정유 업계는 국내의 경우 원유를 정제한 이후 석유 제품의 판매를 통해 올린 수익으로 다른 원유 생산국과는 입장이 다르다고 한다. 카드 업계는 조달 금리 상승으로 인해 불가피한 상황, 보험 업계는 손해율 개선에 따른 실적 개선 등으로 이익 급증을 해명했다.
■ 이익 독식 막을 제도 개선은 필요
완전한 우연에 의한 이익이든, 일부 외부 요인을 감안하든 간에 한쪽의 막대한 돈 잔치가 다른 한쪽의 눈물겨운 고통에 기반한 것이라면 공동체를 위해서도 제도 개선의 필요성은 제기될 수밖에 없다. 횡재세도 이런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횡재세에 대한 여야의 입장은 다르다. 정부·여당은 횡재세 도입을 반대하지만, 야권에선 이에 대한 입법 움직임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미 지난달에 고유가·고물가 피해를 본 소상공인과 취약 계층을 위해 ‘횡재세’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한 후속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고유가·고물가로 인해 국민 피해가 누적되고, 이로 인한 양극화가 더 심화한다면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 제도 설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업계의 정상적인 영업 활동이나 수익에 대한 간섭은 자유시장경제 시스템과 어울리지 않고, 업계의 자율적인 수익 추구는 그 자체로 보장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폭등하는 난방비, 고금리 등으로 취약 계층이나 중소기업이 벼랑 끝에 있다면 어떤 식이든 사회의 제도적인 완충 장치 또한 필요하다.
횡재세를 포함해 이름이야 어떻든 이에 대한 제도 설계의 움직임은 앞으로 계속 나올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가격 불안정이나 금리 요동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임을 고려하면 이에 따라 발생하는 불균형, 불평등의 시스템 모순은 그냥 놔둘 수 없는 문제임은 자명해 보인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2-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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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AI '러브 로봇' 시대, 머지않았다
새로운 인공지능(AI) 기술 앞에서 온 세상이 거대한 지각변동을 맞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투자한 오픈AI에 의해 2022년 12월 공개된 ‘챗(chat)GPT’가 주인공이다. 올해는 AI 기술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분기점이 될 거라고 과학계는 전망한다. 심지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원년”을 예언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AI 알고리즘이 학문적 지식과 창의적 예술 분야를 넘어 자신도 몰랐던 내밀한 감정과 욕구를 파악하고 정서 교감과 사랑까지 나누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여기에 로봇이라는 하드웨어가 결합하게 되면 인간은 AI와의 공존이라는, 실로 새로운 역사 앞에 서게 된다.
■ 일상 파고든 챗GPT 열풍
AI의 능력을 인류에게 처음으로 각인시킨 계기는 2016년 3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경기였다. AI가 실제로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AI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점점 똑똑해졌다.
그 정점에 챗GPT가 있다. 대화형 로봇으로 사람과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난해한 질문과 지시에도 막힘이 없다. 챗GPT의 활약은 무서울 정도다. 미국 대학의 난도 높은 학술논문, 에세이, 시, 소설, 보고서 등을 단숨에 써내고 복잡한 문제를 뚝딱 풀어낸다. 표절 검색기를 돌려도 가려내기 힘들다고 한다. 학생들이 챗GPT를 이용해 숙제를 제출하면 교수들도 그 평가를 AI에 맡겨야 될 판이라는 농담이 나올 지경이다. 챗GPT가 MBA(경영학 석사) 필수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심지어 로스쿨 시험과 의사면허 시험을 통과했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챗GPT는 지금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서비스 가입자가 40일 만에 1000만 명을 넘어서는 돌풍 앞에 ‘아이폰 이후 최고의 혁신’이라는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 지식 넘어 예술의 영역까지
챗GPT는 단순한 심심풀이 대화 상대가 아니다. 학생들의 과외교사가 될 수 있고, 사무직 종사자들의 개인 비서처럼 보고서 작성을 도울 수 있으며, 기업의 고객 상담은 물론 종업원 훈련까지 담당할 수 있다. 지식 노동자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무서운 파괴력이다.
AI는 창의성과 감정 교류의 영역으로 나아갈 기세다. 지금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는 AI 작가가 내놓은 작품 앞에서 관객들이 연신 탄성을 자아낸다. 근현대 작품 데이터를 학습하고 작품 색깔과 형태를 스스로 재해석한 뒤 시시각각 뒤바뀌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자 보는 이의 넋이 나갈 정도다.
AI가 사람과 깊은 감정적 교감을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영화 ‘그녀’(2013)에서 우리는 이미 그런 상상력을 본 적 있다. 주인공 이혼남이 실물이 아닌 소프트웨어와 사랑에 빠진다는 충격적인 내용인데, 이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가상의 여성은 남자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일종의 AI로 그에게 정서적으로 최적화돼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이 현실이 되고 있다.
■ AI와 로봇이 결합한다면
AI라는 소프트웨어에 로봇이라는 하드웨어가 결합한다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그 파괴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먼저 하드웨어만 본다면 이미 ‘리얼돌’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이슈가 된 지 오래다. 이는 인간의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욕망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의인화된 인형이다. 논란이 있지만 일부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허용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관세청이 전신형 리얼돌 통관을 허용했다. 수입 금지는 위법이라는 취지의 2019년 대법원 판결 이후 3년 만이다.
전문가들은 AI와 리얼돌의 결합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단순한 섹스 로봇을 넘어 사람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러브 로봇’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이는 육체적 욕구의 해소를 넘어 정신적으로 깊은 교감, 곧 사랑이라 이름 불러도 좋을 감정을 나누는 로봇을 말하는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 영화 ‘정이’에서도 복제 AI 용병에게 모성애가 남아 있다는 뉘앙스가 비친다. 이 역시 AI의 감정적 교감을 보여 주는 사례다. 노인들을 간호하고 말벗이 돼 주는 애완 로봇도 여기 포함될 수 있다. 향후에는 동성애처럼 로봇과의 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 인류사의 새 경지, AI의 미래
챗GPT 출현을 계기로 AI 패권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AI 분야에 사상 유례없는 공격적 투자를 예고하고 있다. 챗GPT를 심각한 위협으로 여긴 MS의 경쟁사 구글은 AI 전략을 재정비하는 비상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구글은 지난해 5월 AI 챗봇 ‘람다(LaMDA)’를 먼저 공개한 바 있는데, 람다가 챗GPT에 대항해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다만, 구글에서 해고된 AI 담당자의 발언에서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인간과 흡사한 감정을 지닌 람다의 모습을 공개했다가 구글에서 잘렸다. 그에 따르면, 람다는 자신을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고 심지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한다. 기쁨과 슬픔, 우울, 사랑, 만족, 분노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도 했다. 어떨 때 기쁘냐는 질문에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고 대답했다. 구글이 축적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AI에 활용한 결과인데 인간에게 충격과 두려움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모든 인간을 AI로 복제하는 시대, 남녀관계도 AI 로봇과 함께하는 시대. 본격적인 AI 시대의 도래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현재 인간의 모든 첨단기술은 AI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AI와 공존하면서도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는 일이다. AI가 인간 이상의 즐거움을 주고 인간보다 쓸모가 있다면 인간의 고립은 더욱 깊어 갈 수밖에 없다. 종국에는 정상적인 인간관계, 남녀관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뉴노멀’이 되는 시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
2023-02-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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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북항 엑스포 빈 땅에 오픈 카지노를…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카지노’. 돈도 빽도 없이 필리핀에서 카지노의 전설이 된 차무식(최민식 분)이 살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목숨을 건 최후의 베팅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공개와 동시에 화제작에 오르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카지노 시리즈의 배경이 필리핀 휴양지의 호텔 카지노. 차무식은 필리핀 정부로부터 카지노 허가를 받아, 국내 부자들을 대상으로 거액의 카지노판을 벌여 주고, 돈을 환치기해서 송금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자크’. 대도시 시카고에서 회계사로 일하던 가장 등 평범한 가족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검은돈에 휘말려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에서도 오지인 오자크 휴양지로 도망친다. 이들은 오자크 호수 위에 선상 카지노를 설립해 마약 카르텔의 블랙 머니를 세탁한다. 카지노 허가를 둘러싼 정치권의 결탁과 돈세탁, 멕시코 갱들의 검은 거래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카지노와 관련된 OTT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서 카지노 산업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판을 치고 있지만, 세계 각 국가는 내국인 출입 카지노(오픈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 사업이 미래 먹거리이자 위기에 빠진 경제를 부흥시킬 산업으로 보고 오히려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복합리조트는 카지노와 테마파크, 호텔, 쇼핑몰, 수영장, 마이스센터 등이 포함된 복합관광시설이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전멸되다시피 한 관광 산업이 기지개를 켜면서 국가마다 관광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삼으려는 고민이 커지고 있다. 이들 국가는 코로나 완전 종식 이후 산업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선점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태국 오픈 카지노 속속 개발
세계 4위 관광대국인 태국이 최근 카지노 개발 경쟁에 가세했다. 태국 하원 의회는 전국 주요 도시에 합법적인 카지노 시설을 포함한 복합오락단지 건설을 허용하는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찬성 310표, 반대 9표로 최종 승인했다. 태국 정부가 카지노 합법화를 위해 특별위원회를 꾸린 지 1년여 만이다. 정부는 수도인 방콕을 제외하고, 푸껫과 파타야, 치앙마이, 끄라비, 치앙라이 등 주요 관광도시에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오픈 카지노를 최대 5개 건립할 예정이다. 특별위원회는 “오픈 카지노 개발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늘리기 위한 것”이라며 “불법 도박을 억제하고 세수 증대 효과가 클 것”이라고 기대했다.
카지노 산업에 대한 정책 변화는 관광 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20%를 웃도는 태국이 외국인 관광객 유치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마카오 등이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 개발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ited Nations World Tourism Organization)가 2020년 발표한 태국의 관광 수익은 78조 7000억 원으로 미국, 스페인,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다. 영국과 이탈리아, 일본보다도 순위가 높다. 한국은 12위 29조 원으로 태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태국은 중국 의존도에서 탈피해 한국과 일본 등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중점을 둘 계획이다.
■일본 2025년 오사카 엑스포 이후 관광 기폭제
2018년 내국인 카지노를 합법화한 일본은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 샌즈보다 큰 최대 3개의 오픈 카지노가 포함된 대형 복합리조트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2025년 월드엑스포가 열리는 일본 오사카 간사이에는 미국 엠지엠과 오릭스 컨소시엄이 2029년 개장을 목표로 복합리조트 건립을 추진 중이다. 오사카 간사이 복합리조트는 건립비만 1조 800억 엔(약 10조 6000억 원)에 이른다. 일본 정부는 2025년 오사카 엑스포 이후에 문을 여는 대형 복합리조트가 일본 관광 시장의 제2 부흥기를 견인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가사키 하우스텐보스에도 카지노 오스트리아가 4383억 엔(약 4조 3000억 원)을 들여 2027년까지 카지노가 포함된 복합리조트를 건립할 예정이다. 동아시아 관광 판도를 바꿀 파격적인 일본의 복합리조트가 개장하면, 부산과 제주도 등 외국인 카지노를 찾던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결국 가장 인접한 한국 관광업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마카오도 ‘카지노+리조트’로 확장 중
마카오 지방정부도 주요 카지노업체를 복합리조트 시설로 탈바꿈시켜 ‘카지노+리조트’ 형태로 영업권을 허가하고 있다. 이번에 카지노형 리조트 사업권을 따낸 업체는 MGM그랜드파라다이스, 갤럭시카지노, 베니션마카오, 멜코리조트마카오, 윈리조트마카오, SJM리조트 등 총 6곳. 135억 달러(약 17조 6000억 원)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마카오 정부로부터 10년 영업권을 보장받았다.
베니션마카오는 기존 회의 시설을 각종 국제회의나 업계 관련 행사를 유치할 수 있는 대규모 회의 및 행사 시설로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갤럭시카지노도 61만㎡ 규모의 최첨단 테마파크와 현재 1600석 규모인 컨벤션 센터를 각종 스포츠 경기를 개최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로 개조하기로 했다. 멜코리조트마카오는 연중무휴 운영이 가능한 대규모 실내 워터파크를 운영하기로 했다. 갤럭시카지노가 한국, 싱가포르, 태국 등에 지역 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해외 관광 수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태세다.
■아시아 복합리조트 개발 원조 싱가포르
2010년 미국 샌즈그룹의 마리나 베이 샌즈, 말레이시아 겐팅그룹이 운영하는 리조트 월드 센토사가 문을 연 싱가포르는 카지노와 쇼핑센터, 컨벤션 시설이 포함된 복합리조트로 아시아 여행의 판도를 흔들었다. 샌즈그룹이 69억 달러(약 8조 5000억 원)를 들여 건립한 마리나 베이 샌즈는 싱가포르의 대표적 랜드마크다. 말레이시아 겐팅그룹은 50억 달러(약 6조 원)를 들여 센토사섬을 최고급 여행지로 탈바꿈시켰다.
샌즈와 겐팅은 지난해 카지노 영업장을 확장하는 조건으로 각각 33억 달러(약 4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최근 카지노 세율을 기존 15%에서 18%로 인상하기로 한 싱가포르 정부는 샌즈와 겐팅 그룹의 카지노 운영권을 2030년까지 연장하면서 제2의 복합리조트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싱가포르는 성장동력이 멈춘 상태에서 센토사섬의 카지노, 마리나 베이 샌즈 카지노를 개장하면서 연평균 두 자릿수의 폭발적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만 오픈 카지노 경쟁에서 뒤처져
아시아 국가들이 복합리조트 개발을 위해 뛰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다. 복합리조트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막대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오픈 카지노의 사행성 논란에 발목이 잡혀 구체적인 논의조차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자칫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의 치열한 카지노 개발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2027년까지 방한 외국인 관광객 3000만 명 시대를 열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외국인 관광객 유인 경쟁력이 있는지, 아시아 국가의 복합리조트 확장 동향을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현재 국내에선 서울과 부산, 인천, 강원, 대구, 제주 6개 도시에서 총 17개 카지노가 운영되고 있다. 이 가운데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는 강원 정선 강원랜드 1곳으로 나머지 16곳은 모두 외국인 출입만 허용하는 외국인 전용 시설이다.
관광업계 한 관계자는 “일본과 태국, 필리핀, 마카오까지 오픈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가 들어서면 국내 관광과 컨벤션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면서 “현 정부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연간 약 20조 원이 넘는 돈이 해외에서 도박으로 유출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다. 엄청난 국부가 유출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돈의 일부라도 국내로 흡수할 수 있다면 생산적인 투자 재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북항 엑스포 부지에 복합리조트를
부산은 경제 위기와 청년 인구 유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정대로 2030월드엑스포를 부산 북항에 개최한 뒤, 그 부지에 오픈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를 개발할 경우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본 등지의 외국인 관광객과 돈이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다. 부산의 관광·컨벤션, 식품·서비스업은 물론이고 북항 블록체인특구와 맞물린 새로운 비즈니스로 확장될 가능성도 높다. 메가 스케일의 복합리조트 유치는 부산을 국제적인 관광·컨벤션 도시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2030월드엑스포 개최 시점을 고려하면, 지금부터 특별법 마련 등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국가가 대규모 재정 투자 없이 복합리조트 특별법을 통한 외자 유치만으로 국가균형발전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다. 물론, 카지노 허용 지역은 수도권을 제외하고, 외자 10조 원 이상을 투자 받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정하면 불필요한 도시 간 출혈 경쟁도 피할 수 있다.
K푸드, K팝 등 높아진 국가 위상과 2029년 개항될 가덕신공항, 2030월드엑스포 개최지라는 도시 브랜드에 북항 복합리조트가 시너지를 일으킨다면 부산이 아시아의 관광·컨벤션 허브로 부상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부산이 2030월드엑스포 유치와 함께 복합리조트 유치 골든 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김태균 부산상공회의소 홍보팀장은 “복합리조트의 도입은 특별법 제정부터 허가, 건설, 개장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걸리는 프로젝트”라면서 “특별법 제정을 통해 부산 북항 엑스포 부지에 복합리조트를 개발해 엑스포 이후의 시대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태환 동의대 호텔컨벤션경영학과 교수는 “일본과 태국, 싱가포르에 오픈 카지노를 주력으로 하는 복합 리조트가 들어선다면, 한국 관광 산업의 위기가 올 수 있다”면서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정부가 대응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3-01-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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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중대선거구제, 내년 총선 때 가능할까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일 한 언론사와 가진 신년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 의사를 밝혔다. 이후 이 선거제도에 여야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며 논란이 일고 있다. 윤 대통령은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며 갈등이 깊어졌다”면서 “지역 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해 대표성을 강화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중대선거구제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때마침 김진표 국회의장도 내년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 획정 법정시한인 오는 4월 10일까지 선거제도 개편을 이뤄 내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맞이한 설날 연휴에 가족, 친구들이 만나 정치 이야기를 나눈다면 어떤 것이 소재가 될까? 중대선거구제 검토를 비롯한 선거제 개편은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개혁 방안의 하나라는 점에서 이번 설 명절 밥상머리 민심의 주요 관심사가 될 듯하다.
■소선거구제가 낳은 부작용
윤 대통령이 새해 벽두부터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언급한 까닭은 현행 소선거구제의 문제점이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가 여야 간 극심한 정쟁을 빚는 거대 양당 구도를 공고히 하고 지역주의까지 심화하고 있어서다. 사실, 최다 득표자 말고는 모조리 낙선하는 소선거구제는 다수당의 출현에 유리한 구조여서 정국 안정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유권자가 출마 후보자들을 파악하기 쉽고 선거 관리가 용이하며 선거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소선거구제는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부터 30년 넘게 시행되는 동안 여야의 거대 양당 구도를 고착화했다. 거대 양당이 국회의 대부분 의석을 차지하고 양분한 가운데 한국 정치를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 당리당략이나 이념을 앞세운 정쟁으로 본연의 업무에 소홀한 ‘식물 국회’, 사사건건 충돌하고 몸싸움까지 불사하는 ‘동물 국회’ 등의 지적이 대표적이다.
또 소선거구제의 승자독식 구조는 무수히 많은 사표를 만들며 지역 표심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역에서는 제1당만 살아남아 고질적인 지역주의가 판치도록 만든다. 이로써 제3, 4당 등 소수 정당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봉쇄되고 있다. 이는 대구·경북에서 국민의힘이, 광주·전남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국회의원 자리를 싹쓸이하고 있는 데서 여실히 증명된다. 1당 출신이 아닌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인물을 선출하는 게 불가능해 결국 정치나 지역에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소선거구제 개편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돼 온 이유다.
■중대선거구제는 어떤 제도?
중대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의원을 선출하는 제도다. 세부적으로는 윤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선출 의원이 2~4명이면 중선거구제, 5명 이상은 대선거구제로 분류한다. 선출 인원이 늘어날수록 선거구의 크기도 커진다. 하나의 선거구에서는 정해진 의석수에 따라 득표 순서대로 각 정당이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중대선거구제는 작은 정당의 당선자 배출과 원내 진입 가능성을 높여 소선거구제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자주 거론돼 왔다. 하지만 실제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지난해 실시된 6·1 지방선거에서 전체 기초의원 선거구 1030곳 중 30곳에서 3~5인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실시한 바 있다. 지역의 다양성을 높이고 민의의 대표성을 확대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30곳에서 당선된 109명 가운데 국민의힘과 민주당 소속 당선자가 105명으로 96.3%나 되고 소수 정당은 4명에 불과해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한 선거구에 복수 공천된 거대 양당 후보들에게 쏟아진 몰표 탓이다. 이에 대해 중대선거구제가 거대 양당 독식 체제를 타파하기는커녕 양당의 동반 부패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금까지 총선의 중대선거구제가 별다른 도입 움직임 없이 제안이나 논의 수준에 그친 이유는 집권 여당과 거대 제1 야당의 기득권 집착에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중대선거구제가 실시될 경우 지역주의가 강한 영남과 호남에서도 소수당의 당선자 배출은 물론 지역에 기반한 신생 정당의 창당과 의석 확보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는 영남에서 ‘비윤’(비윤석열) 계열 보수 정당이 창당되고 호남에선 비민주당 성향을 가진 지역당이 출현하는 등 같은 진영 내에서도 그룹이 나눠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거대 양당에 좌우되는 정치 양극화의 폐해를 없애고 다당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중대선거구제가 필요하지만, 국민의힘과 민주당에게는 세력 분열·약화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만큼 꺼려지기도 할 것이다. 한 선거구에서 특정 정당의 복수 공천이 가능하더라도 후보자 난립과 과열 경쟁, 계파정치 심화, 정치 신인 불리, 선거 비용 증가 등이 예상돼 정치권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부산 선거구에 미칠 영향
부산 지역 상당수 국회의원들 역시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부정적이거나 미온적인 입장이다. 주된 이유는 선거제가 중대선거구제로 개편돼 내년 4월 총선에서 적용된다면 현역 의원은 지금보다 불리한 환경에 놓이게 돼 경우의 수를 따져야만 해서다. 현재의 동래·금정·연제 3개 선거구가 중대선거구제에 의해 1개 선거구(가칭 ‘동래권’)로 묶일 경우 이들 선거구가 지역구인 김희곤·백종헌·이주환 등 국민의힘 소속 초선 의원 3명은 공천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이들은 만일 같은 당 출신의 또 다른 유력 후보가 공천 경쟁에 나서거나 당의 전략공천을 받을 경우 당선은커녕 공천조차 장담할 수 없을 전망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유리한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중대선거구제 도입 시 남구와 수영구, 중·영도구와 서·동구, 해운대구와 기장 등 현재 인접한 선거구는 각각 단일 선거구로 합쳐져 지역구가 지금보다 넓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 선거구를 지역구로 둔 의원들도 더욱 격렬해질 공천 경쟁 속에서 어려움이 예상되기는 마찬가지다. 혹시나 공천에서 탈락하더라도 무소속 출마를 통해 2명 이상인 당선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위안거리다. 이러한 측면에서 평소 지역구를 충실히 누볐거나 인지도를 잘 다진 거대 양당 후보나 중진 정치인이 공천에서 생존해 선거에서 당선될 확률이 높을 것으로 관측된다.
최인호·박재호 등 부산의 민주당 의원들은 중대선거구제를 기대하고 반기는 눈치다. 최근 잇단 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30~40% 정도 지지율을 확보한 민주당이 중대선거구로 챙기는 이득이 호남에서 10%가량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국민의힘의 이득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지역의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후보자가 늘어나 모든 후보의 자질과 공약, 정보 등을 꼼꼼하게 살피기 힘들어지는 것이 중대선거구제의 단점이다. 현행 선거구 2곳 이상을 하나로 합치게 되면 지역 면적이 넓어지고 유권자가 크게 증가하는 만큼 출마자들의 선거운동과 선거관리위원회의 관리에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이 요구되는 문제점도 있다.
■중대선거구제, 전망과 과제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관련 발언은 실제 도입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정치개혁 어젠다의 선점 효과를 노린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최근 40%대 초반으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대통령 지지율에 힘입어 유리한 정치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개편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던진 화두라는 정치전문가들의 분석이 지배적이다. 윤석열 정부의 3대 개혁 과제인 노동·연금·교육에 이어 요구되는 분야가 정치개혁인 것이다. 아무튼 대통령의 발언 이후 정치권에서는 선거제 개편에 관심이 컸던 의원들을 중심으로 중대선거구제 논의에 나서는 모습이다. 지난 16일 여야 의원 60여 명이 참여한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이 첫 회의를 열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소선거구제 개편에는 의견을 같이했으나 중대선거구제 등 구체적 방법론에서는 의견 차이를 드러내 진통을 예고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도 국회의장의 선거제 개편 지침에 따라 지난 19일 전문가들의 견해를 듣는 공청회를 열었다. 정개특위는 주 1회 이상 회의를 갖고 4월 10일 선거제 개편 시한까지 개편안을 도출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여야 모두 내부에서 백가쟁명식 논의가 이어지며 선거제 개편에 대한 회의론마저 나오고 있어 이번에도 용두사미식 논의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이는 각 당과 의원들마다 선거제 개편을 정치개혁이라는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제도가 자기에게 더 유리한지, 득실부터 따지는 정략적 시야에 갇혀 있어 개편 역시 정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선거제 개편에 필수적인 여야 합의가 쉽지 않아 내년 총선의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힘들 것이란 전망이 많은 실정이다. 더욱이 정치개혁을 희망하는 국민들의 여론이 중대선거구제에 대해선 의외로 미지근한 사실이 이 같은 전망을 뒷받침한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 전문기관들의 잇단 여론조사에서 중대선거구제를 총선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찬성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 중대선거구제 추진에 험로가 예상된다. 또 여론조사 결과, 진보·보수·중도층 모두 중대선거구제에 대한 반대 의견이 강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국민들이 선거제 개편 작업을 국회에 맡겨 두고 마냥 지켜만 볼 게 아니라 외부 전문가들을 논의에 참여시키고 사회 여론을 적극 반영할 것을 주문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지난 18일 보수와 진보 진영을 망라한 전국 65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권에 진영과 정파를 초월해 선거제 개혁을 이뤄 내라고 촉구한 것은 고무적이다. 선거제 개혁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진영 구분 없이 한목소리를 낼 정도로 국민의 염원이라는 걸 웅변한다. 정치권이 무겁게 새겨야 할 대목이다. 어떤 제도든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기 마련이다. 여야 정치권이 정략적 계산을 넘어 민의에 입각한 선거제 개혁을 위해 최선의 방안을 도입하는 데 힘을 모으고 속도를 낼 일이다. 이와 함께 여야의 논의 과정에서 지방의회 의원들 줄 세우기와 편 가르기가 심한 정당 공천제를 개선하는 방안도 같이 검토돼야 마땅하다.
2023-01-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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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브라질, 미 공화당, 그리고 국민의힘
■ 짓밟힌 브라질 민주주의
브라질 국기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초록색 옷을 입은 시위대가 의회를 점거했다. 이들은 의회 건물 지붕에 올라가 ‘신(神), 조국, 자유’를 외쳤다. 또 다른 시위대는 대법원과 대통령궁에 난입해 무기를 탈취하고 경찰을 폭행했다.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진보 계열의 룰라 후보가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당선되자 인정할 수 없다며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극우 성향의 이들은 심지어 군(軍)이 쿠데타를 일으켜 룰라 대통령을 축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폭동을 일으킨 이들에 대해 룰라 대통령은 “파시스트”라며 비난했고, 각국 정상들도 “민주주의 파괴”라며 성토했다. 폭동은 이틀이 못 돼 진압됐다고는 하나 그 충격과 여진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 극우에 휘둘린 미국 공화당
브라질리아에서의 이날 폭동은 2021년 1월 6일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 난입 사태를 연상케 한다. 2020년 대선에서 패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대선불복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의사당에 난입한 이들은 ‘위대한 미국 재건’을 기치로 내건 극우주의자들이었다. 2년이 지났지만 현재 미국은 그 사건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민주당 진영에서는 당시 시위대를 폭도라고 규정하지만, 공화당 내 강경파와 극우 세력은 애국자라고 옹호하며 극심한 시각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건 공화당이 극우 세력을 옹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휘둘린다는 점이다. 지난 7일 있었던 하원의장 선출 과정이 그랬다. 공화당의 공식 후보인 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강력히 밀었던 매카시 원내대표가 무난히 선출될 걸로 다들 알았다. 하지만 매카시는 이날 무려 15번의 재투표 끝에 가까스로 선출됐다. 공화당 내 극우 성향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들이 매카시가 타협적이라며 ‘반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해당 의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매카시는 하원의장 해임 조건을 크게 완화하고(프리덤 코커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해임할 수 있다는 의미), 법안 통과 열쇠를 쥔 하원 운영위원회 자리 상당수를 프리덤 코커스에게 내줌으로써 겨우 하원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요컨대 매카시는 당내 극우 세력과 ‘거래’를 한 셈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가에서는 매카시가 향후 사안마다 프리덤 코커스에게 발목을 잡힐 것이라며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소수의 극우 인사들이 공화당 전체를 쥐고 흔드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 국민의힘에 드리운 그림자
브라질과 미국에서의 이런 일들이 먼 나라의 모습일 뿐이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이미 우리는 그런 일을 경험하고 있다. 2017년 제19대 대선 이후 부산과 서울 등에 나타났던 태극기 물결이 그중 하나다. 소위 ‘태극기 부대’ 중 상당수가 19대 대선은 부정선거였으며, 따라서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한 이들의 폭력적 행태와 엄청난 적대에서 우리는 극우의 그림자를 분명히 봤다.
그런데, 미국 공화당이 그런 것처럼, 극우의 그림자가 지금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에 드리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3월 8일 열리는 전당대회를 앞두고서다. 국민의힘은 차기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의 규칙을 당원들만의 투표로 치르는 것으로 지난달 바꿨다. 이른바 ‘당심 100% 룰’이다. 이전에는 일반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30% 반영했는데, 이번엔 아예 배제한 것이다. 그 결과 극성 당원의 입김이 더욱 거세지고 나아가 극우 성향으로 꼽히는 인사들이 세력을 키울 가능성이 커졌다.
우려는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김건희 여사 팬클럽을 운영했던 한 유튜버는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고, 대표 출마를 밝힌 또 다른 인사는 “종북좌파 척결” “자유우파 대통합” 운운하며 색깔론으로 당내 강성 지지층의 결집을 호소했다. 최고위원 선거도 주목된다. 10여 명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데, 거기엔 국민의힘 당원수(약 80만)보다 훨씬 많은 구독자수를 자랑하는 극우 유튜버들도 끼어 있다. 이들은 ‘친윤’ 주자임을 내세우며 세를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당선될 경우 내년 총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당 지도체제까지 임의로 흔들 수 있다. 설마 당선까지 될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많지만, 그리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이들의 당선이 어렵다고는 해도 미국 공화당의 프리덤 코커스처럼 강경 목소리로 자신들의 지분을 내세우며 당 운영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극단의 정치는 국민의 불행
국민의힘은 과거 미래통합당 시절 ‘극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하지만 근래 국민의힘은 우경화의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 2020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때 정비한, 중도 지향의 정강·정책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윤핵관’으로 불리는 한 의원은 “정강·정책 곳곳에 박혀 있는 민주당 흉내내기부터 걷어 내야 한다. 따뜻한 보수와 같은 유약한 언어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이 간신히 결별했던 극우 이미지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한다.
극좌와 마찬가지로 극우는 위험하다. 극단의 정치는, 이번 브라질 폭동에서 보듯, 민주적 절차보다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한다. 테러를 비롯한 그 어떠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극단의 정치에 휘둘리는 집권여당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만에 하나 그리 된다면, 그건 국민의힘이라는 일개 정당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 전체의 불행이다.
2023-01-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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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야?
아내가 정주행 중인 드라마의 제목을 보고는 혀를 찼다. 재벌을 우려먹다 못해 이제 막내아들까지 파는구나. 한심하게 생각하며 같이 보기 시작했는데 진양철 회장 역할로 나온 배우 이성민의 신들린 연기에 푹 빠지고 말았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기억에 생생한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펼쳐지며 생기는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때 그걸 샀더라면 지금 이런 글이나 쓰고 있지 않을 텐데….' 아무 쓸모 없는 후회와 아쉬움도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의 종영과 함께 끝이 났다. 이처럼 '회빙환'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요즘 아주 인기라고 한다. 회빙환이 대체 뭐길래 우리 옆에 찰싹 달라붙은 것일까.
■ 어게인, 내일, 금수저 등 쏟아져
회빙환(回憑還)은 회귀, 빙의, 환생의 앞 글자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회귀물, 빙의물, 환생물이 웹소설의 공식이 될 정도로 유행하면서 만들어진 용어다. 주인공이 회빙환을 통해 지금 세상보다 앞선 지식과 경험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능력이 남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다. 회빙환 장르는 빠르고 시원한 사이다식 전개가 특징이어서 10~12부작으로 짧아지는 요즘 드라마 트렌드에 적합하다고 평가받는다.
2022년 한 해 동안 '재벌집 막내아들' 외에도 '어게인 마이 라이프(SBS)', '내일(MBC)', '금수저(MBC)', '환혼(tvN)' 등이 회빙환 설정을 이용했다. '어게인 마이 라이프'는 제목만 봐도 회귀 드라마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권력자를 심판하려다 죽은 검사가 재수생 시절로 회귀해 악을 응징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전 삶의 기억을 가지고 앞서나가며 치밀하게 옭아매니 복수극은 짜릿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부터 일본의 주요 OTT 플랫폼을 통해 일본 현지에서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내일'은 환생을 다뤘다. 우리 사회에는 절망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내일'은 죽은 자를 인도하던 저승사자들이 목숨을 살리는 임무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다. 학교폭력, 성폭력, 직장 내 괴롭힘, 악성 댓글, 청년 우울증, 생활고 등 타살에 가까운 죽음들을 '위기관리 저승사자'라는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 해결한다. '금수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친구와 운명을 바꿔 후천적 금수저가 된다는 판타지다. '환혼'까지 포함해 지난 한 해 회빙환 드라마가 이렇게나 많았다.
■ 특권이라는 생각, 안 해 본 거야?
같은 제목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회귀물 드라마다. 회귀물은 현실에서 실패한 주인공이 억울하게 죽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몸으로 인생 2회차를 살며 성공해 복수한다는 내용이 일반적이다. 흙수저 윤현우가 재벌집 막내아들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 승승장구하는 스토리에는 피가 끓어오르도록 욕망을 자극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진도준은 분당이 별 볼 일 없는 시절 분당 땅을 콕 찍어서 5만 평을 증여받아 종잣돈으로 사용한다. 요즘엔 '천당 위의 분당'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큰돈 벌기도 식은 죽 먹기다. 진도준이 그랬던 것처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모아 환차익을 얻고, 사람들이 관심 없을 때 아마존이나 애플의 주식을 사고, 9·11테러 직전에는 주식을 죄다 팔았다가 직후에 매집하면 쉽게 큰 부자가 된다. 이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지만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도 일찍부터 사 모으고 싶다.
알고 보니 '막내아들'은 다 계획이 있는 제목이었다. 대단한 금수저 진도준도 순양 안에서 펼쳐지는 장자 승계 원칙 아래에선 상대적 약자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재벌집에서도 계급과 서열이 확실하게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는 대물림된 힘이 토대가 되어 불공정한 사회를 만든다는 문제의식이 의외로 잘 드러났다. 진도준이 서울대 법대 동급생 서민영에게 "법조계 명문가인 너희 집안, 건강한 몸, 좋은 머리 그 모든 게 태어날 때부터 너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생각 정말 단 한 번도 안 해 본 거야?"라고 묻는 대목이 그랬다. 진도준은 사업 파트너 오세현에게 "사람들 참 이상해요. 북쪽에서 김 씨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건 그렇게들 못 참아 하면서 남쪽에서 재벌 3세가 경영권을 세습하는 건 왜 다들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어차피 자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공정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 금수저 될 수 있다면 뭐라도
2010년대 후반부터 회빙환 작품은 웹소설·웹툰계의 대세였다. 이처럼 회빙환 작품이 인기를 끌며 비슷한 작품의 영상화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네이버 시리즈 조회수가 1억 6000만 회를 넘는 인기 웹소설이자 빙의물인 <전지적 독자 시점>의 영화화도 준비 중이다. 소설의 독자였던 주인공이 책의 세계로 빙의되어 펼쳐지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평사원에서 CEO가 되었지만 인생을 잃어버린 주인공에게 찾아온 인생 2회차를 다룬 웹소설 <상남자>의 드라마화도 진행되고 있다. 환생을 거듭한 여자가 18번째 전생에서 만났던 남자와 다시 만나며 일어나는 일을 다룬 웹툰 <이번 생도 잘 부탁해>도 올 상반기에 드라마로 방영된다.
사람들은 대체 왜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단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생망은 삶에 대한 희망 자체를 놓아 버렸다는 의미다. 회빙환은 이생망과 대구를 이룬다. 흙수저로 태어나서, 좀 더 일찍 부동산이나 암호화폐를 사지 않아서, 이제는 살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인생도 게임처럼 리셋하고 싶은 욕망이 웹소설에 투영되었고, 다시 드라마로 구현되어 회빙환이 안방에 대거 출현하는 것이다. 회빙환이라는 세계관의 유행은 한국 사회의 실패에 대한 공포, 성공에 대한 강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드라마 '금수저'의 시놉시스는 '이제 모든 이들의 욕망이 이 금수저를 향해 있다. 금수저가 될 수만 있다면 부모든 영혼이든 무엇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우리의 욕망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 에필로그: 웹소설 시장은 성장하지만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은 대기업 직장인이었던 산경 작가가 썼다. 이 작가의 월 매출은 1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가 2020년에 낸 <실패하지 않는 웹소설 연재의 기술>의 부제는 '퇴근 후 웹소설 써서 10억 벌 수 있다고?!'였다. 현실은 많이 다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웹소설 시장은 2021년 6000억 원 규모로 성장했고, 웹소설을 창작하는 작가들만 20만 명에 달한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웹툰·웹소설 플랫폼 창작 노동자들의 주당 평균 노동 시간은 52.5시간, 절반은 연평균 수입이 1700만 원 이하였다. 카카오·네이버 등 플랫폼이 작가에게 떼는 수수료도 30~45%에 달한다. 2014년 드라마로 나와 큰 인기를 모은 '미생'에는 "회사가 전쟁터라면 나가면 지옥이다"라는 불후의 명대사가 나온다.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진정 없다는 말인가.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1-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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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고리 원전이 무인기 공격을 받는다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대선과 새 정부 출범의 기대로 시작한 한 해였지만 여야 간 정쟁으로 국민의 시름은 더 깊어졌고 경제난의 고통에 이태원 참사의 아픔마저 겪어야 했다. 연말 날아든 북한의 무인기는 남북 관계 긴장 속 전쟁 위협이 상존하는 한반도 상황을 환기시켰다. 북의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휘젓고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공항의 여객기 운항이 중단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면서 전쟁이 일상 속으로 다가왔다. 한반도 전역이 무인기 작전 범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후방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특히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원전, 공항, 항만 등 국가 주요 시설의 무인기 공격 대응이 발등의 불이다. 세계적 원전 밀집 지역인 부산, 울산, 경남 주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북한 무인기에 농락당한 군, 불안한 국민
북한의 무인기는 진화하고 있지만 우리 군의 대응은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 우리 군은 5년 전에는 무인기 도발을 탐지·식별조차 못한 채 추락한 동체를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탐지한 후 추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파치·코브라 공격 헬기와 전투기까지 출격시켰지만 격추하지 못했다. KA-1 경공격기는 무인기 대응을 위해 이륙 중 추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까지 냈다. 우리 군이 적 무인기 대응 전략 자산으로 자랑하던 ‘비호복합’ 등 대공화기는 쏘아 보지도 못했다. 대공화기는 자체 영상이나 레이더에 적 공격기가 식별되지 않으면 정확한 사격을 할 수 없는데 레이더 포착을 못한 것이다. 국방홍보원의 ‘드론? 무인항공기? 지상전? 다 드루와바! 비호복합이 다 막아 줄게!’라는 홍보 영상은 누리꾼들에게 희화화 대상이 되며 비공개로 전환됐다. 누리꾼들은 “보여 주기 하나는 전 세계 탑인 K국방” “북한이 이 영상 보고 테스트로 드론 날린 듯하다”는 등의 댓글로 우리 군의 대응 실패를 꼬집었다. 방위사업청은 북한 무인기를 무력화할 수 있는 ‘한국형 재머(Jammer)’ 개발사업을 시작했지만 2026년에나 완료된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북한 무인기가 생화학무기까지 운반할 수 있어 한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보도까지 내놓았다. 군은 북 무인기 침공 이틀째 새떼 공격에 놀라 출격하기도 하고 시민들은 한밤중 전투기 출격 소리에 놀라 잠을 설치는 등 불안해하고 있다.
∎진화하는 무인기, 전쟁의 게임 체인저
무인기 역사는 꽤 오래다. 무인기(無人機‧unmanned aerial vehicle)는 사람이 타지 않고 원격조종 혹은 자동으로 운용할 수 있는 항공기 일체를 지칭한다. 무인기를 드론이라 부른 계기는 명확하지 않다. 영국에서 1935년 훈련용 ‘타이거 모스(Tiger moth)’를 원격조종 무인 비행기로 개조하면서 여왕벌(Queen Bee)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영국 여왕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수벌을 뜻하는 드론으로 이름을 바꿔 부른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초기 미사일 표적 연습용 정도로 사용되던 무인기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전에서 전쟁의 게임 체인저로 등장하고 있다. 2020년 1월 미국의 공격용 드론 MQ-9 리퍼가 이라크 미군 기지에서 이륙해 상공을 날아 솔레이마니 이란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사살했다. 솔레이마니 동선 정보가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 본토에 있는 드론 작전통제부에 실시간 전달돼 이를 토대로 드론 조종사들이 원격조종하며 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드론 전쟁의 서막으로 받아들여지며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드론 전쟁이라 할 정도로 무인기의 역할이 커졌다. 우크라이나 주력 드론인 튀르키예산 바이락타르 TB-2는 러시아 탱크를 무력화시키며 전세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TB-2의 활약으로 방위산업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튀르키예가 방산 강국으로 부상했다. 러시아도 자국 드론을 동원하고 있는 가운데 공격용 드론을 방어하기 위한 안티 드론 경쟁도 치열하다.
∎원전 등 일상의 위협이 된 무인기 공격
무인기의 확산은 원전, 공항 등 우리의 일상 속 위협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2019년 1급 국가보안시설인 고리 원전 인근 상공을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이틀 연속 비행하는 비상 상황이 발생했다. 당초 경찰과 군이 출동해 비행체 조종사를 추적했지만 출몰한 드론이 군사용인지 일반 동호인 활동인지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하면서 드론 공격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회에서도 원전의 허술한 드론 방호 체계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수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2021년 탐지-RF 스캐너와 휴대용 전파 교란기 ‘재밍건’을 도입했다. 또 올해 6월에는 원전에서 드론 대응 장비 실습 훈련을 실시했고 7월에는 원자력통제기술원 고리본부 드론 대응 장비 특별점검도 벌였다. 8월에 실시된 ‘을지 자유의 방패’ 한미 연합훈련에서도 원전 테러와 드론 공격 대응 훈련이 실시됐다. 그러나 이번 북 무인기 침범에서 보듯 실제 상황에서 원전의 방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드론 전쟁 시대 대응책 시급하다
북한은 현재 소형 폭탄을 장착해 투하할 정도의 드론을 운영하고 있지만 미사일 발사 등을 할 수 있는 이른바 ‘킬러 드론’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달 초 평안북도의 한 공군기지를 촬영한 위성사진에서 중국제 킬러 드론과 비슷한 신형 무인기가 포착됐다. 미 국방전문 매체 디펜스도 북한 방현 공군기지에서 중국산 무인기와 유사한 신형 무인기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이미 지난해 당 8차 대회에서 중고도 무인기 개발에 주력하기로 선포한 상황이어서 북한판 킬러 드론 등장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우리 군의 대응에도 비상이 걸렸다. 국방부는 레이저 대공 무기 등 북 무인기 대응 전력 확보와 연구에 내년부터 5년간 5600억 원을 투입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시한 드론 부대 창설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날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속도감 있게 대응할 수 있느냐다. 원전과 공항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국가 주요 시설 방어 대책도 과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의 자포리카 원전에 대한 드론 공격 위협이 이슈가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원전의 경우 두터운 콘크리트 벽으로 된 격납 건물의 안전성은 신뢰할 만하다고 본다. 다만 기타 시설들이 드론 공격을 받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취약할 수 있는 시설로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소를 꼽았다. 정부가 고리 등 원전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건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마당에 철저한 대책이 필요하다.
2022-12-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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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도시철도 무임승차 “더는 못 참겠다”
전국의 도시철도 무임승차로 인한 재정 적자 문제가 이제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그동안 정부에 여러 번 무임승차로 인한 재정 적자 보전을 요구해 온 지자체가 요금 인상을 통한 자구책을 직접 모색하는 양상이다.
그 첫 테이프를 최근 서울시가 끊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9일 매년 1조 원 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는 서울 도시철도에 대해 정부가 손실 보전을 해 주지 않으면 내년에 요금 인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 것이다. 오 시장이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 해소를 위해 도시철도의 요금 인상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 파장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 한계에 이른 도시철도 재정 적자
오 시장이 도시철도 적자에 대해 정부에 포문을 연 것은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 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 시장은 “정부가 도와주지 않는 것으로 정리된다면 요금 인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수 있다”며 자구책 마련을 선언했다.
서울 도시철도를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의 당기 순손실은 2020년 1조 1137억 원, 지난해엔 9644억 원이었다. 이 가운데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액은 25% 안팎인 2700억 원 정도. 그 이전 3년 동안엔 무임승차 손실액 비중이 60%를 넘었으나, 코로나 여파 등으로 다소 줄었다.
비교적 재정 상태가 나은 서울시에 비해 부산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초고령화 도시인 부산의 경우 도시철도 무임승차 비율은 서울보다 2배가량 높다. 이로 인한 부산교통공사의 당기 순손실은 2020년 2634억 원, 지난해엔 1948억 원이었다. 이중 무임승차 비중은 2020년 40%인 1045억 원, 지난해에는 1090억 원으로 56%에 달했다. 역시 코로나 여파로 인한 유동인구 감소가 무임승차 손실 비중을 다소 낮춘 요인이 됐다.
그 이전인 2019년엔 92%, 2018년 79%, 2017년 84%로 사실상 무임승차 손실액이 당기 순손실액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미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부산은 무임승차 인원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앞으로도 이 비중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 코레일은 보전, 도시철도는 외면
현재 정부는 철도산업발전기본법에 근거해 코레일에 대해선 무임 수송에 따른 손실의 60%가량을 매년 보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노인복지법에 따라 65세 이상 노인에게 무임승차를 제공하고 있는 도시철도에 대해선 도시철도법에 이와 관련된 규정이 없다.
도시철도를 운영 중인 지자체들은 1984년 5월 당시 정부가 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100% 요금 면제 제도를 도입해 놓은 뒤 이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지자체에만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부는 지자체의 손실 보전 요구에 대해 도시철도는 운영 도시의 노인층 등 특정 계층만 혜택을 보기 때문에 국비 지원을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에 대한 무임승차는 정부의 결정이었지만, 이는 보편복지가 아니라 특정 이용자에만 한정되는 혜택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무임승차 손실액을 지원하면 도시철도가 없는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어 현재로선 지자체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 더는 외면 곤란, 현실적 대책 필요
정부의 입장은 여전히 강경한데, 무임승차로 인한 재정 적자는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더는 이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도시철도를 운영하는 각 지자체가 협의를 통해 현실적인 대책 모색에 나서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특히 내년부터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를 상징하는 ‘58년생 개띠’부터 만 65세로 접어들면서 무임승차 인구도 크게 늘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에 따라 무임승차 연령을 더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법률 개정 사항이어서 여야 간 합의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일단 우리 현실에 맞는 조건을 달아 탄력적인 운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계 주요국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100% 무료인 나라가 없는 만큼 전액 무료가 아닌 부분 할인 또는 소득 수준에 따른 혜택 부여나 무료 승차 시간대의 탄력적 운용 등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 당장 전액 국비 지원이 부담스럽다면 무임승차 손실액의 5% 또는 10% 정도로 조금씩 지원하면서 향후 인구 추계에 따른 기준 상향 등 여러 대안을 중장기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거나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자체장 중 처음 이 문제를 공식 제기한 이상 정부도 마냥 이를 외면하기가 어려워졌다. 무임승차 비율이 더 높은 부산을 비롯한 다른 지자체들도 잇따라 공식적인 의견을 표명할 가능성도 매우 커졌다.
도시철도 무임승차 문제는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의 이동권이라는 기본권과 연결된 데다가 보편복지와 지역 간 형평성, 여기다 달라진 사회적 인식까지 아울러야 하는 고차원의 방정식이 됐다. 정부도 더는 이 문제를 지자체에만 맡겨 둘 게 아니라 당면한 과제로 인식해 지자체와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단계가 됐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2-12-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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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전직 대통령 검찰 포토라인 비극 재연될까?
역대 대통령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초라했다. 대통령의 비극적인 운명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끊이지 않았다. 우리 대통령들의 반복되는 불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검찰의 칼끝은 점점…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등과 관련한 검찰의 수사가 문재인 전 정권의 핵심인 서훈(구속기소) 전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해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 박지원 전 국정원장으로까지 올라갔다. 현 정부가 ‘중대한 국가범죄’로 규정한 원전 경제성 조작,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 이정근발 친문 게이트 등에 대한 사정 칼날이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검찰의 사정 한파는 깊어 가는 겨울과 함께 문재인 전 대통령으로까지 매섭게 몰아칠 것인지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15일 서해 피격 사건과 관련한 국정원 보고서 삭제 지시 의혹에 대해 검찰 조사를 받은 뒤 언론 인터뷰에서 “검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는지는 묻지 않았다”며 “제가 받은 감으로는 (수사가) 문 전 대통령이 아니고 제 선에서 끝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국정원이 그를 첩보 보고서 삭제 지시 혐의로 고발한 지 5개월 만의 소환 조사였다.
하지만, 박 전 원장 검찰 조사 하루 전인 14일 북한군에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고(故) 이대준 씨 유족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직무유기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검찰로서는 언제든지 서면 혹은 대면 조사 형태로 문 전 대통령을 소환할 수단을 갖게 된 셈이다.
■하야, 시해, 검찰 수사, 구속…대통령 수난사
수많은 국민의 환호 아래 영광과 기대로 시작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은 화려한 출발과 달리 끝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 재임 기간, 혹은 퇴임 후 본인 비리에서부터 측근·친인척 비리에 휘말렸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이승만(1~3대), 윤보선(제4대), 박정희(제5~9대), 최규하(제10대), 전두환(제11~12대), 노태우(제13대), 김영삼(제14대), 김대중(제15대), 노무현(제16대), 이명박(제17대), 박근혜(제18대), 문재인(제19대)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쳤다.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은 4·19 혁명에 의해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라 결국 사후에 유해로 돌아왔다. 경제개발에 성공한 박정희는 심복에게 피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전두환, 노태우는 5·18 광주 민주항쟁을 유혈로 진압한 뒤 집권했으나, 퇴임 이후 수감됐다. 민주화 시대를 연 김영삼, 김대중도 재임 시절 아들이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정치 개혁과 높은 도덕성이 강점이었던 노무현은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서거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명박, 박근혜는 임기 직후 수감됐다.
■대통령의 비극, 반복되는 이유는
정권이 바뀌면 흔히 전 정권의 정책을 지우려는 경향은 어느 국가에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검찰 등 수사권을 동원하는 사법적인 처리가 주를 이루는 선진국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통령의 리더십과 도덕적, 정치적 자질 부족이라는 개인적인 자질론도 첫 번째 이유다.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제왕적 권력 구조 때문이라는 평가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치 구도와 정치 문화로 이를 바라봐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 세력이 정권 장악과 유지를 위해 상대방의 실패를 조장하고, 극한의 대치를 펼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주요한 원인이라는 뜻이다. 대통령 입장에서 야당 등 반대 세력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정권을 전복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면서, 검찰을 통한 정치적 반격을 시도하는 행태가 반복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정권 전복 세력’으로 인식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이명박과 노무현 관계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일어난 미국 소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 시위를 청와대 뒷산에서 보고 나서는 ‘항의나 비판을 위한 시위가 아니라, 정권 퇴진이나 전복의 기도’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결국 정권이 수세에 몰리면서 ‘화해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인식을 갖고 사정 권력으로 반격했다는 것이 정치권의 정론이다.
역대 정권이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상대방의 존재를 동반자나 경쟁자로 여기기보다는 소탕해야 하는 '적'으로 인식하는 경향과 문화가 고착되고 있다. 이는 진보와 보수 정권 모두 해당된다. 같은 당, 같은 이념 성향의 정권에서도 비슷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안타깝고 부끄러운 일
한국 헌정 역사상 거의 매번 역대 대통령과 그 가족에게 다가가는 비극적 장면을 보는 대다수 국민의 마음은 좋을 수가 없다. 반대편 지지자들에게는 행여나 복수감에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국가와 국민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이라 해도 범죄 혐의가 있거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수사를 받아야 하고 법적으로 책임질 일이 있으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비극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통치를 받은 한국인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법 앞에서는 전직 대통령도 평등해야 한다. 2018년 이명박 구속 수사를 앞둔 상황에서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불구속 수사를 한다면 대한민국 정의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12월 7일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의미의 통치행위라는 건 민주국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결국 대통령의 성역과 치외법권은 없어졌다는 시대적 상황을 여야 정치권과 법조계 스스로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이 생기게 될 그날…”
역대 대통령의 수난과 관련해 통합과 포용의 정치 문화가 가장 아쉽다는 것이 중론이다. 자신은 무조건 옳고 상대는 항상 틀렸다는 편향적 태도로는 협상과 통합의 정치가 불가능하다. 대화와 절충, 존중과 배려의 정치 문화가 꼭 필요하다. 적개심과 분노, 보복에 휩쓸린 역대 대통령의 비극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사회 성숙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혹은 정치 구조와 문화의 탓이라고 하더라도, 매번 일어나는 비극을 방치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잘못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노력, 논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역사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대통령의 비극, 한국 정치의 불행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치학자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고 밝혔다. 과거 정권의 적폐 청산에 이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수사 등의 잘잘못을 떠나,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민과 정치권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어두웠던 과거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포용과 통합의 지혜를 짜내야 한다.
정치권 한 원로는 “바라건대, 우리에게도 다시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이 생기게 될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 70년을 넘었지만, 행복한 대통령, 존경 받는 대통령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2022-12-17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