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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역사문제와 역사의 재현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발전 전망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당시 오부치 일본 총리가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고 표현하면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이 제시되었다. 반성과 성찰을 전제로 미래지향적인 로드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양국 간의 ‘역사문제’인 위안부, 강제징용, 역사 교과서, 독도 영유권 등이 쟁점화될 때마다 일본 정부의 언행과 태도는 오부치의 표현에 현저히 미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한국 국민은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하고 있는가에 늘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역사문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인식 차이는 미래를 저당잡고, 양국의 관계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
양국의 정치체제 차이도 이 문제를 되풀이하는 데 기여했다. 자민당 일당 독점체제로 일본 우익은 변함없는 역사인식을 계승하여 왔다. 한반도 식민 지배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결핍되었고, 진정한 사죄 발언은 인색했다. 반면 수평적 정치권력 교체가 발생하는 한국은 서로 다른 성격의 정부가 역사문제에 서로 다른 접근을 보였다. 특히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지난 정부가 무효화하는 결정을 함에 따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지, 반도체 등에 대한 수출규제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현재, 강제징용을 둘러싼 일본의 사죄와 배상문제는 2018년 우리 대법원 판결에서 시작되었다. 14명의 원고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권과 위자료청구권의 판결금과 그 이자를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에게 지급할 것을 골자로 한다. 이 판결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다. 아울러 피해자 개인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 당시 국가 간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간주한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의 법적인 성격에 대하여 양국 간에 합의된 바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현 정부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자 2023년 3월 6일 강제징용문제 대법원 판결 관련 해법을 발표하였다. 이는 민법 제469조에 근거한 ‘제3자 변제’를 통한 해법이다. 일본 정부나 일본 피고기업의 사죄나 보상 없이 한국기업의 재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는 2015년 자신이 공들여 추진한 위안부 합의 이행을 재차 요구하였다. 아울러 한일군사보호협정과 한일안보정책협의회를 재개하기로 했으며, 한일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일본과의 깊숙한 안보협력은 한·일 관계가 역사문제를 넘어서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향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안보협력 체제이다.
이는 강대국들이 일본을 동북아시아에서 핵심 파트너로 삼았던 ‘역사의 재현(再現)’이다. 일본과의 해양세력 동맹을 기반으로 대륙세력(러시아나 중국)을 견제했던 영국과 미국의 대전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일동맹(1902, 1905)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1905)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냉전시기 반소전략으로서 현재의 미일상호방위조약의 기초를 놓았다.
21세기 미국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세력균형 변화로 인해서 지역 내에서 반중 연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2007년 미국, 일본, 인도, 호주가 참여하는 안보대화 협의체 쿼드(Quad)가 출범했고, 2021년 호주, 영국, 미국이 참여하는 군사협의체 오커스(AUKUS)도 결성되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지리적으로 먼 역내 국가들과 상호 안보의무를 갖는 다자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한국 역시 참여를 요구받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오래전부터 ‘역사문제’가 가로막고 있는 한·일 관계 개선을 요구해 왔다.
향후 한·일 양국 간 산적한 문제들이 순차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이루어졌던 니가타현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문제,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문제, 후쿠시마 등 일본 8개 현의 한국 내 수산물 수입금지 조처 등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현 정부는 한·일 관계 악화를 2018년 대법원 판결 탓으로 돌리며,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면죄부를 부여했다. 만일 향후 한·일 관계 현안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이익이 지속적으로 훼손되게 된다면, ‘굴욕외교’ 또는 ‘계묘국치’라고 비판하는 야당의 목소리는 국민들로부터 점차 공감을 얻게 될 것이다.
2023-03-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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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창업도시 부산, 혁신과 속도에 달렸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와 우크라이나전쟁, 경기침체까지 얽혀 있는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이 터널 끝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돌아보면 우리는 이미 비슷한 터널들을 지나온 경험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 2002년 사스 위기, 2007년 금융위기 등 세 차례의 큰 위기 때마다 벤처기업 육성과 인터넷 보급, 전자상거래 활성화, 스타트업 육성 등 과감한 혁신을 통해 오늘날의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위기가 깊을수록 우리 부산의 미래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일단 스타트업 분야의 해외 사례들에서 시작해 보자.
먼저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이다. 현재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출범하자마자 ‘새로운 자본주의’라는 기치 아래 스타트업 육성과 디지털화를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다. 이어 스타트업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4개 대도시에 실리콘 밸리 같은 스타트업 특구 조성 계획과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모두 ‘일본식 성장전략의 대전환’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은 특히 속도 면에서 이게 과연 일본의 정책이 맞느냐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5년 이내에 스타트업 10만 개와 유니콘 기업 100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6월 말 기준 일본의 유니콘 기업 수는 11개로 우리나라(23개)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스타트업 투자액도 8000억 엔 정도인데, 불과 5년 만에 이보다 10배 이상 되는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10조 엔을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제조 대기업의 오픈 이노베이션 등을 활성화시키겠다는 등 구체적인 방법론도 제시하고 있다.
도쿄 역시 일본 정부의 방침에 발맞춰 고이케 유리코 지사가 직접 스타트업 육성 정책에 앞장서고 있다. 야후 재팬 사장 출신인 미야사카 마나부를 부지사로 영입한 데 이어 올해 2월 말에는 부산의 FLY ASIA와 같은 ‘시티 테크 도쿄 2023’이라는 스타트업 행사도 크게 열었다.
한편 민간 분야의 글로벌 혁신 사례로는 단연코 마이크로소프트와 챗GPT를 손꼽을 수 있다. 챗GPT는 그 자체만으로도 누구나 인정하는 디지털혁명이자 거대한 게임체인저이다. 하지만 동시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바로 CEO인 인도 출신의 사티아 나델라이다. 윈도 운영체제의 안정적인 수입에 안주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인공지능 분야에서 구글이나 아마존보다 먼저 챗GPT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근 몇 년간 지속적인 내부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혁신을 존중할 뿐입니다”라는 말로 그는 임기를 시작했고,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에 혁신 정신을 다시 살려냈다.
끝으로 요즘 스타트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글로벌 행사에도 스타트업 관련 프로그램과의 융합이 일어나고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칸영화제의 마켓 행사는 몇 해 전부터 영화 관련 분야 스타트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는 해마다 다양한 예술 장르와 스타트업 행사가 함께 열리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라는 초대형 행사가 열리고 있다. 영화와 예술 두 분야는 서로 전혀 다를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창의와 혁신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정신적 바탕이 있다.
위의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복합 위기의 긴 터널 속에서도 끊임없는 혁신의 파동을 일으키며 전진해 가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부산에서도 창업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혁신의 몸부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부산 창업생태계의 다양한 주역들이 좀 더 절박하고 좀 더 속도를 내어 창업도시 부산을 향해 전진해 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혁신과 속도에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절박한 마음으로 또 다른 부산을 꿈꿔 보자.
2023-03-0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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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
집에 귀한 손님을 들인다는 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대청소도 해야 하고 세간도 정리해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일은 꼭 손님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종 벌이는 일이다. 깨끗하게 정돈하는 일쯤은 몸만 잠깐 쓰면 된다. 해 놓고 나면 성취감에 기분도 좋아진다.
손님맞이가 힘든 이유는 정신적 피로 때문이다. 손님의 시선에서 집을 닦고 꾸며야 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의 속을 알 수 없으니 개운하게 손을 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손님이 오는 시간이 다가오면 공연히 두리번거리게 되고, 초인종 소리에 흠칫하게 되고, 문을 열어 주는 순간에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된다.
4월 엑스포 실사단 부산 방문
무엇을 보여 줄 것인지 고민
부산은 개방성·친화력의 도시
진심과 정성 다한 어울림 강점
부산엑스포는 그런 대동의 마당
이런 정신적 피로를 더는 방법은 돈을 들이는 것이다. 값비싼 가재도구나 장식을 사들이고 평소 먹지 않던 귀한 음식을 내놓으면 손님의 시선을 뺏을 수 있게 된다. 손님은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에 집중하게 될 테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뚫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덜 수 있다.
물론 결산은 나의 몫이다. 값비싼 음식이라고 해서 배 속에 더 오래 머무는 것도 아닌지라, 손님이 떠난 후 남은 음식을 벅벅 긁어 먹으면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손님 덕에 좋은 세간은 장만하지 않았냐고? 그러나 나의 필요로 선택된 세간이 아니었기에 그런 것들은 얼마 못 가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뒷전으로 밀려날 운명이 된다. 이쯤 되면 원초적인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애초에 손님을 부르지 말았어야 했나? 이렇듯 손님을 불러들여 나를 보여 주는 일은 힘겨울뿐더러 심지어 공허하기까지 하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제 곧 4월이면 2030 세계엑스포 실사단이 부산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바깥으로 찾아가서 부산을 알렸지만 이제 손님이 찾아온다. 그냥 마실 삼아 빙 둘러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밖에서 뱉었던 말들을 꼼꼼히 확인하러 온다. 기회는 한 번뿐인지라 다시 불러 모을 수도 없다. 몸의 모든 근육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뭘 보여 줘야 하나?
우리는 ‘보여 주기식 행사’라는 말을 종종 쓴다. 일을 꾸림에 있어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만족을 중심에 놓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겪은 손님맞이 체험에서 느낄 수 있듯이 ‘보여 주기식’은 나의 정신건강을 지키려는 생리적 차원의 반응이기 때문에 그 유혹은 쉽사리 떨쳐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국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문제의 사달은 나와 너를 나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나와 너는 다르고, 너에게 힘이 있으니 나는 너에게 맞춰지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뭘 내놔야 상대가 만족할지 불확실하다. 이때는 세계인 모두에게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는 돈을 살짝 보여 주면 된다. 이 돈을 부산에 발라 놓고 꾸미면 된다. 하지만 이게 먹히기 힘든 노릇인 게, 우리의 경쟁자인 사우디는 돈이 많아도 너무 많다.
보여 주기가 안 되면 어울릴 수밖에 없다. 우리에겐 ‘환대’의 미학이 있다.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려는 풍습은 세계 공통이지만 우리 환대의 핵심은 진심과 정성에 있다. 그리고 진심과 정성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어울림을 향한다. 이 어울림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크게 어우러지면 대동(大同)이 된다. 대접은 손님이 문지방을 넘어서야 하지만 대동은 마당에서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부산의 강점이 돋보이는 순간은 부산이 마당의 역할을 할 때였다. 한국전쟁 때는 전국의 피란민이 모였고 산업화 시기엔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모였다. 부산은 문지방 안에 갇힌 내향성 도시가 아니라 바깥으로 열린 공간이다. 그래서 부산은 세계를 품을 준비가 이미 된 너른 마당이다. 그 공간에 생명과 활기를 부여하는 것은 개방성, 친화력, 그리고 공감과 배려다. 그것이 부산의 마음이고 부산의 문화적 강점이다. 엑스포 유치 노력은 바로 그 부산의 마음을 살리고 키우는 게 중심이다. 그 중심을 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시민으로 한발 더 성장할 수 있다. 그래야 설사 유치에 실패하더라도 크게 얻는 게 있다.
2023-02-2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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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코로나가 교육에 남긴 과제
2023년 1월 30일, 3년 만에 마스크를 벗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된 날. 마스크를 벗고 신나게 뛰어가는 중학교 남학생의 모습이 출근길을 미소 짓게 했다. 마스크를 쓴 채 걷고 있는 여학생에게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데 왜 쓰고 있어요?” 물었더니 “아직 춥기도 하고 습관이 되어서 쉽게 안 벗어져요. 그래도 이제 벗어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좋긴 해요. 일종의 해방감 같은 거죠” 하며 웃는다.
그렇지, 마스크가 필요해서 쓰는 것과 강제로 써야만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우리는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자유로운 여행, 마스크 벗은 얼굴,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 등이 그것이다. 한편 잃으니 보이는 것도 있었다. 쉽게 끝나지 않는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거리 두기와 손 씻기가 모두의 습관이 되었고, 홈트레이닝으로 건강을 살피는 문화가 확산되었다. 온라인 소비, 플랫폼 기업 등 새로운 분야가 발전하고, 재택근무로 일하는 방식의 변화를 체감했다. 랜선 여행, 온라인 마라톤, 메타 회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것도 우리가 얻은 것이다. 최근 미국 핵과학자회는 지구 종말 시계가 90초 전으로 당겨졌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는데, 코로나를 지나면서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기후 위기와 생태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전 세계가 인지하고 실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가오는 봄만큼 성큼 다가온 ‘마스크 없는 일상’ 앞에서, 코로나가 교육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우선 미래교육을 10년은 앞당기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교육 방법을 획기적으로 바꾸려면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인데, 블렌디드러닝(혼합형 학습으로 두 가지 이상의 학습 방법을 결합하여 이루어진 형태) 같은 새로운 수업 방법도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서로 배우고 성장하면서 미래교육은 자연스럽게 교실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코로나19는 우리 교육에 많은 과제를 남기기도 했다. 온라인 교육이 증가하면서 교육과정의 균형이 흐트러졌고, 교육격차는 심화되었다. ‘평균실종’(종 모양의 정규분포가 붕괴되면서 평균, 기준, 통상적인 것의 의미가 사라진 상황)이라는 ‘트렌드 코리아 2023’의 키워드는 교육의 현재를 진단하는 데에도 손색이 없는 단어다. 사교육이 늘었고, 대면 수업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학생도 많아졌다. 교육 현장의 교사들을 만나 보면 수업 시간에 넷플릭스, 유튜브를 시청하는 학생이 늘고, 제지해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등 학교생활 규칙을 지키기 어려운 학생도 늘었다고 한다. 교사들은 기본생활습관 지도가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굿네이버스 조사에 의하면, 대인 기피, 외출에 대한 두려움, 불안, 우울, 부정적 신체반응이 전 연령대에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캐나다 요크대학 연구진은 마스크 부작용으로 감정 파악에 적신호가 켜졌으며, 신생아는 부모의 마스크 착용으로 조기 애착 형성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밝혔다.
코로나 이전에는 매일같이 이어졌던 대면 수업은 생각보다 많은 역할을 했다. 학습은 물론이고 사회성, 정서 발달과 관계, 조화로운 인성 형성 등 모든 것이 교육이 된다. 학교는 배움과 상상력, 성장과 행복의 터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늘어나면서 많은 것을 놓쳤다. 특히 사각지대 아이들의 소외와 결핍은 그 정도가 더하다.
그동안 놓친 것을 채워 나갈 2023년, 부산시교육청의 인성에 기반한 학력 신장, 교육격차 해소 등의 정책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실행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올바른 일을 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없는 법. 지금은 너나없이 연대와 협력으로 소중한 우리 아이들의 교육 회복을 위해 지혜를 모으고 힘을 다해야 할 때이다.
이른 봄꽃들은 망울을 맺고 겨울 칼바람을 이긴 나뭇가지들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봄이 말하네. 그대 앞길 따뜻이 데워 놓았다고.” 몇 년 전 광화문 거리를 지날 때 걸음을 멈추게 한 문구를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낸다.
다행히 우리 앞에 봄이 있다.
2023-02-0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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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세계 시장을 향한 지역출판과 도서전
코로나19로 한동안 열리지 못했던 국제도서전이 지난해에는 곳곳에서 문을 활짝 열었다. 국제도서전은 책을 사랑하는 독자와 작가, 출판사들이 모여 책에 관한 이슈를 토론하고, 저작권을 거래하는 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알려진 도서전은 10월에 열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이다. 6월에 서울국제도서전이 코엑스에서 열리고, 어린이 도서로 특화된 이탈리아 볼로냐아동도서전에도 한국 출판사들이 많이 참여한다.
지난해 필자는 네 군데의 국제도서전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에는 해마다 부스를 차려 출판사의 책들을 소개하고 있고, 스웨덴 예테보리, 독일 프랑크푸르트,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도서전에 가 볼 수 있었다. 그중 마지막으로 참석한 과달라하라도서전은 대한민국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체감한 도서전으로 인상이 깊었다.
국제도서전 세계 곳곳에서 재개
K콘텐츠 바람 타고 한국 부스 인기
한국관에 방문객 끊이지 않아 눈길
지역출판도 세계 시장에 눈 돌려야
해외 출판인 교류 ·독자 소통 필요
과달라하라도서전은 스페인어권에서는 최대 규모의 도서전이다. 11월 26일부터 12월 4일까지 80만 명의 독자들이 참여하고, 49개국 2173개 출판사가 참가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제2의 도시이자 대학도시인데, 수도가 아닌 도시에서도 대규모 국제도서전이 가능하며, 청소년을 비롯해 지역민들이 적극 참여하여 축제처럼 책을 즐기는 모습이 새로웠다.
한국관을 운영한 대한출판문화협회는 부스 명칭을 ‘이야기 공장’이라고 붙였다. 전 세계에서 각광 받고 있는 K콘텐츠(한류)의 원천, 즉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한국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산지니, 다락원, 사회평론 등의 출판사 부스와 위탁 도서가 진열된 한국관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청소년들의 관심이 높았는데, 한 여고생이 한국관 부스에 앉아 2시간 동안 전시된 한국어 교재를 펼쳐 놓고 공부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10월에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참가하였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어서 그런지 이전에 비해 빈 부스가 여기저기 보일 정도로 열기가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한국에 대한 관심은 높아, 나이 지긋하신 한 이탈리아 편집자가 한국 문학을 소개하고 싶다고 부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예테보리도서전은 스웨덴의 제2 도시에서 열리는데, 북유럽 사람들의 높은 독서율을 반영하듯 일반 독자들의 참여 열기가 높았으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한국관을 만들어 한국 그림책을 소개하고 그림책 작가들이 직접 해외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도서전은 갈수록 독서율이 추락하는 현실에서 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면서 도서 판매를 통해 출판사와 서점의 수익을 올리고, 저작권 거래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미래 출판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를 열어 새로운 출판의 형태를 고민하게 만든다.
종잇값 폭등과 물류비 인상 등 인플레이션으로 나날이 위축되어 가는 출판 환경 속에서 지역의 출판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출판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국제도서전을 다니면서 든 생각은 책을 작은 시장에만 팔려고 하지 말고 국내외 다양한 시장에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K콘텐츠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연초에 베트남에 5종의 저작권을 수출하였다. 2018년 장편소설 〈쓰엉〉이 베트남여성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이후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 얻은 결과이다. 그 외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 등의 출판사들과도 꾸준히 교류하면서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생각하는 사람들〉 등을 해외에 수출할 수 있었다.
오는 9월, 부산 수영구와 한국지역출판연대가 함께하는 제7회 한국지역도서전이 부산에서 열린다. 전국의 지역출판인들이 부산에 모여 축제를 열고 시민들과 함께하는 책 행사가 마련될 예정이다.
현재는 중심과 주변이 해체되고, 새로운 탈구축이 실험되고 있는 탈세계화의 시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는 어수선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와 아시아평화를 위해 아시아의 지역 출판인을 초대하여 부산이라는 도시의 매력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문화적 동질감과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 이웃 나라 출판인과 교류하면서 책을 읽고 독자와 소통해 보는 건 어떨까.
2023-01-2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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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토끼의 지혜가 절실하다
계묘년을 맞아 토끼라는 작은 동물을 두고 다양한 문화에서 신화적, 예술적, 민속적 의미의 해석이 분분하다. 서양에서는 대체로 토끼 이미지가 형편없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토끼는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교만함이 넘쳐 쉬엄쉬엄 가다가 지고 마는 영악한 사기꾼으로 묘사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는 뚱뚱한 욕심쟁이로 양복을 입고 회중시계를 늘어뜨린 거만한 인물로 앨리스를 곤경에 빠뜨린다. 심지어 번식능력이 어떤 동물보다 강한 탓에 관능과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 성인잡지의 로고로도 쓰였다.
동양권에서 토끼는 헌신과 희생 공덕의 표상으로 불교 신화와 인연이 깊다. 어느 날 제석천이 걸식하는 스님의 모습을 하고 공양을 받기 위해 여러 동물을 찾아갔다. 토끼는 공양할 것이 풀밖에 없자,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제석천은 토끼의 갸륵한 보시행을 기려 달의 수호자로 삼고 중생들의 표상이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 영향으로 동양에서는 보름달과 함께 토끼를 다산, 풍요, 번영의 길상으로 여겼다.
계묘년 맞아 토끼 뜻 해석 분분
설화에서 토끼는 서민의 분신
코로나·기후변화·핵·인구 감소
새해에도 약육강식의 위협 산재
재치·유연함으로 위기 극복해야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문화에서 토끼는 착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온 동물이었다. 어릴 때 제일 먼저 하는 노래가 동요 ‘산토끼’였고, 여기에 맞춰 깡충깡충 율동을 배웠다. 과거에 배고픔이 일상이었던 서민 생활에서 토끼는 달에서 떡방아를 찧고 있는 옥토끼의 모습으로 ‘초가삼간 집을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의 노래 가사같이 배고픔 없이 평화로운 이상향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우리나라 전역에 ‘토끼실, 토끼재, 토끼비리, 토산, 토끼봉, 토끼섬’ 등과 같은 토끼와 관련한 지명이 유독 많이 있다.
토끼는 작고 연약한 동물로 사방이 천적으로 둘러싸인 야생에서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다. 그들에게 대항할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쫑긋 세운 예민한 귀와 동그랗게 큰 눈, 재빠르게 토낄 수 있는 뒷다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비록 힘은 약하지만 영특하고 꾀가 많았다. 수렁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 주다 잡아먹히게 된 나그네를 구해 주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고, 나보다 맛있는 것을 소개하겠다고 속여 호랑이를 골탕 먹이기도 한다. 특히 이솝우화에서는 토끼가 거북이에게 당하지만, 우리 토끼는 ‘수궁가’에서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꾀를 부려 거북이를 따돌린다. ‘범 내려온다’라는 대목도 별주부가 “토 생원”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발음이 새어 “호 생원”이라 부른 데서 생긴 소동이다.
설화에서 호랑이, 용왕, 거북이는 모두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왕과 양반의 상징이고, 거북이는 권력에 아부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벼슬아치의 모습이고, 호랑이의 담뱃대를 들고 있는 척하는 익살스러운 토끼는 서민들의 분신이었다. 설화는 오랜 세월을 통해 전승한 민족적 사상과 가치관을 함축시켜 놓은 것이기에, 단순히 동물의 모습으로 세태를 풍자한 우화로 치부하기에는 섬뜩한 깨우침이 담겨 있다. 계묘년 한 해도 역시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여전히 토끼를 노리는 거북이와 호랑이들이 사방에 득실거린다.
‘아직도 창궐 중인 끝나지 않은 코로나’ 호랑이도 있고, ‘폭염, 홍수, 가뭄, 산불로 대표되는 기후변화’라는 호랑이도 있다. 그리고 ‘2년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라는 호랑이와 ‘더욱 치열해진 미국과 중국의 패권 군비 경쟁’이라는 호랑이도 있다. 또 ‘그 틈을 타고 첨예한 대치로 핵 위기를 확산하는 한반도 정세’라는 거북이도 있고, ‘간사한 꾀로 이웃 나라 영토를 노리는 열도’ 거북이도 있다.
그리고 국내의 ‘꼬인 실타래 같은 정치 상황’과 ‘경제적 동력 상실’, ‘사회적 대립과 갈등’, ‘인구 감소’ 등도 우리를 언제 삼킬지 모르는 강력한 호랑이와 거북이다. 설화에서 토끼는 거듭 닥쳐오는 부당한 위협과 요구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재빠른 재치와 대처 능력을 발휘하여, 호랑이와 거북이를 농락하고 그 고비를 극복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토끼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다.
2023-01-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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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염치없는 세상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 마포구에서 20년 이상 맥줏집을 운영하던 50대 자영업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영난을 더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살던 원룸을 정리해서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주었다. 그것이 사장으로서의 도리라 생각했다. 가게 유리창에는 도시가스 공급을 중단한다는 통지문이 붙어 있었다.
이 뉴스를 보며 나는 ‘염치’를 떠올렸다. 염치란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쳤을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과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과 고마움 때문에 그냥 떠날 수가 없었을 게다. 가게 문 아래에는 누군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 다발이 그의 넋을 달래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아는 게 염치다. 염치의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을 합한 글자다. 자신의 마음 소리를 자신의 귀가 먼저 듣고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로 짐작된다.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저 ‘패널’에게 과연 염치라는 게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특수 임무를 띠고 투입된 용병처럼 현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기 위해 온갖 궤변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문제를 두고도 정치적 보복이라 우긴다. 저절로 분노 게이지가 올라간다.
여권의 분위기는 또 어떠한가. 당권 경쟁에 눈먼 자들이 수시로 불협화음을 내는가 하면, 범퍼카를 탄 아이들처럼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민들로 하여금 누구의 범퍼카가 뒤집혔는지 구경이나 하라는 건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 주무 장관이란 자가 했던 말도 잊을 수 없다. “소방, 경찰 인력을 배치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어야 옳지 않나. 이들의 ‘염치 소재지’도 궁금하다.
상당히 많은 20대가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저지르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응답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취업이 안 되고 앞날이 불투명하다 보니 한탕주의에 빠져든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도덕과 윤리의식마저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닌지. 젊은이들이 돈 10억에 무너져 내린다면, 그동안 기르고 가르치고 밥상머리 교육을 시켜 온 부모의 공은 어디에서 찾나. 아무리 현실이 막막하다 하더라도 ‘염치불고(廉恥不顧)형’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 염치가 없으면 이내 상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처신에 있어 못 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게 없다. 염치는 인간의 근본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염치가 있어야 잘못을 하더라도 회생의 기회, 변화의 기회, 거듭남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요즘 매스컴에서 들려오는 낱말들은 거의 어둡다. 파행, 결렬, 파업, 탄핵, 참사, 깡통전세, 탄도미사일, 대선자금 저수지 등. 우리가 서로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하지만, 실은 그 누구도 안녕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사회, 경제, 정치, 외교, 민생, 어느 분야든 다 어렵다. 어쩌면 이 나라가 ‘다발성 장기 손상 환자’가 된 게 아닐까 싶다. 대다수의 국민이 현 정부에 바라는 것은 ‘많이 아픈 대한민국’을 어떻게든 치료하라는 게 아닐까.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우선 노동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에 집중하겠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줄탁동기’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가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야 한다는 의미다. 나라의 앞날을 정부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우리 국민도 힘을 보태야 한다. 무엇보다 염치를 되찾았으면 한다. 체면을 생각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사회를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리라 믿는다.
유난히 길게 느껴진 한 해였다. 그만큼 힘들었고, 애태웠고, 종종걸음을 했다는 얘기다. 서로의 부은 발등을 어루만져 주며 올 한 해 잘 버텼다고 위로할 때다.
지금 겨울 한파가 몰아치고 있지만 갯버들은 이미 움 틔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게다. 우리의 봄도 그렇게 오지 않을까.
2022-12-2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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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늑대가 몰려온다
늑대가 몰려오고 있다. 전 세계 4억 마리가 떼를 지어, 거침없이, 빠르게 달려온다. 기존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기들만의 새로운 생태계를 급속히 만들고 있다. 바로 스타트업 얘기다. 방 하나 소유하지 않은 에어비앤비는 창업 10여 년 만에 수십 년간 브랜드를 쌓아 온 힐튼호텔의 자산가치를 훌쩍 넘어섰다. 식당 하나 없는 배달의 민족은 수십 년간 명성을 지켜 온 식당업계의 비즈니스 구조와 문법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디즈니로 상징되는 100년 전통의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생산, 유통구조를 넷플릭스는 4년 만에 송두리째 뒤집어 놓고 있다. 늑대의 속성을 똑 닮았다. 그것도 변종의 늑대(김영록, 〈변종의 늑대〉)들이다.
이들은 주로 플랫폼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전통적 업종 구분을 무참히 파괴한다. 이들에게 제조, 서비스, 금융업종 구분은 의미가 없다. 기업 성장 속도는 기존 기업의 3~5배 정도 더 빠르다. 전통기업이 기업가치 1조 원대에 도달하는 기간은 평균 21년이 걸렸다. 이에 비해 플랫폼 스타트업은 평균 6.5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업 인수가 이루어진다. 합병이 번개처럼 일어난다. 스타트업 투자집단과 성장 촉진 집단이 별도의 업종군으로 만들어져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플랫폼과 디지털이 결합한 신산업의 대전환은 우리 사회의 수도권 집중을 더 가속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스타트업 기업들이 활성화된 2015년은 우리 사회에서 수도권 집중의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해로 기록될 것이다, 꾸준히 증가하던 수도권 집중도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기존 제조업보다 훨씬 기술집약, 인재집중, 도심밀집형이다 보니 수도권 선호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이들 늑대의 질주는 신발, 목재, 건설, 조선, 전자 등 우리나라 경제성장 연대기를 대표하는 산업정책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기존 제조업의 입지 선호는 산업용수(用水), 노동력, 물류가 좌우했다. 그러나 스타트업의 입지 선호는 자유로운 도시문화, 특화된 인재풀, 네트워크 잠재력, 투자자들과의 교류 기회가 결정한다. 기업지원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장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자금, 기술보다 인재를 원한다. 문화를 원한다.
이들 스타트업과 기업들이 선호하는 입지 요인에 부산은 어떨까? 우리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가, 전국의 스타트업들이 부산의 자유로운 도시공간과 문화를 매우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업이 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특화된 인재풀과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산학(地·産·學) 정책이다. 기업의 시장주도 욕구를 적극 지원하고, 대학의 기술개발력을 기업현장과 직접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청년의 잠재력을 지역기업을 통해 실현하는 선순환구조에 지자체가 적극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지역내재적 공급가치사슬망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전환기를 맞고 있는 부산의 전략적 선택이다. 그동안의 그렇고 그런 산학협력 정책의 아류가 아니다. 부산만의 문화, 인재, 네트워크, 투자를 위한 기업지원책이자 교육정책이며 산업전략이다.
벌써 몇몇 기업과 대학, 산업 영역에서 꿈틀거림이 있다. 세계적 에너지 전환 기술을 주도하는 환경기업의 부상, 서비스와 제조영역을 융합한 세계적 커피팩토리의 등장이 심상찮다. 지역의 13개 대학이 협력하는 파워반도체 공유대학, 지산학 브랜치들 간 융합적 비즈니스 네트워크 등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유의미한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투자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다. 스타트업 투자는 지속성과 네트워크가 중요한데 이를 매개하는 메신저가 필요하다. 새로 만들어질 부산창업청은 초기 투자뿐만 아니라 후속 투자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스케일업 투자의 공공플랫폼이 될 것이다. 결국 스타트업을 위한 창업정책과 지산학 정책은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전국과 아시아 늑대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부산 전역에서 들리는 날이 올 것이다. 산업계의 늑대가 몰려온다.
2022-12-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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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위기의 순간 빛나는 인문학의 힘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행복하냐고 내게 물었다. 행복이라니, 흔하게 소비되지만 일상에서 생각지 못한 단어에 잠시 당황했다. 며칠 전 아끼는 후배도 ‘선배님은 요새 행복하십니까’라는 톡을 보내왔다.
그냥, ‘나쁘지 않아’라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는 ‘왜, 요즘 행복하지 않나? 그렇다고 불행한 건 아니제?’라고 덧붙였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냐고 묻지 않는다.
잇단 대형 참사, 자살률 1위 오명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인문학적 사유 없이는 행복 요원
줄 세우기식 교육시스템 재고
정답 아닌 스스로만의 해답 찾아야
자고 나면 새로운 사건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한다. 대통령이 2032년에는 달에 착륙해 자원 채굴을 하고 2045년에는 우리 힘으로 화성에 착륙하겠다는 ‘미래 우주 경제 로드맵’을 발표하는 시대에 생활고로 인한 극단적 선택은 갈수록 늘어난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은 8년이 지나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4차 산업혁명이 가파르게 진행되니 인간의 삶은 더 나아져야 하는데 부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져 간다. 나만 나쁘지 않다고 괜찮은 건 아니다.
대한민국은 2016, 2017년을 제외하고 2003년부터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2011년 국내 자살은 정점을 찍은 후 조금씩 감소되고 있다지만 10대와 20대의 자살률은 급증하고 있다. 2020년 대비 2021년의 자살률이 10대는 10.1%, 20대는 8.5%가 증가했는데 2017년과 비교하면 50%가량 늘었다고 한다. 10대와 20대에 인생을 버리는 것은 개인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근대교육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등 관료 양성에 목적을 둔 줄 세우기식 교육은 ‘왜’라는 근본적 질문 없이 정답만을 요구한다.
청년 세대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른들이 답을 정해 놓은 세계는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에는 척박하고 암울하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삶의 근본적 질문 자체를 할 수 없는 시스템은 인문학의 필요성을 묻지 않는 사회로, 고등교육에서조차 인문학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인문학적 사유 없이 이루어지는 학문의 발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 명과 암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는 여실히 보여 주었다. 화학자였던 그는 인류의 식량을 많이 보급하게 하는 인공 질소 비료를 개발해 인류의 염원이었던 식량 생산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이후 질소를 이용해 역사상 가장 사악한 무기인 독가스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독가스는 홀로코스트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이 인간이라는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 지구 곳곳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보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현대는 인간조차도 소비하는 사회가 되었다.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인 노동의 개념도 재정립해야 한다. 영국의 최고 지성으로 불리는 찰스 핸디는 AI가 인간의 많은 일자리를 대체하는 미래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AI를 보조하는 개인보좌관(Individual Assistant; IA)이 될 거라고 한다. 이런 세상이 온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아직도 우리는 기존의 ‘산업 역군’을 길러 내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학습된 AI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마저도 친절하게 해 주는 세상에서 정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스스로만의 해답을 찾도록 하는 사유의 힘을 길러 주는 것이 교육의 지향점일 것이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상가는 수천 년 동안 같은 질문을 하고 다른 답변을 했다. 인생은 선택의 문제인데 다양한 선택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선택의 틀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느린 것 같지만 위기의 순간 가장 빛을 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 가진 힘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정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질문을 하지 않는 것, 해답이 없다는 이유로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질문을 생각하는 데에 있어 틀린 답안이다.
2022-11-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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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북방 유라시아 시민전문가 양성하자
바야흐로 ‘북방 유라시아 시대’가 다시 열렸다. 대공산권 적대 정책을 바꾸겠다며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 북한개방까지를 염두에 두고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 경제정책에 이어 네 번째로 다가온 북방 시대다.
그러나 ‘북방 유라시아 시대’가 다시 다가온 것은 이전과 다르게 우리 내부적 요청이라기보다는 전쟁 등 외부적 요인 탓이 크다. 무엇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적으로 안보, 에너지, 식량 위기가 초래되어 그 영향이 크고, 날로 심각해지는 북방권의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도 북방 유라시아에 세계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부산시 등 지자체 차원에서도 북방 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을 점차 높이고 있다. 2030 부산 세계박람회를 북방 유라시아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잘 치러야 하고, 부산기업의 새로운 활로를 유럽연합(EU), 동유럽, 중앙아시아 등에서 다양하게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 탓에 부산시도 지난 9월 말 카자흐스탄 알마티시와 현지에서 ‘우호 도시 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사실 부산은 항구도시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세계 23개국의 26개 항구도시하고만 자매결연을 해 왔고, 내륙 국가의 내륙도시하고는 이번 알마티 협정이 처음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경제진흥원에서도 중앙아시아 경제사절단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보낸다고 한다. 지난 6월에는 부산국제교류재단 주최의 ‘2022 유라시아 도시포럼’이 부산에서 열렸다.
북방 유라시아가 이렇게 뜨는 까닭은 부산의 핵심 산업인 관광산업 육성과도 관련이 깊다. 부산시는 앞으로 2024년까지 1500억 원을 투입하여 부산만의 관광상품과 콘텐츠 개발, 부산형 모빌리티 구축 등에 나선다고 한다. 그런데 외교부 산하의 아세안문화원이 맡고 있는 아세안 10개국과의 협력만으로는 국제 관광도시 부산의 꿈을 이루기 어렵다. (사)유라시아 교육원 같은 민간 차원의 북방 플랫폼을 잘 활용하여 남방과 북방 모두에 걸쳐 친부산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부산이 살아갈 새로운 국제적 활로가 열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시민과 청년 대상의 가칭 ‘북방 유라시아 시민대학’을 시 차원에서 새롭게 별도로 운영하자고 제안한다. ‘부산인재 평생교육 진흥원’ 같은 곳에 맡겨 버릴 게 아니라, 시가 책임지고 해외 지역학 전문교육기관을 공모하고 심사를 공정하고 철저하게 하여 시니어 은퇴자, 청년 재교육 희망자, 주부 가운데 유라시아 근무 경험자와 교육 희망자를 뽑자. 그래서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언어와 지역학을 연간 100시간이라도 집중적으로 가르치자. 단발성의 특강만으론 해외지역 전문성을 갖출 수 없으며, 연계형의 주요 교과목 5개를 각각 20시간씩이라도 교육하여 새롭게 뜨고 있는 유라시아 시대에 선제적으로 대처하자.
곧 영어 상용화 정책이 부산시 주도로 대대적으로 시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부산은 일상에서 영어를 중국어와 말레이어 등과 이미 섞어 사용하는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다르다. 막대한 영어 교육비를 쏟아붓는다 한들 과연 효과가 있을까? 그런데 북방대륙은 우리와 초원 스키타이 시대부터 서로 살을 늘 맞대고 살아왔으며, 우리 한반도는 지금 이 순간도 경제, 문화, 정치, 과학기술 등에서 대륙과 한 몸으로 호흡하고 있다.
이 ‘시민대학’에서 체계적으로 전문성을 갖춘 시민들은 향후 관광해설사, 법정통역사, 국제 공인중개사, 의료 코디네이터 등에서 새 일자리를 만들어 나갈 것이며, 전문성을 갖춘 자원봉사자로서 컨벤션 행사 등에서도 빛을 낼 것이다. 청년들의 해외 취업에도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중앙아시아의 에너지 개발 현장과 신규 블루 시장에 한국기업들이 다시 몰려들어 갈 것이고, ‘시민대학’에서 자기 전공과 별도로 새로운 취업역량을 갖춘 청년들은 그 무대를 잘 활용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젠가 끝나면 미국, 이스라엘, 유럽연합 등과 더불어 한국기업도 전후 복구 사업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사)유라시아 교육원도 서울의 유관기관들과 같이 그 준비를 하고 있다. 시민전문가를 미리미리 양성하여 다시 다가온 북방 유라시아 시대에 선제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잘 대비하자고 호소하고 싶다.
2022-11-1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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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인문학 위기는 없다
“나는 청춘의 열정으로 여러 학문 분야에 몸을 던졌으나 재능이 제한되어 많은 분야에서 모두 성공할 수는 없다는 점을 대학 일 학년에 깨달았다. 나는 메피스토의 경고에서 진리를 배웠다. ‘학문의 주변을 맴도는 짓은 헛된 일, 누구든 배울 수 있는 것만 배울 수 있다.’”
프로이트(1856~1939)는 자서전(Selbstderstellung)에서 신입생 시절의 통찰을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인간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재능의 한계 때문에 여러 학문에서 성과를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여러 분야를 공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학식은 얕게 마련이다. 넓지만 얕은 지식은 쓸모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교양인보다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에서 자신이 할 일이 생긴다.
대학 ‘인문학의 위기’ 사회에 호소
정작 인문학 개념은 정립 못 해
좋은 삶 즉 호생의 탐구가 인문학
인생의 행복을 찾는 다수 학문 해당
인문학 수요, 계속 늘 수밖에 없어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우리는 인문학 교수들에게 자주 듣는다. 그들은 교양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Humanities)은 한국 대학에서는 교양 학문으로 간주되어, 예전에는 문학, 역사, 철학 같은 인문학은 학과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수강해야 했다. 2000년대부터 학생들이 이런 교양을 듣기 싫어하면서 인문학은 강좌 수가 대폭 줄고, 인문학 관련 학과에 학생들이 지원하지 않아서 폐과되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인문학 교수들은 인문학의 위기라고 간주하고, 그 위기를 사회에 호소했다. 그들은 인문학의 위기가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진정성을 황폐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대학 당국과 정부에 대책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정말 교양 과목을 듣지 않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몰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것도 아니고, 진정성 없이 대충대충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교양 교육이 제공하는 교양이 없어도 인생을 잘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 인문학 교수들이 자주 ‘인문학 위기’를 논의했지만, 인문학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했다. 인문학이 무엇이냐 물으면, 그들은 철학, 역사, 문학, 예술 등을 열거한다. 이것은 인문학의 사례를 든 것이지 인문학의 본질을 말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하는데, 이건 범위가 너무 넓다. 의학, 생물학, 화학, 법학, 신문학도 인간을 탐구한다. 인문학의 위기와 대책을 논의하기 전에 인문학의 본질이 먼저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의 본질을 오해하게 되고, 효과적인 대책도 세우지 못하게 된다.
인문학은 좋은 삶 즉 호생(好生)의 탐구이다. 행복한 인생의 요소는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현재의 사회 제도와 문화가 호생의 목표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하는 지성적 활동이 인문학인 것이다. 문학, 역사, 철학이 인문학인 이유는 그것들이 인문대학에 소속되어서가 아니라, 호생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문사철(文史哲)만이 아니다. 오페라, 발레, 뮤지컬, 영화뿐 아니라 종교, 정신의학,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도 인생의 행복을 탐구한다. 예전에는 철학이 곧 인문학이었지만, 이제는 다수의 학문이 호생의 탐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하면 인문학 위기 사태가 전혀 달리 보인다. 인문학 관련 학과가 모두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 영화, 심리학, 정신의학은 인기가 점점 증가하고, 경제학, 정치학이나 종교 관련 학과는 예전 같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다. 폐과되어 대학에서 사라지는 학과는 철학과와 역사과 그리고 일부 외국 문학 학과들이다. 이런 학문은 공부하기 너무 어렵거나 졸업해도 취직하기 힘들어서 학생들이 지원하지 않은 것이지 인문학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인문학을 경시하지 않는다. 경제 수준이 높아질수록 호생의 욕망은 더 커지므로 인문학의 수요는 계속 늘 것이다. 다만 철학처럼 공부하기 어렵거나, 독문학처럼 졸업생을 기업이 뽑으려고 하지 않는 학과를 지원하는 학생 숫자는 줄어들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2022-11-02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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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요산정신 부산정신 시대정신
오는 10월 22일부터 일주일 동안 제25회 요산김정한문학축전이 열린다. 사반세기 세월이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한다.
요산 김정한(1908~1996)은 20세기 민족사의 질곡을 민중과 함께 견디어 내고 분단 극복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자신의 문학적 과제로 삼은 작가다. 한편으로는 평생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삶의 텃밭을 지켜 낸 파수꾼이기도 했다.
22일부터 제25회 요산문학축전
주제는 ‘차마 묵묵할 수 없는’
부산 사람들의 생활 정신 구현
개방성·진취성·공존성 바탕
부산정신의 원형은 요산정신
올해 문학 축전의 주제는 ‘차마 묵묵할 수 없는’으로 대표작 ‘모래톱 이야기’에서 빌려 왔다. 요산 소설은 낙동강 하류와 부산지역을 배경으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부산 사람들의 삶과 생활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 또한 그의 문학은 변방-지역의 문제를 보편적 담론으로 이끌었기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기도 하다.
먼저 ‘사밧재’를 통해 부산 사람들의 현실주의와 연관된 적극성을 엿볼 수 있다. 때는 일제 말, 팔순이 다 된 송 노인이 양산에 사는 누나 병문안을 가려고 나서는데 하필 매섭게 추운 날이다. 손주며느리가 만류하지만 그는 겨울은 으레 추운 것이니 내일로 미룰 필요가 없다면서 기어이 나선다. 이웃에서는 고집쟁이라 하지만 그로선 그냥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힘껏 부닥쳐 보는 것일 뿐이다.
이런 기질은 일제 말 일간지 강제 폐간 직전의 신문 지국장 이야기인 ‘위치’에서도 확인된다. 배달 소년들이 해코지당하고 다치자 그는 사무실을 빌려준 친구와 같이 40대 배달원으로 나선다. 친구는 신문이 탄압받는 걸 보고 그저 불평만 하는 건 신문을 뺏기고 우는 아이들보다 더 못난 바보라고 말한다.
‘산거족’은 1960년대 부산의 고지대 주민들의 식수 문제를 다룬다. 상수도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동네라 그들의 수원은 국유지인 동네 뒷산인데 부정불하로 개인 땅이 되었다. 그들은 소송에 지고 산수도는 철거되지만 한 번 지면 계속 지고 살게 된다는 투지로 싸운다. 요산정신의 대명사이기도 한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발언도 이 작품에서 나오는데 주인공은 인간이 그리울 때나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그 말을 새긴다.
요산 작품에는 권위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민초들의 모습도 자주 보인다. ‘산거족’에서 권력의 편에 붙어 허세를 부리는 사람에게 친구들이 “니가 뭔데 큰소리를 탕탕 치노?”라는 비난과, ‘모래톱 이야기’ 갈밭새영감의 “하기싸 시인들이니칸에 훌륭하겠지요. 머리도 좋고…. 선생도 시인 아입니꺼.”라는 발언이 그렇다. 이 말에는 글쟁이들에 대한 비판 이상의, 배운 사람들이 제 역할을 못 했을 때 받을 야유에 가까운 비판이 담겨 있다.
비판 정신은 무지렁이 순적백성에 그치지 않는다. ‘교수와 모래무지’는 해수오염에 관한 논문 내용이 신문에 소개되면서 교육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대학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시말서 제출을 거부하면서 “학문하는 사람이 학술논문을 발표하는데 무슨 놈의 허가가 필요합니까? 그런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또 있습니까? 신문이 학술 논문의 골자를 소개하는 건 신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일 테고.”라고 말한다. 학문의 자유를 지키려는 소신 있는 행동이다.
오늘 이 지점에서도 요산정신은 일정부분, 개방성과 진취성, 공존성에 바탕을 둔 부산정신의 원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는 변하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탄생시키지만 요산의 인간 존중 사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차마 묵묵할 수 없을 때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정신도 유효하리라 싶다. 요산의 마지막 직책은 그가 오래 살았던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직이었다. 사회 저명인사 이전에 주민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맡았을 테니 그로선 별스러운 일도 아니었으리라.
2022-10-1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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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동백전, 공공서비스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지역경제는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비대면 환경의 확대와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및 온라인 금융과 전자상거래의 확산으로 지역 내에서 순환되고 재투자되어야 할 자금들이 역외로 유출되고 있다. 지역화폐는 지역 소비자들의 자금을 소상공인에게 이전하는 것을 지원하고, 소비를 진작시키면서도 해당 지역의 자금이 역외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여 지역 경제의 선순환을 촉진해 온 효과가 있어 각 지자체에서 선호하는 정책 중 하나다.
부산연구원은 동백전의 신규 소비 창출 효과가 투입 대비 2.56배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고, 대전세종연구원 역시 지역화폐의 지역경제 파급 효과 분석에서 소상공인 매출 증대와 저소득층의 여유로운 소비생활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지역화폐가 지방분권 시대 전국 각지에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 지역화폐 예산 전액 삭감
자금 역외 유출 방지 목적 망각
소상공인 등 곳곳서 강력 반발
단순 결제 시스템에서 벗어나
동백전 활로 적극 찾아 나가야
그런데도 정부는 2020년 조세재정연구원의 ‘지역화폐 도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보고서, 즉 특정 지역 소비가 늘어나도 국가 전체적 경제 소비 증대 효과가 없다는 근거를 들면서 2023년 지역화폐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정부의 주장은 지역화폐 도입 취지를 모르는 소리다. 지역화폐는 자금의 역외 유출 방지와 국가 전체의 소비 증대가 아닌 부의 서울 수도권 집중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으로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벌써 논란과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소상공인들은 연일 국회 앞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지역화폐 예산 삭감 방침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오히려 정부가 지역화폐 예산을 전액 삭감할 것이 아니라 지역화폐에 내재되어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더욱 현저하게 발현되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정책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산경실련과 부산시의회 기획재경위원회가 ‘지역화폐 그 위기 해법은'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먼저 국회 예산안 심의를 통해 정부가 일방적으로 전액 삭감한 예산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산시가 내년도 동백전 예산을 예년 수준 정도로 확보하는 것이다. 인천시는 내년 지역화폐 예산을 국가 예산 확보와 무관하게 자체 예산으로 2000억 원을 편성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부산시는 내년도에 발행 한도 월 30만 원과 캐시백 요율 5% 규모를 예상한다. 부산시가 올해 동백전에 투입한 예산이 1600억 원 규모인데 아무래도 올 예산보다는 작을 것으로 보인다. 2030엑스포 유치 등을 고려하더라도 소상공인, 자영업자와 서민들을 생각한다면 동백전 예산은 최소 예년 수준은 유지되어야 한다.
지역화폐는 예산이 마중물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다. 일정 기간 국·시비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지역화폐가 광역과 기초가 중층구조를 이룬다면 예산에 대한 부담은 훨씬 줄어들 수 있다. 현재 부산엔 이바구페이(동구)와 오륙도페이(남구)가 발행 중인데 모두 구비로만 지역화폐 예산을 충당하고 있다. 동백전이 동구와 남구의 지역화폐와 연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눈여겨볼 대목은 나머지 14개 기초자치단체이다. 정부가 지역화폐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있고 동구 남구가 순수 자체 예산만으로 지역화폐를 운영하다 보니 재정이 열악한 부산의 구·군들이 내년도 지역화폐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지역화폐에 대한 가치와 효과를 본다면 기초단체에서도 조심스럽게 지역화폐 발행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백전은 국비 지원이 최소화되더라도 운영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진화되어야 한다. 광역과 기초단체 간의 중층구조를 비롯해 업종에 따른 캐시백 차등 지급, 특화 상품 개발과 소상공인 자체 할인정책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상인과 상인, 상인과 중소기업 간 동백전 결제가 가능하게 해 지역화폐가 일회성 소비가 아닌 지속적 순환 사용이 되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부가서비스 탑재, 각종 정책 수당 연계를 통한 시민 편의 제고로 동백전이 단순 결제 시스템에서 공공서비스 플랫폼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2-10-0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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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약자복지’ 사각지대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12일 부산의 한 빌라에서 모녀가 사망했다. 경찰에 의하면 양정동 모 빌라에서 40대 여성 A 씨와 10대 딸 B 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한다.
외부 침입 흔적이 없어 A 씨가 B 양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경찰은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들은 지난 7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고, 이웃에서는 경제적인 어려움일 것이라고 했으나 유서가 없어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이보다 앞선 8월 21일 경기 수원 다세대주택에서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은 신변을 비관하는 유서를 남겼는데 60대 어머니는 암을 앓았고, 40대 두 딸은 장애인이었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사업 실패로 빚만 남기고 병사했고, 이후 생계를 책임졌던 아들도 3년 전 지병으로 숨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었다. 수원은 이들의 주소지가 아니어서 사회복지 관계자들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 23일 생활고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원 세 모녀 사건’을 언급하며 ‘정치복지’가 아닌 ‘약자복지’를 강조하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약자복지 언급으로 정부에서는 ‘복지사각 개선 TF’팀을 구성했으나 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추석 연휴 기간에도 약자와의 동행을 계속했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약자복지란 어떤 것일까.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가 진정한 약자’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약자란 빈곤층 그리고 장애인 등이다. 현재(2021년 통계) 기초생활수급자는 235만 9672명이고, 장애인은 264만 4700명이다. 모든 장애인이 기초생활수급자는 아니겠지만 많은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은 맞물려 있다.
이들에게 제일 시급한 문제는 경제적 자립 지원과 일자리 창출이다. 그러나 현 제도는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일할 의욕을 잃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한다.
왜냐하면 일을 하여 수입이 발생하면 수급자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아무도 일을 안 하려고 한다. 지난 12일에 일어난 모녀 사망사건에서도 관할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는 “A 씨의 일일 소득과 전 배우자의 양육비 지급 등으로 의료·생계급여의 선정 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그러나 약자에는 빈곤이나 구직만 있는 게 아니라 교통약자 내지 보행약자도 있다. 대문 밖을 나서면 곳곳에 턱이 있어 앞을 가로막고 대중교통에서 지하철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서면역이나 연산역 등의 곡각지점에는 승강장과 지하철의 간격이 벌어져 있어 발빠짐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시각장애인도 빠지고 휠체어 사용 장애인은 휠체어의 바퀴가 빠지기도 하고 어린이나 유모차가 빠지기도 한다.
버스도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은 불편하기는 해도 저상버스가 있어 그런대로 견딜 만하지만,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는 장애인은 버스가 어디에 설지를 모르고 버스의 승강장이 너무 높아서 이용하기가 대략난감이다.
산업의 발전으로 2000년대부터 전동휠체어와 전동스쿠터가 보편화되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밀어주어야 하는 수동휠체어는 가정용이나 병원용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부산의 주요 관광지인 송도 용궁구름다리는 2020년에 완공했음에도 휠체어 사용 장애인은 접근조차 불가하고 송도 케이블카는 전동휠체어는 탑승조차 못 하게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해운대 블루라인파크의 해변열차도 2020년에 개통했음에도 전동휠체어는 탑승을 못 하게 해서 장애인들은 불만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약자복지의 뒤꼍에서는 복지 관련 예산이 줄줄이 삭감되어 앞뒤가 다르다는 원성도 높다. 그리고 윤 대통령은 “표를 얻기 위한 복지가 아니라 표가 안 되는 곳, 정말 어려운 분들의 곁에서 힘이 되는 복지 정책을 펴나가겠다”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고 좋은 복지라면 투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왜 표가 안 되는 곳이라고 할까. 약자는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라는 말인가.
이복남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
2022-09-2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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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낙동강 녹조, 대책은 뭔가
2022년 여름은 그야말로 무더웠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지만, 8월의 무더위를 낙동강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 때 4대강 조사평가단에서 답보 중이던 보 개방이 금강·영산강 수문 개방마저 미루고 있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낙동강 녹조는 그 위력의 절정을 보여 주었다. 시민사회와 연구자 그리고 환경부는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녹조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부산시민들은 다대포해수욕장과 삼락둔치, 원동의 논, 매일 마실 수밖에 없는 수돗물에서도 마이크로시스틴이라는 녹조 독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부산 수돗물에서도 녹조 독 검출
노인성 치매 유발 독성 충격적
환경 재난 넘어 사회적 재난 양상
녹조 막으려면 강 흐르게 해야
민관위원회 통해 대책 마련을
먼저 녹조라 불리는 광합성을 하는 세균 중 남세균의 마이크로시스틴은 이제 웬만한 분은 다 알게 된 녹조 독이 되어 버렸다. 이 남세균이 만들어 내는 독성물질인 시아노톡신에는 마이크로시스틴만 있는지 알았더니, 영주댐에서 우종으로 발견된 아나톡신, 그리고 이번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확인된 베타 메틸아미노 알라닌(BMAA)도 있다.
이 이외에도 실린드로스퍼몹신까지 확인되었는데, 모두 생식기 및 신경, 뇌 질환을 일으키는 독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이번에 다대포 및 삼락둔치의 저질토에서 확인된 BMAA는 알츠하이머병 등 노인성 치매를 유발하는 독성으로 알려져 충격을 준다. 대구 수돗물에 이어 초고도 정수처리를 하고 있다는 부산 수돗물에서도 마이크로시스틴이 검출돼 물탱크 및 관로를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유역물관리위원회에서는 취수원 다변화라는 명분으로 황강으로부터 50%의 상수를 가져올 것을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낙동강 본류가 아니라 지류를 상수원수로 사용하면 문제는 해결되는가. 이제 낙동강의 녹조는 5월, 10월, 2월 등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강에서 그리고 수돗물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더구나 부산 인근의 양산에서는 초록색 유화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강물로 벼농사뿐 아니라 엽채류와 과일 농사를 짓고 있다. 축산분뇨까지 더해진 이 지천은 코를 찌르는 악취뿐 아니라 녹조 독이 든 쌀과 무, 상추 그리고 딸기를 부산시민들에게 공급해 줄 것이다. 농업용수에까지 비상이 걸린 것이다. 취·양수 시설 개선을 하지 않고 넘실대는 보의 강물로 농사를 짓겠다며 버티던 낙동강 상류의 농민들이 이것을 보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을까.
고농도 녹조가 유입됨에 따라 농산물에 축적되면서 농민의 생계뿐 아니라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20여 일간 국민 체감 녹조 조사단에서 확인한 최악의 지점이 양산의 양·배수장에서 확인된 마이크로시스틴 16,952ppb는 농산물의 전국 유통을 지금 당장 중단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낙동강 녹조 문제는 환경재난을 넘어서 사회적 재난이 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수문개방을 여전히 주저하면서 녹조 독성 검출 방법에 대해서 논란을 이어 가고 있으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양심적인 학자를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4대강의 녹조는 강에 설치된 16개의 보 수문을 열어 물을 흐르게 할 경우 녹조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2017~2021년 4대강 수문개방 모니터링을 통하여 확인된 사실이다. 그런데도 정권이 바뀌자 이를 없었던 일처럼 숨기고 수문개방 계획을 외면하고 있다.
우선 정부는 녹조 독소가 검출된 농수산물에 대하여 전량 수매하여 이를 폐기 조치하여야 한다. 농경지 자체에 녹조 독이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며 농민의 피해가 발생할 시에는 이에 대한 보상대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낙동강 녹조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는 강을 흐르게 하여야 한다. 올 하반기에는 합천보 인근의 취·양수 시설을 신속히 개선하여 수문개방의 폭을 확대해 나가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녹조 문제 해결을 위한 민관위원회를 구성하여 인근 농민과 민간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총리실 산하의 민관위원회 구성도 주요한 방안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창궐한 녹조를 눈에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수문을 개방하고 이것이 다대포해수욕장 및 거제도 앞바다까지 녹조 알갱이가 떠다니지 않도록 하는 방안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2022-09-07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