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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세계 시장을 향한 지역출판과 도서전
코로나19로 한동안 열리지 못했던 국제도서전이 지난해에는 곳곳에서 문을 활짝 열었다. 국제도서전은 책을 사랑하는 독자와 작가, 출판사들이 모여 책에 관한 이슈를 토론하고, 저작권을 거래하는 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알려진 도서전은 10월에 열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이다. 6월에 서울국제도서전이 코엑스에서 열리고, 어린이 도서로 특화된 이탈리아 볼로냐아동도서전에도 한국 출판사들이 많이 참여한다.
지난해 필자는 네 군데의 국제도서전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에는 해마다 부스를 차려 출판사의 책들을 소개하고 있고, 스웨덴 예테보리, 독일 프랑크푸르트,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도서전에 가 볼 수 있었다. 그중 마지막으로 참석한 과달라하라도서전은 대한민국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체감한 도서전으로 인상이 깊었다.
국제도서전 세계 곳곳에서 재개
K콘텐츠 바람 타고 한국 부스 인기
한국관에 방문객 끊이지 않아 눈길
지역출판도 세계 시장에 눈 돌려야
해외 출판인 교류 ·독자 소통 필요
과달라하라도서전은 스페인어권에서는 최대 규모의 도서전이다. 11월 26일부터 12월 4일까지 80만 명의 독자들이 참여하고, 49개국 2173개 출판사가 참가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과달라하라는 멕시코 제2의 도시이자 대학도시인데, 수도가 아닌 도시에서도 대규모 국제도서전이 가능하며, 청소년을 비롯해 지역민들이 적극 참여하여 축제처럼 책을 즐기는 모습이 새로웠다.
한국관을 운영한 대한출판문화협회는 부스 명칭을 ‘이야기 공장’이라고 붙였다. 전 세계에서 각광 받고 있는 K콘텐츠(한류)의 원천, 즉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한국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산지니, 다락원, 사회평론 등의 출판사 부스와 위탁 도서가 진열된 한국관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청소년들의 관심이 높았는데, 한 여고생이 한국관 부스에 앉아 2시간 동안 전시된 한국어 교재를 펼쳐 놓고 공부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10월에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참가하였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어서 그런지 이전에 비해 빈 부스가 여기저기 보일 정도로 열기가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한국에 대한 관심은 높아, 나이 지긋하신 한 이탈리아 편집자가 한국 문학을 소개하고 싶다고 부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예테보리도서전은 스웨덴의 제2 도시에서 열리는데, 북유럽 사람들의 높은 독서율을 반영하듯 일반 독자들의 참여 열기가 높았으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한국관을 만들어 한국 그림책을 소개하고 그림책 작가들이 직접 해외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도서전은 갈수록 독서율이 추락하는 현실에서 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면서 도서 판매를 통해 출판사와 서점의 수익을 올리고, 저작권 거래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미래 출판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를 열어 새로운 출판의 형태를 고민하게 만든다.
종잇값 폭등과 물류비 인상 등 인플레이션으로 나날이 위축되어 가는 출판 환경 속에서 지역의 출판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출판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국제도서전을 다니면서 든 생각은 책을 작은 시장에만 팔려고 하지 말고 국내외 다양한 시장에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K콘텐츠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연초에 베트남에 5종의 저작권을 수출하였다. 2018년 장편소설 〈쓰엉〉이 베트남여성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이후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 얻은 결과이다. 그 외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 등의 출판사들과도 꾸준히 교류하면서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생각하는 사람들〉 등을 해외에 수출할 수 있었다.
오는 9월, 부산 수영구와 한국지역출판연대가 함께하는 제7회 한국지역도서전이 부산에서 열린다. 전국의 지역출판인들이 부산에 모여 축제를 열고 시민들과 함께하는 책 행사가 마련될 예정이다.
현재는 중심과 주변이 해체되고, 새로운 탈구축이 실험되고 있는 탈세계화의 시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는 어수선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와 아시아평화를 위해 아시아의 지역 출판인을 초대하여 부산이라는 도시의 매력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문화적 동질감과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 이웃 나라 출판인과 교류하면서 책을 읽고 독자와 소통해 보는 건 어떨까.
2023-01-2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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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토끼의 지혜가 절실하다
계묘년을 맞아 토끼라는 작은 동물을 두고 다양한 문화에서 신화적, 예술적, 민속적 의미의 해석이 분분하다. 서양에서는 대체로 토끼 이미지가 형편없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토끼는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교만함이 넘쳐 쉬엄쉬엄 가다가 지고 마는 영악한 사기꾼으로 묘사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는 뚱뚱한 욕심쟁이로 양복을 입고 회중시계를 늘어뜨린 거만한 인물로 앨리스를 곤경에 빠뜨린다. 심지어 번식능력이 어떤 동물보다 강한 탓에 관능과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 성인잡지의 로고로도 쓰였다.
동양권에서 토끼는 헌신과 희생 공덕의 표상으로 불교 신화와 인연이 깊다. 어느 날 제석천이 걸식하는 스님의 모습을 하고 공양을 받기 위해 여러 동물을 찾아갔다. 토끼는 공양할 것이 풀밖에 없자,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제석천은 토끼의 갸륵한 보시행을 기려 달의 수호자로 삼고 중생들의 표상이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 영향으로 동양에서는 보름달과 함께 토끼를 다산, 풍요, 번영의 길상으로 여겼다.
계묘년 맞아 토끼 뜻 해석 분분
설화에서 토끼는 서민의 분신
코로나·기후변화·핵·인구 감소
새해에도 약육강식의 위협 산재
재치·유연함으로 위기 극복해야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문화에서 토끼는 착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온 동물이었다. 어릴 때 제일 먼저 하는 노래가 동요 ‘산토끼’였고, 여기에 맞춰 깡충깡충 율동을 배웠다. 과거에 배고픔이 일상이었던 서민 생활에서 토끼는 달에서 떡방아를 찧고 있는 옥토끼의 모습으로 ‘초가삼간 집을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의 노래 가사같이 배고픔 없이 평화로운 이상향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우리나라 전역에 ‘토끼실, 토끼재, 토끼비리, 토산, 토끼봉, 토끼섬’ 등과 같은 토끼와 관련한 지명이 유독 많이 있다.
토끼는 작고 연약한 동물로 사방이 천적으로 둘러싸인 야생에서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다. 그들에게 대항할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쫑긋 세운 예민한 귀와 동그랗게 큰 눈, 재빠르게 토낄 수 있는 뒷다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비록 힘은 약하지만 영특하고 꾀가 많았다. 수렁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 주다 잡아먹히게 된 나그네를 구해 주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고, 나보다 맛있는 것을 소개하겠다고 속여 호랑이를 골탕 먹이기도 한다. 특히 이솝우화에서는 토끼가 거북이에게 당하지만, 우리 토끼는 ‘수궁가’에서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꾀를 부려 거북이를 따돌린다. ‘범 내려온다’라는 대목도 별주부가 “토 생원”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발음이 새어 “호 생원”이라 부른 데서 생긴 소동이다.
설화에서 호랑이, 용왕, 거북이는 모두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왕과 양반의 상징이고, 거북이는 권력에 아부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벼슬아치의 모습이고, 호랑이의 담뱃대를 들고 있는 척하는 익살스러운 토끼는 서민들의 분신이었다. 설화는 오랜 세월을 통해 전승한 민족적 사상과 가치관을 함축시켜 놓은 것이기에, 단순히 동물의 모습으로 세태를 풍자한 우화로 치부하기에는 섬뜩한 깨우침이 담겨 있다. 계묘년 한 해도 역시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여전히 토끼를 노리는 거북이와 호랑이들이 사방에 득실거린다.
‘아직도 창궐 중인 끝나지 않은 코로나’ 호랑이도 있고, ‘폭염, 홍수, 가뭄, 산불로 대표되는 기후변화’라는 호랑이도 있다. 그리고 ‘2년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라는 호랑이와 ‘더욱 치열해진 미국과 중국의 패권 군비 경쟁’이라는 호랑이도 있다. 또 ‘그 틈을 타고 첨예한 대치로 핵 위기를 확산하는 한반도 정세’라는 거북이도 있고, ‘간사한 꾀로 이웃 나라 영토를 노리는 열도’ 거북이도 있다.
그리고 국내의 ‘꼬인 실타래 같은 정치 상황’과 ‘경제적 동력 상실’, ‘사회적 대립과 갈등’, ‘인구 감소’ 등도 우리를 언제 삼킬지 모르는 강력한 호랑이와 거북이다. 설화에서 토끼는 거듭 닥쳐오는 부당한 위협과 요구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재빠른 재치와 대처 능력을 발휘하여, 호랑이와 거북이를 농락하고 그 고비를 극복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토끼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다.
2023-01-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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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염치없는 세상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 마포구에서 20년 이상 맥줏집을 운영하던 50대 자영업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영난을 더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살던 원룸을 정리해서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주었다. 그것이 사장으로서의 도리라 생각했다. 가게 유리창에는 도시가스 공급을 중단한다는 통지문이 붙어 있었다.
이 뉴스를 보며 나는 ‘염치’를 떠올렸다. 염치란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쳤을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과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과 고마움 때문에 그냥 떠날 수가 없었을 게다. 가게 문 아래에는 누군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 다발이 그의 넋을 달래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아는 게 염치다. 염치의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을 합한 글자다. 자신의 마음 소리를 자신의 귀가 먼저 듣고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로 짐작된다.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저 ‘패널’에게 과연 염치라는 게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특수 임무를 띠고 투입된 용병처럼 현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기 위해 온갖 궤변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문제를 두고도 정치적 보복이라 우긴다. 저절로 분노 게이지가 올라간다.
여권의 분위기는 또 어떠한가. 당권 경쟁에 눈먼 자들이 수시로 불협화음을 내는가 하면, 범퍼카를 탄 아이들처럼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민들로 하여금 누구의 범퍼카가 뒤집혔는지 구경이나 하라는 건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 주무 장관이란 자가 했던 말도 잊을 수 없다. “소방, 경찰 인력을 배치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어야 옳지 않나. 이들의 ‘염치 소재지’도 궁금하다.
상당히 많은 20대가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저지르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응답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취업이 안 되고 앞날이 불투명하다 보니 한탕주의에 빠져든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도덕과 윤리의식마저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닌지. 젊은이들이 돈 10억에 무너져 내린다면, 그동안 기르고 가르치고 밥상머리 교육을 시켜 온 부모의 공은 어디에서 찾나. 아무리 현실이 막막하다 하더라도 ‘염치불고(廉恥不顧)형’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 염치가 없으면 이내 상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처신에 있어 못 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게 없다. 염치는 인간의 근본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염치가 있어야 잘못을 하더라도 회생의 기회, 변화의 기회, 거듭남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요즘 매스컴에서 들려오는 낱말들은 거의 어둡다. 파행, 결렬, 파업, 탄핵, 참사, 깡통전세, 탄도미사일, 대선자금 저수지 등. 우리가 서로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하지만, 실은 그 누구도 안녕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사회, 경제, 정치, 외교, 민생, 어느 분야든 다 어렵다. 어쩌면 이 나라가 ‘다발성 장기 손상 환자’가 된 게 아닐까 싶다. 대다수의 국민이 현 정부에 바라는 것은 ‘많이 아픈 대한민국’을 어떻게든 치료하라는 게 아닐까.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우선 노동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에 집중하겠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줄탁동기’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가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야 한다는 의미다. 나라의 앞날을 정부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우리 국민도 힘을 보태야 한다. 무엇보다 염치를 되찾았으면 한다. 체면을 생각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사회를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리라 믿는다.
유난히 길게 느껴진 한 해였다. 그만큼 힘들었고, 애태웠고, 종종걸음을 했다는 얘기다. 서로의 부은 발등을 어루만져 주며 올 한 해 잘 버텼다고 위로할 때다.
지금 겨울 한파가 몰아치고 있지만 갯버들은 이미 움 틔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게다. 우리의 봄도 그렇게 오지 않을까.
2022-12-2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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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늑대가 몰려온다
늑대가 몰려오고 있다. 전 세계 4억 마리가 떼를 지어, 거침없이, 빠르게 달려온다. 기존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기들만의 새로운 생태계를 급속히 만들고 있다. 바로 스타트업 얘기다. 방 하나 소유하지 않은 에어비앤비는 창업 10여 년 만에 수십 년간 브랜드를 쌓아 온 힐튼호텔의 자산가치를 훌쩍 넘어섰다. 식당 하나 없는 배달의 민족은 수십 년간 명성을 지켜 온 식당업계의 비즈니스 구조와 문법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디즈니로 상징되는 100년 전통의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생산, 유통구조를 넷플릭스는 4년 만에 송두리째 뒤집어 놓고 있다. 늑대의 속성을 똑 닮았다. 그것도 변종의 늑대(김영록, 〈변종의 늑대〉)들이다.
이들은 주로 플랫폼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전통적 업종 구분을 무참히 파괴한다. 이들에게 제조, 서비스, 금융업종 구분은 의미가 없다. 기업 성장 속도는 기존 기업의 3~5배 정도 더 빠르다. 전통기업이 기업가치 1조 원대에 도달하는 기간은 평균 21년이 걸렸다. 이에 비해 플랫폼 스타트업은 평균 6.5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업 인수가 이루어진다. 합병이 번개처럼 일어난다. 스타트업 투자집단과 성장 촉진 집단이 별도의 업종군으로 만들어져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플랫폼과 디지털이 결합한 신산업의 대전환은 우리 사회의 수도권 집중을 더 가속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스타트업 기업들이 활성화된 2015년은 우리 사회에서 수도권 집중의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해로 기록될 것이다, 꾸준히 증가하던 수도권 집중도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기존 제조업보다 훨씬 기술집약, 인재집중, 도심밀집형이다 보니 수도권 선호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이들 늑대의 질주는 신발, 목재, 건설, 조선, 전자 등 우리나라 경제성장 연대기를 대표하는 산업정책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기존 제조업의 입지 선호는 산업용수(用水), 노동력, 물류가 좌우했다. 그러나 스타트업의 입지 선호는 자유로운 도시문화, 특화된 인재풀, 네트워크 잠재력, 투자자들과의 교류 기회가 결정한다. 기업지원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장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자금, 기술보다 인재를 원한다. 문화를 원한다.
이들 스타트업과 기업들이 선호하는 입지 요인에 부산은 어떨까? 우리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가, 전국의 스타트업들이 부산의 자유로운 도시공간과 문화를 매우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업이 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특화된 인재풀과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산학(地·産·學) 정책이다. 기업의 시장주도 욕구를 적극 지원하고, 대학의 기술개발력을 기업현장과 직접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청년의 잠재력을 지역기업을 통해 실현하는 선순환구조에 지자체가 적극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지역내재적 공급가치사슬망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전환기를 맞고 있는 부산의 전략적 선택이다. 그동안의 그렇고 그런 산학협력 정책의 아류가 아니다. 부산만의 문화, 인재, 네트워크, 투자를 위한 기업지원책이자 교육정책이며 산업전략이다.
벌써 몇몇 기업과 대학, 산업 영역에서 꿈틀거림이 있다. 세계적 에너지 전환 기술을 주도하는 환경기업의 부상, 서비스와 제조영역을 융합한 세계적 커피팩토리의 등장이 심상찮다. 지역의 13개 대학이 협력하는 파워반도체 공유대학, 지산학 브랜치들 간 융합적 비즈니스 네트워크 등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유의미한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투자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다. 스타트업 투자는 지속성과 네트워크가 중요한데 이를 매개하는 메신저가 필요하다. 새로 만들어질 부산창업청은 초기 투자뿐만 아니라 후속 투자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스케일업 투자의 공공플랫폼이 될 것이다. 결국 스타트업을 위한 창업정책과 지산학 정책은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전국과 아시아 늑대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부산 전역에서 들리는 날이 올 것이다. 산업계의 늑대가 몰려온다.
2022-12-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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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위기의 순간 빛나는 인문학의 힘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행복하냐고 내게 물었다. 행복이라니, 흔하게 소비되지만 일상에서 생각지 못한 단어에 잠시 당황했다. 며칠 전 아끼는 후배도 ‘선배님은 요새 행복하십니까’라는 톡을 보내왔다.
그냥, ‘나쁘지 않아’라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는 ‘왜, 요즘 행복하지 않나? 그렇다고 불행한 건 아니제?’라고 덧붙였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냐고 묻지 않는다.
잇단 대형 참사, 자살률 1위 오명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인문학적 사유 없이는 행복 요원
줄 세우기식 교육시스템 재고
정답 아닌 스스로만의 해답 찾아야
자고 나면 새로운 사건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한다. 대통령이 2032년에는 달에 착륙해 자원 채굴을 하고 2045년에는 우리 힘으로 화성에 착륙하겠다는 ‘미래 우주 경제 로드맵’을 발표하는 시대에 생활고로 인한 극단적 선택은 갈수록 늘어난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은 8년이 지나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4차 산업혁명이 가파르게 진행되니 인간의 삶은 더 나아져야 하는데 부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져 간다. 나만 나쁘지 않다고 괜찮은 건 아니다.
대한민국은 2016, 2017년을 제외하고 2003년부터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2011년 국내 자살은 정점을 찍은 후 조금씩 감소되고 있다지만 10대와 20대의 자살률은 급증하고 있다. 2020년 대비 2021년의 자살률이 10대는 10.1%, 20대는 8.5%가 증가했는데 2017년과 비교하면 50%가량 늘었다고 한다. 10대와 20대에 인생을 버리는 것은 개인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근대교육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등 관료 양성에 목적을 둔 줄 세우기식 교육은 ‘왜’라는 근본적 질문 없이 정답만을 요구한다.
청년 세대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른들이 답을 정해 놓은 세계는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에는 척박하고 암울하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삶의 근본적 질문 자체를 할 수 없는 시스템은 인문학의 필요성을 묻지 않는 사회로, 고등교육에서조차 인문학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인문학적 사유 없이 이루어지는 학문의 발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 명과 암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는 여실히 보여 주었다. 화학자였던 그는 인류의 식량을 많이 보급하게 하는 인공 질소 비료를 개발해 인류의 염원이었던 식량 생산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이후 질소를 이용해 역사상 가장 사악한 무기인 독가스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독가스는 홀로코스트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이 인간이라는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 지구 곳곳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보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현대는 인간조차도 소비하는 사회가 되었다.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인 노동의 개념도 재정립해야 한다. 영국의 최고 지성으로 불리는 찰스 핸디는 AI가 인간의 많은 일자리를 대체하는 미래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AI를 보조하는 개인보좌관(Individual Assistant; IA)이 될 거라고 한다. 이런 세상이 온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아직도 우리는 기존의 ‘산업 역군’을 길러 내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학습된 AI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마저도 친절하게 해 주는 세상에서 정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스스로만의 해답을 찾도록 하는 사유의 힘을 길러 주는 것이 교육의 지향점일 것이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상가는 수천 년 동안 같은 질문을 하고 다른 답변을 했다. 인생은 선택의 문제인데 다양한 선택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선택의 틀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느린 것 같지만 위기의 순간 가장 빛을 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 가진 힘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정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질문을 하지 않는 것, 해답이 없다는 이유로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질문을 생각하는 데에 있어 틀린 답안이다.
2022-11-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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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북방 유라시아 시민전문가 양성하자
바야흐로 ‘북방 유라시아 시대’가 다시 열렸다. 대공산권 적대 정책을 바꾸겠다며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 북한개방까지를 염두에 두고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 경제정책에 이어 네 번째로 다가온 북방 시대다.
그러나 ‘북방 유라시아 시대’가 다시 다가온 것은 이전과 다르게 우리 내부적 요청이라기보다는 전쟁 등 외부적 요인 탓이 크다. 무엇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적으로 안보, 에너지, 식량 위기가 초래되어 그 영향이 크고, 날로 심각해지는 북방권의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도 북방 유라시아에 세계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부산시 등 지자체 차원에서도 북방 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을 점차 높이고 있다. 2030 부산 세계박람회를 북방 유라시아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잘 치러야 하고, 부산기업의 새로운 활로를 유럽연합(EU), 동유럽, 중앙아시아 등에서 다양하게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 탓에 부산시도 지난 9월 말 카자흐스탄 알마티시와 현지에서 ‘우호 도시 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사실 부산은 항구도시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세계 23개국의 26개 항구도시하고만 자매결연을 해 왔고, 내륙 국가의 내륙도시하고는 이번 알마티 협정이 처음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경제진흥원에서도 중앙아시아 경제사절단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보낸다고 한다. 지난 6월에는 부산국제교류재단 주최의 ‘2022 유라시아 도시포럼’이 부산에서 열렸다.
북방 유라시아가 이렇게 뜨는 까닭은 부산의 핵심 산업인 관광산업 육성과도 관련이 깊다. 부산시는 앞으로 2024년까지 1500억 원을 투입하여 부산만의 관광상품과 콘텐츠 개발, 부산형 모빌리티 구축 등에 나선다고 한다. 그런데 외교부 산하의 아세안문화원이 맡고 있는 아세안 10개국과의 협력만으로는 국제 관광도시 부산의 꿈을 이루기 어렵다. (사)유라시아 교육원 같은 민간 차원의 북방 플랫폼을 잘 활용하여 남방과 북방 모두에 걸쳐 친부산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부산이 살아갈 새로운 국제적 활로가 열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시민과 청년 대상의 가칭 ‘북방 유라시아 시민대학’을 시 차원에서 새롭게 별도로 운영하자고 제안한다. ‘부산인재 평생교육 진흥원’ 같은 곳에 맡겨 버릴 게 아니라, 시가 책임지고 해외 지역학 전문교육기관을 공모하고 심사를 공정하고 철저하게 하여 시니어 은퇴자, 청년 재교육 희망자, 주부 가운데 유라시아 근무 경험자와 교육 희망자를 뽑자. 그래서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언어와 지역학을 연간 100시간이라도 집중적으로 가르치자. 단발성의 특강만으론 해외지역 전문성을 갖출 수 없으며, 연계형의 주요 교과목 5개를 각각 20시간씩이라도 교육하여 새롭게 뜨고 있는 유라시아 시대에 선제적으로 대처하자.
곧 영어 상용화 정책이 부산시 주도로 대대적으로 시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부산은 일상에서 영어를 중국어와 말레이어 등과 이미 섞어 사용하는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다르다. 막대한 영어 교육비를 쏟아붓는다 한들 과연 효과가 있을까? 그런데 북방대륙은 우리와 초원 스키타이 시대부터 서로 살을 늘 맞대고 살아왔으며, 우리 한반도는 지금 이 순간도 경제, 문화, 정치, 과학기술 등에서 대륙과 한 몸으로 호흡하고 있다.
이 ‘시민대학’에서 체계적으로 전문성을 갖춘 시민들은 향후 관광해설사, 법정통역사, 국제 공인중개사, 의료 코디네이터 등에서 새 일자리를 만들어 나갈 것이며, 전문성을 갖춘 자원봉사자로서 컨벤션 행사 등에서도 빛을 낼 것이다. 청년들의 해외 취업에도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중앙아시아의 에너지 개발 현장과 신규 블루 시장에 한국기업들이 다시 몰려들어 갈 것이고, ‘시민대학’에서 자기 전공과 별도로 새로운 취업역량을 갖춘 청년들은 그 무대를 잘 활용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젠가 끝나면 미국, 이스라엘, 유럽연합 등과 더불어 한국기업도 전후 복구 사업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사)유라시아 교육원도 서울의 유관기관들과 같이 그 준비를 하고 있다. 시민전문가를 미리미리 양성하여 다시 다가온 북방 유라시아 시대에 선제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잘 대비하자고 호소하고 싶다.
2022-11-1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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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인문학 위기는 없다
“나는 청춘의 열정으로 여러 학문 분야에 몸을 던졌으나 재능이 제한되어 많은 분야에서 모두 성공할 수는 없다는 점을 대학 일 학년에 깨달았다. 나는 메피스토의 경고에서 진리를 배웠다. ‘학문의 주변을 맴도는 짓은 헛된 일, 누구든 배울 수 있는 것만 배울 수 있다.’”
프로이트(1856~1939)는 자서전(Selbstderstellung)에서 신입생 시절의 통찰을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인간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재능의 한계 때문에 여러 학문에서 성과를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여러 분야를 공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학식은 얕게 마련이다. 넓지만 얕은 지식은 쓸모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교양인보다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에서 자신이 할 일이 생긴다.
대학 ‘인문학의 위기’ 사회에 호소
정작 인문학 개념은 정립 못 해
좋은 삶 즉 호생의 탐구가 인문학
인생의 행복을 찾는 다수 학문 해당
인문학 수요, 계속 늘 수밖에 없어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우리는 인문학 교수들에게 자주 듣는다. 그들은 교양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Humanities)은 한국 대학에서는 교양 학문으로 간주되어, 예전에는 문학, 역사, 철학 같은 인문학은 학과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수강해야 했다. 2000년대부터 학생들이 이런 교양을 듣기 싫어하면서 인문학은 강좌 수가 대폭 줄고, 인문학 관련 학과에 학생들이 지원하지 않아서 폐과되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인문학 교수들은 인문학의 위기라고 간주하고, 그 위기를 사회에 호소했다. 그들은 인문학의 위기가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진정성을 황폐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대학 당국과 정부에 대책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정말 교양 과목을 듣지 않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몰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것도 아니고, 진정성 없이 대충대충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교양 교육이 제공하는 교양이 없어도 인생을 잘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 인문학 교수들이 자주 ‘인문학 위기’를 논의했지만, 인문학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했다. 인문학이 무엇이냐 물으면, 그들은 철학, 역사, 문학, 예술 등을 열거한다. 이것은 인문학의 사례를 든 것이지 인문학의 본질을 말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하는데, 이건 범위가 너무 넓다. 의학, 생물학, 화학, 법학, 신문학도 인간을 탐구한다. 인문학의 위기와 대책을 논의하기 전에 인문학의 본질이 먼저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의 본질을 오해하게 되고, 효과적인 대책도 세우지 못하게 된다.
인문학은 좋은 삶 즉 호생(好生)의 탐구이다. 행복한 인생의 요소는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현재의 사회 제도와 문화가 호생의 목표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하는 지성적 활동이 인문학인 것이다. 문학, 역사, 철학이 인문학인 이유는 그것들이 인문대학에 소속되어서가 아니라, 호생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문사철(文史哲)만이 아니다. 오페라, 발레, 뮤지컬, 영화뿐 아니라 종교, 정신의학,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도 인생의 행복을 탐구한다. 예전에는 철학이 곧 인문학이었지만, 이제는 다수의 학문이 호생의 탐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하면 인문학 위기 사태가 전혀 달리 보인다. 인문학 관련 학과가 모두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 영화, 심리학, 정신의학은 인기가 점점 증가하고, 경제학, 정치학이나 종교 관련 학과는 예전 같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다. 폐과되어 대학에서 사라지는 학과는 철학과와 역사과 그리고 일부 외국 문학 학과들이다. 이런 학문은 공부하기 너무 어렵거나 졸업해도 취직하기 힘들어서 학생들이 지원하지 않은 것이지 인문학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인문학을 경시하지 않는다. 경제 수준이 높아질수록 호생의 욕망은 더 커지므로 인문학의 수요는 계속 늘 것이다. 다만 철학처럼 공부하기 어렵거나, 독문학처럼 졸업생을 기업이 뽑으려고 하지 않는 학과를 지원하는 학생 숫자는 줄어들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2022-11-02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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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요산정신 부산정신 시대정신
오는 10월 22일부터 일주일 동안 제25회 요산김정한문학축전이 열린다. 사반세기 세월이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한다.
요산 김정한(1908~1996)은 20세기 민족사의 질곡을 민중과 함께 견디어 내고 분단 극복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자신의 문학적 과제로 삼은 작가다. 한편으로는 평생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삶의 텃밭을 지켜 낸 파수꾼이기도 했다.
22일부터 제25회 요산문학축전
주제는 ‘차마 묵묵할 수 없는’
부산 사람들의 생활 정신 구현
개방성·진취성·공존성 바탕
부산정신의 원형은 요산정신
올해 문학 축전의 주제는 ‘차마 묵묵할 수 없는’으로 대표작 ‘모래톱 이야기’에서 빌려 왔다. 요산 소설은 낙동강 하류와 부산지역을 배경으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부산 사람들의 삶과 생활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 또한 그의 문학은 변방-지역의 문제를 보편적 담론으로 이끌었기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기도 하다.
먼저 ‘사밧재’를 통해 부산 사람들의 현실주의와 연관된 적극성을 엿볼 수 있다. 때는 일제 말, 팔순이 다 된 송 노인이 양산에 사는 누나 병문안을 가려고 나서는데 하필 매섭게 추운 날이다. 손주며느리가 만류하지만 그는 겨울은 으레 추운 것이니 내일로 미룰 필요가 없다면서 기어이 나선다. 이웃에서는 고집쟁이라 하지만 그로선 그냥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힘껏 부닥쳐 보는 것일 뿐이다.
이런 기질은 일제 말 일간지 강제 폐간 직전의 신문 지국장 이야기인 ‘위치’에서도 확인된다. 배달 소년들이 해코지당하고 다치자 그는 사무실을 빌려준 친구와 같이 40대 배달원으로 나선다. 친구는 신문이 탄압받는 걸 보고 그저 불평만 하는 건 신문을 뺏기고 우는 아이들보다 더 못난 바보라고 말한다.
‘산거족’은 1960년대 부산의 고지대 주민들의 식수 문제를 다룬다. 상수도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동네라 그들의 수원은 국유지인 동네 뒷산인데 부정불하로 개인 땅이 되었다. 그들은 소송에 지고 산수도는 철거되지만 한 번 지면 계속 지고 살게 된다는 투지로 싸운다. 요산정신의 대명사이기도 한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발언도 이 작품에서 나오는데 주인공은 인간이 그리울 때나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그 말을 새긴다.
요산 작품에는 권위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민초들의 모습도 자주 보인다. ‘산거족’에서 권력의 편에 붙어 허세를 부리는 사람에게 친구들이 “니가 뭔데 큰소리를 탕탕 치노?”라는 비난과, ‘모래톱 이야기’ 갈밭새영감의 “하기싸 시인들이니칸에 훌륭하겠지요. 머리도 좋고…. 선생도 시인 아입니꺼.”라는 발언이 그렇다. 이 말에는 글쟁이들에 대한 비판 이상의, 배운 사람들이 제 역할을 못 했을 때 받을 야유에 가까운 비판이 담겨 있다.
비판 정신은 무지렁이 순적백성에 그치지 않는다. ‘교수와 모래무지’는 해수오염에 관한 논문 내용이 신문에 소개되면서 교육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대학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시말서 제출을 거부하면서 “학문하는 사람이 학술논문을 발표하는데 무슨 놈의 허가가 필요합니까? 그런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또 있습니까? 신문이 학술 논문의 골자를 소개하는 건 신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일 테고.”라고 말한다. 학문의 자유를 지키려는 소신 있는 행동이다.
오늘 이 지점에서도 요산정신은 일정부분, 개방성과 진취성, 공존성에 바탕을 둔 부산정신의 원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는 변하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탄생시키지만 요산의 인간 존중 사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차마 묵묵할 수 없을 때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정신도 유효하리라 싶다. 요산의 마지막 직책은 그가 오래 살았던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직이었다. 사회 저명인사 이전에 주민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맡았을 테니 그로선 별스러운 일도 아니었으리라.
2022-10-1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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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동백전, 공공서비스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지역경제는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비대면 환경의 확대와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및 온라인 금융과 전자상거래의 확산으로 지역 내에서 순환되고 재투자되어야 할 자금들이 역외로 유출되고 있다. 지역화폐는 지역 소비자들의 자금을 소상공인에게 이전하는 것을 지원하고, 소비를 진작시키면서도 해당 지역의 자금이 역외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여 지역 경제의 선순환을 촉진해 온 효과가 있어 각 지자체에서 선호하는 정책 중 하나다.
부산연구원은 동백전의 신규 소비 창출 효과가 투입 대비 2.56배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고, 대전세종연구원 역시 지역화폐의 지역경제 파급 효과 분석에서 소상공인 매출 증대와 저소득층의 여유로운 소비생활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지역화폐가 지방분권 시대 전국 각지에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 지역화폐 예산 전액 삭감
자금 역외 유출 방지 목적 망각
소상공인 등 곳곳서 강력 반발
단순 결제 시스템에서 벗어나
동백전 활로 적극 찾아 나가야
그런데도 정부는 2020년 조세재정연구원의 ‘지역화폐 도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보고서, 즉 특정 지역 소비가 늘어나도 국가 전체적 경제 소비 증대 효과가 없다는 근거를 들면서 2023년 지역화폐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정부의 주장은 지역화폐 도입 취지를 모르는 소리다. 지역화폐는 자금의 역외 유출 방지와 국가 전체의 소비 증대가 아닌 부의 서울 수도권 집중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으로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벌써 논란과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소상공인들은 연일 국회 앞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지역화폐 예산 삭감 방침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오히려 정부가 지역화폐 예산을 전액 삭감할 것이 아니라 지역화폐에 내재되어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더욱 현저하게 발현되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정책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산경실련과 부산시의회 기획재경위원회가 ‘지역화폐 그 위기 해법은'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먼저 국회 예산안 심의를 통해 정부가 일방적으로 전액 삭감한 예산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산시가 내년도 동백전 예산을 예년 수준 정도로 확보하는 것이다. 인천시는 내년 지역화폐 예산을 국가 예산 확보와 무관하게 자체 예산으로 2000억 원을 편성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부산시는 내년도에 발행 한도 월 30만 원과 캐시백 요율 5% 규모를 예상한다. 부산시가 올해 동백전에 투입한 예산이 1600억 원 규모인데 아무래도 올 예산보다는 작을 것으로 보인다. 2030엑스포 유치 등을 고려하더라도 소상공인, 자영업자와 서민들을 생각한다면 동백전 예산은 최소 예년 수준은 유지되어야 한다.
지역화폐는 예산이 마중물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다. 일정 기간 국·시비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지역화폐가 광역과 기초가 중층구조를 이룬다면 예산에 대한 부담은 훨씬 줄어들 수 있다. 현재 부산엔 이바구페이(동구)와 오륙도페이(남구)가 발행 중인데 모두 구비로만 지역화폐 예산을 충당하고 있다. 동백전이 동구와 남구의 지역화폐와 연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눈여겨볼 대목은 나머지 14개 기초자치단체이다. 정부가 지역화폐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있고 동구 남구가 순수 자체 예산만으로 지역화폐를 운영하다 보니 재정이 열악한 부산의 구·군들이 내년도 지역화폐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지역화폐에 대한 가치와 효과를 본다면 기초단체에서도 조심스럽게 지역화폐 발행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백전은 국비 지원이 최소화되더라도 운영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진화되어야 한다. 광역과 기초단체 간의 중층구조를 비롯해 업종에 따른 캐시백 차등 지급, 특화 상품 개발과 소상공인 자체 할인정책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상인과 상인, 상인과 중소기업 간 동백전 결제가 가능하게 해 지역화폐가 일회성 소비가 아닌 지속적 순환 사용이 되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부가서비스 탑재, 각종 정책 수당 연계를 통한 시민 편의 제고로 동백전이 단순 결제 시스템에서 공공서비스 플랫폼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2-10-0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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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약자복지’ 사각지대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12일 부산의 한 빌라에서 모녀가 사망했다. 경찰에 의하면 양정동 모 빌라에서 40대 여성 A 씨와 10대 딸 B 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한다.
외부 침입 흔적이 없어 A 씨가 B 양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경찰은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들은 지난 7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고, 이웃에서는 경제적인 어려움일 것이라고 했으나 유서가 없어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이보다 앞선 8월 21일 경기 수원 다세대주택에서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은 신변을 비관하는 유서를 남겼는데 60대 어머니는 암을 앓았고, 40대 두 딸은 장애인이었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사업 실패로 빚만 남기고 병사했고, 이후 생계를 책임졌던 아들도 3년 전 지병으로 숨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었다. 수원은 이들의 주소지가 아니어서 사회복지 관계자들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 23일 생활고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원 세 모녀 사건’을 언급하며 ‘정치복지’가 아닌 ‘약자복지’를 강조하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약자복지 언급으로 정부에서는 ‘복지사각 개선 TF’팀을 구성했으나 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추석 연휴 기간에도 약자와의 동행을 계속했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약자복지란 어떤 것일까.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가 진정한 약자’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약자란 빈곤층 그리고 장애인 등이다. 현재(2021년 통계) 기초생활수급자는 235만 9672명이고, 장애인은 264만 4700명이다. 모든 장애인이 기초생활수급자는 아니겠지만 많은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은 맞물려 있다.
이들에게 제일 시급한 문제는 경제적 자립 지원과 일자리 창출이다. 그러나 현 제도는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일할 의욕을 잃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한다.
왜냐하면 일을 하여 수입이 발생하면 수급자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아무도 일을 안 하려고 한다. 지난 12일에 일어난 모녀 사망사건에서도 관할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는 “A 씨의 일일 소득과 전 배우자의 양육비 지급 등으로 의료·생계급여의 선정 기준을 초과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그러나 약자에는 빈곤이나 구직만 있는 게 아니라 교통약자 내지 보행약자도 있다. 대문 밖을 나서면 곳곳에 턱이 있어 앞을 가로막고 대중교통에서 지하철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서면역이나 연산역 등의 곡각지점에는 승강장과 지하철의 간격이 벌어져 있어 발빠짐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시각장애인도 빠지고 휠체어 사용 장애인은 휠체어의 바퀴가 빠지기도 하고 어린이나 유모차가 빠지기도 한다.
버스도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은 불편하기는 해도 저상버스가 있어 그런대로 견딜 만하지만,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는 장애인은 버스가 어디에 설지를 모르고 버스의 승강장이 너무 높아서 이용하기가 대략난감이다.
산업의 발전으로 2000년대부터 전동휠체어와 전동스쿠터가 보편화되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밀어주어야 하는 수동휠체어는 가정용이나 병원용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부산의 주요 관광지인 송도 용궁구름다리는 2020년에 완공했음에도 휠체어 사용 장애인은 접근조차 불가하고 송도 케이블카는 전동휠체어는 탑승조차 못 하게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해운대 블루라인파크의 해변열차도 2020년에 개통했음에도 전동휠체어는 탑승을 못 하게 해서 장애인들은 불만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약자복지의 뒤꼍에서는 복지 관련 예산이 줄줄이 삭감되어 앞뒤가 다르다는 원성도 높다. 그리고 윤 대통령은 “표를 얻기 위한 복지가 아니라 표가 안 되는 곳, 정말 어려운 분들의 곁에서 힘이 되는 복지 정책을 펴나가겠다”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고 좋은 복지라면 투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왜 표가 안 되는 곳이라고 할까. 약자는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라는 말인가.
이복남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
2022-09-2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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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낙동강 녹조, 대책은 뭔가
2022년 여름은 그야말로 무더웠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지만, 8월의 무더위를 낙동강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 때 4대강 조사평가단에서 답보 중이던 보 개방이 금강·영산강 수문 개방마저 미루고 있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낙동강 녹조는 그 위력의 절정을 보여 주었다. 시민사회와 연구자 그리고 환경부는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녹조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부산시민들은 다대포해수욕장과 삼락둔치, 원동의 논, 매일 마실 수밖에 없는 수돗물에서도 마이크로시스틴이라는 녹조 독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부산 수돗물에서도 녹조 독 검출
노인성 치매 유발 독성 충격적
환경 재난 넘어 사회적 재난 양상
녹조 막으려면 강 흐르게 해야
민관위원회 통해 대책 마련을
먼저 녹조라 불리는 광합성을 하는 세균 중 남세균의 마이크로시스틴은 이제 웬만한 분은 다 알게 된 녹조 독이 되어 버렸다. 이 남세균이 만들어 내는 독성물질인 시아노톡신에는 마이크로시스틴만 있는지 알았더니, 영주댐에서 우종으로 발견된 아나톡신, 그리고 이번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확인된 베타 메틸아미노 알라닌(BMAA)도 있다.
이 이외에도 실린드로스퍼몹신까지 확인되었는데, 모두 생식기 및 신경, 뇌 질환을 일으키는 독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이번에 다대포 및 삼락둔치의 저질토에서 확인된 BMAA는 알츠하이머병 등 노인성 치매를 유발하는 독성으로 알려져 충격을 준다. 대구 수돗물에 이어 초고도 정수처리를 하고 있다는 부산 수돗물에서도 마이크로시스틴이 검출돼 물탱크 및 관로를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유역물관리위원회에서는 취수원 다변화라는 명분으로 황강으로부터 50%의 상수를 가져올 것을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낙동강 본류가 아니라 지류를 상수원수로 사용하면 문제는 해결되는가. 이제 낙동강의 녹조는 5월, 10월, 2월 등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강에서 그리고 수돗물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더구나 부산 인근의 양산에서는 초록색 유화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강물로 벼농사뿐 아니라 엽채류와 과일 농사를 짓고 있다. 축산분뇨까지 더해진 이 지천은 코를 찌르는 악취뿐 아니라 녹조 독이 든 쌀과 무, 상추 그리고 딸기를 부산시민들에게 공급해 줄 것이다. 농업용수에까지 비상이 걸린 것이다. 취·양수 시설 개선을 하지 않고 넘실대는 보의 강물로 농사를 짓겠다며 버티던 낙동강 상류의 농민들이 이것을 보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을까.
고농도 녹조가 유입됨에 따라 농산물에 축적되면서 농민의 생계뿐 아니라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20여 일간 국민 체감 녹조 조사단에서 확인한 최악의 지점이 양산의 양·배수장에서 확인된 마이크로시스틴 16,952ppb는 농산물의 전국 유통을 지금 당장 중단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낙동강 녹조 문제는 환경재난을 넘어서 사회적 재난이 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수문개방을 여전히 주저하면서 녹조 독성 검출 방법에 대해서 논란을 이어 가고 있으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양심적인 학자를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4대강의 녹조는 강에 설치된 16개의 보 수문을 열어 물을 흐르게 할 경우 녹조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2017~2021년 4대강 수문개방 모니터링을 통하여 확인된 사실이다. 그런데도 정권이 바뀌자 이를 없었던 일처럼 숨기고 수문개방 계획을 외면하고 있다.
우선 정부는 녹조 독소가 검출된 농수산물에 대하여 전량 수매하여 이를 폐기 조치하여야 한다. 농경지 자체에 녹조 독이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며 농민의 피해가 발생할 시에는 이에 대한 보상대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낙동강 녹조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는 강을 흐르게 하여야 한다. 올 하반기에는 합천보 인근의 취·양수 시설을 신속히 개선하여 수문개방의 폭을 확대해 나가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녹조 문제 해결을 위한 민관위원회를 구성하여 인근 농민과 민간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총리실 산하의 민관위원회 구성도 주요한 방안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창궐한 녹조를 눈에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수문을 개방하고 이것이 다대포해수욕장 및 거제도 앞바다까지 녹조 알갱이가 떠다니지 않도록 하는 방안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2022-09-0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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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부산오페라하우스,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부산의 랜드마크이자 문화관광 거점시설로 건립되는 부산오페라하우스. 2008년 롯데그룹과의 건립 기부 약정서 체결 이후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부산시 수장이 네 차례나 바뀌었고, 그때마다 오페라하우스 건립에 대한 찬반 여론 또한 들끓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오페라하우스 건립공사가 현재 36.6%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으며, 오는 2024년 3월 준공, 2024년 10월쯤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총건립비는 3050억 원(롯데그룹 1000억 원, 시비 1550억 원, BPA 500억 원), 운영비는 최소 연 150억 원에 이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제 원자잿값의 인상으로 추가 건립비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더욱이 부산시의 지원금 규모가 90억 원에 불과한 까닭에, 부족분 60억 원의 운영비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하는 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와중에, 오페라하우스의 운영 주체 문제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즉 부산시가 문화체육관광국 내에 ‘문화시설개관준비과’(3개 팀 13명)를 신설하고, 오페라하우스의 시 사업소 직영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계는 즉각 반발했다. 부산시가 예산·인력 확보 등의 과제도 미처 풀지 못한 상태에서 극장 운영 경험이 없는 공무원 조직에 오페라하우스의 개관과 운영을 맡기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전문성·독립성이 요구되는 문화예술에 더더욱 걸맞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오늘날 공공 공연장의 운영체계는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직접관리방식과 혼합관리방식, 그리고 간접관리방식이 그것이다(백선혜, 서울시 공공 공연장의 운영 실태와 개선방안, 2011).
첫째, 직접관리방식은 부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직영 형태를 말한다. 이것은 일반행정조직(국·과, 사업소 등)에 의해서 운영되고 행정관리 책임자와 직원도 대부분 공무원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안정적인 운영 지원이 가능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예술경영적 관점에서 전문성이 부족할 뿐 아니라 낮은 기획력, 잦은 순환보직으로 장기적·지속적인 경영노하우의 축적이 어렵다. 무엇보다 문화예술의 본질인 창의력·창발성이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이다.
둘째, 혼합관리방식은 민영화에 앞서 행정조직이 행하는 방식으로 책임운영기관 제도가 대표적이다. 소속 직원들이 모두 공무원 신분이고, 최고책임자만 일정 기간(보통 3년 임기) 동안 계약에 의해서 해당 기관의 책임을 맡는 형태다. 즉 이것은 직접관리방식에서 간접관리방식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볼 수 있다.
셋째, 부산문화회관과 같이 비영리 독립법인을 통한 간접관리방식은 공연 전문인력을 확보함으로써 책임경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곧 행정조직이 문화서비스를 독점하기보다 자금·인력·기술 등에서 행정조직과 민간부문의 상호 협력을 통해 더 큰 효율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더욱이 개인 및 기업의 후원금을 조성할 수 있으며, 문화예술의 특수성을 살린 사업에 대한 예산집행의 탄력적 운영이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전 세계의 보편화된 공공 공연장 관리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문화예술의 전문성·독립성·책임성·창의성을 획득할 수 있지만, 대형 문화시설의 운영·관리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과 재정확보가 쉽지 않다는 단점도 있다.
요컨대 공공 공연장의 운영체계가 당초 직접관리방식에서 혼합관리방식으로, 혼합관리방식에서 간접관리방식으로 그 흐름이 변화되었고, 간접관리방식이 오늘날 가장 이상적인 운영체계로 정착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미래 문화 비전을 위한 부산오페라하우스가 되려면, 운영 효율화는 물론 전문인력 확보, 전문 기획·연출가에 의한 콘텐츠 프로그램 개발 등 중장기 계획 설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의 전문성·독립성·창의성을 드높일 수 있는 운영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오페라가 대규모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연극과 무용이 포괄되는 종합예술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우스’가 아니라, ‘오페라’를 위한 부산오페라하우스가 되기를 기대한다.
2022-08-24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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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코로나19 재유행,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규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 1만 명 이하로 유지되더니, 8월 들어서는 1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그렇지만 질병의 중증도가 아주 높아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정부는 과거처럼 강제적인 영업 제한과 같은 조치를 시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영업자를 비롯한 여러 경제 주체들이 겪는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층의 연령대에서는 질병이 중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휴가철을 맞이한 젊은이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기도 쉽지 않고, 2년 반 이상 끌어온 팬데믹으로 해서 국민 모두가 더 많은 인내심을 발휘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 방역 당국은 환자 발생 숫자의 증가 외에도 몇 가지 점에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60세 이상의 고령층 환자가 발생하는 숫자와 비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고, 요양병원과 같은 감염 취약 시설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증가 추세로 볼 때 8월 중순 이후에 감염자가 20만 명 이상 발생하리라는 것이 보건 당국의 예측이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형 사회적 거리 두기를 독려하고 있다. 이런 조치는 현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로 보인다. 다만, 그 조치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국민들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사적 모임을 최소화하고, 직장이나 다수가 모이는 시설에서 밀집도를 완화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바로 성숙한 시민의식이 발휘되어야 할 시점이다.
정부에서는 또 4차 예방접종 대상자를 60세 이상에서 50세 이상으로 낮추는 등 대상자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기대만큼 4차 접종 완료율이 높지 않다고 한다. 국민 중에서 백신을 맞기를 꺼리는 사람, 잘못된 정보로 인해서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4차 접종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여러 연구에서 증명되었다. 3차 접종 후 수개월이 지난 후에 4차 접종을 받은 사람들은 감염 후, 중증이나 사망에 이를 확률이 50% 이상 줄어든다. 특히 감염 확률은 크게 줄이지 못한다고 하지만 감염 자체도 25% 정도 줄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질병관리청의 권고에 따라 50세 이상 연령층, 18세 이상 면역저하자 및 기저질환자, 감염 취약 시설에 입원하고 있거나 근무하는 사람들은 4차 접종을 받는 것이 좋다. 무슨 백신을 맞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자기가 맞을 수 있는 백신이 가장 좋은 백신이다.
감염병이 지역사회에 퍼지게 되면 그것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지역사회나 국가, 혹은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된다. 그래서 모든 나라는 전 세계의 환자 발생을 줄이고자 하는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코로나19가 발생한 초기에는 변이 바이러스가 주로 환자 발생이 많은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 백신이 보급되면서 오미크론은 백신 접종률이 낮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등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앞으로도 어떤 변이가 발생한다면 그 기원은 백신 접종이 낮은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백신 접종률을 보면, 적어도 한 차례 이상 백신을 맞은 국민의 비율이 고소득 국가에서는 70% 이상인 반면, 저소득 국가에서는 20%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1년 전에 이미 세계보건기구는 가난한 나라에서 1차 접종을 받은 인구가 1.5%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에서 세 번째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사치라면서 백신 불평등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 바가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예방 효과의 증가 폭은 백신을 1회 접종했을 때 가장 크다. 그 뒤에 반복 접종할수록 총 예방 효과는 높아지지만, 증가하는 정도는 점점 작아진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가장 크게 코로나19를 방어할 수 있는 1회 접종의 기회를 갈구하고 있다. 우리는 주어진 4차 접종의 기회를 취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2022-08-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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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일 관계, 포용적 여론이 긴요
지난 5년간 멈춰 서 있던 한·일 관계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미·중 경쟁, 북핵 문제 등 요동치고 있는 동북아 정세를 고려하면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 관계를 마냥 방치해 둘 수는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달라진 것과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새 정부 대일 관계 회복 의지 강해
아베 전 총리 사망 큰 변수 못 돼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가 최대 이슈
국내 여야 대립 양국 협상 걸림돌
정쟁보다 포용적 국민 여론이 중요
먼저 달라진 것은 윤석열 새 정부의 대일 관계 회복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공히 국가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양국이 엄중한 안보 상황에서 갈등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둘째, 윤 정부의 이러한 의지 표현은 그간 한국과는 대화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던 일본 정부 내 분위기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국가 간 합의인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실질적으로 파기했고,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해당 일본 기업은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삼권분립이라는 명분으로 ‘방치’해 온 점을 들어 대화를 거부해 왔다. 최근 박진 외교장관이 도쿄를 방문해 2017년 이후 약 55개월 만에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진 것은 변화하고 있는 일본의 분위기를 보여 준다. 셋째, 현대 일본 정치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급서이다. 아베 전 총리는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그간 금기시되어 왔던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는 등 ‘전후 일본 체제로부터의 탈피’라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의 서거로 기시다 총리의 운신의 폭이 넓어져 양국 관계에 변화를 보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자민당 내의 파벌 관계, 그리고 아베 전 총리가 일본 정계와 사회에 남긴 보수적 유산을 고려하면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첫째, 한·일 관계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이다. 그간 한·일은 “이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법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는데 입장을 같이했었지만, 한국 대법원 판결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일본은 국제법과 한국 내 법적 판단 간의 불일치는 원인 제공자인 한국이 먼저 해결책을 가져와야 한다고 초지일관 요구하고 있다. 둘째, 한국과 일본 국내 여론은 여전히 서로에게 싸늘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불매 운동이 한창일 때와 비교해 일본에 대한 여론이 일부 호전되었지만, 일본인들의 감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의 정권이 바뀌었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본도 이제 감정을 그만 풀어라”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셋째, 한국 정계의 여야 간 극한 대립 상황이다. 이러한 적대적 상황은 상대편의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공격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일본과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면 그 폭발력은 대단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최근 한·일 간에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현재까지 한국에서 제시된 강제징용 문제 해법 중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 안은 우리가 먼저 배상을 하고 일본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대위변제 방식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결 방식에 대한 피해자들의 수용 여부이다. 또한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일방적으로 폐기당한 기억이 있는 일본이 과연 어떤 모습과 조건으로 이를 수용할지도 큰 관건이다.
화려한 외교적 퍼포먼스보다는 피해자들과의 진정성 있는 깊은 대화 과정을 이어 가야 하고, 서로 간의 입장을 고집하기보다는 양국 정부의 대승적 결단이 중요하다. 국민 감정을 자극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는 정당하지 않다. 무엇보다 국민 여론이 좀 더 포용적이어야 한다. 중심 잡힌 포용적 국민 여론은 정쟁의 여지를 없앤다.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도 있었지만, 최악의 한·일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부산과 일본과의 교류도 멈추어 섰다. 다행히 지난 2년간 중단되었던 ‘부산-후쿠오카포럼’이 11월 초에 부산에서 다시 개최된다. 한·일 관계에 있어 긴요한 포용적 국민 여론이 좀 더 확장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2022-07-2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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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엑스포 유치 활동, 지금 어디쯤 왔나
2030 월드엑스포 유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최근 사우디아라비아가 앞서고 있어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든가, 방탄소년단(BTS)이 홍보대사로 위촉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는 등 비관적 의견과 낙관적 의견이 교차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주에 유치위원회가 개편된 상황에서 마치 이미 판세가 결정된 것인 양 부산이 유치에 성공할 가능성이 몇 퍼센트냐고 직설적으로 문의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필자는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결과는 앞으로 남은 기간에 달려 있어 현재 확률은 0%~100% 사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궁금증에 응답하고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유치 활동 과정과 특징에 대해 몇 가지 설명하고자 한다.
부산엑스포 가능성 0~100%
국가별 다양한 맞춤식 전략 필요
유치 통합 컨트롤타워 역할 중요
시민도 주인의식 갖고 앞장서야
출발 늦었지만 끝까지 최선 다해야
먼저 우리가 월드엑스포와 자주 비교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과는 유치 교섭 대상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엑스포의 경우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나 국제축구연맹(FIFA) 위원과 같은 개인이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인 170개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이 교섭 대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각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은 다양하며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도 다수여서 이러한 제반 변수에 우리의 의사를 투입하여 그들이 부산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다.
따라서 국가별로 다양한 맞춤식 전략이 필요한데,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각 국가의 목표는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의 극대화’이므로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협상 기간이 1년도 더 남아 있는데 외국 관료 몇 명이 경쟁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했다고 이것을 최종적으로 지지한다고 간주할 필요는 없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더라도 만일 우리나라가 지금 여러 나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이라면 후보들을 비교해 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최종 결정을 내려 협상의 문을 닫아 버리겠는가.
우리 정부는 지난 8일 민간유치위원회와 정부유치위원회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컨트롤타워를 출범시켰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출범은 다소 늦었지만 효과적인 유치 교섭 활동을 위해서는 그동안 절실하게 필요한 조치였다. 우리는 많은 해외공관을 보유하고 있고, 글로벌 기업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BTS와 같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그룹이 홍보활동을 해 줄 수 있는 등 다양한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능한 전략가들로 구성된 컨트롤타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상국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는 워낙 다양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집중적으로 다층적·복합적인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중복이나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정해 주는 통합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지막으로 부산시민이 엑스포 유치 가능성을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부산은 유치 준비 과정이나 유치계획서 작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앞으로 남은 3번의 프레젠테이션(PT)과 BIE 실사 과정에서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유치교섭은 중앙정부가 해 주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국내 홍보에만 머물면 엑스포 유치 가능성은 급격히 낮아진다. PT에 포함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콘텐츠를 개발하고 유치 교섭 활동에 활용할 수 있는 소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동시에 실사단에게는 엑스포 유치 시민로서의 능력과 자신감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엑스포의 주인공이 될 당사자가 강한 결기를 가지고 절실한 마음으로 유치 활동의 엔진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는 경쟁 도시보다 다소 늦게 출발했지만 경쟁력 있는 많은 자산이 있고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출범시켰으며, 열정적인 부산시민의 지원을 받고 있다.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마지막 한 나라도 포기할 수 없고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시기에 돌입했다. 변수는 많고 불확실성이 높은 험난한 과정이지만,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미래를 향한 여정이다.
2022-07-13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