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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하는 ‘아보하’ 소망, 추억의 흑백사진에 담다 [별별부산] ⑨
다사다난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퉁치고 넘기기엔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고와 난리가 났다.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많았다. ‘다이내믹 코리아’란 말도 2024년 대한민국 상황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2024년 12월 대통령에 의해 난데없이 불거진 비상계엄은 국민의 일상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더 테러 라이브’나 ‘서울의 봄’ 같은 영화를 보는 듯했던 상황은 앞선 그의 허물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2024년 마지막 일요일 발생한 여객기 참사는 대한민국을 깊은 슬픔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희생자들과 남은 가족에게 국민 모두가 마음 깊이 위로와 애도를 전하고 있다.
정국 혼란과 사회적 불안감이 이어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해가 바뀌었다. 밤새 일한 뒤 쉬지 못하고 다시 일터로 나선 것 같은 피곤함으로 맞는 새해다. 예년처럼 희망찬 새해를 맞자고 외치자니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기분까지 든다.
그래도 차분히 한 해를 되돌아보면 한 가지 빼놓으면 안 될 축복의 기억이 또렷하다. 바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다. 10월의 깜짝 발표와 12월의 비상한 시국 속에서 진행된 시상식의 아이러니함이란. 어쨌든 예상치 못한(사실 경사와 흉사는 예고 없이 닥친다) 낭보에 ‘한강 보유국’이 된 대한민국은 잠시나마 문학 르네상스에 흠뻑 젖어 보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이후 진행된 전국 각지의 문학 행사에선 ‘한강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몇몇 대형 업체들이 온기를 거의 다 가져가긴 했지만, 얼어붙은 출판계에도 강한 훈풍이 몰아쳤다. 크리에이터가 희망 직업 1위라는 유튜브 만능 시대,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진풍경이 펼쳐진 종이 인쇄소 르포 기사를 접하는 건 상상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개인 SNS도 온통 책 사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집안 곳곳에 묵혀 뒀던 한강 작품이 소환되거나, 동네 책방에는 ‘○일 입고 예정’ 안내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온 국민이 문학평론가인 나라로 불려도 손색없을 것 같았다. 이런 현상을 불편하게 받아들인 몇몇은 ‘과시적 독서’나 ‘패션 독서’라 질타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록 한때의 허영일지라도 다시 기대하기 힘든 문학 열풍이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라는 문단이나 출판계의 간절함에도 크게 마음이 가닿았다.
이른바 책을 읽는 것이 멋있다는 ‘텍스트힙’의 절정기에 보수동책방골목을 찾았다. 가장 고전적인 활자 매체인 책과 가장 보편적인 SNS 수단인 사진이 한데 어울리는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오후, 책방골목은 의외로 인적이 드물었다. 인근 국제시장이나 광복로, 자갈치 일대가 그나마 연말과 성탄절을 즐기려는 사람들도 제법 북적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1980년대까지 70여 곳이 성업하던 보수동책방골목은 현재 20여 곳으로 쪼그라들어 명맥을 이어 간다. 전국 유일 헌책방 거리라거나 부산시 미래유산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해마다 책방 수가 줄고 있다. 대청사거리에서 이어지는 책방골목 초입엔 공사장 가림막이 방문객을 맞았다. 서점 여러 곳을 매입해 오피스텔을 짓던 곳이다. 지금은 부동산 경기 악화 때문인지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돼 있다. ‘책방골목사진관’은 가림막이 끝나는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외부에 전시된 사진 작품을 구경하고 있는 젊은 커플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헌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이 보였다. 책장 아래엔 여느 헌책방처럼 바닥부터 세로로 높다랗게 쌓아 올린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관의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 주는 장면이다.
사진관은 장호림(40) 대표가 2018년 문을 열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음반회사 일과 사진관 운영을 하던 장 대표가 어릴 적 오가던 고향 마을로 돌아와 시작한 곳이다. 사진관은 개업하자마자 방송에 등장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가수 유희열과 유시민 작가 등 ‘잡학박사’들이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지식을 나누는 인기 프로였다. 헌책방을 배경으로 찍은 흑백사진을 출력해 소장할 수 있는 특별한 사진관으로 소문나면서 전국에서 손님이 몰려들었다.
책방골목사진관은 헌책방과 사진관을 겸하고 있다. 당연히 장 대표도 책방골목번영회 회원이다. 장 대표가 처음 헌책방을 인수할 때는 판매용 책까지 몽땅 사들일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일반적인 사진 스튜디오를 열 구상이었다. 그런데 책방골목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한 옛 주인이 책방을 운영할 생각이 없다면 팔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렇게 책방과 사진관을 겸업하게 됐지만 다른 가게처럼 적극적으로 책 판매 영업을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기껏 하루 2~3권 거래하는 게 다반사인 다른 가게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란다.
사진관은 예약제로 운영한다. 홈페이지(사진관 이름과 같다)에서 예약이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전화 문자를 남기면 예약이 진행된다. 매주 일요일과 책방골목 전체 휴무일인 매달 1, 3주 화요일은 문을 닫는다. 예약 없이 방문했다가 헛걸음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고 하니 명심하자.
종이 액자에 넣은 4×6인치 크기 사진 한 장 가격은 5000원. 사진 파일까지 포함된 가격이다. 1인당 최소 두 장은 구매해야 한다. 사진관 안에는 책장과 책을 배경으로, 혹은 책을 머리 위에 얹거나 펼쳐 드는 등 다양한 포즈의 흑백사진 샘플이 놓여 있다. 장 대표 자녀 셋과 아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애도 속에서 출발하는 2025년. 희망에 앞서 무탈과 안녕을 기원하게 된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새해 아침, 부산의 역사가 숨 쉬는 곳에서 가족이나 연인 등 소중한 이들과 함께 차분히 흑백사진 추억을 남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다.
2025-01-0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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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 타고도 만날 수 있다 '푸른 초원 위 양 떼 풍경' [별별부산] ⑧
드넓게 펼쳐진 풀밭 위로 수많은 양이 떼를 지어 거닐고 있다. 티 없이 맑은 하늘엔 군데군데 하얀 구름이 떠 있고, 초록의 대지엔 마치 흰색 물감으로 점을 찍은 것 같은 양 무리가 고개를 숙인 채 풀을 탐하고 있다. 어릴 적 기억 속 멋진 풍경 사진이 담긴 달력에서 본 듯한 장면이다. 최근엔 시시각각 변신하는 컴퓨터 잠금화면에서 만난 듯도 하다. ‘그림 같은’ 이 장면은 남반구인 호주나 뉴질랜드를 여행한 이라면 한 번쯤 눈앞에서 마주했을 경험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먼 이국 얘기로만 들리는 ‘푸른 들판 위 양 떼 풍경’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부산에서 다녀오기엔 제법 부담되는 거리이긴 하지만, 1988년 문을 연 대관령양떼목장이 대표적이다. 그곳에서는 약 1.3km 길이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양 떼를 관람하고 먹이 주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성인 9000원, 소아 7000원(36개월 미만 무료)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강원도뿐만 아니다. 경기도 가평과 양평군, 전북 고창과 임실군, 전남 화순군, 경북 칠곡군 등 전국 곳곳에 유료로 운영되는 양 떼 목장이 있다. 어린 자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기꺼이 달려갈 부모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울산과 경남 남해군에도 양을 만날 수 있는 야외 목장이 있다.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만큼 이미 다녀온 시민이 꽤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부산에서는?
부산에서 풀밭 위를 거니는 양 떼를 만나는 건 진정 꿈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아마도 자녀를 둔 일부 부산 시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현장을 다녀왔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겸손하게 서 있는 정문을 통과했다. 장소 이름이 커다랗게 내걸린 멋진 정문을 생각했는데 약간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입구의 안전지킴이 초소처럼 생긴 조그만 ‘안내소’에 고작 관람 전 미리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을 따름이었다. 62만 8275㎡(약 19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부지 면적을 생각하면 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안내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박한 정문을 지나 몇 걸음 걷다 보니 키다리 느티나무 삼거리에 비로소 ‘해운대수목원’이라는 깔끔한 이름표가 보였다. 수목원에 양 떼 목장이? 의아함을 품고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떼니 곧바로 ‘미니 동물원 200m’라는 막대 이정표가 나왔다. 의심을 거두라는 듯.
겨울나기를 준비하느라 이파리를 들어내기 바쁜 나무들을 감상하며 얼마쯤 걸어가니 축사로 보이는 건물 뒤로 삼삼오오 찍혀 있는 하얀 점들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지그재그 모양의 오르막길로 조성한 월가든을 휘휘 돌아 장미원 앞에 서니 비로소 아래로 펼쳐진 초원의 하얀 점들이 제대로 보였다. 분명 양이었다. 멀리 수목원 경계 밖 산업단지의 잿빛 건물들과 한 프레임에 잡히는 양 떼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어쨌든 ‘부산에서 만나는 초원 위 양 떼’는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이었다.
부산시가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하던 해운대구 석대동 77번지 일원에 조성한 해운대수목원. 1단계 공사를 끝내고 2021년 임시 개방해 무료 운영 중이다. 현재는 내년 말까지 진행될 2단계 공사 완공에 맞춰 새로 운영할 프로그램 개발과 공간 재배치를 준비하고 있다.
수목원 측은 이에 맞춰 미니 동물원을 내년 6월 수목원 중앙의 장미원 뒤쪽으로 옮겨 새로 조성할 방침이다. 이곳에는 현재 어린이놀이원과 가족마당이 있다. 여기에 미니 동물원을 더해 자녀 동반 가족 방문객이나 어린이집, 유치원 단체 방문객이 다양한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동물원이라고 하지만, 현재 만날 수 있는 동물은 암컷 양 10마리가 전부다. 이 중 3~4마리가 임신 중이다. 내년 재개장할 동물원에도 새로 태어날 새끼를 포함해 양 13~14마리만 입주하게 된다. 가족 방문객의 발길을 이끌었던 타조와 당나귀는 재배치 계획에 따라 지난 10월 다른 지역 농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를 모르고 방문했다가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기장군에서 온 남수빈(34) 씨도 그런 경우다. 최근 출산한 아내와 둘째를 두고 21개월짜리 첫째만 데리고 왔다는 남 씨는 “수목원에 와서야 타조, 당나귀가 떠나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 씨는 “평화롭게 풀밭을 거니는 양 떼는 볼 수 있어 그나마 오길 잘했다”며 안도했다.
실제로 수목원 측은 자연 방사 방식으로 양을 키우고 있다. 양들은 아침이면 축사를 벗어나 수목원 구석구석을 누비며 배를 채우다 해지기 전 무리 지어 축사로 돌아온다. 운이 좋으면 양 떼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먹이를 주는 건 금물이지만, 함께 사진을 찍는 행운까지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에는 자연 방사가 힘들 수도 있다. 매주 월요일이던 수목원 휴무일이 화요일로 변경됐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절기인 내년 2월까지는 오후 5시까지 개방된다. 대중교통 이용이 여전히 불편하다는 점은 아쉽다. 현재 105, 106, 107번 3개 노선 시내버스만 수목원 정문을 경유한다.
해운대수목원 사육 담당 강엽 주무관은 “수목원이라는 정체성을 생각하면 많은 동물을 사육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 아쉽다”면서도 “내년 재개장 때에는 부산 아이들이 숲속에서 양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에는 사상구에서 운영하는 사상근린공원 미니 동물원에도 양 4마리가 있다. 토끼, 염소 등도 있는데, 자연 방사는 하지 않고 우리 안에서만 키우고 있다. 부산시가 운영하는 화명수목원 동물 학습장에서는 거위, 닭, 토끼, 칠면조, 염소를 만날 수 있다.
2024-12-05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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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하듯 쉬어 가세요”…광리단길 24시간 밝히는 ‘위로 책방’ [별별부산] ⑦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광안리해수욕장 일대는 언제나 왁자지껄하다. 도시철도 금련산역 인근에 있는 카페 거리인 일명 ‘광리단길’은 부산 사람보다 관광객 사이에서 더 유명하다. SNS에서 입소문을 탄 식당과 카페는 늘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늦은 밤까지도 젊음의 활기가 넘치는 이 거리에는 혼자 조용히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독립 서점도 있다. ‘밤산책방’은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해 만든 24시간 무인 서점이다.
독특하게 꾸민 입구 덕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밤산책방은 “낮, 밤 언제든 시간 제약 없이 쉬어 가는 위로 서점”을 표방한다.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함께 공감하고 함께 행복해졌으면 해서, 서툴지만 열심인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어서 위로가 되길 바라는 책을 판다”는 안내 문구가 방문객을 반긴다. 녹색 바탕에 하얀색 글자가 적힌 포스터가 학창 시절 칠판을 연상시킨다. 따뜻한 백열등 아래 놓인 소박한 화분들조차 제법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점 주인이 방문객들에게 쓴 편지가 보인다. 자신처럼 방황하고 좌절하는 이들이 일상을 환기하고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이쯤 되니 주인의 사연이 알고 싶어진다. 궁금증을 품은 채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힐링을 위한 공간답다. 흰색 벽면을 스크린 삼아 반복 재생되는 잔잔한 파도 영상과 소리는 늦은 밤 광안리 해변을 찾은 듯한 안도감을 준다. 은은한 조명 아래 곳곳에 배치된 원목 가구가 감성을 자극한다.
빈티지 인테리어의 정점은 책이다. 표지가 잘 보이도록 세워진 채 아기자기하게 진열된 책들이 잠들어 있던 독서 욕구를 건드린다. 독립 서점답게 제목들이 톡톡 튄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니 마음만 있냐?>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등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주인이 직접 책을 읽고 쓴 소개글 덕에 책의 성격과 내용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 상주하고 있는 직원이 없으니 한결 편하고 여유롭게 책을 구경하고 내용을 일부 읽어볼 수도 있다. 마음에 드는 책은 무인 계산대를 통해 값을 지불하고 가져가면 된다. 짐이 많은 여행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택배 서비스도 마련했다. 책방 이름처럼 밤 산책을 나왔다 발에 상처가 난 손님을 위한 일회용 밴드까지 구비돼 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의 상처까지 보듬겠다는 듯이.
이런 배려심 덕일까. 지하에 있는 데다 운영을 시작한 지 2년을 막 넘긴 소규모 서점이지만 방문객이 꽤 많다. 기자가 찾았던 평일 오후에도 7~8명의 손님들이 서점에 있었다. 블로그와 SNS에도 방문기가 넘쳐 난다. 그런데 정작 사장은 고민이 늘었다. 책방이 당초 운영 취지와는 다르게 알려지고 있어서다.
밤산책방은 원래 김소라(35) 대표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김 대표는 오늘날 청년 세대가 흔히 겪는 좌절을 맛봤다. 스무 살에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정규직 전환만 바라보며 10년을 바쳤다. 그러나 회사는 기대를 저버렸고, 미래도 막막해졌다. 고민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부산의 일자리 부족은 각오한 것보다 심각했다. 1년을 방황하다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일했는데, 이때 직장 내 괴롭힘을 심하게 당했다. 어느 날 퇴근 길에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고, 공황 장애까지 얻었다. 집에서도 부모의 잔소리 때문에 편히 쉴 수 없었다.
김 대표에겐 혼자서 마음 놓고 쉴 공간이 절실했다. 그렇게 도망치다시피 마련한 곳이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월세 30만 원짜리 지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김 대표는 책도 보고 휴식을 취하며 아픈 마음을 서서히 치유했다. 여유를 되찾으니 자신처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끔찍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 공간을 공유하고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울 수도 있고, 밤에 산책하듯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자신에게 위로가 됐던 책이 함께하면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직장일과 병행하면서 지하 공간 일부를 책방으로 꾸미고 개방한 것이 24시간 무인 서점 밤산책방의 시작이었다.
김 대표의 진심은 통했다. 방문객도 매출도 조금씩 늘었다. 어느 날은 “먹고 살기 지쳐서 도망치듯이 부산에 왔다가 우연히 (이곳을)발견했는데, 마음 놓고 울고 간다”는 내용의 편지를 누군가 남기고 갔다. 눈물이 핑 돈 김 대표는 열정적으로 이곳을 단장하고 확장해 지금의 책방을 만들었다.
고비도 많았다. 무인으로 운영하는 점을 악용하는 이기적인 진상 고객이나 절도범도 문제였지만, 장마철 빗물에 침수된 책방에서 잠도 못 자고 물을 퍼낼 때가 가장 힘든 순간 중 하나였다. 처음엔 책방 운영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는 김 대표의 눈물 섞인 토로를 들은 다음 날 조용히 배수 펌프를 가져다줬다.
올해는 책방이 잘못 알려지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김 대표를 괴롭히고 있다. 일부 무성의한 블로거들이 이곳을 실내 데이트 공간이나 카페로 소개하고, 잘못된 정보로 인한 불만이 김 대표에게 향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소외받는 이들을 위한 공간이 데이트 명소처럼 변하는 것도, 끊이지 않는 민폐 손님들도 고민이다.
‘책방이 나를 괴롭게 만들면 언제든 폐점할 것’이라는 김 대표의 각오가 실천으로 옮겨지는 걸 막은 건 결국 사람이었다. 책방 한쪽에는 손님들이 직접 수기로 남긴 방명록이 있다. 여기 적힌 따뜻한 문구들이 밤산책방의 폐점을 막았다.
김 대표는 “손님들로부터 격려의 편지와 SNS 메시지를 정말 많이 받는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뜻깊다”면서 “저도 책방 덕분에 공황 장애가 완전히 나았고, 사회 생활 때문에 깎여 나갔던 자존감도 회복했다”고 밝혔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마침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전국에 독서 열풍이 몰아치고 있기도 하다. 밤산책방에서 이 건강한 열풍에 동참해 보는 건 어떨까. 허기진 마음을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면 더욱 좋으리라.
2024-10-17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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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지 이름난 대학 캠퍼스, '결혼 전당'으로 화려한 변신 [별별부산] ⑥
부산영상위원회가 발행하던 계간 소식지 ‘영화부산’의 2023년 여름호 표지. 전체 지면의 절반을 넘게 차지한 사진에는 웅장한 석조 건물 앞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생생한 모습이 담겨 있다. 건물 아래 사다리꼴로 넓게 펼쳐진 계단 중간에 여러 명이 서 있고, 그 아래 평지에는 4대의 지프 차량 주변으로 무장군인과 촬영 스태프로 보이는 이들이 모여 있다. 지난해 개봉한 넷플릭스 드라마 ‘택배기사’ 촬영 현장이다.
지난 한 해 부산영상위원회 지원으로 부산에서 촬영한 영화와 영상물은 모두 118편에 이른다. 1년에 4차례 발행되던 영화부산(올해부터는 연 1회 단행본으로 발행 예정) 표지에는 그중 한 작품의 제작 현장 모습이 담겼는데, 지난해 특정 건물이 표지에 등장한 사례는 여름호의 이 석조 건물이 유일하다.
주인공은 부산 금정구 남산동에 위치한 부산외국어대학교 만오기념관. 학교법인 성지학원 설립자인 만오 정태성(1899~1986) 박사의 호를 이름으로 사용한 '센터 건물'로, 중앙에 솟아오른 돔형 지붕과 전면부의 6개 기둥만으로도 눈길을 붙잡기 충분하다.
남구 우암동 시대를 뒤로 하고 2014년 남산동에 문을 연 부산외대는 건물을 포함한 캠퍼스 전체가 현대적이고 이국적이어서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택배기사를 포함해 조인성 주연의 영화 더 킹(2017), 보안관(2017), 남산의 부장들(2020),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가 이 학교에서 촬영됐다.
'센터 건물'답게 부산외대 캠퍼스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아래로 탁 트인 남산동 일대를 내려다보는 만오기념관은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촬영 포인트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시대 신전을 연상케 하는 만오기념관은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도 남다른 위용을 자랑한다.
정면의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원형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홀이 나타난다. 밝은 베이지 톤의 대리석으로 마감된 바닥과 벽면 위로 원통형의 천장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다. 만오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중앙홀이다. 만오기념홀로도 불리는 이곳에서는 평소 소규모 공연과 전시회가 열리거나 박사 학위 수여식 등 각종 학교 행사도 진행된다.
설립자의 건학 정신을 계승한 학문의 전당이자 부산을 대표하는 영화 촬영지로도 이름난 이곳이 올해 들어 ‘결혼의 전당’이라는 새 임무를 맡았다.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 결혼식 장소로 제공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지역 사회에 기여할 방안을 찾아봅시다.” 부산외대의 결혼식장 무료 제공 서비스는 남산동 시대 10년을 앞둔 2022년 말 취임한 장순흥 총장의 이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이후 담당 부서인 대외협력팀이 ‘코로나 암흑기를 거치며 비용 부담이 적은 소규모 예식장이 하나둘 문을 닫고 공공기관 무료 예식장마저 이용률이 뚝 떨어져 제 기능을 못 한다’는 언론 보도를 눈여겨보면서 밑그림 그리기가 시작됐다.
대외협력팀의 보고를 받은 학교 본부는 곧바로 실무 작업에 착수, 만오기념홀을 결혼식 진행 장소로 낙점하고 결혼식 후 피로연 장소로 학생식당을 섭외하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결혼식은 학교 수업이 없는 주말과 휴일을 활용해 하루 최대 2회씩 여유 있게 운영하기로 했다. 또 신랑 신부와 혼주는 물론이고 하객들에게도 주차비를 받지 않기로 했다.
장소를 제공한다고 끝난 건 아니었다. 결혼식 3종 세트로 불리는 스드메(스튜디오 촬영+드레스 대여+메이크업·헤어) 등 천정부지로 뛴 부대 비용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역 사회 기여’라는 취지를 살리기 힘들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또 뛰었다. 학교의 취지에 공감하는 지역 결혼대행업체와 손을 잡고 시중가의 절반 정도에 부대 비용을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드디어 지난 3월 16일 이곳에서 첫 결혼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한-필리핀 다문화 부부로, 가정을 꾸리고도 한동안 예식을 올리지 못하다 부산외대와 인연이 닿은 것이다. 학교는 1호 부부에게 특별히 ‘스드메’를 포함한 풀 서비스까지 무료로 제공했다. 영상콘텐츠융합학과와 항공서비스학과 학생들의 재능 기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권오경 부총장은 직접 주례로 나서 새로 출발하는 부부의 행복을 기원했다.
첫 결혼식이 언론 보도로 알려진 후 문의 전화도 제법 온다고 한다. 주로 다문화센터나 구청의 소개를 받은 이들이라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10월과 11월 한 차례씩 결혼식이 더 열릴 예정이다.
만오기념관 웨딩이 꼭 다문화 가정이어야 하거나, 남달리 애절하거나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이들에게만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와 연령, 가족 형태,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결혼식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예비부부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부산외대 대외협력팀 이승기 담당은 “만오기념관은 마치 처음부터 예식장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착각될 정도로 결혼식 사진이 완벽하게 나온다”고 자랑했다. 이 담당은 이어 “특히 영화에도 종종 나오는 외부 계단에서 드레스 촬영을 하면 웅장한 건물을 배경으로 평생 기억에 남을 인생 사진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무료 결혼식장 대여 신청은 금정구민을 포함한 부산시민 누구나 가능하다. 신청 및 문의 전화는 051-509-5203~4번으로 하면 된다.
2024-09-05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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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밤바다 낭만 부럽지 않은 ‘분위기 깡패’ 포장마차촌 [별별부산] ⑤
여름이다. 지금 한창인 장마가 물러가면, 이 계절은 낭만파 애주가들에겐 밤바다에서의 한잔이 절로 생각나는 때이기도 하다. 이럴 때 ‘바로 거기지’라고 떠오르는 곳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개인적으론 전남 여수시에서의 경험이 강렬하다. 그중에서도 10여 년 전 창 너머로 돌산대교가 보이는 여수시의 한 횟집 2층에서 술잔을 기울인 기억이 우선 떠오른다. 당시 신문 기사에 제목을 달던 편집부 소속이었는데, 맛난 횟감과 운치에 더해 식당 벽에 붙은 지역 소주 업체의 ‘잎새주세요’라는 멋진 광고 문구가 잊히지 않는다.
낭만과 운치를 얘기하자면, 여수시 거북선대교 아래의 포차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름마저 ‘낭만 포차거리’가 아닌가. ‘여수 밤바다~’로 시작하는 장범준의 달콤한 감성 발라드곡이 밤새 울려 퍼지는 일대는 특히 외지 관광객의 ‘원픽 방문지’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부산이라고 이런 낭만과 추억을 선사할 장소가 없을 리 있나. <부산일보> 인기 연재물 ‘별별부산’이 수소문해 봤다.
가장 먼저 후보에 오른 곳은 해운대 포장마차촌이다. 해운대해수욕장 해변 바로 뒤 주차장 쪽에 나란히 줄지어 선 이곳은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신선한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영화인들이 많이 찾아 유명해지기도 했다. 특히 고급 재료인 랍스터를 맛볼 수 있는 포차로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이곳은 해운대구청과의 약속에 따라 지난달 철거돼 지금은 명성만 떠돌고 있다.
해운대 포장마차촌이 사라졌다고 부산의 밤바다 낭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개구이를 대표 메뉴로 애주가들을 불러 모으는 서구 송도 암남공원과 해운대구 청사포 일대를 비롯해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 입구, 기장군 학리 방파제 등 밤바다를 향해 술잔을 들 수 있는 곳은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핫하고 힙한 장소로 정평이 난 곳은 따로 있으니, 바로 영도구 봉래동 봉래물양장 공영주차장에 자리 잡은 영도 포차거리이다. 이곳에서는 저마다 개성 넘치는 상호를 단 포차 23곳이 영업 중이다. 1980년대부터 뱃사람들의 시장기와 애환을 달래 주던 포차가 하나둘 들어서며 생긴 영도 포차거리는 코로나 팬데믹 시절 실내 영업 제한 ‘무풍지대’로 주목을 받으며 점차 다리 바깥 뭍사람들에게까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영도 포차거리의 가장 큰 장점은 도시철도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입지다. 영도 포차거리는 일제 수탈기와 한국전쟁 피란기 애환이 가득 서린 영도대교(영도다리라고 흔히 불린다)에 접해 있다. 1호선 남포역 8번 출구에서 600m가 채 되지 않는 거리여서 영도대교를 건너 10분 안에 닿을 수 있다. 이런 입지는 운전 부담 없이 한잔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두 번째는 속칭 ‘분위기 깡패’로 불릴 만한 주변 풍경이다. 애인이든 친구든 마음 통하는 이와 함께한다면 어디라도 좋겠지만, 이왕 부산에서 포차를 이용한다면 바다를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앞서 언급했듯이 포차에 앉아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은 부산에서도 여럿이다. 하지만 ‘ㄷ자’ 형태의 봉래물양장을 둘러싸고 자리한 이곳에선 해수욕장과는 또 다른 항구의 비릿함을 품은 ‘찐 부산 분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건배’하고 술잔을 들어 올리면 눈앞에 금방이라도 뱃고동을 울릴 것 같은 선박(주로 예인선)들이 도열해 있는 풍경 말이다.
포차 뒤쪽은 물양장을 마주 보고 솟은 고층 호텔 두 곳이 병풍을 치고 있다. 여기에 영도대교와 부산대교, 롯데백화점 광복점, 부산타워(용두산공원) 등 부산 원도심이 선사하는 주변 건축물들. 포차에 앉아 이들이 발산하는 경관조명을 보노라면 관광대국 싱가포르의 수변 명소 클라크키 노천카페에 자리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도 포차거리는 오후 4시께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인근에 마련된 수레 보관소에서 포차가 하나씩 이동해 차량이 떠난 공영주차장 자리에 터를 잡으면서부터다. 손님을 받는 시간은 포차 도착시간과 상관없이 일제히 오후 6시 무렵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래야 공평하기 때문이다. 메뉴는 스무 가지가 넘는다. 곰장어·오돌뼈·고갈비 등 구이류부터 산낙지·문어숙회 등 해산물, 어묵탕·조개탕 등 탕류까지 대동소이하다. 가격은 대부분 2만 원으로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 특이한 점은 LA갈비(2만 5000원)가 메뉴판에서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포차마다 2개씩 내놓는 야외 원탁 테이블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뜨겁다. 특히 주말엔 이른 시간부터 주변을 서성이며 테이블이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조출족’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야외 테이블 이용 시간을 2시간으로 제한하고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매달 1·3주 월요일은 공식 휴무다. 태풍이 몰아닥치는 등 날씨가 심하게 궂은 날에도 쉰다.
50대 이상이 대부분이던 상인 연령층에도 변화가 생겼다. 코로나 이후 30대 젊은 사장이 하나둘 합류하면서다. 젊은 손님이 좋아할 만한 새 메뉴 선정이나 SNS 계정 운영 등 최근의 변화는 우연이 아니다. 상인회 윤종덕 회장은 “SNS를 통해 포차거리가 널리 알려지면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외국인의 발길도 늘었다”고 소개했다. 윤 회장은 이어 “상인들 역시 영도 포차거리가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상품 중 하나라는 마음가짐으로 손님을 맞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4-07-0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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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교각 위 롤러코스터 질주…2층버스 맨 앞자리가 ‘명당’ [별별부산] ④
“무료로 즐길 수 있는 롤러코스터 타실 준비 되셨나요?”
지난달 26일 오전 부산역에서 탑승한 부산시티투어 레드라인 버스. 영도구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담벼락을 따라 태종로를 달리던 버스 안에 갑자기 놀이공원에서나 들릴 법한 경쾌한 음악이 흐르더니 곧이어 ‘롤러코스터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파노라마 선루프를 활짝 연 것처럼 지붕이 시원하게 뚫린 개방형 버스 2층에 올라탄 승객들이 일제히 스마트폰 카메라를 눈높이로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부산항대교 진입램프에 접어든 버스는 놀이공원 승강장에서 막 출발한 롤러코스터처럼 서서히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장대높이뛰기 바를 닮은 진입 램프 입구는 예사롭지 않게 많은 도로표지판으로 치장돼 있었다. 차량 통과높이 제한(4.5m)과 속도 제한(40km) 안내는 기본이고 ‘위험’이라고 적힌 빨간색 테두리 표지판까지 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띈 것은 한글 ‘이’의 자음과 모음을 맞닿게 한 후 좌우를 뒤집은 모양의 파란색 표지판이다. 모음 ‘ㅣ’의 위쪽에는 진행 방향을 알리는 화살표 머리가 달렸다. 파랑 바탕 표지판은 주로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의 도로 진입부에 세워져 특이한 통행 방법을 안내한다. 부산항대교 진입램프의 파랑 표지판은 바로 전방에 자음의 ‘ㅇ’ 형태로 순환하는 ‘360도 회전 구간이 있다’는 안내인 셈이다.
시티투어 버스가 진입램프를 지나 교량 상부를 향해 오르막길에 들어섰다. 전체 550m 길이인 진입로 중 약 300m를 직선으로 달린 후 나머지 250m 정도를 원형으로 360도 돌아 교량 상부에 오르는 방식이다. 바로 250m 원형 구간이 ‘공포의 부산항대교 진입램프’ 하이라이트다.
본격적인 원형 구간 주행은 지상에서 약 40m 높이에서 시작된다. 이 높이는 뉴질랜드의 카와라우강 번지점프대 높이(43m)와 비슷하다. 세계 최초로 상업 번지점프 영업을 시작한 이곳은 ‘번지점프 좀 해 봤다’는 마니아들도 막상 푸른색 강물 위 교각 점프대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공포감이 상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양쪽 발목에 칭칭 감은 안전줄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지상에서 시선이 멀어질수록 고소공포증의 강도는 커지는 법이다. 그러니 이 공포 구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선 ‘세단보다 SUV, SUV보다 버스, 일반버스보다 2층버스’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층버스에서도 최고의 명당은 진행 방향 왼쪽 맨 앞자리다. 이 자리에선 버스가 회전할 때, 마치 자기 몸이 도로 난간을 뚫고 나가 바다 위 허공에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부산항대교를 경유하는 부산시티투어 레드라인과 그린라인 노선 2층버스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경쟁도 치열하다. 마치 놀이동산 롤러코스터의 맨 앞자리와 바이킹의 맨 뒷자리가 먼저 채워지는 것처럼.
맨 앞자리뿐만 아니다. 공포감에서 나온 건지, 감동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를 탄성은 버스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회전 구간 안쪽을 향하는 오른쪽 자리도 마찬가지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반경 60m의 회전 구간 반대편이 보이는데, 가늘게만 느껴지는 교각 위에 아찔하게 서 있는 도로와 그 도로를 암벽 등반하듯 비스듬히 오르는 차량을 보다 보면 새삼 오금이 저리는 걸 느끼기도 한다.
부산항대교는 영도구 청학동에서 부산항 북항을 가로질러 남구 감만동까지 이어지는 총길이 3368m의 사장교로 10년 전인 2014년 개통됐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을 드나드는 크루즈선을 비롯해 초대형 선박들이 안전하게 오갈 수 있도록 최대 통과높이가 아파트 25층과 맞먹는 66m에 이른다.
공포의 진입램프는 설계 당시부터 어떤 구조로 지어질지 관심을 끌었다. 청학동에서 대교 상부를 연결하는 접속도로를 만들 수 있는 여유가 609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직선형 연결도로로 60m 높이의 교량 상부에 이르게 하려면 도로 기울기(종단경사)를 10%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말해 수평 구간 100m를 이동하는 동안 수직으로 10m를 올라가는 방식인데, 이는 산지에 작업용 임도를 만들 때나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한다.
부산항대교는 개통 후 한동안 이용 차량이 뜸했다고 한다. 그러다 2020년 초부터 3년 가까이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부산 공포의 진입로’ ‘부산항대교 롤러코스터 구간’ 등의 해시태그를 단 SNS 게시물이 쏟아지면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방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해외 여행길이 끊기면서 외면받던 국내 이색 장소들이 새삼 관심을 끈 것이다.
특히 이 구간은 지난해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화제성이 폭발하기도 했다.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인데, 진입램프 초입에 갑자기 차를 멈춘 운전자가 “도저히 무서워서 못 올라가겠다”며 뒤따르던 차량에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었다.
민간투자사업으로 건설된 부산항대교는 광안대교와 남항대교를 연결하는 부산 해안순환도로의 주축이다. 700원(경차)부터 최대 3000원(대형차)까지 통행료를 2044년 8월 20일까지 징수한다.
부산관광공사가 운영하는 시티투어버스 2개 노선(레드, 그린)은 하루 9차례 부산항대교를 경유한다. 1층과 2층, 개방형과 폐쇄형 등 버스 종류가 다양한데, 배차는 무작위 방식으로 한다. 2개(1006번, 1011번) 노선의 급행버스도 부산항대교를 통과한다.
진입램프의 360도 순환 구간 아래에는 영도구에서 운영하는 오토캠핑장이 있다. 카라반 사이트 15개, 오토캠핑 사이트 40개, 일반 사이트 12개로 꾸려졌는데, 특이한 장소를 선호하는 캠퍼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2024-05-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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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동 언덕에 우뚝 선 황금 사원…부산 속 ‘작은 티베트’ [별별부산] ③
부산 서구 아미동 도시철도 1호선 토성역 8번 출구로 나와 부산대병원을 오른쪽에 두고 오르막길을 걸었다. 아미초등학교를 향해 200m 정도 올라가다 아미동시장 입구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천마산 앞을 막고 선 노란색 건물이 눈길을 붙잡는다. 적색 외벽의 꼭대기 층에 ‘한국티벳불교사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그러고 보니 꽤 이국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 불교의 상징처럼 불리는 라싸의 포탈라궁이 연상되는 외형에 끌려 발길을 옮겼다. 오르막길 끝의 회전교차로를 지나 아미초등학교 쪽으로 100여m를 더 오르니 4층 높이 건물 앞에 다다랐다.
대한민국에 하나뿐인 티베트 불교 사원 광성사다. 우리나라에서 티베트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곳은 울산과 대구, 서울 등 여러 지역에 있다. 하지만 단독 건물을 갖추고 티베트 스님이 상주하며 대중을 상대로 티베트 불교 법문을 전파하는 곳은 부산의 광성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광성사는 한국 불교 사찰을 연상케 하는 이름과 달리 황금색 지붕을 얹은 건물 외형부터 남다르다. 황금색으로 칠하거나 금을 입힌 지붕이나 기와는 티베트 불교 사원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포탈라궁을 포함해 라싸에 있는 여러 티베트 불교 사원과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의 사원들도 대부분 황금색 지붕 아래에 불상을 모시고 있다.
광성사가 티베트 불교 사원이라는 것을 알리는 또 하나의 상징물은 황금 지붕 위로 솟아 있는 사슴 조형물이다. 선박 조타기나 수레바퀴를 빼닮은 둥그런 원을 가운데 두고 사슴 두 마리가 양쪽에서 바라보는 형상으로 역시 황금색이다. 석가의 일대기를 여덟 장의 그림으로 묘사한 팔상도 가운데 하나인 녹야전법상을 표현한 것으로, 부처님 말씀을 사슴이 경청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법륜이라고 불리는 원형 조형물은 부처님 말씀, 암수 두 마리의 사슴은 중생을 뜻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벽화나 법당 안에 걸린 탱화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를 티베트 사원에서는 조형물로 만들어 건물 가장 높은 곳에 세운다고 한다. 마치 이장님 전달 사항이 마을 구석구석 널리 전파되기를 바라며 설치한 마을회관 옥상 스피커처럼.
광성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1층의 공양실과 2층 지장전을 지나 한 층 더 올라가면 불국당이라는 이름표를 단 본 법당과 스님이 공부하며 정진하는 자비실이 나온다. 사미니승의 안내를 받아 자비실에서 주지인 소남 스님을 만났다.
1971년 라싸에서 태어난 소남 스님은 10대 중반에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인도에서 출가, 달라이 라마로부터 사미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2004년 한국에 온 이후 광성사 주지를 맡아 티베트 불교와 문화 전파를 이어오고 있다.
스님은 그동안 티베트 불교 경전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노력을 쏟아 <티벳 스승들의 수행 이야기> <티벳스님과 함께하는 반야심경 공부> <성스러운 따라보살 기도문> 등의 책을 펴냈다. 10여 년 전 한국으로 귀화한 스님은 우리말 구사가 아주 자연스럽다. 매주 토요일 오후 열리는 람림 공부를 직접 진행한다. 람림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내용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본이자 최고 경전으로 꼽힌다.
취재를 위해 세 차례 광성사를 방문하는 동안 모두 3명의 승려를 만났다. 소남 스님 외에도 앞서 말한 사미니승과 로남 스님이 그들이다. 한국인인 사미니승 역시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다. 티베트 국적인 로남 스님은 귀화 절차를 밟고 있다. 수년 전 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여전히 귀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외교 문제 때문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자비실 앞 불국당은 가로 액자에 담긴 티베트 라싸의 전경 사진을 보고 입장하게 되어 있다. 티베트 법당이라는 무언의 알림처럼 법당 풍경이 우리나라 사찰 법당과 사뭇 달랐다. 양쪽 벽면에 큰 탱화가 있고 가운데 주불 주위로 여러 불상이 놓여 있다. 큰 광배 장식을 한 주불 앞에 놓인 의자에는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주지 스님이 법문하는 자리는 그 아래에 있다. 사부대중을 향한 스님의 법문은 그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달라이 라마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라는 뜻이 담긴 듯했다.
왼쪽 벽면에는 불법의 핵심을 둥근 도형으로 표현한 만다라 장식이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샌드 만다라인데, 모래처럼 세밀히 다듬은 돌가루를 이용해 높낮이가 있는 입체형으로 만든 것이다. 형형색색의 색감과 일일이 수작업을 거친 세밀함은 그야말로 예술 작품의 경지였다.
원형 금속 상자에 담긴 티베트 대장경도 만날 수 있다. 티베트어로 깡규르라 부르는데, 상자 속에는 티베트 종이에 조밀하게 인쇄된 경전 100권이 돌돌 말려 있다. 상자 아랫부분을 회전할 수 있게 만들어 손으로 돌리면서 경전을 받아들이는 마니차 역할을 한다.
실제로 읽을 수 있는 경전은 법당 오른쪽 서랍에 보관되어 있다. 100개의 나무 상자에 담긴 경전을 펼치면 목판 인쇄 경전이 펼쳐진다. 스님이 법회를 진행할 때 하나씩 꺼내 경독을 한다고 한다.
광성사는 매주 수요일과 토·일요일 오후 정기적으로 불교 기초와 경전·람림 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법당 내부와 사원 곳곳에 등이 달린 모습은 우리나라 사찰과 마찬가지다. 음력 4월 8일에 거행하는 부처님오신날 법회도 마찬가지로 챙긴다고 한다. 소남 스님은 “광성사도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인연을 중시하는 등 한국의 절이 하는 역할을 똑같이 하고 있다”며 “종교를 떠나 부담 없이 방문해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광성사에 등록된 신도는 500여 명, 법회나 공부에 참여하는 이는 300명 안팎이라고 한다. 광성사의 거의 모든 활동은 유튜브를 통해 만날 수 있다.
2024-03-07 [0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