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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뉴스] 코로나19로 까묵은 운동회, 내년 가을에는 꼭 오이소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올해는 유독 코로나19 때매 몬하는 게 유달시리 많습니더. 그중에 가을운동회도 있네예. 옛날에는 가을운동회 하면 얼라들도 다리몽디이 뿔라질 정도로 뛰놀고예, 어른들도 함께하는 동네 잔치 아니었겠습니꺼. 말그대로 '굿이 한 다래끼'였지예. 그런데 세상도 변하면서 재밌는 게 몽창시리 나오니까네, 가을운동회 열기도 고마 시들시들해지뿐기라예. 그라고 또 올해는 코로나19까지 덮쳐뿌가 가을운동회 하는 학교도 드물지예. 그런데 과거에도 가을운동회를 못했던 해가 있었던 거 아십니꺼? 이번에는 추억 속의 가을운동회를 함 들시보입시더.
■아폴로 눈병, 태풍 등으로 중단되기도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파란 가을하늘, 나부대는 만국기 아래서 운동장에 얼라들이 응원한다꼬 쌔리 고함지르는 가을운동회. 기억나시지예? 특히 옛날에 초등학교(이전 국민학교)에서 운동회 열렸다카면 학생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학교도 안 드간 얼라들까지 무작빼이로 운동장에 몰리가 놀았다 아입니꺼. 당시 운동회 때도 주종목은 달리기, 줄다리기, 공굴리기로 요즘하고 비슷하고예, 차전놀이, 매스게임 등등 볼거리도 많았지예.
근데 1975년에 정부가 운동회를 전면 금지한 사례가 있었어예. "얼라고 어른이고 할 거 없이 잘 노는데 만다꼬 못하게 하는교?"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을낍니더. 이유는예, 가을운동회 비용인 '학교잡부금' 징수가 금지됐기 때문이랍니더.
사실 가을운동회 비용을 학부모들한테 거둬서 학교가 욕을 테베기로 얻어묵기도 했지예. <부산일보> 1956년 10월 27일 자 사설 '교육이 형식에 치우쳐선 안된다'를 보면은 "운동회의 상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학부형 가정을 방문하여 금품의 기부를 청한다"면서 "그러한 돈을 낼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갖지 못한 학부형들의 심정은 어떠할까"라고 따끔하게 비판하지예. 심지어 경비 부담을 한 학부형에게는 운동회 당일 좌석도 마련해주고 음식도 대접해줘서 돈을 못 낸 가정 얼라들 동심에도 상처를 줬다안캅니꺼.
정부가 1975년 학교잡부금 징수를 금지하면서 가을운동회를 못해 얼라들도 뿔따구 났겠지만, 다행히도 이듬해에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운동회가 다시 부활했습니데이. 당시 문교부는 운동회 개최 때 학부모 부담을 줄이기 위해 초등학교 운영비를 30% 인상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지예.
전염병 때매 가을운동회를 못했던 때도 있었던 거 아십니꺼? 코로나19하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예, 2002년에는 경남 지역 학교에 '아폴로 눈병'이 싹 돌아뿟다 아입니꺼. 거기다가 태풍 피해도 억수로 컸고예. 특히 아폴로 눈병으로 경남도내 261개교가 임시휴교하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데이. 2003년 9월에는 태풍 '매미'가 부울경 지역을 초토화시키뿌면서 이때 가을운동회도 고마 물건너갔습니더. 얼라들 참말로 서분했을낍니데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가을운동회
머 세상 만사 다 마찬가지겠지만, 가을운동회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뀝니더. 어른들 기억 속 가을운동회 최고의 먹거리가 삶은 계란, 밤 등이었다카네예. 먹을 것도 항그 생기면서 운동회 음식도 점점 다양해졌습니데이. <부산일보> 2003년 10월 9일 자 기사 '밤·달걀에서 치킨·족발로'는 2000년대 초반 당시 운동회 음식의 변천사를 소개하고 있네예. 기사를 함 볼까예.
"밤과 달걀은 이미 운동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 반면 김밥은 요즘에도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밤과 달걀의 자리는 통닭과 족발, 그리고 햄버거 등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패스트 푸드가 차지했다. 여기다 갖가지 과일 야채를 버무린 샐러드까지 운동장에 등장했다."
어디 변하는 게 먹거리뿐이겠습니꺼. 온종일 하던 운동회가 퍼뜩 끝나버리기도 하고예, 프로그램도 다양해졌지예. <부산일보> 2007년 10월 11일 자 보도 '바뀌어가는 가을운동회'에는 달라진 운동회 풍경이 잘 드러나 있네예. 기사를 보니 운동장에 돗자리 깔고 궁디 좀 붙이고 있으니까네 운동회가 오전 중에 끝났뿟고, 점심은 학교에서 급식으로 대체했다고 합니더.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면서 운동회도 이리 바뀠다카니 우짤 수 없지예.
변해버린 운동회의 '끝판왕'은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된 2016년 가을부터입니더. 그래도 운동회 한다카면 학부모들이 선생님 고생하신다고 도시락도 준비해 드리고 했는데, 고마 물도 못주는 시대가 되뿐거지예. <부산일보> 2016년 10월 17일 자 기사 '물 한 병도 안돼요, 달라진 가을운동회'에는 "각종 간식과 물따위를 보내오는 학부모들의 손길이 '뚝' 끊겼고, 학교들 역시 관련 단체 문자메시지와 가정 통신문을 잇달아 보내며 몸을 낮추고 있다"고 바뀐 상황을 전하고 있슴더.
사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을운동회의 사회적 관심도 떨어진 게 사실입니더. 가을운동회 관련 언론 보도 횟수가 확연히 줄어든 것만 보면 알 수 있지예.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 서비스를 이용해 1990년 1월 1일부터 2020년 10월 23일까지 54개 언론사에서 가을운동회를 언급한 뉴스 통계를 함 뽑아봤지예.
2011년 196건으로 정점을 찍었고, 그담부터 보도 횟수가 사부작이 줄더만 올해는 꼴랑 16건만 언급됐네예. 세상이 변하면서 가을운동회를 대체할만한 것들이 그만큼 많아진 거겠지예. 그래도 그때 그시절 가을운동회가 억수로 그립습니더. 내년에는 우리 아들 딸이 시원한 가을바람 맞으며 운동장을 냅다 뛸 수 있을까예?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2020-10-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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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뉴스] 가을 태풍 무서븐 거 아시지예? 대비 단디 하이소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올해는 유달시리 천재지변이 많습니더. 코로나19에다가 얼마 전에는 엉성시럽게 길었던 장마도 있었고예, 폭우까지 쏟아지뿌가꼬 전국에서 인명피해도 많았다 아입니꺼. 그런데 이제는 태풍까지 올라온다카이 참말로 올해는 와 이런지 모르겠심더.
특히나 지금 오고 있는 제9호 태풍은 이름이 뭐라 카더라…'마이삭'! 이름도 얄구진 요 태풍은예, 억수로 강한 바람을 동반하고 있다 카데예. 한마디로 역대급이랍니더. 마 우리 팀장님도 "니 사투리 뉴스 너무 오래 쉬는 거 아이가"하면서 은근히 쪼으고, 태풍도 올라오고 케서 이번 사투리 뉴스에서는 역대 태풍을 함 다뤄봤지예.
■ 2001년 이후 상륙 태풍은 16개
'북태평양 서남부에서 발생하여 아시아 대륙 동부로 불어오는, 폭풍우를 수반한 맹렬한 열대 저기압.'
요게 바로 태풍이라는 겁니더. 역시 지구과학 시간에 배았지예? 기상청 '날씨누리'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1977년 이후부터 발생한 태풍을 검색할 수 있습니더. 또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태풍은 2001년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데이. 당연히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태풍이 궁금하지예?
영향을 준 태풍은 상륙을 포함해서 한반도 인근 해상을 지났던 태풍들을 말합니데이. 2001년부터 올해 8월까지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은 모두 63개입니더. 연도별로 보면, 2019년에 7개로 제일 많습니데이. 그담으로 2018년, 2012년, 2004년 각각 5개로 두 번째로 많았던 해고예.
이 중에서 어떤 놈들이 상륙했는지 함 보입시더. 아무래도 직접 땅 위로 기 오른 놈들이 더 큰 피해를 주겠지예. 같은 기간 한반도 상륙 태풍은 모두 16갭니더. 2012년에 태풍 '카눈(7월)' '덴빈(8월)' '산바(9월)' 3개가 한반도에 상륙했는데예, 이때가 제일 많은 태풍이 기 올라왔던 연도라예. 그라고 2019년하고 2018년, 2010년, 2002년에 각각 태풍 2개가 상륙했습니더.
상륙했던 태풍은 물론이고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이 아예 없었던 시기도 있었지예. 바로 2009년 아입니꺼. 그때는 나랏님이 덕이 있어서 그랬는지… 보자, 그때 대통령이 누구였던고… 압! 다음으로 넘어가겠심더.
■ 매미에 초토화된 부산·경남
땅으로 기 오른 태풍 중에 제일 쎈 놈은 뭐니 뭐니 해도 추석 연휴를 공포에 떨게 했던 바로 '매미'지예. 2003년 9월 12일 오후 8시께 경남 사천으로 상륙했습니더. 그때 매미 중심기압이 950hPa, 중심 부근 최대 풍속이 초속 40m였고, 일 최대 풍속은 초속 51.1m로 역대 1위였습니데이.
매미는 12일 오후 9시쯤에 경남 함안, 11시에 대구 남서쪽 20km까지 접근하고 다음 날 13일 오전 2시 30분에 경북 울진군 동해안으로 빠져 나갔지예. 태풍 매미가 지나갈 때 마 말도 마이소. 사상자가 130명이나 발생하고예, 재산 피해가 4조 2000억 원대나 됩니더. 도로 뿌사지고, 다리도 무너지고, 자동차 침수되고, 전쟁터나 다름 없었습니더.
부산항에는 신감만부두하고 자성대부두 크레인도 자빠졌다 아입니꺼. 바람이 얼마나 강했으면 크레인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졌을까예. 이 와중에 우암부두 크레인은 화를 면했다고 합니더. 와 그런지 보니까네 <부산일보> 2003년 9월 14일 자 3면에 "우암부두의 경우 상대적으로 내륙 쪽에 있어 태풍 중심 방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더. 그라고 해운대에는 해상호텔로 사용하는 선박이 있었는데 매미 때문에 좌초가 되뿌가 몇 년 동안 '유령선'으로 둥둥 떠 있었다 아입니꺼.
마산에도 피해가 심각했습니데이. 마산항에서는 해안저지대에 해일이 몰아치가꼬 침수되면서 18명이나 유명을 달리했지예. 마산항은 1900년 개항한 이래 해일 재해가 단 한 번도 없었다캅니더. 그런데 태풍 매미가 이 기록을 깨뿐 거라예.
이렇게 엄청난 짓을 하고 소멸한 매미는 태풍 이름에서 완전 퇴출됐심더. 매미 대신 '무지개'라는 이름으로 바까뿠다 아입니꺼. 마찬가지로 2005년 일본에 큰 피해를 준 태풍 '나비'도 제명되고 '독수리'로 이름을 바꿨지예. 매미가 부산·경남을 할퀴고 지나간 지 20년이 다 돼가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거립니더.
■ 마린시티 삼킨 차바
이번에는 비교적 최근인 2016년 10월에 내습했던 제18호 태풍 '차바'를 함 보입시더. 차바는 태국이 제출한 명칭인데, 꽃 이름이라고 합니더. 그런데 이노마는 이름하고 정반대로 무지막지한 놈이었지예. 차바는 중심기압 970hPa, 최대풍속 초속 35m였고예, 10월 5일 오전 11시에 부산에 상륙했습니더.
차바 때문에 난리가 난 데는 부산 최고의 부촌 마린시티였지예. 아파트 사이로 높이 10m 이상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치가 바닷물이 마 콸콸콸 들어오는데, 영화 '해운대' 실사판이나 다름없었다 아입니꺼. 차들이 파도에 휩쓸려 떠밀리가고, 보도블록이 뿌사지가 나뒹굴고, 가로수하고 가로등도 쓰러지고… 하이고 마,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었심더.
파도가 이리 많이 넘어가뿌니까 물고기도 같이 땅으로 넘어오는 일도 벌어졌다 아입니꺼. 횟집도 아이고 화단하고 도로에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걸 보면 기도 안 차겠지예. 그때 제 지인도 저한테 전화해서 "침수된 지하주차장에서 우럭 잡았다"고 하더라고예.
사실 마린시티는 태풍 올 때 한두 번 침수가 된 게 아입니더. 2002년 태풍 '루사', 2003년 '매미', 2010년 '뎬무', 2012년 '볼라벤' '산바'가 부산에 상륙했을 때도 마린시티가 물에 잠기뿌가 100억 원가량 재산피해가 났습니더. 2012년에 높이 5m 방파제 우에 1.3m 해안방수벽을 추가로 설치했는데, 태풍 차바 때 파도 높이가 10m나 되니 무용지물이었지예.
아무튼 마 이래나 저래나 지금 열심히 오고 있는 태풍 마이삭이 얼마나 큰 피해를 줄지 걱정입니데이. 특히 여름보다는 가을 태풍이 피해가 어마어마 했으이 더 그런기라예. 함 보이소. 1959년 9월 '사라', 2003년 9월 '매미', 2007년 9월 '나리', 2016년 10월 '차바'. 전부 가을 태풍 아입니꺼.
그라고 요즘 자연재해는, '기-승-전-기후변화'라꼬 이리 어마무시한 태풍이 오는 것도 기후변화하고 연관이 있다고 합니더. 지구가 점점 따시지면서 바닷물 온도도 올라 뿌면 태풍이 더 강력해진다고 하네예. 그라면 해수면까지 올라가뿌니 해일 피해도 더 크겠지예. 참말로 걱정입니더.
아무튼예, 이번 태풍 대비 단디 하시이소. 태풍 뒤에 꼭 살아서 뵙겠습니더.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2020-09-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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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뉴스] 비 구경에 찌짐이나 디비면 참 좋은데… 장마 대비 단디 하이소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올해도 지난달 24일부터 어김없이 장마가 시작됐다 아입니까. 6월 29일 밤에는 태풍만큼 강한 저기압이 통과하면서 부산에 100mm가 넘는 폭우가 내리고 바람도 세게 불고 마… 제 지인은 그날 운전하다가 식겁했다카데예. 근데 비 그치니까 푹푹 찌고 불쾌지수 팍 올라뿌는 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사투리 뉴스'에서는 부산의 장마를 분석해봤습니데이.
■부산은 평균 31일, 380mm 내렸다
기상청이 장마 기간하고 강수량을 분석해 공식 통계를 내기 시작한 게 1961년부터라 카네예. 1961년부터 2019년까지 59년치 장마 자료를 좌악 받아보니까네, 장마 기간 동안 부산에 내린 총 합계 강수량은 2만 2488.1mm입니다. 59년 동안 부산 전체 강수량이 8만 9175.9mm니까 4분의 1 정도가 장마 때 내린 빕니더. 또 한 해 평균 장맛비는 381.2mm고예.
혹시 장마 첫날과 끝날 기준이 뭔지 아십니꺼? 따신 북태평양 기단하고예, 차가운 오호츠크해 기단이 쎄리 부딪히가꼬 정체전선이 생겨 한반도를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다들 지구과학시간에 배았지예? 뭐라꼬예? 디비잤다고예? 이 정체전선이 비를 뿌린 첫 날이 장마 시작일이고예, 정체전선이 한반도 북쪽으로 싹 올라가뿌면 장마 끝이랍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보통 6월말 또는 7월초에 장마가 시작돼, 길 때는 8월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부산에서 장마일수가 가장 길었던 해는 1969년이고예, 6월 25일 시작돼서 8월 11일에 끝났습니다. 48일 동안 장마였다카니 참말로 엉성시러웠겠지예. 반대로 가장 짧았던 해는 꼴랑 6일밖에 없었던 1973년(6월 25일~30일)이었습니다. 59년 동안 평균 장마 일수는 31일, 딱 한 달정도네예.
장마라 카더라도 노상 비가 내리는 건 아니지예. 비는 안 오고 날씨가 꾸무리하이 찝찝한 날도 있다 아입니꺼. 장마 때 부산에서는 평균 17.3일 비가 내렸습니다. 비 내린 날이 가장 많았던 해는 1974년(6월 16일~7월 31일), 2006년(6월 21일~7월 29일)으로 29일이고예, 비 내린 날이 가정 적었던 해도 역시 1969년으로 딱 4일만 비가 왔다캅니다.
■물 폭탄 두 번 터진 2009년 장마
그라믄 이제부터 어느 해 장마 때 비가 많이 왔고, 또 어느 해에 덜 왔는지 함 살펴보입시다. 장마 때 비가 억수로 퍼부었던 해 1위는 바로 2009년이었습니더. 그해 장마(6월 21일~8월 3일) 때 온 비만 1044.1mm라예. 이 정도면 머 거의 물폭탄이 터진 거 아이겠습니꺼. 심지어 장마 때 내린 비가 그해 전체 강수량(1772.9mm)의 58.8%나 된다카니 말 다했지예.
특히 7월 7일에 부산에는 호우경보가 발령되면서 308.5mm나 되는 비가 쏟아졌습니더. 하루 강수량으로는 18년 만에 최고치라카네예. 이날 하루에 남구 대연동에만 368.5mm, 해운대에 343.5mm가 내렸는데, 이 정도면 마 보통 장마기간 전체 강수량과 맞먹는거지예. 비가 이리 와갖고 배수가 안 돼 도심지, 농경지 침수는 말할 것도 없고예, 토사가 쏟아지가 차들을 싹 덮어뿌고, KTX 끊기고, 항공기 결항되고…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됐습니더. 이 때 해운대 벡스코 일대도 물바다가 돼서 센텀시티도 우사스럽게 됐다 아입니꺼.
그런데예,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참말로 하늘도 무심하시지 16일 부산에 또 폭우가 퍼부었지예. 이날 강수량만 266mm인데예, 비피해로 부산·경남에서 6명이 숨지거나 실종됐습니다. 부산에서는 주택 357곳, 상점 278곳, 도로 252곳이 침수됐고예, 차량 142대도 물에 잠기뿠다카네예. 하이튼 마 재산피해가 어마무시했습니더.
물론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난을 막아내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재난대응기관이 단디 대비했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시각도 다분했심더. 한 번 먹을 욕 두 번이나 먹은 재난당국은 쪼매 억울할 수도 있겠지마는 배수시설만 제대로 갖차놨거나 실시간 정보 전달 시스템만 잘 맨들었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었거든예.
■기후변화의 역습, 앞으로가 더 걱정
장마 기간에 비가 가장 적게 내린 해는 43mm만 내린 1994년(6월 24일~7월 6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찔끔 내린 거네예. 장마 기간도 꼴랑 보름밖에 안 돼가 장마 일수가 역대 네 번째로 짧기도 했습니다.
당시 <부산일보>를 함 들차 보니 이번에는 비가 안 와서 난리네예. 1994년 7월 2일 자 '경남 10여일 째 마른장마 현상'을 보니까네 "경남 지방은 무더위 속 찔끔 비가 내리는 마른 장마가 지속, 1일 현재 도내 평균 강우량은 38mm에 그쳤다. 중·서부 경남지방 14개 시·군은 장마 속 가뭄이 계속돼 농작물이 생육에 타격을 입고 있다"고 전합니다. 가뭄이 농심을 다 태아 묵어삤다 아입니꺼. 피해는 어데 농작물뿐이겠습니꺼. 1994년 7월 7일 자 '폭염 폭발 남부 연일 찜통' 기사 함 보입시다.
"소서(小暑)인 7일에도 부산의 낮 기온이 32도를 기록하는 등 이 같은 무더위는 휴일인 오는 10일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부산 영도구, 서구, 부산진구 등 고지대와 마산시 회원구 구암동, 봉암동 일대, 울산시, 삼천포시 일부 지역에는 수돗물 공급이 끊겨 행정당국이 급수차와 소방차를 동원, 비상급수에 나서는 등 식수난을 겪고 있다."
장마 때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오는대로 걱정, 적게 오면 적게 오는대로 걱정이지예. 그런데예, 장마 기간 비가 내리는 패턴을 보면 비가 덜오는 것보다도 2009년 같은 비가 또 올까 봐 더 겁나긴 합니다. 1961년부터 2019년까지 장마 때 비가 많이 온 상위 10개 연도 데이터도 함 뽑아봤지예. 딱 보니까네 10개 연도 중에 4개 연도는 2000년도 이후입니데이. 부동의 1위는 1044.1mm 쏟아진 2009년이고예, 2003년(751.1mm) 4위, 2006년(720.1mm) 5위, 2019년(596.8mm) 10위로 기록됐다 아입니까.
2000년 이후에 비가 쎄리 퍼붓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눈치 채셨지예? 기후변화 때문이라카네요. 한반도가 점점 아열대성 기후로 변하면서 대기가 불안정해 국지성 집중호우가 자주 내린다 안캅니다. 그러니 우째야 되겠습니까. 야시맹키로 물난리에 단디 대비해야겠지예. 그나저나 일본 규슈를 쑥대밭으로 만든 장마전선이 슬슬 북상한답니다. 운치 있게 비 구경하면서 찌짐이나 꾸 묵으면 참 좋은데. 아무쪼록 큰 비 피해가 없도록 간절히 바랍니데이.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2020-07-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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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뉴스] 참말로 엉성시러븐 피란살이, 그래도 잊지는 맙시데이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올해가 6·25전쟁 70주년 되는 해라예. 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 수도'였고, '피란 수도'였습니더. 대통령뿐만 아이라 피란민들도 부산에 몰리와서 그때가 진짜배이 '다이내믹 부산'이었습니다.
강산이 7번이나 바뀌는 시간이 흘렀어도 산복도로, 돼지국밥처럼 부산 곳곳에는 피란민들의 흔적이 남아있심더.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 떠나서 낯선 부산에 정착해 치열하게 산 피란민들이 결국 오늘의 부산 모습을 만든 거나 다름없지예. 그래서 이번 '사투리 뉴스'에서는 피란 시절을 함 다뤄봤심더.
■공간만 있으면 들어선 판잣집
원래 부산 인구가 해방 직후에 30만 명이 채 안됐어예. 그런데 마 주로 일본, 중국에서 온 귀환 동포들이 부산으로 들어오면서 전쟁 직전에는 47만 명 정도로 늘었다 아입니꺼. 귀환동포 중 상당수가 부산에 주저앉아뿐기라예. 근데 말도 마이소. 전쟁 터지고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몰리와가 서로 찡기고, 받치고… 마 부산이 또 다른 전쟁터가 돼뿠지예. 1951년 1·4 후퇴 때 부산 인구가 80만 명이 넘었다카니 말 다했네예.
우선은 사람이 이리 몰리오니 피란민들이 살 수 있는 집부터 퍼뜩 마련해야겠지예. 우선은 급한대로 남구 우암동에 있던 소 검역소, 영도 대한도기회사, 해안가,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군데에 수용소를 만들었는데, 꼴랑 7만 명만 수용 가능했습니다. 이 정도는 택도 없어서 사회부장관, 경남지사, 부산시장이 피란민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루가 멀다카고 언론에다 협조를 요청합니다.
<부산일보> 9월 10일 자 2면에 실린 기사 '귀재(귀속재산) 이외 주택에도 피란민 수용을 명령'을 보면 당시 사정을 잘 알 수 있지예. 기사에는 "피란민 수용이 귀속재산만으로서 그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 있어서는 사회부장관은 귀속재산 이외 주택, 여관, 요정, 기타 수용에 적당한 건물의 소유자 또는 임차인에 대하여도 피란민 수용을 명령할 수 있다"고 났네예. 이기 무슨 말입니꺼? 피란민들을 광복 이전 일본인 소유였던 귀속재산에 수용을 하다하다 안되니까네 필요하면 다른 주택이나 여관, 요정까지 쓰겠다는 겁니다.
피란민들이 살았던 집도 지금 보면 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어예. 수용소 못 드간 피란민들은 공터는 말할 곳도 없고 심지어 축사나 공동묘지에도 판잣집, 움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집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그것도 없어서 다리 밑에서 살기도 하고예, 하천변 특히 보수천 주변에 잠자리만 만들어 생활하기도 했다캅니다.
■지긋지긋한 화재
애써 지은 판잣집도 당시 워낙 빈번했던 화재로 다 태아먹는 경우도 천지빼까리였다 아입니꺼. 불이 얼마나 많이 났는지, "났다카면 불"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습니다. 1950년 11월 24일에는 영도 대한도기회사에 설치된 피란민 수용소에서 불이 났습니다. <부산일보> 11월 26일 자 '영도에 대화재'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함 보시지예.
"550세대의 피란민 가옥을 전소하고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근래에 보기 드문 어마어마한 대화재가 영도에 발생하였다. 24일 밤 9시 30분경 시내 봉래동 2가 115번지 대한도기회사 피란민 수용소 18조에서 발화한 불은 때마침 불어오는 동북풍에 더욱 힘을 얻어 확대되는 화마는 삽시간에 그 부근 일대를 휩쓸게 되었는데… 이 화재로 인한 이재민은 2739명에 달하고, 이중 무참히도 어린이 5명이 숨졌다. 이재민은 모두 이번 사변으로 서울·인천에서 온 가엾은 피란민들이라고 한다."
1952년만 하더라도 화재가 490건이나 났다카네예. 화재 원인은 대부분 초롱불이나 난로의 취급 부주의였습니다. 피란민 집도 쉽게 불에 타는 물질이었고, 집들도 빽빽하게 붙어 있으니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습니더. 1953년 7월 휴전협정 뒤 11월에 발생한 '부산역 대화재'는 피란민들에게 또 한 번 치명상을 입힙니다. 전쟁도 끝났고 이제 좀 제대로 살란갑다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보금자리를 잃은 피란민들의 낙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꺼. 그래서 어떤 피란민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다고 하네예. 그때 부산일보사 사옥과 시설도 불타버려 최대의 시련기를 맞이합니더. 그래도 감사한 거는 시민들이 격려해주셔서 오늘까지 버티고 있는 거 아이겠습니꺼. 참말로 고맙습니데이.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집이 홀라당 불타 얼마되도 않은 재산이 사라졌다케도, 우예됐든 일단은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매 그란지 피란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악착같이 살아 남으려 발버둥쳤고예.
불 뿐만 아니라 물도 피란민들을 괴롭혔습니다. 부산은 40만 명 정도만 수용할 수 있던 도시였는데, 상수도 시설이 어디 제대로 갖춰져 있었겠습니꺼. 그래도 살아야 하니 물은 꼭 구해야만 하고 공동수도가 있는 데마다 양동이 들고 줄 선 어무이들은 당시 부산의 흔한 풍경 아이겠습니꺼. <부산일보> 1953년 8월 21일 자 2면 '물 한 드럼에 300환?' 기사를 함 보입시더.
"… 일반 수도 급수는 최근 2~3일 동안에 갑자기 악화되어 물을 얻으려는 주부들은 수도선 앞에 물동이를 들고 장사진을 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귀한 물을 어디서 구해 오는지 거리마다 부쩍 늘어든 물장수는 19일 아침에 이르러서는 드럼 당 150환부터 300환, 한 동이에 25환부터 30환이라는 엄청난 고가로 팔고 있는데…"
먹고 살길이 막막한 피란민들에게는 미군부대 관련된 것만큼 좋은 사업 아이템도 없었습니더. 위 사진 함 보이소. 집 왼쪽 팻말에 'LAUNDRY(빨래)'라는 말이 보이지예. 1952년 하얄리야 부대(현재 부산시민공원) 옆에 있었던 '세탁물소집소'라고 합니다. 미군들이 빨랫감을 민간에 맡겼고예, 세탁물 소집소 운영하던 주민들은 빨래도 하면서 찢어진 옷도 기워줬다고 하네예. 그러다 비누 같은 미군 물자를 하나 둘 얻어서 되팔기도 했답니다. 사업 아이템이 점점 늘어나는 거지예.
위 사진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수품 나무 상자를 해체해서 늘어놓은 겁니다. 이걸 어디다 팔 수 있을까예? 놀랍게도 집 지으려는 피란민들이 이걸 돈주고 사갔다고 하네예. 초라하더라도 제 한 몸 누일 집이 당장 급했던 피란민들은 미군 부대에서 집 재료를 구해다가 썼다합니다. 심지어 불이 나 재만 남은 미군 부대에 들어가 고철까지 주워갔다고 하네예.
피란살이 기사 보면서 또 한 번 느꼈심더. 참말로 우리 국민들은 강하다고예.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라꼬 발버둥 치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면서도 그게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저력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예, 전쟁의 참상도 극복한 DNA가 어디 가겠심까. 힘 내입시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2020-06-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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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뉴스] 부산 해수욕장, 전쟁 때도 피서객 '천지빼까리'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부산하면 역시 바다지예.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쪼매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지난 1일에 해운대·송정해수욕장이 '안전개장' 했습니다. 보통 해수욕장들이 6월부터 조기 개장에 동참하지만 이번에는 해운대·송정을 제외한 나머지 해수욕장은 7월부터 문을 연다캅니다. 올해는 거리두기 때매 백사장에 천지빼까리로 박혀 있던 파라솔도 사라졌고예, 마스크 쓰고 해수욕장 주변을 댕기는 것도 영 어색한 풍경입니다. 그래도 코로나19 시국에 갈 곳도 많이 없는데, 해수욕장이라도 개장하니 마 참말로 반갑네예. 그래서 이번 '사투리 뉴스'에서는 부산 해수욕장의 과거 모습을 함 챙기봤습니다.
■공식 통계가 10년치뿐이라꼬?
부산에는 해운대·광안리·송도·송정·다대포·일광·임랑 7개 공설해수욕장이 있는 거 다 아시지예? 이중에서 송도가 전국 제1호 공설해수욕장으로 1913년에 개장해 역사만 100년이 넘었습니다. 함 생각해 보이소. 그동안 전국에서 여름 되면 피서객들이 억수로 몰리왔다 아입니까. 그래서 해수욕장 이용객 수 통계도 방대할끼라고 예상했지예. 그런데 부산시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통계는 2009년부터라는 담당자 답변에 가슴이 탁 막혔습니다. 이유는 이렇답니다.
"오래 전부터 집계는 했는데… 담당 부서가 바뀌면서 예전 자료를 찾을 수가 없습니더."
하이고 마… 기도 안 차지만 그래도 기사는 써야 하고… 우짜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10년치 통계라도 여기에 함 소개해드릴께예. 그라고 참, 지자체들이 자기네 해수욕장에 사람 많이 왔다면서 집계를 가끔 뻥튀기한다는 점도 참고 하이소.
가장 최근인 2019년 6~8월 부산 7개 해수욕장을 찾은 사람은 연인원으로 3695만 명이랍니더. 우리나라 인구를 5000만 명으로 잡으면 전체 인구 중 73.9%에 달하는 숫자가 부산 해수욕장에 놀러 온 셈이라예. 최근 10년 중 2017년에 4856만 명이 찾아 가장 많았지만서도, 당시 이동통신사를 활용한 빅테이터 방식으로 집계해 보니 이용객 수는 이 보다 훨씬 작아서 논란이 됐습니다.
가장 적은 이용객이 찾았을 때는 2843만 명을 기록한 2014년이었습니다. 당시 태풍이 쌔리 몰아치가꼬 폐합판 200t이 해운대해수욕장을 덮치는 불운이 있었고, '부산바다축제' 기간 중 나흘 동안 비가 130mm 이상 쏟아지면서 축제를 완전 베리뿟어예.
해운대·광안리·송도·송정해수욕장 개별 추이도 함 보입시다. 역시나 부동의 1위는 해운대네예. 2017년에 광안리가 15만 8000명 차이로 해운대의 턱 밑까지 추격한 적도 있었지만, 역전은 아직 먼 것 같심다. 최근에는 부산 서구가 옛 명성을 되찾는다고 송도에 대대적으로 투자해 송도 이용객도 꽤 많이 늘었고예.
■전국은 '피란 행렬', 부산은 '피서 행렬'
말이 나온 김에 제1호 공설해수욕장 송도 이바구를 함 해야겠네예. 지금은 해운대 천하지만, 과거에는 송도를 찾는 이용객이 제일 많았거든요. 그래서 공공기관이나 언론이 해수욕장을 다룰 때 제일 먼저 거론하는 게 바로 송도 아이겠습니까. 실제 <부산일보> 1954년 8월 10일 자 2면 '바다로, 바다로, 13만 명 사람의 파도' 기사를 보면 부산의 주요 피서지 별로 주말 풍경이 나와 있는데예, △송도 △광안리 △송정 △신선대 △감천 순서로 나와 있습니다. 해운대는 아예 보이지도 않네예.
송도 인기가 어찌나 좋은지 6·25 전쟁이 한창일 때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리와가 북새통이었답니다. 1951년 8월 14일 자 2면을 보면 '전쟁 모르는 송도, 수영복 위를 오가는 추파'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는 "우리 젊은 용사는 붉은 악마(북한)와 더불어 어제도 오늘도 아니, 이 순간도 싸우고 있는데… 호화로움을 자랑삼아 피서하는 시국의 역류군상들이 날마다 찾아도는 송도"라고 개탄하고 있슴다.
당시 기자가 취재했던 8월 12일에 충무동 도선장에서 송도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고예, 남부민동에서 송도로 가는 도로에는 '피란 행렬'이 아닌 '피서 행렬'이 늘어섰다 안캅니까.
백사장에서는 또 이런 광경이 벌어졌다고 묘사했는데,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여성들이 한 벌에 10만 원 한다는 해수욕복을 입고, 하얀 두 다리를 뻐치고 지나가는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으며, 정체 모르는 어떤 사나이는 정욕에 불타는 눈초리로 수영하는 여학생들에게 이상야릇한 행동을 하고 있다." 1950년대 초반,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는지 사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더.
송도하면 또 다이빙대와 해상케이블카, 구름다리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아입니까. 이 시설들은 한때 다 사라졌다가 다이빙대는 2013년, 해상케이블카는 2017년에 복원됐고예. 지난 4일에는 구름다리의 명성을 잇는 '송도용궁구름다리'도 개통됐습니다.
■버스 타기 전쟁에 안전사고도 속출
부산 해수욕장에는 7월 말부터 8월 초 사이 주말에 수십만 명이 전국에서 몰린 거는 예사고예, 100만 명이 훌쩍 넘을 때도 억수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해수욕장 주변 인프라가 이 많은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여름마다 전쟁터 아이었겠심까. 대표적으로 사람들이 해수욕장 주변으로 쏠리가 버스 타기도 쉽지 않았다카데예.
1967년 7월 24일 자 3면에 실린 '피서인파 30만 아비규환… 귀로의 차 잡기' 기사를 함 보입시다. 그때 7월 23일 일요일에 낮 기온도 30도 이상 올라뿌가꼬 '구릿빛 인어' 30만 명이 부산 7개 해수욕장에 바글바글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하철도 없고, 차가 부족해서 '정류소마다 버스 합승 기다리는 시민들로 장사진을 이뤘다'고 하네예. 아래 내용 함 보이소.
"귀로의 해수욕장 주변은 차를 잡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혼잡 상태. 송도해수욕장에는 아예 차 잡기를 단념한 보행자들로 충무동까지 인파가 이어지는가 하면 해운대 버스 정류장에는 300~400명씩, 광안리 정류장에는 500~600명씩 줄을 지어 평균 1~2시간을 기다리는 실정."
해수욕장 개장 기간 동안 월요일 자 신문에는 익사 사고 소식을 어김 없이 볼 수 있기도 했습니다. 1968년 8월 8일 자 7면에 난 기사 '부쩍 는 익사자, 올들어 벌써 19명' 기사를 함 보입시다. 기사에는 "8일 말복, 삼복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면서 물가엔 인파가 붐비고 익사사건이 부쩍 늘었다. 7일 하룻동안만 해도 부산시내에는 어린이 3명을 포함한 익사 사건이 4건 발생했다"고 전합니다. 그해 들어 부산 해수욕장에 하루 평균 15만 명이 찾았는데 익사자 19명 중 7명이 송도·해운대 등에서 발생했다 안캅니까.
안타까운 것은 익사자 대부분이 15세부터 20세 미만이었다는 거라예. 신문에는 청소년의 수영 미숙과 부모의 부주의 때문에 비극적인 사고가 계속 발생하고 있으니, 부모들의 특별한 관심이 요청된다고 하는데…. 근데 이게 어디 부모만 관심을 둔다고 될 일이겠습니까. 당시 해수욕장 관리했던 지자체나 경찰 등은 안전 사고 예방을 위해 도대체 뭘 했는지 궁금해지네예.
■피끓는 청춘은 시대 불변
이번에는 해수욕장에서 벌어지는 청춘남녀들의 '애정행각'을 함 보겠심다. 당사자들에게는 로맨스이기는 한데, 군사정권 시절 분위기가 워낙 고압적이다 보니 당시 남녀 청소년들이 해수욕장에서 벌이는 일탈, 탈선으로 매도됐죠. 부산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진하해수욕장에는 특히 남녀 혼성캠핑·민박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1972년 9월 12일 자 9면에 실린 '난잡한 10대 남녀 혼성 캠핑·민박' 기사에는 "진하해수욕장에는 무분별한 10대를 포함한 난잡한 남녀혼성 민박·혼성캠핑족들이 몰려와 밤낮을 모르고 광란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혀를 차네예. 이 청춘 남녀들은 불을 피우고 모여 앉아 술 마시고, 퇴폐적인 가사로 고친 노래를 부르고, '고고춤'까지 추면서 새벽 2시까지 불야성을 이뤘다 하니, 하이고 마 지금 봐도 끝내주게 논 거 아입니까.
기사를 쓴 기자가 이중 한 명과 인터뷰 한 내용도 웃깁니더. 기사 내용을 보니 아마도 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까 싶네예. "니 여기에 누구하고 왔노? (대가리 피도 안 마른 게…)" "오빠야하고 왔는데요. 와 물어보는데요? 별꼴이네 참말로." 며칠 뒤 후속보도가 나왔는데, 경찰이 진하해수욕장을 덮쳐뿌가 10대 '난잡 캠핑족' 57명을 즉결심판에 회부했다캅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해외여행도 맘대로 갈 수 없던 그때에 부산 해수욕장은 전국 최고의 피서지였지예. 쎄빠지게 일만 하다 해수욕장에서는 한 번쯤 과감한 일탈을 꿈꿔보지도 않았을까예. 그래서인지 옛날 해수욕장 모습이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인 차림과 행동의 피서객들 사진도 꽤 많이 발견했습니다. 차마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쓸 수는 없지만예.
2020년으로 돌아와 코로나19 때매 마음 졸이고 사는 현재를 보면, 그 옛날 팍팍했던 삶과 얼추 비슷한 구석이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해외여행을 갈 수 없다는 점도 빼박았다 아입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올 여름에는 부산 해수욕장에서 철저히 거리두기 하면서 고단한 몸과 맘을 좀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도 참 좋을 것 같네예.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2020-06-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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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뉴스] "머라카노? 부산 동물원 또 문닫는다꼬?"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24일에 부산에 사는 얼라들을 억수로 서운케하는 뉴스가 하나 떴심더. 부산에 딱 하나밖에 없는 동물원 '삼정 더파크'가 25일 문을 닫는다카네예. 2개월 더 연장해 운영할 수도 있다드만, 결국 예정대로 폐업하겠다카니 얼라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입니더. 특히나 어린이날 꼴랑 열흘 남가놓고 이라니 참말로 무심합니더.
코로나19 땜에 외출도 제대로 못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되면 어린이날 동물원에 가볼끼라고 학수고대 하던 분도 많이 허탈해하고예. 마 우짜든동 이번 어린이날에는 부산에서 코끼리는 볼 수 없게 됐심더.
그런데 말입니더, 동물원 문 닫네 마네 이런 뉴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심꺼. 맞심더. 과거에 부산에 있던 동물원들 다 이러다 문을 닫았어예. 그래서 이번 '사투리 뉴스'에서는 부산 동물원과 놀이동산의 흥망성쇠를 함 디비볼겁니더. 얼라들 손잡고 동물원, 놀이공원 앞에 줄 서던 시절로 함 떠나보입시더.
■갈 곳 없어도 화끈하게 놀았다
현재 부산에는 태종대, 에덴, 동백섬 같은 유원지가 12군데, 부산시민공원, 부산어린이대공원, 금강공원, 용두산공원 같은 근린공원이 161군데 있슴더. 바다에 산에다 강까지 있는 부산은 자연환경이 기똥차지만, 문제는 얼라들 데리고 갈만한데가 없다는 것이겠지예. 그래서 봄날 휴일에 시민공원 같은데 함 가보이소. 얼라들로 쎄리 마 미어터집니더.
인프라가 좀 갖춰져 있어도 이 정도인데, 예전에는 우쨌을까예? 그때도 부산에 갈 곳 없다고 아우성치는 기사가 있네예. <부산일보> 1961년 4월 21일 자 1면 '중앙동' 코너 함 보이소.
"부산이라는 곳의 주변에는 시민들이 손쉽게 값싸게 가 볼만한 곳이 없다. 송도나 동래, 해운대의 온천장은 이미 다수 시민들과는 거리가 먼 특수유흥지대로 변했다. 기껏 동백섬이나 금강원, 태종대같은 곳이 있어도 관리며, 시설이 형편없어 벤치는커녕 돗자리를 빌리는데도 돈이 들게 마련이다. 시내에도 문서상으로는 공원예정지가 17개소를 헤아리면서 실지로는 모두 집이 들어서고, 고작 깡패의 무대로 이름난 용두산이 명영(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나마 갈 수 있는 곳도 돗자리 빌릴라고 돈까지 내야하니 하이고 마~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꺼. 갈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예, 그래도 부산 사람들은 노는 것도 끝내줬심더. 그런데 마 이게 좀 과해서 봄철마다 유원지, 공원에서 발생한 사건사고, 나뒹구는 쓰레기가 신문을 도배했지예.
<부산일보> 1969년 4월 21일 자 3면 기사에는 "금강공원 상춘무드를 어지럽힌 122명의 피의자가 현지 순회즉결재판을 받았다"면서 '상춘무드'를 어찌 어지럽혔는지 자세히 알리고 있심더. 보니까네 사이다 병을 깨서 지인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도 있고예, 술값때매 시비가 붙어 기물을 파손한 사람도 있네예.
1971년 4월 22일 자 6면 '소란한 상춘' 기사에서도예, 금강공원에서 벌어진 각종 추태를 자세히 전합니더. 그때 금강공원 인기가 우찌 그리 좋은지 대구에서 관광버스 대절해가 오고, 시내 직장 단위 야유객 10만 명이 몰맀어예. 근데 남녀가 어깨동무하면서 춤추고, 흥청거리는 꼴불견이 마 군데군데서 보였다 안캅니까. 또 어떤 상춘객은예, 술에 곤드레 만드레 취해가꼬 주먹질해서 경찰에도 끌리갔고예. 심지어 '깽가리'도 치고 금강공원을 마 난장판 만들었뿟다카네예. 하이고 마~ 깽가리가 와 거서 나오노.
그래도 한편으로 이해는 갑니더. 그때 시민들은 신발, 섬유, 합판공장에서 주 6일 내내 쎄빠지게 일만 하지 않았겠심꺼. 고단한 일상 유원지서 함 풀어보려다 저럴 수도 있겠다 싶으니 좀 짠해집니더.
■10년 만에 문 연 동물원 또 폐업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동물원 이바구를 함 해보겠심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동물원이 부산에 있었다는 거 아십니꺼. 1964년 문을 열었다가 2002년에 폐업한 금강공원 '동래동물원'이지예. 이 동물원에는예, 코끼리하고, 호랑이는 물론이고 140종 860마리가 바글바글했다캅니다. 휴일만 되면 동물원 입구부터 망미루까지 400m 구간은 표를 사볼끼라고 줄이 어마무시하게 길었다카이 말 다했지예.
그 시절 동물원 동물 동정도 신문 지면에 심심찮게 등장했어예. 대표적인 기사 제목만 몇 개 불러드릴게예.
'표범 빌리양, 두 수놈 순산' '동래동물원에 분가해 온 아프리카산 하마' '동래동물원에 온 바다사자가 신방살이에' '동래동물원에 시집오는 호랑이 공주'
특히 이 호랑이는 광주에서 왔다캅니더. 와~ 그 시절에 호랑이가 먼저 영호남 화합을 했뿠네예. 얼마 전에 동물복지 개념도 생겼지만, 그때는 그런 게 있었겠심꺼. 못된 관람객들이 쓰레기도 던지고 동물들한테 해코지를 하는 일도 많았지예. 심지어 꼬끼리가 비닐을 삼켜 죽어뿌고, 호랑이도 급사하는 일이 벌어졌슴더.
금강공원 동래동물원은 운영사가 제때 투자를 안 해 점차 시시한 동물원으로 전락했고예, 경영난도 가중돼 2001년 11월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갑니더. 그리고 다음해 동물 180마리를 대전동물원에 팔고 완전 문을 닫았심더. 그때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코끼리 '삼돌이'도 팔려갔지예.
동래동물원과 양대 산맥이었고, 더파크 전신인 '성지곡동물원'도 빼놓을 수 없지예. 성지곡동물원은 1982년 어린이대공원에서 문을 열었어예. 그런데 성지곡동물원도 동래동물원맹키로 만성적자에 허덕입니더.
2002년 3월에는 성지곡동물원에서 부산·경남에 딱 한 마리 있던 코끼리가 죽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어예. 당시 <부산일보> 기사를 보면예 "1982년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성지곡동물원에 들어온 아프리카 코끼리(암컷)는 20년간 어린이와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면서 "코끼리 평균 수명(60살)의 3분의 1밖에 채우지 못하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합니더.
결국은 성지곡동물원도 2005년 문을 닫았고예, 동물 320마리는 국내외 동물원으로 팔려갔심더. 수컷 하마 코돌이는 평양동물원으로 갔다카네예. 부산시는 당시 '더파크'란 이름으로 2년 만에 다시 동물원 문을 열겠다고 큰소리 쳤는데, 실제 10년이 다 지나서 더파크가 개장했거든예. 근데 또 문닫는다카니 속에 천불이 날라캅니더.
■놀이공원 0의 도시, 부산
부산 놀이공원도 동물원처럼 쇠락의 길을 걷기는 마찬가지라예. 과거 부산의 놀이공원하면 금강공원하고예, 어린이대공원 내 '동마놀이동산', 태종대 '자유랜드'가 대표적이었심더. 금강공원에서는 회전목마하고 비행카의 인기가 치솟던 시절도 있었지예. 그래가 1970~1980년대 금강공원 놀이시설 업주 한 명은 "휴일 장사 마친 뒤 500원짜리 지폐를 세다가 날이 새기도 했다"고도 말했다네예.
㈜동마기업이 1989년 1월부터 운영했던 어린이대공원 내 놀이동산도 부산 얼라들의 나들이 1순위였심더. 회전목마 등 놀이기구 16종을 갖췄고예, 연간 70만 명이나 이용했다카니 참말로 대단하지예. 안타깝게도 놀이동산 사용기간이 2011년까지라 그 해에 문을 닫았심더.
태종대 자유랜드는 1988년 5월에 개장했지예. 귀신의 집, 사격연습장, 청룡열차도 있었고예, 동물원도 운영됐심더. 바닷바람 맞으면서 타는 바이킹은 국내 어느 놀이공원에서도 맛 볼 수 없었던 거 아이겠심꺼. 그런데 마 자유랜드도 2008년 5월에 문을 닫심더.
놀이공원은 얼라들은 물론 가족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해주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심더. 특히 놀이기구 안전관리가 제대로 안돼서 절대 있어서 안 될 사망사고도 발생했고예. 1990년대에 어린이가 어린이대공원 내 오수정화조에 빠져 익사하거나, 놀이기구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고가 일어났심더. 가장 최근에는 2007년 영도구 이동식 놀이동산 '월드카니발'에서 일가족 5명이 숨진 참사도 있었구예.
추억과 상처를 동시에 준 놀이공원이지만예, 지금은 부산에 놀이공원이 하나도 없심더. 가장 최근에 생겼던 놀이공원 수영구 '미월드'도 2013년 6월 폐장했지예. 술먹고 바이킹 타다 토했다는 무용담 쏟아지는 '광안비치랜드'도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철거됐지예. 금강공원에도 놀이기구 3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작년 7월 1일부터 운영이 중단됐고 시설물 팔려고 내놨답니더.
"부산이 대한민국 제2 도시 맞나?"
부산에 하나 있는 동물원도 문을 닫고예, 놀이공원도 하나 없는 현실을 두고 나오는 얘깁니더. 제 후배는예 이제 100일 넘긴 얼라 크면 꼭 동물원에 델꼬가 코끼리 보여줄라 캤는데, 천상 다른 도시로 가야할 판입니더. 코끼리 뿐이겠습니꺼. 바이킹 함 타볼라면 경남 양산에 있는 '통도환타지아'까지 가야할낍니더.
억수로 거창하고 까리한 거 새로 만들어달라는 것도 아니라예. 시민들의 애환이 서린 추억의 장소조차 지키지 못하는 부산시는 부끄럽지도 않은교? 앞으로 누가 다시 시장 자리 올지 몰라도, 다음 시장은 단디 하소. 쫌!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2020-04-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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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뉴스] 해방 이듬해 부산 쑥대밭 만든 전염병, '호열자'를 아시나예?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21세기에 전염병이 우짠 일이고. 옛날에 '호열자(虎列刺)' 돌던 시절도 아이고, 참말로…"
"호열자예? 호열자가 뭔가예?"
"니는 기자면서도 호열자가 뭔지도 모르나?"
요즘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니까, 어르신들 기억에 있던 전염병들이 한목에 다 튀나오는가 봅니더. 저희 어머니 기억 속에 있는 가장 쎈 전염병이 이 호열자, 바로 '콜레라'였다 카데예.
호열자는 호랑이가 몸을 찢는 것처럼 통증이 어마어마해가 붙인 이름인데, 그래서 '호역(虎疫)'이라고도 합니더. 이 콜레라는예, 한 번 걸리면 구토도 나오고예, 설사가 좔좔 나와서 탈수 현상까지 나타나고 결국엔 삐짝 곯아가 죽을 수도 있답니더. 다른 전염병도 그렇겠지만예, 이 콜레라는 정말로 인간의 '존엄성 1'도 지켜주지 않는 더러운 질병이기도 합니더.
그런데 해방 이듬해 1946년부터 부산이 바로 이 콜레라의 온상이 됐다는 거 알고 계십니꺼?
■동포 귀환선, 부산항 앞바다서 둥둥
항구 도시 부산은예, 해방 뒤부터 해외에서 동포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던 귀환 통로였심더. 일본에 있던 동포들이예, 시모노세키, 센자키, 하카타, 사세보, 마이즈루에서 연락선 타고 처음으로 밟은 고국 땅이 바로 부산항 1부두인 거라예. 그 모진 고통 다 견디고 집에 오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심꺼.
일본 정부 자료에는 1944년 말에 일본에 있던 동포 수가 193만 6843명입니더. 1947년 9월 일본 내무성의 조사에는 재일 동포 수가 총 52만 9907명이거든예. 대략 140만 동포가 해방 직후 일본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을낍니더.
그런데 이 귀환 동포들을 따라 콜레라까지 같이 온 거지예. 당시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1946년 5월에 중국 남부에서 귀환한 수송선에 동포 3150명이 타고 있었는데, 배 안에서 고마 콜레라가 돌아뿠어예. 이미 사망자 두 명이 발생해서 시신을 바다에 그냥 버리는 처참한 일도 발생했고예. 배가 입항도 못하고 일주일 동안 부산항 앞바다서 둥둥 떠다녔다고 합니더.
이 신문 표현대로 '자나 깨나 해방된 조국 산천을 그리며 멀리 해남도 남지나에 가 있든 3150명의 동포들'이 손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고국 땅을 눈 앞에 두고 얼마나 비통해 했을까예.
안타깝게도 부산에는 이 때부터 콜레라 환자가 억수로 쏟아집니더. 그해 5월 28일 자 신문에는예, 부산에 콜레라 확진자 87명이 발생하고 25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더. 특히 초량동 일대 피해가 심각했다네예. 같은 해 9월 17일 자 기사를 보면예, 부산 콜레라 환자가 564명이고 그 중 172명이 유명을 달리했심더. 전국적으로는 38선 이남 지역에서 5월부터 10월 중순까지 1만 4909명이 콜레라에 걸렸고, 그중 9632명이 목숨을 잃었지예.
당시 미군정청 시절이라서 우리는 방역도 주체적으로 할 수 없었던 속터지는 시절이였지예. 미군들이 자국민 대하듯 우리 국민들을 콜레라로부터 살뜰하게 보살폈을까예? 그라고 당시 치료약도 제대로 구비돼 있었겠습니꺼. 아마 대다수 국민들은 콜레라 걸리면 100% 죽는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을낍니더.
■콜레라 격리병사에 사망자 해골이
1946년에 9월 10일에 창간된 <부산일보>도 그때 부산의 콜레라 전파 상황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심더. 1946년 9월 10일 자 2면에는 '호역예방주사 미실시자는 처벌'이라는 기사가 실렸네예.
"부립병원 격리실에 입원된 호열자 환자 중 주사를 맞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에 비춰 도 방역본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의를 환기하는 동시에 도민의 협력을 요망하고 있다. 금후 주사를 맞지 않은 사람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처벌할 것이니 도민 여러분은 항상 주의와 협력을 요망하야 마지 않는다." 그런데 예방주사를 맞고 싶어도 충분하지 않았고예, 시골에선 구경도 못했다니 서민들도 답답했을 낍니더.
콜레라의 참상을 보여주는 기사도 하나 소개해드리께예. <부산일보> 1949년 4월 2일 자 2면 '500주의 해골, 격리병사에 방치' 기사는 제목부터 충격적입니더.
기사 내용을 자세히 보니까네, 격리시설에서 4년 전에 콜레라로 사망한 환자들의 해골 수백 기가 방치돼 골치라고 합니더. 1946년 5월부터 콜레라 사망자가 속출했는데예, 이 때 숨진 사람 1만 명이 부립(府立) 화장장에서 화장된 다음에 연고자가 유해를 찾아갔심더. 그런데 일부 주민들은 콜레라에 감염될까봐 유해를 찾아가지도 못했다 아입니꺼. 그래서 우짤 수 없어가지고 부산부가 남은 유해를 부립병원 격리병사에 안치했다네예. 당시 부산 부립병원은 지금 서구 아미동 부산대병원 자리에 있었답니더.
그런데 마 환절기 지나서 콜레라 환자가 나날이 불어나니까, 병원에 있는 해골 때매 산 사람을 수용하는데 지장을 줬다 안캅니까. 그동안 부산부가 유족들 독촉해서 해골 500기는 찾아가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일부가 여전히 남아서 난감한 처지였다고 기사는 전합니더. 죽은 다음에도 가족과 상봉조차 못하게 만든 콜레라는 그때 우리 할배, 할매들을 이리 비참하게 만들었심더.
■70년 전 콜레라와 오늘의 코로나19, 그 묘한 기시감
근데 와 이렇게 70년도 더 된 케케묵은 일을 끄집어내냐고예? 보이소. 그때 상황하고 요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된 코로나19하고 묘하게 닮은 점이 있심더.
일단은 그때 콜레라가예, 외국에서 들어온 우리 동포들부터 시작된 거 아이겠슴꺼. 지금 함 보이소. 국내에서 신천지 신도들 중심으로 퍼진 코로나19의 큰 불줄기는 일단 잡았심더. 그런데 해외에서 들어오는 국민들 중에서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는 게 그때와 비슷하지예?
그라고 또 함 보이소. 1946년에 동포들이 귀국할 때 타고 왔던 배가 전염병 때매 들어오도 못하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지 않았습니꺼. 올 2월에 일본 요코하마항에서 유람선 ‘다이아몬드프린세스’호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생기자 한동안 해상에서 격리됐던 거도 비슷하지예?
“외국에서 계속 살지 만다고 들어와서 전염병을 퍼뜨리노?”
1946년 당시 원래 부산에 살던 시민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법도 합니더. 그런데예, 부산 사람들이 팻말 들고 1부두로 몰리가가 "귀환 동포 입국 반대한다"는 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은 찾아보지 못했심더.
한 번 걸리면 죽을지도 모르는 전염병인데, 와 안 불안했겠습니꺼. 그래도 부산 사람들은 외국에서 모진 고생 다 하고 집에 온 사람들을 내치지 않았습니더. 이런 부산 사람들의 따신 맘 씀씀이는예, 6.25 전쟁 때도 발현돼 전국의 피란민들을 거둬들인다 아입니꺼.
누구는 그러더라고예. 우리 국민들의 취미는 ‘국난 극복’이라고예. 어마무시한 전염병이 돌아 내가 죽을 수 있다케도, 이웃과 역경을 이겨내려는 부산 사람들이 국난 극복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입니꺼.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2020-04-01 [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