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뉴스] 참말로 엉성시러븐 피란살이, 그래도 잊지는 맙시데이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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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부산 서구 보수천변에 자리 잡은 피란민 움막, 판잣집이라예. 뒤로 보이는 산이 영도구 봉래산입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2년 부산 서구 보수천변에 자리 잡은 피란민 움막, 판잣집이라예. 뒤로 보이는 산이 영도구 봉래산입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읽기 전 잠깐] 우리 생활과 밀접한 데이터와 스토리를 접목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사투리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올해가 6·25전쟁 70주년 되는 해라예. 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 수도'였고, '피란 수도'였습니더. 대통령뿐만 아이라 피란민들도 부산에 몰리와서 그때가 진짜배이 '다이내믹 부산'이었습니다.

강산이 7번이나 바뀌는 시간이 흘렀어도 산복도로, 돼지국밥처럼 부산 곳곳에는 피란민들의 흔적이 남아있심더.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 떠나서 낯선 부산에 정착해 치열하게 산 피란민들이 결국 오늘의 부산 모습을 만든 거나 다름없지예. 그래서 이번 '사투리 뉴스'에서는 피란 시절을 함 다뤄봤심더.



1950년 부산 동구 성북고개에서 바라본 피란민 판잣집 모습입니다. 판잣집들이 억수로 빽빽하게 들어섰지예. 우측 상단에 공장처럼 보이는 건물이 조선방직입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0년 부산 동구 성북고개에서 바라본 피란민 판잣집 모습입니다. 판잣집들이 억수로 빽빽하게 들어섰지예. 우측 상단에 공장처럼 보이는 건물이 조선방직입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공간만 있으면 들어선 판잣집

원래 부산 인구가 해방 직후에 30만 명이 채 안됐어예. 그런데 마 주로 일본, 중국에서 온 귀환 동포들이 부산으로 들어오면서 전쟁 직전에는 47만 명 정도로 늘었다 아입니꺼. 귀환동포 중 상당수가 부산에 주저앉아뿐기라예. 근데 말도 마이소. 전쟁 터지고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몰리와가 서로 찡기고, 받치고… 마 부산이 또 다른 전쟁터가 돼뿠지예. 1951년 1·4 후퇴 때 부산 인구가 80만 명이 넘었다카니 말 다했네예.



1953년에 촬영된 영도다리 인근 점바치 모습입니다. 피란민들이 헤어진 가족 생사라도 알아볼라꼬 여기에 점보로 댕깄다 아입니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3년에 촬영된 영도다리 인근 점바치 모습입니다. 피란민들이 헤어진 가족 생사라도 알아볼라꼬 여기에 점보로 댕깄다 아입니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우선은 사람이 이리 몰리오니 피란민들이 살 수 있는 집부터 퍼뜩 마련해야겠지예. 우선은 급한대로 남구 우암동에 있던 소 검역소, 영도 대한도기회사, 해안가,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군데에 수용소를 만들었는데, 꼴랑 7만 명만 수용 가능했습니다. 이 정도는 택도 없어서 사회부장관, 경남지사, 부산시장이 피란민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루가 멀다카고 언론에다 협조를 요청합니다.

<부산일보> 9월 10일 자 2면에 실린 기사 '귀재(귀속재산) 이외 주택에도 피란민 수용을 명령'을 보면 당시 사정을 잘 알 수 있지예. 기사에는 "피란민 수용이 귀속재산만으로서 그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 있어서는 사회부장관은 귀속재산 이외 주택, 여관, 요정, 기타 수용에 적당한 건물의 소유자 또는 임차인에 대하여도 피란민 수용을 명령할 수 있다"고 났네예. 이기 무슨 말입니꺼? 피란민들을 광복 이전 일본인 소유였던 귀속재산에 수용을 하다하다 안되니까네 필요하면 다른 주택이나 여관, 요정까지 쓰겠다는 겁니다.


1952년 영도다리 아래 급하게 만들어진 피란민 가옥들입니데이.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2년 영도다리 아래 급하게 만들어진 피란민 가옥들입니데이.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피란민들이 살았던 집도 지금 보면 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어예. 수용소 못 드간 피란민들은 공터는 말할 곳도 없고 심지어 축사나 공동묘지에도 판잣집, 움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집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그것도 없어서 다리 밑에서 살기도 하고예, 하천변 특히 보수천 주변에 잠자리만 만들어 생활하기도 했다캅니다.


■지긋지긋한 화재


1952년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발생한 화재 모습입니데이. 이 때는 마 1952년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발생한 화재 모습입니데이. 이 때는 마 "났다카면 불"이라꼬, 불이 억수로 많이 났어예.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애써 지은 판잣집도 당시 워낙 빈번했던 화재로 다 태아먹는 경우도 천지빼까리였다 아입니꺼. 불이 얼마나 많이 났는지, "났다카면 불"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습니다. 1950년 11월 24일에는 영도 대한도기회사에 설치된 피란민 수용소에서 불이 났습니다. <부산일보> 11월 26일 자 '영도에 대화재'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함 보시지예.




1952년 피란민 촌 모습입니더. 저 멀리 산자락 판잣집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나는 거 보이시지예. 판잣집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가꼬 화재 피해가 더 컸다 아입니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2년 피란민 촌 모습입니더. 저 멀리 산자락 판잣집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나는 거 보이시지예. 판잣집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가꼬 화재 피해가 더 컸다 아입니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550세대의 피란민 가옥을 전소하고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근래에 보기 드문 어마어마한 대화재가 영도에 발생하였다. 24일 밤 9시 30분경 시내 봉래동 2가 115번지 대한도기회사 피란민 수용소 18조에서 발화한 불은 때마침 불어오는 동북풍에 더욱 힘을 얻어 확대되는 화마는 삽시간에 그 부근 일대를 휩쓸게 되었는데… 이 화재로 인한 이재민은 2739명에 달하고, 이중 무참히도 어린이 5명이 숨졌다. 이재민은 모두 이번 사변으로 서울·인천에서 온 가엾은 피란민들이라고 한다."


1953년 부산역 대화재로 부산일보사도 다 타버렸어예. 1953년 11월 29일 자 1면에 여러분들이 찾아주시고 위로해주심을 감사하는 사고를 냈습니다. 부산일보DB 1953년 부산역 대화재로 부산일보사도 다 타버렸어예. 1953년 11월 29일 자 1면에 여러분들이 찾아주시고 위로해주심을 감사하는 사고를 냈습니다. 부산일보DB

1952년만 하더라도 화재가 490건이나 났다카네예. 화재 원인은 대부분 초롱불이나 난로의 취급 부주의였습니다. 피란민 집도 쉽게 불에 타는 물질이었고, 집들도 빽빽하게 붙어 있으니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습니더. 1953년 7월 휴전협정 뒤 11월에 발생한 '부산역 대화재'는 피란민들에게 또 한 번 치명상을 입힙니다. 전쟁도 끝났고 이제 좀 제대로 살란갑다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보금자리를 잃은 피란민들의 낙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꺼. 그래서 어떤 피란민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다고 하네예. 그때 부산일보사 사옥과 시설도 불타버려 최대의 시련기를 맞이합니더. 그래도 감사한 거는 시민들이 격려해주셔서 오늘까지 버티고 있는 거 아이겠습니꺼. 참말로 고맙습니데이.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집이 홀라당 불타 얼마되도 않은 재산이 사라졌다케도, 우예됐든 일단은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매 그란지 피란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악착같이 살아 남으려 발버둥쳤고예.


1952년 부산 중구 영주동에 설치된 공동수도에 주민들이 물뜨러 나온 모습입니다. 물이 귀하다보니 공동수돗가에는 이렇게 긴 줄이 늘어섰지예.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2년 부산 중구 영주동에 설치된 공동수도에 주민들이 물뜨러 나온 모습입니다. 물이 귀하다보니 공동수돗가에는 이렇게 긴 줄이 늘어섰지예.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불 뿐만 아니라 물도 피란민들을 괴롭혔습니다. 부산은 40만 명 정도만 수용할 수 있던 도시였는데, 상수도 시설이 어디 제대로 갖춰져 있었겠습니꺼. 그래도 살아야 하니 물은 꼭 구해야만 하고 공동수도가 있는 데마다 양동이 들고 줄 선 어무이들은 당시 부산의 흔한 풍경 아이겠습니꺼. <부산일보> 1953년 8월 21일 자 2면 '물 한 드럼에 300환?' 기사를 함 보입시더.

"… 일반 수도 급수는 최근 2~3일 동안에 갑자기 악화되어 물을 얻으려는 주부들은 수도선 앞에 물동이를 들고 장사진을 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귀한 물을 어디서 구해 오는지 거리마다 부쩍 늘어든 물장수는 19일 아침에 이르러서는 드럼 당 150환부터 300환, 한 동이에 25환부터 30환이라는 엄청난 고가로 팔고 있는데…"


1952년 하얄리야부대 옆에 있었던 '세탁물소집소' 모습이라예.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2년 하얄리야부대 옆에 있었던 '세탁물소집소' 모습이라예.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먹고 살길이 막막한 피란민들에게는 미군부대 관련된 것만큼 좋은 사업 아이템도 없었습니더. 위 사진 함 보이소. 집 왼쪽 팻말에 'LAUNDRY(빨래)'라는 말이 보이지예. 1952년 하얄리야 부대(현재 부산시민공원) 옆에 있었던 '세탁물소집소'라고 합니다. 미군들이 빨랫감을 민간에 맡겼고예, 세탁물 소집소 운영하던 주민들은 빨래도 하면서 찢어진 옷도 기워줬다고 하네예. 그러다 비누 같은 미군 물자를 하나 둘 얻어서 되팔기도 했답니다. 사업 아이템이 점점 늘어나는 거지예.



1951년 하얄리야부대 밖에 널려있는 군수품 나무상자 잔해들입니더.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1년 하얄리야부대 밖에 널려있는 군수품 나무상자 잔해들입니더.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위 사진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수품 나무 상자를 해체해서 늘어놓은 겁니다. 이걸 어디다 팔 수 있을까예? 놀랍게도 집 지으려는 피란민들이 이걸 돈주고 사갔다고 하네예. 초라하더라도 제 한 몸 누일 집이 당장 급했던 피란민들은 미군 부대에서 집 재료를 구해다가 썼다합니다. 심지어 불이 나 재만 남은 미군 부대에 들어가 고철까지 주워갔다고 하네예.


1954년 11월 부산 동구 범일동 미군 55보급창이 불탄 자리 모습입니다. 불에 탄 미군부대에서 혹시 돈 되는 거라도 찾을까 싶어서 저렇게 얼라까지 업고 잔해 속을 뒤지고 있는 겁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4년 11월 부산 동구 범일동 미군 55보급창이 불탄 자리 모습입니다. 불에 탄 미군부대에서 혹시 돈 되는 거라도 찾을까 싶어서 저렇게 얼라까지 업고 잔해 속을 뒤지고 있는 겁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피란살이 기사 보면서 또 한 번 느꼈심더. 참말로 우리 국민들은 강하다고예.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라꼬 발버둥 치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면서도 그게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저력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예, 전쟁의 참상도 극복한 DNA가 어디 가겠심까. 힘 내입시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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