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8> 북한의 발해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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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강점 기반 독립국 역사 복원 의지

2002년부터 공개화된 중국의 역사 침탈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이 알려지면서 자주 받던 질문 증의 하나는 북한은 과연 고구려나 발해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한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북한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대로 설명을 해 보이지만 그런 나를 신기롭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북한 자료를 보아 왔느냐 하는 것도 그렇게 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필자가 북한의 연구 성과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 및 중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부터였다. 1980년 초반 필자는 주로 일본 국회도서관에 복사 신청을 하여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문헌사의 '력사과학'과 고고학 중심의 '조선고고연구'라는 잡지가 보려는 자료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북한 논문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논문에 있는 김일성 교시문이 생소하고 거슬렸지만 중국 논문을 보다가 우리와 같은 시각에서 쓰여진 강렬한 글을 보니 귀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차에 1992년 중국에서 열리는 '발해사 국제학술회의'는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공산권 여행 '허가'를 받아 혼자서 텐진으로 입국하여 베이징을 거쳐 연변으로 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여기에서 북한의 발해사 학자들을 세 분이나 만날 수 있었다. 주최 측에서 북한 학자들을 초청하고서 남한에는 이러한 사정을 통보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한 해 전 비슷한 학술회의를 할 적에는 한국 학자들만이 참석하였기에 남북 발해사 학자가 역사상 최초로 만난 사건이 된 것이었다.

지금은 모두 다 고인이 되었지만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전영률 소장을 비롯해서 역사연구소 발해사연구실장인 장국종 박사,김일성대학 교수인 현명호 박사가 참석하였다. 북한 학자들은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에 대한 발표를 하였고,필자는 '신라와 발해의 교섭과 대립'이라는 글을 통해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시대'를 역설하였다. 헤이룽장성을 비롯한 중국 내의 많은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이 참석하여 진행된 이 학술회의는 긴장된 상태 그대로였다. 당나라 지방정권으로서의 발해라는 중국학자들의 견해와는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까지의 발해사에 대한 연구는 북이 남보다 앞섰다. 이는 발해사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사에 대해서도 큰 차가 없었지만 남한은 발해사 연구 인력이 거의 전무했고 1980년에야 비로소 한국사 전공자로서 발해사 연구를 시작한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필자와 서울대 송기호 교수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은 지역 자체가 고구려와 발해사 영역으로 1차 자료를 안고 있는 곳이다. 또한 1963년부터 2년간 중국의 발해사 유적을 중국과 공동발굴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어 주영헌,장상렬,김종혁 등과 같은 훌륭한 고고학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에서는 박시형이 1962년 '발해사를 위하여'라는 지표가 될 만한 무게있는 글을 발표하여 판단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문헌과 고고학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발해사가 발전하였다. 역사연구소에 발해사연구실이 있는 것만으로도 북한은 제도적인 면에서 남한보다 나았다.

북한 발해사 연구의 강점은 고고학이다. 아울러 정사류의 기록에 없는 내용이 많은 '협계태씨족보' 등을 적극적으로 원용해서 발해사를 복원하려는 것도 주목된다. 발해건국 1천300주년을 기념해서 내놓은 7권의 '발해사'와 '발해사문답집' 등은 훌륭했다. 이 연구서는 사료 인용에 있어서 무리한 부분이 있지만 발해사를 복원하려는 북한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업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필자는 1992년 발표가 끝난 후 중국 학술회의의 관례대로 답사 안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발해유적 답사는 공식적으로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묵인할 테니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이나마도 이때에는 헤이룽장성까지 발해유적을 비교적 많이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감동적이었다. 북한 학자들에게는 내가 쓴 박사논문 등을 전달하고 헤어졌다.

1992년부터는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발해유적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북한 땅은 2004년 2월에야 밟을 수 있었다. 첫 방문은 운 좋게도 인천공항발 평양 순안공항 직항 고려항공이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으로서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남북공동 학술토론회 및 자료전시회' 참석을 위해서였다. 출국면세점도 국내 여행으로 간주되어 이용할 수 없었다.

'동북공정' 분위기가 한층이었고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이 진행중에 있던 터라 내심으로는 고구려나 발해유적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북한은 '일제의 약탈문화재'를 주제로 내세웠다. 이른바 '납치문제' 등에서 북한은 중국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얻어내려는 분위기였다. 중국과의 관계는 한국이 알아서 해주고,일본은 우리가 맡는다는 분위기로 읽혀졌다.

그렇다고 북한이 중국의 '역사침탈'을 방관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었다. 북한은 발해의 5경 중의 하나인 남경이 있던 곳이고 함남 신포시의 오매리절터 등 많은 발해유적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등에 대해서는 이미 논리적 기반을 구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국이 발해사연구를 8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하기 시작한 것은 북한으로부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있는 동안 북한은 오히려 고구려·발해사 연구에 진력하여 많은 성과를 남기고 있었다.

▲함경남도 신포시의 발해유적 오매리절터 전경. 이곳에서는 구들이 있는 건물터와 발해의 전형적 기와들이 쏟아져 나왔다('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 오매리절터 북쪽1호 건물터 구들 유구.


어떤 이는 북한의 역사학이 교조적이고 국수적이기에 무시하거나 얕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발해 이래 요·금·고려·조선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간적으로 그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곳은 바로 북한이고 60년대 쌓은 학문적 우월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토론회가 끝난 후 북측은 남측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와 강서큰무덤 등을 우리들에게 공개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찍지 말라는 비디오 카메라를 몰래 찍다가 필름을 압수당하기까지 하였다.

2004년 7월 1일 드디어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남한의 민관이 적극 후원한 덕택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9월에는 금강산에서 '고구려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기념 남북공동전시회·학술토론회'가 열려 고구려와 발해사 학자들을 대거 만나게 되었다. 작년에 작고하신 전 발해사연구실 채태형 실장도 만났는데 발해사의 중요성을 열변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북한에서마저 고구려 중심의 연구에 섭섭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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