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 (13) 홍주의진 의병장 전 참판 민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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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살해되자 가산 털어 거병

충남 우국지사들이 을사늑약에 반발, 당시 홍주(현 홍성) 관찰부가 있던 홍주성을 점령했던 의병투쟁에 대해 '매천야록'은 이렇게 기술해 두었다.

"전 참판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로 들어갔다. 종식은 판서 민영상의 아들로서 국변(명성황후의 살해)을 아프게 생각하여 가재를 풀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사들이니, 호서지방의 사민들은 추종하는 자가 날로 증가하였다. 남포·보령 제군을 습격하여 그 병기를 거두어들이고 순찰하는 일본군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5월 20일(19일-필자 주)에 홍주로 들어갔다. 지난번 일본군은 홍주성은 족히 믿을 만하다 하여 포병 약간을 배치하고 대포 10여 문을 매설하였는데, 모두 민종식의 소유가 되었고, 부서별로 나누어 지키니, 명성과 위세가 몹시 왕성했다."

민종식(1861~1917)은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 충남 정산(현 청양군 속면)으로 이사했다. 1882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갑오경장(갑오왜란), 을미사변(을미왜란) 등으로 일제와 그들 앞잡이들이 설쳐대는 세상으로 변하자 벼슬을 버리고 정산에서 국권회복을 도모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우국지사에게 보내는 격문과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청원문을 작성하고 군용품 준비 및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에 홍주·청양을 중심으로 한 양반·유생들은 민종식을 의진의 응원(應援)으로, 최익현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자 했다. 최익현은 홍주·청양의 지사 150여명이 울면서 애원했지만 홍주의병 거사 이틀 전에 나귀를 타고 전북 정읍시 태인으로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홍주·청양의 지사들은 예정대로 1906년 3월 17일(음력 2월 23일) 충남 예산 광시 장터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모인 군중이 수천을 헤아렸다. 이튿날 의병들은 민종식을 대장으로 하는 의진을 편성, 홍주성으로 진군했다. 이튿날 새벽, 공주진위대와 서울의 시위대 병력 200여명이 들이쳤다. 의병들은 화승총과 칼을 들고 싸웠지만 민 대장을 비롯한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안병찬 등 수십 명이 체포되어 공주관찰부로 압송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1차 병오 홍주의병'이었다.

1차 기병에 실패한 민 대장은 그해 5월 12일, 흩어졌던 의병들을 모아 충남 홍산(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다시 국권회복의 기치를 들었다. 이튿날 서천읍에 이르니 의병은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다음날 비인을 점령했으며, 보령 남포성에서 5일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광천을 거쳐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주한 일본군 사령부는 포병·기마병·헌병 및 보병 2개 중대로 편성된 혼성 부대를 파견하고, 아울러 충남·전북 일원의 진위대 병력을 총출동하게 하여 홍주성을 맹공격해 왔다.

미명의 새벽, 홍주성 동문이었던 조양문을 폭파하고 들이닥친 일본군은 굶주린 이리떼같이 닥치는 대로 살상을 저지르니 홍주성은 일시에 아비규환 속에 빠졌다. 민 대장을 비롯한 상당수의 의병들은 성 밖으로 몸을 피했으나 채광묵 부자를 비롯한 80여명의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생포된 의병이 130여명이었으니, 홍주성을 점령한 지 13일째인 5월 31일이었다.

이날의 격렬한 전투에 대하여 '매천야록'에는 "홍주 10리 안에는 밀과 보리가 모두 없어졌으니, 병마에 짓밟힌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홍주성을 탈출한 민 대장은 의진을 수습하고 재거의를 도모하다가 그해 11월 17일 공주 탑산리에서 붙잡히니, 국권회복기 후기 의병사에 길이 빛나는 홍주의병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듬해 7월 2일 민 대장은 평리원에서 교수형을 받았지만, 집행은 1등급 낮춰 진도로 유배되었고, 이어 순종 즉위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한편, 경성으로 끌려간 의병 중에 70여명은 그해 7월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홍주 9의사'로 일컬어지는 유준근·이식·신현두·남규진은 종신 유배형, 문석환·안항식·신보균·최상집·이상두는 3년 유배형을 받고 일본 대마도로 끌려갔다. 전북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 군경과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붙잡힌 최익현과 임병찬이 구금되기 3주일 전의 일이었다.

홍주 9의사는 1906년 8월 7일 '유배형'을 받아 대마도로 향했지만, 최익현과 임병찬은 8월 28일 '구금형'을 받고 대마도에 도착하게 된다.

홍주의병은 최익현과는 무관한데도 독립기념관에는 홍주의병장 민종식에 관한 내용보다는 오히려 최익현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찼으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민 대장의 홍주성 점령은 전기의병 때 김하락의 남한산성 점령이나 노응규의 진주성 점령, 유인석의 충주성 점령과 같은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하겠다.

김해건설공고 교사·문학박사(의병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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