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 (17) '마도일기' 남긴 홍주의진 유병장 유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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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지언정 일본 음식 받아먹을 수 없다'

1906년 5월 12일,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이 충남 홍산(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을 출발, 이튿날 서천읍에 이르자 참여한 의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다음날 비인을 점령한 뒤 보령의 남포성(藍浦城)에서 5일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다. 특히 이 싸움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곳 출신으로서 덕망이 높았던 선비가 홍주의진의 유병장(儒兵將:유생들을 이끄는 장수)으로 종군했기 때문인데, 그가 유준근(1860~1920) 의병장이다.

5월 19일 민종식의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그달 31일 성이 함락되면서 80여 명의 의병이 순국하고 130여 명이 생포되었는데, 그중 80여 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6월 9일(음력 윤 4월 18일) 일본군사령부로 끌려갔던 의병들은 7월 말 70여 명이 석방되었지만, 홍주의진의 참모였던 남규진·문석환·신보균·신현두·안항식·유준근·이상두·이식·최상집 등 이른바 '홍주 9의사'는 대마도로 끌려가게 되었다. 남규진·신현두·유준근·이식 등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무기형을 받아 적국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그날의 심회를 유준근은 '마도일기(馬島日記)'-책 이름도 '대마도일기'라고 하지 않았다. '대(對)' 소릿값이 같은 '大'로 들리는 것조차 싫었기 때문이었다-에 이렇게 남겨 놓았다.

"병오년 6월 18일(양력 8월 7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홍주 9의사는 대마도의 이즈하라(嚴原) 경비대에서 감금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의 풍속과 예법을 지켰고, 이에 맞지 않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따르지 않았던 지조를 보였다. 유준근은 이미 일본군사령부에서 갖은 고초를 당할 때 "우리들은 의로써 거병하였던 것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일본 음식을 받아먹을 수 없다"며 조선의 관청 급식을 요구해 이를 관철했던 터.

'마도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2일(양력 8월 21일) 일기가 음산했다. 통사가 일찍 와서 '집 안에서 갓을 쓰고 있는 자에게는 밥을 주지 않아야 마땅하다' 하고는, 심지어 욕하고 구타까지 했다. '비록 이 땅에 감금을 당했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 한국 예속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집 안에서 갓을 쓰는 것은 한국의 전해 오는 법도이니 차라리 굶어죽을망정 갓은 잠깐이라도 벗을 수는 없다' 대답하고 밥을 물리쳤더니 강제로 풀을 뽑게 하였다. 오후 6시경에 통사 중에 한 사람이 와서 위로하고 밥을 권하면서 '아까 통사가 한국의 예속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망언이 있게 된 것이니 행여 개의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며, 누누이 밥을 들라고 권했다."

1차 단식이 있은 후 1주일 되던 날인 8월 28일, 최익현과 임병찬이 각각 3년과 2년 구금형을 받아 그곳에 도착하니, 그날 오후에 대마도 경비대장이 방문했다. 안내자가 갓을 벗고 경례하라고 하자, 유준근은 언성을 높여 꾸짖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제도를 지켜 갓을 벗지 아니하는데 무엇이 일본에 해가 되기에 이와 같이 곤욕을 주느냐? 이것은 바로 우리 의복을 변경하고 머리를 깎으려는 수단이 아니겠는가? 대의에 관계되는 바이니 나는 죽기로 결정했다. 다시 여러 말을 하지 말라." 그는 최익현, 남규진 등과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이틀 후 대마도 경비대장이 죽과 밥을 가져와서 "머리를 깎고 옷을 변경하는 일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밥을 먹고 나라를 위해서 몸조심하오"라고 말하자 비로소 두 번째 단식을 중지했다. 최익현이 순국(1907년 1월 1일)하자 임병찬과 대마도에 와 있던 최익현의 두 아들 영조·영학, 제자 노병희 등은 귀국했지만, 그는 경술국치 후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귀국 후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조국 광복을 꾀했던 그는 고종 인산일(1919년 3월 3일) 직후인 3월 5일, 순종이 우제(虞祭)에 나갈 때 백관형·송주헌 등 10여 명과 함께 청량리로 나아가 융희 황제의 복위와 광복을 성취할 것을 청원하는 글을 올리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6월형(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3·1운동 직후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파리강화회의에 서한을 보냈던 이른바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콜레라가 창궐하던 1920년 여름, 일제가 행인들에게 예방접종을 했는데 그는 일제에게 예방접종을 받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겨 이를 거부했다가 유명을 달리했으니, 그는 일생 동안 일제에 추호도 굴복하지 않은 의병장이었다.

김해건설공고 교사·문학박사(의병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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