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쇼핑' 제동 장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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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전자 쇼핑으로 태어난 아이라면 / 정혜경 / 뜨인돌

유전자는 이제 더 이상 과학서적이나 백과사전 속의 전문용어가 아니다. 사람 유전자 변형도 멀지 않은 미래라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이를 통제할 과학윤리는 아직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사진은 지난 2000년 6월 영국 런던에서 공개된 DNA 이중나선 구조.

유전자는 생명체의 구조와 형질을 담고 있는 일종의 설계도다. 그 설계도의 아주 작은 부분만 바꿔도 출생 이후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아주 심각한 선천성 질병이 우려되는 아이라면 유전자 변형은 그에게 '신의 축복'에 다름아니다. 그 신이 비록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떨까. 축구광인 아버지의 바람대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순발력과 평형 감각, 공간 지각력을 두루 갖춘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성장한 아들이 묻는다. "내 운명을 왜 아버지가 마음대로 결정하셨나요?" 그는 어쩌면 가수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유전자 쇼핑으로 태어난 아이라면'(정혜경/뜨인돌/9천500원)은 이런 유전자 쇼핑의 미래에 대한 미리보기다. 문제는 그런 미지의 세계가 임박했다는 것. "우리는 이미 유전자 쇼핑 시대를 향해 달려가는 열차에 올라 탔다. 그 열차를 움직이는 바퀴는 '변화'이고, 기술·사회적 변화의 속도에 따라 우리는 남들보다 빨리 목적지에 닿을 수도, 매우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176쪽)"

얼핏 유전자 조작 지지로 들릴 수 있겠다. 하지만 책은 그런 일방의 의견을 경계한다. 책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제동 장치다. 달리는 열차를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지점에 멈추게 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화약이나 원자력이 그랬던 것처럼 생명공학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두 세계를 모두 지향한다는 것. 심각한 질병이나 장애를 치료하고 식량 위기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후유증도 우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동 장치로 거론되는 것은 결국 인문학이다. 사람의 무늬가 담긴 철학과 윤리,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과 토론이 요구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생학은 그런 인문학의 제동 장치 부재가 남긴 상처이기도 하다. "우생학은 자칭 우수한 인종인 유럽인이 열등한 제3세계인을 다스리고 수탈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양 정당화해 주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정신박약아의 결혼을 금지시켰고, 이와 유사한 법률이 독일과 스웨덴, 노르웨이에서도 시행됐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그런 우생학 비극의 정점에 있었다.(139쪽)"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것은 과학자다. 하지만 그로 인해 변화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어차피 '우리'다. 이왕 신의 영역에 들어가려고 작정했다면 저주보다 축복이 전제돼야 한다. '과학 읽기'는 그런 축복과 삶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일 수 있겠다.

저자는 국내 대학에서 과학사와 생물학사를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부산대 출신으로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때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백현충 기자 choon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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