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3국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슬픔] <3> 에스토니아의 노래하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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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잡고 합창하며 스스로를 하나로 묶었다

최초의 에스토니아어 신문인 '페르누의 우체부'를 창간한 에스토니아의 민족 지도자 발데마르 얀센이 자신의 신문을 펼쳐보고 있는 동상. 에스토니아 페르누 시내 중심부에 세워져 있다.

해안은 예부터 정복과 저항의 교차 지점이었다. 발트도 그랬다. 정벌과 항거가 수없이 교차하고 접점을 이룬 곳이었다. 생존과 죽음의 무상한 경계는 그런 역사 속에서 뚜렷한 선을 무수히 그어왔다. 발트해가 유독 더 차갑고 짙푸른 빛깔을 띠는 까닭도 어쩌면 그런 슬프고 억센 역사 때문이리라.

에스토니아 페르누도 그런 역사의 흔적이 뚜렷한 도시다. 19세기 중반부터 정체성을 갖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에스토니아어 신문 '페르누의 우체부'를 만들었고 민족자각 운동을 펼쳐왔다. 그 신문을 창간했던 민족지도자 발데마르 얀센은 그런 풍토 속에서 페르누에 삶의 똬리를 틀었다.


노래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무기

4~5년마다 성대한 합창제 개최

그 자체가 강력한 저항의 힘 발휘

구 소련의 탱크조차 뚫지 못해



페르누의 얀센 동상은 꽤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후손들이 엮은 '인간사슬(발트의 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런데 얀센 동상과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점령자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의 흔적도 있었다. 그런 모습에서 잊고 싶은 흔적과 기억하고 싶은 흔적은 어떻게 교차되고 부정될까, 하는 생각이 시나브로 일어났다.

그런데 세월의 힘이 있을까? 식민지가 된 날로부터 50년이 되던 해인 1989년 5월, 발트 3국은 민족정치정당 통일조직인 '발트총회'를 창설해 소련연방정부에 "불법 점령사실을 인정하고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집단행동을 하기에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준비할 시간도 대대적인 국민들의 참여도 불확실하여 실패할 가능성마저 짙게 드리운 절박한 상황이었다. 소련의 무력침공도 우려됐다. 이 같은 우려를 반증하듯 그해 8월 15일자 소련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는 발트 3국이 계획하고 있던 집단행동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또 루마니아 독재자인 차우셰스쿠는 스스로 지원 병력을 보내겠다는 흑심도 드러냈다. 그런 불안감이 행사 당일인 8월 23일까지 계속됐다.

페르누를 지나 탈린까지 이동하던 도중에 억수 같은 비를 만났다. 앞 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폭우였다. 도저히 운전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해 결국 숲속 휴게소에 자동차를 댔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 향이 진했다. 그런데 그 진한 커피 향이 묘한 숙연함을 불러왔다. 약소국의 처절함이었다. 에스토니아는 지구 역사상 가장 많은 외침과 핍박을 당한 나라였다. 그로인해 망명, 학살, 추방, 유배 등을 이유로 국토를 등진 국민이 한때 인구의 절반에 이르기도 했다.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친 하늘은 이내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을 드러냈다. 그 하늘 아래로 비에 젖은 두송나무가 푸른 잎을 더 푸른 빛깔로 그려냈다. 소련 치하에서 벗어난 에스토니아의 독립과 자유도 아마 그런 빛깔을 닮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두송나무를 뒤로 하고 또 한참 동안 자동차를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발트의 길'의 또 다른 시작이자 끝 지점인 토옴페아 성벽에 닿았다. 그동안 정말 멀고도 먼 길이었다.

탈린 시내에서 만난 중년의 얀 운두스크는 이렇게 말했다. "탈린 시민들의 열광은 대단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러시아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이고 멀리 서부 유럽에 살고 있던 주민들도 찾아왔답니다. 손발을 움직일 수 있는 주민이라면 누구나 일심동체가 되어 하루를 보냈지요. 촛불로 서로를 격려하고 노래로 서로의 마음을 달랬습니다." 학술원 회원이자 '운데르-투글라스 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그는 당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시민들이 손에 손을 붙잡고 함께 합창하는 것"이었다고 주저없이 말했다.

노래는 그들에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무기였다. 오랫동안의 핍박 속에서도 자신과 가족, 그리고 후손을 잊지 않을 수 있었던 장치였다. 사실 그들의 핍박은 13세기 초부터 거의 700년 동안 이어졌다. 독일과 스웨덴, 러시아 등 외세의 지배는 끝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래를 통해 핍박을 견디고 스스로를 하나로 묶어왔다. 단결된 힘의 원천이 바로 노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발트의 길'을 만들면서 스스로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또 함께 함성을 지를 수 있었다. 당시 '발트의 길'에 동참한 인구가 전체의 4분의 1에 달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만큼 노래는 큰 힘을 지녔다. 이런 단결된 힘의 노래가 지구상 어디에 또 존재할까?

1989년 8월23일 마침내 오후 7시가 됐고 시민들은 손에 촛불을 하나씩 들고 크게 외쳤다. '바바두스 (Vabadus·자유).' 하지만 이 같은 외침은 이미 2년째 계속된 대합창 축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노래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 합창을 통해 스스로 단결을 약속할 수 있었던 에스토니아의 전통은 결국 또 다른 2년 뒤 독립으로 이어졌다.

'노래하는 민족' 에스토니아. 그들은 노래 하나로 소련의 탱크조차 뚫지 못할 단결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 합창의 역사는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았다. 19세기 말 타르투에서 시작된 '라울루피두(Laulupidu.대합창제)'는 올해로 벌써 140년째다. 에스토니아 전 국민은 물론이고 해외에 살고 있는 교민들도 이날만큼은 모두 찾아와 민요와 현대음악을 곁들여 가며 합창을 부른다고 한다. 그런 만큼 합창단원 수가 많을 때는 무려 3만명을 웃돈다. 특히 에스토니아 민족 여류시인 리디아 코이둘라의 시에 구스타프 에르네삭스가 곡을 붙인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은 에스토니아 국가가 금지됐을 당시 국가처럼 불려지기도 했다.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 애정을 바쳤던 그대에게/ 노래하네. 크나큰 행운을/ 생기발랄한 에스티여.'



에스토니아의 대합창제는 인접한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발트 3국은 4년 또는 5년마다 국가적으로 성대한 합창제를 개최하고 있다. 노래는 그 자체로 평화이고 때때로 탱크보다 더 강력한 저항의 힘을 발휘했다. 노래는 또 스스로의 울분을 달래고 결국 620km의 발트의 길을 여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다시 한 번 외쳐본다. '라이스베스(Laisves)' '브리비바(Briviba)' '바바두스(Vavadus)'.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지녔다. 바로 자유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와 독립은 과연 찾아왔을까? 핍박과 지배는 이제 정치가 아니라 경제에 달렸다.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그들이 또 다시 헤쳐나가야 할 벽이고 도전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켜냈던 '발트의 길'은 그런 또 다른 도전을 향한 용기의 자양분이 될 테다.

이상금
부산대 독어교육과 교수
타루투 대학의 리나 루카스 교수는 이 같은 에스토니아의 운명에 대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 한 대목을 인용했다. "운명이란 자신의 마음 속에, 본질 속에, 성격 속에 이미 감춰져 있거나 포함돼 있습니다. 내면으로부터 원하지 않은 것은 결코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닥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자신으로부터 끌어내 살아가는 것이며 동시에 그 운명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이 됩니다."

낙원과 지옥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낙원과 지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전적으로 스스로에게 주어져야 한다. 에스토니아는 그 권리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sgli@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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