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비평공모-박찬욱의 영화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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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에 김보년의 '자살하는 사람들'

시네마테크 부산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가 함께 주최한 '제1회 비평공모-박찬욱의 영화세계'에서 김보년의 '자살하는 사람들-'복수 3부작'과 <박쥐>를 중심으로'(원문 게재)가 당선됐다.

가작으로는 송경원의 '이상한 영화 나라에서 날아온 유희의 퍼즐'과 김정남의 '박찬욱 비평론-'복수 3부작'을 중심으로', 이지영의 '장르 게임의 반칙과 공간의 건축학-'박쥐'를 중심으로' 등이 뽑혔다.

김보년의 비평은 "응모작 중 '자살 충동'이라는 열쇳말을 통한 분석 방식의 일관성, 명료한 개념 사용, 정제되고 부드러운 문장력에서 가장 돋보였다"는 심사평을 얻었다.

수상자에 대한 시상은 오는 12일 오후 7시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리는 제1회 수영포럼에서 이뤄진다.

김수진 기자 kscii@

자살하는 사람들 - ‘복수 3부작’과 <박쥐>를 중심으로

김보년

1. 과잉된 스타일, 그 뒤로 숨는 죽음들

박찬욱은 한국 영화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감독이다. 그는 거의 유일하게 대중과 평단의 관심을 동시에 받고 있는 감독이다. 지지여부를 떠나서 일정 이상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그의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뜨거운 찬반 논쟁이 벌어진다. 동시대 한국 감독 중에서 이 정도 위치를 갖고 있는 감독으로는 봉준호 정도가 있을 뿐이지만, 박찬욱 감독의 경우는 해외 영화제 경쟁부문 출품과 수상이라는 상징까지 갖고 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대표 감독’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의견을 표명하고 싶어 하며, 그의 다음 영화를 궁금해 한다. 쉽게 말해서 박찬욱은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이유는 그의 영화에서 현재 한국대중사회의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별 영화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내는 것도 의미심장하지만 어떤 감독 개인이 만든 일련의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높은 관심을 받는 것은 대중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또한 주목할 만하다. 또는 반대로 박찬욱의 영화가 대중에게 소구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 박찬욱의 영화와 대중들 사이에는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우려감이 드는 것은 박찬욱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성격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뚜렷하게 양식화된 스타일의 과잉을 보여준다. 조상경-류성희 콤비가 보여주는 ‘특이한 패턴의 벽지와 의상’ 이라든지, 정정훈의 촬영이 보여주는 카메라 움직임과 미장센은 확실히 ‘박찬욱표’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올드보이> 이후 음악 감독으로 참여하고 있는 조영욱이 들려주는 현악기 멜로디가 강조된 음악은 이러한 외형과 맞물려 어떤 과잉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물론 스타일이 뚜렷한 것과 스타일의 과잉은 구분을 해야 한다. 하지만 박찬욱의 경우는 그 뚜렷한 스타일이 종종 서사의 개연성을 정지시키고 스타일 그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과잉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서사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서는 내러티브의 논리보다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과잉된 파토스가 먼저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박찬욱은 폭력의 묘사에 아낌이 없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사람의 살이 찢기거나 피가 튀는 것을, 심지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자극적인’ 장면들 역시 서사의 개연성을 정지시키고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관객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의 방이 보여주는 양식적인 세트에 일단 눈길을 뺏길 수밖에 없으며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신하균)의 동선의 개연성을 생각하기보다 ‘경동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몸을 움츠리게 되며,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가 장도리로 다른 사람의 이빨을 뽑는 장면을 기어이 클로즈업으로 보여줄 때 그 앞에서 논리적 사고를 멈출 수밖에 없다.

부연하자면, 이런 식으로 스타일의 과잉을 보여주는 영화는 많다. 당장 우리가 즐겨 보는 액션 장르의 영화들만 생각해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과 박찬욱의 영화가 다른 것은 박찬욱의 영화는 과잉된 스타일을 앞세워 그 뒤에 서사의 개연성을 숨긴다는 것이다. 즉, 서사의 빈자리를 스타일이 채우는 꼴이다. 또는 다르게 말하자면 서사상의 균열을 스타일이 억지로 봉합하려 하고 있다. 그 때 관객은 이야기 속에서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지점들을 놓치게 된다. 박찬욱의 영화가 양식적인 스타일을 방패삼아 숨은 서사 속 무의식적 욕망을 거의 밀어붙이다시피 할 때, 관객은 그 부분을 놓치고 만다.

그렇다면 관객이 스타일에 눈멀어 놓치고 마는 영화의 무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찬욱의 영화에는 죄의식을 모조리 끌어안고 자살하려 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별 이유 없이’ 계속해서 죽어간다. 장르적인 순간을 위해서 죽어가고,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죽어간다. 등장인물이 소모품처럼 다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내기 어렵다. 처음에는 장르적 장치가 방패가 되어주거나(<공동경비구역 JSA>), 또는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인물들을 전면화 시켜서 오히려 의식하게끔 했다면(<복수는 나의 것>), 최근에 들어서는 그러한 방어 장치마저 없어지고 있다. 특히 <박쥐>에 이르러서는 등장인물들에게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만다. 그들은 그냥 죽기 위해 그 자리에 놓여 있는 듯하다. 더 큰 문제는 앞서 언급한 영화의 외적 요소들과 인상적인 몇몇 장면들에 가려서 이런 모습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영화에서는 스타일이 내용을 결정한다. 그러나 지금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스타일이 내용을 감추는데 사용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과잉되고 도드라지게 양식화된 스타일과 재기발랄한 장르적 상상력이 역설적으로 서사상의 균열과 위기 지점을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서사상의 균열은 죽음, 특히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통해 발생한다.

2. <공동경비구역 JSA> - 죽어야만 끝나는 영화.

‘복수 3부작’ 이전에 먼저 <공동경비구역 JSA>을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개봉 당시 소위 ‘웰메이드 상업 영화’로 평가 받으며 대중에게 박찬욱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이 영화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남북 병사들간의 우정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상황을 다룬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진행된다.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은 설득력 있게 그려지며, 어느 순간 불현 듯 발생하는 갈등과 그로 인한 비극도 따라가는데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되려는 순간, 이수혁 병장(이병헌)이 자살로 목숨을 끊는다. 이때는 이미 남성식 일병(김태우)이 투신 자살을 기도해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이 두 명이 자살을 시도한 것은 물론 진실이 밝혀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정우진(신하균)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자살이 비극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건이 거의 모두 해결된 상황에서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에게서 살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생각해볼만하다. 즉, 죽음은 예정돼 있던 것이었고 영화가 진실을 알려주기를 기다렸다가 진실이 플래쉬백을 통해 관객에게 알려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자살을 택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그렇게 갑작스러운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두려움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느니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을 영화의 정서적 효과를 위한 반전의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추리극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통해 이 죽음을 충분히 ‘받아들일 만 한’ 것으로 그리는 것이다. 살아남아서 자신을 희생하며 까지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오경필 중사(송강호)의 성숙한 캐릭터만이 오롯이 영화에 위로를 준다. 그러나 이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제외하고 이러한 캐릭터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며, 이들의 죽음은 앞으로 이어질 박찬욱 영화의 수많은 죽음을 예고한다.

3. ‘복수 3부작’ - 죄의식 끌어안기, 혹은 죄의식 전가하기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을 만든다. ‘복수’를 주요 테마로 삼고 있는 세 편의 영화들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복수의 대상과 주체가 모두 죽음으로 끝장을 보고야 마는 ‘하드코어’한 복수를 보여준다.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다. 먼저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결과적으로 총 14명의 사람이 하나씩 죽어 나간다. 영화의 시작은 류(신하균)의 누나의 수술비 마련을 위한 유괴극이지만, 사실상 이는 구실일 뿐이며 사람들이 하나씩 죽게끔 하기 위한 첫 번째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이 많이 죽는 영화가 <복수는 나의 것> 뿐 만인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죽음들은 그 연결고리가 헐거운 편이다. 오히려  죽음이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죽음은 너무나 불가항력적인 것이라서 실제 복수와 관계없는 사람들마저 무차별적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를테면 마침 동진(송강호)이 영미(배두나)를 전기고문하고 있을 때 짜장면 한 그릇을 배달하기 위해 찾아왔던 중국집 배달부(류승완)를 생각해보자. 영화는 이 사람에 대해 설명을 전혀 해주지 않는다. 단지 영미의 시체 옆에 놓여 있는 시체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가 하면 동진의 딸은 어떤가. 그녀는 단지 냇가를 건너다가 다리에서 미끄러져 익사한다. 영화는 친절하게(?) 그녀가 수영을 얼마 전에야 배우기 시작했다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이를테면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시침 뚝 떼고 ‘그건 그녀가 아직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라고 부연 설명 해주는 것이다. 이 영화가 복수의 허무함에 대해 얘기하는 계몽 영화가 아닌 이상에야 이런 방식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나열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동진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갑작스러움 때문에 일종의 소격효과마저 발생한다. 이 엔딩이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죽음 앞에 놓인 인물들의 무기력함을 전면화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친절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만든 <올드보이>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보여주었던 자살적 죽음을 완전히 전면화해서 다시 한 번 등장시킨다. 오대수(최민식)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딸과 섹스 했음을 알고, 자신의 혀를 자름으로써 복수의 행위가 완결되자 복수의 집행자인 이우진(유지태)은 그제야 자신이 누나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눈물 흘리며 자신의 머리에 총을 당긴다. 오대수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지만 이우진에게는 결국 죽는 것만이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답이다. 이우진은 누나의 죽음 이후 그 책임을 타인(오대수)에게 전가하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문제의 핵심은 자신에게, 즉 누나의 손을 끝까지 잡고 있지 못한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박찬욱 영화가 보여주는 자살의 심리적 메카니즘이다. 어떻게든 죄의식을 타자에게 떠넘기려 하지만 결국 그 죄의식은 돌고 돌아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 때 그는 그 죄의식을 감당해 낼 수 없으며,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죽음 뿐이다. 그 진실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 보이>와는 반대로 죄의식이 타자에게 온전히 넘겨졌을 때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복수의 집행자인 금자씨(이영애)는 치밀한 계획의 실행 끝에 결국 백선생(최민식)에게 성공적으로 복수를 한다. 심지어 백선생의 손에 죽은 아이들의 가족을 불러 모아 복수의 기회를 나누어줄 정도로 치밀하게 복수를 집행한다. 그리고는 두부 모양의 생크림 케익을 (얼굴을 파묻고)먹으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보여준다. 금자의 딸인 제니의 나레이션은 금자가 그 이후에도 어떻게든 살아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지점은 백선생에 대한 것이다. 백선생은 철저하게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올드보이> 속 오대수의 저 유명한 대사 -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아갈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는 같은 배우인 최민식이 연기한 백선생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일종의 싸이코 패쓰로 그려지며, 따라서 금자의 철저하고 ‘친절한’ 복수를 위한 완벽한 대상으로 그려진다. 복수의 집행자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대신 복수의 대상은 완전한 괴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단순히(?) 제니의 유괴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복수 과정에서 백선생이 더 많은 아이들을 목매달아 죽였다는 설정을 추가한다. 왜 제니는 입양 보내고 다른 아이들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백선생은 일말의 동정 없이 죽어도 괜찮은 사람으로 그려지고 영화는 더 이상 백선생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여기에서 과잉은 홈비디오 영상으로 보여주는 이름 모를 아이들의 애꿎은 죽음이다. 관객이 그 아이들의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 받지 못하고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책임을 백선생에게 떠넘기는 단계로 즉시 넘어간다. 결국 금자는 자신에게 돌아올 죄의식을 잘 방어해낼 수 있다. 죄의식 때문에 자살했던 <올드 보이>의 유지태가 금자의 환상 속으로 돌아와서 그녀의 죄의식을 건드리지만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선생이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백선생은 이해 불가능한 괴물이 되고 그 안에서 관객은 안도감을 느낀다. 죄의식을 끌어안고 자살하거나 죄의식을 다른 대상에게 전가하기. 이 양자 택일의 구조 안에서 죄의식의 다른 탈출구는 없다. <박쥐>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이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4. <박쥐> - 비극적 자살에서 낭만적 자살로.

<박쥐>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서사를 놓치게 하는 방어 기제는 예의 양식화된 외적 스타일과 ‘뱀파이어’라는 장르적 장치이다. 현상현 신부(송강호)는 이브 바이러스 백신 실험을 위해 생체실험에 자원했다가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된다. 덕분에 이브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되지만, 흡혈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의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친구의 아내인 태주(김옥빈)를 만난 후 사랑에 빠져 이런저런 사건을 일으키다가 태주마저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린다. 이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지고 현상현은 최후의 수단으로 태주와의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줄거리를 거칠게 정리해보았지만, 이 영화에서 서사 상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각 시퀀스 간의 유기적인 연결은 차치하고서라도 기본적인 개연성을 생략하고 있거나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현상현 신부는 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자살과 다를 바 없는 생체 실험에 자원하는지, 왜 뱀파이어가 되고난 뒤 모든 종류의 쾌락을 갈구하는지, 왜 결국 자살이란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영화는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과잉된 감정과 폭력, 섹스이며 그 안에서 단 하나 영화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상현의 일관적인 죽음을 향한 이끌림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상현의 자살로 시작해서 자살로 끝나는 영화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상현은 곧 자신의 생명을 베풀기 위해 아프리카로 날아간다. 상현이 찾아간 연구소의 소장은 순교와 자살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얘기하며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하지만 상현은 “내 기도는 잘 듣습니다” 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곧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으로 상현의 기도문이 들려온다.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언뜻 듣기에는 숭고한 희생의 기도 같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가장 극단적으로 낭만화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희생을 미화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 다짐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가장 비참한 곳까지 자신을 스스로 떨어트려 결국 신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숨어 있다. 결국 박찬욱의 자살은 스스로를 낭만적인 주체로 만드는 지경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말 부분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 태주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상현은 그녀와의 동반 자살을 선택한다. 이 시퀀스에서 상현의 대사는 단 한 마디 뿐이다. “우리 지옥에서 만나요” 태주가 “죽으면 끝” 이라고 말하든 말든 그는 자살로써 자신의 죄의식을 덜어내고 그 후의 새로운 삶을 그리고 있다. 심지어 그 자리에 나여사를 동반했다는 것은 상현의 의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준다. 나여사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써 그는 자신의 죄의식을 더 확실하게 끌어안는다.
이 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상현이 영화 내내 일관적으로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제가 좋아서 뱀파이어 피를 수혈 받은 건 아니잖아요”). 심지어 강우(신하균)를 죽일 때에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태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스스로 변명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문제를 회피하고 자신의 죄의식을 방어하다가 결국 태주로 인해 상황이 돌이킬 수 없어지자(이 때도 문제가 되는 것은 상현이 아니라 태주이다) 그 때 비로소 다시 죽음을 택한다. 문제는 죽음 외에는 답이 없는 것처럼 영화가 자연스럽게 자살을 답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여기에는 태주의 태도도 한 몫 한다. 약간의 우스꽝스러운 반항을 한 뒤, 그녀는 비교적 간단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추억이 깃든 상현의 신발을 꺼내 신는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이전의 영화들이 자살을 비극적인 것으로 그린 것과 비교하면 이는 주목할 만하다. 심지어 영화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신발이다. 낭만적 자살을 위해 멜로드라마적 장치까지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현은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사명까지 등에 지고 있다. 이제 상현은 모든 죄의식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속죄를 완성시켜 줄 대타자(나여사) 앞에서, 사후 세계를 기약하며 자살한다. 이토록 완벽하고 숭고한 자살이라니!

5. 살아도 괜찮아

결국 다시 앞에서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가자면 - 박찬욱의 영화가 대중들의 무의식과 공명하는 지점은 이러한 죽음, 즉 자살적 몸짓을 향한 끌림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가정을 해본다.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그 죄의식을 타자에게 전가하다가, 결국 자신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죄의식을 모조리 끌어안은 뒤 자살하기. 한국의 관객들이 박찬욱의 영화와 공명하고 있는 부분이 이런 것이라면(공교롭게도 복수 3부작 이후 삶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거의 유일한 영화인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 했다. 박찬욱이 삶의 의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박찬욱의 영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박찬욱의 영화는 양식화된 스타일과 장르적 감수성에 기인한 파토스의 강도를 더해가면서 그 안의 등장인물들은 자살의 몸짓을 보인다. 이 말은 단순히 ‘영화 속 등장인물을 쉽게 죽여서는 안 된다’ 라는 윤리적 명제를 확인하려 하는 것은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적당한 때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 죽음을 택하고 마는 인물들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박쥐>는 그러한 맥락에 있어 정점에 다다른 영화이다. 박찬욱이 다음 영화에서는 어떤 선택을 보여줄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다음 영화에서는 더 끔찍한 것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자살은 이미 숭고한 선택이 되어버렸고, 그 끔찍함은 더욱 화려해진 스타일에 가려지며 한국의 관객들은 다시 한 번 그 안에서 자신도 모른 채 뜨겁게 화답할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박찬욱이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만든 감독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일군(정지훈)은 밥을 먹지 않는 영군(임수정)에게 갖은 노력을 다해 밥을 먹게 만들고, 세상을 끝장내겠다는 영군을 섹스에 눈 돌리게 만든다. 황량한 벌판 위 두 남녀의 나신 위로 무지개가 뜨면서 끝나는 이 영화는 ‘죽으면 안 돼’ 라고 말한다(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서사가 정신병원이라는 판타지적 공간에서 전에 없이 산만한 진행 속에서 가능했다는 점 역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일군과 영군 역시 죄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일군은 자신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고 영군은 자신 때문에 할머니가 밥을 못 먹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죄의식을 온전히 방어해낸다. 이 때 방점은 환상이다. 지금까지 박찬욱의 영화에서 진실과의 대면은 곧 자살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이를 환상 구조를 통해 막아낼 수 있는, 또는 우회해서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복수 3부작’ 이후 박찬욱이 찍은 두 편의 영화 -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박찬욱은 다음 영화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나 역시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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