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역사] 비운의 혁명가 김산(193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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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경력을 심사한다. 반역자, 일제의 간첩 혹은 트로츠키파 등의 의혹에 대해 조사했지만 결론을 내릴만한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뒷날 중국 비밀경찰의 총수로 악명을 떨친 캉성은 김산의 처형을 지시했고, 33살의 젊은 조선 혁명가는 뜻을 채 펼치지도 못한 채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비운의 혁명가 김산. 본명은 장지락이다. 1905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19년 일본에서 잠시 유학생활을 하다 이듬해 15살의 나이로 중국 대륙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옌안 등지를 누비며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한때 무정부주의에 경도되었으나 김성숙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 사상을 흡수하였다. 중국 공산당과의 연대를 통한 독립으로 투쟁방향을 잡은 김산은 1927년 중국 공산당이 광둥에서 봉기한 광저우코뮌에 참여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1930년과 33년 국민당 정부의 비밀경찰에 체포된 뒤 일본 경찰로 넘겨져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버텨 풀려났다. 그러나 예상보다 빨리 석방된 것이 동지들의 의심을 샀다. 결국 당적을 박탈당한 김산은 당적 회복과 조선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 옌안으로 갔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역사 속에 묻힐 뻔했던 김산의 생애는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에 의해 전해질 수 있었다. 웨일스는 김산이 죽기 1년 전인 1937년 여름 김산을 만나 두 달 동안 22회에 걸쳐 대화한 기록을 1941년 <아리랑>으로 출간했다. 하지만 이 책은 1984년에야 국내에 번역본이 나왔다. 이데올로기 장벽 때문이었다. 1983년 중국 공산당은 김산을 처형한 과오를 인정하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고, 우리 정부에서도 2005년 훈장을 추서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페루-칠레 앙콘조약 체결(1883.10.20)

△일본, 재일교포학교 폐쇄령(1949.10.21)

△중국 덩샤오핑, 일본 방문(1978.10.22)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1969.10.23)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1994.10.24)

△소설가 앙리 콩스탕 출생(176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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