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풍경화가 전통 재료 먹 옻칠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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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발리'

광택이 났다. 자동차는 흑백사진처럼 감쪽같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면 형체는 사라지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남아있다. 올이 촘촘한 천 위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다.

빛이 났다. 광안대교의 긴 꼬리가 반짝거렸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빛의 정체는 자개임이 드러난다. 만져보면 유리보다 반질거린다. 나무로 짠 틀 위에 옻으로 그린 그림이다.


·장재록전
먹으로 그린 이 시대의 소비 욕망
번짐과 스밈으로 표현한 자동차

·한국옻칠회화전
전통공예의 틀에 갇혀 있던 옻칠
반짝거리는 회화로 놀라운 변신



먹으로 그린 그림이라면 흔히 문인화나 산수화를 떠올리고 옻칠을 한 작업은 문갑에 장식된 민화를 떠올린다. 먹과 옻칠이라는 지극히 전통적인 재료들이 빛나는 현대적 풍경화로 재해석되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 중동 코리아아트센터에서 12월 6일까지 열리고 있는 '장재록-또 다른 풍경전'. 장재록은 먹으로 자동차와 다이아몬드, 샹들리에 같은 반짝이는 이 시대의 소비 욕망을 그린다.

지난해부터는 자동차에 비춰진 풍경에 초점을 맞췄다. 자동차 보닛에 비춰진 나뭇가지나 건물은 실제라기보다는 그가 이상적으로 지향하는 풍경들이다. 한데, 그가 사용하는 천과 먹은 빛을 빨아들이는 소재인데도 희한하게 반질거린다. 녹묵, 중묵, 담묵처럼 색상의 단계에 따른 착시현상 때문이다.

배경은 거리감을 주기 위해 번짐의 효과를 많이 주는 대신 자동차는 번짐을 최소화했다. 자동차마다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최적의 시점을 찾아 위에서 혹은 앞에서 혹은 밑에서 본 풍경을 그렸다. 흰 차는 동양화의 여백을 살려 처리했다.

10m쯤 떨어져 멀리서 보면 흑백사진으로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면 먹의 스밈과 번짐으로 인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픽셀 같은 덩어리들뿐이다. 뉴욕 타임스퀘어의 야경을 그린 작품은 뒤로 물러날수록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까만 먹에서 나오는 에너지 때문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051-742-7799.

부산 남구 대연동 한국아트미술관에서 24일까지 열리고 있는 '한국옻칠회화전'은 전통공예의 틀에 갇혀 있던 옻칠을 과감히 회화의 장르로 끌어왔다.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추상화 등 얼핏보면 유화 같지만 가까이 가서 만져보면 유리만큼 반질거리고 반짝인다.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을 비롯해 통영의 미술인들이 몇 년 전부터 옻칠의 채색회화로서의 가능성에 주목해 작업한 결과물이다. 방부 방수 향균 효과가 탁월한 옻칠의 특성을 살려 나무로 만든 틀에서부터 작품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옻칠로 작업했다.

세병관에서 내려다보는 통영항을 그린 서유승의 '일출'이란 작품. 흑진주처럼 검고 짙으면서 빛나는 검은 색 산이 인상적인데, 산의 선은 자개로 붙였다. 자개를 먼저 붙이고 광물성 안료와 옻을 섞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몇 번이고 문질렀다. 작품은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갈고 긁어내고 문지르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옻칠은 야경 표현에 탁월한데 하정선의 '부산 야경'은 자개 하나하나가 빌딩 속 조명처럼 반짝거린다. 김성수의 '발리'는 보리 이파리를 나전으로 붙이거나 세필로 그려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051-612-3400.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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