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에세이] 우리는 거대한 보리밥
요즘 난 보리밥에 빠져 있다.
매주 황령산에 오르는 10여 명 정도의 모임이 있다. 이른 아침 금련산 청소년수련원 입구에서 모여 산 중턱까지 오른 뒤 하산한다. 하산 후에는 차로 용호동에 있는 보리밥집으로 이동해 식사를 한다.
이 보리밥집 반찬은 12~14가지. 다시마 미역 멸치 김 등 해산물부터 콩나물 시금치 양배추 오이 무말랭이 고사리 부추 등 각종 나물에다 옛 맛이 생각나는 된장에 숭늉까지 나온다. 때에 따라 추가되는 고추 가지 산초잎 등 제철 채소가 즐거움을 더해 준다. 따뜻한 보리밥에 양껏 반찬을 올리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적당히 넣어 쓱쓱 비빈다. 비비면 각 재료의 감칠맛이 더해진다. 요새 말로 시너지 효과다. 나는 이 보리밥을 '억수로' 좋아한다.
황령산 산행 뒤 보리밥집 들러
한일 관계도 맛난 밥 같았으면
부산 사람들과 같이 산에 오르고 보리밥을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1년을 보냈다. 다 함께 봄에는 산복숭아 꽃을 즐기고 여름에는 모기에 물리며 가을에는 오리나무 열매를 줍고 겨울에는 추위에 떨기도 했다. 외국인은 나 혼자고 연령도 직업도 서로 다르지만 이 모임에서는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간혹 의견 차는 있어도 넘을 수 없을 정도의 벽은 없었다. 오히려 푸근한 동족 의식조차 느낄 때가 많다. 근본적인 감성, 인간성이라는 차원에서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마도 한국인과 일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마음이 통하는 우리는 하나다.
다만, 최근 한일 관계가 순탄치 않은 점도 있어 뜻하지 않는 곳에서 엉뚱하게 욕을 먹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때 고인(故人)이 되신 전 주한일본대사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한일 관계는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반복하면서 한일 관계는 반드시 나선형 계단처럼 더욱 높은 쪽으로 올라가게 된다.' 왜 대사님은 한일 관계가 반드시 보다 높은 곳으로 발전해 간다고 확신하셨을까.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만난 훌륭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런 확신을 얻으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에게도 그런 확신의 '원점'이 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동일본을 강타한 직후, 부산 시민 여러분들께서 가장 먼저 피해지역에 구호물자를 보내 주셨다. 그 후에도 영남지역의 수많은 분들께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때의 감사하는 마음이 나의 '원점'이다.
외교의 본질은 이쪽의 요구를 상대가 억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해결이 어려운 문제일수록 서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공통의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입지를 되도록 넓혀, 그 위에 발전적인 관계를 구축해 가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사막 위에 모래 누각을 쌓듯이 인내가 필요하며 또한 끝이 없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외교의 세계에서는 선인(先人)들이 끈기와 지혜로 쌓아 올린 신뢰와 약속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인구 약 3만 3천 명의 쓰시마에 작년 15만 명의 한국 분들이 왕래했고, 올해는 그 수가 더욱 늘어 17만 명을 넘을 것이라 한다. 이러한 인적 교류가 쓰시마와 부산지역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또한 영남지역과 규슈지역 간에는 한국과 일본의 자동차에 사용되는 우수한 부품들이 오가고 있다. 국경을 초월한 이 지역은 사람 물자 돈이 왕래함으로써 향후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한 보물 지역이다.
한국과 일본에 걸쳐 있는 바다는 '거대한 그릇'이다. 이 그릇에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쌀'과 '보리'를 넣고 사람 물건 자금이라는 '반찬'을 더해 자유로운 왕래를 나타내는 '거대한 주걱'으로 잘 섞어 보자. 얼마나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낼 지 상상을 못 할 정도다.
우리는 무한한 미래를 가진 거대한 보리밥이다.
오스카 재부산일본국총영사관 수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