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이별의 다섯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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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죽음에 관한 연구에 일생을 바친 스위스 출신의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암환자 등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의 심리학적 반응 혹은 태도가 대체로 다섯 단계를 밟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부정'이다. 진단 결과를 의심하고 믿지 못한다.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의 전체를 물들이기 시작한다. 두 번째 단계는 '분노'.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찾아오냐'는 심사를 타인에게 드러낸다.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 사람에게 짜증을 부리고 신체적인 위협을 가하는 등 공격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분노의 과정이 지나면 '타협'의 단계가 온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죽음을 늦추고 싶은 마음에 타협을 시도하는 것인데, 예컨대 '낫게 되면 가족에게 더 잘해 줄 텐데…' 같은 심리적 상태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수긍은 아니다. 네 번째 단계는 '우울'. 가망 없는 현실을 깨닫는 단계로 불안, 절망, 무력감에 빠져 대화를 거부한다. 여러 걱정에 휩싸여 마음은 천근만근이 된다. 이를 지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수용'이 찾아온다.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단계다. 생을 포기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출발이라는 관점을 얻는 아이러니. 어쩌면 영적 깨달음의 경지와 맞닿는 순간이기도 하다.

저 5단계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애착 대상과의 분리 등으로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죽음의 5단계' '이별의 5단계' '슬픔의 5단계' '상실의 애도 단계' 등으로 변용된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둔 오늘, 우리는 거대한 이별을 목전에 두고 있다. 탄핵안이 가결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국민 대다수가 심리적 탄핵과 정치적 사망 선고를 내린 상태다. 대통령의 내면은 지금 어떤 단계에 와 있을까. 분노? 타협? 우울? 하지만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국민들의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다. 퀴블러 로스의 이론에 따르면, 결국 자연스러운 귀착은 '수용'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진정으로 치유하고 더불어 국민들까지 치유해 주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김건수 부장 kswoo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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