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기요·부산요 궤적을 쫓다] 1. 한국에선 막사발, 일본선 국보-<1부>일본에서 찾은 조선 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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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질 수 없는 ‘신의 그릇’… 성(城)과도 안 바꿔

기자에몽이도. 높이 8.9~9.1㎝, 입지름 15.3~15.5㎝. 일본 교토 대덕사 고봉암 소장. 신한균 제공

보는 최초의 한·일 합작 프로젝트인 조선 도자기의 교류사를 양산 법기요와 부산요를 고리로 추적해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시리즈 1부는 신한균 NPO법기도자 이사장·사기장이 한·일 교류사를 통해 양산 법기요와 부산요의 흥망성쇠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냅니다. 2부에선 부산요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도자 전문가들의 릴레이 칼럼을 통해 300년 만에 복원을 앞둔 부산요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대이도(大井戶) 다완 중 기자에몽(喜左衛門)이라는 명(銘)을 가진 이도(井戶)다완이 있다.’

조선 제기였던 ‘기자에몽이도’
차 사발로 사용한 일본인들
모두 욕창 걸려 혹독한 대가

도요토미에 미움 받은 영주
‘쓰쓰이쓰쓰이도’ 상납
성 뺏길 위기 모면하기도

우리들의 신성한 제기
막사발로 불러선 안 돼


일본 전국시대 때 등장한 기자에몽이도(喜左衛門井戶)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8세기 후반 운슈(雲州)지방의 영주(다이묘)이자 유명 차인(茶人)인 마쓰히라 후마이(松平不昧) 손에 들어갔다. 당시 지불한 돈은 금 550냥이었다.
신한균 NPO법기도자 이사장·사기장이 1994년 대덕사 고봉암에서 기자에몽이도를 보고 있다. 신한균 제공
하지만 이 사발에는 ‘이것을 가진 자는 재앙으로 욕창에 걸린다’는 불행한 사연이 전해진다. 마쓰히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두 번의 욕창을 겪었다.

마쓰히라가 사망 후 아들이 그 사발을 물려받는다. 그도 욕창에 걸린다. 아들은 ‘이 사발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신의 그릇’이라 결론 내리고 일본의 유명한 절인 교토 대덕사의 고봉암에 기증한다.

1931년 일본을 대표하는 미학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고봉암 주지의 특별한 배려로 기자에몽이도를 볼 수 있었다. 야나기의 말을 들어보자. “기자에몽이도는 천하제일의 다완으로 일컬어진다… 이것은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이 예사로 사용하던 그릇이다. 너무나도 조잡한 것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형편없이 싼 기물이다… 저 평범한 그릇이 어떻게 아름답다는 인정을 받았을까? 거기에 일본 차인들의 놀라운 창작이 있었다. 잡기는 조선인들이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대명물은 차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도가 일본으로 건너오지 않았더라면 조선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야말로 그 고향이다.”

야나기가 잡기였다고 한 기자에몽이도는 현재 일본의 국보로 되어 있고 그것을 한국에서는 막사발로 부른다. 과연 이 사발은 조선에서 잡기인 막사발이었을까?

1994년 이른 봄날. 일본 다도의 상징인 히사다 종정의 추천으로 교토 대덕사 고봉암에서 그 사발을 만날 수 있었다.
쓰쓰이쓰쓰. 높이 9.3~9.8㎝, 입지름 15.2~15.5㎝. 개인 소장. 신한균 제공
사발은 7개의 오동나무로 된 칠기상자에 칠첩으로 싸여 있었다. 칠첩상자가 하나씩 분리되었다. 하나, 둘…일곱 번째 상자를 열자 자줏빛 천 속에 평범하면서도 살짝 비뚤어진 사발이 눈에 들어왔다.

주지 스님이 내게 사발을 권했다. 거친 듯이 다가오는 손맛이 나를 전율시켰다. 무거워보였다. 사발을 들었다. 놀라웠다. 종이처럼 가벼웠다. 이것이 과연 잡기인 막사발이었을까? ‘난 대를 이어 사발을 만드는 기술자다. 절대 아니다’는 확신이 내 정수리를 때렸다.

한국과 일본의 박물관과 옛 도요지 그리고 도서관을 뒤졌다. 결과를 얻었다. 그것은 조선에서는 신성한 제기였다. 제사 때 메(밥)를 올리는 제기였다.

옛날 이 사발을 소장한 일본인은 모두 욕창으로 고생한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듯했다. 남의 나라의 신성한 제기를 함부로 가져 간 뒤 액(厄)을 제거하지 않고 그냥 차 사발로 사용한 대가를 치른 것은 아닐까?

기자에몽이도, 이런 사발들을 일본인들은 이도다완이라 부른다. 왜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일본 다도구를 집대성한 <다도전제(茶道筌蹄)>라는 옛날 책에 이도 와카사노카미(井戶若狹守)가 소장했던 다완과 같은 종류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럼 이도와카사노카미가 소장했던 다완은 어떤 사발이었을까?

‘쓰쓰이쓰쓰(筒井筒)’라는 명(銘)을 가진 이도다완을 지칭한다. 이 사발은 기자에몽이도와 쌍벽을 이루는 차 사발로 알려져 있고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우리나라의 보물에 해당)이다. 이 다완의 이력을 살펴보자.

일본의 전국시대, 이도 와카사노카미(井戶若狹守)는 일본 야마토지방의 사무라이였다. 이 사람이 자신의 주군이자 야마토 지방의 영주(다이묘)였던 쓰쓰이 준케이(筒井順慶)에게 자신이 최고로 아끼는 이 사발을 헌상한다. 쓰쓰이는 이것을 올린 사람의 성(姓)이 이도(井戶)라 이도다완이라 불렀다.

나중에 쓰쓰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미움을 받아 성을 빼앗길 위험에 직면했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원흉이다. 쓰쓰이는 성을 지키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이도다완을 도요토미에게 바쳤고 도요토미는 쓰쓰이를 벌하기는 커녕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명품 이도다완은 성(城) 하나와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나게 된다.

쓰쓰이쓰쓰이도는 도요토미가 주최한 차회에서 바닥에 떨어져 깨진다. 아끼던 다완이 깨져 도요토미가 불같이 화를 낼 때 그 자리에 있던 유명한 차인이자 다이묘인 호소카와(細川)가 당시에 유행하던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의 ‘쓰쓰이쓰쓰’편에 나오는 한 구절을 노래해 도요토미의 노여움을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후에 도요토미는 일본 다도 정신을 확립한 센노 리큐(千利休)를 시켜 깨진 그것을 수리한 뒤 측근에게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깨어져 있는 이것을 소장하고 있던 절에서 건물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매로 내어 놓았는데 일본 최고 경매가를 기록하며 가나자와 지방의 재벌에게 낙찰되었다고 한다.

이도(井戶)는 일본 사무라이의 성(姓)씨에서 나온 일본식 다완 분류명이다. 우리의 제기에 일본 사무라이의 성씨를 붙였으니 불경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조선의 제기를 한국인인 우리가 막사발로 불러서도 안 될 일이다.

다음에는 부산 왜관과 조선사발의 관계, 일본인들이 왜, 언제부터 조선 사발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신한균

NPO법기도자 이사장 사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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