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호구생활⑦] “고작 3일 임산부가 됐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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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아니가!!”

지난주 부산 한 시민단체 소장님이 대뜸 한 말이다. 만삭 아내가 ‘선잠’을 자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자, 순식간에 바보 소리가 귀에 박혔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생활하다 보면 지쳐 ‘단잠’을 자지 않을까.

그러나 아내는 침대에 누우면, 한동안 못 자고 한숨을 쉬어댔다. 격렬한 태동은 꼭 잘 때쯤 오는지 많이 아파했다.

새벽에는 조금이라도 뒤척거리면 잠에서 깼다. 아침이 돼야 그나마 ‘잠 다운 잠’을 자는 듯 보였다.

많이 늦었다. 지금이라도 임산부 고충을 느껴봐야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호구 남편’은 되지 않으리….


■5일→3일

3일간 ‘동거동락’할 묵직한 임신부 체험복. 배 안에는 태아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계가 있다. 3일간 ‘동거동락’할 묵직한 임신부 체험복. 배 안에는 태아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계가 있다.

㈔부산성폭력상담소 늘함께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감사하게도 흔쾌히 임신부 체험복을 빌려줬다. 5kg짜리다. 7개월 된 태아, 양수 등의 무게라고 한다. 7kg짜리 ‘만삭 장비’도 있지만, 다행히(?) 이날 재고가 없었다.

사서 하는 고생이지만, 은근 기대가 됐다. 운동도 되고 재미도 있겠지. 샤워하고 옷 갈아입을 때 빼고는 늘 입기로 했다.

5kg 묵직함은 생각 이상이다. 체험복을 담은 종이가방을 한 손으로 들고 인증샷을 찍으려니,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6개짜리 생수통 묶음을 나를 때 느낌이다.

회사에 도착해 체험복을 입은 시점은 10일 오전 11시 30분. 첫 몇 시간은 거뜬했다. 앉고 일어설 때 나도 모르는 신음이 나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허리 다친다” “쌍둥이냐?” “운전할 때가 제일 힘들다” 등 마주치는 동료마다 웃으며 응원했다. 배를 어루만지며 ‘가상 임신’에 함께 감정이입도 했다.

한계는 금방 왔다.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이를 피해 빨리 움직이다 보니, 몸에 쉽게 무리가 갔다. 어깨는 짓눌렸고, 허리는 뻑적지근했다.

앉아 있으면 허벅지가 눌리거나 쓸렸다.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겨울이 무색하게, 살과 체험복이 맞닿은 부분은 땀이 흥건했다. 가만히 있어도 몸에 힘이 계속 들어갔다.

첫 계획은 5일 체험이었다. 너무 섣불렀다. 착용 2시간 만에 3일로 줄였다. 눈치 빠른 동료들의 만류에 못 이긴 척 재조정. 감사했다.


■1일 차, 근로 의욕 상실

양반다리는 고통이다. 양반다리는 고통이다.

가상 아기의 태명은 ‘슬기’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에서 앞글자를 따왔다. ‘호구 주니어’를 줄인 ‘호주’도 추천받았지만,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이름이다.

온 신경이 슬기에게 쏠렸다. 간지럼을 원래 많이 타서 그런가…. 갈비뼈에 뭐가 걸려 불편했다. 최적의 자세를 찾느라 이리저리 뒤척였다.

배가 계속 압박받아 가스가 차는 느낌이다. 몸 곳곳이 땀으로 젖어, 괜스레 짜증이 올라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늘 기다리던 점심 식사는 ‘미션’이 됐다. 우선 계단 오르내리기가 아찔하다. 불룩 나온 배 때문에 계단 3칸 정도가 가려진다. ‘난간 잡기’가 필수.

보이지 않는 계단들. 아내 손을 잡아준 기억이 있는지 되돌아봤다. 보이지 않는 계단들. 아내 손을 잡아준 기억이 있는지 되돌아봤다.

양반다리를 해야 하는 식당은 피해야 한다. 배가 허벅지를 눌러 피가 안 통한다. 한 자세로 5분 이상 있기 힘들다. 일어날 때, 감전된 듯한 다리 저림은 상상 초월이다. 맛, 가격보다는 의자가 있는 식당이 우선이다.

음식은 그릇을 들고 먹어야 한다. 고개가 끝까지 숙어지지 않는다. 이날 ‘앞접시’ 없이 국밥을 숟가락으로 퍼먹다가 여기저기 흘렸다.

퇴근길 운전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핸들과 의자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긴박한 대처는 어려웠다. 후방카메라의 귀중함도 새삼 느꼈다. 뒤로 돌아보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조금씩 이해가 된다

“진짜 고생했겠네~”

집에 도착해 요리 중인 아내에게 던진 첫마디다.

샤워 후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으니 기분이 훨씬 낫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저녁 먹은 뒤 설거지를 하자, 또다시 한계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한쪽 손은 싱크대 위를 붙잡고 있다. 대충 씻다가 결국 새로 다시 했다. 발톱 깎을 때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가 분명히 있었다. 발가락 하나를 깎을 때마다 허리를 펴야 한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한쪽 손은 싱크대 위를 붙잡고 있다. 대충 씻다가 결국 새로 다시 했다. 발톱 깎을 때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가 분명히 있었다. 발가락 하나를 깎을 때마다 허리를 펴야 한다.

처음에는 배를 싱크대 위에 올리고 설거지했다. 나름 편했다.

“슬기를 생각해야지!” 이를 본 아내의 지적.

맞다. 배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곧바로 엉덩이를 빼고 허리를 숙였다.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2~3개 그릇을 씻고 나면 허리를 한 번씩 폈다. 헹굴 때는 한쪽 팔로밖에 하지 못했다. 다른 팔로 싱크대를 잡고 버텨야 했다. 문득 설거지하며 아내에게 투덜거린 과거가 스쳤다.

이후 한 시간 동안 소파에서 뻗었다. 그리고 ‘어우~’ 소리와 함께 다시 기상. 3일간 최대한 경험해야 한다는 의지. 화장실 가기, 발톱 깎기, 발 씻기, 압박스타킹 신기를 해보며 또다시 한계를 느꼈다. 참고로 비데가 없었다면, 화장실 가기는 실패였을 것이다.

유일하게 체험복을 벗을 수 있는 샤워는 무려 20~30분 했다. 샤워하며 영화리뷰(결말포함) 유튜브 2편을 다 봤다.


■2일 차, 장기가 아프다.

자정이 넘어 침대에 누웠다. 이제 이틀 남았다.

눕기 전부터 이미 ‘선잠’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똑바로 눕는 것이 불가능했다. 장기 곳곳이 눌려 10초도 견디기 어렵다. 왼쪽 오른쪽으로 돌아누워도, 갈비뼈에 뭔가 또 거슬린다. 매우 좁은 곳에 끼여 자는 느낌이다.

계속 뒤척이다 체험복 끈이 풀려 엉망이 됐다. 목이 말랐지만, 자세를 잡은 뒤에는 움직이기가 그렇게 싫었다.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기 전 아내에게 “불 꺼달라” “휴대폰 충전 좀 해달라”고 했던 과거가 또 스쳤다.

새벽잠도 설쳤다. 거짓말이 아니라, 어둠 속을 더듬는 ‘진짜 악몽’을 꿨다.

체험 2일 차 출근길, 비극적인 장면이다. 벽 사이에 몸이 끼여 결국 운전석 옆좌석으로 차를 탔다. 전날 아내 차를 타고 출근해 이런 사실을 몰랐다. 체험 2일 차 출근길, 비극적인 장면이다. 벽 사이에 몸이 끼여 결국 운전석 옆좌석으로 차를 탔다. 전날 아내 차를 타고 출근해 이런 사실을 몰랐다.

이튿날에도 가상 임신은 적응되지 않았다. 배는 여전히 무거웠고, 온 장기가 쑤시는 것 같았다. 만신창이다. 아주 오랜만에 풋살 경기를 뛴 다음 날 몸 상태다.

퇴근 후 평소 가던 코스대로 산책을 했다. 왕복 1km 정도 길이다. 100m 채 가지 못해 숨이 가빠 마스크를 벗었다. 돌아보니, 이틀간 코로나19 여파에도 제때 손도 씻지 않은 것 같다.

경사가 급한 청사포 언덕을 지나면서 무릎이 시큰거렸다. 신발 끈은 3번이나 풀려 가위로 잘라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땀이 줄줄 흘러 마치 열대야를 방불케 했다.

청사포 언덕길. ‘길빵’(노상 흡연)하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았다. 임신부가 지나가도 대놓고 핀다. 청사포 언덕길. ‘길빵’(노상 흡연)하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았다. 임신부가 지나가도 대놓고 핀다.

■3일 차, “그만했으면…”

“그만했으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아내의 우려다. 기획 취지와 달리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단다. 멍을 때리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체험 마지막 날, 아침에는 장대비가 내렸다. 습한 날씨에 사실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버스가 경적을 울려대자 나도 모르게 큰소리 내며 노려봤다. 왠지 모르는 우울감도 느껴졌다. “얼굴 살이 빠졌다” “해쓱하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오후 6시쯤 되니 기분이 좀 낫다. 퇴근을 앞둔 데다 체험 마지막 날이어서다. 갈비뼈 압박 통증도 어느새 적응됐다.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 슬기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점심때 비를 피해 전력 질주한 일, 몰래 싱크대 위에 배를 올리고 설거지한 일, 동료가 배를 주무르도록 허락한 일, ‘듣기 좋은 태담’보다 짜증만 낸 일…. 확실한 건 슬기가 진짜 태아였다면 이 모든 것을 느꼈을 테다.

밤 12시, 슬기를 출산했다.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정각에 체험복을 벗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후련함이 훨씬 컸다. 거실과 방 사이를 거닐며 어색해진 내 걸음걸이를 다시 찾았다.


■몰랐던 것들

체험 3일 차에도 자정까지 체험은 계속됐다. 체험 3일 차에도 자정까지 체험은 계속됐다.

이번 체험은 절반의 성공이다. 임신부를 어느 정도 느꼈다.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배려할 능력이 조금 생겼다. 인터넷에서 본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임신 후기 허리 상태를 탄띠+수통+탄입대 2개를 항상 차고 있는 것에 비유했다. 정확하다.

그동안 몰랐다. “발 마사지 좀 해줘” “아 힘들어” “불 좀 대신 꺼줘” 등 그냥 하는 볼멘소리겠거니…. 옆에서 도와는 줬지만, 진정성은 부족했다. 부부 모두에게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됐을 거다.

고작 3일이지만,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을 알겠다.

‘산책할 때 허리 받쳐주기’ ‘신발 신겨주거나 끈 묶어주기’ ‘어깨, 발 마사지하기’ ‘잘 때 불 끄기’ ‘발과 등 씻겨주기’.

그러나 해답은 아닌가 보다. “어떤 도움이 가장 필요하냐”는 질문에 아내와 아내 친구들의 답은 다른 차원이었다.

‘배 나오고 살찌더라도 예쁘다고 해주기’ ‘따뜻한 말로 스킨십으로 불안한 마음 풀어주기’….


■절반의 실패

이제는 육아다. 한 번도 싸우지 않은 부부가 육아 때는 돌변한다더라. 이제는 육아다. 한 번도 싸우지 않은 부부가 육아 때는 돌변한다더라.

이번 체험은 반대로 절반의 실패다. 실제 임신부와 달리 마시고 싶은 탄산음료와 커피를 수시로 마셔댔다. 몸이 무겁고 땀이 차다 보니 더 당겼다. 통증을 유발하는 격렬한 태동도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3일의 체험은 한계였다. 실패여도 이보다 더한 것은 할 수 없었다. 장비를 벗은 지금도, 가만히 앉아 있지만 허리가 쑤신다.

곧 엄마가 될 아내는 위대했다. 3일도, 30일도 아닌 그 이상을 견뎌내고 있다. 내가 대형마트에서 골골대며 장 볼 때, 이미 마트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산책하며 언덕을 오를 땐 뒤에서 밀어주기까지 했다. 체험이 아닌 ‘진짜 내 아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출산은 시작이다. 이후엔 더 큰 난관이 기다린다.

출산을 앞둔 새로운 출발선에 있다면 임신부 체험을 추천한다. 3일에 3만여 원이면 인터넷에서 쉽게 빌릴 수 있다. 고통을 느껴보라는 말이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체험복을 입은 남편의 모습을 아내도 뜻깊게 바라볼 것이다. 서로의 공감 속에 ‘슬기로운 육아생활’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거라 믿는다.

시민 동참도 필요하다. 불룩 나온 체험복을 입은 남자가 있더라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아 달라. 남 시선을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큰 부담이더라. ‘쯧쯧’하는 눈초리보다 ‘멋있다’는 말을 해주길….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P.S. 슬기로운 호구생활을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호구생활을 하기 바라는 아이템이 있다면 lee88@busan.com이나 댓글로 남겨주세요.^^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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