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호구생활⑧] “하루종일 TV를 봤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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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게임 하다가, 혹은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누가 나를 호구라 하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직장 상사에 의해 알면서도 바보가 된다. 치열한 삶 속에서 꾹꾹 ‘속앓이’만 할 뿐이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최애’ 채널의 배신

최근 3부 쪼개기 방송으로 과도한 광고 논란이 일었던 드라마 스토브리그. SBS 제공. 최근 3부 쪼개기 방송으로 과도한 광고 논란이 일었던 드라마 스토브리그. SBS 제공.

한없이 나른했던 지난 주말 오후. 새벽부터 무리하게 축구를 한 탓인지,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 소파에 누운 채 머리 위를 더듬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OCN, CGV, 슈퍼액션….’

‘최애’(最愛·가장 사랑함) 영화 채널을 찾았다. 2~3시간 넋 놓고 바라보는 채널들이다. 손만 움직이는 ‘반시체’ 상태로 3번, 44번, 45번을 차례로 눌렀다.

광고, 광고, 광고 ….

“○○화재, 청약 사항 확인하세요.” “암 보험비, ○○만 원까지 보장됩니다.”

3개 채널 모두 ‘꿀맛 휴가’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우연일지 모르나 모두 광고로 도배다.

하는 수 없이 ‘실제상황, 기막힌 이야기’를 찾았다. 사건사고 재연 프로그램으로 은근 빠져든다. 1990년대 히트 친 ‘경찰청 사람들’과 비슷하다. 장점은 재방송이 워낙 많아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것.

이날은 예외였다. 프로그램을 찾았으나, 또 광고질(?)이다. 우연이 아니라 이제 ‘악연’이다.

놀리는 듯 화면 왼쪽에 ‘배너 광고’까지 떴다. 미국 아카데미 4관왕 ‘기생충’을 보려면 녹색버튼을 누르란다. 내 돈 내고 보는 케이블 채널을 맘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슬호생 8탄’은 ‘광고 호구’다.


■지상파 점령…선 넘은 ‘광고 자본’


광고가 끊이지 않는 각 방송 채널과 유튜브, 인스타그램. 광고가 끊이지 않는 각 방송 채널과 유튜브, 인스타그램.

“60초 후에 공개합니다!”

한 케이블 채널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최종 예선 합격·우승자 발표를 앞두고 꼭 60초 광고가 나간다.

탄식과 함께 저절로 욕이 나오지만, 자리를 뜰 수 없다. 1초라도 늦을까 노심초사하며 광고를 애청한다. 기껏 기다려도,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예고편만 덩그러니 내보낸 채 끝내기도 한다. 배신감이 극에 달한다. 조련사에 길들여진 동물원 속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케이블 채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상파도 마찬가지.

단 4회 만에 시청률 10% 돌파한 SBS 금토드라마 ‘스토브리그’. 인기를 얻더니 10회부터 3부 쪼개기 편성에 들어갔다. 고작 60분짜리 드라마가 두 번의 중간광고로 20분씩 쪼개진 셈이다. 여기에 더해 ‘하이라이트’인 예고편 앞에도 광고를 붙였다. 대놓고 시청자를 호구 취급했다.

예능도 마찬가지. 2부 쪼개기는 일상이 됐다. SBS ‘미운 우리 새끼’는 3부 쪼개기다. 교육방송인 EBS마저 쪼개기 광고를 삽입했다.

지상파 채널이 케이블이나 종편처럼 중간광고를 넣을 수 없으니, 아예 회차를 나누어 광고하고 있다.


■영화 한 편에 광고만 약 20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야장천 케이블 TV를 봤다. 김강현 PD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야장천 케이블 TV를 봤다. 김강현 PD

뒤범벅된 광고 실태를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다. 1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TV를 봤다.(점심시간 제외)

오전 10시. 영화 채널에 방영 중인 ‘위대한 소원’을 틀었다. 이미 40분 전에 시작한 영화다. 스토리는 생략.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장기 드라마다.

시청 6분 만에 첫 광고다. 짤막한 4개 광고가 나간 뒤 재시작. 이후 10시 30분 다시 두 번째 광고가 시작됐다.

영화 1부와 2부 사이여서 그런지 광고가 꽤 길었다. 이것저것 주제가 다른 광고만 15개. 5분 후 다시 시작한 영화는 20여 분이 지나 끝이 났다.

한 편의 영화가 끝나니 또 광고다. 다음 ‘서유기2: 선리기연’이 시작하기 전까지 약 23개 광고가 줄줄이 나왔다. 12분간 ‘논스톱’이다.

광고 유형은 일반 CF부터 지역 내 맛집, 보청기, 가구, 대출 광고까지…. 해당 채널의 또 다른 드라마 홍보도 줄기차게 나왔다. 한 드라마 예고편은 체감상 2~3분 지속했다. 광고가 계속 반복돼 스토리와 성우 멘트를 외울 정도다.


■재시작 2분 만에 또 광고

이날 오후 1시 55분. 한 케이블TV의 ‘맛있는 녀석들’ 예능 재방송을 봤다. 이 채널은 방송 시작 후 55분간 광고가 없었다. 이후 1분 광고 돌입. 프로그램 연속성을 해치치 않아, 웃고 즐기며 시청이 가능했다.

그러나 1분 후 재시작한 프로그램은 고작 2분 만에 다시 끊겼다. 그리고 다시 광고. 무려 15분 넘게 20~30개의 광고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알고 보니, 해당 프로그램이 별다른 마무리 영상도 없이 끝이 난 것이었다.

이날 오후 3시 45분에 시작한 한 케이블 채널의 ‘TMI NEWS’. 7분 만에 1분 광고가 시작됐지만, 이후 프로그램이 마치기까지 광고가 없었다.

광고 때문인지, 식곤증 때문인지 TV에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정수원 PD 광고 때문인지, 식곤증 때문인지 TV에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정수원 PD

우연한 시점에 채널 수 대비 광고는 어느 수준일까. 시점에 따라 편차가 크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광고가 적은 특정 시점을 노려 TV를 보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회사 TV는 유료가입 채널이 적어 집에서 테스트했다. 오후 11시 50분 1~100번까지 채널을 돌려봤다.

유료 채널 등 나오지 않는 채널과 대놓고 광고하는 홈쇼핑 채널은 모두 뺐다. 남은 65개 채널 중 실제 광고는 11개. 약 17%다. 6개 중 1개 채널에서는 광고를 하는 셈이다.

또 하나 놀란 것은 홈쇼핑 채널이 너무 많다는 것. 1~100번 채널 중 18개가 홈쇼핑이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도…

퇴근 후 샤워하며 유튜브의 ‘영화리뷰(결말포함)’ 한 편 보는 게 일상이다. 그러나 꼭 수십 초짜리 중간광고 2편이 신경을 건드린다. 샤워 도중이라 5초 후 ‘광고 건너뛰기’도 안 된다.

유튜브의 광고 실태도 알아봤다. 10분 54초짜리 영화 리뷰 영상이 3번 쪼개졌다. 3분쯤에 15초짜리 광고 2개가 나왔다. 7~8분에도 5초, 23초짜리 광고 2개. 영화가 끝나니 51초, 35초 광고 2개가 또 붙었다.

6분 57초짜리 ‘무도 5분 순삭(순간 삭제)’ 콘텐츠는 시작 전 2개 광고가 있었으나 중간광고는 없었다.

유튜브 홈에 걸리는 광고도 적지 않았다. ‘5개 콘텐츠 후 1개 광고’가 공식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자주 보는 네이버TV도 테스트했다. 해외축구 하이라이트 등 4~5개 영상에서 중간광고는 없었다. 영상 시작 전에는 무작위로 30초짜리(5초 후 넘김 가능) 광고가 붙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은 3~4개 콘텐츠를 넘기면 광고가 하나씩 붙었다.

인스타그램 광고들. 자극적인 광고보다는 이용자의 취향을 분석한 광고들이 올라온다.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인스타그램 광고들. 자극적인 광고보다는 이용자의 취향을 분석한 광고들이 올라온다.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낯부끄러운 광고질

지난 11일 게임물관리위원회는 유튜브 등 플랫폼사업자에게 ‘왕비의 맛’ 광고 차단을 요구하는 시정 권고를 내렸다. 왕비의 맛은 모바일 게임으로 이용 등급이 만 15세 이상이다. 그러나 광고에서 여성 캐릭터를 ‘딸기맛’ ‘복숭아맛’ 등으로 비유했다. 일본 성인 배우를 모델로 삼아 ‘○○배우의 맛을 느껴봐라’는 문구를 써 질타를 받았다.

왕비의 맛 논란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튜브 홈화면에 뜨는 광고들. 유튜브 화면 캡처. 유튜브 홈화면에 뜨는 광고들. 유튜브 화면 캡처.

유튜브 홈화면 광고에는 ‘다 바꿨어.. 지금 할래?’라는 문구와 함께 젊은 여성이 모델로 그려졌다. 게임제목 옆에는 ‘실사풍 미녀 게임’ 문구가 적혔다. ‘바카라’를 출시했다며, 포커 게임 광고도 눈에 띄었다.

소개팅 앱 광고도 넘쳐났다. 나쁜 광고가 아니지만, 여성 신체를 부각하는 자극적인 광고 ‘썸네일’이 부적절해 보였다. 유튜브 홈화면에는 대출, 모바일 게임, 소개팅 광고가 대다수였다.

일반 콘텐츠를 가장한 광고도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치 심층 취재해 증명한 것처럼 꾸몄다.

TV 채널이나 인스타그램 광고는 그나마 낫다. 인스타그램은 이용자가 보는 콘텐츠에 기반해 필요한 물품을 추천했다. 아내 인스타그램에는 육아용품, 샤워기, 화장품 등의 광고가 떴다.


■시청자가 ‘봉’이냐


휴식 때마다 재 뿌리는 ‘1분 후 계속됩니다’ 문구. TV화면 캡처. 휴식 때마다 재 뿌리는 ‘1분 후 계속됩니다’ 문구. TV화면 캡처.

하루 간 체험해 보니, 온통 광고였다. 콘텐츠는 많지만, 정작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콘텐츠를 보기가 어려웠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도 광고 때문에 맥이 뚝뚝 끊겼다. ‘금’같은 시간을 허무하게 날리는 느낌이다.

TV보다 유튜브나 SNS 광고는 짧게 보고 넘길 수 있어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자극적 광고에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이런 광고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려스러웠다.

체험이 끝나고, 그동안 관심 없던 ‘유튜브 프리미엄’ ‘넷플릭스’의 가격을 찾아봤다. 케이블 채널과 가격 차이가 크게 없다면 갈아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문득 유튜브 프리미엄, 넷플릭스 가입을 권유하는 광고들이 머리를 스쳐서다. 광고를 없애기 위해 또 다른 광고에 넘어간 호구가 되긴 싫었다.


■더는 못 참아

광고가 이제는 더 교묘해지고 대담해졌다. 최근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효능이나 장점을 소개한 상품을 비슷한 시간대에 홈쇼핑에 내놓는 일이 벌어졌다. 공공전파를 쓰는 지상파까지 별다른 동의 없이 광고 확대에 슬쩍 가세하는 실정이다.

시청자 인내는 이제 한계다. 그동안 ‘좋은 콘텐츠를 위한 투자 목적이겠거니’라며 참아왔다.

그러나 스토브리그 3부작 쪼개기 편성을 계기로 180도 태도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넘기던 PPL(영상 속 제품광고)도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다. 기사 댓글과 SNS에는 광고 제한을 강화하는 법 개정까지 요구하고 있다.

플랫폼 다양화로 수익성이 낮아지고 있는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엄연히 돈을 낸 콘텐츠 이용객이다. 여론을 무시한 무리한 광고 행태는 장기적으로 시청자 이탈을 가속할 뿐이다.

최근 유튜브는 8분 이하 영상의 중간광고를 금지했다. 방송통신위원회도 편법, 꼼수 중간광고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기로 했다. 시청자를 호구로 만드는 경마식 광고 경쟁에 ‘브레이크’를 걸기를 기대한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P.S. 슬기로운 호구생활을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호구생활을 하기 바라는 아이템이 있다면 lee88@busan.com이나 댓글로 남겨주세요.^^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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