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칼럼] 부산항의 기억, 위기의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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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부산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갈 때마다 북항을 내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 우리에겐 북항이 있었지. 1876년 개항한 이래 온갖 우여곡절로 점철된 기억을 지녔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소설가 이병주는 장편의 표제로 ‘관부연락선’을 삼았다. 왜 그랬을까? 그는 관부연락선을 영광과 굴욕의 상징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런데 단순하게 이분하여 어느 한쪽의 영광과 다른 한쪽의 굴욕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그만큼 그는 식민지 근대를 복합적으로 바라보았다. 제국주의 일본이 구축한 부산항도 그와 같은 기억을 담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식민 지배기에 들고 난 배가 수천 척이었고 드나든 사람 또한 수백만 명이었으니 부산항의 평전을 쓴다면 이보다 더 굴곡지고 흥미진진한 생애도 없을 터이다.

부산엑스포 도시재생 호기에도
국가중심 일극 체제 강화 불안감
갈수록 중심-주변 종속 고착화
 
모두가 서울 향하면 미래 닫혀
부산항은 부산 넘어 한국의 미래
체제 전환 운동 강력히 전개해야
 

일본의 패전, 다시 말하여 조선의 해방과 더불어 한·일 간에 서로 귀환한 사람도 부지기수이며 한국전쟁으로 왕래한 함선과 세계 여러 나라의 인파도 가히 짐작이 어려울 정도이다. 대양으로 길이 열리면서 원양어선과 상선이 무시로 출항하거나 정박한 남항과 북항은 말할 것도 없고, 파월 장병을 실어 나른 제3 부두의 숨 막힌 역사도 있다. 모두 제1 부두에서 제5 부두에 이르는 항만과 그 앞바다의 심연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을 품고 있는 부산항은 부산을 집약하는 대표 기호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지금 재생의 과정에 있으며 이곳에서 앞으로 열고자 부산 엑스포 2030을 준비하고 있으니, 누적된 적층의 부산항 역사를 되살려 내는 데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부산항은 대양으로 열려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아시아 지중해를 넘어서 태평양과 인도양 그리고 대서양을 향하는 거점이다. 해양을 두고 지역적이고 지구적인 상상을 하고 이를 실현하는 장소에 다름이 없다. 이러한 지정학으로 부산항을 매개로 한 부산 르네상스의 기획이 그동안 여러 차례 반복되었음이 사실이다. 부산과 후쿠오카가 통합 경제권이 되려는 초국적 연계도 시도되었다. 국가가 해 주지 못하는 일을 부산 스스로 내재 역량을 동원하여 안간힘으로 발휘하려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현금에 이르러 한편으로 팬데믹으로 장벽이 드리워졌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중심적인 일극 체제가 강화되면서 부산의 도약 의지가 큰 좌절에 봉착하였다. 그저 울지 말고 힘을 다시 결집해 보자고 다잡기엔 시절이 녹록하지만 않다. 중·미 관계가 대결 구도로 가고 한국과 일본이 점차 멀어지면서 한동안 절실한 구호였던 동아시아 공동체도 거의 뜬구름이 되고 말았다. 외적인 정세 변동과 내적인 서울 중심주의가 네트워크 도시 부산의 활력을 떨어트리면서 그랜드 디자인이나 메가시티 구상을 더욱 어렵게 한다. 그야말로 위기의 부산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국가주의가 강화된 가운데 일극 체제도 더 가속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경제, 권력, 인구의 지역 분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집중과 소멸이라는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중심부 서울의 지가와 부동산이 놀랍게 상승하면서 한국 사회는 중심-주변의 종속 체제로 고착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야말로 반체제 운동을 전개해야 할 시점이다. 서울 혹은 수도권 중심의 일극 체제를 뒤흔드는 반체제 선언을 소리 높게 외쳐야 한다. 미래 세대의 분노를 발생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도 일극 체제라는 모순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죽자고 노력하고 찢어질 듯 경쟁하여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청년들이 어떠한 정동을 품겠는가?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가 있는가 하면 기득권 장벽이 만든 분노도 있다. 후자는 결국 기성세대가 져야 할 책임과 연관된다.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 행동에 나서서 세계 자본주의의 기득권 세력의 무책임을 질타하였듯이 우리 사회의 미래 세대도 자신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든 기성세대를 신뢰하지 못한다.

부산항은 부산의 내일이자 한국의 미래이다. 어찌 되든 모두 서울로 가야만 한다면 우리 사회의 열린 전망은 닫히고 만다. 부산항은 아시아를 바라보는 창이고 세계로 향한 대문이다. 흐려진 창문 앞에서 부산의 체온은 날로 식어 가고 있다. 우리대로 기획한 일들이 정세에 뒤틀리고, 무엇보다 일극의 국가 체제에 의하여 무산되고 있다. 희망의 열기를 흡수하고 고장에 대한 애정을 흩어 버리니 이 어찌 남의 탓만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부산항은 역사의 뒤안길로 퇴각하고 있는가? 부산은 그저 제2 도시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자족해야 하는가? 하지만 부산이 망하면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무너진다는 사실을 한시바삐 깨달아야만 한다. 이래서 우리가 견결한 심정으로 체제 전환을 호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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