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틈 / 김수우(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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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구운 나귀 한마리 길 잃은 카프카처럼 내게로 왔다

북아프리카 모래숲에 서 있던 진지한 똥고집 다시 마주친다

제 몸 흙과 내 몸 흙이 함께 바오바브나무를 키웠던 적 있다

내 안 바람과 제 안 바람이 같은 바다 위를 불었던 적 있다

한발짝 어긋났는데 긴긴 미로를 걷고 있는 회색 발목들

쥐부스럼 긁으며 목각인형을 깎던 흑인들의 안부 한줄기

사하라 낯선 마을 담벼락에 서 있던 어리석음 그대로

우두커니, 우두커니

내 책상에 녹슨 닻을 내린다 억울한 꿈들, 끝까지 꾼다 -시집 (2021) 중에서-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간 아프리카에서 신혼 시절을 힘들게 보낸 시인의 문학적 토양은 거칠지만 광활했다. 억울해서 시작한 문학은 억울한 삶을 사는 풀뿌리들에게 지표가 맞추어지고 백 마리의 물고기로 장식된 그의 문학은 모든 자아와 타자의 동일성을 지향할 수 있게 시인을 배양시켰다. 어두운 문학의 현주소 속에서 오래된 이상주의자이기를 꿈꾸는 시인은, 이상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믿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의 근원임을 확신한다. 우주로 나가는 녹슨 문고리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서 시인은 또 믿는다. 모든 해골이 그의 선생이고 수천 겹으로 둘러싸인 가난이야말로 사유의 대상이고 평생 업고 가야 할 이웃임을. 병든 혁명과 싸우는 데 어떤 이론도 소용없다고 말하는 시인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안락한 삶이 제국주의임을 깨닫는다. 억울해서 시작한 시인의 문학 그 틈새로 오늘도 바람은 분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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