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못 말리는 오지랖
논설위원
1981년과 1988년 대선에서 두 차례 당선된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스인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국외에서도 평가가 비교적 좋았다. 1984년, 라는 주간지가 그에게 혼외 딸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런데 다른 언론사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반문과 “하수구 저널리즘”()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내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재선 도전이 유력한 현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40대 중반의 그는 아내보다 나이가 24살이나 아래다. 둘은 고등학교 선생과 제자로 만났다고 한다. 그때 선생은 이미 아이를 셋 둔 기혼자였고, 그중 맏이는 마크롱과 같은 학년이었다나. 한국 사회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지만 프랑스에선 문제가 안 된다. 사람들이 사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다. 언론도 암묵적으로 보도를 자제하는 영역이 사생활이다. 그것을 공직자의 능력과 분리해서 보기 때문이다. 그쪽 문화가 그렇다.
최근 사생활 폭로 사태 일파만파
무차별 공개로 개인 삶 짓밟혀
사생활 보호·알 권리 충돌 때마다
언론들은 입맛 따라 이중 잣대
합리적 판단 기준 정립 위해
국민적 공론화 작업 뒤따라야
국외로 시선을 돌려 본 것은 최근 한국에 불거진 한 공인의 사생활 폭로 사태 때문이다. 민주당 ‘인재 영입’ 1호 조동연 씨가 과거의 가정사 문제로 비난 여론 끝에 자진 사퇴했다. 지극히 내밀한 사생활이 까발려지는 수모를 겪었는데 그 파장이 만만찮다. 무엇보다 민주당의 잘못이 크다 할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인재 영입이라는 ‘이벤트’에만 매몰돼 사전 검증에 소홀했고, 논란이 된 뒤에는 정치적 계산 끝에 결별을 선택한 점. 두고두고 비판받아야 할 대목이다.
부실한 인사 검증 시스템과는 별개로 공인의 사생활 공개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혼외자’라는 소재는 대단히 휘발성 강한 프라이버시다. 보수 유튜버와 보수 언론이 무차별 폭로에 앞장섰고, 결국 한 사람의 삶이 짓밟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어째서 한 개인의 가정사를 일일이 알아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사과까지 받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비난은 가정 안에서 이뤄져야 하고, 응징의 자격도 오직 배우자에게만 있는 게 아닐까.
우리나라 미디어들이 선정적인 사생활 보도에 매달리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중의 관음증적 관심이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와 시시콜콜한 가정사로 채워지는 저질 기사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호기심이 문제라기보다는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언론의 행태가 더 큰 문제다.
‘사생활 보호’와 ‘알 권리의 보장’, 두 가치가 충돌할 때 정치권이나 언론의 입맛에 따라 이중 잣대가 적용되곤 했다. 2013년은 당시 검찰총장의 혼외자 논란으로 떠들썩했던 해였다. 보수 언론의 주도로 비난 여론이 빗발쳤고 당사자는 부도덕한 공직자로 몰려 결국 사퇴했다.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이 간단히 ‘알 권리’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4년 전인 2009년 모 장관의 혼외 딸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정반대의 논리가 펼쳤더랬다. 그 보수 언론은 이렇게 썼다. “개인적 이슈에 불과하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 우리의 관심은 사생활 문제가 장관의 직무에 영향을 미칠 공적 이슈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정략적 관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국은 아직 프랑스의 ‘쿨함’을 기대하기 힘든 나라다. 결혼 제도와 가부장제가 여전히 강고하고 특히 혼외 출생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생각이 엄격하다. 그렇다 해도 개인의 가정사가 ‘공직 윤리’라든지 ‘알 권리’란 미명 아래 파헤쳐지는 것은 엄연한 폭력이다.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특히 아동의 사생활에 대한 공개와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보다 엄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보수 유튜버들이 어떤 사회적 노림수를 갖고 사생활 폭로에 혈안이 돼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못 말리는 오지랖이 안타깝다.
우리나라에는 공인의 사생활 보호와 국민의 알 권리 보장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기준이 없는 실정이다. ‘공익을 위해 부득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의 사생활을 보도·평론해서는 안 된다.’ 한국신문협회의 ‘신문윤리강령 및 실천 요강’에 이리 명시돼 있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가깝다.
대립하는 두 사안에 대한 가치 기준을 마련하려면 우선 국민적 의견 수렴 절차가 시급해 보인다. 학계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된 주장이다. 지금까지는 국민의 알 권리가 절대적인 명제처럼 보장된 점이 없지 않다. 비도덕적이고 선정적인 보도가 횡행하는 황색 저널리즘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론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