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다리 건너면 시름 잊는 겨울 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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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선암사·송광사

전남 순천에는 삼국시대에 만든 천년 고찰 두 곳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선암사와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인 송광사다. 고갯길을 사이에 두고 조계산 동쪽과 서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은 사찰들이다. 끓어넘치는 여름의 욕심을 버리고 텅 빈 늦가을의 풍광을 안고 있는 두 절을 다녀왔다. 따스한 햇살과 맑은 공기, 조용한 바람이 여행길에 동행했다.


7km 감나무 가로수 끝에 만나는 선암사
개울 아래서 바라보는 승선교 한 폭 그림

■선암사

참 특이한 시골길이다.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내려 선암사로 들어가는 선암사길의 가로수는 매우 이색적이다. 길 입구에서부터 선암사에 도착할 때까지 7km 구간의 가로수가 온통 감나무다. 많은 곳을 여행하고 다녔지만 감나무를 가로수로 세운 곳은 이곳에서 처음 보는 것 같다.

어떤 감나무 가지는 그야말로 헐벗었지만 빨간 땡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도 한두 그루가 아니다. 까마귀가 쪼아 먹었는지 반쯤 터져나간 채 가지에 붙은 감도 수두룩하다. 저렇게 많은 감이 달려 있는데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걸 보면 먹으려고 심은 가로수는 아닌 게 분명하다.

찬바람에 볼이 발개진 빨간 감들의 반가운 미소를 뒤로 돌리면서 달린 차를 맞은 것은 잎을 모두 떨어뜨린 채 추위에 덜덜 떠는 나무 사이에서 울고 있는 새들이다. 한꺼번에 합창을 하는 게 아니라 한 마리 두 마리씩 띄엄띄엄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선암사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개울을 따라 걷는다.

선암사로 들어가려면 제법 고색창연한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한다. 300년 전에 만들었고 17년 전에 대대적으로 수리했다는 홍교 즉 무지개다리인 승선교다. 개울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승선교는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든다. 다리 뒤쪽에는 작은 누각인 강선루가 서 있는데, 다리 아래에서 바라보는 이 경치가 상당히 훌륭하다.

선암사는 6세기에 백제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9세기에 신라의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어느 게 사실이든 처음 지은 지 1천 년이 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암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곡저(골짜기 밑바닥)형 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사찰에서는 스님들이 선을 수행하면서 차밭을 운영하는 게 특징이다. 절 입구에는 스님들이 관리하는 차밭이 눈에 띈다.

선암사 대웅전으로 향하다 보면 무언가 하나 빠진 것처럼 허전하다는 걸 알게 된다. 사찰에 가면 볼 수 있는 사천왕문이 이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지켜줄 것이라고 여겨 사천왕문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선암사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주제를 앞세워 영주 부석사, 양산 통도사 등 6개 사찰과 함께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산지승원이란 신앙, 수행, 생활을 함께 유지하는 종합 승원을 의미한다.

선암사는 대개 봄에 절 뒤편의 매화를 보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 50여 그루는 200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이와는 달리 가을의 선암사는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젖어 티끌 하나 없이 맑고 파란 하늘의 바다에 침잠한 것 같다. 화려하고 형형색색인 봄과는 또 다른 매력을 안겨다준다.
사진 찍기에 좋은 송광사 삼청교, 송광사 전경, 대형밥통인 비사리구시, 보조국사 지눌의 지팡이 고향수(위에서부터 시계 방향).

지눌 지팡이 설화 전하는 승보종찰 송광사
징검다리서 바라보는 삼청교 풍경에 ‘찰칵’

■송광사

선암사에서 조계산 고갯길을 넘어 송광사로 이어지는 천년불심길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답사길이다. 총 거리가 12km여서 봄, 가을이면 이 길로 산을 오가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차를 몰고 다니며 하루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삼십 리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됐다. 보조국사 지눌을 포함해 국사 16명이 거처했던 곳이어서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로 일컬어진다. 삼보사찰이란 경남 양산의 통도사와 합천의 해인사, 전남 순천의 송광사를 일컫는다. 삼보는 불교의 신행 귀의대상인 불보, 법보, 승보를 가리키는 말이다. 통도사가 불보, 해인사가 법보, 송광사가 승보에 해당한다.

송광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네모난 돌 19개로 만든 홍교인 삼청교다. 다리 위에는 정자 같은 건물이 있는데 우화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일주문을 거쳐 계곡을 건너는 징검다리에서 삼청교를 바라보며 찍는 사진이 꽤 멋있다. 이 풍경을 담으려고 송광사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삼청교 아래를 흐르는 개울에는 삼청교, 우화각은 물론 푸른 하늘과 구름도 담겨 있다. 불과 몇 달 전 봄과 여름에는 잎이 무성했을 것 같은 나무 한 그루는 하늘과 구름을 따라 물에 뛰어들 것처럼 허리를 숙이고 있다. 나무에게는 땅위에 서 있는 다리가 아니라 개울에 비친 그림자가 진실처럼 보이는 것일까. 과연 세상에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까. 하늘에 떠다니는 하늘과 구름이 진짜일까, 개울에 푹 젖은 그림자가 진짜일까. 헷갈리는 세상이다.

삼청교 앞에는 긴 장대 같은 나무 작대기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사에 처음 왔을 때 짚고 왔다는 지팡이 고향수다. 태어난 곳을 뜻하는 고향이 아니라 말라죽은 향나무를 뜻하는 고향이다. 보조국사가 지팡이를 땅에 꽂자 잎이 나더니 향나무로 자랐다. 그러나 그가 입적하자 나무도 그대로 시들고 말았다. 불가사의하게도 더 이상 마르지도 않고 지금 이 상태대로 800년을 지탱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지팡이는 과연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선암사에서도 그랬지만 송광사에서도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다. 굳이 이곳에서는 말을 꺼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기지 않아도 된다. 그냥 때로는 흙을 밟으며, 때로는 낙엽을 사각거리며 그야말로 무념무상으로 걷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문득 불교는 가을과 무척 닮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둘 다 자꾸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려는 욕심을 수시로 계속 비워낸다. 쓸 데 없는 잡념이라며 비시시 웃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가을처럼 마음을 비워 영원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을지 잠시 고민에 빠져본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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