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필요로 하는 신체… 일제는 왜 방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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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 한번 잡숴 봐!/최규진

<이 약 한번 잡숴 봐!>는 약 광고를 통해 보는 일제강점기 생활문화사다. 부제가 ‘식민지 약 광고와 신체정치’인데 식민지 시대 자본과 권력이 어떻게 신체를 규율했는가를 들춘다.

약 광고 통해 본 일제강점기 생활문화사
배탈 나 먹는 정로환은 ‘러시아 정복’ 뜻

왜 약 광고인가. 약 광고가 가장 많아 일제강점기는 이른바 ‘약의 시대’를 구가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조선 신문에 매약 광고가 8할을 점령했으며 매독약 임질약 폐병약 성흥분약(흥분제)로 외국 사람이 보면 조선인은 모두 화류병자라고 할 일’이라는 표현도 있다. 약 광고의 유행은 병원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품으로서의 약을 더 필요로 하는 신체를 만들어가는 근대의 과정, 근대의 장치였다. 이른바 근대에는 병이 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이 병과 몸의 욕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병 앞에 방치하기도 했다. 1918년 가을 중반 스페인 독감이 조선을 습격했을 때 일제는 무방비상태였다. 총 환자 수가 758만여 명이었고, 사망자가 14만 명이었다. 1918년 일본에서는 마스크가 보급됐으나 조선에는 마스크를 보급조차 하지 않았다. ‘입 코 덮개’라고 하여 조선에 마스크가 전파된 것은 1919년부터였다고 한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자본주의가 얼굴을 본격적으로 내밀었다고 한다. 1910년대보다 상품의 힘이 더 커지고 소비의 욕망도 그만큼 늘었다는 것이다. 맥주 광고의 한 구절. ‘마셔라, 마셔라. 맥주. 맥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개화하지 못한 사람이다.’ 맥주를 개화와 연결한 거다. 나아가 맥주가 ‘자양강장음료’라며 맥주를 마시고 역기를 번쩍 드는 그림을 싣기도 했다. 포도주를 마시면 ‘아주 빠르게 정력이 된다’며 포도주를 강장제와 연결시키고 나중에는 만병통치약처럼 광고하기도 했다.

삿구, 삭구라 했던 콘돔은 원래 성병 예방 도구였다. 하지만 그건 별로 유혹적이지 않다. 1920년대 중후반에 ‘성의 영기(靈器) 성의 복음’ ‘예쁘고 튼튼하고 육감적인’이란 문구로 ‘성적 쾌락’의 도구로 광고하면서 사람들을 홀렸다. 1922년 전면광고를 보면 약에서 시작해 약으로 마무리하는 일상이 그려져 있다. 얼굴을 희게 만드는 화장수, 부인병 치료제, 위장약, 신경통 치료제, 치질약, 정력제, 안약까지 하루를 구성하는 약의 향연을 그리고 있다. 그야말로 ‘약의 시대’였던 거다.

1930년대가 되면 흐름이 바뀐다. ‘명랑’이란 단어가 광고에 단골로 등장했는데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도시 명랑화 방침’을 따른 것이었다. 명랑은 제국이 지시하는 제국의 감각이었던 것이다. 그 감각은 1930년대 후반이 되면 마각을 드러낸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군국주의가 조선 사회를 뒤덮었다. 이전의 건강 제일주의가 국가주의와 결합했다. 정로환(征露丸)은 배탈 설사 때 먹는 약으로 러일전쟁 때 개발됐는데 약 이름이 ‘러시아 정복’이란 뜻이다. 1938~39년 일본이 전쟁에 미쳐 날뛸 때 총칼 든 군인이 나오는 정로환 약 광고가 등장했다. 제국주의 야욕, 전쟁과 신체, 약을 연결했던 거다. 최규진 지음/서해문집/512쪽/3만 3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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