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나무에게 자비를, 소수에게 동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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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학평론가

이웃 도시에 머물 일이 생겼다. 한동안 가보지 못했던 도시인지라, 시내 구경을 나가 보았다. 거리는 조용했지만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아담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멀리서 볼 때는, 품격을 갖춘 고요가 도시 내부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 걸음 다가가자, 눈을 의심해야 했다. 거리의 불빛은 아름다운 전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전구들은 사정없이 가로수에 감겨 있었다. 아마 밤새도록 전구는 번쩍거렸을 것이고, 나무들은 그 불빛을 참아내야 했을 것이다.

가로수 휘감은 화려한 전구들
고통 감내하는 나무 보면서
침묵 강요 당하는 소수 떠올려
 
배려·설명 없는 백신 패스 정책
동조할 수 없는 소수도 우리 일원
다수의 폭력 대신 진정한 공존을

아마도 가로수는 반짝이는 불빛으로 잠들 수 없었을 것이고, 피부(껍질)는 계속되는 열로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워졌을 것이다. 인간에게 그토록 아름답다는 형형색색의 빛은 그들에게 고통이고, 화인이고, 또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나무의 고통을 인지한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거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인간에게 잠시라도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불빛 아래 신음하는 나무의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했다.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이 정도 따뜻하고 환한 미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 표정까지 지어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무에게는 그 미소야말로 악몽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특정 종교만의 특별한 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날이 되면 전세계 사람들이 자비와 평화 그리고 평온과 희망을 노래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주고, 어려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자비의 대상에서 나무만은 예외인 것 같았다.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인간이 나무에게 저지른 일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요즘 백신 패스 때문에 몹시 시끄럽다. 백신을 맞을 수 없거나 백신 맞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그 밖의 사정으로 엄두를 내지 못하는 소수에게, 다수는 가혹하게 다그치고 있다. 다수의 입장만을 강조하는 이들은 백신이 잘못되거나 백신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 따위는 사치라고 몰아붙인다. 말을 하지 못하는 나무를 보면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소수를 생각한다. 뜨거운 전등에 감겨 불과 빛의 화인을 굴레처럼 짊어져야 했을 때,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항변을 하고자 했을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불만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소수의 항변 따위는 아예 없는 것처럼 백신 패스를 밀어붙이고 있지만, 이에 동조할 수 없는 소수 역시 분명 우리의 일원이며, 그 소수의 목소리가 강제된 침묵으로 인해 새어 나오지 못할 따름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수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해도 백신 패스를 강요하는 세상의 정책에 무작정 동조할 수 없다. 백신을 맞지 않았다고 이 세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의 입장을 옹호할 수는 더더욱 없다. 지금까지 코로나 방역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은 응당 뒤따를 소수에 대한 배려와 설명을 기다렸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결정하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강압 때문은 아니었다.

나무에 걸린 불빛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으니, 그저 조용하기만 한 나무의 아픔이나 사정쯤은 넘어가자고 더는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세상에는 분명히 나무의 괴로움을 덜어주면서도, 거리의 불빛을 아름답게 살려낼 방법이 존재한다. 백신 패스를 무자비하게 강요하지 않아도, 세상 어딘가에는 코로나19에 대항할 현명한 방법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진정한 공존의 방식을, 다수의 폭력과 분리해야 할 때이다. 그것이 자비이고, 세상을 함께 살아야 하는 이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진정한 동등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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