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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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60대 김 씨. 얼마 전 도시철도를 탔다가 봉변을 당했다.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남녀가 열차 안에서 서로 끌어안은 채 입을 맞추는 등 말 그대로 난리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보다 못한 김 씨가 “너무 하는 것 아니냐”고 한마디 했는데, 적반하장이라고, 그 젊은 남성은 도리어 눈을 부라리며 “뭐?” “어쩌라고?” 소리를 지르며 욕을 퍼붓는 게 아닌가. 그 서슬에 놀라기도 했거니와 상대할 인간이 못 된다 싶어 피하듯 객차에서 내려 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부끄러움이란 게 없어져 버린 세상인가!”라며 한탄하는 김 씨였다.

타인보다 자기를 우선시하는 세태
잘못해도 버티면 된다는 인식 팽배
지적하면 “증거 있냐”며 더 큰소리

정치판 몰염치 행태 특히 두드러져
득표 위해선 영혼도 팔아 치울 태세
“너나없이 도둑들만 설친다” 비판


주택가 좁은 도로 가운데에 ‘당당히’ 주차해 놓은 외제차. 연락처는 남기지도 않고 주인은 어디 갔는지 종적을 찾을 길 없다. 이런 경우 설사 주인을 찾아서 항의한다고 해도 오히려 삿대질 당하기 일쑤다. ‘네까짓 게 어쩔 거냐’라는 식의 뻔뻔한 주차로 물의를 일으키는 외제차 주인의 몰상식한 처사가 종종 보도되는 걸 보면 그다지 드문 일만은 아니다.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의 레깅스 차림도 그렇다.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남성들은 눈을 어디 둘지 몰라 허둥대는데, 레깅스 입고 다니는 여성들은 “내 옷 내가 입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산이며 체육관이며 심지어 학교까지 가리지 않고 입고 다닌다. 여성들은 “개인의 자유” 운운하며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지만 보는 사람은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이때의 민망함은 성적 수치심일 수 있다. 성적 수치심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례’를 말할라치면 그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개인과 개인 사이 낯 뜨거운 사례만 있는 게 아니다. 누가 봐도 뻔한 죄를 지었어도 ‘존버’(끝까지 버틴다는 뜻으로, 젊은 층에서 통하는 속어) 하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한 듯하다. 땅 투기로 일반 사람은 꿈도 못 꿀 막대한 부당 이익을 얻은 게 분명한 데도 “증거 있냐”며 도리어 큰소리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법을 공부하고 법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더 그렇다.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는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알려 달래도 당사자는 “너희들이 능력껏 알아봐라”며 수사기관을 비웃고, 불리하다 싶으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 버리면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다.

특히 심각한 건 정치판이다. 선거철이면 이익을 좇아 부나방처럼 부유하는 무리가 나타난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키워 주고 스스로 입지를 다지게 한 인연에 대한 의리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다. 아무리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도 어느 정도는 염치가 있어야지, 아이 보기 부끄러울 정도다. 당에 분명한 해를 끼쳐 내보낸 인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은근슬쩍 복당시키기도 한다. 부족한 식견 탓에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엉뚱한 사과로 눙치려는가 하면, 어제 했던 말이 다르고 오늘 하는 말이 또 다르다. 국민의 미래를 위해 오랜 고민을 거쳐 설계한 국가적 큰 계획도 득표에 불리하다 싶으면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그러고는 “그때는 틀렸고 지금이 맞다”고 우긴다. 표를 위해서라면 이전에 가졌던 신념과 가치관은 물론 영혼마저 팔아 치울 태세다.

목하 이런 정치판이 몹시도 걱정됐는지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묘서동처(猫鼠同處)를 꼽았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이 사자성어의 글자 그대로 뜻은 ‘고양이와 쥐가 한곳에 어울려 있다’이다. 보통 쥐는 음침한 곳에 숨어 살며 집안의 곡식을 훔쳐 먹는 존재이고, 고양이는 이런 쥐를 잡아먹는 존재다. 요컨대 도둑놈과 이를 잡아 없애야 할 놈이 한데 얽혀 야합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를 대선을 앞둔 우리 정치판에 빗대면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끼리 한패가 돼 못된 짓을 하고 있다거나, 너나없이 썩은 내가 진동하는 도둑들만 설쳐댄다는 비판이 되겠다.

공자는 소인(小人)을 미워했다. 대의를 따르지 않고 자기에게 이로운 것만 밝힌다는 이유에서다. 맹자도 소인을 욕했다. 양심을 어기고 눈과 귀로 확인되는 실리만 챙기기 때문이다. 소인을 천박한 존재로 분류했지만 그래도 두 성인에 따르면 소인이라고 해서 영 몹쓸 인간은 아니다. 비록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에게 해를 가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 소인이지만, 그나마 자신이 소인임을 알고는 있다는 것이다. 양심이 있고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다.

소인배가 판치는 세상이라지만 그런 소인 축에도 못 끼는 인간들이 있다. 바로 잡배(雜輩)다. 무뢰해서 부끄러움도 모르는, 쓰레기로 취급해야 할 무리라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로 분류되는 꼴은 당하지 말아야 않겠나.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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