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훗날의 시집/배영옥 (1966~2018)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2019) 중에서-
한 시인의 문학적 여정이 그 시인의 삶을 결정짓는 걸 종종 보게 된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의 유고 시집을 받아들고 먹먹한 가슴으로 눈물을 훔치며 시인의 약력을 보았다. 등단 12년 만에 첫 시집을 내고 생애 첫 여행지로 8개월간의 쿠바 생활을 보낸 시인은, 욕망의 맨 얼굴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쿠바의 경험을 적은 산문집 <쿠바에 애인을 홀로 보내지 마라>를 2014년 발간한다.
쿠바에서의 문화 충격이 몸에서 분해되지 못한 것일까? 뒤이어 시인은 지병을 얻게 되고 2018년 세상을 떠난다. 작은 생명과 작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행복해하고 극단의 은유를 배제한 담담한 삶의 기록을 담고 있는 유고 시집을 읽으면 살아남은 시민들의 여생이 덧없어진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발설한 시인. 그리고 그 시인을 사랑한 시인. 시인은 말한다. 함께 별을 바라본다는 건 타다 남은 잔해를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규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