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연필심과 스카치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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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사회부 행정팀 차장

탄소 원자로 이뤄진 세상에서 가장 얇은 막. 고작 0.3nm(나노미터) 두께에 불과하지만 구리보다 100배 전기가 잘 통하고, 강철보다 200배 강한 물질.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Graphene)’은 뛰어난 성질만큼이나 탄생 이야기도 놀랍다.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 안드레 가임과 콘스탄틴 노보셀레프 교수는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탄소 동소체’인 연필심(흑연)에서 그래핀을 발견해냈다. 이들이 쓴 실험기구는 스카치테이프. 부러진 연필심에 테이프를 반복해서 떼었다 붙이는 방식으로 마침내 마지막 한 층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그래핀을 발견한 공로로 가임과 노보셀레프는 2010년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이들의 연구는 역대 노벨상 중 가장 단순한 실험으로 통한다.

그래핀의 탄생을 보면서 위대한 발견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인지, 우리나라에선 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 어려운지 짐작해 본다. 값비싼 실험 장비를 제쳐두고, 수년간 연필심과 스카치테이프를 조몰락대는 과학자를 기다려줄 인내가 우리에겐 있는가. 이들의 성과는 상상력과 도전 정신, 끈기가 켜켜이 쌓인 결과다. 탄소가 층층이 쌓인 흑연을 테이프로 한 겹씩 떼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 이를 실행에 옮기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끝내 해내고야 마는 끈질김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의 자질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졌을 것이다. 학창 시절 흥미 있는 일에 몰두했고, 때론 좌절하면서도 성취를 맛봤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꼬마 과학자의 도전을 격려하는 이들이 있었으리라. “왜 성적이 이 모양이냐”는 꾸지람 대신 “다음에 더 잘하면 돼”라는 응원의 한마디가 뜨거운 불씨로 가슴 깊숙이 심겼을 것이다.

강산이 여러 번 변했지만, 오래 전 어머니 아버지가 그러했고 필자가 그랬듯, 까마득한 후배들이 여전히 국·영·수 점수를 따지며 입시에 목을 맨다. 이런 현실에선 연필을 부러뜨릴지언정, 부러진 연필심으로 실험 따위를 할 리 만무하다. 특히 올해 입시는 정시 비중이 확대되면서, 점수로 줄 세우기 하던 시절로 퇴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진로·적성 대신 대학 간판만 보고 자연계열 학생들이 대거 인문계열로 지원하는 초유의 ‘문과침공’ 현상마저 나타났다.

최근 부산에선 또 다른 위험 신호가 감지됐다. 코로나 시국을 틈타 해외유학 수요를 노린 미인가 국제학교가 하나둘 문을 연 것이다. 유학원 같은 교육서비스업으로 사업자등록을 한 뒤 학교인 양 학생들을 모집하는가 하면, 어학원을 국제학교나 영어유치원처럼 운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 점수, 외국대학 간판을 좇는 이들이 그리는 미래는 위대한 발견과 거리가 먼 것만은 분명하다.

뒤늦게나마 부산시교육청이 문제 시설에 대해 경찰 고발과 특별단속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점은 다행스럽다. 수천만 원의 학비를 받아챙기며 극소수를 위해 운영하는 미인가 국제학교의 일탈과 위법을 대다수의 시민들은 분노하며 지켜보고 있다. 불법 교육시설에 대한 시교육청의 특별단속 결과가 부산교육의 지향점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이들이 영어성적표가 아니라, 연필심과 스카치테이프를 조몰락거리는 미래를 그리면서 말이다. djr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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