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나도 괜찮아요, 크거나 작으면 어때요, 음~ 맛있으면, 그만이죠
못난이 농산물
뿌리가 여러 개인 혹부리 당근, 크기가 제각각인 감자, 손바닥만 한 키다리 새송이버섯, 흙투성이 작은 무, 판로를 찾지 못한 시금치와 오이·대파까지. 이것들은 모두 ‘못난이 채소 박스’에 담긴 것들이다. 못난이 농산물 정기배송업체 ‘예스어스’에서 주문했던 1~2인용 가구를 위한 1만 5000원짜리 박스였다. 모두 무농약 인증을 받은 친환경 농산물이다. ‘오늘 채솟값 최대 41% 절약’ 안내문처럼 기대 이상으로 풍성했다. ‘어떤 못난이’에서 주문한 욕지도 꿀밤고구마 못난이는 도대체 어디가 못난 것인지 오히려 고민하게 만들었다. 크기가 들쭉날쭉한 것 외엔 맛 좋은 예쁜이였다.
외관으로 상품 가치 잃은 식품
적극 구매하는 ‘푸드 리퍼브’
최근 필환경 바람 타고 주목받아
못난이 농산물 배송업체도 등장
국내 소비자 ‘못난이’ 구매 이유
가격 저렴·품질 큰 차 없어서
■농산물인데 외모를 왜 따지나요
못난이 농산물은 흔히 말하는 ‘등급 외’ 농산물이다. 쉽게 말해 ‘외모(규격) 심사’에서 탈락한 것들이다. 색이 예쁘지 않다거나 표면이 울퉁불퉁하다거나 혹이 났다거나 하면 탈락이다. 크기도 심사에 중요한 기준이다. 너무 크거나 작아도 통과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대형 유통업체 위주로 농산물이 유통된다. 업체들은 판매와 관리가 수월하도록 ‘규격화’한다. 농산물의 모양과 크기를 기준으로 특·상·보통 등의 등급을 매기고 기준에서 벗어나면 출하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시중에서 ‘못난이’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심사에서 탈락한 농산물은 대부분 산지에서 폐기되거나 가공용으로 헐값에 처분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한국협회가 지난해 10월 내놓은 국제기구 농수산동향 모니터링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는 식품의 14%가 수확에서 소매에 이르는 과정에서 손실된다고 한다. 이러한 식품 손실은 식량불안을 악화시키고, 결국 먹지 않는 식품을 생산하기 위한 토지·물·에너지의 낭비는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잉거 안데르센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총장은 “우리의 푸드 시스템과 소비 관행이 지구를 괴롭히는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손실, 환경오염의 주요 원인이다”고 말했다. 음식을 폐기할 때 발생하는 메탄과 이산화질소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이기도 하다. 생김새만으로 못난이 농산물을 ‘버릴 것’으로 취급한 결과가 농가는 물론 지구와 환경까지 위협하고 있다.
■필환경 시대 가치소비로 주목받다
최근 ‘필(必)환경’ 바람과 ‘가치 소비’ 바람을 타고 못난이 농산물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푸드 리퍼브’라고 한다. 푸드 리퍼브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외관으로 상품 가치를 잃은 식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하거나, 그 농산물을 활용해 새 식품 혹은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는 트렌드다.
2014년 프랑스 슈퍼마켓 체인인 인터마르셰(Intermarche)는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inglorious fruits&vegetables)’ 캠페인을 벌여 큰 관심을 끌었다. 포스터에는 ‘못생긴 당근’ ‘그로테스크한 사과’ ‘실패한 레몬’ 등이 등장했다. 못난 농산물은 예쁜 농산물보다 30% 더 저렴한 가격에 팔았다. 이후 프랑스에는 못생긴 채소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비자들이 못난이 농산물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맛남의 광장’이라는 TV 예능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다양한 크기의 못난이 감자들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에게 30t 매입을 부탁했고, 이후 감자는 대형마트에서 완판을 기록했다.
못난이 농산물에 대한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인식은 어떨까.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이 소비자 2000명을 대상으로 못난이 농산물 구매 실태와 인식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60.5%는 구매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못난이 농산물을 구매하는 이유는 “가격이 일반 농산물보다 저렴해서” 46.4%, “품질에 큰 차이가 없어서” 28.4%, “즙·주스 등 외관이 중요하지 않은 요리를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14.2%, “최근 언론보도 등을 통해 못난이 농산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7.2% 순이었다. 구매 경험자의 95.5%가 재구매 의사가 있다고 답해 긍정적인 인식을 보여 줬다.
■버려지는 못난이 농산물 구출 대작전
최근 몇 년 사이 못난이 농산물로 구성한 꾸러미를 정기 배송하는 업체가 속속 등장했다. 대형 유통업체나 지자체가 못난이 농산물을 대량 판매하는 이벤트성 행사뿐 아니라 못난이 농산물만 골라 유통하는 업체들이 생기면서 시장이 커지고 있다.
‘어글리어스’는 2010년 10월 동종 업계 최초로 못난이 농산물을 정기 배송하기 시작했다. 채소 박스 크기와 배송 주기(매주/격주)를 선택할 수 있다. 무농약·유기농 인증을 받은 친환경 채소 7~9종으로 구성되며 추천 레시피도 동봉한다. 받고 싶지 않은 채소는 제외할 수 있다.
‘예스어스’도 사이즈와 배송 주기(매주/격주)를 선택하면 6~10종의 채소를 보내 준다. 채솟값을 얼마나 절약했는지 알 수 있도록 매주 채소 시세를 업데이트한다. 배·파프리카 등 단품도 판매한다.
부산 사회적기업 ‘파머스페이스’가 운영하고 있는 ‘어떤 못난이’도 있다. 현재까지 275만 3114kg의 못난이 농산물을 구출했다고 한다. 욕지도 꿀밤고구마, 화이트 양송이버섯, 국내산 무농약 바나나 등 다양한 못난이 농산물을 만날 수 있다.
못난이 농산물을 업사이클링한 뷰티 브랜드들도 있다. ‘어글리시크’의 페미닌 워시폼은 전북 유기농 못난이 사과 추출물로, 자외선 차단제는 제주 유기농 브로콜리로 만든다. ‘이니스프리’는 제주에서 수확한 제철 못난이 당근을 화장품 원료로 재탄생시켜 핸드솝과 핸드크림을 선보였다. ‘쏘내추럴’의 ‘쏘 비건 어글리 포테이토 마스크’는 못난이 감자를 활용한 것이다.
농산물은 공장이 아닌 땅에서 자라는 것이니 각자 다른 생김새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같은 환경의 같은 땅에서 자랐으니 맛과 영양은 똑같다. 일부러 못난이를 재배하는 농부는 없다. 자연스럽게 태어난 못난이 농산물들이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다.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