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여성의 날과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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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3월 9일에 치러지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이번 대선은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바로 다음 날이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77년 UN에서 국제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고, 한국은 2018년 법정 기념일로 지정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기린 것으로 알려진 여성의 날의 상징은 다름 아닌 ‘빵과 장미’다.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흔히 참정권으로 해석되는데 인간으로서 삶을 누릴 권리를 의미한다. 제임스 오펜하임이 1911년 발표한 시 ‘빵과 장미’에는 당시 봉기했던 여성들의 심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은 착취당하지 않아야 하지만/마음과 몸 모두 굶주린다./우리에게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 여성들이 생존권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권리를 요구했던 그 목소리 덕분에 오늘날 여성의 권리는 신장되어 왔지만, 변하지 않은 현실 또한 존재한다.

성별 임금격차 OECD 국가 1위
유리천장 지수는 9년 연속 꼴찌
코로나19 거치면서 더욱 심화

젠더 갈등·여성혐오 대선 안 돼
공동체 가치·비전으로 승부하고
구조적 성차별 문제 적극 해결을



‘눈 떠 보니 선진국’이 되어 주요 7개국(G7)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이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중 성별 임금격차는 언제나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동시에 ‘유리천장 지수’는 9년 연속 꼴찌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여성 노인빈곤율은 세계 1위이며 OECD 평균보다 3배 높다. 여성 가구주의 가구빈곤율 역시 남성 가구주에 비해 3~4배 높다. 이러한 여성의 빈곤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더 심화하였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2020년 초기 2분기에만 41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여성이 25만 명으로 남성 16만 명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자살률로 가면 상황은 더 절망적이다. 2015년 이후 20대 여성 자살자는 64.5%나 급증했는데 모든 연령대의 남녀를 통틀어 자살 증가율이 가장 높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상식적인 사회라면 대통령 후보들이 정책과 공약을 통해서 어떤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한국 정치가 성평등 사회를 향한 전망을 보여 주기 이전에 진영 싸움과 성별 갈라치기에 급급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평가에 더해 여혐 대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표방하며 정권을 잡은 여당은 연달아 벌어진 지자체장에 의한 성폭력 사건과 그 대응에 있어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피해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겪은 일은 여성 노동자가 생존권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일상적으로 침해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준다. 반성의 여지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비교적 탄탄히 마련된 여당 후보의 성평등 공약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여당의 지지자들은 상대 진영 후보 부인의 외모에 대한 공격과 조롱을 일삼고, 정작 그 피해자인 야당 후보의 부인은 성폭력 피해여성에 대한 2차 가해를 저지르는, 말 그대로 참담한 선거다.

주요 이슈로 급부상한 소위 ‘젠더 갈등’에 대한 정치권 대응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반감이 지나친 나머지 같은 성별의 남성들에 대해서도 ‘퐁퐁남’이라 부르며 비하하고 조롱할 정도의 과격한 목소리는 어느 세대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정치권의 호응이다. 과격한 언어와 표현으로 부당한 현실을 말하는 대중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정치인의 사명이지만, 공동체의 윤리와 가치를 표방하는 비전으로 화답하는 것 또한 중요한 책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야당 대표와 후보를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은 여성혐오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며 정치공학적으로만 움직인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반이민주의 정서를 부추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여성주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대표적인 게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다. 전체 정부 예산의 0.2%에 불과한 행정부처의 폐지를 대선의 주요 공약으로 내걸 만큼 이것이 국가의 미래와 비전을 담고 있는 정책일까?

제임스 오펜하임의 시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하면서, 우리는 남자들을 위해서도 싸운다./그들은 여성의 자식이고, 우리가 또 그들의 엄마이기 때문에./(...)/여성이 봉기한다는 것은/인류가 봉기한다는 것/삶의 영광을 함께 누리자/빵과 장미, 빵과 장미” 100년 전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결국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인류의 투쟁이었다. 3월 8일을 지나 당선될 차기 대통령이 이 의미를 되새기고 구조적 성차별과 폭력을 드러내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그런 정치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대선을 하루 앞둔 올해 3·8 여성의 날에는 누군가의 딸이거나 엄마이거나 아내인 여성들. 그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사회의 노동자로서 여성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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