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강대국 이익에 흔들리는 ‘요충지’… 우크라 운명은 자국 국민이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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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우크라이나는 주권국가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전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한 노인이 러시아 모스크바 서쪽 아프렐레프카 역에 도착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전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한 노인이 러시아 모스크바 서쪽 아프렐레프카 역에 도착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유럽 국가이며 미래를 위해 싸우겠다.”

2014년 친러시아 정권인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 준회원협정(Association Agreement) 체결에 반대하자, “소련 시대 할아버지 세대로 한참을 퇴보했다”면서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에서 벌어졌던 유로마이단 혁명에 대한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Winter on Fire)’의 첫 대사이다. ‘우크라이나 자유 투쟁’이란 부제를 단 이 다큐멘터리는 93일 동안 125명 사망·65명 실종이란 희생 끝에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하야하고, 유럽연합과 준회원협정을 체결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러시아는 친러 정권이 무너진 2014년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하고, 동부 반군세력을 지원해 돈바스 전쟁을 벌인다. 8년 뒤인 2022년 2월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다시 침범했다. 구소련 붕괴 이후 30년 이상 수면으로 가라앉았던 냉전이 부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전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22일(현지시간) 친러시아 반군이 통제하는 동부 도네츠크에 러시아군 탱크가 진입하는 장면.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전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22일(현지시간) 친러시아 반군이 통제하는 동부 도네츠크에 러시아군 탱크가 진입하는 장면. 연합뉴스

■ 우크라이나 위기의 배경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는 키예프 루스(키예프 공국)라는 러시아 슬라브 문명의 발상지이다.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인 레온 트로츠키와 흐루쇼프 전 공산당 서기장 등이 우크라이나와 인연이 깊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당시 세계 3위 핵무기 보유국이었다. 하지만 1994년 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중국까지 안전보장을 약속하자 핵무기를 포기했다. 재래식 군 병력도 지속적으로 감축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할 때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무장해제 상태였다.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이 22일 미국 폭스뉴스에 출연해 미국이 당시 약속했던 안전 보장을 이행하라고 촉구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자국의 실력이 아닌 의정서나 협약에 기초한 안전 보장은 휴지 조각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동유럽의 지정학적 공백을 NATO를 중심으로 메우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동유럽의 폴란드·헝가리·체코 3개국이 1999년, 불가리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 등 7개국이 2004년에 나토에 가입했다. 2020년까지 알바니아·크로아티아·몬테네그로·북마케도니아 등도 나토 회원국이 됐다. 이번 사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노선을 택하고, 나토 가입을 추진하면서 증폭됐다. 그 이면에는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 이후 잠복해 있던 서방과 러시아의 뿌리 깊은 불신, 지정학적 공백, 미국 일극체제에 대한 불만이 군사적 충돌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러시아는 국경선을 맞닿은 우크라이나까지 NATO에 가입하면 지정학적 완충지대가 사라져 안보 딜레마를 고조시키는 위협이 되고,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국내정치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라고 이번 사태를 진단했다.

러시아 에너지·사이버 등 하이브리드 전쟁

러시아 상원은 푸틴 대통령의 해외 병력 사용 요청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러시아는 22일 평화유지군이란 미명 아래 우크라이나 영토로 탱크를 진입시켰다. 러시아는 이와 함께 전력망 등 에너지 기반시설에 대한 대규모 사이버 공격, 심리전을 병행하는 비대칭 전술인 일명 ‘하이브리드 전쟁’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도발을 지속하고 있다. 수도 키예프로 군사적 침공 가능성을 주기적으로 흘리면서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천연가스 에너지를 무기화하는 전략도 등장했다. 러시아는 유럽연합 가스 수요의 40%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러시아는 특히 가스 수요가 높은 겨울철에 우크라이나 도발을 강행해 전략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재생에너지에 집중해 러시아 천연가스 에너지 의존도가 50% 이상인 독일은 제 목소리를 내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 국제 질서의 새판 짜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 이후에 형성된 유럽 안보 지형, 국제 질서를 새롭게 짜겠다는 속셈이다.

장세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위기’ 이슈 보고서에서 “러시아는 이미 싸움의 판을 키워 강대국 위상을 유지·강화하기 위한 지정학적 기반을 수호해 유럽 안보 지형을 재편하고, 중국과의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다극적 국제질서체제로의 이행을 추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안상욱 교수도 “우크라이나 사태는 확실한 국제적 리더십이 부재한 시대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발생한 갈등”이라면서 “향후 유럽의 안보 지형과 국제 질서는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 방향에 따라 지금과는 많은 차이를 보일 것이다”라고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카터 미국 대통령 시절에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레진스키가 21세기 미국의 세계 전략을 담은 저서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에서 탈냉전 이후 붕괴한 러시아가 제국 부활을 꾀한다면 우크라이나는 그 시발점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은 이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브레진스키가 제시했던 러시아가 중국, 이란과 함께 유라시아에서 반미 동맹을 형성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서 세계적으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미국, 서유럽의 경제 제재 효과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군사적 대응은 마땅치 않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는 군대를 진입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상태이다. 현재 서방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강화와 러시아에 대한 금융·경제 제재에 불과하다. 미국은 러시아 최대 국책은행인 대외경제은행(VEB)을 비롯해 2곳을 제재하는 등 서방에서의 자금 조달을 전면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 제재의 효과는 크지 않다. 2014년도 크림반도 사태 때에도 러시아에 금융 제재를 가했지만, 결국 큰 효과 없이 흐지부지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주 뮌헨 안보회의에서 “러시아가 점령하고 난 이후에 제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절규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의 국제기구와 국제 질서가 분쟁의 해결이나 규범의 위반에 대해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위기의 해법과 시사점

미국이 러시아와 유화적인 타협에 그친다면 미국의 신뢰성은 타격을 받게 된다. 동맹국들이 이번 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군사적 충돌도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은 중국과 대만, 북한, 이란 문제에 대응하여야 할 미국의 역량과 자원을 분산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중국·이란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연대는 대만해협과 동중국해, 한반도 등 약한 동맹의 고리를 비집고 어디서든 출현할 수 있다. 결국 미·중 경제 전쟁의 새로운 변수가 될 수 있다. 미국으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기도 하다.

7000㎞ 이상 떨어진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국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굳건한 동맹 체제나 스스로의 안보 수단 없이 구속력 없는 안전 보장 약속만 믿다가 안보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유가 급등과 주가·코인 가격 폭락 등 한국의 경제, 사회는 물론이고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2014년 마이단 혁명에서 93일간 광장을 지킨 시위대는 ‘윈터 온 파이어’ 다큐멘터리에서 “우리는 23년 동안 겉으로는 독립 국가였지만, 이제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진정한 독립 국가가 됐다”라고 환호한다. 이젠 독립국으로 31년이 지난 우크라이나 운명은 푸틴의 탱크가 아닌, 그 땅에서 자유롭게 성장한 국민이 결정해야 한다. 우크라이나는 ‘주권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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