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한반도 평화' 대원칙 흔들려선 안 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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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북한이 끝내 선을 넘었다. 올 들어 잇달아 타전한 시그널이 미국에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결국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카드를 꺼내 들었다. 확인된 정점 고도는 6200㎞ 이상, 비행 거리는 1080㎞, 정상 각도보다 높게 쏜 고각 발사였다. 통상 궤도였다면 1만 5000㎞ 이상을 날아 미국 동부 해안을 포함한 미국 전역에 도달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실상 전 세계가 사정권 안에 들었다는 뜻이다. 이게 기존 화성-15형인지 신형 화성-17형이 맞는지 논란이지만, 2017년 11월 발사한 화성-15형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간 건 분명하다. 기술적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

24일 모라토리엄 약속을 4년 4개월 만에 스스로 뒤집은 북한의 ICBM 발사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요, 동북아를 포함한 국제사회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다. 착탄 지점이 일본 해역이라서 당장 일본의 반응이 부산스럽다. 일본 열도가 북한 미사일의 앞마당이란 사실이 재차 확인된 데다, 일본의 육지가 아닌 인근 바다에 떨어지도록 한 고각 발사의 정확도에 충격을 받은 듯하다. 여기에 북한의 7차 핵실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2018년 폭파한 일부 핵실험장 갱도가 복구된 정황이 28일 탐지됐다고 한다.


끝내 ICBM 카드 꺼내 든 북한

모라토리엄 4년여 만에 파기

한반도 평화 다시 격랑 속으로


새 정부 혼란 속 새로운 시험대

2018년 이후 성과들 불씨 살려

평화 정착 주도권 만들어 가야


해가 바뀌자마자 집중되고 있는 북한의 잇단 강수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세계정세의 혼란과 한국의 정권 교체기를 노렸다는 의미다.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마당에 미국의 대북 제재안에 러시아가 협조할 리 만무하다. 미국과의 갈등이 장기화하고 있는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발사 직후 유엔안보리는 가장 낮은 수준의 회의 결과물인 언론성명조차 내지 못했다. 한국의 정권 교체기를 틈탄 것은 향후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쥐려는 심산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써 한반도 평화에 다시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암울한 전망이 빗발친다. 그런데 시선을 단발적 사건에 두지 말고 거시적 관점으로 확대해 볼 필요가 있겠다. 북한이 시종 ICBM 개발과 소형 핵탄두 탑재에 매달리던 때가 2017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18년은 매우 중대한 전환의 해로 기억된다. 이 시기 남·북·미가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다양한 합의들이 발표됐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미국이 사실상 북한의 핵 억지력을 인정했다. 대북 압박이 군사적 수단에서 외교적 수단으로 바뀐 점, 다시 말해 대북 전략이 무력이 아닌 협상으로 변화한 것은 고무적인 변곡점이라 할 만하다.

안타깝게도, 북·미는 끝내 신뢰 구축에 실패했다. 북한은 자신의 선제적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미국의 조치를 요구했고, 미국은 회담 이후 북한에 대한 신뢰를 문제 삼으며 전면적 비핵화 이행을 요구하는 강경파들의 목소리에 휩쓸렸다. 그렇게 북·미 관계가 원점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 북한은 아예 북·미 간 협상이나 대화에 대한 기대를 접은 듯하다. 바이든의 ‘매파’ 전략은 지금 러시아가 군사행동 수위를 높일 때마다 추가 경제 제재를 부과하는 맞대응 전략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원하는 바를 얻는 수단으로 무력을 선택했지만 북한의 궁극적 목표는 대북 제재 완화·해제에 있다. 이는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종국에는 북·미 관계 개선, 종전 선언, 체제 인정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살길임을 북한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펼쳐지는 한반도 상황은 위기 국면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2018년 ‘한반도 평화 전환’ 이후의 과정 속에 있다고 보는 게 옳다. 최근 세종연구소에서 펴낸 〈한반도 평화 대전략〉(백학순 외)이라는 책이 그런 통찰을 제공한다. 2018년부터 이미 한반도에서 ‘평화’를 중심으로 한 대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항구적 정착으로 끌고 나가는 전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궈 낸 성과들을 평화 정착의 불씨로서 살려 내고 주변 관련국과의 전략적 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평화라는 대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켜 나가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도권 행사에 있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주변국과의 협력과 포용, 설득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지 치열한 고민과 정교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새 정부는 전례 없이 험난한 시험대에 섰다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늘 반복된다. 2017년 겪었던 전쟁 위협의 재발을 막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이뤄 내야 할 민족의 과제다. 이는 인류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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