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투쟁과 문화 그리고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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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2020년, 작품성과 화제성을 인정받으며 등장한 영화.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을 받고, 수상을 했지만 도통 개봉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다큐멘터리 ‘재춘언니’. 극장에서 보지 못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 개봉 소식을 들었다. 수십 년 넘게 일하던 공장에서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 당했다. 경영진은 경영 위기를 내세웠지만 세계 기타 시장 30%를 점하고, 연간 100억 이상 흑자를 기록하던 회사였다. 폐업 이후 공장은 해외로 이전한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 기타 한 대를 만드는 데 헌신했었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로부터 무려 13년, 한국 최장기 투쟁을 이어간다. 나는 부끄럽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났다.

다큐 ‘재춘언니’ 뒤늦은 극장 개봉
콜트·콜텍 해고자 13년 투쟁 그려
격한 충돌 아닌 문화적 연대 ‘뭉클’
농성 끝 웃음 잃은 주인공 씁쓸해


‘재춘언니’를 연출한 이수정 감독은 2012년 ‘깔깔깔 희망버스’를 통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2015년 ‘나쁜 나라’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재춘언니’를 통해서는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삶을 뒤따르며 다큐라는 형식을 빌려 영화를 완성한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를 관찰하는 감독의 카메라는 투쟁을 정리하려 하기 보다는 ‘재춘언니’로 불리는 임재춘을 중심으로 콜텍 노동자들의 삶을 지켜보는 데 의의를 둔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재춘은 투쟁의 현장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재춘. 그는 천막 농성장에서 요리를 담당하고, 청소를 하는 등 노동자들을 살뜰히 살피는 ‘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감독은 “임재춘이라는 사람은 농성 당시 주방을 담당하며 맛있는 밥을 지어주고 여성 연대자와 수다를 격의 없이 떨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회상한다. 각박한 농성 현장에서 자주 불리는 형이나 동료, 동지라는 강경한 이름 대신 ‘언니’라는 유연한 호명이 바로 콜텍 노동자들의 시위와 닮아있다.

‘재춘언니’는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담았기에 어떤 면에서 격렬한 충돌 장면이 나올 법한데도 영화에선 격렬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재춘언니’에서 노동자들은 문학, 음악, 연극 등 다양한 문화적 연대를 통해 투쟁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달리 말해 영화의 미덕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고, 억울함이나 분노를 담아내는 대신 자신들의 투쟁을 문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연극 ‘구일만 햄릿’과 ‘법 앞에서’를 무대에 올리고, 밴드 ‘콜밴’을 만들어 노래를 하고, 철학을 통해 노동의 고귀함을 알리고, 글쓰기를 통해 노동의 시간을 기록한다. 또한 노동자들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대신 제를 올린다. 그 어떤 투쟁보다 더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또한 이런 문화와 결합한 농성은 기존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을 만든다.

영화의 흑백 화면도 인상적이다. 농성 8년 차 재춘이 말한다. 해고 당시 12살 아이가 20살이 되었다고, 44살 재춘도 52살이 되었다. 세상은 형형색색의 빛으로 흘러가지만 기나긴 농성 속에서 노동자들에겐 색이 없었다. 하지만 이 흑백은 멈춰진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노동의 의미와 노동자들과의 연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묵직한 시간이 담긴 화면이다.

2019년 4월 극적으로 노사 합의가 이뤄졌다. 4464일의 긴 농성에 마침표를 찍었다. 현실로 돌아온 재춘언니는 흑백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처럼 칼라 속에서 있다. 하지만 재춘언니는 그토록 원하던 형형색색의 빛이 드는 세계로 돌아왔지만 과거 농성장에 있던 그 때와 다르다. 흑백의 세상에서 늘 웃음을 머금고 있던 재춘언니가 웃지 않기 때문이다. 웃지 않는 재춘의 모습이 어색해서 눈을 감고 싶어진다. 그건 아마도 그가 그토록 원하던 콜트·콜텍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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