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의 플러그인] 일상이 된 합의 파기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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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부가 어제 출범했다. 역대 어느 때보다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선이었지만, 국민의 여망을 안고 대장정을 시작한 새 정부의 앞날이 밝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라도 같을 것이다. 국민의 기대 속에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수행할 새 정부 인사들의 의욕도 충만해 있으리라 생각한다.

새 정부 출범에 발맞춰 국정의 또 다른 축인 국회의 여건도 우호적이라면 금상첨화이겠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처지가 바뀐 더불어민주당과 여당이 된 국민의힘 사이의 협치 실종으로 인한 갈등은 새 정부의 조기 안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난해 국회 법사위원장 교대 약속

최근 민주당 “재검토”, 번복 밝혀

극심한 논란 부른 검수완박 중재안

국민의힘 역시 합의 뒤집은 전례

정치 신뢰성 스스로 해치는 행위

새 정부 출범, 전환 계기 삼아야


인사청문회 이후 당장 제기되는 현안은 오는 7월부터 시작되는 21대 국회 후반기 법제사법위원장 선출 문제다. 21대 개원 때부터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 치열한 힘겨루기의 대상이었던 법사위원장이 다시 양당 갈등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모양새다. 발단은 민주당의 합의 파기 움직임이다.

개원 이후 1년 3개월 만인 지난해 8월에야 상임위원장 진영을 온전히 꾸린 양당은 최대 쟁점이 된 법사위원장을 전반기엔 여당인 민주당이, 후반기엔 야당인 국민의힘이 맡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올해 대선을 통해 민주당이 야당으로 바뀌면서 이를 번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최근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후반기 원 구성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해 기존 합의 파기 방침을 밝혔다.

야당이 된 민주당 입장에서는 정권도 내준 마당에 국회 운영의 실권을 쥐고 있는 법사위원장을 여당인 국민의힘에 넘길 수는 없다고 계산한 듯하다.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으로 통칭하는 검찰개혁 후속 입법을 비롯해 새 정부 견제를 위해서라도 법안의 마지막 관문인 법사위원회를 틀어쥐겠다는 뜻이다.

이를 보면 이유야 어떻든 우리나라 정당이 공식적인 합의나 약속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똑똑히 알 수 있다. 공식 석상에서 서명하고, 언론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리며 철석같이 이행을 공언했더라도 당리당략에 조금이라도 부딪히면 태도를 확 바꾼다. 정치권의 합의는 이행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라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세간의 우스갯소리가 참말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런 합의 파기가 민주당만의 일도 아니다. 온 나라를 들쑤셔 놓은 검수완박 법안을 둘러싼 갈등 국면에서 국민의힘도 국회의장 중재로 민주당과 맺은 합의안을 손바닥 뒤집듯 파기했다. 책임 공방을 놓고 벌어진 여야의 극한 대립은 새 정부의 국정 쇄신 방향은 물론 다가온 지방선거 이슈마저 모두 파묻히게 했다. 국가적 에너지 낭비다. 여기서 다시 검수완박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를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이룬 합의를 나중에 아무렇지 않은 듯 뒤집는 일이 일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숨길 수가 없다. 정치적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예전에 했던 합의를 쉽게 파기한다면 앞으로 그 누구와 맺은 합의나 약속도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정당 간 또는 정치인 간 합의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파기되어선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사회적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위 단계인 정치의 장에서 맺은 합의나 약속은 보통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무게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니, 정치적인 합의나 약속에 대한 신뢰가 허약한 것도 당연하다.

우리 국민들이 여전히 정치인의 합의나 약속에 대해서는 가장 밑바닥의 신뢰성을 보이는 것도 모두 이런 기억에 연유한다. 최근의 일만 보더라도 정치권의 행태는 국민 불신을 자초하는 요인이지만, 정치권이 진지하게 반성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여러 이유가 제기될 수 있겠으나, 우리 정치의 극심한 독과점 현상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 지적이 많다. 소수 정당에 의한 정치 독과점이 극심하다 보니, 선거를 통한 민의의 견제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고한 진영 정치화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선거제도 개편 등 대안이 제기돼도 굳건한 정치 독과점 장벽 앞에서 막히기 일쑤다. 정치의 장에서 합의 파기를 유발하는 요인이 상존하는 구조인 셈이다.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해도 우리 정치가 발전하려면 이를 넘어서야 한다. 정치 상황의 변화무쌍함을 합의나 약속 파기의 구실로 둘러대서도 안 된다. 이는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새 정부는 국가균형발전을 포함해 110개 국정과제를 약속했다. 정치권의 합의 파기 악습이 새 정부의 국정 수행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런 모습은 이미 국회만으로 충분하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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