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오월의 숲과 생명의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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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오월이 깊다. 계절의 여왕 오월의 숲은 특별하다. 한껏 물이 오른 이팝나무는 우듬지까지 꽃대궐이다. 연초록 보드랍던 잎사귀도 제법 힘살을 키워 어느새 큰 그늘을 드리우며 고요하다. 그뿐이랴. 노란 피나물꽃과 애기똥풀, 보랏빛 구슬봉이와 으아리, 밥풀 같이 흰 말냉이꽃. 형형색색 야생화도 숲의 향기를 돋운다. 드물게 딱따구리와 산고양이를 만나는 날에는 하루가 산빛만큼이나 짙다. 이름 모를 곤충의 소란한 날갯짓이 숲의 고요를 깨뜨려도 좋은 날들이다. 오월의 숲은 뭇 생명이 저마다 뿜어내는 향취로 경이롭다.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의 이야기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1824)가 원작소설이다. 악마는 슐레밀의 그림자를 보물이 나오는 요술자루와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그림자가 없어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슐레밀은 악마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다. 악마는 풀밭에 드리운 슐레밀의 그림자를 거둬들여 주머니에 둘둘 말아 넣고는 이내 사라졌다. 그림자가 사라지니 슐레밀은 큰 곤경에 처하고 만다. 요술자루 덕분에 부를 이루었지만, 그림자의 부재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슐레밀은 조롱을 피해 어둠 속에서 살아보려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사랑하는 이도 잃고 말았다. 그림자란 과연 무엇일까. 햇빛 아래 어김없이 나타나는 것이 그림자다. 너무나 당연하여 특별히 자각하는 대상이 아니다. 슐레밀은 가난할지라도 그림자가 있을 때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림자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림자 없는 존재라는 말은 이방인에 대한 비유다. 그림자는 슐레밀이 사람들 속에서 마땅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실존의 기본조건이었던 셈이다.

현대는 다문화사회다. 정치적 망명이든 개인적 이주든 국경을 넘나들며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도 이방인으로서 공동체에 편입되는 일이나 낯선 이를 공동체에 흔쾌히 받아들이기란 여전히 난망하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으며 타자로부터 온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뜻이다. 국적, 인종, 성별, 지역, 종교와 같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배척하지 않고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환대라 한다. 환대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일이자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는 자리를 내주는 행위다. 칸트는 환대를 사람으로서 갖는 권리라 했다.

숲에는 100년 넘은 아름드리나무의 그늘과 한해살이풀의 개화가 서로 다투지 않는다. 웃자란 쑥과 키 낮은 피막이풀도 제 영토를 일구며 더불어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며 어느 하나 소외되거나 고립되지 않는 헤테로토피아다. 사람 사는 세상도 예서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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