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64.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 스승과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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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라 했듯이 지도하는 곳에는 배움의 기회가 공존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다 같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은 요가 지도 현장과 특히 어울린다. 시연: 임은주, 전서영.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라 했듯이 지도하는 곳에는 배움의 기회가 공존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다 같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은 요가 지도 현장과 특히 어울린다. 시연: 임은주, 전서영.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스승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윤기, 무명자집).

백지 상태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지식뿐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다면 인간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누가 자신할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은 평생에 한 분의 스승을 모실 수 있기를 원했고, 심지어 스승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평생 섬길 스승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이라 여겼다. 고개를 숙이고 발등에 입 맞출 스승이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랴.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마음은 황폐해지고, 지식이 넘쳐날수록 인격은 메말라 간다. 재주는 비상해도 덕망이 미치지 못하며, 교사는 많아도 스승은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스승이란 어떤 사람인가. 조선 후기의 이서는 ‘자신의 도(道)를 이루어 남에게 미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 도가 대단히 커서 덕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덕성을 지니지 않고서 스승이라는 명예와 그에 따른 이익만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스승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스승은 도를 전하고 학업을 전수하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존재가 아닐진대 누군들 의혹이 없을 수 있으리오? 의혹이 있으면서도 스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의혹된 것은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그 도(道)를 들은 것이 진실로 나보다 앞선다면 나는 따라서 그를 스승으로 삼고 나보다 뒤에 태어났더라도 그 도를 들은 것이 또한 나보다 앞선다면 나는 따라서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무릇 어찌 그 나이가 나보다 앞서거나 뒤짐을 따지겠는가? 그런 까닭에 귀하거나 천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관계없이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는 곳이다.(중략)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같지 못한 것은 아니며,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하지는 않다.”

당나라 때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한유(768-824)의 사설(師說)로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돼 있는 글이다.

갈수록 덕망을 가진 스승이 사라지고, 스승을 모시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다. 참다운 가르침을 줄 지혜로운 스승이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스승의 날(5월 15일)은 1964년 만들어졌으며 이듬해 기념일로 지정됐다. 이 날은 세종대왕 탄신일로 이 세상의 모든 스승이 세종대왕처럼 존경받는 시대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 스승은 무당을 나타내는 무격(巫覡)에서 여자 무당을 말한다거나 중(僧)을 나타내는 사승(師僧)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스승이란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로서 인생이라는 험난한 여정에서 우리를 안전하고, 이로운 곳으로 안내해 줄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샛별 같은 든든한 존재가 아닐까?

“스승이라는 말 속엔 허허벌판이 있다. 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크고 굳센 어른 하나 서 있다. 스승은 말하지 않는다. 그 삶이 거울이 되어 내내 한 존재를 비춘다.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는 것, 거기엔 허허벌판에서 허허벌판으로 이어지는 진수(眞髓)의 이동이 있다. 누군가가 나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가슴에 평생 지지 않는 해를 달아 거는 일이다. 그리고 나를 스승으로 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또한 나를 해 삼아 세상을 비춰보는 것이다. 눈 내리는 막막한 삶에 문득 홀로 서서 나를 지켜보는 스승, 그 스승의 안광(眼光)을 빌려 세상을 읽고 다시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야말로 일생의 간명한 요약이다. 누구에게나 스승은 있다. 비록 거룩한 차림에 학위(學位)는 갖추지 않았더라도, 지혜를 건네주는 선각(先覺)은 어디에나 있다. 삼인행(三人行)에 필시 내 스승이 하나 있으니, 그저 그 스승을 향해 간절한 마음만 열어두면 되는 일이다. 스승은 굳이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살아간 자취만으로도 훌륭한 스승이며 한 구절 언어로도 평생 스승이 되기도 한다. 모든 스승이 뒷사람을 모두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뒷사람의 삶을 이루는 긴요한 결정들 앞에 스승의 말씀과 스승의 가르침은 문득 값지게 돋아나는 법이다. 내 살이의 스승을 살피는 일,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때로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고, 오직 내 존재가 기특하여 말없이 지혜를 퍼 주는 사람이 있지 않았던가. 내 모든 고난과 역경들도 비문(非文)의 스승이었다. 숨어 있는 스승들은 옛 책들에 가득하다. 오직 내가 무릎을 꿇고 거기 앉기만 하면 그들은 기꺼이 사제(師弟)의 연을 맺는다. 나를 보는 일은, 내 스승의 흔적과 영향을 보는 일이다.”(이상국)

그러므로 스승은 높은 곳에만 있지 않다. 올곧게 살라고 마음 환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끌어 주는 스승은 더 가까운 곳에, 겨울이기에 꽃피운 나무나 밑줄 그어둔 책의 한 문장도 나를 키우는 스승이다. 어쩌면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미운 사람과 고통스러운 세상조차 좋은 스승이리라.

선현들의 글이나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사숙(私淑)이라 했다. 남몰래 선한 것을 본받는다고도 한다. 이와 달리 스승에게서 직접 배우는 것을 친자(親炙) 즉 고기 굽는 것을 보며 배운다고 한다. 누가 고기를 잘 굽는 사람일까? 그런 스승을 공들이지 않고 저절로 만나는 것은 지복(至福)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택사삼년(擇師三年), 스승을 고르는 데 삼년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듯하다.

“요즘은 세상에 참스승이 없다고들 한다. 아니 찾기 어렵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지혜로움, 솔선수범, 전문적이거나 해박한 식견, 자애하는 마음 등을 두루 갖춘 이를 스승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이는 엄격히 따지면 스승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일 뿐이다. 스승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제자다. 당연한 소리지만, 제자가 없으면 스승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살아가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스승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제자의 존재다. 그러니 제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스승이지만, 스승을 만드는 것은 제자라고 하면 과한 말일까.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듯이 제자가 있을 때 스승이 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제자가 없으면 훌륭한 사람은 될지언정, 스승은 되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저 홀로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스승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게 제자 될 사람의 첫 역할이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어도 내 눈이 어두우면 스승을 만날 수 없고, 스승을 만들 수도 없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를 만나는 게 천운이고, 제자는 스승을 만나는 게 만복이라 할 수 있다.”(최광수)

불가에서 사제지간(師弟之間)이 되려면 만겁(萬劫)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한 말을 곰곰이 반추해 볼지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처럼 예전엔 선생님은 임금, 아버지와 지위가 같았다. 율곡 이이는 ‘학교모범(學校模範)’에서 스승을 쳐다볼 때 목 위를 봐서는 안 되고, 스승 앞에선 개를 꾸짖어도 안 되며, 웃는 일이 있더라도 치아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현대인들이 들으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할 정도이겠지만, 봉건시대 스승의 권위는 이처럼 절대적이었다. 이제는 교권 몰락을 운운하는 장탄식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쩌면 스승과 제자의 상하관계가 요즘은 눈높이 인권의 수평관계로 진화했다고도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지상에는 신과 항상 친교를 맺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접촉하러 오는 사람들을 신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귀한 영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와 같은 사람을 요가에서는 구루(guru)라 칭한다. 구(gu)는 어둠을, 루(ru)는 밝음의 뜻으로 즉 구루라는 말은 ‘어둠을 추방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구루는 은총을 내리는 신의 힘이다. 이 은총으로 제자의 영적의식을 일깨워준다. 구루의 영적 에너지는 자연적인 통찰, 자연적인 영적 성장과 의식의 확장을 가져다주었다.

구루라는 말은 참으로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일반적인 지도자와는 차이가 있다. 그는 단순히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영혼의 스승이다. 그는 영혼의 지식을 전수하고, 그 영혼의 지식을 전수받는 자를 쉬스야(sisya), 제자라 한다.

쉬스야는 구루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될지어다. 자기 깜냥대로 자기 눈높이대로만 스승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는 자만이 자질 있는 쉬스야라 할 것이다.

단순히 현장에서 실전적인 지식의 습득만을 수단으로 하는 자, 그들은 곧 요가의 지식과 기능을 사고파는 장사꾼일 뿐이다. 영혼의 지식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관계일 때가 진정한 구루와 쉬스야의 관계라는 말이다.

옛 구루 중에서는 제자를 택할 때 인성(人性)이 함량 미달이면 천금을 지고 와도 허하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해온다. 눈 밝은 스승이 그립고 제자다운 제자를 그리워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 아닐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 나라에 인재가 없음을 한탄 말고, 네 스스로가 인재가 되기를 힘쓰라”고 하였는바, 그럼 먼저 스승다운 스승이 되도록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의 의미인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실천할지어다. 수행과 교육과 경영이 함께 하는 길,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길이 요가의 길인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세월이 가고 연륜이 쌓이니 조금은 철이 드나 보다만 그간의 숱한 시행착오는 무엇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설익고 어설픈 요가지도자로 인해 상처받고 실망했을 사람들도 많았을 듯하여 얼굴이 화끈거려 옴을, 이 카르마를 이 업보를 어이할꼬.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세 가지 눈물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하나는 잘못을 뉘우치는 학생의 눈물, 상처를 어루만지며 부족함을 탓하는 부모의 눈물, 그리고 또 하나는 덕으로 가르치지 못했음을 탓하는 스승의 눈물이다. 이를 일러 교편삼루(敎鞭三淚)라 한다. 이제야 그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스승과 제자, 멘토와 멘티, 영혼의 동반자, 소울 메이트, 선물과도 같은 운명과도 같은 사람, 이 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난다(ananda) 즉 지복(至福)이다.

혼돈 속에서 혼자 하는 수행이나 공부나 학습보다 눈 밝은 스승 모시고 도반과 함께하는 수행이, 공부가, 학습이 더욱 나를 무르익게 한다고 했다. 김삿갓의 ‘도움을 받으면 빨리 알게 되고, 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어진다(補知는 早知고 自知는 晩知라)’는 시를 되새겨 본다.

퇴계 이황은 “스승은 산 속 샘터와 같아서 제자들은 각기 필요한 만큼 마시고 간다”고 하였다.

중국 당나라 때 문인 한유는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치며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면 누군들 의혹이 없겠는가? 의혹이 있으면서 스승에게 배우지 않는다면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공자는 곤학론(困學論)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아는 사람이 으뜸이다. 배워서 알게 된 사람이 그다음이다. 깨닫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며 힘써 배우는 사람은 또한 그다음이다. 깨닫지 못했는데 힘써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장 하류이다. 알려주는 사람은 누군들 다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요즘에는 내가 좋아하는 채널이 3개 있으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선생이 있다는 말로 바뀌게 된 듯한 시대가 되었지만, 공자가 언급한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은 여전히 새겨들을 말이다.

제주도 유배 중인 스승을 위해 몸소 제주도까지 찾아온 제자 이상적에게 추사는 한 폭의 그림으로 보답하였다. 이들은 사제 간을 넘어 서로의 마음을 털어 놓는 인간적인 만남을 이루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들의 만남은 사제지간을 떠나 결코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인간의 표상이다. 이런 참다운 사제 간의 모습은 인간의 삶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추사는 제자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세한도(歲寒圖)라는 길이 남을 작품을 그렸다. 스승과 제자의 아릿한 정이 우리나라 국보 중에 국보인 세한도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발문에 “날이 차가운 이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고 써서 제자 이상적의 의리와 절개를 칭송했다.

오래전에 방영된 TV사극 ‘허준’에서 스승 유의태가 허준에게 죽기 직전 자신의 몸을 실험 수술 대상으로 내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 유의태의 모습은 비록 픽션이라 하더라도 강한 감동을 주었다. 허준은 그런 유의태라는 스승이 있었기에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될 수 있었다.

황진이 그녀는 서경덕에게서 우주의 철리(哲理),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곳에서 서경덕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생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터득한 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를 자연스레 읊조려 보게 된다.

‘소설 속을 걷는 여행’의 작가 이순원 소설가는 초등학교 시절 백일장에 나갈 때마다 상(賞)과는 인연이 없었다. 풀 죽은 제자에게 담임교사는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같은 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 피는 꽃이 있더라. 일찍 피고 지는 꽃이 눈길은 더 끌지만, 선생님 보기엔 큰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이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라는 말로 제자를 격려한 기억을 떠올린다.

주로 성화(聖畫)와 신화를 그렸던 루벤스 이후 가장 뛰어난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 안토니오 반 다이크의 명성이 그 스승 페테르 파울 루벤스 없이 가능했을까? 루벤스를 스승으로 모신 다이크였기에 영국 국정 수석화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스승의 그림을 실수로 망친 제자들, 만회하려고 덧칠한 안토니오 반 다이크, 이것을 본 루벤스는 뭐라고 했을까. “내 그림을 자네가 더 좋게 고쳐 놓았군.” 언어의 힘을 알고 말의 영향력을 믿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스승을 원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제자에게 처음에는 판단을 가르치고, 그다음에는 지혜를 가르치고, 마지막으로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고.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은 여전히 볼 때마다 감동을 준다. 한 여학생이 흑인 선생님에게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부른다.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해 ‘To Sir with love’를 부른 여학생이 바로 루루(Lu Lu)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움켜진 명배우 시드니 포이티어가 가난하고 거친 이스트엔드 지역의 교사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학교생활 이야기다. 주인공은 임시로 교직생활을 시작했지만 주어진 교육환경에서 진심으로 아이들과 소통한다. 이런 과정이 점차 사제 간의 감동적 교감으로 바뀌어 가는 장면들이 인상적인 영화이다.

영화 ‘뮤직 오브 하트’는 뉴욕 할렘가 초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취직한 로버타 과스파리의 실화를 담은 작품이다. 그는 클래식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빈민가 아이들에게 13년 동안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불어넣는다. 다리로만 일어설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강하면 살 수 있다고, 진정한 스승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을 만드는 의사들이다. 헬렌 켈러를 절망에서 끌어올린 앤 셀리번처럼.

영화 ‘굿 윌 헌팅’ 속 숀 맥과이어 교수가 인생의 조력자로서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를 건네며 주인공인 제자 윌 헌팅의 곁을 지키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훈훈한 사제지간의 또 다른 예를 들면, 이달과 허균의 두터운 이해, 연암 박지원과 그 제자들, 외로운 유배자 처지의 정약용과 황상, 부처의 법을 전한 사리불 등 10제자, 공자의 도를 받든 안연 등 10철(哲), 예수의 진리를 전파한 베드로 등 12사도, 인도 고전 바가바드 기타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리쥬나와 크리슈나, 앞서 얘기한 추사 김정희와 이상적,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의 애절하고 두터운 스승과 제자 관계 등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 관계이다.

살아가면서 세월 지나도 기억이 나는 스승과 기억에서 지워지는 스승은 어떤 차이가 날까?

맹자는 “빛나는 스승이 아니라 따뜻한 스승이 되라”고 한다. 요즘엔 참된 제자도 드물지만 참된 스승 역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마음 깊이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와, 제자를 진심으로 아끼는 스승의 만남에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사제관계가 시대를 뛰어넘는 울림을 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근래 요가 수련 현장에서는 ‘스승’ 대신, 생활 속에서 요가의 길을 실천하고 지도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요가지도자’나 ‘요가강사’, ‘요가선생님’, 트레이너란 호칭이 흔히 사용되고 있다. 또 제자란 말 대신에 회원, 수련생, 수강생, 학원생, 멤버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대중성과 보편성 상업성을 띠다 보니 그리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문의 세계이든, 도(道)의 세계이든, 수행의 세계이든 멘토와 멘티, 영혼의 동반자, 소울 메이트라 대변되는 이런 관계는 앞서 열거한 예를 보듯이 인생에서 평생 잊지 못할 운명과도 같은 극적인 만남이 될 것이다. 그런 만남 자체만으로도 그는 진정 축복 받은 자이며,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가를 지도하는 것은 요가 수행의 또 다른 연장이다. 많은 요가지도자들이 지도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의 수행에 소홀해질 수도 있다. 자기 자신만의 수행이야말로 균형 잡히고 건강한 삶의 체계를 이루는 길인데 말이다.

체력이든 요가이론이든 많은 수업지도를 했다면(output), 반드시 자신만의 수행, 공부, 학습(input)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야 심신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지치지 않고 싫증나지 않고 오래도록 요가를 즐기고 사랑할 수 있고 지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가 지도 역시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물 흐르듯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To teach is to learn)’이라 했듯이 지도하는 그곳에서 역시 배움의 기회가 공존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다 같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특히 어울리는 곳이 바로 요가 지도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행자는 천년을 살듯이 오늘을 살고, 내일 죽을 듯이 오늘을 산다” 했다. 배우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성장을 약속한다. 그래서 선현들은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였다. 그걸 일러 평생학습(Life long education)이라고 하지 않던가.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라는 말이 여기에 딱 와닿는다.

인생이란 살아가면서 스승이 되었다가 제자가 되었다가, 제자가 되었다가 스승이 되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부단히 영혼을 뒤흔드는 스승을 찾고 또 기다린다. 생애 내내 그 갈증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깨달음에 이르는 고독한 행로에 내가 미숙하고 모르는 다른 분야에 문득 길잡이처럼 나선 사람, 등을 돌린 채 묵묵히 앞에서 걷는 사람을 자연스레 뒤따르게 된다. 그러다가 제자는 다시 스승이 된다.

어쩌면 역사란 이렇듯이 사제지간(師弟之間)의 행렬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유구한 세월 속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제지간 서로 마주 잡은 두 손의 온기를 따라 그 숱한 지혜와 지식, 문화와 문명, 지성과 덕성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이어지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비제도권 속 평생 강단(대학 강사 40여 년, 요가 지도 25년)에 선 사람으로서, 영원한 공염불일 수도 있겠으나 ‘눈 밝은 스승’ 소리 한 번 들어 보는 것, 그리고 진실로 ‘신애(信愛)로운 제자’ 몇몇 손꼽을 수 있기를 간구하고 소망해 본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앞으로도 요가지도자 대열에 서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그동안 쌓아 놓은 조그만 내공이지만 힘닿는 데까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의 발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능력과 열정을 성심껏 그리고 진솔하게 뿜어내 보리라는 의지를 다져본다.


[기능인 혹은 선생님·스승님 / 최진태]

누군가를 지도할 때/ 누군가를 가르칠 때/ 우리는 기능인이 될 수도/ 선생님 될 수도/ 스승님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뭔가를 지도한다고/앞에서 뭔가를 가르친다고/ 모두가 선생님이 스승님이/ 되는건 아니다

깔랑한 지식 몇 알/ 깔랑한 기능 몇 줄/ 깔랑한 재능 몇 잎 앞세우며/ 안하무인 무례한 처사/ 안과 뒤 겉과 속 말과 행동이/ 불일치 되는 얄팍한 속내/ 진정성 없는 눈빛/ 자신감이/ 경망함과 시건방짐으로 비쳐질 때/기능인은 기능인일 뿐/선생님·스승님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도하고 가르치면서/ 진정으로 회원이나 문하생 수강생/ 그 제자의 발전을 묵묵히 후원해 주고/ 사랑의 눈빛으로 지켜봐 주며/ 간절히 이끌어 주는/ 그런 선생님을 스승님을 만난다는 것/ 축복 중에 축복/ 하늘의 복을 타고난 것이리라

우리 역시/ 기능인이 아닌/ 선생님이 되고 싶은/ 스승님이 되고 싶은/ 존재의 이유이다

우리는 기능인이기 전에/ 먼저 한 인간이 되어야 하리/ 우리가 만약 남 앞에 서서/ 뭔가를 지도하려고 한다면/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선생님이 되고자 한다면/ 스승님이 되고자 한다면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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