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인은 아무도 안 가는 산복도로 명소 180계단 [산복빨래방] EP 15.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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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오늘은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에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마을의 한 계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부산 산복도로에는 ‘도시재생’, ‘뉴딜’, ‘마을 개선’ 등 다양한 이름의 사업이 이뤄졌습니다. 주민 삶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로 오늘날에도 많은 예산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골목 흙길에 보도블록이 깔리고, 주민이 모일 수 있는 큰 건물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산복도로에 불어온 변화를 주민 모두가 반기는 건 아닙니다. 특히 보여주기식 사업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분도 많습니다. 산복빨래방은 산복도로의 미래에 대해 주민들과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부산 부산진구 호천마을 180계단은 '아찔한 경사'로 유명합니다. 가파른 경사 탓에 주민들은 아무도 다니지 않습니다. 부산 부산진구 호천마을 180계단은 '아찔한 경사'로 유명합니다. 가파른 경사 탓에 주민들은 아무도 다니지 않습니다.

“또 공사를 한다카네. 부쉈다가 덮었다가. 난리다, 난리야.”


“공사하면 더 좋아지는 것 아니에요?”


“아이고야. 모르는 소리다. 계단을 고친다고 우리가 저기를 다니겠나?”


지난 7월 빨래방으로 더위를 피해 들어온 한 어머님이 하소연을 늘어놓습니다. 호천마을 명소로 꼽히는 ‘180계단’ 이야기였습니다. 아래에서 위를 쳐다봤을 때 아득할 정도로 높은 경사라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입니다. 이곳 180계단은 지난 7월부터 약 2개월간 공사 중이었습니다. 일부 계단의 출입이 막혔고, 각종 공사 자재가 널브러져 부산한 모습이었습니다.


빨래방에 다닐 때마다 통행이 다소 불편했지만 ‘어르신들이 좋아하시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웬걸.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예상 외로 냉랭했습니다. “공사를 왜 하노”, “또 파 디비나(파헤치나)?” 같은 토로가 이어졌습니다.


“180계단 바로 옆에 사는 사람 말고 저 계단 다니는 사람이 있나? 마을에서 관광객하고 주민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아나? 절로(저기로) 다니면 다 처음 온 사람인 거라. 지금도 보면 공사하는 사람 말고는 마을 사람 중에 아무도 저기 안 댕긴다. 옛날에 저기 다니던 할매들 중에 발 헛디뎌서 다친 사람 한둘이 아니거든. 그래서 다 골목으로만 다닌다.”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빨래방을 처음 열었을 때 우리는 180계단으로 출퇴근했습니다. 180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조심 내려오다보면 젊은 우리도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오를 때는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한 번에 다 오르지 못해 중간에서 거친 숨을 헉헉 내쉬어야 했습니다. 혹시나 발을 헛디디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평균 연령 70세가 넘는 마을 어르신들은 오죽할까요?


처음 마을에 왔을 때 빨래방 직원들은 180계단을 이용했습니다. 마을 정착 4개월만에 이제는 180계단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처음 마을에 왔을 때 빨래방 직원들은 180계단을 이용했습니다. 마을 정착 4개월만에 이제는 180계단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마을에 4개월간 지내며 이곳이 익숙해진 지금은 우리도 180계단을 이용하지 않게 됐습니다. 180계단이 도로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건 맞지만, 조금만 둘러서 가면 힘을 덜 들이고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180계단에는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줄지어 사진을 찍고 갑니다. 계단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보이는 까마득한 경사는 매우 이색적인 모습입니다. SNS에서 호천마을을 검색하면 180계단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계단은 발 하나 겨우 들어가는 좁은 폭입니다. 깨진 타일이 문제가 아니라 폭이 문제입니다. 계단은 발 하나 겨우 들어가는 좁은 폭입니다. 깨진 타일이 문제가 아니라 폭이 문제입니다.

‘주민들은 잘 다니지 않는 계단에 왜 공사를 하는 걸까?’ 구청에 문의했습니다. 부산 부산진구청에 따르면 180계단과 일대 골목길을 정비하는 데에 도시재생 뉴딜 사업비가 3억 원가량 투입됐습니다. 노후된 계단을 정비하고 주민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공사라고 합니다. 깨진 타일 대신 시멘트가 매끈히 계단을 덮었습니다.


하지만 계단 타일 보수 공사에도 주민들은 ‘바뀐 게 없다’고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계단의 높이가 바뀌거나 단의 폭이 좁아지는 실질적인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4년 전 마을이 KBS <쌈 마이웨이> 드라마로 유명세를 치른 뒤 계단에 그려졌던 연어 벽화만 사라졌습니다.


어르신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계단에 잊을만하면 예산이 들어가는 것에 주민들은 고개를 젓습니다. 오히려 예산이 있다면 180계단 말고 마을 곳곳에 노후 주택을 정비하거나 실제 주민들이 자주 다니는 골목 계단을 정비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산복도로는 1970년대 일자리를 찾아 부산에 노동자들이 몰려들며 주거지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지금은 인구가 계속 줄어 빈집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빈집은 마을 주거환경을 악화하고 범죄를 유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골목 곳곳에 있는 소형 계단입니다. 마을 주민들의 고령화가 심해짐에 따라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계단 손잡이가 없는 골목이 많아 어르신들은 이곳에 벽을 짚고 아슬아슬 다니는 실정입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넘어져서 병원에 다녀왔다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닙니다.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180계단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SNS 캡쳐 jeong pic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180계단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SNS 캡쳐 jeong pic

산복도로에는 마을마다 ‘어떻게 저기를 다니지’ 싶은 이름 없는 계단이 많이 있습니다. 비단 호천마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계단에 모노레일,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듯한 대형 사업이 아니더라도 빈집을 정비해 공원을 조성하고, 계단 손잡이를 설치하고, 골목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가능할 겁니다.


‘보여주기식 개선사업’은 평균 연령 70대가 넘는 실제 주민 삶의 변화를 만들지 못합니다. 이름난 계단에 의례적으로 이뤄지는 ‘탁상행정’ 공사 말고 진짜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마을 개선 공사가 낙후된 산복도로에는 절실합니다. 주민들의 말에 답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아무도 안 다니는 계단 공사를 왜 하는 거요?”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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