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디지털 광장] 언어의 타락, 망국의 그림자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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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국장

펜이 칼보다 강했던 시대가 끝나자 말이 최고 존엄의 자리에 올랐다. 과잉 정치화된 유튜브가 위세를 떨치자 정치권까지 거친 말 경쟁에 편승했다. 정론(正論)은 잦아들고 센 목소리만 널리 퍼지는 꼴이다. 문제는 추락하는 말의 품격에 날개가 없다는 점이다.

2017년 버지니아주 샬롯츠빌에서 있었던 극우 폭력 사태를 들여다보자.

대명천지 미국 도심에서 노예제와 나치 깃발이 나부꼈다. 주류 보수보다 한술 더 뜨는 ‘대안 우파(Alternative Right)’ 주최 ‘우파여 단결하라(Unite the Right)’ 집회. 이 인종 차별 집회에 진보 진영이 맞불 시위를 하자 우파 측이 차량 돌진 테러를 벌이고 연이은 폭동으로 3명이 숨지고 35명이 다치는 유혈극으로 비화됐다.


유튜브 거친 말 온 사회 번져

정치 화법까지 조롱, 무례 득세

언어 품격, 날개 없이 추락 중


민주주의, 설득과 참여로 작동

진정성 있는 대화만이 해결책

악담 그만, 말의 신뢰 회복을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원인과 대책 논의가 무성했는데, 그중 이 사건과 관련한 양대 진영의 유튜브 언어 비교 연구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을 준다.

〈온라인 영향력, 오프라인 폭력: ‘우파여 단결하라’ 집회를 둘러싼 유튜브 언어 사용〉(컴퓨테이셔널 사회과학 저널 2020년 9월). 이 연구는 유혈 사태 직후 우파와 진보 유튜브 채널 7142곳에서 등장한 단어를 분석했다.

단어 빈도 조사 결과 양 진영 채널 모두 상대를 비난하는 표현이 급증했다.

진보 채널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 ‘나치’ 같은 경멸적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우파 쪽은 스스로를 ‘백인 민족주의자’로 미화했다.

연구진은 동일한 상황에 대한 상반된 인식과 명명, 상호 경멸이 강화됐다고 지적한다. 진영 간 양극화가 언어로 드러난 것이다. 대화로 접점을 찾기는커녕 끼리끼리 통하는 상징 체계로 소통하며 뭉친다는 의미다.

온라인에서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심화되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연구진은 “흥미로운 것은 우파 채널에서 욕설이 만연했다”고 분석했다. 욕설의 쓰임새는 특정 그룹 소속감,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례라는 분석이다.

이 대목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경남 양산의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벌어지는 욕설 시위가 겹쳐 떠올라서다. 지면에 차마 담기 어려운 모욕과 저주를 내뱉고 이를 유튜브로 생중계하는 식이다.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확인 중이다.

말의 하향 평준화는 전방위적이다. 급기야 근엄한 정치권까지 오염시켰다.

요즘 정치 언설에서 칼과 독을 만나는 건 일상사가 됐고, 말맛을 곱씹게 만드는 여운은 좀체 만나기 어렵다.

예컨대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의 자당 대선 후보 개고기 비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벌이는 말꼬리 잡기식 설전은 한마디로 꼴불견이다. 오늘날 정치 화법이 ‘누가 더 무례한지 겨루기’로 전락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게 정치 화술이 조롱과 경멸을 앞세워 내 편을 뭉치게 만드는 기술로 전락한 결과는 참담하다. 가벼운 혀 놀림이 기승을 부리면서 숙성되고 정제된 화법은 퇴출 신세로 전락했다.

공론장에서 말이 왜 중요하냐고? 왕정과 신정 시대에는 ‘말의 교환’, 즉 대화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여론에 귀 기울일 필요 없이 짐과 신의 뜻만 관철되면 되니까. 근대 민주국가가 성립되면서 국민의 의사표현이 중요해진 이유다.

민주공화국은 말의 네트워크를 딛고 서 있다.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만인의 관계에서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 언어의 신뢰라는 의미다.

의견과 주장이 자유롭게 발화되고, 참과 거짓이 판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만약 서로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 않으려 한다면 공동체는 모래알처럼 부서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말의 길이 끊어지고 있다. 말의 가치가 떨어져 헌신짝 취급이다. 서로의 말을 더 이상 믿지도 않고, 듣지도 않게 되는 언어도단의 끝에는 공동체의 자멸이 기다리고 있다.

국민 통합은 끊어진 말의 길을 잇는 데서 시작한다. 그 책임의 꼭짓점에는 단연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 ‘내부 총질 체리 따봉’은 통합 메시지와 거리가 멀다. 유승민 전 의원의 “이러니까 당도, 대통령도, 나라도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지적을 새겨야 한다.

강요나 무력 대신 설득과 참여를 통해 통합되는 질서 체계가 민주정이다. 진정성이 담긴 한마디 한마디가 공동체를 굳건하게 만든다.

권력 핵심부터 거칠고 상스러운 악담 경쟁을 멈추라. 언어의 타락으로 이득을 보려는 세력은 민주 사회의 적이다.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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